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이야기> 나의 인생 네 권

지난 23일인 ‘세계 책의 날’을 맞이하여 알라딘에서 ‘내 인생 네 권’의 이벤트를 진행 중이어서 나도 참여해 보기로 한다.


내가 읽었던 천 권 가까이 되는 책 중에서(과장해서 말함.) 최고의 책을 어떻게 네 권만 뽑으란 말인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현재 생각나는 최고의 책 네 권으로 정하고 나니 뽑는 게 쉬워졌다.


나의 인생 네 권은 다음과 같다.


서머싯 몸, <인간의 굴레에서 1> · <인간의 굴레에서 2>
에리히 프롬, <자유로부터의 도피>
정희진, <정희진처럼 읽기>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1. 서머싯 몸, <인간의 굴레에서 1> · <인간의 굴레에서 2>


두 권을 합해 천 쪽이 넘는 분량의 소설이지만 긴 시간을 들여 읽을 가치가 충분히 있었다. 사색적인 문장이 많아 사색적인 글을 쓰는 것에 대해 내가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사색적인 문장에 반해 내가 서머싯 몸의 광팬이 되어 버리기도 했다.


자신의 의지가 자유롭다는 환상 : 크론쇼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람은 자신의 의지가 자유롭다는 환상을 너무 철썩같이 믿고 있어. 그래서 나도 그걸 쉽게 받아들이고 마네. 나는 내가 자유로운 행위자인 것처럼 행동하지. 하지만 어떤 행위가 이루어질 때는 우주의 모든 힘들이 저 영겁에서 함께 작용하여 이루어진다는 것이 분명해. 내가 할 수 있는 어떤 행위도 그것을 막을 수는 없지. 그건 필연이니까. 선한 행위였다 해도 난 공적을 주장할 수 없고, 나쁜 행위였다 해도 난 비난받을 수 없네.”
- 서머싯 몸, <인간의 굴레에서 1>, 351쪽.


⇨ 이 글과 비슷한 글을 어디서 본 것 같았다. 그리고 생각해 냈다. 에리히 프롬의 저작에서 봤다는 것을.


우리 결정의 대부분은 실제로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라, 외부로부터 우리에게 암시되는 어떤 것이다. 결정을 내린 것이 자기 자신이라고 믿을 수는 있어도, 실제로 인간의 결정 행위는 인간이 두려운 고립감이나 생명, 자유, 안락함에 대한 보다 직접적인 위협에 내몰렸을 때 타인의 기대에 보조를 맞추는 것에 불과하다.
- 에리히 프롬, <자유로부터의 도피>, 168쪽.


⇨ 두 개의 글이 공통적으로 의미하는 것은 ‘어떤 행위를 하기로 결정할 땐 자신의 의지로만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예를 들면 우리가 스마트폰을 구입하는 일조차 여러 가지 것으로부터 영향을 받는다고 볼 수 있다. 단지 그것이 필요해서라기보다 남들이 다 사니까 나도 뒤처질 수 없다는 생각, 고립되기 싫다는 생각, 최신의 기술을 자랑하며 유혹하는 광고 등 여러 가지 것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구입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직 자신의 의지로만 스마트폰을 구입하는 게 아닌 것이다.


참고로 <자유로부터의 도피>가 1941년에, <인간의 굴레에서>가 1915년에 발표된 것이니 서머싯 몸이 먼저 썼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2. 에리히 프롬, <자유로부터의 도피>


이 책은 도스토예프스키, 히틀러, 휴즈, 샤피로, 루터, 칼뱅, 그린, 발자크 등을 비롯한 많은 저술가들의 글을 인용하고 있다. 인상 깊은 책이었는데 오래전에 읽어서 다음 사진으로 대신한다.


목차가 있는 페이지에 중요한 글이 있는 쪽수를 적어 놓았다.








3. 정희진, <정희진처럼 읽기>


이 책은 페미니즘의 고수로 유명한 저자가 79권의 책에 대해 쓴 서평집인데 서평 한 편, 한 편에 좋은 글이 담겨 있다. 특히 다양한 시각으로 책을 읽을 수 있음을 깨닫게 해 주는 것이 이 책의 강점이다.


‘다양한 시각’이란 무슨 말인가? 이에 대해선 다음 글이 설명이 될 것 같다.


