마약과 관련한 관문이론 Gateway Theory)이란, 부드러운 마약(연성 마약soft drug)인 대마초를 사용하게 되면 점차 더욱 강력한 마약(강성 마약hard drug)인 헤로인이나 코카인 등의 사용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가설이다. 따라서 강성 마약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처음부터 연성 마약인 대마초 사용을 금지해야 한다는 것으로, 대마초 사용 불법화 논리를 대표하는 고전적인 이론이다. 이 이론은 1960년대 초에 미국에서 유포된 이래 대마초 사용 금지 법률을 옹호하는 가장 강력한 이론으로 오늘날까지도 활용되고 있다. -<대마와 대마초>(노의현, 소동)-

 

- 반대입장-

 

<대마와 대마초>(노의현, 소동)

1. 관문이론 자체를 공격한다.: 대마초 사용이 하드드럭으로 간다는 명백한 실증적 증거가 없다는 것이다.(하지만, 부재의 증거가 실재를 완벽히 부정하기엔 부족하다.) 실태조사에 따르면 오히려 술과 담배가 마약으로 이끈다고 한다. 저자는 이를 근거로 대마초의 관문이론이 허약하다고 하지만 관문이론 지지자들은 술과 담배도 금지하자고 할지 모른다. 또 대마초를 합법화한 네덜란드가 오히려 미국보다 강성마약 사용빈도가 낮다는 연구결과를 드는데 이것만으로 관문이론을 뒤집기엔 약간 부족하지 않을까. (또 다른 변수들이 있기 때문이다.)

금주법과의 비교: 술을 금지하자 알 카포네같은 갱단이 발흥한 것처럼 코스트 베네핏을 따져보면 대마를 합법화하는 것이 현실적이다. 여기에는 아마 대마가 소프트 드럭이라 폐혜가 낮고 하드드럭으로 가지 않는다는 것, 대마를 100% 통제한다는 게 불가능하다는 전제가 이미 깔려 있을 것이다. 여기의 반대는 살인도 100%통제가 불가능한데 처벌한다는 논리다.

대마반대의 악의 세력이 있다: 담배 술 등 대마 경쟁 회사들, 연구소들, 갱단 카르텔 등,,,여기에도 대마에 대한 호의적인 전제가 깔려 있다.

일반적으로 대마 합법화와 관련한 다른 나라의 상황을 많이 기술한다. 대마 합법화 이후로도 대마로 인한 폐혜가 급격하게 는다거나 하는 경우가 없다는 것을 강조한다. 인상적인 것은 네덜란드의 상황을 묘사한 부분인데 카페와 커피숍을 구분한다. 네덜란드가 제한적인 합법화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 <우리는 마약을 모른다>(오후,동아시아)

대마를 하면 코카인이나 헤로인을 한다는 것은 담배에 내성이 생기면 술을 마시는 것과 같다라는 말이다. 대마와 하드 드럭은 완전히 틀리다. 반론은 대마를 하다 하드드럭으로 간 실제 사례를 인용하는 책-<마약하는 마음, 마약파는 사회>(양성관,히포크라테스)

역시 알 카포네: 금주법이 오히려 전과자와 갱단을 키우는 역효과를 양산했다. 더 설득력있게 주장하는 것은 불법화가 오히려 관문효과를 부추긴다는 것. 오히려 하드드럭이 더 활발해진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대마가 관문효과가 약하거나 없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역시 통계: 대마 합법화가 난장판으로 이어진다든 통계나 결과가 없다는 것. 반론은 역시 반대 통계를 드는 <마약하는 마음, 마약파는 사회>(양성관,히포크라테스)

실질적으로 대마보다 알코올과 담배가 주는 사회적 폐해가 더 크다는 입장->물론 대마를 권하는 건 아니다. 상황을 똑바로 파악하고 선택을 하자는 거라는 오후의 주장

 


  - 찬성 입장-


3. <마약하는 마음,마약파는 사회 >(양성관,히포크라테스)

한 사람이 두 가지 이상의 마약을 한다는 통계로 관문이론을 지지함.“술을 안 마시는 사람은 있어도 한가지 술만 마시는 사람은 없다내가 봐서( 저자는 가정의학과 전문의이다) 아는데 하는 식으로, 실제 케이스를 들이댄다. 일단 마약을 경험하고 나면 더 많은 자극을 원하게 되어 있다는 논리다 여기에 대한 오후의 반론은 대마와 하드드럭은 틀리다는 것.‘포도주 애호가가 반드시 위스키를 마시는 것은 아니다’->이런데서 연구결과가 해석에 따라서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지 볼 수 있다.

