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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세계대전 발발 직전의 외교적 상황
제 1차 세계대전은 역사적으로 국가의 거의 모든 자원과 국민들을 동원한 총력전이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하지만 최초의 총력전이었다는 특징 이외에도 제 1차 세계대전만이 갖는 독특한 문제가 있었으니, 바로 '어떻게 해서 이 전쟁이 발발했는가?' 하는 의문이다. 물론 그때 당시 막 불타올랐던 민족주의 열풍으로 인해 발생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지만 어째서 저 멀리 있던 발칸 반도에서 일어났던 분쟁이 유럽 전체를 전쟁의 물결로 휩쓸었는지에 대한 문제는 아직까지도 명확한 결론이 나지 않은 상태이다. 나 또한 이와 비슷한 궁금증을 가지고 있었고, 관련된 책이 어디 없나 살펴보던 중에 본 책을 발견하여 읽게 되었다. '학술 총서'라는 점에서 뭔가 딱딱해 보일 것 같았지만 그만큼 자료나 원문 조사가 풍부할 것이라 생각해 고민 끝에 결국 읽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책을 다 읽어 본 결과 1차 세계대전이 단순히 민족주의의 열풍으로 인해 발생한 전쟁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민족주의는 그 수많은 발발 원인 중 하나였을 뿐이었으며, 1차 세계대전은 아주 복잡다단한 과정을 거쳐 발생한 전쟁이었다. 특히 각 국가들의 외교적 노력과 그 노력들이 오해를 쌓고, 또 그 오해가 진실이 되어 마침내 대다수의 유럽 국가들이 이 전쟁에 참여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독일이 비스마르크에 의해 통일을 이루고 산업의 발전을 겪으며 식민 지배의 필요성과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 영국과 신경전을 벌였는데 이것이 해군 경쟁이라는 방식으로 나타났으며, 이후 이 경쟁에서 좌절한 독일이 이번엔 세계가 아닌 유럽 내에서 주도권을 자리잡기 위해 영국의 중립성을 강력히 요구했다는 점은 단순히 두 국가가 서로 힘으로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비정상적으로 이러한 경쟁을 일으켰다는 일차적인 판단에서 벗어나 국가의 성장과 발전, 그리고 여러 국가들이 인접해 있던 유럽의 정치적 상황에서 힘의 균형을 위해 경쟁했다는 관점으로 본다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물론 그 과정이 다소 위협적이고 비뚤어진 수단을 통해서 이루어졌지만 말이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도 무조건적인 공격 자세보다는 각국 나름대로 최소한의 피해를 보기 위해 민간 정부 차원에서 외교적 노력에도 힘썼다는 점, 그리고 그 누구도 이 전쟁이 유럽 전체에 퍼져 장기전으로 될 지 예상하지 못했다는 점 등등은 누군가 혹은 어떤 국가에 의해 이 전쟁이 철저히 계획된 것이라는 기존의 편견을 깨뜨렸다.


이렇듯 본 책은 1차 세계대전의 기원에 대해 단순히 군사적 갈등으로만 얘기하지 않고 각 국가들의 사정과 외교적 현실에 기대어 그 원인을 찾고 있다. 특히 나라 간의 동맹과 이해관계가 국제관계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지, 그리고 외교에 있어서 공격적인 자세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걸 깨닫게 해 준다는 점에서 오늘날 21세기의 정치적, 외교적 상황에서도 대입해 볼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된다.


과거 영국과 독일이 세계패권을 두고 경쟁했다는 건 오늘날 중국과 미국의 패권 전쟁을 연상시키고, 민족 문제로 신경전을 벌였던 러시아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일은 이민자와 난민들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오늘날의 유럽을 연상시키니 말이다. 만약 우리가 1차 세계대전의 기원을 그저 군사적인 관점에서만 보고 그 기원과 외교적, 정치적 원인에 대해선 등한시한다면 또다시 1차 세계대전보다 더한 세계적 규모의 전쟁이 일어날지 모를 일이다.
