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 사춘기 마음을 부탁해 - 청소년의 마음을 단단하게 해 주는 쓰담쓰담 그림책 상담실
남기숙 지음 / 상도북스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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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래전 나를 붙들어 준 그림책을 기억한다. 집 앞 도서관에서 열린 동화구연 수업에서였다. 누군가 나에게 읽어주는 그림책을 들은 경험이었다. 앞에 선 선생님이 동화책을 넘기며 읽어주시는 이야기를 따라가는데 가슴이 몽글몽글 벅찼다. 눈물이 날 것 같기도 했다. 선생님의 목소리도 좋았지만 눈을 맞추며 가만가만 책 이야기를 전해주시는 그 순간, 위로와 감동을 느꼈다. 지금도 그때의 마음을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다. 그 뒤로 나의 아이들에게 그림책을 읽어주는 마음이 달라졌던 것도. 그렇게 동화구연 수업을 열심히 들었다. 도서관에서 동화구연 봉사를 하게 되었고, 도민 강사로 그림책을 통해 아이들을 만나게 되었고, 보육교사가 되었다. 내향적인 나의 미래에 있어 전혀 예측할 수 없던 길이었다. 따뜻한 어른과 그림책으로 연결되어 내가 달라지게 된 그날, 내 안에 새로운 희망을 발견한 그날을 지금도 떠올리며 아이들을 만나고 나를 돌아본다.


아무리 우울한 순간이라 해도 절대 놓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희망입니다. 《어두운 겨울밤에》는 작가 플로라 맥도넬 자신이 우울증을 겪었던 경험을 담은 자전적인 이야기라고 합니다. 우울증이라는 깊고 깊은 겨울밤을 지나 탄생한 이 그림책 자체가 바로 희망의 증거가 아닐까요? -p.106


 그림책을 읽어주는 일은 나를 만나는 일이기도 했다. 그림책을 통해 받은 위로와 용기를 아이들에게 전달하고자 하면서, 수업을 준비하고 실행하고 실패와 좌절을 경험하면서 나를 더 돌아보게 되었다. 내가 충만하고 행복하지 않은 채로 아이들에게 그러한 마음을 전달할 수 없다는 걸 시간이 지날수록 알게 됐다.

 내 아이를 위한 독서였는데 자꾸만 내가 떠올랐다. 마흔이 넘어 이제야 나를 만난다. 그 과정에서 겪는 고민들을 아이들도 똑같이 겪고 있다. 나도 여전히 답을 찾지 못한 고민들은 나이를 먹어도 계속 이어지는 것일까. 아니면 아이들은 나와 달리 성인이 되기 전에 답을 찾게 될까. 고민하는 아이들의 모습은 안쓰럽고 뭉클하고 대견하다. 


 사춘기 자녀를 이해하기 위해 책의 도움을 받고 싶지만 육아서가 부담스럽고 어려운 분들께 이 책을 추천하고 싶다. 다른 아이들의 고민을 통해 내 아이의 모습을 거리를 두고 보게 되는 것과 더불어 나의 유년을 떠올리게 되고, 책 속 질문에 답하고 생각하는 과정을 통해 나를 돌아보게 된다. 아이를 이해하고 돌보는 부모가 되기 위해선 내가 먼저 돌봄을 받아야 한다. 누군가가 채워주는 돌봄은 나이가 들수록 어렵고, 어릴 때 충분히 받고 자라는 일도 드물다. 그러니 내가 나를 돌볼 수 있어야 한다. 충분하게, 자녀에게 해주고 싶은 돌봄을 나에게 먼저 해내야 한다.


