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 당사자들이 얘기를 하게 되었고, 그럼으로써 문제가 불거진 것입니다. 즉 1990년 전후에야 불거진 거죠. 이때부터는 일본도 이 문제를그냥 넘어가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1990년대에 접어들자 일본정부도이 문제를 해결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한일 문제에서 자주 거론되는 고노 담화나무라야마 담화가 이때 발표되었습니다.

이야기가 나온 김에 고노 담화와 무라야마 담화에 대해서도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1993년에 나온 고노 담화는 당시 일본의 관방장관이었던 고노 요헤이의 이름을 땄습니다. 위안부 문제가 계속해서 불거지자 일본정부가 조사를 했습니다. 조사 결과 위안부들은 일본에 의해 강제로 끌려간 경우도 있고 일본이 위탁한 회사에 의해 속아서 간경우도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 근본적으로 일본정부의 책임을 인정하고,
조사에서 밝혀진 사실들을 역사의 교훈으로 남김으로써 같은 과오를 반복하지 않겠다면서 이 문제로 고통을 당한 사람들에게 반성의 마음을 올린다는 내용을 담은 것이 고노 담화입니다.

무라야마 담화는 1995년 당시 일본 수상이었던 무라야마 도미이치山가 발표한 담화를 말합니다. 
식민지 지배에 대해서 공식적으로 사죄하면서 위안부 문제에 대해 보상을 비롯한 여러 가지 조치를 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여성기금이란 것이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애초에 한일협정에서 개인 배상 얘기는 끝났기 때문에 일본은 책임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의 책임을 인정하고 매듭을 지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식민지 본국이 그 식민지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에서 개척하는 걸까요? 아닙니다. 식민지를 발전시켜주려고 개척하는 것이 아니라 제국주의 본국의 경제를 안정화시키고 더 확대하려는 목적이 있는것입니다. 즉 착취리는 본질을 무시할 수가 없습니다. 

그럼 일제가 한국을 근대화시켰다는 착시현상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요? 식민지가 제국주의 본국 경제에 포함되어버리니까 제국주의 본국의 시장과 근대 문화가 ‘이식‘되는 과정이 나타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 과•정에 식민지 지역에서 근대 자본주의적인 생산관계와 경제구조가 시작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이식된 경제구조를 보고우리나라가 식민지 시기에 근대화되었다고 생각하는 거죠.

식민지 근대화론에 맞서는 논리로 자본주의 맹아론이 있습니다.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장하는 이들의 기본적인 생각은 조선시대에는 자본주의적인 생산관계가 발전하지 않았으며, 스스로 발전하기도 어려웠다는 것입니다. 정체되어 있었다는 거죠. 
그런 상황에서 일본이 들어오면서 한국에 근대 자본주의가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사실은 어느 나라는자본주의 맹아가 없는 나라는 없습니다. 경제가 발전하다보면 어느 단계에는 자연스럽게 자본주의적인 모델들이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나타난 모델들이 자생적으로 확대되고 발전할 수도 있고, 그전에 제국주의의 식민지가 됨으로써 애초에 나타났던 맹아는 사라지고 이식된 자본주의적인 모델들이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즉 맹아가 발전해서 스스로 발전한 나라도 있고 그렇지 않은 나라도 있습니다.
자본주의 맹아론은 기본적으로 모든 교과서가 수용하고 있는 이론입니다.
식민지 시기라는 같은 경험을 했는데,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날까요?
우리나라와 다른 나라 사이에는 몇 가지 의미있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지리적인 문제입니다. 한국 같은 경우는 대단히 특이한 경우로 다른 나라와 달리 이웃 국가의 식민지가 되었습니다. 대다수 아시아,
아프리카 국가들은 멀리 떨어져 있는 서양 제국주의 국가의 식민지가 되었죠 
이웃 국가의 식민지가 된다는 것은 매우 자존심이 상하는 일입차이가 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역니다. 한국과 일본의 역사를 보면사의 어떤 국면에서는 큰 차이가 나기도 했겠지만 대체로 비슷하게 살아왔죠그뿐만 아니라 한국 사람들은 전근대 시대에 일본을 그렇게 문명화된 국가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반대로 우린 굉장히 문명화되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중국의 문물을 받아들였던 종속적 문명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건 당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주장입니다. 전근대 시대에 선진문명의 제1 아이콘은 중국의 유학이었습니다. 그 유학을 받아들여서 나름대로의 유학체계를 유지해온 나라이니, 수준 높은 문명을 가지고 있었다고 자부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합니다. 그러다가 우리보다 분명 수준이 낮다고 여겨지던 일본에 식민지화되었으니, 얼마나 자존심이 상하겠습니까. 그러니 이것만으로도 식민지화가 진행되었다는 것, 식민지가 되었다는 것, 식민지였다는 것에대해 좋은 감정을 가질 수가 없는 거죠.

