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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란 인간학이다!
예전에 포이어바흐의 <기독교의 본질>을 읽은 적이 있다.
<기독교의 본질>에서 포이어바흐는 기독교란 결국 인간학이며, 결코 절대적인 진리가 아니라는 걸 주장했었다. 하지만 너무 기독교에 대한 얘기만 나누다 보니 솔직히 배경지식 없이 읽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독교에 대한 지식이 없었다기보다는 저자인 포이어바흐가 생각하고 있는 '종교(기독교 포함한 다른 종교들)'란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해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었다. 기독교만이 종교라고 할 수 없지 않은가. 그런 의미에서 이번엔 기독교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종교의 본질을 다룬 <종교의 본질에 대하여>를 읽기로 결심했다. 이 책을 읽으면 종교에 대한 포이어바흐의 생각을 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들었다.


그렇게 다 읽어 본 결과, <기독교의 본질>보다 이 책을 먼저 읽을 걸 하는 아쉬움과 함께 종교에 관한 포이어바흐의 파격적인 주장이 인상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종교의 본질에 대하여>는 <기독교의 본질(1841)> 이후에 작성된 후기 포이어바흐 작품이다. 확실히 후기 작품이다 보니 이전작보다 완숙함이 느껴졌고, 이해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었으며 꽤 쉬웠다. 사실 본 책은 포이어바흐가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민주적 학생회 위원들의 초청으로 1848년 12월 1일부터 1849년 3월 2일까지 주 3회(수, 금, 토요일 저녁)에 걸쳐 시청 강당에서 진행된 강연회 때 했던 만들을 후에 편집에서 엮은 책이다. 이때 강연에는 많은 지식인들과 '노동교양회'에 속했던 노동자들이 참석해 강연을 들었다고 한다. 포이어바흐는 1850년쯤에 강연회에서 했던 연설을 비롯해 자신의 의견을 좀 더 첨부해<종교의 본질에 대하여>라는 이름으로 출판했다. 그래서일까, 앞서 내가 말했듯이 다른 작품들보다 완숙함이 느껴지고 이해하기 비교적 쉬웠다. 아마도 청강생들과 일반인들을 배려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이 책에서 포이어바흐는 <기독교의 본질>과 마찬가지로 거의 대부분의 종교들 역시 인간학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인간이 탄생하면서 종교를 가지게 된 원인과 그 이유에 대해서 하나하나 조목조목 따진다. 그가 생각하길, 인간이 종교를 가지게 된 것은 '종속감'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종속의 대상은 다름 아닌 '자연'이다. 인간은 옛날부터 자연을 두려워했으며 자신들과 달리 아무런 감정도, 아무런 목적도 없이 움직이는 이런 거대한 자연이라는 존재에 대해 두려움과 함께 경외심을 품고 이들을 이해하기 위해, 그리고 공포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종교를 만들었다고 한다. 때문에 종교의 첫 시작은 사실상 자연종교이며, 기독교 또한 이런 자연 종교적인 성격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때 포이어바흐는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고 주장하는데, 종교의 대상이 자연이었다고 해서 그것이 곧 범신론처럼 신이 곧 자연이라는 동급 의식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신이 이해할 수 없거나 자신과 전혀 다른 존재에 대해서는 '있는 그대로' 보고 인식하는 게 아니라, 어떻게든 '인간화'를 시켜 이해하려는 습성이 있기 때문이다. 즉, 인간은 자연을 자연 그 자체고 보기보다는 자연은 '인간화'시켜 그것을 이해한다는 거다. 예를 들어 이집트 신화나 그리스 로마 신화 속 신들을 보면 얼굴은 동물인데 몸은 사람이라든지, 바다의 신이니, 천둥의 신이니 해도 그 모습은 인간인 경우가 많다(심지어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는 사랑이나 질투 같은 인간적인 감정에도 따로 신을 만든다).