인생에서 두려운 것이 어디 시험뿐일까요. 사춘기가 지나고 나면 또 새로운 두려움이 여러분 앞에 나타날 거예요. 사자로부터 벗어난 파랑 아이가 이번에는 곰과 마주쳤듯이 말이지요. 어쩌면 인생은 계속해서 새로운 두려움을 만나는 과정인 것 같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춘기에 진정으로 중요한 과제는 단지 높은 시험 점수를 얻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을 대하는 자세를 익히는 것입니다. -p.80


 아이들에겐 시간이 필요하다. 학업만큼 삶의 고민에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꼭 있어야 한다. 이러한 고민은 힘이 든다. 품을 들여야 하는 일이다. 하지만 학업으로, 시간이 없어서 불편한 마음을 피하고 미룬다. 아이들이 자신을 들여다보며 내가 좋아하는 것, 하고 싶은 것을 알고 표현할 수 있으면 좋겠다. 불편한 상황에서 자신만의 기준으로 스스로를 지켜낼 수 있는 힘과 마음을 발휘할 수 있길 바란다. 마음이 아프기 전에 이러한 힘과 마음을 다져가는 과정이, 연습이, 시간이 필요하다. 좋은 어른과 함께. 비난과 질책이 아닌 긍정의 말과 응원으로 좋은 질문을 건네고 이야기를 들어주는 어른. 아이들 곁에 좋은 어른이 있어야 한다. 그런 어른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나 또한 그런 어른이 되기 위해 그림책을 읽는다.


 사람을 바꾸는 말은 어렵고 멋진 말이 아니다. 익숙하지만 사려 깊고 따뜻한 한 마디의 말이 사람을 움직인다. 그림책에 쓰인 언어들이 그렇다. 짧지만 묵직하게 마음을 누르고 뻐근한 그 자리를 들여다보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거기엔 외면했던 감정들, 우리가 품어야 할 진짜 모습이 있다. 그림책은 읽고 즐기는 일을 넘어 각자의 이야기를 길어올리고 내보이게 한다. 아이와 부모, 아이와 어른 사이에서 심리적 거리를 좁혀 서로의 마음을 마주 보게 한다. 어렵지만 해볼 만한 일이다. 가만히 들여다보려는 마음만 있다면 말이다. 그 마음이 어려워 망설이게 된다면 이 책이, 돋보기쌤의 이야기가 힘이 되어 줄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마음에 오래 담고 싶은 문장 발견했다. '혼자만의 작은 모험' 그 표현을 보는 순간 그래 이거야, 하며 마음이 설렜다. 내가 지향하는 삶. 혼자만의 작은 모험 안에서 스스로의 선택과 실행으로 채워진 이야기를 갖는 것. 그 과정을 음미하고 숙려하는 것. 파랑 아이의 얼굴에 두려움 대신 차오르던 기대감(p.78)처럼 말이다. 오래전 나를 위해 샀던 『그림책으로 쓰담쓰담』 그리고 『그림책, 사춘기 마음을 부탁해』까지. 꼭 필요한 어른의 목소리로 질문과 응원이 담겨 있는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중요한, 그러나 알아보지 못했던 것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것을 가만히 바라볼 수 있다면, 그 목소리와 이야기 나누게 된다면 우리는 좀 더 좋은 어른 쪽으로 성장하리라 믿는다.


혼자만의 작은 모험을 마치고 아가타는 다시 캠핑장으로 향합니다.

돌아가는 발걸음이 가볍습니다.

아가타는 아이들과 어울려 모닥불 앞에 앉습니다.

그 자리가 자신에게 딱 맞게 느껴집니다.

산의 환한 웃음을 마음에 품은 채 아가타는 잠자리에 듭니다.

그렇게 산속 캠핑장의 밤은 깊어 갑니다.

-p.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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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19 11:1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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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랄맞음이 쌓여 축제가 되겠지
조승리 지음 / 달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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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저 불꽃을 볼 수 없다 해서 아쉽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나의 불꽃은 더 찬란하고 빛나기 때문이다. -p.15


