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문학과 관련있는 추리소설에 대한 얘기로 시작한다. 따로 이쪽 분야의 책을 많이 읽어보진 않았지만, 이쪽 업계에 대해 간단하게나마 살펴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저자의 얘기에 따르면 이 분야는 도서 시장에서 그다지 큰 비중을 차지하는 분야는 아니지만 꾸준히 명맥을 이어 오고는 있다고 한다.

또한 앞선 포스팅을 포함하여 이 ‘업계인‘이라는 챕터를 읽으면서 들었던 생각은 출판사 직원들도 결국 매출의 압박을 받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물론 처음에는 그저 책이 좋아서 출판사에 입사했는지는 몰라도 자기가 속한 출판사에서 출판했거나 출판 예정인 책들이 잘 팔리지 않을 경우 당장의 수익성에 있어서 타격이 없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지난 포스팅에서 저자가 이 쪽 업계인들이 다들 제일 먼저 살펴보게 되는 것이 판권면이며 자신들이 본업을 대하는 태도가 결코 정신적이지 않다는 고백(p.150)에서 볼 수 있듯이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수익성을 배제한 채 어떤 것을 생각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이는 비단 여기서 언급한 출판업계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업계에 통용될 것이다. 업계인으로서의 진솔함이 느껴지는 부분이었다.

업계인에 대한 얘기 다음에는 철학자에 관한 얘기가 나온다. 개인적인 독서의 깊이가 얕아서 이 책에 나오는 유명한 인물들을 다 알지는 못하지만, 읽으면서 한 번씩 찾아보고 하면서 꾸역꾸역 읽어나가고 있다. 중간중간 저자가 던지는 촌철살인의 문장들은 뭔가 내 머릿속에 강한 임팩트를 남기는 느낌이었다.

p.172에 밑줄친 문장 중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소크라테스나 보들레르라는 이름의 가치는 쓸모 있는 생각을 통해서 입증되어야 하는 것이지 그 이름들이 생각의 가치를 보증하는 일 따위는 없는 것이다.]

이 문장을 보면서 독자인 나는 껍데기와 알맹이라는 말이 문득 떠올랐다. 껍데기는 껍데기일 뿐이고 핵심은 껍데기 안의 쓸모 있는 알맹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살다보면 내면보다는 겉으로 보여지는 것에 더 집착하는 경우들이 많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외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겉모습에 너무 치중한 나머지 자신의 내면을 가꾸는 일에는 소홀하게 되는 경우들이 있다는 게 살짝 아쉬울 따름이다. 요즘 시대가 알맹이라는 본질보다 껍데기라는 겉모습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게 현실이기는 하나 이러한 시대일수록 알맹이에 더 집중하고 키워나가는 것이 위기의 순간이 닥쳤을 때 살아남을 수 있는 중요한 요인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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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에 나오는 글은 지하철의 교통약자석과 관련된 이야기다. 저자가 자신이 직접 겪었던 에피소드를 바탕으로 도덕과 법에 대한 생각을 기술해놓았다. 독자인 나는 이 내용을 읽으면서 우리나라가 법치주의 국가라고는 하지만 모든 것을 일일이 세세하게 법으로 규정할 수는 없기에 도덕이 하는 역할이 분명히 있다는 게 핵심적인 저자의 생각이라고 느꼈다. 생각을 좀 더 확장해보자면 이러한 역할이 있기에 초중고 교육에도 도덕, 윤리 같은 과목을 아직까지도 가르치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이러한 과목들이 대학에 진학하는데 국영수만큼의 큰 비중까지는 아니더라도 이 사회를 살아가는데 있어서 누구에게나 꼭 필요하겠다는 나름의 결론에 이를 수 있었다.

주제를 바꿔서 ‘자유‘라는 것에 대한 얘기들도 등장한다. 특별히 p.180, 181에 밑줄친 내용들에 공감이 많이 갔다. 핵심은 너와 나의 다름을 인정하고 그냥 내버려두라는 것이다. 실제로 저말이 나온 것은 한참 전이지만 자기 색깔대로 살아가는 요즘 같은 시대에도 딱 들어맞는 말이 아닌가 싶다.


뒤이어 나오는 얘기는 궁극에는 정치와 관련이 있어보였다.

˝우리 사람 되기 어려워도 괴물은 되지 말자.˝

이 대사는 홍상수 감독의 영화《생활의 발견》에 나왔다고 한다.