토머스 해리스의 ‘대중 소설’ <양들의 침묵>을 예로 들어보자. 이 책은 ‘범죄 스릴러’로 읽을 수도 있지만, 어떤 사람은 그 책을 여러 권의 다른 책으로 읽는다. 범죄와 지식의 관계, 범죄자의 지적 매력, 식인의 의미, 동성애 코드, 선악의 대치보다 지적 친밀성이 우선하는 관계, 현대 범죄 패턴의 변화, 말하기가 인간을 자살로 이끌 수도 있다는 점, 말과 죽음의 관계 등 열 권 이상의 책으로도 읽을 수 있다.
- 정희진, <정희진처럼 읽기>, 20쪽.


⇨ 자신이 읽지 않은 책에 대한 서평을 읽는다면 자신이 몰랐던 정보와 지식을 얻을 수 있다는 점에서 유익하겠고, 자신이 읽은 책에 대한 서평을 읽는다면 자신의 시각과 다른 사람의 시각을 비교해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유익하겠다.


예전에 영화 ‘밀양’을 봤는데 이것의 원작이 이청준 저, ‘벌레 이야기’라는 소설임을 알았다. <정희진처럼 읽기>에 ‘벌레 이야기’에 대해 쓴 서평이 있다. 그중 일부다.


나는 용서가 저주보다 바람직한 가치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가해자의 권력은 자기 회개와 피해자의 용서를 같은 의무로 간주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45쪽) (...) 나는 용서와 평화를 당연시하는 사회에 두려움을 느낀다. 2차 폭력의 주된 작동 방식이기 때문이다.
- 정희진, <정희진처럼 읽기>, 45쪽.


⇨ 이런 글을 쓰려면 고정 관념과 편견을 얼마나 깨야 하는 걸까?


좋은 글이란 독자로 하여금 고정 관념과 편견을 깰 만큼 새로운 무엇을 보여 주는 글이거나, 만약 새롭지 않다면 새롭지 않은 무엇에 대해 새롭게 해석하는 글이거나 둘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물론 영양가가 있는 글이어야 한다는 전제 조건이 필요하겠다.










4.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이 책은 나의 애독서 중 하나다. 애독서인 만큼 밑줄이 그어져 있는 구절이 많다.


그러나 그대가 마주칠 수 있는 최악의 적은 언제나 그대 자신이다.
-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110쪽.


⇨ 자신이 자기 삶의 주체자가 아닌가. 도박에 빠지는 것도, 범죄나 패륜을 저지르는 것도 누가 시켜서 하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이 하는 게 아닌가.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특수한 경우에만 한할 뿐, 대체로 스스로 행동한다. 그러므로 자기 인생을 망치게 하는 것은 자신이다.


자기 인생만 망치게 하는 것이 아니다. 자식을 가장 사랑하면서도 자식의 인생을 망치게 하는 부모가 있다. 자식에 대한 부모의 지나친 간섭과 지나친 교육열이 오히려 자식의 인생을 망치게 된 예를 우리는 종종 보아 왔다. 부모 자신의 적은 ‘자식에 대한 지나친 간섭과 지나친 교육열’이었다는 말이다.


”최악의 적은 언제나 그대 자신“이다. 이 문장을 정치인들이 꼭 읽었으면 한다. 나라를 위해 일하겠다고 나섰다면 자신이 어떤 이득을 얻으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전 세계를 통틀어 쿠데타나 전쟁을 일으킨 자들은 나라를 위해서 한 게 아니라 자신의 추악한 권력욕과 탐욕에 의해서 한 것이 아닐까 의심이 간다. 최악의 적은 니체가 말한 대로 자신일 수 있으니....


이때 누군가가 다시 속삭이듯 내게 말했다. “가장 조용한 말이 폭풍우를 몰고 오며, 비둘기 걸음으로 오는 사상이 세계를 움직인다.
- 프리드리히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262쪽.


⇨ 떠들썩한 곳에서 위대한 사상이 나오지 않는다. 위대한 사상은 비둘기 걸음처럼 남모르게 조용히 전해지는 것. 사람들이 처음에 지지하지 않았던 사상이 나중에 세계를 움직인 적이 많지 않던가.


니체가 전달하려는 메시지를 정확히 파악하기 어려우나 이 책을 아낀다. 나의 고정 관념을 깨게 하는 글이 있고, 표현 방식을 배울 수 있는 글이 있으며, 사색에 잠기게 하는 글이 있어서다. 이런 글들을 만나면 연필로 밑줄을 긋는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다 보면 읽는 이에 따라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 ‘시’를 읽는 것 같다. 이 책을 내 맘대로 해석하며 읽었다는 점을 밝혀 둔다. 다시 말해 내가 니체의 글을 잘못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내게 중요한 건 니체의 책을 읽고 내가 단상을 적어 보는 일이었다. 나로 하여금 생각할 거리를 주는 책이므로.