현실적으로 제한적 합법화는 불가능하다. 결국 난리법석이 날 거다. 19금 영화를 어떻게든 미성년자도 보는 것과 마찬가지다

 

 

4. 맥주를 마시면 위스키까지 마시게 될까? 나 자신을 돌아보면 가능할 것 같다. 아주 기분이 더러운 날, 맥주론 안 돼,짧고 굵게 가자 하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래도 만약 위스키가 불법이라면 나 자신을 제어할 것 같긴 하다. 결국 대마초를 불법으로, 마약으로 분류할 것인지는 인위적 선긋기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도 관문이론이 적용되는 사람이 분명 있지 않을까? 비록 소수일지 몰라도 그런 사람이 존재한다면 대마초를 금지하는 게 인생하나 구하는 것 아닐까? 음 생각할 수 있는 반론 하나는 대마를 불법으로 하는 비용이 그런 소수의 혜택을 초과할 정도로 많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니 관문이론적인 이슈가 몇 개 더 생각난다. 포르노를 허용하면 성문화가 문란해진다? 무상급식을 허용하면 또 다른 무상 시리즈가 이어질 것이다?(옛날 오세훈 얘기같은데) 그럼 애시당초 왜 대마를 꼭 해야할까? 의료용은 제쳐놓고, 즐길 수 있는 권리를 확보하기 위해서?...아직 공부가 부족하다. 어쨌든 세계는 재미있다. 동물의 세계엔 마약같은 게 없잖아.. 어째 마약이란게 SF 픽션에나 등장할 것 같은데 현실에는 존재한단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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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란유발자들 - 인간 심리의 취약점을 이용하는 소셜미디어의 뒷이야기
맥스 피셔 지음, 김정아 옮김 / 제이펍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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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나면 저커버그를 위시한 실리콘밸리의 개객끼들,,, 하는 감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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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안연에서 진행 중인 하루키 강의 덕에 <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를 근 20년만에 다시 읽었다. (최근에 김난주씨 개정판이 다시 나왔는데 역자의 이름에 걸맞지 않게 어색하다. 작품에서는 세계의 끝에 대비해서 원더랜드가 현실 역할을 하지만, 독자에게는 원더랜드 역시 판타지이기 때문에 김진욱판의 ~. ~. 로 끝나는 다소 연극적인 문장이 어색하지 않다. 김난주 판은 ~.~. 같은 구어체를 쓰는데 오히려 멋이 없는 것 같다. 박사와의 대화 장면에서는 경어체가 헷갈리게 쓰였는데... 초벌번역인가?.. )

 

20년전에 읽을 때는 소설의 거울구조부터 야미쿠로라는 존재까지(한동안 지하철 탈 때 저기 너머에 야미쿠로가 있어 하고 느낌이 남달랐다. 스크린도어가 생기기 전 일이다) 기발한 재기가 넘치는 인디영화를 보는 느낌이었는데, 아이디어에 닳은 지금 독자가 보면 그 정도는 아닐 것 같다. 그 때는 원더랜드를 창조해 낸 하루키의 기발한 상상력이 재밌었고, 세계의 끝은 약간 지루했다.(재독할 때는 원더랜드 편만 체리피킹하듯 읽었었다.) 그런데, 최근 <고양이를 버리다>를 읽다가 하루키가 의외로 불교적 관점에 익숙한 작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집안이 승려 집안이고 아버지는 승려가 될 뻔한 국어교사다. 하루키가 승려집안의 영향을 받지는 않았을까?

 

나는 한 평범한 인간의, 한 평범한 아들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 그것은 아주 당연한 사실이다. 그러나 차분하게 그 사실을 파헤쳐가면 갈수록 실은 그것이 하나의 우연한 사실에 지 나지 않는다는 점이 점차 명확해진다. 우리는 결국, 어쩌다 우연으로 생겨난 하나의 사실을 유일무이한 사실로 간주하며 살아있을 뿐이 아닐까.