하지만 이렇게 인간화시킨다고 해서 그것이 자연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는 왜곡에 불과하다. 포이어바흐는 말한다. "자연종교라는 최초의 입장에서 자연이 인간의 대상이 되는 것은 현실적인 자연이 아니라 도야되지 않고 미숙한 이성, 환상, 심정이 나타나는 바와 같은 자연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왜 자연을 있는 그대로 보기보다는 자신의 생각이나 심정에 따라 보려는 걸까? 포이어바흐는 그 이유로 '인간의 한계'를 꼽는다. 아무리 인간이 다른 생물보다 똑똑하고 이성을 지니고 있다고 해도 결국 자신의 본질(생물학적 유(류)의 개념)에서 벗어날 수 없다. 자기가 경험해 보지 못하는 것에 대해선 여전히 인간은 추측만 가능하다. 더욱이 오늘날처럼 전문적인 과학이 없던 고대 사회에서는 자신과 다른 존재에 대해선 '내가 이러니까 저것도 아마 나처럼 그러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하게 되었고, 종교는 이런 상상력을 극대화시켜 두려운 자연이라는 존재를 동시에 인간화시켜 버렸다. 그래서 고대 종교들을 보면 양이나 소들을 신에게 제물로 바치는 모습이 종종 보이는데, 이것 역시 인간에게 중요한 가축이었던 양과 소를 '신들도 역시 좋아할 것이다'라는 전제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고, 이는 자연이라는 신을 고대 사람들이 인간과 마찬가지로 감정이 있고 먹고 마실 줄 아는 존재로 여겼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런데 여기서 또다른 의문이 든다. 정말 자연과 신을 인간화시켰다면 인간과 다를 바 없을 텐데 왜 이들을 숭배하게 되었을까. 이는 앞서 말했듯이 자연이 인간에게 공포심을 줬기 때문이다. 인간이 제아무리 강해도 자연재해 한 방이면 바로 골로 간다. 거기서 공포를 느낀 인간은 자연을 어떻게든 이해해 보고자 인간화시켜 이들의 '분노'를 가라앉히려고 했다. 사실 자연이 '분노'할 리가 없을 텐데도 말이다. 거기다 '아무런 목적 없이 묵묵히 자신의 일을 행하는' 자연의 모습이 인간들에게 더더욱 공포심을 줬을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그 자연의 배후에 '목적'을 가지고 있는 '신'을 만들어 세웠고, 인간 역시 자신의 삶의 목적이 있을 것이다, 라고 믿고 싶었기에 신을 숭배하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포이어바흐는 신은 곧 '인간'이라는 존재가 자신의 종에 갇혀 답답해하던 인간이 만든 것이며, 신학 역시 인간학에 불과하다는 결론을 내린다. 신은 인간 자신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포이어바흐는 위와 같은 고대 종교와 다른, 기독교만이 가지고 있는 종교성에 대해서도 폭로한다. 기독교도들은 이런 자연 종교적인 고대 종교와 자신들은 다르다고 주장한다. 포이어바흐도 이에 어느 정도 동의한다. 하지만 고대 종교보다 더 안 좋은 방식으로 변해갔다고 주장한다. 고대 종교는 자연에 종속되어 있다는 인간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고, 또 이것을 그대로 수용했다는 점에서 고대 종교인들은 솔직한 편이지만, 기독교는 여기에 한술 더 떠서 아예 인간을 '자연'에서 떼놓으려고 한다. 한 마디로 기독교는 '자연 초월적인 존재'을 추구하는데 그게 바로 '예수'와 같은 전능자와, 그가 펼치는 '구원'이라는 공식에서 찾아볼 수 있다. 대표적으로 기독교는 천국이라는, 인간이 기존에 종속되어 있던 자연적 한계를 뛰어넘는 공간을 제공한다. 그곳에는 질병도 존재하지 않으며, 고통, 슬픔, 죽음도 없다. 오직 영생뿐이다. 그런데 과연 현실에서 이게 가능할까? 위와 같은 것들은 현실에서 불가능하다. 그러나 자기보존 욕구와 자연적 한계에서 벗어나 언제까지나 살고 싶어 하는 인간의 욕망은 기독교라는 종교를 만들었고, 기독교에서는 천국과 구원이라는 방식을 통해 현세보다는 내세에 관심을 두고 현실을 내세의 행복을 위한 조건에 해당한다고 주장한다. 기독교의 반자연적인 성격은 사제들을 통해서도 볼 수 있다. 사제들은 결혼도 하지 않고 극단적인 종파의 사제들은 마을에서 멀리 떨어져 고립된 삶을 살아간다.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생물에게 반드시 필요한 후손을 만드는 생식능력과 사회적 동물이라는 인간의 자연적 본능을 거부한 채 오직 정신만 쫓는 행위인 것이다.


