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포스팅에서 건축 요소 중 벽, 창문, 기둥에 대해 살펴보았고, 오늘은 지붕, 길, 다리에 대해 살펴본다.

읽으면서 들었던 생각은 건축 요소의 종류를 불문하고, 모든 건축물들은 환경과 기술의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었다. 중력같은 물리적인 힘이나 지형같은 자연 환경을 극복하는 과정 속에서 다양한 건축 기법들이 개발되고 진화해왔음을 보게 된다. 또한 기술의 발전이 좀 더 나은 건축 재료의 사용을 가능하게 하여 좀 더 효율적이고 규모가 큰 건축물을 만들 수 있는 기틀을 제공하는 것들을 보면서, 저자가 책에서 언급하는 생명체의 진화과정이 건축분야에서도 별반 다르지 않게 적용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저자가 이러한 과정들을 설명하고 이야기로 풀어내기 위해 사용한 적절한 비유들이 일반인들에게 비교적 생소할 수 있는 건축이라는 분야에 대한 관심과 흥미를 유발하는데 도움이 될 듯 하다.

뒤이어 나오는 내용 중에 일본이 우리나라보다 근대화가 빨랐던 이유에 대해 건축적인 관점에서 저자가 분석해본 내용이 있는데, 처음 접하는 발상이라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꽤나 신선하게 느껴지는 시각이었다.

이 책의 거의 마지막 부분에선 유명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와 르 코르뷔지에의 대표적인 건축물인 ‘낙수장‘과 ‘빌라 사보아‘ 을 비교하면서, 건축의 다양성과 획일성에 대해 언급함과 동시에 우리나라 주택시장의 획일화 현상에 대해 비판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저자의 견해도 볼 수 있었다. 이 부분에 있어서는 사람마다 추구하는 가치가 무엇이냐에 따라 갑론을박이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대량생산을 통한 수익성 추구에 가치를 둔다면 지금같은 획일화된 주택 공급에 크게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겠지만, 저자와 같이 다양성을 추구하는 분들에게는 충분히 큰 문제의식을 가질만한 지점이 있다고 보여진다.

저자는 이 책을 마무리하면서 독자들이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라도 건축을 즐길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또한 책에서 배운 건축에 대한 시각을 바탕으로 좀 더 화목한 도시를 함께 만들어가자고 제안한다. 나도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저자의 제안에 기꺼이 함께 할 생각이다.


지붕의 모양은 기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건축물은 지붕이 평평하다. 이 지대는 건조 기후대다 보니 굳이 비를 의식해서 경사 지붕을 만들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강수량이 늘어날수록 지붕의 기울기는 급해진다. 우리나라보다 비가 더 많이 내리는 동남아시아 건축물의 지붕을 보면 훨씬 더 기울기가 급하다. 물을 빨리 땅으로 내려보내기 위해서다.
지붕은 건축 재료와 기술에 의해서도 변화한다. 과거 조선 시대 때 지붕을 건축하는 주요 재료는 나무와 진흙이었다. 나무 서까래로 지붕의 모양을 만들고 그 사이에 진흙을 채우고, 그 위에 돈이 없는 사람은 볏단을, 부자는 기와를 얹어서 지붕을 완성하였다. 이것이 가장 효율적으로 방수되는 지붕을 만드는 방식이었다.
‘기와지붕‘은 여러 가지 이유에서 부의 상징이 된다. 도자기처럼 구운 기왓장뿐 아니라 그 무게를 견딜 지붕과 기둥 구조체를 만들 정도의 나무를 살 수 있는 재력이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전에는 초가집과 기와집이 경제적 신분을 나누는 지표가 되었던 것이다.
현대에 와서는 나무로 만든 지붕 구조체보다 훨씬 더 얇으면서도 더 무거운 하중을 견딜 수 있는 강한 철근콘크리트 구조 방식이 있다. 이 재료는 방수에도 비교적 강하다. 그래서 더 이상 빗물을 경사지로 흘려 내려보내지 않아도 되었다.
지붕에 마당을 둔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생각 같았지만 새로운 재료의 적용으로 가능해졌다. 덕분에 평지붕에 올라가서 하늘을 만나는 기분을 느낄 수 있게 되었다.
미야자키 마사카쓰는 역사책《공간의 세계사》에서 교통수단이 발달하면 역사에 큰 변화가 온다고 말한다. 그 대표적 사례가 ‘말‘이다. 말을 타면서부터 인간은 시간 거리를 줄일 수 있게 되었고 이로 인해서 공간의 혁명이 일어났다.
