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는 꼭 그들이어야 했다.
그를 멸시한 세계에 내가 속하게 되었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그의 가장 큰 자부심이요, 심지어는 그의 삶의 이유 자체였는지도 모른다. (p.127)
나에겐 최근까지도 부모에 대한 컴플렉스가 있었다. 그것이 일상생활을 하는데 불편함을 가져다주는 정도는 아니었지만 잊을만하면 가끔씩 툭 튀어나오곤 했다. 남동생이 직장을 구하기 위해 여기저기 면접을 보러 다닐때면 왜 우리 아빠는 당신의 아들을 아무 직장에나 툭 꽂아줄만큼 사회적 위치가 단단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고 부모가 사회적으로 단단한 위치에 있는 남자와 연애를 하게 되었을 때에는 우리 부모님은 그만큼 배우지 못해서 문화적 차이가 있을테니 저 남자와는 금세 끝내버려야겠군, 하는 생각을 했다. 내가 대학교육까지 받았다는 것, 내가 알파벳을 알고, 음악을 듣고 영화를 들으면서 이러저러한 의견과 생각을 보탤 수 있다는 것, 그것들을 글로 써낼 수 있다는 것, 그 교육의 과정 모두는 영어단어를 읽을 줄 모르고 사회적으로도 소시민의 위치에 놓인 우리 부모가 한 일이라는 것. 그런 부모가 없었다면 지금의 나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을 거라는 것을 아주 늦게야 알게됐다.
한때는 그런 원망도 했다. 나의 부모가 조금 더 잘났다면 그러니까 조금 더 배우고 조금 더 부자였다면 어릴때 내게 어떠한 능력이 있는 줄 미리 발견하고 더 큰 사람으로 키울 수 있지 않았을까. 언젠가 가족들이 식사하는 자리에서 아빠는 '김연아 부모는 좋겠다, 김연아가 잘나서' 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때 남동생은 아빠께 이렇게 대꾸했다. '김연아가 우리집에서 태어났으면 어차피 우리가 다닌 회사에 다녔을걸' 이라고.
그 말은 그때 우리 부모님의 가슴을 찢어 놓았을까? 우린 모두 그 때 웃었지만 그 말은 부모에게 상처였을까? 나는 종종 엄마에게 왜 우리는 잘난 친척조차 없어서 내가 고작 이정도의 사람밖에 되지 못하게 한거냐고, 왜 엄마는 엄마와 똑같은 처지의 남자와 결혼했느냐고 내뱉곤 했다. 그때마다 엄마는 그러게 말이다, 내가 좀 더 잘난 사람과 결혼했다면 너가 좀 더 훌륭한 사람이 되었을지도 모르는데, 라고 하셨더랬다.
작년에 사주를 보았을 때, 사주를 보아주셨던 분이 내게 그런 말씀을 하셨다. 부모가 참 좋다고, 부모자리를 정말 잘 만났다고.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부모한테 크게 위로 받은 기억도 없는 것 같고 그저 나는 부모를 원망했던 순간들만이 떠오르는데, 그런데 내가 부모를 잘만났다고?
그러다가 인터넷에서 잘난 엄마의 글을 읽게 됐다. 본인이 많이 배우고 본인이 이미 돈이 많았던 엄마. 그런 엄마의 일상이었는데 나는 갑자기 내가 그런 부모를 가지지 않아서 다행이란 생각이 드는거다. 내 성격에 많이 배우고 많이 가진 부모를 만났다면 나는 자식이지만 늘 기가 죽었을 것 같은거다. 우리 부모는 이만큼인데 나는 왜이렇게 못난 딸로 태어났을까 하는 자책에 시달릴 것만 같은거다. 실제 그런 환경이 된다면 내가 어떤 성격을 형성할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때서야 비로소, 나에게는 우리 부모가 최상이었구나, 하는 깨달음이 온 것이다. 나를 이만큼 키워내기 위해서는 우리 부모가 존재해야 했다. 더 거만해지지 않기 위해서, 더 비약하지 않기 위해서, 더 모나지 않기 위해서, 그래서 내 부모는 나에게 필요한 최상의 보호자였던 거구나. 내게는 정말이지 이런 부모여야 했구나, 하고. 그래서 친구를 만나 이런 이야기를 했다. 그때 사주 보시는 분이 내게 부모를 잘 만났다고 했는데 이해하지 못했었다. 그러나 나는 이제 내가 정말 최상의 부모를 두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그러자 내 말을 들었던 친구는 너는 정말 최상의 부모를 두었는데 너가 그동안 모르고 있었던 것 같다고, 나는 너를 보고 너와 이야기하다 보면 정말 좋은 부모님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고 말했다. 나는 내 친구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을 오히려 내가 모르고 있었던거다.
