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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월 27일 오후 3:49 공개
천사들의 제국 1권 - 베르나르 베르베르
<개미>에 이어 한국과 프랑스에서 큰 히트를 쳤던 <타나토노트(1994)>에 거의 바로 이어졌던 후일담입니다. 그렇기에 발표된 지 오래된 작품이며 베르베르 초기의 풋풋함이 곳곳에 살아 있는 게 느껴집니다. 이 리커버판은 이세욱씨 번역 텍스트 그대로이며 다만 (제 기억으로) 몇 개 용어가 개정된 것 같기는 합니다. 타나토노트의 세계관을 그대로 계승했으며, 젊은 자신의 재능을 화끈하게 증명이나 하려는 듯 기발한 상상력과 치밀한 세팅이 빛납니다. 원래는 <개미>도 "개미들의 제국"이라 제목이 붙었기에 이 작은 어느 정도 제목 전통을 이어가는 형식입니다. 

만약에 천국이 실재함이 확증되었다면 지상의 질서가 크게 흔들릴 것입니다. 지금도 일부 종교의 광신도들은 순교(?), 목적사에 주저함이 없는데 현생의 괴로움을 천국에서 보상 받겠다는 믿음이 확고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상인들은 과연 죽어서 무엇이 자신을 기다릴지 확신이 없고, 혹여 이 죽음과 함께 나의 모든 것이 무(無)로 화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무슨 새로운 세계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죽음(자살)을 결행한다든지 하는 건 상상하기 힘듭니다. 그런데 이 작품 p29에서 대천사들이 말하는 대로, 천국의 비밀이 누설되면 "관광 목적의 자살자들"이 속출하겠기에, 로즈, 아망딘, 그리고 1인칭 주인공 미카엘 팽송 들은 강력한 견책을 받는 중입니다. 

2000년 초판에서도 그랬습니다만 풍부한 역주를 통해 독자들의 이해를 돕는 건 열린책들 출판사의 문학서 공통된 특징입니다. 베르베르 이전에는, 움베르토 에코의 책을 번역했던 이윤기씨가 그러했고, 그 정도까지는 아니라도 베르베르 역시 작품에서 지식의 향연이 펼쳐지지 때문에 풍부한 역주가 동원됩니다. 저승, 아니 천계에서 에밀 졸라를 만난 팽송은 그의 입에서 또다시 "나는 고발한다"를 듣는데 우리의 주인공 팽송이 천사들로부터 그릇된 심판을 받았음을 고발한다는 뜻입니다. 물론 졸라가 드레퓌스를 변호했던 역사적 사건을 환기하려는 의도인데 일종의 유머입니다. 이세욱 역자는 혹시 모르는 독자가 있을까봐 p35 하단에 긴 역주를 달고 있습니다. 

<상대적이며... 백과사전(p164)>의 저자로 유명한(?) 에드몽 웰스가 p42에 등장합니다. 수호천사라는 말은 들어 봤어도 지도천사라는 말은 금시초문인데 독자뿐 아니라 팽송도 마찬가지인지, 상대에게 그게 뭐냐고 되물어 봅니다. 원어로는 ange instructeur인데, 말이야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지만(영어로 옮기면 instructor angel), 불어건 영어건 그런 표현은 없고 베르베르의 신조어입니다. 수호천사는 불어로 ange gardien(영어로는 가디언 엔젤)라고 합니다. 웰스는 천사로서의 권능과 그 특유의 지혜를 동원하여 1에서 6까지에 담긴 신성한 의미를 팽송에게 코칭(=인스트럭팅)하는데 7에 대해서는 끝내 언급을 자제합니다(저 뒤 p144에서도 대답을 회피합니다). 베르베르 작품의 공식대로라면 이 부분이 후반부에서 어떤 복선 구실을 해야 합니다. p60에서 팽송은 라울 라조르박을 뜻밖에 해후하며 긴 모험을 함께하게 됩니다. 

p73에서 <...백과사전> 인용 형식으로 소개되는 태아 접촉법은, 요즘 이른바 후생유전학이라 해서 각광받는 학문분야하고도 관련이 있습니다. p75, p76, p244의 "알려지지 않은 세계, 미지의 세계" 등은, p62에 나왔던 라틴어 표현 "테라 인코그니타"와 같은 뜻입니다. p77에서 태아 비너스가 겪는 체험은 이른바 vanishing twin에 대한 이야기인데 한국에서 2000년에 지수원씨(<투캅스>에서 박중훈 여친으로 나온 배우) 주연으로, 같은 제목의 영화도 나왔더랬습니다. p82에서 팽송은 이른바 "파스칼의 내기"를 언급하는데, 사실 <팡세>의 그 서술은 일종의 농담이지, 정말로 보험 든다고 생각하고 종교를 믿는다면 그런 불경스럽고 부정직한 믿음에 대해서는 거꾸로 신이 벌을 내릴 가능성이 크죠. 영화 <대부 3>에서도 람베르토 추기경이 비슷한 이야기를 깡패 두목 마이클 콜레온에게 꺼내죠. 

