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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과 현실의 경계를 허물다
얼마 전에 읽은 추리소설인 김내성 작가의 <가상범인>이 생각났다. 작가인 유불란이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인 몽란이 살인사건의 용의자가 되자, 자신이 범인이라고 생각하는 나용귀를 범인으로 밝히는 극본을 써서 연극으로 상연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추리소설은 예상과는 다른 방향으로 나갔는데, 읽는 내내 슈니츨러의 또 다른 소설인 <꿈의 노벨레>가 생각났었다. 그리고 다시 슈니츨러의 <초록 앵무새>를 읽는데, <가상범인>이 떠올랐다.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했건만, 슈니츨러의 희곡 또는 소설이나 <가상범인> 같은 추리소설이나 모두 그 사람 속을 아는 척 하는 점이 비슷하다. 현실과 연극의 경계가 사라지고 우리는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가짜인지 알 수 없게 되어버린다. <초록 앵무새>란 술집에 온 손님들 중 일부는 자신의 무용담을 떠들어대지만 사실은 술집 주인인 프로스페르가 고용한 배우들이다. 귀족으로 결혼식에 다녀온 것처럼 말하지만 낡은 옷을 입고 있는 모리스와 에틴은 결혼식장에서 좀도둑질을 했다고 자랑한다. 기욤은 재판관의 집에 불을 질렀다고 하고, 조르주트는 창녀인 척 하지만 사실 가장 정숙한 부인이다. 하지만 이 술집에 처음 온 그레는 진짜 자신의 아주머니를 살해한 범죄자이며 이 술집의 손님들 지갑을 훔치려는 시도를 하기도 한다. 후작 부인 세브린은 바람둥이인 척 하는데 진짜 바람둥이이며, 가스통은 좀도둑 역할을 하다가 현실에서도 좀도둑질을 하다가 감옥에 갇힌다.


이렇게 연극은 현실과 연극 사이를 오가며 아슬아슬하게 우리의 판단력을 흐린다. 실제 같은 연극, 연극 같은 실제를 눈으로 보면서 더 이상 연극과 현실은 구분되기 어렵다. 실제로 바깥에서는 바스티유 감옥이 함락되는 등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는 중이었는데, 이 곳 술집의 관객인 빈 궁정의 귀족들은 그런 현실을 외면하고 '초록 앵무새' 술집이 주는 연극으로 도피하고 있는 듯 하다. 프랑수아 자작이나 알뱅 기사 또는 랑사크 후작과 세브린 후작부인 등 여러 귀족들이 이 술집에서 진실을 가장한 거짓을 혹은 거짓을 가장한 진실을 즐긴다. 그리고 앙리는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연기에 임했는데, 레오카디와 막 결혼하고 그녀를 극장에 데려다 준다고 나갔다가 혼자 술집으로 돌아온다. 그는 자신이 레오카디의 불륜남인 카디냥 공작을 죽였다고 자백한다. 손님들은 모두 거짓이라 생각하고 호응하지만, 주인인 프로스페르는 사실이라 생각하고 그를 도망시키려는데 카디냥 공작이 등장한다.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가. 결국 마지막에 앙리는 카디냥 공작을 죽임으로써 연극을 실제로 전환시키고 민중의 영웅이 된다.


두 번째 희곡인 <아나톨의 망상>은 말 그대로 아타톨의 망상을 그린 연극이다. 아나톨은 끊임없이 여자의 속내를, 지조를, 사랑을 의심하던 상류층 젊은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냥 사교계에서 소외된 늙은이일 뿐이다. 사교계의 꽃들이 자신을 좋아한다고 착각하지만 오래 전에 잠깐 만났던 베르타를 잊지 못하고 그녀를 다그치기까지 한다. 왜곡된 기억 속에서조차 베르타를 의심하고, 왜곡된 시선으로 보는 현실에서도 아네테의 행동을 추파로 여긴다.


한마디 해 주고 싶다. 아저씨. 그냥 친절은 친절로 받아들여요. 그런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나요? 거울을 봐요. 어? 거울에 고기 있다가 왠지 어울릴 것 같다.


슈니츨러는 이렇게 망상과 현실의 경계를 허물고 유쾌한 것처럼 보이는 한 인간의 내면을 끌어올려 우리에게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마치 <카사노바의 귀향>에서 이제는 늙어버린 카사노바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물론 아나톨이 카사노바처럼 비열하지는 않았다는 게 다행이라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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