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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빛] ‘잉글리시 페이션트‘ 작가의 신작 장편 소설

마이클 온다치는 영화 <잉글리시 페이션트>의 원작 소설을 썼고, 역대 부커상 수상작 중 최고로 꼽히는 작품만 받은 '골든 부커상'을 받은 작가로 알고 있었다. 정작 작품을 읽어본 적은 없었는데, 이번에 그의 신작 장편 소설 <기억의 빛>을 읽으면서 <잉글리시 페이션트>는 물론이고 다른 작품들도 전부 구해서 읽어보고 싶어졌다. (근데 인터넷 서점에서 검색해보니 이렇게 유명하고 뛰어난 작가인데 국내에 출간된 작품이 별로 없어서 속상했다. 원서로 읽어야 하나...)


제2차 세계 대전이 막 끝난 1945년 영국 런던. 14세 소년 너새니얼은 어느 날 아침 부모로부터 아버지 일 때문에 아버지와 어머니만 일 년 간 집을 떠나 싱가포르에서 지내게 되었다는 말을 듣는다. 그동안 너새니얼과 두 살 위 누나 레이철은 기숙학교에서 지낼 것이고, 무슨 일이 생기면 3층에 세들어 살고 있는 '나방'이라는 남자에게 도움을 청하라는 말이 덧붙었지만, 남매는 부모의 통보가 워낙 갑작스러운 데다가 나방이라는 남자가 범죄자처럼 보여서 불안하기만 하다.


얼마 후 아버지와 어머니가 차례로 떠나고, 기숙학교에 적응하지 못한 남매는 집으로 돌아온다. 그동안 나방은 남매의 부모가 집을 비우길 기다렸다는 듯이 자신의 손님들을 불러 들였고, 남매는 처음엔 경계하는 태도를 보인다. 하지만 점점 이들의 자유분방한 대화와 행동, 생활 방식에 호기심을 느끼고 결국 이들을 따라다니게 된다. 그렇게 매일 런던 안팎을 오가며 모험을 하고, 사랑을 하고, 성장을 하는 날들이 계속될 것 같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사람들에 의해 그들의 행복한 동거는 끝이 나고 너새니얼은 미국으로 보내진다.


여기까지가 이 소설의 1부이고, 1부만 보면 전쟁 직후에 사춘기를 맞은 소년의 이야기를 그린 성장 소설처럼 보인다. 하지만 2부가 시작되고, 영국으로 돌아온 너새니얼이 정보국 요원이 되면서 분위기가 반전된다. 1부에서 아버지의 일을 핑계로 사라졌던 너새니얼의 부모는 사실 자식들에게조차 정체를 밝혀선 안 되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 특히 너새니얼의 어머니 로즈는 전쟁 중에 적군의 암호를 무수히 해독한 암호 분석원이자 직접 수많은 작전들을 수행한 요원이었고, 그 때문에 로즈의 목숨을 노리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너새니얼은 정보국 요원으로서 어머니의 행적을 조사하는 한편, 아들로서 어머니와의 추억을 회상하며 어머니의 삶을 탐문한다. 이 과정에서 너새니얼은 어머니가 너새니얼이 14세 때 집을 떠난 것은 전후 유럽에서 일어난 크고 작은 분쟁을 수습하기 위함이었음을 알게 되는데, 어머니가 가족을 버리고 국가와 전쟁을 택한 것 자체도 충격이지만, 당시 어머니의 곁에 어머니를 그러한 삶으로 이끈 한 남자가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혼란을 느낀다. 너새니얼이 몰랐던 진실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너새니얼은 부모가 떠난 후 부모 대신 자신과 누나를 돌봐준 어른들의 행적을 조사하고 그 중 한 사람을 만나는데, 너새니얼에게는 아름답고 찬란했던 그 시절이 그에게는 다른 의미였음을 알고 충격을 받는다. 게다가 그 때는 어렸기 때문에 그 모든 일을 당할 수 밖에 없었다고 여겼던 자신이 누군가에게 지우기 힘든 상처를 남긴 가해자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 대목에서 그저 순진한 소년/청년 같았던 너새니얼에 대한 인상이 많이 바뀌기도 했다.)


한 번만 읽어도 충분히 재미있고 감동적인 작품이지만, 다양한 시점의 이야기가 있고, 각 시점의 이야기를 통해 다른 시점의 이야기를 보다 깊게 이해할 수 있는 구성이라서 여러 번 읽으면 훨씬 더 재미있을 것 같다. 이 소설은 너새니얼의 관점으로 쓰여 있지만 로즈나 레이철, 나방, 화살, 아그네스의 관점으로 보면 또 다른 이야기가 있을 것 같고, 소설에선 끝내 밝혀지지 않은 아버지의 이야기도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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