두 번째로 식민지를 경험한 국가들을 보면 수천 년 동안 독립된 통일왕조를 유지한 경우가 별로 없습니다. 우리보다 역사가 더 오래되었다
는 인도에도 독립된 통일왕조가 지속적으로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중간중간에 계속 외세의 침입을 받았고, 계속 분열되어 있었습니다. 이슬람 세력들이 지배한 적도 있죠. 
베트남은 우리와 많은 점에서 비슷하면서도 큰 차이가 있습니다. 중국의 변방에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기 때문에 우리보다도 중국의 괴롭힘을 더 많이 받은 나라가 베트남입니다.
베트남에 통일왕조가 들어선 것은 1000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고, 그나마 그 중간에 분열과 복속이 반복되었습니다. 
타이완은 식민지 전 300여년간 독립국가를 이뤘던 적이 없었습니다. 포르투갈과 네덜란드 그리고 청나라의 지배를 받다가 일본이 들어왔고, 다시 국민당이 들어온 상태입니다.

 그러니까 이들 국가의 국민들한테는 어떤 나라의 식민지가되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누가 좋은 지배자였는지만 생각하면 되는 거죠.

그런데 우리나라는 다릅니다. 오랫동안 통일왕조를 유지하며 우리것을 지키다가 별로 차이가 나지 않는, 아니 오히려 뒤떨어진 문명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던 이웃나라의 식민지가 되었죠. 우리와 같은 경우가 많지는 않아서 이웃나라인 영국에 통합된 아일랜드 정도가 있습니다.

한국과 일본처럼 아일랜드와 영국도 사이가 아주 좋지 않습니다. 사실 아일랜드와 영국의 관계에 비교해 보면 그래도 한국 사람들은 정말 점잖은 편입니다. 아일랜드의 유혈투쟁에 대해서는 다들 너무나 잘 알고있을 것입니다.