프로이센, 프랑스 전쟁에서 프로이센이 승리함으로써 독일은 통일국가로 새로운 정치적 삶을 시작했다. 독일의 이러한 지위 상승은 당연히 기존 국제 사회의 역학 구조에 변화를 가져왔다. 특히 기존 정치 질서에 익숙한 유럽의 강대국들은 독일의 정치적 상승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비스마르크는 대단히 힘들여 만들어놓은 국제적 안정을 위해 독일의 대외적 팽창 정책을 억제하였는데, 지속적인 경제성장에 따른 독일 산업의 해외 진출 욕구는 더 이상 정치적으로 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서유럽을 향한 보수성은 독일의 정치적 절제라는 긍정적인 측면을 보였지만 동유럽에서의 보수성은 민족주의의 억압과 이민족 정치적 탄압을 위한 군국주의 및 제국주의의 유지라는 부정적인 측면을 기초로 하고 있었다.
실제 독일의 해군 증강 작업은 다른 국가들의 해군 증강 작업을 자극함으로써 세계적 규모의 해군 경쟁이 일어나게 하였고 이것을 계기로 외교 교섭이 활발해졌다. 그러나 영국을 공격하는 것보다 독일에 대한 영국의 공격을 어렵게 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군비 증강이 바로 무력행사로 이어질 것을 상정하기보다는 직접 싸우지 않고 상대의 양보를 얻어내기 위한, 즉 위협 외교 또는 공갈 외교의 수단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더 흔했다.
그러나 해군 경쟁 과정에서 고조된 양국 간의 적대감, 특히 여론의 악화는 1차 대전이 발발할 수 있는 조건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몫을 차지했다. 특히 영국이 독일을 견제하기 위해 대륙 문제에 직접 개입하기로 방향을 정하는 과정에서 해군 경쟁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전쟁이 단기전이 되어야만 한다는 절박감, 사실 단기전에 대한 기대는 육군만이 아니고 민간인, 외교관, 금융가, 산업가 등이 모두 공유하던 기본 가정이었다. 왜냐하면 장기전을 경제적으로 불가능하고, 사회적으로 위험하고, 또한 군사적으로는 파국적이었기 때문이다.
이중왕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체제 안에서 자치권을 누리던 헝가리의 영토 안에는 세르비아인이나 크로아티아인 같은 남슬라브계 소수민족과 루마니아인들의 많이 거주하였는데, 이들에 대한 헝가리의 차별 정책은 대단히 가혹하여 인접한 루마니아와 세르비아와는 첨예한 긴장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다민족 국가로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왕국의 국내 정치는 바로 국제 정치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러시아가 타협적 자세를 취하게 된 데에는 독일의 외교적, 군사적 압박이 크게 작용했는데, 당시 독일의 태도에도 많은 비판이 따랐다. 즉, 퇴각하는 적에게는 타협의 여지를 주어 굴욕감을 최소화한다는 것이 외교가의 전통이었는데, 오스트리아의 요구에 러시아의 무조건적인 수락을 강요한 독일의 위협적인 자세는 그러한 규칙을 위반하는 것으로 평가된다. 실제로 러시아는 보스니아 위기를 통해 앞으로 비슷한 수모를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군사력을 보강하고 영국 및 프랑스와의 외교 관계를 강화해야만 한다는 절실한 교훈을 얻게 되었다.
보스니아 위기 사태에서 외교적 승리를 거둔 것은 분명히 오스트리아-헝가리, 독일이었다. 그러나 그 승리는 일시적인 것이었고, 장기적으로는 더 큰 패배와 희생의 밑돌이 되었다. 이들의 강압외교는 러시아는 물론 유럽의 다른 모든 나라에 실망감과 불만감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외교적 고립이라는 결과를 낳았다.
독일은 자국의 필요 때문에 오스트리아-헝가리가 러시아를 견제해 주기를 바랐고,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세르비아를 공격하는 동안 독일군이 러시아 군을 견제해주기를 바랐던 것이다. 이는 1차 대전 개전 직후 동부 전선에서의 초기의 혼란을 야기한 주된 원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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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thkang1001님도 <1차 세계대전의 기원>을 좋아합니다. thkang1001님이 읽은 다른 책이 궁금하신가요?
  • 2023-07-02 16:16 좋아요  l  좋아요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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