저자는 이 대사를 여러 각도에서 바라보며 다양한 해석들을 내놓는다. 그러다가 권력과 정치 쪽으로 포커스를 맞추면서 정치의 속성에 대해 얘기한다. 적을 죽여야 내가 산다는 단순하지만 강력한 명제를 통해 왜 정치인들이 서로를 적으로 간주하고 죽자살자 물어뜯고 뜯기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이유에 대해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다. 정치의 속성을 조금이나마 느꼈다고나 할까...


오늘 포스팅의 마지막에서는 가상 인터뷰에 대한 저자의 이런저런 생각들을 엿볼 수 있었다. 수능시험 같은 각종 시험에 이러한 형식의 문제가 출제되는 것을 거론하면서 과연 이런게 교육적으로 효과가 얼마나 있겠는가 하는 약간의 회의적인 시각을 엿볼 수 있었다. 얼핏 보기에는 새롭고 참신한 시도같아 보이지만 핵심을 깊게 파고들어가보면 결국은 그게 그거라는, 다 똑같다는 얘기처럼 들렸다. 궁극적으로 알맹이는 동일한데 굳이 복잡하게 만들어서 작성자를 굳이 피곤하게 할 필요가 있을까 라는 얘기처럼 들리기도 했다.


추리소설은 "완전히 불가해한 사건의 완전히 합리적 해명"을 목표로 하는 장르
출판업계에는 죽어 있던 책이 몇 년 뒤 운 좋게 부활하는 이야기들이 꽤 있다. 대개 출판사나 번역자, 제목 중 하나 이상이 바뀌거나, 영화화되어 주목받는 방식이다.
상업성이 없다는 것은 환상문학의 가장 큰 비밀의 하나다. 왜 상업성이 없을까? 앞에서 ‘문학사적으로 소멸한 장르‘라는 말을 썼는데, 그 실질적인 의미는 ‘무섭지 않다‘이다. 그것은 독자들의 독후감에서 쉽게 확인된다. 왜 무섭지 않을까? 100년, 200년 전 독자에게 통하던 기법이 지금 효력을 발휘할 리가 없지 않은가. 거기에서 사용된 클리셰들, 예를 들어 ‘신뢰할 수 없는 서술자‘는 지금 책을 읽지 않는 사람도 영화 등을 통해서 훤히 알고 있을 정도이다.
환상문학이 고전 총서류에 포함되면 단행본으로 냈을 때보다 더 팔리는 수수께끼는 복잡한 것이 아니다. 19세기 유령 이야기가 상업적 자립성이 없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환상문학 기획자 앞에 놓인 판매라는 과제는 이중적이다. 출간된 책의 판매를 궁리하기에 앞서서 출간 자체가 가능해야 한다. 회사가 자신의 기획을 사 줘야 하는 것이다.
회의가 보수적인 판단을 내리는 데 적합한 구조로 되어 있을 뿐이다. 비슷한 취향을 가지고 있는 동료라고 해서 기획에 찬동해 주리라고 기대하기는 힘든 일이다.
이런 까다로운 경우 정면 승부보다는 기존에 확정된 기획에 슬쩍 올라타는 방식이 언제나 훨씬 쉬웠던 것 같다.
편승이 가능해 보인다고 과욕스러운 탑승 리스트를 만드는 건 어리석다. 리스트가 회의에 부쳐져 검토되는 것은 편승 전략을 원점에 돌리는 일이니까. 당신이 정말로 그 책을 내고 싶다면 회의를 최대한 건너뛸 방법을 궁리해야 한다. 여기에서 주의할 것은, 기존 기획의 편승이든 확장이든 회사의 방침을 실현하는 형식을 취하는 것이 기본이라는 점이다.
기획자는 회사에 본인의 제안을 제출하기도하지만 회사의 방침을 이해하고 구체화하는 역할도 맡게 된다.
우리는 원칙적으로 홍보에 두 가지 차원, 즉 받는 이가 예상 가능한 정보와 예상 가능하지 않은 정보가 같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실제로 독자의 선입견을 넘어서는 정보를 집어넣을 공간을 찾기는 쉽지 않다. 진부한 말 한두 마디를 뺄 수 있다는 건 한두 마디의 다른 이야기를 넣을 드문 기회가 생겼다는 뜻이다. 이때 장르에 대한 새로운 관점이 있다면 소개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한 장르에 정치성을 불어넣어 젊은 세대에게 참신한 것으로 만드는 일"은 결국 판매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업계인은 알게 된다. 스스로가 그런 의미 부여에 동의하는가와는 무관하게 말이다.
사실 출판은 각 출판물들이 그보다 큰 단위의 이미지에 기여하고, 브랜드 이미지가 그보다 작은 단위의 판매에 기여하도록 하는 게 이상적이다. 단권, 총서, 브랜드의 상호기여라는 점에서 출판 홍보는 애초에 편승의 원리가 지배하는 곳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사실 편승이라는 말 자체가 또 다른 기획자에 의한 간섭을 뜻하는 것
