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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장미향 같은

Appetite for Destruction, 소설을 다 읽고 나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록밴드 건즈 앤 로지즈의 위대한 데뷔 앨범 타이틀 제목이 떠올랐다. 24년 전에 발표되고, 무려 5년 전에 사둔 책을 이제야 읽었다. 그러게 사둔 책은 언제고 반드시 읽는다. 이번이 세 번째 시도였던 것 같다. 우리 달궁의 헤르메스 브로가 언젠가 이 책의 저자 아룬다티 로이에 대해 절찬을 해서 읽지 않고 배길 재간이 없었다. 그 때 이미 절판된 책이어서(나중에 문동 버전이 나왔다) 도서관에서 빌려다 보다가 반납했던가. 그리고 문이당 책도 구했지만 못 읽었다. 다시 문동 버전으로 나왔다. 수차례 초반부만 열심히 읽다 보니 이제는 익숙하더라.

이번에도 일 년 전부터 읽다 만 책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바로 어제 저녁부터. 그전에 정확하게 135쪽을 읽었는데 하루 만에 나머지를 다 읽어 버렸다. 이 소설의 초고를 본 에이전트가 돈다발을 싸들고 인도의 로이 여사를 찾아갔다고 하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로이 여사는 첫 소설로 단박에 부커상 대박을 냈다.

이 책을 읽고 나니, 내가 사는 세상은 큰 것들과 작은 것들의 조화로 이루어져 있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큰 것들은 내가 선택하거나 바꿀 수 있는 그런 부분들이 아니다. 소설에서는 인도의 고질적 카스트제도가 규정하는 사랑의 법칙(Love Laws)라던가, 관습이라는 미명 아래 행해지는 폭력적 해결 방식 등이 아마 큰 것들이리라. 대신 작은 것들은 충분히 취사선택이 가능하고, 당장에라도 이룰 수 있는 그런 것들이다. 오늘 점심 메뉴로 두꺼비 부대찌개를 먹을 것인가, 아니면 천인감자탕을 먹을 것인가. 그리고 오늘은 읽다만 파스칼 로즈의 <제로 전투기>를 마저 읽을 것인가 아니면 책바다 서비스로 도착할 예정인 쿠쉬완트 싱의 <파키스탄 행 열차>를 먼저 읽을 것인가, 이런 것들이 아마 작은 것들이리라. 하지만 이런 작은 것들이 하나둘씩 모여 나의 어설픈 구성하는 게 아닐까.

소설 <작은 것들의 신>은 1969년 인도 남부 케랄라 주의 아예메넴에서부터 이야기를 굴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23년 뒤인 1993년, 암무가 낳은 쌍둥이 에스타(펜)과 라헬의 재회를 오가며 시간과 공간의 경계들을 무시로 허물어 버린다. 쌍둥이들은 태어날 때도 남달랐던 모양이다. 하마터면 버스 안에서 태어날 뻔 했다지. 소설 속 캐릭터들의 궤적은 저자인 아룬다티 로이의 삶의 그것과 비슷한 항해를 선보인다. 결국 작가는 자신의 스토리텔링을 풀어낼 수밖에 없는 그런 존재가 아닐까 싶다는 생각도 조금 들었다. 오로지 자신의 머릿속에서 벌어지는 상상만으로 그런 방대한 이야기들을 풀어낼 수 있다고 생각할 수가 없다 나는.

이란성 쌍둥이인 에스타와 라헬은 서로 떨어져 살 수 없는 그런 존재였지만, 영국 사촌 소피 몰의 죽음으로 그럴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하게 된다. 아이들이 소피 몰을 마중하는 연극에 나서기 전에 보러 간 <사운드 오브 뮤직> 관람은 확실히 작은 것들 중의 하나였다. 반면, 시리아 정교도 성당에 안치된 어린이용 관에 누운 소피 몰의 장례식은 큰 것들이었다. 사랑의 규칙에 대범하게 도전한 암무와 달리트 파라간 출신 벨루타의 사랑은 엄격한 카스트제도가 규정한 소위 <사랑의 법칙>에 도전장을 낸 큰 것들의 일부였다.

벨루타는 암무의 엄마 맘마치가 실제적으로 운영하는 <파라다이스 피클>의 실질적인 운영자였지만, 부르주아 지주 계급인 맘마치는 벨루타에게 정당한 임금을 지불하지 않는다. 단지 그가 불가촉천민이라는 이유 때문에 말이다. 이런 ‘유동적인’ 공화국에서 벨루타가 급진적인 공산주의자 그룹에 합류하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 아니었을까. 암무와 벨루타의 사랑을 파국으로 몰고 간 주범 대고모 베이비 코참마의 악행에 대해서는 더 할 말이 없을 것 같다. 자신도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주인공이었으면서도, 타인의 작은 사랑은 받아들이지 못했다. 아니 자신이 사랑한 신부가 힌두교도로 개종한 게 더 큰 충격이 아니었을까. 만신의 나라 인도에서는 정말 불가능한 게 없을 것 같다는 그런 생각이 들 정도였다.

