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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만이 가능한 것들에 대하여...

영화 <매트릭스>에서 모피어스는 매트릭스는 진실을 보지 못하도록 눈을 가리는 세계를 의미하며, 이는 모든 곳에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네오에게 두 가지 형태의 알약을 건넨다. 파란 알약은 비록 허구로 이루어진 세계이지만 그러한 현실에 안주하며 살 수 있는 약이고, 빨간 알약은 참혹하고 고통스럽지만 거짓을 꿰뚫고 불편한 진실을 바라볼 수 있는 약이다. 네오는 단 한번의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의 순간에 빨간 알약을 삼키고 진실을 택한다. 김영하 작가의 <작별 인사>를 읽으며, 나는 매트릭스의 빨간 알약을 떠올렸다.

"자기가 누구인지 잘못 알고 있다가 그 착각이 깨지는 것, 그게 성장이라고 하던데?" (p. 83)



<작별인사>는 많은 이들이 기다려 온 한국문학을 대표하는 김영하 작가의 9년만의 신작 장편소설이라는 점에서 많은 화제를 모았다. <작별인사>는 한 소년이 갑자기 마주치게 된 일련의 사건을 겪으며, 인간성의 경계와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인지, 필멸의 존재인 인간이 꿈꾸는 불멸의 삶에 대해 깨달아 가는 과정을 그린 성장소설이다. “‘나'는 어디까지 '나'일까? (p. 201)“라는 철이의 질문과 인간의 삶을 바라보는 선이와 달마의 철학적 논쟁들은 독자들에게도 잔잔한 울림과 감동을 선사한다.



<작별 인사>는 작가가 처음으로 시도하는 SF 소설이라는 것도 큰 화제가 되었다. 과학기술이 가진 잠재력을 기반으로 특정 세계관과 시스템을 구성하고 그 세계에서 살아가는 인간을 다루는 것이 SF (Science Fiction)의 장르적 속성이라고 한다면 <작별 인사>는 ‘기술’이나 ‘세계’ 그 자체 보다는 그에 반응하는 ‘인간’에 주목하는 SF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이성과 기술이 구현해내는 세계에 대한 냉철한 분석 보다는 그러한 세계를 살아가는 인간의 다채로운 감정과 삶을 받아들이는 태도에 주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가 <작별 인사>를 읽으며 어디에도 없는 그러나 어딘가에 있을 것 같은 느낌을 받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마치 어딘가에 존재할 것 같으면서도 현실에서 찾아볼 수 없는 소설 속 안드로이드 로봇처럼 말이다.



우리는 흔히 SF 가 그리는 미래는 현시대와는 동떨어진 어쩌면 향후에 도달할지 모를 미래의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SF가 그리는 미래의 어느 시점은 그 아득한 시간의 간극이 걷어내고 보면 또 다른 우리들의 모습이 숨겨져 있다. 언젠가 우리는 현재와는 다른 모습으로, 우리와 비슷한 모습을 한 누군가와, 또는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또 다른 누군가와 공존하면서 전혀 다른 세상에 적응하며 살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작별 인사>의 선이와 철이의 모습은 현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과 닮아 있고, 김영하 작가가 그려 낸 미래의 어느 시점은 그 아득한 시간의 간극이 걷히면 또 다른 우리의 모습으로 남는다. 세월의 흔적을 걷어내고 바라보면 저마다가 직면한 세상에 맞서 살아가는 똑같은 인간만이 남는 것이다. 환경이 달라지더라도 누군가와 상호작용을 하면서 세상을 살아나가는 삶의 원형은 현재의 삶이나 미래의 삶이나 크게 달라지진 않는다.



"개별적인 의식을 가지고 살아 있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행운이니 너무나 짧은 이 찰나의 생을 통해 조금이라도 더 나은 존재가 되도록 분투하고, 우주의 원리를 더 깊이 깨우치려 애써야 한다는 것이다." (p. 108)



인간의 삶은 평범한 사건들이 빚어낸 기적이고 역사다. 사소하고 시시콜콜한 삶의 순간들이 누적되어 이루어진 인생은 누구에게나 값지고 귀한 것이다. 그러한 순간들이 모여서 시간과 역사를 이루고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개별적 세계가 빚어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저마다의 역사와 존재 이유를 가진 하나의 섬이다. 서로의 고유한 존재방식, 상실과 결핍의 기억들은 우리 각자를 섬으로 만든다. 하지만 섬은 연결과 단절의 이중성을 가진 특별한 공간이다. 수면 위 드러난 부분을 기준으로 보면 섬은 단절된 공간이지만 드러나지 않은 수면 밑으로 섬과 섬들은 연결되어 있다. 삶이란 저마다 쌓아둔 사연들로 섬들이 나누는 대화가 아닐까 생각했다. 그러면서 서로의 존재를 느끼고 온기를 나눌 수 있으니 말이다.