역사상 그 많은 전쟁을 만든 주범이 ‘말‘인 것이다. 말은 인간의 공간 이동 능력을 혁신적으로 발전시켰다. 이후에 기차와 자동차가 그 역할을 하게 된다. 건축에서는 길이 말과 자동차를 도와서 이동 공간을 축소시킨다. ‘길‘은 인간의 공간 개념을 변화시킨 건축요소다.
우리가 빈 땅에 가면 그 공간은 하나다. 거기에 벽이 서게 되면 하나였던 공간이 벽의 이쪽 편과 저쪽 편으로 나뉘게 된다. 이 벽에 구멍을 뚫으면 창문이 된다. 창문은 벽으로 단절되었던 두 공간을 서로 쳐다볼 수 있는 관계로 만들어 준다. 그 구멍을 바닥까지 내려오게 뚫으면 문이 된다. 문은 시각적으로만 연결되었던 공간을 실제로 오갈 수 있는 관계로 바꾸는 건축 요소다. 이런 관점에서 다리는 장애물로 나누어진 두 공간을 하나로 연결해서 소통하게 해주는 건축 요소다.
다리 건축 역시 다른 건축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기술, 건축 재료, 권력의 규모에 따라서 각 시대와 지역마다 다르게 나타난다.
혹자는 다리가 인간 사회를 가장 급진적으로 바꾸는 건축물이라고도 말한다. 땅의 관계를 바꾸는 요소이니 그 말도 일리는 있다.
배가 점이고, 징검다리가 점선이라면, 지금의 다리는 실선이다.
현대 건축물은 과거의 건축물에 비해 감동이 떨어진다. 그 이유는 구조체가 보이지 않아서다. 과거에 건축된 무량수전, 석굴암, 고딕성당들은 그 건축물이 중력을 어떻게 이겨 내고 있는지를 그대로 보여 준다. 건축 구조체가 노출되어서 구조체는 곧 내외부 마감재이기도 하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는 건축물이 콘크리트나 철골로 지어지지만 그 모든 것이 마감재로 가려져서 안 보인다.
건축이 다른 예술과 다른 큰 차이점은 가장 근본적인 자연법칙인 ‘중력‘을 이겨 내려는 인간의 노력을 보여 준다는 점이다. 그래서 건축은 감동이 있다.
다리는 아주 거대한 공공 건축물이지만 실제로는 아주 개인적인 체험을 선사하는 건축물이기도 하다. 주변의 세상과 모든 관계를 끊고 홀로 있을 수 있는 곳이다. 오늘 이 복잡한 도심에서 벗어나 다리위에서 하늘과 물을 만나고, 다리 밑에서 생각에 잠겨 보면 어떨까?
뇌과학자 이대열에 의하면 생명의 중요한 진화 과정에서 자주 등장하는 메커니즘이 ‘분업과 위임‘이라고 한다. 대표적인 사례로 다세포 생명체가 등장할 때 체세포와 생식세포 사이에서 일어나는 분업을 들고있다. 생식세포가 번식 기능을 완전히 도맡아 하게 됨으로써 체세포는 번식 이외의 모든 기능을 담당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세금도 걷고 전쟁도 해야 하는 일인 ‘정치‘는 체세포라 볼 수 있고, 현재의 시스템과 가치관을 동일하게 다음 세대로 넘겨주는 일을 하는 ‘종교‘는 생식세포라고 볼 수 있겠다. 생식세포처럼 종교권력은 수천 년간 별로 변한 것이 없다. 반면 체세포가 많은 진화를 하듯이 정치는 민주주의, 삼권분립, 시민혁명 등을 거치며 많은 진화를 이루어 온 것을 알 수 있다.
인류는 오랫동안 주거와 종교 기능이 섞여 있는 공간인 동굴이나 움집에서 살다가 어느 순간 종교 기능만 가진 건축을 하기 시작했다.
종교 건축이 발생하면서 인간의 그룹은 더 커질 수 있었다. 같은 이야기를 믿는 사람이 뭉쳐 살게 되어서다. 이때 종교 건축은 사람들이 신화를 믿게 만드는 데 촉매 역할을 한다.
종교 건축은 사회를 키우고 집단의 수명을 연장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들 종교 건축은 생식세포라고 볼 수 있다. 체세포와 생식세포로 분열된 이후로 생명체가 급속히 진화하듯이, 일반 건축과 종교 건축이 분리되면서부터 인간 사회는 급속하게 진화하게 되었다.
건축의 분업화는 지금도 이루어지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 가장 최근에 있었던 의미 있는 건축 내의 분업은 ‘온돌과 아궁이의 분리‘다.
