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존슨의 예수 평전
폴 존슨 지음, 이종인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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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은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베스트셀러이지만 또한 가장 읽히지 않은 책이라고 한다. 이 같은 상황은 아마 예수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다. 예수는 세계 4대 성인중 가장 첫 손가락에 꼽히는 존재이지만 막상 그 존재가 걸어온 삶에 대해 아는 자는 그리 많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그것은 그의 생애를 담은 기록이 고작 네 개의 짧은 복음서 밖에는 없어서이기도 하고 또한 그 복음서가 많은 부분 비유와 암시로 이루어져 있어서이기도 하다. 게다가 공식적인 전기라 할 수 있는 4복음서마저 서로 일치하지 않는 부분들이 있고 또한 모두 생애를 상세히 기록하기 보다는 중요한 사건들만 나열한 것일 뿐이어서 얼른 읽는 이로선 전체적인 줄기를 잡기가 대단히 어렵다. 그래서 대부분 우리가 아는 것은 유명한 단편적인 사실들 뿐인 경우가 많고 예수의 말 또한 맥락과 상관없는 파편적인 것일 뿐일데가 많다. 게다가 예수가 자신의 사상을 설파하는데 있어서 주요한 방법들이었던 비유와 암시 때문에 그 말의 알쏭달쏭함으로 총천연색으로 인상이 잡히기도 전에 벌써 흐릿해지고 만다.

 

  아마도 그래서 예수에 대한 전기가 역사에 걸쳐서 그토록 많이 나오고 있는지 모른다. 또한 그토록 다양한 시각으로 예수의 인생이 말해지고 있는 지도 모른다. 사실 예수의 일생이란 공식적인 주요한 사건들로만 층층히 쌓아올린 탑과도 같은데 사실 그 탑의 이음새가 그리 탄탄하지는 않다. 그나마 4복음서만이라도 일치를 보이면 괜찮을텐데 복음서의 저자들 자체가 자기 시각으로 편중된 서술들을 하고 있어 차이가 보이는 더 헐거워 보인다. 말하자면 지금 우리에게 있어 예수의 생애란 장님 코끼리 만지기와 같다는 것이다. 장님들도 코끼리를 만지면 대략적인 다리나 몸통 코 상아등은 알 수 있다. 바로 그것이 우리가 4복음서를 통해 알 수 있는 단편적인 사건들이다. 하지만 코끼리 전체를 알기 위해선 그 사건들만으로는 부족한다. 예수는 무엇보다 메시아이고 그가 메시아답기 위해서는 그 모든 사건들이 그의 온전한 뜻 안에 자리잡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사건 자체가 아니라 왜 그 사건이 하필 거기서 일어나야 했느냐 하는 그 의미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신앙이란 이적이나 행위를 믿음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의 바탕이 된 '뜻' 혹은 '신념'을 믿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때 단순히 그 존재만이 아닌 '인격적' 존재를 강조하는 것도, 그 인격에서 발현된 '사랑'을 강조하는 것도 그 까닭이다.

 

 때문에 의미가 중요하다. 하지만 의미란 해석의 문제라서(특히나 주된 방법이 비유와 암시라면 더욱 그렇다.) 결국 저마다 자신이 무슨 색안경을 쓰고 있느냐에 따라 달리 보일 수 밖에 없다. 해서 우리는 아주 많은 다양한 시각의 예수의 생애에 대한 판본을 가지고 있다. 비근한 예로 진보주의적 입장에서 바라본 김규향의 '예수전'이 있는가 하면 성인의 색채를 모조리 탈색해 버리고 온전히 인간적으로만 해석한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도 있다. 예수가 십자가를 질 때 느꼈던 고통을 가감없이 전해주는데 주력한 멜 깁슨의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가 있는가 하면 중요한 건 예수의 말과 행위를 통해 자신의 신념과 태도로 본받을 것인가 말 것인가라는 결단이 중요하다며 오로지 그 결단을 촉구하는 역사적 사실만으로 써내려간 독일의 신학자 불트만의 '예수'도 있다.