이런 부분들을 고려하면서 식민지 시기를 바라보면 ‘개발이냐, 수탈이냐‘ 같은 문제를 포함해 좀더 명확하게 이 시기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식민지와 제국주의 관계의 본질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사실 위주로, 아니 너무 사실만 강조했기 때문에 문제된 측면도 조금은 있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옛날에는 너무 수탈 얘기만 했던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학생들에게는 특히 균형 잡힌 관점이 중요합니다. 
단순히 과거를 바로 알자는 말은 아닙니다. 이는 1960년대 이후 개발 원조와도 관련되기 때문에 현재를 바라보는 데도 상당히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우리는 원조를 받는 처지에서 벗어나 이제는 개발도상국에 원조를 주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사회 일각에서 우리도 힘든데 무슨원조냐는 이야기를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개발도상국에 원조를 하는 것은 우리의 필요 때문이기도 하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수출 비중이 큰 우리나라는 개발도상국에도 우리 상품을 팔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우리 물건을 사는 나라도 잘살아야 합니다. 그곳의 사람들이 소득이 없고, 아는 것도 없고, 이용할 줄도 모르면 우리와의 교역은불가능합니다. 즉 우리만 잘산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나라와 같이가야되는 측면이 있는 거죠. 물론 이건 식민지화하고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이야기입니다. 논리는 비슷하지만 식민지는 상대국의 주권까지도허용하지 않는 반면, 원조는 주권을 침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상생의 방안이죠. 식민지 시기의 본질은착취였고 그 과정에서 개발이 나타나는 것이지만 오늘날 국제관계의본질은 착취가 아니라 상생의 모델 속에서 어떻게 하면 서로 윈-윈 하느냐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같은 성격의 이슈라고 하더라도 시대에 따라서, 방식에 따라서 서로 다르게 그리고 객관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경제적으로는 베트남 파병이 도움이 됐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미국이 한국에 대한 원조를 감축하•려던 시기에 파병을 결정하여 미국의 대한 원조를 연장할 수도 있었습니다. 
미국은 1960년대 초부터 원조 감축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미국이 원조할 곳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한국이라는 단일국가에 대규모의 원조를 주기가 힘들었습니다. 원조를 감축하려는 때에 베트남 파병이 이루어지면서 1966년 브라운 각서를 작성하고 미국이 한국에 특별원조를 주기로 했죠. 그외에도 전투에 들어가는 모든 비용을 미국이 부담했기 때문에 우리한테는 경제적으로 많은 도움이 되였습니다. 특히 경제개발계획 실행에 꼭 필요한 도움이었습니다. 경계개발계획을 실행하려는 개발도상국들이 일반적으로 겪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돈과 기술 문제입니다. 베트남전쟁이 문제들을 모두 극복하는계기가 되었습니다. 전쟁특수로 돈이 들어왔고 파병의 대가로 한국과학기술연구원이 만들어졌습니다.
하지만 짚고 넘어갈 점도 분명히 있습니다. 돈을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버느냐도 참 중요합니다. 누구나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돈을벌 수 있습니다. 다만 그 방법이 정당했는가 하는 문제는 여전히 남죠.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한국전쟁 기간에 일본이 돈을 벌어서 경제를 부홍시킨 것을 알고 있는지‘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특히 신입생들한테 물어보면 거의 90퍼센트 이상이 알고 있다고 답합니다. 어디서 배웠느냐
고품으면 그 친구들은 기억을 못 합니다. 부모님한테 들은 건지 수업시간에 들었는지 그러나 분명히 한국 사람들은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전정으로 고통받는 동안 일본은 얄밉게도 전쟁특수를 이용해서 돈을 벌없다는 것을요.

한국전쟁을 베트남전쟁에 비교해보면 베트남 사람들은 우리를 어떻게 생각할까요? 우리와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있는 전쟁이라고 하더라도그 전쟁을 통해 돈을 벌었다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하물며 베트남은 우리나라와 공통점이 많은 나라이긴 하지만 아주 멀리 떨어져 있고 직접적인 이해관계도 없는 국가입니다. 그곳에 가서 벌어온 돈으로 경제적인 이득을 봤다고 해서 우리 스스로 전쟁특수를 정당화시킨다면 일본이 한국전쟁 중에 돈을 번 것을 어떻게 비난하겠습니까. 

비난을 떠나 우리가 일본을 굉장히 얄밉게 보는 것처럼 베트남 사람들도 한국인들을 그렇게 바라보겠죠.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인가요?
우리 후손들한테 어떻게 이야기할지도 문제입니다. 우리의 후손들한테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자랑스러워하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하는 점입니다. 

우리는 젊은 세대들에게 목적도 중요하고 결과도 중요하지만 그과정도 중요하다고 이야기합니다. 어떤 결과나 결론을 얻기 위해서 어떤 과정을 거쳤고 어떤 수단을 썼는지를 봐야 한다고 하면서도 막상 우리가 경제성장을 위해 남의 나라 전쟁에 참전해서 이득을 얻는 과정이•정당했는지를 따지지 않는다면 역사에서 우리가 얻을 교훈은 전혀 없습니다.
아프가니스탄에 재파병할 때는 또다른 상황이 연출되었습니다. 
모든 신문들이 재파병에 반대하면서 "뭘 얻을 게 있느냐"라는 헤드라인을 뽑았습니다. 

그런데 파병의 목적은 다른 나라에 군대를 보내서 평화체제수립에 이바지하고, 그 나라의 재건에 참여하고, 정말 순수하게 전쟁피해를 입은 사람들을 도와주는 것이면 족합니다. 

