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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월 19일 오후 11:55 공개
육질은 부드러워
고기를 안 먹고도 버틸 수 있을까요.
매일은 아니지만 일주일에 서너 번은 고기를 먹어왔고, 아예 고기를 끊는다는 건 생각조차 안해봐서 잠시 고민했던 것 같아요. 근데 그깟 고민이 무색해지는 소설을 읽고 말았네요. 당장 고기를 끊지는 못하겠지만 결코 즐기지는 못할 것 같아요.
《육질은 부드러워》는 아구스티나 바스테리카 작가님의 장편소설이에요. 이 소설은 매우 충격적인 가상 세계를 보여주고 있어요. 모든 동물이 인간에게 치명적인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더 이상 동물을 먹을 수 없게 되면서 세상은 대체육으로 인육을 선택했어요. 당연히 처음엔 마찰이 있었지만 기업들이 대규모 육류 공급을 위해 사람을 동물처럼 사육하기 시작했고, 인육을 특별육이라고 부르면서 '변이'를 받아들이게 된 거예요. 사람들은 정육점에서 잘 가공된 인육을 구입해 먹기 시작했고, 직접 사육하는 사람들도 생겼어요. 주인공 마르코스 테호는 아버지가 운영했던 육류 가공 공장 '사이프러스'에서 도축 작업을 했는데, 현재 공장은 남에게 넘겼고 그는 여전히 그곳에서 일하고 있어요. 속으론 끔찍하게 괴롭지만 참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아버지 때문이에요. 아버지는 '변이'를 받아들이지 못해 정신이 나갔고, 의사들은 노인성 치매로 진단했어요. 최고급 요양시설에 아버지를 모신 뒤로 더 많은 돈이 필요했고, 요양원 간호사인 세실리아를 만나 결혼하면서 더욱 열심히 일하게 된 거예요. 아내가 난임이라 힘들게 아들 레오를 낳았을 때는 행복이 영원할 거라 믿었는데 무참히 깨지고 말았어요. 아들 죽음 이후 세실리아는 무너졌고, 마르코스 역시 좀비처럼 겨우 숨 쉬며 살고 있는데 예상치 못한 변수가 생겼어요. 사육장 사장인 엘 그링고가 선물이라며 테호에게 암컷 FGP를 택배로 보낸 거예요. FGP(First Generation Pure) 란 순종 1세대, 태어날 때부터 가둬서 따로 키운 개체들로 성장 속도를 높이기 위해 유전자를 변형하거나 주사를 맞히지 않은 것들을 의미한대요. 사육되는 인간들이 어떻게 가공 공장에서 처리되는지, 소설에서 너무나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어서 공포 영화를 보는 느낌이었어요. 10년 전에 봤던 영화 <언더 더 스킨>이 떠올랐어요. 스칼렛 요한슨 주연의 SF 영화로 외계인 시점에서 인간을 사냥하는 내용인데, 그때 처음으로 '인간의 먹이가 되는 가축의 입장이 된다면 ···· ?'이라는 생각을 해봤고 소름이 돋았어요. 이 소설을 읽으면서 스스로 묻게 되더라고요. 왜 여전히 고기를 포기하지 못하는가. 어쩐지 숨겨왔던 야만이 들킨 것 같아 부끄러웠네요. 소설 속에서도 마르코스의 주변 인물들을 통해 다양한 인간 군상을 보여주고 있어요. 미치거나 죽거나, 그냥 견디거나 아니면 즐기거나. 이미 식인이 합법화된 세상에서 당신이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요. 한 가지 확실한 건, "고기를 향한 갈망은 위험하다." (89p)라는 사실인 것 같아요. 비틀린 욕망을 향해 나아갈 때 세상은 야만이 되는 거예요. 인간을 그저 씹어먹을 고기로 생각하는 순간, 그곳에 인간은 존재하지 않아요. 그깟 고기 때문에 인간이길 포기할 거냐고, 심장이 계속 벌렁벌렁, 끝까지 몰입하며 읽었네요.



"난 온종일 죽음에 둘러싸여 있어." 그녀는 냉장창고 속 지육 덩이들을 가리키며 말한다.
"모든 것이 내 운명은 저 안에 있다고 말하고 있어. 아니, 그럼 당신은 우리가 이런 짓을 하고도 대가를 치르지 않으리라 생각해?"
"그러면 그냥 그만두면 되잖아? 가게 팔고 다른 일 하면 안 돼?" (62p)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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