내가 부모에 대한 컴플렉스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을까. 나에겐 '내 아이의 아빠'에 대한 로망이 있었다. '내 남편'에의 로망이 아니라 '내 아이의 아빠'에 대한 로망. 그는 양복을 멋드러지게 차려입고 출퇴근을 해야할 것, 단단한 어깨와 팔로 아이를 한 손에 안고 씩씩하게 걸을 수 있을 것. 그리고 무엇보다 아이가 교과서나 참고서 혹은 소설책을 내게 들고와서 '이건 왜 그런거에요?' 라고 물었을 때 "네 아빠에게 물어보렴" 이라고 대답할 수 있을 것. 그게 내가 내 아이의 아빠에 대해 요구한 것이었다. 내가 그런 아빠를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아빠를 내 아이에게 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는 조금씩 바뀌어갈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아직 그 로망 자체를 포기할 수는 없지만, 그 로망이 실현되지 않더라도 그 나름의 의미가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하나씩 하나씩 나는 바뀌어가고 깨달아가고 있다.
아니 에르노의 소설을 일전에 읽어본 적이 있다. 그 소설은 남자와의 연애를 풀어 쓴 것이었는데 너무나도 솔직해서 거부감이 들었다. 나는 알고 싶지 않았고 그래서 더이상 아니 에르노를 읽고 싶어지지 않아졌다. 그래서 이 책이 아니 에르노의 책이라는 걸 알았을 때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았었다. 그러나 다른분의 리뷰에서 위에 인용한 저 문장을 보았다. 아, 그녀도 그녀를 이만큼 키워내준 아버지가 가난했구나, 소시민이었구나, 배움에 대해 일종의 경외감마저 가진 사람이었구나, 하는걸 깨닫는 순간 그녀가 지독하게 솔직히 써냈을것이 분명한 이 책을 읽고 싶어졌다. 그녀가 아버지에 대해 써낸 글은 내가 읽기에 적절했다. 그녀가 아버지에 대해 솔직히 말해준것이 내게는 무척 유용했고 고마웠다. 그녀같은 여자가-내게는 꽤 큰 위치에 있다고 느껴지는-, 나와 같은 아버지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자라는 동안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다는 것이 내게는 위안이되었고 또 문제의 해결로까지 느껴졌다.
별것도 아닌 일들을 가지고 식탁에서 입씨름이 벌어지곤 했다. 그는 토론할 줄을 몰랐기 때문에, 난 항상 내가 옳다고 생각했다. 또 그가 먹고 말하는 방식에 대해 이것저것을 지적했다. (p.91)
나도 나의 부모와 의견충돌이 있을 때 얼마나 많이 내가 옳다고 생각했는지, 얼마나 많이 '그들은 몰라' 라고 생각했던지. 위 문장을 읽다가 가슴이 꽉 막히는 것 같았다. 내가 지적할 수 있게 하기 위해 교육을 받게끔한게, 누가 한 일이란 말인가.
그는 덮고 있던 이불을 잡아당겨 내가 매트리스를 볼 수 있게끔 해주었다. 쓰러지고 나서 처음으로 주위에 있는 무언가에 관심을 보인 거였다. 돌이켜보면 그때 난 아직 모든 가능성이 남아 있다고 생각했었다. 아버지는 자신의 병세가 그렇게 깊지 않다는 걸 보여 주려고 그렇게 말한 거였지만, 이렇게 어떻게 해서든 세상에 달라붙으려는 노력 자체가 거기서 멀어져 가고 있다는 반증이었다. (p.121)
내가 나의 부모의 죽음의 시간을 늦출 수 있을까? 그 시간이 닥쳤을 때 내가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을까? 내가 무너지지 않을 수 있을까? 내가 그들이 편히 눈감을수 있도록 할 수 있을까? 나에겐 어떤 식으로든 많은 후회가 존재하겠지. 앞으로도 또 후회할 일을 만들겠지.
마지막 페이지들을 늦추고 싶다. 그것들이 항상 내 앞에 남아 있었으면 좋겠다. (p.114)
나도 마지막 페이지들을 늦추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