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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착각
이 글의 저자인 이진우 교수는 1956년 경기도 화성에서 태어나 연세대 독어독문과를 졸업합니다. 이후 독일 아우크스부르크 대학에서 철학으로 석사 및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1989년부터 계명대학교 철학과 교수를 역임했는데요. 그는 2005년에 국무총리실산하 인문정책위원을 지냈고, 한국니체학회 회장과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위원으로도 활동했습니다. 2010년부터는 포항공과대학의 인문사회과학부 석좌교수로 자리를 옮겼고, 같은 대학의 인문사회과학부 학부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그의 논저들 가운데, '한국 인문학의 서양 콤플렉스'와 '지상으로 내려온 철학' 등을 접했는데요. 저자에 대해선 학자로서, 꽤나 스스로에게 자신감이 있는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이와는 별개로, 그는 요즘 여러 방송 강의에도 출연해 대중들을 위한 철학 강의에도 매진하고 있는 중입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지난 22년 7월 출간되었습니다.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에 앞서, 이진우 교수와 같은 정치철학자가 현실 정치나 왜곡된 정치 상황에 대해 소신껏 말을 해야 하는가, 혹은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양심의 문제로 국한해야 되는지, 아마도 여러 의견이 있을 것이라 짐작됩니다. 일찍이 막스 베버가 깊이 탐구한 정치철학을 그저 학문의 한 분야 정도로 취급해야 되는지 아니면 현실 정치와 우리가 추구하는 정치적 이상을 위해, 다각도로 연구하는 실질적인 학문이 되어야 하는지는 현실 상황과 맞물려 생각해 볼 수 있을 텐데요. 저는 학자들이 스스로 갖고 있는 정치적 지향을 차치하고 그저 기계적 중립을 외피로 두르는 것이 과연 옳은 태도인가에 대해 지극히 회의적인 감정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이진우 교수의 이 책은 여러모로 우리에게 생각할 꺼리들을 안겨준다고 생각합니다.

소위 우크라이나에 대한 푸틴의 야욕 내지는 저자가 분석한 러시아의 노골적인 '유라시아주의'를 비평하기에 앞서, 논증 가운데 한 가지 흥미로웠던 부분은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기존과는 다른 해석이었습니다. 즉 지금의 전통적 연대기는 더 이상 유용하지 않다는 관점과 함께, "2차 대전은 1930년대 초 중국에서 시작되어 1945년 이후 10년 만에 중국, 동남아시아, 동유럽 및 중동에서 끝났다"고 저자는 이처럼 단언하고 있었는데요. 뒤이어 중국의 경제적 대두와 미국의 전세계 패권에 도전하는 '강고한 민족주의적 체제 중국'의 시작은 기존과는 상이한 '1979년'으로 보고 있었는데요. 이 시기의 중국은 덩샤오핑의 개혁개방과 이란 팔레비 왕조의 붕괴, 독일과 일본의 변화 및 미국 주도 아래의 서구 통합 등이 서로 맞물려, 소위 '중국의 시간'에 매우 유리한 환경이 조성되었다고 저자는 보는 듯 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과거 오바마 행정부의 '아시아로의 회귀 pivot to Asia'라는 정치적 선언은 중국의 폭발적인 경제 성장과 더불어 마련된 중국의 국력이 지속적으로 증대됨에 따라, 세계의 중심이 유럽에서 아시아로 향하게 된 결정적인 사건이기도 할 텐데요. 바로 오늘날 중국의 토대가 되었던 이런 일련의 사건들이 블라드미르 푸틴에게 어떠한 의미가 되었는지 고찰해 보는 것이 아마도 '우크라이나에 대한 제한적인 군사작전'이 시행된 그 이면의 감춰진 이유를 어느 정도 짐작해 볼 수 있을 겁니다.