기획자는 자신이 제안할 수 있는 다수의 목록을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이고, 기존의 기획을 편승에 적합한 것으로 변형해 볼 수 있는 약간의 상상력도 있어야 할 것이다. 책을 내기 위해 필요한 절충의 범위도 헤아릴 수 있어야 한다.
보이지 않는 손이 있다면, 보이지 않는 기획자도 있다.
한 명의 이상적인 기획자를 가정해 보자. 유능한 그는 ‘편승‘
을 우리처럼 눈에 띄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가 행하는 편승은 결코 편승으로 보이지도 않을 것이고 그의 제안은 아무런 수상한 느낌 없이 받아들여질 것이다.
아무도 의도하지 않은 것 같아 보이는 때가 ‘보이지 않는 기획자‘가 얼핏 존재를 드러내는 순간인 것이다.
"나는 오랜 투쟁 끝에 용기를 끌어내어 무언가를 실행한 후에는 언제나 훨씬 더 자유롭고 행복하게 느꼈다. 너는 기는 것을 그만두고 걷기를 다시 시작해야 한다. 책임질 일을 찾아서 그것을 수행하려고 노력해라."
곤경이 시작되면 철학은 멈춘다는 세간의 격언이 있지만 비트겐슈타인과는 무관한 얘기였다.
우리는 별로 하고싶지 않은 주제의 대화를 거절할 권리가 있다. 이것은 실로 인간의 평안을 좌우하는 권리인데,
"아우슈비츠 이후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적이다."라는 아도르노의 말
적절하지 않은 이야기를 악의 없이 꺼내는 것. 이것은 참을 수 없는 일
소크라테스나 보들레르라는 이름의 가치는 쓸모 있는 생각을 통해서 입증되어야 하는 것이지 그 이름들이 생각의 가치를 보증하는 일 따위는 없는 것이다.
철학자들의 전기를 보면 벼락같은 한마디로 주변인들의 인생을 혼란에서 구해 주는 이야기들이 없지 않다.
이름이 지식은 아니고, 착한 말이 선은 아님
어떤 종류의 배움은 선생이 학생의 존경을 받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학생 역시 선생의 존경을 획득해야만 성립이 가능한 듯하다.
「교통약자의 이동편의증진법」은 교통약자를 ‘장애인,
고령자, 임산부, 영유아를 동반한 자, 어린이 등‘으로 정한뒤, 이들을 위해 교통약자석을 설치할 수 있다고 되어 있다.
우리는 사소한 거짓말을 뱉은 뒤 비참한 기분으로 하루를 보낼 때가 있는데, 자격 없이 교통약자석에 앉아 있는 기분도 그와 비슷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교통약자석은 우리가 생활 속에서 치르는 일종의 도덕 시험이다. 거짓말과 다른 점은, 거짓말은 자신의 것만 바로 알수 있을 뿐이지만 교통약자석 위반은 마치 극장처럼 되어있는 지하철 좌석 구조 때문에 누구나 잘 관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만일 코로나 같은 위기 상황에서 국민의 도덕적인 역량이 필요하다면, 그게 이런 일상적인 연습 없이 갑자기 발휘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말년의 저서《학부들의 논쟁》(1798)에서 칸트는 썼다.
"선은 자유 상태에서만 발생할 수 있을 뿐이다." 국가는 국민을 선하게 만들 수 없고, 단지 자유를 줌으로써 스스로 선하게 될 기회를 줄 수 있을 뿐이라는 뜻으로 읽었다.
뭐든지 세밀하게 법으로 정해 놓는 이상적 사회가 있다면 개인은 도덕적 판단을 안 해도 되니 편할 것 같지만 실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곳에선 위법 아닌 것은 모조리 당당하게 합법이고, 구성원들은 서로가 도덕적 백치임을 발견하고 새삼 놀랄 뿐일 테니까.
"영국인들은 스스로를 자유롭다고 여기지만, 이는 심한 착각이다. 그들은 단지 선거일에만 자유로울 뿐이며, 다음날 다시 노예로 돌아간다." 18세기 사상가 루소의 이 말은 선거에 관한 가장 유명한 인용구일 것이다.