포이어바흐는 기독교란 자연을 초월하고픈 인간의 욕망, 즉, 자연에서 벗어나 자기보존을 하고픈 인간의 이기적인 소망을 대변하는 종교라고 주장한다. 성경에서도 보면 '인간이 타락했다'라는 이유로 야훼는 지상의 '모든 생물들을' 죽이는 홍수를 일으킨다. 인간 때문에 자연물 전체가 죽은 것이다. 고대 종교가 자연물인 신을 숭배했다면 기독교는 이런 자연물적인 신을 배척하고 오직 인간이라는 종만을 소중히 여기는 신을 탄생시켰다. 예를 들어 예수의 경우 이전의 야훼보다 더더욱 '인간적인 면모'를 가지고 있는데, 그는 사람처럼 울고 웃으며, 사랑하고 무엇보다 '어떤 죄를 지었든 자기를 용서'한다. 이것 역시 마찬가지로 어떻게든 살고픈 인간의 자기보존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이며, 자연이라는 현실에서 유리된 어떠한 존재가 너무나 괴로운 나머지 기독교적 신을 믿음으로서 자신을 긍정하고 싶을 때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기독교도들은 자신이 예수를 믿고 있다지만 실제로는 '자기 자신을 믿고 있다'.


포이어바흐가 기독교에 대해 치를 떠는 것도 이런 자연에 종속된, 어찌 보면 당연한 사실을 거부하고 오직 인간만이 위대하고 중요하다고 여기는 모습에서 기인한다. 게다가 자연을 도외시하고 인간적인 감성만 따지다 보니 현실을 제대로 직시하지 못한 채 본인의 종교적 원칙에 따라 세상을 바라보고 판단하는 등의 현실을 왜곡하는 모습이 당시 교조적 관념론자들 그 자체로 보였을 것이다.


포이어바흐는 사람들이 이런 종교에서 벗어나 진정한 인간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종교에 종속된 삶이 아닌 진정한 자신을 발견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본 책을 썼다. 기독교의 도덕을 신랄하게 비판했던 니체보다 무려 3, 40년 전에 나온 책임에도 불구하고 신에 대한 포이어바흐의 끈질긴 연구는 21세기인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흥미롭다. 개인적으로 무신론자뿐만 아니라 종교에도 관심이 있는 사람들도 읽었으면 하는 책이다. 비록 종교에 대한 비판적인 의견이 많지만 이런 쓴소리라도 있어야지 종교에서 발생하는 비이성적인 잘못들을 사전에 방지할 수 있고, 자신이 믿는 종교가 오직 인간 초월적인 부분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부분 역시 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으니 말이다. 포이어바흐의 주장들은 뒤의 마르크스와 엥겔스와 같은 사람들에게 비판받았음에도 이들 역시 포이어바흐의 주장을 어느 정도 비판적으로 수용했으니 이쪽으로도 관심이 있다면 읽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한국에서도 포이어바흐에 대한 책이 좀 더 많이 나오길 바라며 이번 리뷰를 마치겠다.
자연과 직접적인 교제 속에서만 인간은 치유되며 모든 터무니없고 초자연적이거나 반자연적인 이념과 상상을 벗어던질 수 있다.
신학에서는 성스러운 것만이 진리이지만 철학에서는 진리만이 성스럽다.
신학은 인간학이다. 종교의 대상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인간의 본질에 불과하다. 또는 인간의 신은 인간을 신격화시킨 본질에 불과하다.
기독교는 바로 태양, 달, 별, 불, 흙, 공기가 아니라 자연과 구분하여 인간의 본질을 규명해주는 힘인 의지, 오성, 의식을 신성한 힘과 본질로서 경배한다.