바꿔 말하면 우리는 광활한 대지를 향해 내리는 방대한 빗방울의이름 없는 한 방울에 지나지 않는다고유하기는 하지만교환 가능한 한 방울이다그러나 그 한 방울의 빗물에는 한 방울의 빗물 나름의 생각이 있다빗물 한 방울의 역사가 있고그걸 계승해간다는 한 방울로 서의 책무가 있다우리는 그걸 잊어서는 안 되리라가령 그 한 방울이 어딘가에 흔적도 없이 빨려 들어가개체로서의 윤곽을 잃고 집합적인 무언가로 환치되어 사라져간다 해도아니오히려 이렇게 말해야 할 것이다그것이 집합적인 무언가로 환치되어가기 때문에 더욱이.

 

나는 지금도 때로 슈쿠가와 집의 마당에서 있던 높은 소나무를 생각한다그 가지 위에서 백골이 되어가면서도사라지지 못한 기억처럼 아직도 거기에 단단히 매달려 있을지 모르는 새끼 고양이를 생각한다그리고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고저 먼 아래눈앞이 어질어질해지는 지상을 향해 수직으로 내려가는 어려움에 대해 생각한다.”

(고양이를 버리다 중)


 

대안연에서 강의하는 김응교 선생님는 하루키를 무의식을 다루는 작가로 보는데 , <고양이를 버리다> 의 이 대목은 나에게 칼 융식의 무의식보다 불교에서 말하는 에고와 무아를 떠올리게 한다. ‘나라는 우연한 사실’, ‘빗방울이 에고라면 광활한 대지는 에고를 벗어나 열반으로 돌아가는 해탈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다. 재밌게도 하루키는 곧 사라질 빗방울을 공허하게 바라보기보다 한없이 애틋한 마음으로 의미를 부여하려고 한다. 뭐 이런게 예술인지도 모르겠다만,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원더랜드>에서 세계의 끝의 묘사는 하루키가 이해한 무아와 해탈의 이미지 아닐까? 세계의 끝에서 사람들은 마음과 희노애락을 잃어버리고 평정한 평화상태에 머문다. 여기에는 죽음도 고통도 없지만, 행복도 없다.

 

아닌게 아니라 이곳 사람들은, 물론 문지기는 제외하고, 아무도 서로 상처를 주지 않고, 아무도 서로 미워하지 않으며, 아무도 욕망을 가지고 있지 않지, 모두가 만족해하며 평화롭게 살고 있어, 왜라고 생각해? 그런 마음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야."

"그건 잘 알아"라고 나는 말했다.

이 도시의 완전함은 마음을 상실함으로써 성립되는 거야. 마음을 상실함으로써, 각각의 존재를 영원히 늘어진 시간 속으로 끼워 넣고 있는 거지. 그러니까 아무도 늙지 않고 죽지 않는 거지. 먼저 그림자라는 자아의 모체를 벗겨 내어, 그것이 죽어 버리기를 기다리는 거야. 그림자가 죽어 버리고 나면 그 다음에는 별문제가 없다구. 그날그날 생기는 사소한 마음의 거품 같은 것을 퍼내기만 하면 되는 거니까."

"퍼낸다구?"

거기에 대해서는 좀 있다가 말하지. 우선 마음의 문제야. 너는 나한테 이 도시에는 싸움도 미움도 욕망도 없다고 했지? 그건 그것대로 좋아. 나도 기운만 있으면 박수를 보내고 싶을 정도야. 그런데 싸움과 미움과 욕망이 없다는 것은 다시 말해서 그 반대의 것도 없다는 얘기기도 하지. 그건 기쁨이고, 행복이고, 애정이야. 절망이 있고 환멸이 있고 비애가 있음으로해서 기쁨이 생기는 거야. 절망이 없는 행복 따위는 아무데도 없어. 그게 내가 말하는 자연스러움이라는 거야. 그리고, 물론 애정에 대한 것이 있지. 네가 말하는 그 도서관 여자 일만 해도 그래, 너는 물론 그녀를 사랑하고 있을지도 몰라. 그러나 그 마음은 어디에도 이르지 못할 거야. 왜냐하면 그녀에게 마음이 없기 때문이지. 마음이 없는 인간이란, 그저 걸어 다니는 허깨비에 지나지 않아. 그런 것을 얻는 데에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다는 거지? 그런 영원한 삶을 너는 원하고 있는 거야? 너 자신도 그런 허깨비가 되고 싶다는 거야? 내가 여기서 죽으면 너도 그 친구들과 같은 부류가 되어서 영원히 이 도시를 빠져나갈 수 없게 되고 마는 거야.”