 강릉으로 여행을 왔다. 바다가 보이는 숙소에서 이른 저녁을 먹고, 보고 싶은 책을 들고 창가에 앉았다. 피융 파바바바바방! 어둠이 덮인 바닷가에서 사람들이 불꽃놀이를 한다. 허공으로 쏘아진 불꽃이 한순간 강렬한 빛과 소리로 부서진다. 사람들의 와, 하는 소리. 행인의 시선이 그곳에 모였다 흩어진다. 모자로 보이는 일행은 노부인을 바다 앞에 세워두고 멀찍이 뛰어와 사진을 찍는다. 어서 보여주고 싶은 뒷모습으로 모래 위를 뒤뚱거리며 뛰어가는 모습이 아이 같다. 책을 읽다 고개를 들면 하나의 담요를 덮은 두 사람이 거기 있고. 또 고개를 들면 혼자 걷는 이가 있고. 다시 고개를 들면 아무도 없다. 순간 그 장면들이 불꽃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녀의 책에서도 그런 불꽃을 보았다. 작가의 이야기, 작가가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 작가가 그들에게 건넨 말과 그렇게 나에게로 온 문장들.


 그녀가 앞을 볼 수 없다는 걸 전혀 느끼지 못했다. 누구보다 밝고 진지한 눈으로 삶을 바라보고 생생하게 느끼고 있었다. 그녀는 슬픈 이야기를 하면서도 털썩 웃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그 무방비한 슬픔의 해제가 그녀의 무기였다. 오히려 그녀를 단단하게 만드는 유연함. 그녀의 춤을 닮았다.


 마음을 고쳐먹고 고객들을 대하자 일이 즐거워졌다. 

 나는 누군가에게 고된 삶을 견뎌내게 할 의지다. 살아갈 힘을 주는 사람이다. -P.37


 항상 시간은 모자라고 조급함과 조바심에 몸이 달았다. 늘 종종거리며 지내는데 남는 것은 없는 하루. 허무하고 무력했다. 자주 내가 갖지 못한 것에 마음을 두고 그것을 쫓느라 애썼다. 애써 가진 것들을 내팽개쳐 두고 나에게 없는 것들을 찾아 헤매며 시간을 소진했다. 나는 이 삶에 무얼 기대하며 사는 걸까. 나에겐 아무것도 아닌 일이 당신에겐 큰일이 될 수 있는 것처럼 그 무시무시한 모호함들로 삶은 점점 어렵기만 하고. 나이를 먹을수록 함부로 단정할 수 없는 많은 것들을 마주한다. 그 앞에서 우왕좌왕하며 우스꽝스러운 몸짓에 울다 웃음이 터지기도 한다.

 책을 읽으며 장애인 시위에 대해 아들과 나눈 대화가 떠올랐고, 샌드위치도 꿈이 될 수 있다는 것과(「당신의 꿈은 샌드위치」) 선한 마음도 누군가를 다치게 할 수 있다는 것(「정지된 도시」)에 대해 생각했다. 서슴없이 감정을 드러내고 상처를 주다 부둥켜안는 모녀를 보면서는 늘 조심하기만 했던 엄마와 나의 관계도 생각나고. 나도 부모님이 오지 않은 졸업식에서 내가 그들에게 이것밖에 안되는구나 싶었던 적이 있다. 나는 두려웠다. 두려워서 표현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는 그때의 서운함보다 부모가 된 마음으로 작가님을 안아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나 서운하고 속상하고 그리웠을지. 내가 다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 딸에서 엄마로, 다시 내가 되기 위한 과정으로. 문장 사이에 그녀가 뛰어넘은 가늠할 수 없는 고통과 시련들을 가늠하며 글로 뛰어넘는 마음에 대해 생각했다.


 곧 잃어버릴 세상이어서 모든 게 소중하고 아름다웠다. -p.123


 하루하루를 태워 만들어내는 불꽃들. 불꽃은 타올라 소진한다. 스스로 선택한 일이다. 그래서 위험하지 않고 아름답다. 우리는 그러한 소멸을 꽃이라 부른다. 그녀의 꽃을 통해 내 삶의 꽃을 본다. 내 주변의 꽃을 본다. 저마다 스스로를 태우며 다른 색깔로 함께하기에 알록달록 무늬가 되는 그 우연이 슬프면서도 아름답다.