1960년대에 ‘석유곤로‘가 도입되면서부터 취사가 난방에서 분리되기 시작했다. 석유곤로의 도입은 엄청난 에너지 혁신이다. 선사 시대부터 우리는 에너지를 항상 장작, 석탄, 연탄 같은 고체 연료에서 얻었다. 그러다가 곤로를 통해서 석유라는 액체 에너지원이 최초로 쓰이게 된 것이다.
취사를 하는 불과 난방을 하는 불이 분리되면서 우리 사회는 급속하게 진화하게 된다. 석유곤로는 곧 가스레인지로 진화했고, 난방을 담당하는 불은 연탄보일러와 기름보일러로 진화했다.
고밀화된 도시가 되면서 가장 혜택을 본 계층은 농업보다는 상공업을 하는 사람들이다. 주변에 자신의 물건을 사주는 사람이 많아지기 때문이다.
건축적으로 유추해보면 도시 고밀화와 사회 진화는 어느 정도 연관이 있다고 보인다. 도시의 고밀화는 신흥 계급을 만들고 사회의 민주화와 진화를 이루어 낸다. 이렇게 우리 사회의 변화는 ‘온돌과 아궁이‘가 분리되면서 시작된 일이다.
건축적으로 보면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받은 이유는 우리나라의 ‘온돌‘ 난방 시스템 때문이다.
도시의 고밀화는 신흥 계급을 만들고 근대화로 이어진다. 온돌을 사용한 우리나라는 단층짜리 주거지에 머물 수밖에 없었고 고밀화 도시를 만들 수 없었다.
아마 일본도 우리의 온돌 시스템을 수입하였을 테지만 잦은 지진으로 구들장이 내려앉아서 무거운 온돌시스템을 사용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일본은 가벼운 다다미방에 ‘화로‘를 놓는 난방 시스템을 사용하였다. 덕분에 일본인들은 우리보다 수백 년 앞서서 2층집을 지을 수 있었다.
고밀화된 도시 덕분에 두터운 상인 계층이 생겨났고, 중국의 도자기 공장이 파괴된 틈을 타서 일본은 유럽으로 도자기도 수출하였다. 이런 배경으로 일본은 우리나라보다 먼저 개항을 한다. 아마 일본에 지진이 없어서 온돌을 사용했다면 상인 계층도 일찍 등장하지 않았을 것이고, 도자기 수출도, 근대화도 우리보다 늦어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체세포와 생식세포의 분업은 생명체의 진화에서 중요한 전환점을 만들었다. 마찬가지로 건축에서의 분업은 사회의 진화를 촉발했다. 건축과 사회는 서로 연동되어 있고 공진화한다. 건축이 만드는 사회, 사회가 만드는 건축은 생명체와 같다.
라이벌은 경쟁을 통해 서로 발전하기도 하고, 일반인들은 둘을 비교하면서 그 분야에 대해 더 많은 이해를 하게 된다. 건축에도 그런 라이벌이 존재한다. "20세기 최고의 주택은 무엇인가?", "20세기 최고의 건축가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항상 등장하는 두 명의 건축가가 있다. 신대륙을 대표하는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와 유럽을 대표하는 건축가르 코르뷔지에다.
보통 근대 건축의 4대 거장이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르 코르뷔지에, 미스 반 데어 로에, 알바 알토라고 한다.
건축가의 건축 세계와 철학을 보여 주기 위해서 사람들은 대표작을 거론한다. 건축가에 따라서 그 대표작은 교회일 수도 있고, 미술관일 수도 있다. 하지만 제대로 된 비교를 위해서는 주택이 나와야 한다. 왜냐하면 주택은 모든 건축의 줄기세포이기 때문이다. 주택에서 방이 늘어나면 호텔이 되고, 거실이 커지면 미술관이 된다. 따라서 한 건축가의 건축 철학이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은 주택이다.
기둥 없이 건축물이 나뭇가지처럼 한쪽으로 뻗어 나간 것을 건축 용어로 ‘외팔보‘라고 한다.
그(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건축은 ‘유기적 건축‘이라고 이야기되는데, 말 그대로 땅에서 자라난 듯한 느낌을 보여 준다. 그의 건축은 땅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건축이다. 주변 대지에서 구할 수 있는 재료를 이용하고 자연의 구성 원리를 적용한 그의 건축 디자인은 시간이 흘러도 고유의 가치를 가진다.
우리나라 건축이 발전하지 못한 데는 이러한 모델하우스 분양을 통한 주택 공급이 큰 역할을 했다. 그래서 대부분 국민의 의식에 건축은 없고 인테리어가 있을 뿐이다. 그뿐 아니라 선분양이라는 시스템 역시 철저하게 공급자 위주의 시스템이다. 이는 사용자의 개성이 무시될 수 있는 주택 공급 시스템이다.