여러분! 당신들이 말이 완전히 맞소. 나는 나를 비난하는 자들과 조소하는 자들에게 마음 속으로 말했다. 나는 그 자체만으로 존재하고 절대적인 것으로 상상된 인간의 본질이란 하나의 난센스이며 관념론적 괴물이라는 사실을 여러분과 똑같이 또는 여러분 이상으로 더 잘 알고 있소. 그러나 인간의 전제가 되고 인간이 필연적으로 관계하며 그것 없이는 인간의 실존이나 본질을 생각할 수 없는 본질은 여러분이 말하는 신이 아니라, 바로 ‘자연에 불과하오!‘
나의 이론이나 이념은 그러므로 자연과 인간이라는 두 단어로 요약될 수 있다. 인간의 전제가 되는 본질, 인간의 원인과 근거가 되고 인간의 발생과 존속을 좌우하는 본질은 나에게 신이 아니고, 또 신으로 불리지 않으며 명백하고, 감성적이고, 이중의 의미를 지니지 않는 말과 본질인 자연이다.
나에게 무엇보다 중요했고 중요한 것은 종교의 어두운 본질을 이성의 횃불로 밝혀주어 인간으로 하여금 마침내 지금까지 그리고 오늘날에도 종교의 몽매성을 인간의 억압에 사용하고 있는 저 모든 인간에 적대적인 세력의 먹이나 노리갯감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다.
나의 강의와 저술의 목적은 다같이 인간을 신학자가 아닌 인간학자로 만들고, 신을 사랑하는 자에서 인간을 사랑하는 자로 만들고, 내세의 수험생에서 현세의 학생으로 만들고, 천상적이고 지상적인 군주제와 귀족제의 종교적 정치적 하인에서 자유롭게 자신감에 찬 지상의 시민을 만드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나는 긍정하기 위해 부정하는 것이다. 나는 인간의 참된 본질을 긍정하기 위해서 신학과 종교의 환상적이고 가상적인 본질을 거부할 뿐이다.
‘종속감‘이 종교의 근거이고 이러한 종속감의 근원적 대상이 자연이며 그러므로, 자연은 종교의 제1대상이다. 자연에 대한 공포가 처음으로 세상에 신들을 만들어냈다. 정신적으로 발달한 민족에게도 최고의 신성은 소나기, 번개, 천둥과 같은 최고도의 공포를 인간에게 일으키는 자연현상이 인격화된 것이다.
유신론이나 신학은 바로 인간을 세계와의 결합에서 분리시키고 고립시켜 자연을 넘어서는 오만한 자아나 본질로 만들고 있다. 다시 말하면 자연을 벗어나 있고 초자연적인 본질을 참되고 신성한 본질로 믿는 것과 일치된다. 그러나 종교는 근원적으로 인간이 자연이나 세게와 결합되고 일치된다는 감정을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
기독교는 이루어질 수 없는 인간의 소원을 성취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고 바로 그 때문에 이루어질 수 있는 인간의 소원을 등한시했다. 기독교는 인간에게 영생을 약속하면서 현세를 망가뜨렸고 신의 도움에 대한 신뢰를 통해서 인간 자신의 힘에 대한 신뢰를 망가뜨렸다. 또한 천상에서의 더 나은 삶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 지상에서의 더 나은 삶에 대한 믿음과 그것을 실현하려는 노력을 망가뜨렸다. 기독교는 인간에게 상상 속에서 원하는 것을 부여했지만 바로 그것 때문에 진리와 현실 속에서 인간이 요구하고 원하는 것을 부여하지 못했다.
신이란 추상화되고, 환상적인, 상상력을 통해서 독자화된 인간과 자연의 본질에 불과하다. 유신론은 그러므로 사물과 인간의 구체적인 삶과 본질을 단순한 사유상의 환상적인 본질을 위해 희생한다. 무신론은 이에 반해 구체적인 삶과 본질을 위해 사유상의 환상적인 본질을 희생한다. 무신론은 그러므로 적극적이고 긍정적이다. 무신론은 유신론이 자연과 인류에게서 박탈해간 의미와 존엄성을 자연과 인류에게 되돌려준다. 무신론은 유신론이 최상의 힘을 흡수해가버린 자연과 인간에 생기를 불어넣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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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겨울호랑이님도 <종교의 본질에 대하여>를 재미있게 보고 리뷰를 남기셨네요. 리뷰를 읽어보시겠어요?
  • 2023-09-11 18:44 좋아요  l  좋아요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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