소설 속 주인공들은 큰 것들과 작은 것들이 쉴 새 없이 충돌하고 무언가 결론을 도출해내는 그런 혼돈의 세상을 살아간다. 큰 것들은 폭력적인 방식을 동원해서 예방접종이라는 허울 좋은 미명으로 작은 것들을 제압한다.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는 작은 것들의 연합에 두려움을 느껴서였을까? 가촉민 경찰들은 그들만의 엉터리 구호로 무장하고 베이비 코참마의 무고에 의해 성폭행 미수범이자 아이들 유괴범으로 지목된 벨루타를 습격해서 그야말로 무자비한 폭력의 끝판왕적인 면모를 유감없이 드러낸다. 암무와 에스타펜 그리고 라헬이 사랑했던 목수 벨루타는 감옥에 갇혀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베이비 코참마는 왜 그런 끔찍한 범죄를 저질렀을까? 결국 그녀의 무고는 벨루타를 죽음으로 인도하고, 암무 역시 31살의 나이에 죽게 만들지 않았던가. 베이비 코참마로 대표되는 기득권 계급은 공산주의자로 변신한 달리트들이 자신들이 유지하고 있던 기존 질서를 허무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프랑스혁명 이래, 비폭력적인 방식으로 기존 질서를 타파한 적이 있었던가. 분노의 주술사였던 베이비 코참마는 우선 국가 폭력의 위임자인 경찰을 이용해서 자신의 목적을 이루려고 했고 자신의 기획이 암무의 진술로 실패하자, 그 다음에는 소피 몰을 잃은 자신의 조카 차코를 조종해서 암무 일가를 풍비박산으로 만들어 버린다. 인도 사회가 수천 년된 카스트제도를 개선할 수 없어 보이는 것처럼, 큰 것들과 작은 것들의 조화와 평화로운 공존은 그런 점에서 요원해 보인다.

폭력은 인도 사회에 기본 구성 요소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자주 등장한다. 전통을 고수하는 극우 힌두이즘을 신봉하는 이들이 자행하는 폭력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1947년 8월 15일, 인도 국가 자체가 파키스탄과 분리 독립하는 순간부터 유혈 속에서 탄생하지 않았던가. 맘마치는 영국 제국의 나방을 연구하는 고상한 곤충학자 파파치에게 지속적으로 두들겨 맞았다. 딸인 암무도 예외는 아니었다. 승마 채찍으로 파파치는 딸을 때렸다. 암무 역시 벵골 출신 알코올 중독 남편에게 가정폭력을 당했다. 이런 폭력의 악순환을 끊어낼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단 말인가. 그들이 끝없이 구사하는 이런 폭력의 근원에는 무언가를 상실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존재한다.

한편 아룬다티 로이가 구사하는 후각 이미지가 소설 내내 흥미로웠다. 기득권 세력자의 수호자라고 할 수 있는 베이비 코참마는 파라간 벨루타로부터 나는 냄새를 역겨워한다. 아니 그게 실제로 존재하는 지도 모르겠다. 식민 종주국에서 날아온 소피 몰은 인도가 풍기는 후진국 냄새에 질색한다. 포스트콜로니얼 시대에 식민 종주국이 후각이라는 민감한 접점으로 형상화한 혐오와 차별은 기존의 카스트제도와 화학적 결합을 시도하면서 강력한 내러티브의 힘을 독자에게 시전한다. 하루가 다르게 강 부근에 섭생하는 식물들의 크기가 줄어들고, 오염되는 모습들을 냄새의 변화에 담아 저자는 설득력 있게 전달한다.

소설 속에는 숱한 모순들이 피고 지는데, 내가 가장 주목한 모순은 바로 공산당 지도자 필라이 동지의 그것이었다. 계급타파의 선봉에 서야할 노동자 계급의 공산주의자 필라이 동지 역시 위기에 빠진 당원 벨루타를 돕는 대신 조직의 이익을 우선시한다. 암묵적 사랑의 법칙을 위반한 벨루타를 보호하는데 앞장서지 않는다면, 도대체 누굴 돕고 무엇을 개혁하겠단 말인가. 이 위선자는 심지어 공산주의자 행세를 하면서도 카스트제도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하긴 영국 옥스퍼드 로즈 장학생 출신의 차코도 필라이 동지와 다를 게 없다.

