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어나더커버 특별판)
줄리언 반스 지음, 최세희 옮김 / 다산책방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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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나의 예감은 틀렸다.
도대체 찌질한 토니의 기억은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가?

나는 우리 모두가 이러저러하게 상처받게 마련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완전무결한 부모와 오누이와 이웃과 동료로이루어진 세상을 사는 것도 아닌데, 상처를 피할 도리가 있을까. 그렇다면 문제는, 수많은 것들이 걸린 그런 문제로 인한 손실에 어떻게 대처할까이다. 상처를 인정할 것인가, 아니면 억누를 것인가. 또 그 상처는 우리의 대인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인가. 상처를 받아들여 중압감을 덜어보려는 사람도 있을 테고, 상처받은 이들을 돕는 데 한평생을 바치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더 이상 상처받지 않는 것을 주된 목표로 삼는 사람도 있다. 이들이야말로 피도 눈물도 없는 부류이자, 가장 조심해야 할 부류다.
- P81

어쩌면 이것이 젊은 사람과 나이 든 사람의 차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젊은 시절에는 자신의 미래를 꾸며내고,나이가 들면 다른 사람들의 과거를 꾸며내는 것. - P141

그런데, 왜 우리는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유순해진다고 생각하는 걸까. 잘 살았다고 상을 주는 게 인생이란 것의 소관이아니라고 한다면, 생이 저물어갈 때 우리에게 따뜻하고 기분좋은 감정을 느끼게 할 의무도 없는 것 아닌가. 생의 진화론적목적 중에 향수라는 감정이 종사할 만한 부분이 과연 있기나한걸까. - P144

그러나 시간이란.... 처음에는 멍석을 깔아줬다가 다음 순간 우리의 무릎을 꺾는다. 자신이 성숙했다고 생각했을 때 우리는 그저 무탈했을 뿐이었다. 자신이 책임감 있다고 느꼈을때 우리는 다만 비겁했을 뿐이었다. 우리가 현실주의라 칭한것은 결국 삶에 맞서기보다는 회피하는 법에 지나지 않았다.
시간이란...... 우리에게 넉넉한 시간이 주어지면, 결국 최대한의 든든한 지원을 받았던 우리의 결정은 갈피를 못 잡게 되고,확실했던 것들은 종잡을 수 없어지고 만다. - P162

우리는 살면서 우리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얼마나 자주 할까. 그러면서 얼마나 가감하고, 윤색하고, 교묘히 가지를 쳐내는 걸까. 그러나 살아온 날이 길어질수록, 우리의 이야기에 제동을 걸고, 우리의 삶이 실제 우리가 산 삶과는 다르며, 다만이제까지 우리 스스로에게 들려준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는사실을 깨닫도록 우리에게 반기를 드는 사람도 적어진다. 타인에게 얘기했다 해도, 결국은 주로 우리 자신에게 얘기한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 P165

다. 그에 비하면 나는 언제나 흐리멍덩했고, 인생이 내게 던져주는 얼마 되지도 않는 교훈에 대해 크게 깨달을 깜냥도 못 되었다. 내 식으로 말하면, 나는 삶의 현실에 안주했고, 삶의 불가항력에 복속했다. 만약 이렇다면 이렇게, 그렇다면 저렇게하는 식으로 세월을 보냈다. 에이드리언 식으로 말하면 나는삶을 포기했고, 삶을 시험해보는 것도 포기했고, 삶이 닥쳐오는 대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난생처음, 나는 내 온 인생에 대해한결 총체적인 자기연민과 자기혐오 사이의 어딘가에 위치한-후회의 감정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살아온 어느 하루도후회되지 않는 날이 없었다.  - P173

