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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그릇의 진심, 한 숟갈의 세상.

하얀 눈이 내리면 빨간 낙지볶음만 당기는 것이 아니라 눈을 닮은 맛이 나는 맑은 사케에 절로 입이 간다. 추운 겨울날, 따끈히 데운 잔에 튀긴 복어 지느러미를 넣어 나른히 비릿한 맛이 나는 히레사케는 물론이요, 작은 잔이 어울리는 아릿하게 맑고 차가운 것도 좋다. 흰쌀을 깎고 또 깎아 하얀 중심만 남기고 50퍼센트 이상 깎아낸 다이긴조는 입안에 탁 털어 넣으면 무섭게 시퍼런 하늘이 나를 덮치고, 박하사탕처럼 청량한 바람이 나를 감아 돌며, 저 멀리에서는 그 바람에 실린 벚꽃 향이 하늘거리는 듯하다. p.84~85



돌아보면 삶의 중요한 모든 순간에 음식이 함께 했다. 어린 시절 처음 가족끼리 외식이라는 걸 했던 동네의 경양식 집, 동생은 느끼하다고 했지만 나는 너무 맛있었던 돈까스에 대한 기억은 아직도 선명하다. 그리고 대학에 입학했을 때, 처음으로 독립했을 때, 첫 직장에서 첫 번째 월급을 받았을 때, 첫 남자친구와 근사한 데이트를 했을 때 등등... 뭔가 기념할 만한 일이 생기거나, 오래 기억해두고 싶은 순간에 우리는 좋은 사람들과 맛있는 걸 먹으러 간다. 그래서 시간이 어느 정도 흘러 다시 그 순간을 떠올리게 되면, 항상 그 날의 풍경과 사람과 공기 속에 그날 먹은 음식에 대한 맛과 향기와 분위기가 같이 기억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삶의 모든 순간에는 저마다의 고유한 맛이 자리하게 된다. 마치 이 책 속 글들처럼 말이다.


대기업을 다니다 서른을 코앞에 둔 어느 날,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살겠다는 생각에 사표를 던지고 영국 요리학교로 훌쩍 떠나 요리사가 되었다. 그는 늦깎이 셰프로 일하며 전쟁터 같은 주방 풍경, 음악과 영화와 문학으로 버무린 요리 이야기를 글로 쓰는 칼럼니스트이자 작가이기도 하다. 이 책은 그가 써낸 한 그릇에 담긴 사람과 시간에 대한 이야기와 삶의 모든 마디에 자리했던 음식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술술 에세이처럼 편하게 읽히는 글들이지만, 저자가 셰프이기 때문에 요리 과정과 재료와 맛에 대한 묘사가 매우 리얼하고 자세하다. 이야기 속에는 간단한 레시피도 포함되어 있고, 독특한 조리법이나 재료에 대한 팁도 소개되어 있어 흥미로웠다.


다음 날이 되면 다시 똑같은 시간에 눈을 떴다. 몸을 움츠리게 만드는 한기는 익숙해지지 않았다. 그러나 알고 있었다. 나는 침대 밖으로 나갈 것이고 다시 빵을 구울 것이며 갓 국운 빵을 물고 학교에 갈 것이다. 아침을 여는 나만의 신성한 의식이었다. 마치 기도를 하듯 매일 일어나 반죽을 빚을 때면 사위가 조용해지고 신경이 예민해지는 순간이 찾아왔다. 눈을 감아도 오븐 속에서 익어가는 빵이 보였다. 작은 질감의 차이를 손끝으로 알 수 있었다. 마침내 직접 만든 빵, 아무것도 들어가 있지 않은 하얀 빵을 먹으면 나는 인생을 새로 시작하는 듯했다. p.182~184



찬바람이 불기 시작할 때부터 뜨끈한 국물 요리가 생각나기 시작한다. 날씨가 더워지기 시작하면 시원한 수박과 빙수부터 먹고 싶어 지고,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홈파티 음식들을 떠올리며 메뉴를 구상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음식들은 우리의 일상과 고스란히 맞닿아 있다. 그리고 음식은 다시 되돌아갈 수 없는 지난 시절을 불러오게 만들기도 한다. 쓸쓸하고 외로운 날 엄마가 보고 싶으면, 어린 시절 엄마가 해주던 집밥이 생각나고, 지나가다 도시락집을 발견하면 혼자 자취하던 시절 홀로 밥을 먹던 내 모습이 떠오르기도 한다. 순전히 생존을 위한 음식으로 대충 끼니를 때웠던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값싼 빵이나 라면도 있고, 근사하게 분위기 내고 싶은 날 먹었던 파인다이닝 레스토랑의 코스 요리가 생각나는 날도 있다.

어떤 음식은 나의 지나온 한 시절을 기억나게 만들고, 또 어떤 음식은 함께했던 누군가를 떠오르게 만드는 것 같다. 그래서 내가 먹어온 음식만큼, 내가 지나온 시간만큼의 추억들이 쌓이고 쌓여서 나라는 한 사람을 이루게 되는 것일 테고 말이다.




저자는 말한다. 사람들을 낯선 곳까지 오게 하고 밤을 지새우게 하는 것은 그리움이라고. 그들이 먹는 것은 단지 고기뿐만 아니라 불꽃이고 그 불꽃이 이끌어낸 것은 감춰져 있던 기억이라고 말이다. 그는 날이 춥고 속이 헛헛할 때, 하늘은 흐리고 바람은 찰 때 매운 음식이 당긴다고 말한다. 그럴 때 발걸음이 닿을 곳은 정해져 있다고 무교동의 식당들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 낸다. 그리고 다른 집의 것과는 다르게 매서운 직구처럼 매운맛이 강했던 어머니의 비빔국수, 할아버지를 보내고 먹었던 장례식장의 육개장이 슬픔을 견디게 했던 기억도 그려 낸다.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가 영국에서 요리학교에 다니던 시절, 난방을 거의 하지 않아 추웠던 오래된 단독주택에서 새벽 마다 일어나서 빵을 만들었던 일화였다. 수업은 아홉 시에 있었고, 그는 해도 뜨지 않은 새벽 여섯 시에 매번 일어나 주방으로 내려 갔다. 밀가루와 우유, 물, 소금, 버터, 이스트를 준비하고 계량하고, 반죽하고, 숙성해서 모양을 빚어 틀에 집어 넣고 오븐에 굽는다. 재료 준비에서 완성까지 정확히 1시간 40분이 걸려, 완성된 빵 하나를 입에 물고 문밖을 나선다. 노란 자전거 위에 올라 달리면서 먹던 그 빵 맛을 상상해 보았다. 구수하고, 쌉쌀하고, 고소하고, 부드러운 하얀 식빵. 산뜻한 산미와 달콤한 풍미가 섞여 식욕을 자극하는 그 맛. 학교에 도착해서도 여전히 빵의 그윽한 향이 몸에 남아 있고, 매끄럽고 부드러운 살결 같은 반죽의 촉감이 남아 있는 그 순간들이 너무도 행복해 보였다. 마음을 쌓는 것같이 시간과 정성을 들여 만들었다는 큼지막한 식빵 한 조각에 담긴 그 생의 기쁨을 이해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고 나니, '같은 하늘을 지고 사는, 저 멀리, 혹은 가까이에서 숨 쉬는 당신, 당신이 씹어 삼키는 작디작은 한 숟가락에 담긴 세상'이 문득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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