* 내 서재에서 옮겨 와 작성한 글임을 밝힌다.








  • 북플
  • Blue님도 <정희진처럼 읽기>를 좋아합니다. Blue님이 읽은 다른 책이 궁금하신가요?
  • 2024-04-27 17:13 좋아요  l  좋아요 0
  • stella.K
  • 서머싯 몸과 정희진을 꼽는 사람이 많더군요. 저는 게을러서 매번 읽기를 놓치고 있네요. 유념해서 분발하도록 하겠습니다. 수고하셨어요.^^
  • 2024-04-27 18:34 좋아요  l  좋아요 3
  • 페크pek0501
  • 서머싯 몸의 인간의 굴레에서, 를 읽고 사색적인 문장을 쓰는 법을 배웠어요. 배웠다고 해서 제가 잘 활용한 것은 아니고요, 그렇게 써야겠단 방향은 잡을 수 있었어요. 글을 쓰는 데 도움이 많이 됐지요.
    그렇게 댓글을 써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 나이에 함부로 이벤트에 끼는 게 아니었는데... 피로해서 후달달~~~ㅋㅋ
  • 2024-04-27 18:47 좋아요  l  좋아요 3
  • stella.K
  • ㅋㅋㅋㅋ
  • 2024-04-27 20:20 좋아요  l  좋아요 1
  • 페크pek0501
  • 다음부턴 백자평이나 써야 할 듯...ㅋㅋ
  • 2024-04-28 11:09 좋아요  l  좋아요 0
  • 서니데이
  • 페크님 서재의 인생네권에서는 서머싯몸이 한권쯤 있을 것 같았는데, 맞았네요.
    그렇지만 책은 생각했던 것과 다른 책이었어요.^^;
    잘 읽었습니다. 주말 잘 보내시고, 좋은 밤 되세요.^^
  • 2024-04-27 23:43 좋아요  l  좋아요 1
  • 페크pek0501
  • 서머싯 몸의 책은 거의 읽었고 다 좋았어요. 사색적인 문장이 많은 게 인간의 굴레~라서 그걸 뽑았네요.
    제가 서재에 올린 글 보면 아마 가장 많이 인용한 책이었을 듯싶네요.
    서니데이 님도 휴일, 잘 보내세요.^^
  • 2024-04-28 11:11 좋아요  l  좋아요 1
  • 호시우행
  • 좋은책들 읽어셨네요. 대학시절, 차라투스트라를 끼고 다녔던 추억이 떠오릅니다.ㅎㅎ
  • 2024-04-28 06:43 좋아요  l  좋아요 1
  • 페크pek0501
  • 차라투스트라~를 대학시절에 알지도 못한 1인입니다. 놀기 바빴거든요.
    그런 대학시절을 보내셨다니 부러운 걸요..^^
  • 2024-04-28 11:12 좋아요  l  좋아요 0
  • blanca
  • 서머싯 몸이 현역 작가라면 알라딘 서재 보며 흐뭇했을 것 같아요. <인간의 굴레에서> 다시 읽어보고 싶고 니체 책도 페크님 덕분에 꼭 읽어야겠다 결심하고 갑니다
  • 2024-04-28 08:46 좋아요  l  좋아요 1
  • 페크pek0501
  • ㅋㅋ 흐뭇했겠지요? 팬이었다는 건 글쓰는 사람으로서 기쁜 일이죠.
    니체 책은 모든 글이 다 좋다고 볼 순 없어요. 이해가 안 가는 글, 시시한 글도 많아요. 그래도 블랑카 님이 읽으시면 좋은 구절을 많이 발견하실 듯합니다.
    그나저나 참 오랜만의 방문이십니다. 넘 반가웠다는...^^
  • 2024-04-28 11:15 좋아요  l  좋아요 0
  • 새파랑
  • 페크님의 글을 읽고 <인간의 굴레에서> 를 꺼냈습니다~!!
    선택하신 책들이 쉬워보이지 않습니다만 뭔가 아우라가 있습니다~!!
    <자유로부터의 도피> 목차 메모를 보니 이 책을 정말 좋아하신다는게 느껴집니다~!!
  • 2024-04-28 12:24 좋아요  l  좋아요 1
  • 페크pek0501
  • 하하~~ 저도 새파랑 님의 글을 보고 윌리엄 트레버를 꺼냈답니다. 잘 보이지 않는 곳에 책들에 깔려 있더라고요.
    요즘 엉뚱하게도 2024 신춘문예 당선소설집을 읽고 있어요. 스터디 모임에서 다루는 책이라서요. 신참 작가들의 관심사를 읽을 수 있어 흥미롭습니다.