먼저, 저자의 이 책은 러시아의 푸틴이 서방 세계와 이론과 현실적인 측면에서 적극적으로 분리되고자 하는 의도를 차분히 분석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푸틴이 강조하는 '유라시아주의'는 바로 그런 맥락으로 읽혔습니다. 유럽인이 아닌 러시아인, 아시아인이 아닌 러시아인이라는 관념은 자신들을 유럽이 아닌 '유라시아 대륙의 중심'이라는 정체성을 강화하고, 이러한 질서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우크라이나를 응징한 결과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즉,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역사적 관계를 크게 왜곡한 푸틴의 그 문제의 논문도 그렇거니와, 우크라이나의 독립은 러시아인들이 허락했기에 가능했다는 식의 서사로도 왜곡될 수 있습니다. 구소련이 미국과 유럽에 의해 붕괴되었기에 우크라이나가 러시아로부터 떨어져 나갔다는 일방적인 인식론에 러시아인들의 이성이 마비될 수도 있는 것인데요. 물론 러시아인들 대부분이 이런 민족적 광기에 휩싸여 푸틴에게 전쟁을 요구한 것은 분명 아닐 겁니다. '마더 러시아'라는 허황된 꿈과 자신의 지속가능한 정치적 이익에 함몰된 푸틴이 바로 그러한 결정을 내린 것인데요. 일전에 '푸틴 치하의 러시아'라고 러시아 정치를 분석한 독일 언론인인 후베르트 자이펠의 인식은 이처럼 명확했다고 여겨집니다.

저자의 여러 논증들 가운데 개인적으로 주의 깊게 봤던 부분은 "자유주의 대 민족주의"라는 흡사 대결 구도 논리였습니다. 이것을 무슨 신념처럼 맹신할 필요는 없지만 중국과 러시아의 민족주의적 오판 가능성을 여기에 대입해 보면 충분히 설득력이 있었는데요. 푸틴이 우크라이나 침공에 앞서, 시진핑에게 의견을 구했던 것은 좀 더 다른 각도로 살펴보면, 이들의 정치적 지향과 국가 운영 논리가 서로 유사하다는 측면이 있다는 점을 이해할 수 있는데요. 단순히 핵보유국과 비핵국가 간의 전쟁이 아니라, 주도적으로 민족주의를 이용하고 있는 푸틴을 고려해 본다면, 이는 단순한 대결 구도가 아니라 정말 전세계를 전쟁의 참화로 몰고 갈 수도 있는 현실의 심각한 불확실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핵전쟁의 후과가 결코 승리나 패전 따위가 아님을 명백히 인식하고 있다면 그것은 인류의 궤멸이라고 볼 수 있을 텐데요. 민족주의는 바로 이점을 저울질한다는 측면에서 상당히 큰 문제로 여겨집니다. 많은 정치철학자들이 강조하는 정치가 추구하는 것이 고도의 이성적 행위에 기반한 어떤 결과물이라면, 특히 국제정치에서는 이렇게 비이성적이고 극단적인 대결과 파국이 일어날 수 있다는 점에서 단순히 세계화 수준의 개방적 환경이 일차적인 평화 조성의 만능 키가 될 수 없다는 점도 거의 명확해 보입니다.