(세계의끝과 하드보일드원더랜드 중)

 

여기 등장하는 그림자의 말은 사람들이 불교에 딴지를 걸 때 흔히 하는 뉘앙스가 들어 있다. 불교에서 말하는 욕망에서 벗어난 평정한 삶은 희노애락이 없는, 죽은 삶이라는 것이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라는 속담이나 아모르 파티같은 명제는 불완전하고 유한하지만 생기있고 약동하는 삶을 높이 평가한다. 이런 맥락에서는 자신의 욕망을 제어하고 평정심을 유지하라는 불교의 가르침은 삶에 맞서지 못하는 소심함과 유약함으로 비춰진다. 그림자는 절망이 없는 행복 따위는 아무데도 없어. 그게 내가 말하는 자연스러움이라는 거야....마음이 없는 인간이란, 그저 걸어 다니는 허깨비에 지나지 않아.”라고 말하며 속세적인 삶을 긍정한다. 하지만 일본의 어떤 승려는 절망과 행복이 짝이라는 그림자의 통찰을 전혀 다르게 받아들인다.

 

 

수행을 하기 위해 태국에 갔을 때 이야기입니다. 흙길을 몇 시간이나 맨발로 걸었습니다. 처음에는 고()도 낙()도 아닌 극히 평상시 감각이 발바닥이 지면에 닿을 때마다 느껴졌습니다. 가끔 드물게 뾰족한 돌조각 같은 것을 밟았을 때 고()를 느낄 정도였습니다. 바삭한 모래땅에 들어갔을 때는 '어쩜 이렇게 아프지 않은 다정한 모래일까라고 작은 행복감을 맛보았습니다. 그런데 걷기가 두세 시간 지났을 무렵부터 길에 흩어져 있는 돌을 밟을 때마다 아픔의 고가 계속 이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한 걸음 한 걸음 밟을 때마다 고가 생기고, 그 발을 지면에서 올리면 일순간이나마 '~' 하고 낙이 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고(思考)가 만들어낸 사기입니다. 막 걷기 시작했을 때 모래땅을 밟아도 낙도 고도 아닌 감각을 느꼈을 뿐일 텐데, 고의 척도가 듬뿍 고여 있은 후의 경우만 '! 행복' 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니 말입니다. 한 번 한 번, 그때그때 고가 줄어드는 것으로 인해 ''의 환각이 생기는 순간을 명상대상으로 진지하게 계속 관찰하면 '! '이라고 하는 것은 고가 줄었을 때에 느끼는 착각일 뿐이라는 걸 충격적으로 실감 안 할 수가 없습니다.., 낙이 없어도 고는 존재하지만, 낙이라는 것은 고가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 그저 그냥 신기루라고나 할까요. 이제부터가 불교의 안목입니다. '어쩜.... 은 신기루니 실은 인간이란 '' 만 느끼고 사는 건가? 일체개고(皆苦)라고 충격적으로 실감하면 낙을 갖고 싶다는 욕망이 압도적으로 얕아집니다. (이치로 이해하는 것으로는 변하지 않으니 안돼!)

 

<번뇌 리셋> (코이케 류노스케,불광출판사)

 

 

<바가와드기타 강의>(북튜브)의 저자 김영은 신비주의 강의에서 고통과 짝지워진 행복과 차원이 다른 희열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런 희열은 욕망의 충족이나 자아가 아니라 명상이나 요가같은 수행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림자의 말은 이런 희열을 이해하지 못한 말 아닐까? 하루키는 불교의 무아와 해탈을 오해하고 있는 것 아닐까? 하루키는 설혹 불완전한 자아와 삶이라 할지라도 강한 애착을 드러낸다.

 

마음이라는 것은 당신조차도 잘 이해할 수 없는 건가 보죠?"

어떤 경우에는 그렇지하고 나는 말했다.

그 때 당시에는 마음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시간이 훨씬 지나서야 이해할 때도 있어. 그러면 대개의 경우는 이미 때가 너무 늦어 버리지. 대체적으로 우리들은 자신의 마음을 잘 알지 못하고, 더구나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른 채 먼저 행동을 하기 때문에 혼란에 빠지는 거야.“

마음이라는 것이 무척 불안하고 불완전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하고 그녀는 미소를 띠면서 말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마음이란 너무나도 불완전한 거야.” 하고 나는 말했다.