"오즈의 마법사의 허수아비가 인간들은 참으로 번거롭겠다고 불평했던 바로 그것들이 나한테는 귀한 선물이었다." (p. 276)



또한, 인간은 상실과 결핍을 안고 살아가는 불완전한 존재이기도 하다. 하지만 어쩌면 그런 불완전함이야말로 각자 다른 정체성을 가진 채 서로 다른 상황에 놓인 우리를 하나로 연결시켜주는 매듭이 되는 것 아닐까? 신뢰와 사랑, 자발적 책임이 동반된 관계를 구축하고 마음을 나누는 것은 불완전한 현실을 일정 부분 해소시켜주는 심연의 해독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인간을 비로소 인간답게 만들어주고, 삶을 살아가는 근원적인 동력이 되는 것은 일견 불필요하거나 비효율적인 행위처럼 보이는 사랑, 우정, 신뢰와 같은 가치들이다. 서로를 향해 뻗는 온기 어린 손짓이 결국 메마른 삶에 활기가 되어 내일을 밝히는 희망이 된다.



코로나19는 그동안 다소 지루하게 느껴질 정도로 당연하게 펼쳐지는 것인 줄만 알았던 평범한 일상이 정말 이토록 소중한 것이었음을 우리가 절절하게 깨닫게 해주었다. 많은 이들이 정신적으로 또 경제적으로 힘든 나날들을 보냈고, 지금 이 순간에도 고통스러운 순간들을 견디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계속된다. 일상이 회복되지 못하면서 대면 모임이 최소화되고, 비대면 만남과 집에서 가족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증가한 것은 코로나가 만든 새로운 풍경이다. 코로나는 우리 삶의 많은 부분들을 바꾸어 놓았지만 삶의 근본적 속성까지 바꾸어놓지는 못했다. 사소하고 시시콜콜하지만 즐거움과 기쁨이 되고, 살아가는 동력이 되는 생의 순간들은 여전히 우리 곁에 남아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상실과 결핍, 몰이해라는 인간의 한계와 그러거나 말거나 상관없다는 듯 무심하게 흘러가는 세계 속에서 저마다의 속도와 방향으로 한 조각의 진실과 삶의 의미를 찾으려 애쓰는 것이 우리네 '인간'인지도 모르겠다.



“그 부분 다시 읽어줄래?”
“어디? ‘현실하고 다른 일을 상상해보신 적이 한 번도 없으세요?’ 이 부분?” (p. 289)



우리는 동시대를 같이 호흡하면서도 온전히 현재를 살아내지 못하고 누군가는 과거의 한때에 머무르고, 또 누군가는 과거의 기억을 넘어 미래를 응시한다. 동시대를 같이 호흡하면서도 온전히 현재를 살아내지 못하고 누군가는 과거의 한때에 머무르고, 또 누군가는 과거의 기억을 넘어 미래를 향하는 것은 인간은 물리적 시간인 ‘크로노스 (Kronos)' 보다 주관적이고 심리적 시간인 ‘카이로스 (Kairos)'의 영향을 더 많이 받는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과거의 기억은 현재의 우리를 구성하는 것인 동시에 미래를 꿈꾸고 호흡하게 하는 두번째 심장이다. 우리는 상실과 결핍, 몰이해라는 인간의 한계와 그러거나 말거나 상관없이 무심하게 흘러가는 세계 속에서 저마다의 속도와 방향으로 한 조각의 진실과 삶의 의미를 구하려 애쓰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어떤 것들, 예를 들어 윤리 같은 것들, 그런 것들을 다 저버린 채 냉혹하고 무정한 존재로 살아가게 될 때, 비록 내 몸속에 붉은 피가 흐르고, 두개골 안에 뇌수가 들어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대로 인간일 수 있는 것일까?" (p. 69)