인성의 깊이와 세월의 흐름은 비례하는 걸까? 소설에선 물론 그렇다. 그렇지 않다면, 스토리라고 할 수 있는 건 거의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실제 인생에선 어떨지 가끔 궁금해질 때가 있다. 우리의 태도와 견해가 바뀌고, 새로운 습성과 기백이생기긴 하지만, 그건 뭔가 다른 것, 이를테면 장식에 가까운 것이다. 어쩌면 인성이란 다소 시간이 지나서, 즉 이십대에서 삼십대 사이에 정점에 이른다는 점만 빼면, 지성과 비슷할지도모른다. 그 시기가 지나면 우리는 그때까지 쌓은 소양에 여지없이 고착되고 만다. 우리에겐 우리 자신뿐이다. 그렇다면 그걸 통해 여러 인생을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폼 잡-고 말하려는 건 아니지만 우리의 비극까지도 - P180

‘축적의 문제‘라고 에이드리언은 썼었다. 축적의 문제. 어떤말에 돈을 걸고, 그 말이 이기면, 그 상금을 다음번 경기의 다음번 말에게 건다. 이런 식으로 승리는 축적된다. 그렇다면 패배도 축적되는 걸까? 경마에서는 그렇지 않다. 그저 첫 번째노름 밑천을 잃을 뿐이다. 그렇다면 인생에서는? 다른 법칙을적용해야 할지도 모른다. 한 관계에 승부를 걸었으나 실패로끝난다. 계속해서 다음번 관계에서도 실패하고 만다. 이때 잃는 건 단순히 두 번 뺄셈을 하고 난 값이 아니라, 우리가 내걸었던 것의 배수이다. 아무튼 그런 기분일 것이다. 인생은 단순히 더하고 빼는 문제가 아니다. 상실의, 혹은 실패의 축적과 곱셈이다. - P181

이십대에는 자신의 목표와 목적이혼란스럽고 확신이 서지 않는다 해도, 인생 자체와, 또 인생에서의 자신의 실존과 장차 가능한 바를 강하게 의식한다. 그후로・・・・・・ 그후로 기억은 더 불확실해지고, 더 중복되고, 더 되감기하게 되고, 왜곡이 더 심해진다. 젊을 때는 산 날이 많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삶을 온전한 형태로 기억하는 게 가능하다.
노년에 이르면, 기억은 이리저리 찢기고 누덕누덕 기운 것처럼 돼버린다. 충돌사고 현황을 기록하기 위해 비행기에 탑재하는 블랙박스와 비슷한 데가 있다. 사고가 일어나지 않으면테이프는 자체적으로 기록을 지운다. 사고가 생기면 사고가 일어난 원인을 명확히 알 수 있다. 사고가 없으면 인생의 운행일지는 더욱더 불투명해진다. - P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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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모스 - 보급판
칼 세이건 지음, 홍승수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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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세이건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생각해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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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깡의 인간학 - <세미나 7> 강해: 윤리 그 자체인 인간 존재에 관하여
백상현 지음 / 위고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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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지는 두 번째 테제에서 라깡은 실재가 큰사물의 보증자라고언급한다. 여기서 큰사물은 이후 강의에서 중심 개념을 차지하는데,
우선 간단한 묘사로 시작하면 다음과 같다. 큰사물이란 어머니 욕망의 자리이며, 억압 이전에 존재했던 것으로 가정되는 주이상스의 대상이 은폐된 영역이다. 큰사물의 보증자로서 실재란 통제된 현실의 토대를 구성하는 실재, 즉 현실의 가상을 지탱하는 보다 근본적인 현실을의미한다. 도덕법칙은 바로 이것을 테두리치고 대상화하면서 사후 그것을 악으로 규정하는 단계로 전개해나간다. 그런 의미에서 주이상스의 자리인 큰사물은 단지 억압의 대상일 뿐만 아니라 도덕법을 끌어 들여 다양한 분절을 가능하게 하는 일종의 중력장을 형성한다. 라깡이 두 테제로 동일하게 말하고자 하는 바는, "도덕법이 쾌락에 반하여 스스로를 규정한다"는 것과, 주제의 현실은 이러한 규정의 결과물이라는 사실이다. 쾌라과 도덕법의 이와 같은 상호작용이야말로 인간 주체와 문명의 다양성을 출현시키는 가장 근본적인 구조다. - P31

