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의 문제는 교사탓인가
우리는 이 나라의 시민으로서 공권력의 무능을 탓한다. 치안이 불안하면 경찰의 탓을, 판결이 엉망이면 사법부 탓을, 정치가 엉망이면 정치인 탓을 한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교육도 엉망이기에 교사와 학교 탓을 한다. 해당분야에 무능함이 있다면 그건 그 부분의 구성원 문제이기도 하며 또한 구조적 문제일 수 도 있다. 교육의 실패는 무엇 때문일까?
정답은 아마도 둘다 일 것이다. 교사와 그들을 둘러싼 교육계의 구조 둘다 문제인 것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한국의 시민들은 주로 교사를 탓한다. 다른 분야에 비해 교육계에 대한 비판에서 구조탓을 하는 것은 좀처럼 보질 못했다. 왜 일까? 아마도 우리가 모두 자라나면서 잘못된 교사를 한번쯤은 보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누구나 한번 쯤 부당한 대우를 당했고, 언어폭력을 당했으며, 신체폭력을 경험하고, 혹은 성폭력에 비리도 보았기 때문이다. 거기에 외환 위기 이후 전체적으로 어려워진 고용시장에서 교사들이 공직이기에 예전의 위치를 지킬수 있었다는 것에 대한 상대적 박탈감,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와 내 자식이 교육에서 실패한 경험때문 일 것이다.
그런데 이중 다른 건 그렇다 치더라도 잘못된 교사에 대한 추억은 온당치 못한 면이 있다. 위에 언급한 우리가 한번쯤 경험한 나쁜 교사는 사실 70-90년대 근무한 교사로 교직 정년이 62세인걸 감안하면 2-30년이 지난지금 대부분 끝물이거나 정년퇴임한 시점이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가 지금 만나고 비판하는 교사들을 우리와 같은 피해자들이 자라나 교사가 된 사람들이다. 그리고 교직은 오랜 자정노력과 김영란 법등으로 촌지나 각종 비리로부터 상당히 투명해졌으며 학생을 대상으로 한 각종 폭력도 거의 사라졌다. 물론 일부 사립학교를 제외한다면 말이다. 거기에 교대의 입학 점수는 1등급이 아니면 노려볼 수 없을 정도이며 중등교사의 임용고시 경쟁률은 그야말로 점입가경이다. 단순 점수로만 따지면 역대최고, 혹은 지구상 최고의 학력집단을 교육계에 투입한 셈인데. 그 효과를 좀체 체감할수 없는 것이다. 그 원인을 따지고 오늘날 교사가 이처럼 불신 집단이 된 것에 대해 다룬게 이 책이다. 설이 길었지만 본론을 따져보자.
교사 권리는 없고 의무만 무한한 집단
사실 한국사회에서 교사만큼 사회적 위치가 급변한 집단도 찾기 힘들다. 시골 마을에 교사가 발령나면 지역 유지가 나와 맞절하며 감사와 존경을 표하던 시절에서 지금은 학부모가 자신의 아이앞에서 선생의 욕을 대놓고 하는 시점이 왔다. 이는 민원이 중시되며 일어난 일이다. 과거 군과 관이 중시되는 독재, 권위주의 정권에서 사람들은 관과 군에 시달려 왔다. 문민정부 들어 이것을 해체하고자 군관민을 민관군으로 격을 바꾸었고, 이 때부터 관에서는 민원을 최우선시하게 되었다. 이는 현재의 학교도 마찬가지여서 학교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학부모의 민원이다.
민원을 우선시 하는 것은 시민의 권리와 복지를 증진시키는 좋은 점이 있었지만 현재는 부작용도 많이 나타나고 있다. 합리적이지 못한 사유나 근거없는 민원, 악의성 민원을 공공기관이나 학교에서 거부하지 못함으써 소모적 소송에 시달리거나 업무에 심대한 지장을 초래할 정도의 타격을 입고 있는 것이다.
책에 등장하는 예로 한 아이가 주말에 교통사고를 당했다. 격분한 학부모는 분노의 배출구로 학교의 교통지도를 문제삼았고, 학교와 교사가 아이의 교통지도를 잘 하지 못해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취지로 소송을 걸어 패소할때까지 무려 3년간 학교와 교사를 괴롭혔다. 아마 해당 학교의 교장과 담임교사는 3년간 제대로 업무와 교육을 하지 못했을 것이 분명하며 이는 필시 다른 아이들에 대한 피해로 이어졌을 것이다. 사례는 이뿐만이 아니다. 하여튼 현재 법원의 판결 경향과 사회적 시선은 사실상 학교와 교사에 아이들에 대한 무한 책임을 요구한다.
문제는 이 책임을 주로 교육이 아닌 주로 안전이나 다른 부분에서 따진다는 것이다. 어떤 학부모도 아이가 성적이 부진하거나 제대로 발달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학교에 책임을 묻지 않는다. 희안하게 이건 자기들 책임이라고 제대로 생각한다. 오히려 학교에서 다치거나 폭력사건이 일어나거나 하는 일에 격분한다. 이상한 일이다. 학교는 교육기관이지 보육시설이거나 안전보장기관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학교와 교사는 이 분야의 전문기관이 아니기에 이 부분에 취약하다. 사실 한국만큼 아이의 모든 안전과 보호에 학교에 무한책임을 묻는 곳은 없다.
