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험난한 삶을 이해하는 솔직 담백한 생활철학!
독일 철학자 '아르투어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 1788년 2월 22일 ~ 1860년 9월 21일)'는 흔히 '염세주의 철학자'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여기서 염세주의(厭世主義)란 인생은 물론 세계 전체를 추악하고 괴로운 것으로 바라보며, 이에 따른 진보나 개선이 불가능하다고 보는 태도이자 사상이다. 다른 말로 '페시미즘(pessimism)'이라고도 하는데, 거칠게 표현하자면 세상은 곧 거지 같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무척 부정적인 주의로 보이는데, 실제로도 염세주의 철학에 대해 너무 비관적이다고 비판하는 사람이 많다. 특히 염세주의 철학의 대표 주자인 쇼펜하우어의 철학에 대해서도 그러한 비난을 가하는 자가 있다. 하지만 쇼펜하우어의 책을 읽어 본 나로서는 전혀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다. 물론 비관적인 부분도 있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쇼펜하우어 철학 자체가 비판자들이 말한 것처럼 마냥 비관적이고 부정적인 철학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삶에 대해 헛된 희망을 품게 하는 다른 철학에 비해 솔직한 편이랄까. 내가 생각하기에 부조리한 세상을 향해 거침없이 독설을 날리는 그의 염세철학은 현실에 안주하고 있거나 혹은 원인을 알 수 없는 괴로움에 고통받고 있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철학이라고 본다.

이 책은 총 세 종류의 쇼펜하우어의 저서가 수록되어 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저서는(<인생을 생각하다> / <삶의 예지>) 쇼펜하우어의 인생철학이 들어간 책이고, 마지막 세 번째 저서는 쇼펜하우어의 철학이 담겨 있는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라는 책이다. 나는 아직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이해하기엔 실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일단 그의 인생철학이 담긴 두 권의 저서만 읽기로 했다. <인생을 생각하다>는 쇼펜하우어의 인생론으로 자주 거론되는 책이다. 이 책에서 쇼펜하우어는 인생이란 곧 괴로움이라고 말한다. 왜일까? 그건 우리 인간에게 '의지'가 있기 때문이다. 이 의지는 '~을 할 것이다!'라고 다짐한다는 그런 단순한 의미가 아니다. 의지는 우리에게 세상 모든 것을 뛰어넘도록 요구하는 정신으로, 끊임없는 욕망과도 비슷한 것이다.


쇼펜하우어가 세상을 끔찍한 것으로 바라본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인간에겐 끝없는 의지가 있고, 그 의지는 항상 외부의 것과 마찰을 일으키기 때문에 인간은 불행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사람이란 자고로 자기 바로 옆에 있는 건 소중히 여길 줄 모르면서 막상 그것이 사라지면 슬퍼하듯이, 인간은 행복이 아닌 고통에 더 적극적으로 반응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이기적이고, 자신의 의지에 따라 행동하려 하기 때문에 이와 무관하게 움직이는 바깥 것들에 대해 대부분 실망하기 마련이다.


이렇듯 쇼펜하우어는 삶이 괴로운 이유가 의지 때문임을 깨달았다. 그에게 있어 삶이란 의지라는 이름의 욕망의 반복임을 알았고, 많은 사람들이 추구하는 삶의 행복과 사상들 역시 어디까지나 자기 본위에 의한 것임을 알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행위는 결국 괴로움으로 이어진다. 이때의 괴로움은 반드시 고통스러운 표정과 행위를 통해서만 표현되는 게 아니라 권태로도 나타난다고 쇼펜하우어는 말한다. 즉, 세상 사람들이 하는 여러 활동들, 예를 들어 여행이라든지 사교모임, 그 밖의 온갖 여가 행위들도 겉으로는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 같지만 실제로 보면 그러한 행위를 하는 동기는 결국 삶을 살아가면서 느끼는 권태로움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이들에겐 지성보다 의지가 더 강하므로, 즉 욕망이 강하기 때문에 어쩌다 찾아오는 휴식기, 그러니까 권태가 찾아오면 의지가 사라지는 것이 두려워 이리저리 돌아다닌다. 의지라는 목적에 너무나 길들여진 나머지 의지가 없는 상황을 견디지 못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보면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이 세상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말이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쇼펜하우어의 철학이 살을 포기하라고 말하는 건 아니다. 반대로 쇼펜하우어는 어차피 이렇게 주어진 삶에 대해 마냥 불평하기보다 좀 더 너그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라고 조언한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 의지의 노예이고, 불행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쇼펜하우어 특유의 '동정심'이 나타난다.