달리 말하면 현실원칙의 도덕명령들은 보편성을 담보받지 못하는 대가로 전제적 폭력을 행사하는 방식으로만 주체에게 현실에 이르는 길을 강제하며, 이러한 강제는 현실기능의 장애를 필연적으로 초래할 수밖에 없다. 불안정성이란 바로 이것, 현실기능의 장애를 가리킨다. 따라서 인간 심리를 지배하는 감정들, 정동들은 현실에 따른 정확한 반응의 산물이기보다 왜곡된 반응의 산물이며, 눈속임 효과로 주체를 사로잡는다. 라깡은 이러한 국면을 "실재에 접근하는 길잡이로서의 감정은 눈속임이다"라는 문장으로 정리한다. 이처럼 "실재와의 역설적 관계"는 결국 왜곡된 현실, 불안정한 현실을 산출한다." - P38

기표는 쾌락의 위치를 고정하며,큰사물의 자리 역시 기표에 의해 사후 고정된다. 기표가 없다면 큰사물 역시 존재하지 않으며, 죽음충동이나 반복강박의 형성도 불가능하다. 기표 없이는 인간적 충동이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충동 역시 기표에 의해 지표화된다면, 충동의 지표로부터 파생되는 과도한 리비도의 흐름을 억압하여 통제하는 것 역시 기표의 연쇄이다. 따라서 억압은 충동이 아니라 충동의 기표들을 억압한다.  - P48

억압된 충동에 대한 이러한 적대성은 인간 스스로에 대한 수많은 오해를 출현시키는 원인이 되었던 것 역시 사실이다. 인간은 자신의 파편화된 충동을 억압하고 순화시키면 조화로운 세계와 만날 수 있으리라 상상한다. 세계와 육체에 관련된 다양한 환상이 이를 증명한다. 아담과 이브로 표상되는 남녀 성별의 조화로운 관계에 대한 환상에서 자연과 인간이 하나가 되는 환상 등에 이르기까지. 인간은 자신의 욕망의 중핵을 구성하고 있는 파괴적인 죽음충동에 언제나 반대되는 세계의 실현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인간의 의식과 무의식을 장악한 쾌락-현실원칙은 바로 이를 위해 충동을 억압하고 순화시키려 노력하는 것이다. 그러나라깡은 이와 같은 노력이 언제나 실패할 운명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한다. 이것이바로 "도덕 의식의 역설인 것이다. 자신의 충동을 악으로 규정하고 그것에 억압을 가하면 가할수록 충동은 다른 통로를 찾아 다시 회귀하게 된다. 왜냐하면 충동의 회귀를 초래하는 것은 바로 과도한 억압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도덕적으로 살려고 하면 할수록 더욱 강해지는 초자아는 더욱 많은 희생을 요구하며 주체의 목을 조르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도덕적 인간은 조화로운 만족의 세계에 사는 대신살인적 도덕의지의 희생양이 될 뿐이다.
이 같은 이유 때문에 인간의 마음은 원죄의식에 전전긍긍하며 불안에 떨게 된다.
아무리 도덕적으로 살려고 해도 더 많은 죄를 짓게 되는 것만 같은 모순된 현상은인간에게 목자를 찾아 나서도록 부추긴다. "목자의 차원"이라는 주제를 통해 라깡이 말하고자 하는바 역시 이것이다. 인류의 역사 속에서 이 같은 목자의 출현에 대한 요구는 언제나 있어왔던 것이며, 현대에 들어서 정신분석가나 심리치료사에게목자의 역할을 부여하려는 시도 역시 같은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목자로서의 정신분석가는 결코 환자가 원하는 조화로운 삶 따위를 줄 수 없다. 왜냐하면, 목자로서의 분석가가 환자에게 실제로 주는 것은 오히려 더 많은 의무와 더 강한 초자아의 명령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도더의식을 강화하는 방식으로는 환자의 증상을 잠재울 수 없다는 것이다. 루터가 이야기하듯, 인간이 스스로의 욕망을 일종의 "오물 덩어리"로 간주하는 한, 이를 억압하는 방식으로는 결코 조화로운 삶윽 행복에 도달할 수 없다. 퇴행적으로 보이는 충동을 성숙하고 세련된 성인의 욕망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생각은 자아심리학자들의 허망한 꿈에 불과한 것이다. - P98