"하지만 마음은 흔적을 남기지. 그리고 우리들은 그 흔적을 다시 더듬을 수 있는 거야. 눈 위에 찍힌 발자국의 흔적을 더듬듯이 말이지."

그것은 어디에 닿을까요?"

나 자신에게 닿지하고 나는 대답했다.

"마음이라는 것은 그런 거야. 그 마음이 없다면 우리들은 이 세상 어디에도 닿을 수가 없어.“

 

나는 마음을 버릴 수는 없다,라고 생각했다. 그것이 아무리 무겁고 때로는 어둡다고 할지라도, 어떤 때에는 새처럼 바람 속에서 춤을 추고 영원을 내다볼 수 있는 것이다. 이 작은 아코디언의 울림 속에조차, 나는 내 마음을 잠입시킬 수 있는 것이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중)

 

<고양이를 버리다>에서 등장하는 대지와 빗방울의 비유는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에서도 등장한다.

 

"정말로 내 마음을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하나요"라고 그녀가 내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물었다.

"읽을 수 있을 것 같아"라고 나는 조용하게 말했다.

"어떻게?"

"그건 아직 몰라"라고 나는 말했다.

"하지만 꼭 할 수 있어. 난 알아. 틀림없이 좋은 방법이 있을 거야. 방법을 찾아낼 거야."

"당신은 강물 속으로 떨어진 빗방울을 가려내려고 하는 거라구요."

내 말을 들어 봐. 마음이라는 것은 빗방울과는 달라. 그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다른 것과 구별이 안 되는 것도 아니야. 만약 당신이 나를 믿을 수만 있다면, 나를 믿어 줘. 나는 반드시 당신의 마음을 찾아낼 거야. 여기에는 모든 것이 다 있고, 또 모든 것이 다 없어. 그리고 나는 내가 찾고 있는 것을 반드시 찾아낼 수 있어.”

 

그 한 방울의 빗물에는 한 방울의 빗물 나름의 생각이 있다.”(고양이를 버리다) 라는 문장처럼 하루키는 자신의 고유한 마음을 소중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마음과 삶은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그래도 하루키는 삶의 의욕을 꺾지 않는다. 하루키의 이런 태도를 긍정적으로 해석하자면, 니체식의 적극적으로 허무를 끌어안는 허무주의같은 느낌인지도 모르겠다. <영원한 소년의 정신, 하루키 읽는 법>(양자오, 도서출판 유유)에서 말하는 것처럼 여기에는 세계에 대한 사랑이 깔려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루키가 독자들을 절망시킬리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바로 이것이 그가 아무리 무거운 주제로 글을 써도 독자들이 기꺼이 그의 작품을 읽는 이유이다. 그렇게 많이 카프카적 내용을 서술한 뒤, 그는 여기에서 사람과 사람 간의 사랑으로 카프카에 수정을 가한다. 카프카는 우리에게 인간의 고통이 무의미한 세계를 알려 주었다. 이에 대해 하루키는 인간의 고통이 무의미한 세계가 유일한 세계는 아니라고 보충한다. 왜냐하면 "사랑이 라는 것은 다시 세계를 세워가는 일"이므로 그것을 기초로 또 하나의 전혀 다른 세계를 세울 수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 영원한 소년의 정신, 하루키 읽는 법>(양자오, 도서출판 유유)-‘해변의 카프카에 대한 분석 중

 

 

이 도시가 설령 내 눈으로 보았을 때 부자연스럽고 잘못되어 있다 하더라도, 그건 결코 그들의 탓으로 돌릴 수는 없다. 나는 틀림없이 저 문지기조차도 그리워할 것이다. 그도 역시 이 도시의 단단한 쇠사슬에 엮여 있는 한 부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무언가가 강하고 거대한 벽을 만들어 냈고, 사람들은 그저 거기에 휘말려 들어갔을 뿐이다. 나는 이 도시 안의 모든 풍경과, 모든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이 도시에 머물 수 는 없다. 하지만 모든 것을 사랑한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중)

 

더 나아가 양자오는 하루키의 주인공들이 부조리한 삶을 외면하지 않고 끝까지 책임지려는 태도를 보인다고 분석하는데 비슷한 문장은 원더랜드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책임이라는 것을 느껴."에서 특히나 계속 살아가야 하는 책임과 운명적인 조건에 저항하는 책임은 지난 30년간 하루키 소설이 단 한순간도 등한시한 적 없는 주제이다. 그는 다양한 소설에서 다양한 수법과 방향으로 이 주제를 탐색해 왔다. 그것들은 우리의 행위에 대한 책임, 과거의 기억에 대한 책임, 명령에 따른 것에 대한 책임, 환상과 꿈에 대한 책임, 나아가 운명과 숙명적 태도에 대한 책임이었다.