인도 지배계급으로 최상위 교육의 시혜자인 차코는 유사 막시스트 같은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의 모습은 인도주의적 지배를 하고 싶었지만, 결국 저항하는 식민지 인도의 지식인들을 폭력적인 방식으로 다뤘던 식민종주국 영국의 제국주의자들과 다를 게 없었다. 어머니인 맘마치와 달리 가업인 <파라다이스 피클>을 그야말로 나락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다. 물론 경영의 모든 책임이 차코만이 질 것은 아니지만.

두 개의 시간대를 오가는 소설만큼이나 나의 리뷰도 정제되지 않고, 그야말로 마음 가는 대로 써 내린 게 아닌가 싶다. 작은 것들로 대박난 저자는 그동안 인도 사회의 변혁과 여러 가지 큰 것들에 정진해 왔다. 그리고 두 번째 소설 <지복의 성자>로 다시 돌아왔다. 그런데 성과는 데뷔작만 못하다는 게 중론인 것 같다. 그 책도 사두기는 했지만 아직 읽을 생각조차 못하고 있다. 당장에 읽어야 할 책들이 너무 많다는 이유로 말이다. 세 번이나 도전해서 다 읽을 수 있어서 기뻤다. 사랑, 광기, 희망 그리고 무한한 기쁨 중에 마지막에 해당하려나.




[뱀다리] 아주 그냥 오래 전 Poison 이 부른
팝송의 가사 생각이 났다.


Every rose has its thorn
Just like every night has its dawn
Just like every cowboy sings his sad, sad song
Every rose has its thor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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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연님도 <작은 것들의 신 (무선)>을 좋아합니다. 수연님이 읽은 다른 책이 궁금하신가요?
  • 2021-04-15 11:36 좋아요  l  좋아요 0
  • 미미
  • 레삭메냐님 처럼 리뷰 쓰고 싶어요! 몇 년 더 책을 많이 읽으면 가능하긴 할까요?^^;; 공식적으로는 1947년 폐지됐다는데 카스트제도의 흔적은 인도에서 언제쯤 사라질지. 의식적인 문화가 더 무섭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 오늘 또 이 책 저 책 담아갑니다.
  • 2021-04-15 12:44 좋아요  l  좋아요 4
  • 레삭매냐
  • 원래 제대로 한 번 리뷰를 써 보려고
    메모도 열심히 하고 그랬는데 막상
    본 리뷰에 들어가서는 제대로 써 먹지
    도 못하고 감으로 적어 버렸네요 ㅠㅠ

    인도와 카스트제도는 뗄래야 뗄 수 없
    는 그런 게 아닌가 싶습니다. 작가들
    에게는 정말 좋은 소재가 아닐까요.
  • 2021-04-15 17:19 좋아요  l  좋아요 3
  • 새파랑
  • 건즈 앤 로지스가 떠오르는 책이라니~! 완전 정글같은 책인가 보군요 ㅎㅎ ‘작은 것들의 신‘ 이란 문장은 많이 들어봤는데 읽어보고 싶어요^^
  • 2021-04-15 16:35 좋아요  l  좋아요 4
  • Falstaff
  • 메냐 님의 별점이 좀 짰습니다. ㅋㅋㅋㅋ
    이 책의 독자 평가가 왔다 갔다 하는데요, 로이하고 맞기만 하면 정말 왔다입니다.
    전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톱텐에 이 작품을 넣고 싶을 정도로 좋았습니다.
    이거 딱 한 권으로 그만 아룬다티 로이를 숭배하게 됐잖아요 글쎄.
  • 2021-04-15 16:44 좋아요  l  좋아요 5
  • 레삭매냐
  • 모든 갈등을 폭력적으로 해결한다는
    점에서 예의 정글 같은 ˝파괴욕망˝
    이 연상됐습니다.
  • 2021-04-15 17:21 좋아요  l  좋아요 3
  • scott
  • 읽고 보니 매냐님 별 하나 뺴쉼 ㅎㅎ 별넷 냉정한 평가,동감 합니다!
  • 2021-04-15 16:56 좋아요  l  좋아요 4
  • 레삭매냐
  • 왠지 시류에 편승해서 아니면
    어떤 시류를 만들고자 오리엔탈리즘
    적인 요소를 가미하지 않았나 하는
    그런 (비)합리적인 의심의 발로가
    아닐까 합니다.
  • 2021-04-17 15:03 좋아요  l  좋아요 1
  • coolcat329
  • 저 이 책 정말 너무너무 좋아합니다. 그냥 좋아요 🥲
  • 2021-04-16 11:11 좋아요  l  좋아요 2
  • 레삭매냐
  • 이 책의 팬들이신 분들이 참 많은
    것 같습니다 :>

    작가의 소설과 다른 책들은 결이
    많이 달라서 선뜻 평가 내리기가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맞습니다, 좋아하시는데 뭔 이유가
    필요하겠습니까.
  • 2021-04-17 15:04 좋아요  l  좋아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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