충동의 세계가 보여주는 이 같은 현실은 또한 인간이 어깨서 그토록 자기 자신을 가학하는 도덕규범을 발명해내고 그것에 매달려 자신을 파괴하는 모순적 행동들을 보여주는지를 설명할 수 있다. 인간은내면 깊은 곳에서 자신에 대한 증오라고 부를 수 있는, 스스로를 주심급을 가질 수밖에 없고, 이것을 초자아 기능이라고 부른다. 인간의 도덕규범은 세련되기보다 엄격하다. 또한 실제로 범하는 위반의 수준보다 더욱 가혹하다는 특징을 갖는다. 이러한 도덕의식은 결코 소멸하지 않을 것이며, 모순될 정도로 가혹할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타자의 잘못보다 자기 자신을 더욱 가혹하게 확대할 때 명백해지는 사실이라고 라깡은 말한다. 왜냐하면 도덕적 엄격함이란 충동에 사로잡힌신체에 우리가 반응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기 때문이다. 충동의 사건들이 발생하는 신체는 문명의 관점에서 거부되어야 하는 악의 원형처럼 비추어진다. 만일 현실원칙이 우리의 심리를 조율하는 일종의 자아-방어의 시스템이라고 한다면 이러한 현실원칙이 촉발되는 기원적지점은 충동의 지대이며 주이상스의 사건적 장소들이다. 따라서 현실원칙은 전적으로 충동을 방어하는 원칙이 되며, 충동을 억압하여 우회시키는 통제 시스템이 된다. 현실원칙은 다양한 조화의 환상과 신화를만들어냄으로써 주이상스의 파괴적 위협에서 자신을 지킨다. 우리가리비도의 대상과 맺는 모든 관계는 바로 이러한 신화의 파생물들일 뿐이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주이상스의 위협에 다시 우리 자신을 내던지는 것 역시 현실원칙의 맹목적 특성이다.
10 - P113

우리의 마음은 스스로의 파편성에 놀라며 그것을 벌려 하고, 때로는 자기 자신을 증오한다. 스스로 허황된 과대평가와 파괴적 자기폄하라는 양극단을 오가면서 우리의 마음은 행복과 만족의 영역에서 아득히 멀어지는 것이다. 그리하여 법을 지키려 하면 할수록, 과도한 쾌락에서 자신을 절제하려 하면 할수록 그것을 명령하는 초자아는 더욱 엄격한 목소리로 추궁을 시작한다. 왜냐하면 주체를 몰아세우는 초자아의 뿌리가 자양분을 빨아들이는 곳은 우리 마음속 중핵에 있는, 고갈될 줄 모르는 충동과 주이상스의 검은 호수, 큰사물의 영토이기 때문이다. - P119

"상상계적"이라는 표현은 자아의 동일시와 관련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아가서, 대상이 충동을 우회적으로 만족시키는 대체의 기능을하는 동시에 상상계적 기능을 한다는 표현은 대상이 욕망의 만족과 관련이 있으며, 주체의 자아이미지를 결정함을 의미한다. 주체는 자신의 충동을 우회적으로 만족시키려고 대상을 취하며, 그렇게 함으로써동시에 자신이 누구인지도 알 수 있는 것이다. 만족과 동일시의 이 같은 과정은 우리가 문화라고 부르는 것의 본질이기도 하다. 문화적인대상들을 욕망하고 만족을 추구하는 과정 속에서 우리는 자신의 자아를 규정받는다. 직업을 선택하고 가족의 형태를 이루며 여가활동으로자아를 실현하는 등의 사회-문화적 실천들은 결국 문화적 대상들을출현시키는 사회구조적 틀에 자아가 통합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 P127