    요즘 쌓여 있는 책이나 읽자, 하고 구매 금지, 하고 있으나 공동으로 읽어야 할 책은 매달 있으니 아예 안 살 순 없네요. 새파랑 님처럼 부지런해야 독서 진도가 팍팍 나가는 건데... 저도 분발하겠습니다.^^
  • 2024-04-28 12:33 좋아요  l  좋아요 1
  • 페넬로페
  • 인생네권, 저도 정말 정하기 어려웠어요.
    서머싯 몸의 <인간의 굴레>를 페크님께서 여러 번 언급하셨는데 그만큼 좋은가 봐요.
    꼭 읽어 보겠습니다^^
  • 2024-04-28 14:09 좋아요  l  좋아요 1
  • 페크pek0501
  • 인간의 굴레는 줄거리도 재밌지만 사색적인 문장이 많아서 좋았어요. 재독하고 싶은 책 중 하나예요.^^
  • 2024-04-29 22:02 좋아요  l  좋아요 1
  • 그레이스
  • 자유로부터의 도피 👍👍👍
  • 2024-04-28 15:35 좋아요  l  좋아요 1
  • 페크pek0501
  • 제목으로 봐선 재미없을 것 같은 책인데 읽다 보면 흥미롭죠.👍👍👍
  • 2024-04-29 22:04 좋아요  l  좋아요 1
  • 물감
  • 뒤늦게 이벤트 소식 듣고 저도 부랴부랴 참여했습니다 ㅎㅎㅎ
    요런 기획 참 재밌어요. 종종 해주면 좋겠어요. 다른 분들의 취향도 볼 수 있고요 ^^
    역시 페크님과 서머싯 몸은 바늘과 실이군요 ㅋㅋㅋ
  • 2024-04-30 22:28 좋아요  l  좋아요 1
  • 페크pek0501
  • 물감 님의 서재에 다녀왔어요. 다른 분들의 책 취향을 본다는 게 저도 흥미롭습니다.
    서머싯 몸의 광팬이죠. 소설의 줄거리보다 더 재밌는 게 그 안에 담겨 있거든요.^^
  • 2024-05-04 11:42 좋아요  l  좋아요 1
  • 서곡
  • 저도 인간의 굴레 조아하는 부분이 있는데 함 찾아봐야겠습니다 오월 잘 시작하시길요 ~~~~~
  • 2024-05-01 11:02 좋아요  l  좋아요 1
  • 페크pek0501
  • 댓글이 늦었습니다. 인간의 굴레, 같은 팬이시네요. 밑줄을 많이 쳐 놓게 되는 소설이라 재독할 만하죠.
    5월엔 행사가 많아 바쁜 달이네요. 우리집은 애들의 생일도, 결혼기념일도 다 5월에 있어서 더 바쁜...
    행복한 5월을 보내시기를...^^^
  • 2024-05-04 11:44 좋아요  l  좋아요 1
  • 서곡
  • 아 팬이라기엔 많이 부족하고요 ㅎㅎ 네 5월 건강하고 즐겁게 잘 보내시기 바랍니다!!
  • 2024-05-04 12:33 좋아요  l  좋아요 1
  • 페크pek0501
  • 5월은 푸른 풍경이 아름답지요. 세상은 점점 삭막해지는데 날씨는 태평하네요.서곡 님도 즐~거~웁~게~보내십시오..^^
  • 2024-05-04 12:45 좋아요  l  좋아요 1
  • 희선
  • 많은 책에서 네 권 고르기 힘들 듯합니다 한권이 아니어서 다행이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듭니다 네 권을 생각해 보고 그 책을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졌을 듯하네요


    희선
  • 2024-05-06 03:03 좋아요  l  좋아요 1
  • 페크pek0501
  • 맞아요, 힘들어요. 그래서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대로 그냥 골랐어요. 고르고 나서 다른 분들이 뽑은 책들을 보니
    죄와 벌, 스토너, 위화의 인생 등 좋았던 책들이 생각났어요. 뒤늦게. 다음에 또 한번 이런 이벤트가 있다면 다른 책을 뽑을 듯요.^^
  • 2024-05-08 12:21 좋아요  l  좋아요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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