< 영원한 소년의 정신, 하루키 읽는 법>(양자오, 도서출판 유유)

 

내게는 책임이란 게 있어"라고 나는 말했다.

나는 내가 멋대로 만들어 낸 사람들과 세계를 내팽개쳐 두고 가버릴 수는 없단 말이야. 네겐 미안하다고 생각해, 정말 잘못하는 일이라는 걸 알고 있고, 너와 헤어지는 건 고통스럽기도 해. 그렇지만 나는 내가 한 일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만 해. 여기는 바로 나 자신의 세계야. 벽은 나 자신을 둘러싼 벽이고, 강물은 내 속을 흐르는 강물이고, 연기는 나 자신을 태우는 연기라구.”

 

뭐 예술에 대해 문외한이지만 예술이라면 살 맛을 주는 게 아닌가 한다. 인용된 <고양이를 버리다>의 문장은 하루키라는 작가의 고갱이 아닐까? 거기에는 에고와 무아, 불완전함과 완전함의 비유와 대립이 느껴진다. 사실 대양에 내리는 한 방울의 비의 이미지는 인도의 종교전통에서 익숙한 것이다. 결국 하루키는 세계의 끝은 욕망이 사라진 종교적 해탈의 이미지로, 원더랜드는 세속적인 삶으로 대비시키면서 자신의 에고와 삶을 고양하고 싶었던 걸까? 이건 순전히 나의 이지만 만약 그렇다면 그건 하루키의 무아와 해탈에 대한 거친 해석이다. 아닐 수도 있다. 뭐 누구든 자신에 대한 애착이 있고, 삶의 역동성을 원하니까. 득도도 하지 못한 내가 하루키가 틀렸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이 로 이 작품을 해석하기에는 해결되지 않는 다른 여러 설정들이 있다. 예를 들어 박사는 세계의 끝에는 주인공이 상실한 것이 있을 것이라고 말하는데 이 설정은 여러 맥락을 고려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또 샤프링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주인공은 애초에 왜 세계의 끝을 의식의 핵으로 가지고 있었던 걸까? 세계의 끝이 주인공이 만들어 낸 것이라면 그건 환영일 텐데 주인공은 그 세계에 왜 책임감을 느끼는 걸까?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에서 하루키는 또 다른 변주를 통해 자신의 뜻을 전달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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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저스는 유튜브의 추천 영상 배지가 "이들을 그런 여정으로 인도"한다고 지적했다. 또 유튜브의 추천 엔진을 "극도로 노골적인 아동 포르노로 가는 입문 약물"이라 불렀다.

엿먹어라 유튜브

 조시 홀리는 청문회에서 우리 기사를 언급하며 "이 기사는 역겹습니다. 하지만 더 역겨운 것은 유튜브가 여기에 아무 조처도 하지 않으려 한다는 것입니다"라고 비난했다.


근까 엿먹으라고...유튜브... - P3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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뉘른베르크의 사형 집행인 - 16세기의 격동하는 삶과 죽음, 명예와 수치
조엘 해링톤 지음, 이지안 옮김 / 마르코폴로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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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급의 차별을 극복하려 했던 한 사형집행인의 삶을 통해 본 역사 여행.재밌다. 그도 그럴 것이 저자가 묘사한 근세초기는 헨젤과 그레텔과 빨간 모자가 등장하는 듯한, 자력구제가 원칙인 서부개척시대같은 세계다. <사건파일>처럼 프란츠 슈미트가 처리했던 중세의 범죄리스트도 길티 플레져 같은 흥미를 돋군다. 요런 분위기를 좋아하는 분은 편하고 재밌게 읽을 수 있다. 나아가 신분과 계급 차별이라는 당시의 분위기 속에서 이 사형집행인은 어떤 포지션을 취했을까? 뭐 지금도 결국 계급사회니까 묘하게 공감이 된다는 자조적 자기비하 . 근데 3만원은 좀 비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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