만일 우리가 감정의 의미를 묻는 접근을 시도했다면 의미화의 분절과 감정을 동일한 차원에서 파악하려는 노력이 된다. 즉, 분노의 감정이란 그것 자체로 어떤 의미를 원인으로 가지며, 슬픔이나 우울 역시 특정 의미를 그 원인으로 갖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라깡이 말하는, 당시의 메타심리학이 정동을 질적인 범주로 정리하려는 경향의의미이다. 그러나 정동은 질적인 속성을 갖기보다 양적인 속성, 즉 경제학적 속성을 갖는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그것은 일종의 신호이다. 그런데 무엇에 대한 신호일까? 라깡에 따르면, 큰사물이 그곳에 존재한다는 것을 알리는 신호, 즉 실재에 대한 신호이다. 예를 들어, 공포의 감정은 큰사물과 주체의 거리가 너무 가까울 경우 무의식이 보내는 경고 신호이다. 프로이트의 늑대인간 사례가 대표적이다. 늑대인간이 유년기에 꾸었던 여섯 마리 늑대의 악몽은 늑대인간 자신이 아버지에게 느꼈던 성충동, 즉 주이상스의 위치가 너무 가까워진 데 대한 무의식의 방어적 경고였다. 불안 역시 마찬가지다. 일상에서 실질적 이유 없이 출현하는 불안 증세는 주이상스에 너무 가깝게 다가서는 주체에게 보내는 경고의 의미이다. 강한 공포나 강한 불안, 즉 양적으로 강해지는 정동들은 주이상스와 주체 사이의 협소한 거리늘 암시한다. 주이상스와 주체 사이의 협소하다는 것은 충동에 대한 완충장치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달리 말해서 실재가 안정적으로 상징화되지 못한다는 말인데, 이에 대해 라깡은 정동의 문제란 "상징계를 향한 실재의 응답"의 문제라고 판단한다. - P137

쉽게 말해서 동일한트라우마 사건으로 루틴화된 충동과 그것의 억압으로서의 욕망은시간적 요소를 포함한 수많은 변수들에 따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조직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감정의 이 같은 우발성으로 가정할 수 있는 유일한 보편성은 ‘방어적 특성‘일 것이다. 감정은 고통에 관련되었든 쾌락과 기쁨에 관련되었든 혹은 무위의 평온에 관련되었든자아 보존적인 방어적 기능을 수해한다. 감정은 우리가 무의식의 중핵에 자리한 큰사물의 자리로 곧장 들어갈 수 없는 복잡한 미로를 구성해내는 목적을 갖기 때문이다. 불안과 공포의 감정과 마찬가지로 평온과 만족의 감정 역시 실재와 상징계의 관계에서 발생하는데, 특히 만족의 감정은 실재를 상징계가 안정적으로 포힉한 경우이다. 라깡은 "팔루스적 주이상스"라고 불렀다. - P141