 

 그렇게 우리는 지나온 역사만큼이나 다양한 예수의 모습들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각각은 예수가 남긴 파편된 진실들이며 우리가 온전한 예수상을 만드는데 있어 필요한 조각들이다. 그러니 예수에 대한 이야기들은 많으면 많을 수록 더 좋다.(물론 그것들이 타당하고 상식선에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경우에 한해서 말이다.) 더 다양한 시각들로 이루어진 더 많은 블럭들로 더 풍요로운 예수의 상을 만들 수 있을 테니까...

 

 의미란 언제나 고정되어질 때 문제가 발생했다. 왜냐하면 특히나 종교에 있어 그 고정이란 게 원래 성경의 뜻이 아니라 그 고정을 통해 떡고물을 챙기고 싶은 자들에 의해 행해질 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재물이든 권력이든 말이다. 그래서 말씀의 해석에 대한 주권 또한 중세의 교부들에서 부터 지금의 목사들에게 이르기까지 소수의 전유물이 되었다. 그들이 진리를 알 수 있어서가 아니라 재물이든 권력이 거기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진실을 말하자면 우리는 진짜 예수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해석한 그래서 그들이 원하는 예수를 보고 있는 것 뿐이다. 마치 우리는 그들이 의도대로 편집한 예수 전기 영화를 보고 있는 것이나 같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늘 성경 자체에로 돌아가자고 말한다. 그들이 권위로서 내세우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말씀을 묵상하고 먼저 자신이 그 의미들을 깨우치기 위해서. 일종의 의미의 민주화를 가져오는 것이다. 어차피 예수의 생애와 말씀은 모두 비유와 암시이다. 이 말은 그 어떤 해석도 권위를 가지기가 어렵다는 말도 된다. 모든 건 설득의 대상이 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니까 예수가 한 행동이나 말씀에 대해 저마다 각자가 찾은 의미가 있다는 전제를 깔고서 말이다. 우리는 그러한 가운데 타인의 예수상을 포용하고 더 타당해 보이는 것을 찾아 증축해나가는 것이다. 그렇게 신앙의 대상에 대한 해석은 사실 증축이며 대화인 것이다.

 

 

 

 오랜만에 예수의 삶에 대한 책을 읽었다. 개인적으로 차상엽 신부의 '잊혀진 질문'을 읽고서 새삼 다시 내 신앙의 대상이었던 예수를 더 잘 알고자 하는 바람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마침 폴 존슨의 '예수 평전'이 발간되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폴 존슨의 예수 평전은 부제가 신자가 쓴 전기다. 폴 존슨은 로마 카톨릭 신자이고 마거릿 대처의 고문으로도 일한 적이 있는 그러니까 보수다. 나는 이 책을 좌파 철학자로도 유명한 알랭 바디우의 책 '사도 바울'의 반대편 입장의 책이라 생각하고 읽었다. 아시다시피 바디우는 바울만이 실존 인물이고 예수는 그가 창조해낸 인물이라 본다. 그러니까 예수의 일대기는 바울이 지향하는 이상적 사회를 현실적으로 구현하기 위한 하나의 이데올로기였다는 것이다. 물론 나는 그것을 읽으며 그것 또한 타당하다고 생각했다. 바디우의 논리에 설득당하지 않기란 심히 불가능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 반대의 입장은 어떨까 싶어 온전히 실존으로서 믿는 폴 존슨의 책을 선택했다. 말하자면 나는 그렇게 대척점에 놓인 그 둘의 대화를 통해 나만의 예수의 상을 만들어보려 한 것이다. 다행히 바디우의 책이나 존슨의 책이나 분량이 많지 않았다. 사실 예수의 생애에 대한 책은 그리 분량이 많지 않아서 다행스런 사실이기도 하다. 그래서 다양한 시각으로 보다 더 풍성해지는 예수의 상을 홀로 손쉽게 만들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나 개인적으로는 이런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개인적이라는 말에 방점을 찍어두고 싶다.) 존슨도 말하고 있지만 예수는 군중을 상대해도 말씀은 꼭 개개인에게 했다고 한다. 그만큼 사실 신앙이란 지극히 개인적인 행위이다. 하나님과 나와의 다이렉트한 일대일 관계가 전부인 것이다. 불트만은 그래서 더욱 결단을 강조한다. 나는 그 누구도 아닌 하나님 앞에 있고 그러니 그 누구의 눈치도 아닌 오로지 하나님 앞에 내보일 순전한 결단만이 요구될 뿐이라고 말이다. 날 전도한 이가 내 신앙을 대신해 주는 것도 아니고 목사가 내 신앙을 대신해주는 것도 아니다. 신앙은 오로지 나만의 몫이며 그래서 내가 찾아내는 예수의 모습, 의미가 중요한 것이다. 그 외의 것들이란 다 참조가능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도 참조가능한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우리는 좀 더 타당하고 합리적인 예수의 의미에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거기로 다가가는데 있어 폴 존슨의 '예수 평전'도 좋은 징검다리가 되어 주었음을 밝혀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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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령하라 - 세계를 뒤흔드는 용기의 외침
슬라보예 지젝 외 지음, 유영훈(류영훈) 옮김, 우석훈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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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년 9월, 미국의 좌파 잡지, 애드버스터는...