루소의 말은 『사회 계약론』(1762)에서 ‘대의제‘라는 장에 나오는 것으로, 시민들이 주권을 대표자에게 양도하는 한 자유롭게 사는 건 꿈같은 일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들은 자기 생각을 그렇다 아니다로 그 자리에서 말하지 못하는 겁쟁이들을 싫어한다. 겁쟁이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면 그들은 당신을 불쾌하게 하지 않을 것이고, 무슨 짓을 하든 내버려 둘 것이다." 불법만 아니면 말이다.
‘내버려 둔다‘는 일단 두고 보다가 나중에 거두어들일 수도 있는 허용이나 관용이 아니라, 무조건적이고 항구적인 무관심임이 밝혀진다. "그들은 남의 얼굴을 쳐다보지 말라고 훈련받은 것이 아니라 정말 자기 일 말고는 관심이 없다."
에머슨의 요점은, 자유에는 개인적인 용기가 필요하고 집단적인 무관심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내가 신경을 끄지 않고, 시선도 떼지 않고서 어떻게 상대방에게 (그리고 나에게) 자유를 줄 수 있을까?
자녀나 부모, 직장 동료 문제로 힘들어서 상담을 받는 경우, 짐작할 수 있듯 최종 해답은 문제의 인물이 나와 다른 사람임을 인정하고, 영향 받거나 영향 주려고 하지 말고 무관심해지라는 것이다.
스팅의 노래 중에 「사랑한다면 그들을 놔줘(If You Love Somebody, Set Them Free)」가 있다. 에머슨이라면 조건절은 ‘사랑하지 않아도‘가 더 낫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우리 사람 되기 어려워도 괴물은 되지 말자."
귀에 들어간 것은 반드시 입으로 나온다는 홍상수 영화의 법칙
이 편리한 대사가 새삼스럽게 공론의 장으로 불러내진 적이 있다. ‘586세대의 내면 풍경을 절묘하게 보여 주는 대사‘라는 해석도 보았다. 좌절된 이상주의와 타락의 최저선을 제시했다는 것이다. 윤리적으로 추락하고 있는데, 바닥이 어딘지 모르는 세대의 두려움과 자성이 표현된 것이라고.
그런 말이 승리감을 준다면, 이게 겉보기처럼 ‘우리 타락하지 말자‘는 권유가 전혀 아니기 때문이다. 너는
‘괴물‘로 추락하는 자리에, 그리고 나는 너를 꾸짖는 ‘사람‘
의 자리에 당연한 듯 배치하는 권력 효과 때문이다.
이 말이 수행하는 것은 권력 투쟁이고, 카를 슈미트의 유명한 말 "정치는 적과 동지를 구분하는 것이다."를 교과서적으로 실천한다.
이론상, 정치는 죽느냐 사느냐뿐이다.
"인류에게 적은 존재하지 않는다." 적은 인간 취급을 받지 못하리라는 뜻이다. 왜냐하면 인권을 가진 동등한 시민들 속에 적이 있을 리는 없으니까. 우리가 인류를 대표하고 있는 이상, 우리의 적은 사람이라고 볼 수가 없을 것이고 그들은 그에 마땅한 대접을 받게 될 것이다.
그 대사에 왜 ‘괴물‘이 나오는가라는 의문은 이렇게 풀린다. 사람을 존중하는 관용적 민주 사회의 역설은 적을 괴물, 사람 이하의 존재로 호명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어떻게든 상대를 비인간화시키는 것이 오늘날의 주된 정치 투쟁이다.
지금 과격한 강령을 내세우는 정파는 드물다. 모두가 더 큰 연대를 확보하려 노력하며, 인류의 대변자라도 된 듯한 온건한 메시지밖에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럴수록 정치는 인간에 속하지 않는 괴물들을 절멸시키려는 투쟁이 되어 버리는 역설은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 정치는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 상대가 괴물로 추락하면 우리는 사람의 자리를 독차지할 수 있으니 말이다.
가상 인터뷰는 복화술의 한 형식이다. 아무리 위인이나 천재라 해도 작성자가 아는 것 이상을 말해 주지는 못한다.
그것이 일차적인 답답함이다. 여기에 작성자가 제공하는 이차적인 답답함도 추가해야 한다. 그는 자기가 뻔히 아는 답을 위인(물론 자신)이 말하게 하기 위해서 짐짓 모른 체하고질문을 던진다. 방에는 자기 말고 아무도 없는데 마치 한 명더 있는 체한다. 이런 장면의 괴로움은 작성자가 대개 프로극작가가 아니기 때문에 더 심화되기 마련이다.
‘인터뷰 형식을 차용한 인상주의적 묘사의 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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