이에 덧붙여서 라깡은 피카소가 자신의 작업에 대해 펼친 유명한 주장을 다시 환기한다. "나는 모색하지 않는다. 나는 발견한다je necherche pas. je trouve. "여기서 ‘모색한다‘ 또는 ‘탐색한다‘는 표현 ‘chercher‘
는 연구하여 만들어낸다는 함의가 있다. 반면 ‘찾아내다‘ 또는 ‘발견하다‘로 번역될 수 있는 ‘trouver‘는 이미 그곳에 있는 것을 되찾는다는 의미를 갖는다. 만일 이것을 라깡적 문맥에서, 즉 욕망의 대상을 해석하는 문맥에서 이해한다면 피카소의 명제는 인간 일반이 자신의 욕망과 맺는 관계를 설명한다고 간주할 수 있다. 즉, 우리는 언제나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만나고 때로는 발명해내는 듯 보이지만 사실 우리가만나는 대상은 현실의 패러다임이 이미 만들어놓은 것, 즉 레디메이드된 대상들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물론 발견하려면 모색하고 찾아야 할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모색과 탐사는 기표들의 길 내부에서 진행되며, 그런 의미에서 상징계 내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한다. 인간 심리에서 욕망의 대상으로 취해지는 것들의 리스트는 상징계가 허용하는 기성품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는 뜻이다. 욕망과 관련하여 우리의 행위들은 그렇게 ‘되찾아진 대상‘이라는 틀에 의해 통제된다.
반면 피카소의 명제는 예술 창조의 진실성이라는 문맥에서 정반대의 의미를 가질 수도 있다. 즉, 피카소는 현행 질서의 패러다임이 제시하는 좌표들의 외부가 어디인지 이미 알고 있다는 것이다. 피카소는과거 미술사가 제시하는 요소들을 조합하여 이미 알려진 것을 (재)발명해내는 것이 아니라 진정 큰사물의 장소로부터 자신이 찾던 것을 발견할 뿐이다. 여기서 그가 찾던 것은 미술사 또는 상징계의 몰락이며,그로부터만 가능해지는 새로움 그 자체이다. 요컨대 피카소가 발견하는 대상은 쾌락원칙의 항상성의 기능에 투사되는 기표들의 길을 따르지 않는 모색과 탐사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 P168

우리의큰사물과 되찾아진 대상의 관계에 대한 라깡의 설명은 큰사물과더불어 인간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말해준다. 인간은 언제나 자신의 주이상스의 중핵에 존재하는 큰사물과의 관계 속에서만 규정될 수 있는존재이다. 인간의 개인적 삶과 집단적 문명이 욕망의 방향성이라는 구도 속에서 설명되어야 한다면, 그러한 방향성은 상징계의 외존성인 큰사물과 맺는 관계의 유형을 통해서 통제되고 조율된다. 라깡의 표현을따르자면 주이상스란 기표에 의해 고통받는 큰사물의 자리에서 발생하는 사건이며, 인간 존재는 바로 이 사건에 반응하는 유형들인 것이다. 라깡은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우리가 인간이라고 부르는 대상은 내가 조금 전에 큰사물을 규정하는 방식으로밖에는 규정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즉 실재에서 기표에 의해 고통받는 방식으로 말입니다. - P169

다시 강조하건대, 큰사물을 통한 승화란 충동이 다른 것으로 대리만족되지 않고 단지 부재로서, 공백으로서 경험되는 사태이며 그 속에서 발생하는 쾌락의 만족이다. 만일 욕망의 대상들, 라깡이 a라는 표기로 지시하는 이들이 충동과 주체의 거리를 가능한 멀리 떨어지게 한다면, 특수한 목적으로 창안된 절차 속에서 기능하는 승화는 대상들을 제거한다. 또는 주체가 마주한 대상 a를 큰사물의 위상으로 승격시킨다. 혹은 대상 a를 특수한 방식으로, 충동의 영역에 보다 가까이 접근할 수 있도록 가공한다고 할 수도 있다. 그리하여 주체는 마침내 자신의 충동과 마주할 수 있게 되지만, 그가 여전히 상징계 내부에 머무는 한 충동은 오직 불가능성의 방식으로만 출현할 것이다. 따라서 승화 기능 속에서 출현하는 충동은 오직 공백의 형상, 또는 무형상의 형상으로 나타난다. 이것이 바로 큰사물이란 언제나 공백으로 표상된다는 말의 의미이다. 그런데 공백이란 없음 그 자체이므로 결코 그 자체로는 경험될 수 없다. 공백이 나타나려면 언제나 공백을 암시하는 매개체, 즉 ‘다른 것‘이 필요하다. "또는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은 오 - P184