사실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뭔가 느낌이 쎄해서, 하려던 일을 갑자기 그만두었는데 용케도 예감이 맞아서 악운을 피했다는 말을 듣곤 합니다. 이런 이야기는 대개, 자신에게 특별한 능력이 있다고 주변 사람들을 가스라이팅하는 허풍쟁이, 사기꾼들의 수법이긴 합니다만, 베르베르는 이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데, 수호천사들이 자신의 의뢰인(영어로 불어로 모두 client입니다. 불어 발음은 "클리양". 여기서는 베르베르가 색다른 의미를 부여해서 쓰입니다)에게 슬쩍 어떤 일이 일어나기 전에 알려 주는 거라는 식입니다. 꿈이나 영매를 거치는, 혹은 징표(원어는 signe)를 통해서인데, 베르베르다운 유쾌한 상상입니다. 이렇게 해서 천사들은 인간사에 아주 간접적으로 개입한다는 것입니다. 

p105에는 모성애가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정이라는 통념에 대해 백과사전 저자인 웰스가 반론을 제기합니다. 19세기 프랑스의 부르주아들은 시골 출신의 유모에게 육아를 맡기고 애를 전혀 돌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글쎄 19세기 부르주아의 행태를 누가 대표하며 어느 정도 일반화가 가능할지도 의문이지만, 설령 19세기 부르주아 100%가 육아를 방기했다 쳐도, 그들이 과연 인류 어머니층 모두를 대표한다 할 수 있습니까? 뿐만 아니라 본 항목에서도 "시골에서 올라온 유모들"이 그 역할을 대신했다고 나오는데, 그들은 그럼 누구한테 모성 발휘를 학습했단 말일까요? 그저 월급 받고 수행하는 노동? 사실 육아 방기의 가장 전형적인 행태는 중세 유럽 귀족들이나 근세 영국 젠트리층에게서 찾아야 하며, 구태여 내적 동질성도 탄탄치 못한 부르주아를 예거할 건 아닙니다. 모성애가 인간의 본성이 아니라면 우리 인류는 오래 전에 멸종했습니다. p109 맨 윗줄 "체호프으로"는 "체호프로"가 맞겠습니다. 여튼, 카르마가 정말 악착같은 것이라는 팽송의 말은 지극히 타당합니다. 

p72를 보면 "임신 중지 수술"이란 말이 나오는데 과거 같으면 낙태, 중절 같은 말이 쓰였겠습니다. 그러나 이 말에 붙은 부정적 뉘앙스, 또 여성을 일방적으로 비난하는 함의 때문에 요즘은 이 말을 잘 안 쓰는 추세이며 이 리커버판이 그 점만큼은 확실하게 반영한 듯합니다. p225를 보면 역시 베르베르는 페미니스트스러운 구석이 있는데, 다만 "성신"이라는 용어는 이미 한국 천주교에서 "성령"으로 개정한 바 있으므로 기왕 고치는 거 여기도 바꿨으면 어땠을까 하고 개인적인 아쉬움을 표현해 봅니다. 神도 원래 한자에서는 ghost, spirit(鬼, 靈)의 뜻이었으니 무리가 없었는데, 21세기 현재 한국인이라면 神에서 그런 뜻을 떠올리는 이는 아무도 없고 모두가 god만 생각하므로 저런 개정은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p99에서는 다섯 개의 개입 수단이 설명되었습니다. p145에서는 세 가지 설득 수단이 나오는데 마치 현대인을 위한 베스트셀러 자계서에 나올 법한 그럴싸한 이론이라서 흥미롭습니다. p207을 보면 매릴린 먼로가 등장하는데, p153을 보면 비너스 시선에서 리즈 테일러가 언급됩니다. 베르베르가 성장기에 보고 자란 성적 우상들이 아닐까 짐작합니다. 사실 <클레오파트라>에서 보인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관리 안된 중년 여인의 몸 그대로라서 보기 민망한 장면이 있습니다. 시저 역 렉스 해리슨의 중후한 연기가 일품이죠. 

p220을 보면 이른바 메타정신분석 이야기가 나오는데, 베르베르 소설에서 독자가 갑자기 찡!하고 가슴이 뭉클해지는 대목이 바로 이런 곳입니다. 왜 이고르, 비너스, 자크 등을 팽송이 의뢰인으로 두게 되었을까? 답은 그들이 각각, 채 실현되지 못한 팽송 자신의 염원을 대변하는 존재, 영혼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과연 카르마라는 녀석은 악착같지 않습니까? 상상력, 용기, 매력이야말로 우리들 평범한 인생이 가장 갖고들 싶어하는 자질이기 때문입니다. p223에는 "자기 반성의 계기"라는 말이 나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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