그것이 바로 국가의 소프트파워이고 우리의 브랜드죠. 
한국이라는 나라는 정말 어려운 국가를 도와준다는 인식을 심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심성은 ‘우리가 뭘 얻을 게 있느냐‘에 머물러 있습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우리가뭘 얻겠습니까? 우리가 그 사람들을 도와도 모자란데 말이죠. 

베트남전쟁의 기억이 지금의 현실 정치, 현실 외교정치에도 동일하게 작동하고있는 것입니다. 
베트남전쟁은 한편으로는 역사이기 때문에 사실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다른 한편으로는 현실에서 올바른 인식을 가지고 올바른 외교정책과 정치를 해나가기 위해서도 베트남전쟁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럼 ‘이런 과거사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라는 질문이 남습니다. 가장 먼저 정부가 나서서 풀어야 합니다. 정치적인 문제이고, 군사적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기업과 사회가 나서야합니다. 

2014년 현재 베트남의 삼성전자 공장이 베트남 전체 수출에서차지하는 비중이 17퍼센트나 된다고 합니다. 또한 2015년 2월 현재 삼성전자가 공장을 증축하면서 일주일에 2,400명을 신규 채용한다고도합니다. 또한 한국의 전문가들이 설립한 사회적 기업 ‘야만‘이 매년 평화를 위한 행사를 개최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기업과 사회의 역할이 과거의 아픔을 치유하는 중요한 기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한국사회
내부에서 정치적이고 비생산적인 논쟁을 자제해야 되겠죠.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문제는 민간인 학살 문제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한국과 일본 사이에 위안부와 징용이라는 과거사가 있다면, 한국과 베트남 사이에는 민간인 학살이라는 과거사가 있습니다. 

한국사회가 일본정부에 진정한 사과와 보상을 요구한다면, 한국사회 역시 베트남에 대해 과거사 문제를 해결해주어야 합니다. 

일본이 진심으로 사과할 때까지 사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한국도 베트남에게 진심으로사과해야 합니다.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남의 문제를 지적한다면, 그것은 누워서 침 뱉기입니다.

물론 베트남전쟁에서 민간인과 베트콩을 구분하기 힘들었다는 한국군의 주장을 거짓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게릴라 전쟁이었기 때문에 분명 그러한 어려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민간인들이 죽은 것은 분명한 사실이고, 여기에 대해서 사과해야 합니다. 한국군은 정부에 의해 동원된 것이기 때문에 우선 정부가 사과해야 합니다. 한국정부가 진심으로 사과함으로써 동원된 군인들을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로 만들어주어야 합니다. 

그러고 나서 한국과 베트남은 과거를 넘어서 동반자로 나아가야 하고, 일본에 대해서도 진심어린 사과를요구해야 합니다.

역사는 언제나 현재진행형입니다. 

그렇기에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는역사를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베트남전쟁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이 앞으로의 발전적인 관계를 만들어갈 소중한 기회라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한 때입니다.
한국의 경제성장에 대해 교과서는 이분법적으로 서술하는 경향있습니다. 아주 단순합니다. ‘독재는 부정적이고 경제성장은 긍정적이었지만 경제성장 과정에서 독재는 불가피했다‘라는 식으로 서술하는거죠. 

다른 한편으로는 ‘경제성장은 우리의 빛나는 성과다. 그러나 급속한 경제성장 탓에 빈부 격차가 커졌고 경제구조 자체도 튼튼해지지않았다‘라는 식으로 명과 암으로 나눠서 설명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긍정과 부정을 함께 보기 때문에 혹은 명과 암을 함께 살피기 때문에 객관적인 서술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 명과 암을 따로따로가 아니라 하나로 이해해야 합니다. 
서로 같이 이해해야 우리 경제사를 제대로 보고 역사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즉 통합적으로 봐야 하고, 동시에 과정으로 봐야 합니다. 모든 일에는 동전처럼 양면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경제사를 대한민국 정부 수립부터 최근까지 연속적으로 바라보면서 각 국면마다 어떠한 일들이 있었는지를 꼼꼼히 살펴야 합니다. 물론 자료가 아직 다 공개되지 않았고, 앞으로 우리가 더 분석해야할 이슈도 많지만 말입니다.