 살아간다는 것은 내가 무엇이어서가 아니라 그저 살아있기에 충분히 가치가 있다. 나로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알면서도 서로에게, 스스로에게 여전히 해주기 어려운 말. 모질게 지적하고 평가하고 비판하는 세상이 무심코 던지는 말들 앞에 우산을 들고 설 수 있는 힘. 내가 그토록 찾아 헤매고 있는 건 딱 그만큼의 힘인지도 모른다.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내 것을 지키며 버텨낼 수 있는 힘. 그 우산 아래 누군가를 들여놓을 수 있는 힘. 어떠한 원망도 미움도 붙잡지 않고 흘러가게 내버려두고 나로 설 수 있는 것. 그것을 위해 매일을 버틴다. 지랄맞은 나날이 나를 키운다고 생각하면서. 지랄맞은 나날을 시원하게 태워 불꽃으로 완성시키는 기쁨을 떠올리면서. 그것은 소멸이 아니라 영원이다.


 보이지 않아도 보고 싶은 욕망은 있다.

 들리지 않아도 듣고 싶은 소망이 있다.

 걸을 수 없어도 뛰고 싶은 마음은 들 수 있다.

 모든 이들은 행복하고 싶은 욕구가 있다.

 비록 제한적인 감각이라 해도 나는 들을 수 있고 냄새 맡을 수 있으며 낯선 바람을 느낄 수도 있다.

 -p.50


 장애를 가진 사람이 아닌 그 사람을 궁금하게 만드는, 그런 이야기가 많이 들려왔으면 좋겠다. 장애가 있지만 음악중심 무대에 서고, 드라마에 나오고, 여행지에서도 만날 수 있고. 그들의 삶이 우리와 가까워져 아무 경계 없이 이름을 부르고 함께 하는 일이 자연스러운 것이 되길 바란다. 이것이 나의 아들에게 알려주고 싶은 마음이었는데, 나조차도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하기에. 모른다는 말이 부끄럽다. 장애를 가진 사람이 견뎌야 하는 편견과 이 사회가 배려하지 않는 부분들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나도 늘 걸어 다니던 길이 휠체어로는 다니기 어려운 길이라는 걸 아버지의 휠체어를 밀며 알게 되었으니까. 세상은 불편한 사람을 배려하고 양보해야 한다고 가르치지만 세상은 어디 그런가. 공평하다고 하면서 기회는 한정되어 있고 필요한 도움은 스스로 구해야 하며 그마저도 돈이 없다면 어려운 일이다. 무엇보다 불편하게 바라보는 시선은, 그녀의 글에도 나와 있지만 식은땀이 흐른다. 내가 살아가는 세상이 얼마나 작은 부분인지, 알지 못해 볼 수 없는 것은 얼마나 많은지. 그 앞에 넙죽 엎드려 겸손해지지 않을 수 없다.

 하루하루가 쌓여 이르게 될 그녀의 축제를 응원한다. 내 안에 터지는 폭죽과 그 소멸을, 기쁘게 끌어안는 용기를 알게 한 그녀의 문장 앞에 이 글을 꽃다발처럼 내려놓고 싶다. 당신이 애써 살아내고 있는 지랄맞은 하루하루를 나도 웃으며 건너볼 마음이 생겼다고. 알게 되어 반갑고 고맙다고. 오늘 하루는 조금 더 행복하길 바란다고 덧붙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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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에 세 번, 동네문화센터에 놀러 갑니다
정경아 지음 / 세미콜론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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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이 통일법 시행으로 두 번째 마흔을 산다. 두 번째니까 조금은 더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는 불혹의 마흔은 아직도 내게 먼 이야기인 듯하다. 요즘 고민은 점점 희미해져가는 나를 붙드는 일. 내게 부여된 수많은 역할을 수행하며 나를 챙기는 일은 뒤로 미뤄왔다. 딸로 며느리로 아내로 엄마로, 좋은 사람이기 위해 참 열심히 살았는데 이제는 그 마음이 버겁고 두렵기까지 하다. 앞으로도 이렇게 다른 이들만 챙기며 살아야 하나 싶은 마음은 억울함이 되고 서운함이 되어 나를 우울하게 한다. 애써 살아온 시간을 내 몫을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남만을 위해 살았다 생각하며 자책했다. 전과 달리 살고 싶은 마음에 뾰족한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지금도 그 과정 속에서 감정은 롤러코스터를 타지만 그런 나라서 다른 이들의 삶에 더 관심을 갖고 그들의 기술을 내게도 적용해 보려 한다. 두 번째 스무 살을 사는 내가 세 번째 서른에 접어든 이이의 글을 반갑게 읽게 된 이유다. 무엇보다 책 표지에 인생의 절전모드를 켜고 느슨하고 자유롭게 단순하고 호쾌하게,라는 말에 마음을 빼앗겼다. 지금 내가 바라는, 내 삶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힘을 빼는 법을 잃어버린 것처럼, 따뜻한 말을 잊어버린 것처럼 내가 나에게 가장 혹독한 시절을 지나고 있다. 스트레스를 받으면서도 스트레스인 줄 모르고 마음이 약해서라고 나를 탓했다. 그런 내게 저자의 문장은 따뜻한 다독임이었다. 어쩌면 듣고 싶었던 말들, 그 앞에 몸에 들어갔던 힘을 스르르 내려놓는다.