이처럼 학교와 교사에 대한 교육외적인 부분에 대한 무한 책임의 요구는 교육의 저하를 불러온다. 다소 어처구니 없게도 교육과 안전은 반비례한다. 안전과 그에 대한 책임을 강하게 요구할수록 교사와 학교는 교육활동에서 극도로 위축되며 면피성 문서 작성과 메뉴얼에 집착한다. 이는 상당한 시간과 에너지를 요구하는 일이다. 사회와 정부는 이런 요구를 하면서도 인력 충원과 지원은 없고 업무만 주기에 결국 교육에 투입될 자원이 소모된다. 이는 공교육의 저하와 자연스레 연결된다.
일부 학부모의 태도도 상당히 문제다. 시장에도 블랙컨슈머가 있는 것처럼 학교에도 블랙학부모가 있다. 이들은 학교나 교사가 민원의 을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자신의 감정배출구나 하수구로 이용한다. 갖은 트집으로 악의성 민원을 걸고, 담임교체를 요구한다. 문제는 교육기관이 이를 합리적으로 대응하지 않아도 되는 제도가 없다는 것이다. 때문에 학교는 대표성이 전혀 없는 이들의 의견을 수용하고 흔들리느라 에너지를 소모하고 이 역시 다른 학생들에 대한 피해로 이어진다. 학교의 관리자 역시 보신주의로 어처구니 없는 학부모의 민원에 담임교사를 사과시키거나 오히려 학부모의 편을 들어 문제를 진화시키려 한다. 당연히 이런 학교와 교장 교감의 태도는 블랙학부모의 강화제로 작용한다. 남을 괴롭힐 수 있는 권력의 맛을 보게 되는 것이다.
개선 방안은 무엇일까
저자는 교사가 우선 정신을 차릴 것을 종용한다. 합리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교육법을 알고, 전문성을 키워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교육집단이기에 교사는 이 부분에 취약하다. 그리고 교사들로 하여금 집단적으로 교육정책에 참여할 것을 요구한다. 다른 어떤 분야와도 다르게 교육계의 최상위에는 교사가 없다. 경찰청의 최상위에도, 소방재청의 최상위에도 경찰과 소방관이 있음에도 말이다. 어처구니 없게도 교육계의 최상위에는 행정관료와 교수들이 있다. 마치 경찰청의 최상위에 다른 일반 행정직과 경찰행정학과 교수가 있는 격이다. 이렇다 보니 교육부와 상급기관에서 양산하는 정책이 현장과 동떨어져 교육성이 떨어지고 무리한 요구가 된다. 지난 수십년간 하향식 교육정책은 수백조의 예산을 써오고도 어느 것 하나 성공한 바 없다는 것은 이를 반증한다.
그리고 교사 집단의 세분화도 요구한다. 이미 한국은 인구와 감소화로 과밀학급이니 콩나물 교실은 옛말이 되었다. 인구감소로 정부가 어떤 노력을 하지 않았음에도 OECD대비 교사 1인당 학생수가 선진권으로 접어든 것이다. 이는 갈수로 심화 될 것이 뻔하다. 때문에 교사의 증원없이도 교사들의 세분화가 가능하다. 모두 수업하는 교사에서 생활전문교사, 수업교사, 교무기획으로 업무를 담당하는 교사로 세분화 하자는 것이다. 실제로 대부분의 외국에서는 교사는 수업만 하며 생활지도는 관리자나 전문상당교사나 경찰관이, 안전은 다른 기관에서 책임져준다. 이 같은 지원을 기대하기 어렵다면 향후 잉여가 생길 교사집단을 세분화 하자는 것이다. 실제로 수업보다는 행정업무를, 그리고 아이들을 대하는 것에 어려움을 겪는 교사가 있기에 이 같은 분업화는 생각보다 성공적일 수 도 있다.
학부모의 변화도 요구된다. 학교와 교사를 자신의 감정 배출구이자 하수구로 이용하는 것을 멈추고 교육3주체의 하나로서 책무를 다해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학교에서 학교폭력 사건이 벌어지면 가해자의 학부모는 처벌에 불만을 느끼고 소송을 걸기만 할 뿐 가장 책무자임에도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는다. 이에 대한 변화가 필요한 것이다.
이 책의 제목은 교사 집단에 대한 비판서처럼 여겨졌지만 실상은 대변서나 발전서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물론 비판도 강하게 하는 면이 있다. 이것은 저자가 지금 학교교육의 실패와 원인을 결국은 교사보다는 그들이 교육에 집중하지 못하게 하는 사회와 정부에서 찾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학부모나 교사, 일반 시민이라도 읽어볼 만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추천한다.
공교육, 교사불신, 홍섭근, 혁신학교, 학교폭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