 

 

한 광고를 실었다.

 

 

 

바로, '9월 17일에 월가 금융자본의 부패와 탐욕에 항의하자는 평화 점거를 벌이자'라는 광고였다.

바로 이 광고가 뉴욕의 월가를 넘어 전세계적으로 부르조아 1%에 대한 반대와 저항을 불러일으킨 나머지 99%들의 성난 목소리, 월가 점령 운동의 시작이었다.

 

 

우리는 모두 패배자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패배자는 뉴욕 도심의 월가에 있습니다. 우리 돈 수십억 달러가 금융권을 구제하는데 들어갔습니다. 혹자는 우리를 보고 사회주의라고 합니다. 언제나 있었던 것은 부자들을 위한 사회주의입니다. 그들은 우리가 사유재산을 존중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설령 여기에 있는 우리 모두가  한 달 내내 밤낮으로 사유재산을 파괴한다고 해도 그건 우리가 잃은 사유재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피땀 흘려 번 것 보다 더 많은 사유재산이 2008년 금융위기로 날아가렸으니 말입니다. 그들은 우리를 몽상가라고 합니다. 진정한 몽상가는 과거의 상황이 앞으로도 무한히 계속될 거라고 믿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몽상가가 아닙니다. 우리는 악몽으로 바뀌는 꿈에서 깨어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파괴하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단지 이 사회 시스템의 자폭을 목격하고 있을 뿐입니다.

 

 

-2011년 10월 9일 슬라보예 지젝의 주코티 공원 연설 중에서 -

 

 

  월가 점령은 그랬다. 그토록 산재해 있던 모든 개인들의 아픔이 더 이상 그 개인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며 바로 자본주의라는 시스템 그 자체로 부터 야기된 것이라는 걸 깨닫는 것이었다. 그렇게 '모든 것이 당신 자신 때문이다.'라며 자본주의가 주입한 환상과 꿈에서 영화 매트릭스의 네오 처럼 깨어나는 일이었고 이제 이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주렁주렁 매달고 타이타닉호 처럼 가라앉아만 가고 있는 자본주의에 대해 더 이상 이대로 수수방관만 할 수 없다며 떨치고 일어난 것이었다.

 

 

 우리가 여기에 있는 이유는 코카콜라 캔을 재활용하고 불우이웃 돕기에 몇 달러를 내고 혹은 수익금의 1퍼센트를 제3세계의 굶주린 아이들을 위해 쓴다는 스타벅스 카푸치노를 구매하여 흐뭇해하는 세상에 이제 그만 지쳐버렸기 때문입니다.

 각 종 일거리를 아웃소싱하다 못해 이제는 결혼정보업체가 우리의 사랑마저 아웃소싱하고 있습니다. 오랜 시간 이런 모습을 보아왔죠. 우리의 정치 참여 또한 아웃소싱되고 있습니다. 이걸 되찾자는 겁니다.

 

 - 슬라보예 지젝의 같은 연설 중에서 -

 

 

 'n+1' 이라는 잡지가 있다.

 'n+1' 은 뉴욕에 기반을 둔 사회문화 비평 잡지다. 이 잡지의 편집인들은 뉴욕 월가 점령 운동에도 참여하였는데 그들은 월가 점령이 시작될 당시부터 '월가점령가제트'를 발간하여 베포하기도 하였다. 그 'n+1' 의 편집인들이 그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점령운동'에 대해 중간결산한다는 취지로 발간한 책이 바로 이 책 '점령하라'이다.