쇼펜하우어는 동정이야말로 참된 가치라 봤다. 우리가 큰 불행에 처한 타인을 볼 때 동정심이 드는 이유는 뭘까. 단순히 불쌍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지만 그 사람이 처한 상황이 왠지 남일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일 것이다. '나도 저 사람처럼 절망했을 때가 있었지...'라고 말이다. 이렇듯 쇼펜하우어는 이 '고통'이라는 공통분모를 통해 함께 살아갈 수 있다고 보았다. 쇼펜하우어가 염세주의 철학자이지만 그럼에도 마냥 삶을 부정한 철학자가 아니라는 말이 바로 여기서 나온다. 그에게 있어 용기 있는 자, 진정한 천재는 이 고통스러운 삶을 제 손으로 끝내버리거나 끊임없이 불평하는 자가 아니라 오히려 너그러움과 끈기를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는 자이다. 삶이 허무하다는 걸 인식하고 의지의 거침없는 욕망을 절제하며 살아갈 줄 알아야 한다.


흔히 빛이 있는 곳에 어둠이 있다고들 말한다. 분명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어둡다. 하지만 이러한 철학이 없었다면 반대로 밝은 철학 역시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더욱이 쇼펜하우어에게 있어 진정한 철학이란 저 높이 있는 관념적인 것이 아닌 자신의 삶에 적용할 수 있는 그런 철학이었다. 예를 들어 건강한 정신을 위해서는 건강한 신체가 필요하다며 운동과 수면의 중요성을 주장한 것이 대표적이다. 훗날 그가 니체를 비롯해 '생철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물론 쇼펜하우어에게도 한계는 있다. 여성에 대한 차별적인 인식과 너무 자기 고독적, 자기 고립적인 부분이 그렇다. 그럼에도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앞서 말했듯이 인생의 어두운 부분을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또 현실적인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는 점, 기꺼이 심연을 자처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거침없는 말빨과 따끔한 조언을 듣고 싶다면 이 책을 추천드린다!
우리가 살아가는 직접적인 목적은 괴로움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이유를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삶에 따르는 괴로움과 세상에 가득한 걱정과 근심이 우연히 일어나는 것이며 삶의 목적 자체가 아니라고 여기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특수한 개별적인 불행은 예외로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세상은 어디까지나 불행으로 가득 차 있다.
인간이나 동물의 세계에서 의지라는 장애물이 없다면, 삶을 의식하지 못하고 생명을 느끼지도 못한 채 그냥 흘러갈 것이다. 우리가 어떤 것에 주목하고 또 의식하는 것은 우리의 의지가 어떤 장애를 받아 충돌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의지를 방해하는 것, 의지를 가로막거나 대적하는 것, 다시 말해 싫증을 일으키거나 고통을 주는 것은 바로 느낀다. 다시 말해, 평안과 행복은 우리에게 소극적인 역할을 하고 괴로움은 적극적인 역할을 한다.
인간은 누구를 막론하고 세계의 중심에 자신을 놓고 모든 것을 자기와 결부시켜 생각한다. 작은 일에서 큰일에 이르기까지, 심지어 국가의 파멸까지도 자기와의 이해관계에서 계산해 본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기만이 참된 존재이고 남들은 단지 그림이나 초상 같은 것으로 보고 있으니 얼마나 가소로운 일인가.

​개인과 그 모습, 그 일생은 오직 자연의 무수한 영혼과 집요하고 완고히 살려는 의지가 갖는 개별적인 허망한 꿈이요, 시간과 공간이라는 무한한 백지 위에 의지가 그려놓고 희롱하는 한때의 그림이다. 그것은 눈이 아플 만큼 짧은 순간에 사라져버리며 그 뒤에 다시 다른 그림이 그려진다.
살아서 괴로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은 다 자기 인척이 되고, 사물의 본질, 끊임없는 유전, 헛된 노력, 마음의 불안, 그리고 사라지지 않는 괴로움을 통찰한다. 어디를 둘러보나 괴로움에 가득 찬 인간과 괴로워하는 동물, 끊임없이 열망하고 사라지는 삼라만상을 목격하고, 이기주의자가 자기에게만 집착하는 것처럼 그는 자신을 세계의 고뇌에 밀착시킨다.
동정은 신비롭고 놀라운 것으로, 이성적인 눈으로 보면 인간과 인간 사이에 엄연히 경계가 있으나 동정의 눈으로 보면 이 경계선이 허물어져 나 아닌 남이 참된 의미의 ‘나‘로 간주되며 자발적인 정의와 순수한 자선은 이 동정을 유일하고 진실한 토대로 삼고 있다. 선망은 자기와 타인 사이에 놓인 장벽을 높이고 견고히 할 뿐이지만, 동정은 그 장벽을 한층 낮게 만들고 투명하게 할 뿐 아니라 때로 그것을 뿌리째 뽑아버리기도 한다. 이렇게 되면 자타의 구별이 완전히 사라진다.
인생 자체는 결코 비겁해지거나 두려워해질 정도로 고약하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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