앞으로 나에게 남은 날을 세는 지혜는 없다. 그렇더라도 남은 날을 어떻게 살아갈지 궁리할 수는 있다. 잘 살아낸 하루하루가 행복한 잠으로 이어지듯이, 하루하루 잘 걷다 보면 마침내 해피엔딩에 이르지 않을까? 그렇다면 지금처럼 내가 좋아하는 것에 욕심껏 연연하면서, 게으르게, 제멋대로 살아봐야겠다.

너무 훌륭하지 않기. 후회나 자아 성찰도 너무 많이 하지 않기. 왜냐고? 이미 지나간 일은 돌이킬 수 없으니까. 어느 누구도 지나간 일의 기억에서 자유롭지 못하겠지만, 그렇다고 자신을 너무 비난할 필요는 없다. 내가 저지른 잘못엔 그 나름의 이유가 있었을 테니까. -p.216


"60년을 살고 났더니 이젠 모든 게 좀 담담해. 가족들이 너무 사랑스럽지도 너무 밉지도 않고, 그저 적당히 사랑하게 되더라. 어떤 사람들은 다시 한번 젊은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고 하던데 난 절대 아니야. 다시 그 난리 블루스를 벌여야 한다면 너무 힘들 것 같아. 젊은 건 한 번이면 족해." 다들 고개를 끄덕끄덕 -p.98


 전과 달리 살기 위한 시도를 해보지 않은 건 아니다. 많은 책은 나 같은 사람에게 착한 사람 증후군이다, 못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기적이어야 한다, 거절의 필요성 등을 이야기한다. 그렇게 해보려 했지만 어떤 상황에서든 나의 본래 모습은 나타났고 다짐한 것은 이뤄지지 않았다. 내가 먼저이지 못한 나를 자책하며 우울해지는 일이 반복되었다.

 나는 나였다.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온 나의 관성. 남보다 내가 불편한 게 낫고 나만 좋은 결정보단 나도 남도 좋은 선택을 할 수 있길 바라고 고민했다. 그렇게 하고도 타인을 생각하는 마음을 아름답게 바라보지 못했다. 항상 내 몫을 챙기지 못했다 책망만 했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수용하지 못했던 것이다.

 내가 가진 것 안에서 나를 발휘하는 것. 새로움을 만나며 가슴 뛰고 설레는 것. 무엇보다 그 모든 것 앞에 비장해지지 않기. 훌륭해지려 하지 않기. 즐거운 마음으로 지속하기. 저자의 글 속에서 따뜻한 단어들을 품는다. 삶은 유한하고 내일이 어찌 될지 모르는데 모호한 것들을 쫓느라 늘 허덕이며 힘을 뺐다. 힘이 모자라니 여유가 없고 나를 몰아붙이며 하루하루를 종종거렸다. 무엇을 하면서도 해야 할 것들을 생각하고 편할 날이 없었다. 버티기가 가능했던 것들이 (나이 때문인지) 버거워지면서 브레이크가 걸렸다. 나아가려 해도 나아가지 않는 몸과 마음. 잠시 멈춰 서서 나에게 진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여유를 찾고 주변과 함께 행복해질 수 있을지 생각해야 할 시간이 된 것 같다.