인간은 유일하게 이야기를 만드는 종으로서, 이야기를 통해 서로 소통하고 서로를 향해 손을 뻗으면서 인간다움의 가치를 만들어가는 존재다. 소설을 읽으며 타인의 존재와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진실을 탐구하면서 존재하지 않았던 진실을 존재하게 만드는 것, 그 누구도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인양을 거부하는 진실, 존재의 본질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고 관심을 갖는다는 점에서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김영하 작가가 궁극적으로 말하고 싶었던 것은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흘러가는 세상의 흐름에 떠밀리지 말고 저마다의 속도와 방향으로 조금씩이라도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 아닐까? 우리는 어쩌면 지금 이 순간에도 편견과 집착에 사로잡혀 중요한 무언가를 놓치거나 주변의 소중한 것들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서로에 대한 관심과 공감, 진심이 담긴 위로가 진실을 가능하게 하고, 아주 미약한 부분이나마 세상을 진보시키는 원동력이 되는 것 아닐까? 김영하 작가의 <작별 인사>는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서, 또 우리의 과거와 현재, 또 미래의 삶에 대해서 곱씹어 볼 많은 질문을 던지고 있는 소설이다. 이번 20만 부 스페셜 에디션은 마치 과거와 현재, 미래는 연결되어 있다는 듯 변하지 않고 우리 곁을 지키는 밤하늘의 별들을 표현한 아름다운 표지가 소설의 아름다움을 더한다.



"내가 누구이며, 어떤 존재인지를 더이상 묻지 않아도 되는 삶. 자아라는 것이 사라진 삶. 그것이 지금 맞이하려는 죽음과 무엇이 다를까?" (p. 295)


  • 북플
  • thkang1001님도 <작별인사 (밤하늘 에디션)>을 좋아합니다. thkang1001님이 읽은 다른 책이 궁금하신가요?
  • 2022-09-30 23:32 좋아요  l  좋아요 0
  • 호우
  • 김영하 작가님의 소설을 다 가지고 계시네요. 하나로 모아 놓으니 참 아름답네요. 저 위에 사진은 매트릭스 영화의 장면인가요? 저도 영화는 봤는데 잘 기억이 안 나네요.오래 된 화장실 괴담이 연상되서 뭔가 무섭고도 재밌네요. 김영하님 소설을 많이 읽어보진 못 했는데 잘 읽히고 재밌었어요. 늘 생각 할 꺼리를 던져 주시고. <작별 인사>는 꼭 읽어봐야 겠어요.
  • 2022-10-01 07:45 좋아요  l  좋아요 2
  • 잭와일드
  • 네 매트릭스에서 네오가 자신의 선택으로 각성하게 되는 장면입니다. <작별 인사>에서 철이가 우연히 마주친 어떤 사건을 겪으며 자신의 존재와 삶에 대해 깨달아가는 것을 보면서 저 장면이 떠오르더군요. SF라고 해서 처음에는 놀랍고 살짝 걱정도 되었지만, 읽고 나서는 오히려 SF가 아니고서는 이 주제를 구현해낼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독을 추천 드립니다.
  • 2022-10-01 08:17 좋아요  l  좋아요 2
  • yamoo
  • 한때 김영하 작가 소설만 읽던 때가 있었는데....지금은 한국소설을 안 읽어서 잊혀진 작품들이 됐습니다. 그래도 아직까지 몇 권은 소장하고 있습니다만...조만간 한국작가들 작품은 전부 처부할 예정입니다.
  • 2022-10-01 11:48 좋아요  l  좋아요 1
  • 잭와일드
  • 아네 그렇군요. 뭔가 계기가 되는 일이 있으셨나 보네요.
  • 2022-10-02 01:25 좋아요  l  좋아요 1
  • mini74
  • 저는 이 책 읽으며 A.I 스필버그 영화가 떠올랐는데
    이 글 읽으니 매트릭스와도 통하는군요. 잘 읽었습니다.
    당선도 축하드려요 *^^*
  • 2022-10-07 22:11 좋아요  l  좋아요 1
  • 잭와일드
  • 감사합니다. mini74님 편안한 연휴 되시길 빕니다^^
  • 2022-10-09 11:25 좋아요  l  좋아요 1
  • 서니데이
  •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즐거운 연휴 보내세요.^^
  • 2022-10-07 22:24 좋아요  l  좋아요 2
  • 잭와일드
  • 감사합니다. 서니데이님 즐거운 연휴 되시길 빕니다^^
  • 2022-10-09 11:26 좋아요  l  좋아요 1
  • 이하라
  • 잭와일드님 이달의 당선 축하드립니다.
    행복한 주말과 연휴 되세요.^
  • 2022-10-07 22:44 좋아요  l  좋아요 3
  • 잭와일드
  • 감사합니다. 이하라님 행복한 연휴 되시길 빕니다^^
  • 2022-10-09 11:26 좋아요  l  좋아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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