정량적인 가치인 평형수와 부도날 것 같지 않은 건설사의 규모가 우리가 사는 집의 가치를 결정하게 되었다. 이런 시장 상황에서는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땅에 지어진 독특한 가치의 집은 없다. 건축은 땅과 기후와 만든 사람에 의해서 다른 맛이 나는 포도주 같아야 하는데 소주 같은 대량생산된 건축만 만연한 한국 주거 문화가 된 것이다.
우리나라에 지금 더 필요한 건축은 빌라 사보아 같은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건축이 아니라 다양성과 개성이 존중되는 건축일 것이다.
지금같이 주택의 가치가 주택 가격으로 결정되는 것은 마치 학생들을 성적순으로 줄세우는 것과 마찬가지다.
모든 사람은 세상에 한 명뿐이기에 모든 사람의 인생은 각각 가치가 있고 중요하다. 마찬가지로 내가 사는 집이 있는 땅은 타 장소와 다른 색을 가진 세상에 하나뿐인 장소다. 그래서 내가 사는 집은 그만의 고유한 가치를 가져야 한다. 그리고 그에 맞게 각기 다르게 디자인되어야 한다. 그래야 물질 중심적인 건축 가치에서 벗어날 수 있다. 빌라 사보아 같은 집보다는 낙수장 같은 집들이 많아져야 한다.
제대로 설계된 공간은 갈등을 줄이고 그 안의 사람들을 더 화목하게 하고, 건물 안의 사람과 건물 주변의 사람 사이도 화목하게 하고, 사람과 자연 사이도 더 화목하게 한다. 좋은 건축은 화목하게 하는 건축이다.
물론 건축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하지만 갈등을 조금이라도 더 해소하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이 세상에는 화목하게 만드는 건축이 더 많이 필요하다.
건축은 건축가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많은 사람이 힘을 합쳐야 하나의 건축물이 완성될 수 있다. 세상을 더 화목하게 하는 건축물을 만들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가 건축을 조금씩 더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세상과 우리를 둘러싼 환경을 제대로 읽어 낼 수 있어야 한다.
새로운 기기가 발달하면 우리 삶의 모습과 공간의 의미가 달라진다. 이 변화의 시기에 어영부영하다가는 우리가 공간을 만들기보다는 신기술이 만들어 놓은 공간에 조종만 당하기 십상이다. 그래서 우리는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건축 공간이 만들어 내는 환경의 본질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우리 스스로를 제대로 쳐다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고 나서 주변의 공간을 읽어 낼 수 있기를 소망한다.
음식을 자꾸 먹어 보면 음식 맛을 볼 줄 알게 되고, 음악을 자꾸 들으면 듣는 귀가 만들어지듯이, 독자 여러분이 이 책을 통해서 건축을 맛보고 느낄 수 있는 감각이 조금이나마 키워졌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건축을 느끼면 인생이 더 풍요로워지기 때문이다.
어디서 살 것인가? 이 문제는 객관식이 아니다. 서술형 답을 써야 하는 문제다. 그리고 정해진 정답도 없다. 우리가 써 나가는 것이 곧 답이다. 아무도 채점을 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가 스스로 ‘이 공간은 우리를 더 행복하게 만드는가?‘ 자문해 보는 과정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우리가 살 곳을 만들어 가야 한다. 당연히 시간이 걸리는 일이다. 하지만 지금 시작하지 않으면 미래는 바뀌지 않는다. 여러분 모두가 건축주이자 건축가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낸 세금으로 공공 건축물이 만들어지고 도시에 도로가 깔리기 때문이다.
건축물을 만들 때 우리는 건축물 자체에 초점을 맞춰서는 안 된다. 그 건축물이 담아내는 ‘삶‘을 바라보아야 한다. 우리는 차를 선택할 때 자동차의 디자인을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외관 디자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자동차를 누구와 함께 타고 어디를 가느냐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건축과 도시를 만들 때 건축물 자체보다는 그 공간 안에서 이루어질 사람들의 삶의 모습에 초점을 맞추어서 생각해야 한다.
여러 가지 방식으로 여러분 스스로가 자신이 살 곳을 더 화목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 수 있다. 우리를 화목하게 만드는 도시를 함께 만들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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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두뽀사리님도 <어디서 살 것인가>를 재미있게 보고 리뷰를 남기셨네요. 리뷰를 읽어보시겠어요?
  • 2024-04-25 08:27 좋아요  l  좋아요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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