예컨대 이승만 정부 시기에는 환율 문제가 가장 중요했습니다. 환율문제는 한미관계와도 관련이 되고 경제정책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박정희 정부 시기는 경제개발계획이 중요하겠죠. 박정희 정부 하면 대부분 1972년의 유신만 이야기하지만 1972년의 또다른 사건인 8.3조치에•대한 이해가 당시뿐만 아니라 현재를 이해하기 위해 중요합니다. 
그대음에 1970년대 말에 있었던 경제위기와 부채위기, 
1980년대에 있었던 3저 호황을 잘 들여다보면 한국경제의 맥락과 성과 그리고 비용 같은 부분들이 한눈에 들어올 것입니다.
지금까지 한국경제가 위기를 맞은 것은 대부분 시장논리대로 처리하지 않았던 탓입니다. 시장논리에 따라 처리했다면, 한국경제는 더 탄탄한 구조를 가졌을 것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기업가의 윤리 문제입니다. 8.3조치를 발표하면서 박정희 대통령이 마지막에 강조한 것도 기업가들의 윤리입니다. 즉 모든 기업인은 깊이 성찰하고 올바른 기업가 정신을 발휘해야 한다고강조했습니다. 문제의 핵심을 지적한 것이죠. 경제성장의 초기에는 허점이 많았습니다. 기업가들이 마음만 먹으면 차관이나 정부의 돈을 이용해서 얼마든지 탈세나 부동산 투기를 저지를 수 있었습니다. 그만큼경제적 규율과 법률이 정비되지 않은 상황이었고 기업들에 대한 감사시스템 역시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습니다.
이 시기 기업가의 윤리 문제가 얼마나 심각했는지는 크게 논란이 됐던 위장 사채를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원래 기업가는 자기 돈을 회사에 투자해서 그 이익금으로 회사를 살려가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자본•주의의 꽃인 연구개발 R&D 개념입니다. 즉 연구개발을 통해 생산성을 높이고 수익률을 높임으로써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이죠. 그런데 회사의
사주들이 이익금을 자본금으로 투자하는 대신 자기 회사에 사채로 빌려주었습니다. 자기 이름으로 빌려주면 안 되니까 가족의 이름으로 빌려주었습니다. 회사는 사주의 가족들에게 높은 이자를 갚아줘야 했습니다. 사주로서는 경제개발의 초기 기업이 생산으로 얻는 이익이 크지않은 상황에서 사채로 얻는 이익이 훨씬 크겠죠. 이걸 위장 사채라고 합니다. 

정부의 조사한 결과 생각보다 위장 사채의 규모가 컸습니다. 부동산 투기나 위장 사채는 기본적으로 자본주의사회의 기업가 윤리를 벗어난 것입니다. 따라서 처벌이 필요했지만 정부는 많은 대기업들을 사면해주었습니다.

8.3조치는 크게 두 가지 교훈을 준다고 생각합니다. 
경제위기가 왔을때는 시장논리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시장을 정상화시켜야 하는 상황에서 시장논리를 따르지 않았다는 것이 첫 번째 문제점입니다. 1969년과 1970년의 청와대 보고서만 보더라도 시장논리가 살아 있었지만 8.3조치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두 번째는 기업가 윤리를 명확하게 세워주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기업가 윤리를 명확히 세워야만 경제위기가 다시 발생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8.3조치는 기업가 편을 들어주면서 기업가 윤리 문제를 거의 건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기업가들의 윤리를담보해줄 법률도 만들지 않았습니다. 그 때문에 경제위기 때마다 기업가들의 윤리 문제가 재발하게 되었습니다.
1970년대 후반에는 다시 부동산 투기가 나타납니다. 그때는 중동특수로 오일달러가 들어오던 시기입니다. 기업들이 돈이 생기자 다시 두기를 시작했습니다. 강남이 개발되고, 현대아파트 사건이 있던 때였죠.
그리고 나서 1980년에 또 경제위기가 왔습니다. 두 번째 외환위기였습니다.
으켰기 때문에 실패한 것입니다.
또 하나, 정변을 주도한 사람이 기존의 권력층과 완전히 다르냐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김옥균만 해도 안동 김씨의 대단한 명문가 출신입니다. 입양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안동 김씨 가문을 배경으로 하고있습니다. 물론 양반 계층이 아닌 이들도 있었습니다. 서재필이나 오징석은 양반 출신은 아닙니다. 그러나 핵심 세력은 북촌 양반 가문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럼 5·16을 통해서 시스템이 완전히 바뀌었는지를 살펴볼까요? 