 

 

 

 

 이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나는 점령 운동 당시의 현장 상황을 생생히 전해 주는 '점령 풍경' 섹션이고 다른 하나는 그 점령 풍경들 마다 제기 되었던 주된 문제들에 대한 당시의 발표문이나 연설문들이다. 그러니 전자는 실천 부분을 후자는 이론 문제를 다루고 있다고 하겠다. 이 두 개의 섹션은 별개로 묶이어지지 않고 하나하나가 서로 교차로 편집되어 있는데 그것은 이 책의 편집자들이 운동이 전개되어나감에 따라 어떤 문제들이 일어났고 그 문제가 점령 운동에 있어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점령 운동'은 어떤 원칙과 이론적 바탕에 의해 그 문제들을 해결해 나갔는지 보다 직접적으로 전달하기 위해서다. 예를 들어 '점령 운동' 당시 거주하고 있던 '주코타 공원'에서 시위에는 참가하지 않는 뉴욕의 노숙인들이 무료로 지급되는 음식과 잠자리 때문에 자꾸만 노숙하게 되어 시위 참가자들 사이에서 불만이 제기된 적이 있었다. 단순히 그들이 시위에 참가하지도 않으면서 무임승차만 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 노숙자들로 인해 운동의 순수성이 훼손되고 노숙자들의 범람으로 언론들에 의해 '무법천지'로 왜곡 보도 됨으로써 장차 진압을 위한 구실을 주게 되리라는 염려 때문이었다. 풍경의 섹션이 이렇게 제기된 문제를 드러내면 바로 그 뒤 이론 섹션에서 이 문제를 바람직하게 풀어나갈 방향을 이렇게 제시한다.

 

 

  점령 운동이 성장해가는 가운데 우리는 점령 운동에서 노숙인의 자리라는 문제를 단기적으로 또 장기적으로 고민하고 있다. 우리를 하나로 묶는 체제적 연결과 역사적 연결을 기억하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자본주의의 역사는 한편으로 체제적 배제와 사화적 배제, 경제적 배제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 모두는 상대적 잉여 인구의 일부가 될 위험에 처해있는 것이다.

 

  현대 역사에서 추방과 경제적 몰락의 순간은 자주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회 전반에 경제 위기가 닥쳤을 때 아주 통렬하게 다가온다. 따라서 "당신은 왜 여기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우리는 반드시 이 배제와 경제 위기의 논리를 살펴야 한다. 중요한 것은 노숙인 문제와 점령 운동 전반을 실제로 아우르는 대답이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이 둘은 모두 경제적 주변화와 경제 위기 그리고 추방에 의해 생겨난 것이다. (...) 지난 40년 동안 노숙자 인구는 꾸준히 늘어났다.  이러한 문제는 이제 인종 집단을 가리지 않고 나타난다. 우리는 이러한 사태의 밑바닥에 깔린 공통의 논리를 이해해야만 한다. 1970년대 초반에도 최상위 1퍼센트가 빠르게 득세하자 미국의 거리에 노숙자가 늘어났다. 역사적으로 똑같은 상황이 지금 다시 벌어지고 있는 것은 단순한 우연히 아니다.  "우리가 왜 여기에 있는가?"라는 질문에 답하려면 우리의 공통된 곤경을 심각하게 따져보아야만 한다. (...) 마침내 우리는 이 불확실함과 불안과 배제가 함께 합류하는 지점에 함께 도착했다. 이 공통적 곤경은 반드시 배제가 아닌 '포함'의 새로운 정치를 세우는 작업을 위한 연대의 원천이 되어야만 한다.