 이제는 어렴풋이 알 것 같다. 배려의 마음은 아무나 줄 수 있는 게 아님을. 나에겐 그런 에너지가 있었고, 그렇게 한 뒤에야 내 마음이 편했다. 그러나 점점 내가 달라지고 있는데 버틸 수 있는 경계, 한계를 움직이지 못하니 무너지며 지쳐가게 된 거고. 하지만 이제는 나의 경계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 나를 지키는 방식으로 적당하게 타인을 배려할 수 있어야겠다. 나를 가장 잘 돌볼 수 있는 건 나니까. 나여야 하니까. 혼자서도 행복한 내가 되기로 한다.


마음속에 새로움이 결핍될 때 인간은 늙고 낡아가는지도 모른다. 배움은 부족해진 새로움을 채워 넣으려는 안간힘일 것이다. -p.89


 아이가 처음 유치원에 가고 혼자가 되었을 때 막막한 시간을 달래준 건 도서관에서의 문화 프로그램이었다. 육아를 시작한 뒤 멀어졌던 내 이름을 10년 만에 덜덜 떨며 말해 보고, 새로운 것을 배우며 긴장하고 설레고 위로받았던 순간들. 그 시간을 시작으로 멈춘 듯했던 내 삶의 시간이 조금씩 움직였고 그렇게 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 안간힘으로 살았다. 무심코 돌아보면 손가락 사이로 모두 빠져나간 듯 허무한 날들이었는데 이렇게 누군가의 삶 속에서 불쑥 내 삶을, 안간힘을 쓰던 나를 마주하곤 눈시울이 뜨거워지기도 한다. 그러고 보면 모두는 같은 시간 위에서 저마다의 걸음으로 시간을 살아내며 비슷한 고민들로 힘들고 넘어지고 아파하는 것 같다. 오늘의 하루를 적당히 느슨하고 괜찮은, 나다운 나날로 보내기 위해 애쓰시는 모습을 만나면서 지금의 나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느꼈다. 이렇게 자신만의 기준을 만들기까지 얼마나 시행착오를 겪으셨을까 싶고. 그 시간이 멋진 한 권이 되어 비슷한 생각과 고민을 하는 이들에게 다정한 말로 건너오니 너무나 멋진 일이다 싶다. 언제 나에게도 이러한 시간이 찾아올지 알 수 없다는 생각. 존재를 잃어버린 허무한 마음과 함께, 노년에 올 수도 있고. 소중한 가족이 떠난 후나 아이가 다 커버린 듯 느껴지는 어느 날, 혹은 직장을 그만둔 뒤에 찾아올 수도 있고... 언제, 어느 순간에 맞닥뜨릴지 모를 당혹감이며 불안이고 고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를 기회로 만들려면 준비가 되어야겠다. 내가 비장해지지 않고 이 삶과 적당하고 느슨한 관계를 맺으며 살고 있어야겠다.

 출산율이 줄어 노인 부양에 대한 부담이 점점 커지는 미래가 오고 있다고 한다. 사회생활을 하며 청년기를 열심히 살았고 노년기에 이르러 새로움을 채우며 지혜를 도모하는 모습에 이 또한 또 다른 사회 역할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분들은 부양되어야 할 분들이 아닌 함께 살아가는 세대이며 지혜를 더할 어른인 것이다. 이러한 어른과 함께 살아가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기대하게 되었다. 세대를 가르는 것이 아니라 연결하는 일. 그렇게 함께 이야기를 듣고 나눌 수 있는 기회들이 많이 마련되었으면 좋겠다. 