사람들이 혁명이라고 부르는 프랑스혁명, 러시아혁명, 중국혁명을 보면 기존의 사회 시스템이 완전히 바뀌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또 정치적으로 권력을 주도하는 계층이 귀족에서 부르주아지로, 부르주아지에서 프롤레타리아트로 확 바뀌게 됩니다. 시민사회로 들어가거나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체제로 전환하는 거죠. 이걸 혁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5·16은 어떻게 봐야 할까요? 5.16 이후에 과연 정책이나 권력층에 변화가 있었을까요?
일단 5·16 쿠데타를 일으킨 사람들은 이전의 집권층과는 조금 다릅니다. 이전 집권층은 대부분 식민지 시기부터 특혜를 받았던 계층입니다. 그래서 친일파들이 처단되지 않고 등용되었다는 논란이 계속 있었던 거죠. 그런데 박정희와 함께 쿠데타를 일으킨 육사 5기, 8기 등의 세력은 한국현대사에서 비주류 세력입니다. 주류 세력은 이승만 정부가까이에서 당시 여러 가지 부정부패, 부정선거를 만들어냈던 세력이죠.
당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출신 배경만 보더라도 알 수 있습니다. 박정희 의장은 시골의 아주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단지 한 가지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앞에서 현재 러시아나 일본이 나아가는 길이 위험하다고 지적했듯이 역사철학 중에도 전체주의나 군국주의에 기초한 역사인식은 지양해야 합니다. 어쩌면 이 부분들은 법적으로도 규제해야 합니다. 이러한 역사인식은 결국 한국, 더 나아가 세계평화에 치명적인 악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1930년대 말 일본과 독일의 역사인식이 사회 전체를 비정상적으로 만들었고, 결국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이끈 제2차 세계대전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지금일본에 나타나는 역사인식은 그 당시의 역사인식을 합리화하고 있습니다.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한국 역시 그런 역사인식이 전혀 없다고 할수 없습니다. 
2014년에 있었던 ‘서북청년단 재건‘ 사건과 이른바 ‘일베‘
의 역사인식에서 그런 점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는 한국사회를 위험으로 몰고 갈 수 있는 매우 위험한 생각입니다. 

전체주의를 효율적이라고 생각하면서 박정희 시대를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거죠. 그렇게 한다면 우리 사회는 일본이 과거사를 반성하지 않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사회가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박정희에 대한 평가와 관련해서 강조하고 싶은 점은 정치적 평가나 신화로부터 벗어나지 않고서는 객관적인 접근이 어렵다는것입니다. 박정희와 그의 시대를 긍정적으로만 보는 사람들이나 부정적으로만 보는 사람들이나 모두 신화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 북플
  • puttyclay님도 <박태균의 이슈 한국사>를 재미있게 보고 리뷰를 남기셨네요. 리뷰를 읽어보시겠어요?
  • 2024-08-05 13:17 좋아요  l  좋아요 0
  • 복있는사람들
  • 아직도 논란이 되고 있는 이유는 ‘제대로‘ 알려고 하지 않으려 하고, 서로 뭔가 어느 한쪽의 이익에 자신이 연결된다고 믿기 때문인가... 너무 소모적인 편향으로 몰고가는 극단적인 모습들에서 ‘몰지성‘과 ‘형오‘를 읽고 거리를 두게 된다. 그래도 역사는 이어지고, 진실이 힘있게 드러나게 되겠지...
  • 2024-08-05 15:44 좋아요  l  좋아요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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