 

 

 - '홈리스의 문제 -당신은 왜 여기 있는가?' 크리스토퍼 헤링과 졸탄 클루크의 글 중에서 - 

 

 

 

  이렇게 '점령하라'는 운동의 과정에 생겨났던 문제를 가감없이 드러내어 그 문제들이 운동에 있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바람직하게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고려하고 원칙을 삼아 나가야 할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글들을 함께 붙여둔다. 그 이유는 여기에 있는 문제들이 사실 '점령 운동'에서만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사실 모든 운동들이 그 규모가 커지고 영향력이 증대되면 반드시 가지게 될 보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 가장 비근한 예는 얼마전 '나꼼수'로 일어났던 비키니 논쟁이 될 것이다. 이 책 '점령하라'가 이런 식의 편제를 취한 것은 이러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문제에 대해 '누가 옳은가 그른가?'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모든 문제는 저마다의 사유를 촉발하는 계기들이며 모두가 열린 마음으로서 그 계기가 촉발한 저마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더 나은 진화를 위해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것 그것이 정말로 더 중요한 문제임을 알리기 위함이다.

 

 

  월가 점령 운동에도 앞서 얘기한 노숙자 문제를 비롯 숱한 차별과 배제의 문제가 있었다. 타악기라는 것으로 운동의 정체성을 삼았던 드림 써클은 그 소리 때문에 사람들의 회의 순간을 방해하여 원성을 샀다가 지역적으로 분리되기도 했다. 점령 운동의 규모가 커지자 더이상 공개 총회로는 사안의 처리가 힘들어지자 '비대위'를 추진하려 했을 때는 한 이슬람 여성으로 부터 비대위가 모두 백인들로만 구성되어 있는 것은 아니냐고 비난을 듣기도 했다. 사실 모든 운동은 그렇게 결국 근본적으로는 차별과 배제의 문제를 배태하게 된다. 잠재되어 있던 갈등이 수면으로 드러나는 경우도 있고 운동의 영향력이 커지자 서로 그 선봉을 잡고 스포트라이트를 받겠다며 공격을 위한 선가르기가 횡행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나꼼수'의 비키니 논쟁 때 경향신문이 3일 연속 1면에 실었던 것이 이것에 대한 하나의 방증이기도 하다. 결국 이럴 때 어떤 선택을 하느냐가 운동의 성패를 좌우한다고도 말할 수 있다. '점령하라'는 이러한 때 '점령 운동'은 어떻게 풀어나갔는지를 그 때 그 때 그 뒤 '이론 섹션'에서 보여주는 것인데 그럴 때 그들이 언제나 기억했던 것은 '왜 우리가 이 자리에 있는가?'하는 운동을 일으켰던 본연의 동기들이었다.

 

  지배체제는 동일한 하나를 둘로 나눈다. 데카르트의 정신과 육체의 분리가 대표적인 예다. 똑같은 분열이 공개 총회와 드럼 서클 사이에서도 재생산되고 있었다. 드럼 서클은 '소수 민족'이고 공개 총회는 '백인'이었다. 드럼 서클은 '남성'이고 공개 총회는 '여성'이었다. 지금에 와서 여러 인종과 남성과 여성의 구체적 현실이 꼭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내 말은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공개 총회와 드럼 서클도 이 본질을 충실히 반영했다. 이러한 양극 분리야 말로 점령 운동이 깨부수려던 것인데 말이다.

 

 - 드럼 서클에 관한 고찰, 마크 그리프 -

 

 

  아마도 우리는 여기서 우리의 우선 순위를 정확히 전달할 필요가 있을 겁니다. 우리는 높은 생활 수준을 원하는 게 아니라 더 나은 생활 수준을 바라는 겁니다. 우리를 공산주의자라고 부를 수 있는 단 하나의 맥락이 있다면 우리가 모두의 것(the commons)을 생각한다는 겁니다. 자연의 공유, 지식의 공유. 아, 물론 지적재산권은 있어야죠. 유전공학의 공유 이것을 위해서 그리고 오직 이것만을 위해 우리는 싸워야 합니다.