직 다른 것으로만 표상될 것"이라고 라깡이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큰사물은 언제나 공백으로만 표상될 것이며, 공백은 또한 언제나다른 어떤 것으로만 표상(암시)된다. 따라서 승화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어떤 대상이 가장 공백에 가까운 대상인가, 혹은 어떤 대상이 가장 효과적으로 공백을 암시하는가의 문제이다. 이에 라깡은 종교, 예술, 그리고 과학의 절차들을 구성하는 대상이 공백에 가장 근접한 오브제들이라고 간주한다. 보다 구체적인 설명을 위해 각각의 영역을 탐사해보도록 하자. - P185

도덕의 기원에 이 같은 초자아의 모순된 공격성이 존재한다면, 승화는 초자아의 공격성과 억압의속성을 법의 기표 작용 속에서 만족 가능한 대상으로 전환시키는 역할을 할 것이다. 라깡이 『문명 속의 불만을 언급하면서 초자아의 공격성을 암시하려 했다면, 인간 모세와 유일신교』에서는 어떻게 충동의압제자로서의 아버지의 형상, 신의 형상이라고 할 수도 있을 초자아가상징적 이름으로 전환되면서 보편적 종교의 승화 기능을 가질 수 있는지를 설명한다. 특히 이 텍스트에서 라깡은 아버지의 이름‘이라고 하는, 충동을 향한 억압의 기표인 동시에 그렇게 억압된 충동이 우회할길을 제공하는 이중 역할을 수행하는 승화의 기표에 주목한다.
이 같은 승화의 기능이 가능하려면 충동의 억압자인 아버지는 단지 하나의 기표, 즉 상징적 아버지가 되어야 한다. 하나의 기표로 환원된 ‘아버지의 이름‘은 충동이 상징계 내에서 기표연쇄를 따라 전개될수 있도록 욕망을 개방한다. 이를 통해서 파괴적인 충동은 사회적으로길들여진 욕망의 형태를 취하게 된다. 따라서 문명에서 출현하는 부친 살해의 상징은 승화에 필연적인 사전 단계라고 할 수 있다. 나아가서 문명이 남긴 다양한 신화에서 부친 살해가 주요한 모티브로 자리잡은 것은 법과 규범으로서의 문명이 역사적 사건들을 증언하는 것으로해석될 수 있다. 프로이트 역시 부친 살해가 거의 모든 영웅 신화에 등장한다는 사실을 언급한다. 한편 신화라는 것은 라깡의 표현에 따르면
"심리적 관계의 대립적 요소들을 지탱하려고 분절되는 일종의 스케치라고 할 수 있을 기표적 조직체이다." "신화는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 - P214

2장 승화의 문제지만, 그럼에도 주체의 무의식에 자리한 대립적 요소들을 표현하기때문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프로이트는 「인간 모세와 유일신교에서부친 살해의 신화가 오이디푸스 신화로 절정을 이루었음을 재확인한다." 라깡의 이 같은 간단한 코멘트로 우리는 결국 상징계의 시작을 알리는 라깡의 부성 - 기표가 충동에 대한 승화의 기능을 수행한다는 사실과, 이것이 어쩌면 승화에 대해서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보편적인 모습이라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다. 그리하여 승화의 가장 근본적인 구조는 충동의 우회적 만족이라는 사실로부터 승화의 가장 원초적 형태는 도덕 감정에서 실현된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여기에서 승화는 초자아의 폭정을 우회하도록 만드는 욕망의 기술이 된다. - P215

인간욕망의 원인인 동시에 모든 정동들이 출현하는 근원적 장소로서의 주이상스는 오직 그에 대한 억압을 통해 외밀한 장소로 자리잡는다. 주이상스는 본질적으로 억압의 대앙인 것이다. 그런데 주이상스를 억압하는 유일한 방법은 상징적 법에 의한 것뿐이다. 아버지의법으로만 주이상스는 안정적으로 억압되어 통제될 수 있다. 따라서 상징계의 도입은 주이상스의 억압에 필수적인데, 이는 부친 살해의 과정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폭군적 아버지는 죽음을 통해서 하나의 보편적 이름으로 전환될 수 있기 때문이다. 주이상의 소유자이며 폭군이었던 아버지의 이미지는 부친 살해의 은유적 절차 속에서 보편적 법의실행자로 거듭난다. - P245