 한 사람의 의미가 결코 생산, 재화에만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한 명 한 명의 생애가 서로의 삶에 뼈대가 된다. 어떤 시간을 살든 두려움 없이 뛰어들어 저마다의 새로움으로 뻗어가길, '굳이 최선을 다하지 않아도 되고 적당히 게을러도 괜찮은 날들'을 누리길, 마지막까지 이 삶을 온전히 살았다 쓰여지는 이야기가 많이 많이 들려오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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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 속에서 이룰 수 없는 일은 얼마나 많았던가 - 허수경 시선집
허수경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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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허수경 시인의 시를 읽는 기쁨 너무 벅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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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걸음씩 자라는 등산육아 - 엄마도 아이도 함께 크는 특별한 등산 체험 육아 가이드
이진언 지음 / 이은북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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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딱 한 번 온 가족이 함께 정상에 오른 적이 있다. 집 가까운 곳에 있는 왕복 2시간의 산행길. 코로나로 집에서만 지내던 초등학교 2학년, 5학년 아이 둘을 데리고 무작정 나선 길이었다. 산책로를 지나고 산행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 작은 아이가 다리도 아프고 그만하고 싶다며 칭얼거리기 시작했다. 나조차도 체력이 달려 가다 서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남편과 나는 난감한 눈빛을 주고받다 꼭 정상을 보고 싶다는 마음을 전했고 아이는 못내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작은 아이보다 몸집도 작고 어려 보이는 아이들이 폴짝폴짝 뛰어 산을 오르고 내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거봐, 작은 아이는 경험이 없어 힘듦을 버티지 못하고 엄살을 부리는 거라 생각했다. 좀 더 해보자! 할 수 있어! 격려하고 달래며 정상에 올랐다. 올라가랴 아이 마음 달래랴 힘든 산행이었다. 아이에게도 힘든 산행이었을 것이다. 멋모르고 엄마 아빠 오빠를 따라나선 산행길. 다리도 아프고 힘들고 정상은 보이지 않고. 왕복 2시간은 평균이거나 개인적인 의견일 뿐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시간은 아니었는데 이제와 생각하면 너무 쉽게 생각하고 내 고집으로만 아이를 이끌었다. 다른 아이들은 잘만 올라가는데 조금만 참고 더 해보자 하는 마음으로, 정상의 풍경을 만끽하는 기쁨을 알려주고 싶은 엄마의 욕심으로 아이의 마음을 들여다보지 못했다. 그리고 막연한 시도와 밀어붙임은 아이를 다시는 시도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날, 여름으로 기울어가던 계절의 뜨거운 볕 아래 시뻘게진 얼굴을 수건으로 감싸고 정상의 표지석 앞에서 찍은 사진은 좋은 추억으로 남아있다. 힘들어하면서도 끝까지 해낸 아이들이 기특했다. 2시간 정도 걸린다던 산행은 세 시간이 되고 네 시간이 되었지만 끝까지 함께 해내 기쁜 시간이었다. 집으로 돌아와 종아리의 뻐근함과 뒷꿈치를 들면 벌벌 떨리던 서로의 다리를 보며 웃었다. 하지만 그 뒤로 아이들은 산에 가자면 진저리를 쳤다. 아이들에겐 너무 힘들었던 기억만 남아있었다. 시간이 많이 흘렀음에도 이따금 등산 얘기를 꺼내면 그때를 이야기하며 거절하곤 한다. 나의 욕심이 아이들에게서 산을 빼앗았는지도 모른다는 생각.

한걸음씩 자라는 등산 육아를 읽으며 그 날의 등산을 다시 되짚어 보았다. 이 책에 관심을 갖게 된 시작은 동네로만 한정되어 있던 나의 등산 코스를 좀더 넓히고자 함이었지만, 글을 읽으며 자연스럽게 아이들과의 등산을 떠올렸고 다시 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산에서는 냉정하게 결정을 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 지나치게 안전함을 추구하다 보면 등산 실력이 늘기 어렵겠지만, 적절한 타이밍에 포기하고 다음을 기약할 줄도 알아야 한다. 그때 중요한 것은 완등이나 결과에 대한 집착이 아니라 내 아이와 더 오래 건강하고 즐겁게 등산하겠다는 믿음이다. -p.164

 

 

 책에는 등산 초보자에게 실용적인 정보들이 간결하게 담겨 있다. 무엇보다 힘든 등산에서 아이의 마음을 읽어내는 어른의 시선과 태도, 함께 하는 등산에서 잊지 않아야 할 부분, 함께 성장하는 이야기들을 만날 수 있어 좋았다. 아이의 체력과 관심을 고려한 계획을 위해 쉬운 코스부터 어려운 코스까지 작가의 경험을 녹인 다양한 팁이 소개되어 있어 쉬운 산행부터 차근차근 시작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고 아이와 함께 할 수 있겠다는 설렘도 느꼈다.