끝으로 저자가 어느 정도 논증에서 인정하는 바와 같이, 자유주의와 그것과 버금가는 상대적 도덕주의가 결합되었을 때, 전세계 평화와 질서에 상당히 해가 될 수 있다는 맥락의 이해는 깊이 공감할 수밖에 없었는데요. 자유민주주의라는 가치는 우리에게 충분히 중요하고 사활적인 문제이지만 일부 권위주의 국가들의 현실 정치를 어떻게 부분적 자유화 내지는 정치 권력의 교체로 나아갈 수 있겠는가를 모색하는 것 자체가 파국의 단초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됩니다. 물론 단일한 시장 전체주의를 기반으로 물건이나 사고팔고 경제 금융 거래만 제한없이 이뤄지는 '극한의 자유화' 또한 지속적인 평화의 조건이 될 수 없는 점도 거의 명백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마치 신자유주의처럼 어디에서든 전쟁이라도 벌어진다면 그것대로 기업의 이익이 될 수 있다는 식의 논리는 이성적 해결의 원칙과도 근본적으로 대치되는 것인데요. 바로 이러한 구조 속에 정치철학이 어떤 목소리를 내야하는 것은 거의 분명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지오바니 아리기의 의견대로 중국이나 러시아가 지배하는 세계 질서는 자유민주주의를 경험한 많은 국가들에게 재앙이 될 가능성이 높을 겁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이러한 '푸틴 치하의 러시아'가 인류를 절멸시키고도 남을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기에, 이 유라시아주의 국가에 대한 면밀한 제어와 통제가 필요한 것도 사실인데요. 그런 의미에서 작금의 서구 자유주의 국가들이 비상한 정치적 해법을 도출해 낼 수 있을지는 지금으로선 극히 회의적이라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마치 이것은 저자의 비교처럼 칸트와 헤겔을 넘어서는 현실적이고 이성적인 접근이 시급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 우크라이나 전쟁을 통해 인류가 절멸에 이르는 것을 그저 바라 보고만 있을 것이 아니라면 말입니다.

- 오늘날 세계 질서를 만든 미국과 서구 유럽에 대한 비판도 이 책에 담겨 있어, 자유민주주의가 갖는 진정한 함의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볼 수 있었는데요. 그런 의미에서 저자가 언급한 '도덕적 상대주의'라는 의미는 꽤나 오래도록 기억될 것 같습니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어떻게 끝나든지 ‘지정학적 대분기‘를 야기할 것임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20세기 중반 유럽 대륙의 중앙부에서 나치독일과 소비에트러시아는 약 1,400만 명의 사람을 살육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자유민주주의 질서에 대한 가장 커다란 위협은 중국과 러시아다.
전쟁은 국가를 만들고, 국가는 평화를 만든다. 이는 강력한 국가가 없었다면 살인과 가난, 무지가 일상생활의 규칙처럼 되었을 것이라는 홉스의 입장을 반영한다.
칸트가 이상적으로 그리는 ‘영원한 평화‘는 이성에 의해 자유가 완전히 실현된 상태다.
우리는 지금 영원한 평화의 시대에 살고 있는가? 아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영원한 평화가 가능한 시대에 살고 있다.
민주주의가 전통적으로 중우정치와 민중의 독재를 함축하는 까닭에 칸트는 민주주의보다는 공화주의라는 용어를 선호한다.
공화주의에 기반한 ‘시민법 ius civitratis‘, 국가 간 민주적 관계를 규정한 ‘국제법 ius gentium‘, 그리고 환대와 우호에 기반한 ‘세계 시민법 ius cosmopoliticum‘은 영원한 평화의 조건이며 기반이다.
프랑스대혁명을 계기로 우리는 오늘날 모든 사람이 자유롭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인류의 역사 전체가 자유의 이념을 실현하는 과정이라면, 이러한 과정을 진행하는 주체는 "세계정신"이다.
칸트가 영원한 평화를 제창하지만 전쟁을 부정하지 않는 것처럼, 헤겔은 전쟁의 의미를 강조하면서도 평화가 역사의 목적이라는 점을 망각하지 않는다.
전쟁의 폭력적 행위마저 어떻게 해서든 도덕적으로 통제하려는 이상주의의 관점 역시 전쟁의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전쟁의 위험이 긴박한 상황에서 런던과 베를린, 그리고 베를린과 모스크바 사이에 소위 ‘투디키데스의 함정‘이라는 구조적 역학이 작용했을 수 있다.
유럽연합과 나토의 확장 자체가 평화 지역의 확장이라는 생각은 자유민주주의의 오만이다.
자유주의 국가들이 그 나라의 내정에 간섭해야 한다는 강력한 동기를 제공한다고 보는 것이 바로 도덕적 보편주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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