여기서 프로이트가 말하는 초자아는 금지에 복종하는 주이상스의 주체, 즉 향락을 포기하는 주체에게 더욱가혹하며 정교한 억압을 실행한다. 주이상스에 접근하려는 주체와 멀어지려는 주체 모두에게 초자아의 공격과 억압은 언제나 증가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주이상스의 역설이다. 또는 욕망이 언제나 그것을 금지하는 법과의 상호 관계 속에서만 작동한다는 사실에 관한 논증이기도 하다. 욕망은 법으로 금지되기에 그 너머를 욕망하게 되며, 그 너머를 욕망할수록 법의 금지 또한 강화될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욕망은 법과의 뫼비우스 띠적 구조 속에서 억압의 강도를 증가시킨다. 인간은 자신의 욕망을 추구하거나 억압하는 과정 모두에서 법으로부터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 P247

환자가 현재 불행을 겪고 있다면 이는 환자의 주이상스를 억압하는 기능의 장애 때문이다. 여기서 기능장애란 억압이 과도하든가 아니면 환자의 삶에 문제를 일으키는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신분석 임상은 환자가 자신의 쾌락에 대하여 부정적인 효과를 산출하는 억압의 구조를 변경시킬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그리하여 환자가 억압 없는 주이상스의 만족에 도달할 수 있다면임상은 성공했다고 간주될 것이다. 그러나 신경증자에게 억압 없는 주이상스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신경증의 주체 자신이야말로 상징계의 억압이 발생시킨 하나의 효과이며 파생물이기 때문이다. 억압이 없다면 주체도 사라진다. 억압 없는 주이상스는 결국 정신병적 구조의 도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승화 개념이 임상에서 주요한 절차토 제시된 것이다. - P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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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눈 속의 연꽃 문학과지성 시인선 97
황지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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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란
얼마간 굴욕을 지불해야
지나갈 수 있는 길이라는 생각

돌아다녀보면
朝鮮八道,
모든 명당은 초소다

한려수도, 내항선이배때기로 긴 자국
지나가고 나니 길이었구나
거품 같은 길이여

세상에, 할 고민 없어 괴로워하는 자들아
다 이리로 오라
가다보면 길이 거품이 되는 여기
내가 내린 닻, 내 덫이었구나 - P11

너를 기다리는 동안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 P15

끔찍하게 먼 길

외곽을 빠져나온 흰 영구차가 이윽고
붉은 흙길로 들어서고

사람 묻으러 가는 산

멀리, 민가의 미루나무 가지에 세든
고약 같은 까치둥지
 
덕지덕지 달라붙는 흙발을 떼며
잠깐 사이
인간세 뒤돌아보네

그 구덩에 하관할 제
그대 일생을 쓰레기 하치한 느낌

이제 가차워진 자기의 외곽을 보면서
다시 서울로 들어가는 톨게이트 앞,
트럭에 실려 도살장으로 가는 돼지들이
하염없이, 즐겁게 꼬리 흔든네 - P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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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뇌과학 - 인간의 기억은 어떻게 만들어지고 사라지는가
리사 제노바 지음, 윤승희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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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츠하이머병 진단을 받았다고 해서 내일 당장 죽는 것은 아니다. 삶은 계속된다.

☆감정기억은 사라지지 않는다. 사랑과 기쁨을 이해하는 능력에는 변함이 없다. 5분 전에 들은 말을 잊어버리고, 지금 이 말을 한 사람이 누구인지 잊을지라도 그 사람으로 인해 어떤 감정을 느꼈었는지는 기억할 것이다.

☆기억이 우리의 전부는 아니다. - P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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