 운동을 꾸준히 하고 체력이 올라오면서 등산 생각이 자주 났다. 집 가까운 산을 오르더라도 하루의 시간을 내야하기 때문에 좀처럼 쉽지 않는 산행이지만, 항상 체력이 되지 않아 포기했던 산의 정상을 한 번 보고 난 뒤엔 산에 가고 싶은 마음이 더 자주 찾아왔다. 한 번 더 가야지 하는 마음을 끌어안고 어느 새 여름이 되고 그 여름도 조금씩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 창밖으로 초록의 옷을 입고 우뚝 선 산을 보고 있으면 몸과 마음이 편안해지고, 그곳에 가고 싶어진다. 그 마음을 나의 아이에게 어떻게 나눠주면 좋을까. 어쩌면 지금의 산은 쑥 자란 네게 그 때만큼 힘들지 않을 거란 사실도 알려주고 싶다.

 

 마음의 평안은 정신적인 힘 뿐만 아니라 힘든 마음을 지탱할 수 있는 신체적인 힘에서도 온다. 등산에서 가쁜 숨을 달래고 힘든 계단을 오르며 나와 가장 많은 대화를 했고 나를 오래 들여다보았다. 뒤따르는 이에게 선뜻 길을 내어주고 나만의 속도로 산을 올랐다. 정상에 오르는 것도 좋지만 힘든 시간을 견디는 지금을 온전히 밟고 바라보며 스스로 격려하고 응원하는 마음도 중요했다. 절에서 들리는 종소리, 발 밑에서 사그락 거리는 마른 잎소리, 하늘 위에 나뭇가지들이 마음대로 그린 장면 속에 나를 둘러싸던 높은 건물들이 작아지고 작아지는 것을 바라보며 나 또한 얼마나 작은 존재인가를 겸손히 받아들이기도 했다. 무거웠던 물기를 짜낸 듯 가벼워진 마음으로 산을 내려오면 무엇을 얻으려 애쓰던 마음을 내려놓고 온전한 나로 다시 일상에 설 수 있었다.

 

 

등산을 할 때는 각자의 성향에 맞춰 속도와 상관없이 안전하게 완등을 목표로 해야 한다. 누구나 자신에 맞는 성공 경험을 갖게 만드는 것이다. 내가 아이들과 등산을 하면서 맛본 가장 큰 성취는 아이들 모두 소외감 없이 자신만의 성공 경험을 만들어 간 것이었다. -p.37

 

 

 다음을 생각하면, 그러한 생각을 한 나를 자책할 때가 많았다. 다음에 이르고 또 그 다음에 이르며 걸음을 멈추지 않는다면 그것은 도달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도달해가고 있는 중이며 나는 다만 과정 속에 있는 것이라는 걸, 더 건강하고 즐겁게 이 삶을 살아가겠다는 믿음으로 되세겨본다. 등산은 때때로 내게 잃어버린 다짐을 되찾게 한다.

 저자의 산행을 동행하며 숨이 차고 가슴이 뛰기도 했다. 좋아하지만 어쩐지 늘 막막하기만 했던 등산을 조금은 편안하게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앞으로는 남편과만 등산을 하게 될거라 생각했는데 아이들과도 다시 등산을 시작해보려 한다. 어느 새 나만큼 자란 아이와 앞서거니 뒷서거니 산을 오르며 우리의 시간에 새겨질 우리만의 등산이 기다려진다. 어느 날은 그러한 우리의 이야기가 누군가에게 닿아 또 다른 희망이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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