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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을 낮추는 데는 성공했지만
흥미로운 내용의 책인데, 그 중에서도 가장 흥미로운 건 저자의 이력이다. 수년 동안 가정교회의 리더였고, 한 때는 술집에서 모임을 갖는 대안교회의 목회자였으며, 현재는 성공회 사제로 사역을 하고 있다고 한다. 그 중에서도 역시 눈에 들어오는 건 ‘펍’에서 다양한 종류의 회중과 만났다는 부분인데, 그가 ‘전형적인 목회자’와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음을 짐작케 한다.


그의 회중은 ‘전형적인지 않은 사람들’로 채워져만 있는 것 같다(물론 꼭 그렇기만 한 것은 아닐 것이다). 스스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동성애자들(꽤 자주 등장하는 사례다), 약에 빠져있고, 사회의 정규적인 코스에서 벗어나 있는 이들이 그의 주변으로 모여든다. 문득 우리가 이들의 모습을 보고 뭔가 불편함을 느낀다면, 그건 정확히 예수님 곁에 있는 사람들을 보고 불평했던 바리새인들의 모습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저자는 벽을 낮추고, 사람들이 그들의 영혼 속 빈자리를 채울 수 있는 예수님을 소개한다. 저마다의 사정을 가지고 있는 이들은 그렇게 조금은 다른 교회에서 새로운 길을 발견한다. 아름다운 스토리다. 여기까지는.



교조주의에 빠진 기성 교회들에 대한 비판(솔직히 말하면 요새는 그나마 ‘교리’에 대한 관심조차 적어진 게 사실일 것이다), 자기들만 생각한다는 지적, 자신들과 다른 사람들에 대한 배척 등 책에서 비판하는 요소들에 공감한다. 이런 것들은 애초의 교회가 가지고 있던 역동성과 생명력을 희미해지게 만드는 요소다. 이런 것들에 대한 의심은 문제가 아니라 건강한 신앙생활을 위해 꼭 필요한 부분이다.


하지만 그런 것들을 깨고 저자가 새롭게 세워가려고 하는 게 ‘교회’가 맞는지는 살짝 의문이다. 저자가 이 책에서 설파하고 있는 ‘복음’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는 것, 자존감을 회복시키는 것, 자신에 감정에 충실해지는 것, 이성보다는 직감에 따라 종교를 찾는 것(이건 저자의 표현이다)이다.

물론 저자는 몇 번에 걸쳐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고백한다. 이 고백이 거짓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의 신앙이 어떤지는 내가 판단할 수 있는 일는 아니니까. 다만 그가 이 책을 통해 제시했던 기독교에 관한 그림이 과연 충분한가 하는 의문은 별개의 문제다. 책 전체에 걸쳐서 그가 제안하는 ‘종교’는 C. S. 루이스가 말했던 ‘물 탄 기독교’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저자가 생각하고 있는 기독교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단지 위안을 주는 멘토 그 이상으로 비춰지지 않는다. 그는 아무 것도 하라고 명령하거나, 기준을 제시하거나, 잘못을 지적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에게 나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괜찮다’라는 말만 반복하는 인물이다. 개인적으로는 그 자리에 요즘 유행하는 대중적인 심리상담가가 있어도 크게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을 것 같다.



예수의 정체나 그의 사역과 전혀 상관없이 우리는 기독교인이 될 수 있을까? 그에게서 역사성이라는 맥락을 제거해버리고 누구나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부드러움’만 남기려는 시도는 ‘기독교가 아닌’ 무엇을 만드는 건 아닐까? 복음서 속 예수의 모습은 때로 분노하고, 엄격한 기준을 제시하기도 하고, 저주와 징계를 다짐하고 예언하기도 한다. 그분은 실제 존재했던 분이기에, 2천 년 후 어떤 사람들이 불편한 부분을 제거하고 남긴 모양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이런 입장을 유지하려다 보니 회개에 관한 이해는 크게 달라져 버린다. 저자는 회개의 본래 의미가 ‘사고의 폭을 넓히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자신에 대한 좀 더 긍정적인 이미지를 갖게 되는 것도 회개라고 말한다. 이 정도의 단어 의미의 오용이 이루어지면, 우리는 아무 말이나 할 수 있게 된다. 저주라는 말은, 실은 상대가 잘 되기를 바라는 소망이고, 미움이라는 말은 특정한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에 만족한다는 의미고 하는 식으로.


그리고 논리적 귀결로 자연스럽게 ‘구원’에 관한 내용은 책 자체에서 다뤄지지 않는다. 심지어 이 책이 ‘크리스천’을 다루고 있음에도 말이다. 구원이 갖는 심리적 차원에서의 효과는 넌지시 비취긴 하지만, 단지 그게 전부일까?



그간 ‘하나님이 배제했다’고 여기던 이들이 실은 ‘교회가 배제한 것’임을 보여주었다는 면에서 저자의 수고는 충분히 인정해야 한다. 기성교회는 어느 순간 너무 높은 벽을 세워두고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펍이든, 호프집이든, 맥도널드 한 구석이든, 교회가 모일 수 있는 자리로서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애초에 벽이 세워지기 시작했던 맥락을 잊어버린다면, 우리는 그렇게 벽이 사라진 자리에 온갖 종류의 잡초들이 자라는 것을 곧 목격하게 될 것이다. 벽을 낮추는 건, 그 벽으로 보호하고자 했던 내용을 충분히 지킬 수 있을 때 하는 일이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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