 

 - 슬라보예 지젝 - 

 

 

  만약에 희망이 불가능한 것이라면 우리는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겁니다. 불경기에 수익을 얻은 자들에게 부를 재분배하고 탐욕을 멈추라고 하는 것이 불가능한 요구라며 그렇습니다. 우리는 불가능한 것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여기 우리에게 중재할 어떤 주장도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단지 경제적 정의와 사회적 평등만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공공의 장소에 함께 모여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 거리와 광장에서 육체를 지닌 인간으로서 연합하여 하나로 뭉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민주주의를 만들며 하나로 여기 서 있습니다. '우리가 국민'임을 몸으로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 2011년 10월 23일 주코타 공원 발언, 주디스 버틀러 -

 

 

 

  그렇게 이 책 '점령하라'는 단순한 운동의 현장이나 과정이 어땠는지 알려주는 정보 차원만의 책은 아니다. 이 책은 차라리 하나의 '교본'이다. 어쩌면 월가 점령 운동에서 촉발되어 장차 일어날지 모르는 반자본주의 운동(그 뿐만 아니라 모든 현 체제 저항 운동까지)들이 월가 점령 운동에서 직면했던 문제들로 좌초되지 않고 성공적으로 해결하여 꾸준한 지속과 성장을 위해 참조가능한 사유의 계기들을 던져주는...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의 해설을 썼던 우석훈이 이 책에 대해서 했던 말 "변화의 기로에 서 있는 2012년 대한민국이 열독해야 할 단 한권의 책"이라는 말에 무조건적 지지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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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진핑 시대의 중국 - 중국은 과연 세계의 지배자가 될까
사토 마사루 지음, 이혁재 옮김, 권성용 해제 / 청림출판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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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달 시진핑의 미국 방문은 모든 해외 언론의 초유의 관심사였다. 아마도 전 세계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때서야 시진핑의 존재를 알게 되었을 터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토록 언론의 압도적인 관심을 받은 까닭은 무얼까? 그건 그가 장차 중국의 최고 통치자인 주석이 되어 정해진 임기 10년 동안 중국을 다스리게 되기 때문이다. 그는 2012년 그러니까 올 해 가을 현 주석인 후진타오에 의해 부주석이 될 예정이고, 다음 해 2013년에는 후진타오의 뒤를 이어 주석이 될 것이 가장 유력시 되는 인물이다.(이렇게 확률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후진타오 때 까지 이어졌던 전임자의 지명으로 주석으로 뽑는 제도가 시진핑 때에 이르러서는 투표로 선출되는 것으로 바뀌기 때문이다.) 중국은 여전히 일당 체제 이므로 그 수반이 되는 주석의 권력은 실로 막강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중국은 학자들이 장차 언제 미국을 넘어설 것인가 그 시기를 점치고 있을 만큼 가장 강력한 국가의 하나다. 그러니 시진핑의 미국 방문은 언론의 관심을 받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현재 중국은 우리나라의 무역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고 거기다 지정학적 위치 상 아무래도 중국의 정세 변화는 한국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다. 때문에 정치와 경제 모두에 있어 시진핑 시대의 중국에 도래할 변화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는데 지금 말하려는 이 책 '시진핑 시대의 중국'은 바로 정확히 그것을 다루고 있다.

 

 

 

  저자는(이 책의 저자 사토 마사루로 그는 일본경제신문의 정치부 기자다. 정치부 기자로서의 오랜 경험에서 비롯된 특유의 정치 감각과 4년간 베이징 특파원으로 일했던 경험이 더해진 탓에 이 책은 중국의 정치와 경제에 대한 현실적이면서도 상세한 모습을 그리고 풍부한 취재를 통한 가장 직접적인 목소리들을 담을 수 있었다.) 그것을 총 6장에 걸쳐 설명한다.

 

 

 

  먼저 저자는 중국이 가진 모델로써의 독특성에 주목한다. 그는 중국이 지금 작은 정부를 지향하는 신자유주의가 득세하는 세계정치경제로서는 상당히 독특한 모델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정치적으로는 권력이 집중된 일당독재가 모든 걸 지배하고 경제적으로 관 주도의 국가자본주의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권력이 국가에서 시장으로 넘어가고 있는 요즘 중국은 오히려 국가가 여전히 시장을 장악하고 있으므로 독특한 모델이라는 것이다. 더구나 그로인해 아직 중국의 민주화가 천안문 사태가 일어났을 때와 비교해서 별로 진척되지 않았기에 우려스럽다. 사토 마사루는 2010년 중국의 민주화를 위해 일한 공로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류샤오보에 대해 중국 당국이 어떻게 행했는지를 밝혀 중국의 민주화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밝혀준다. 그러니까 현재 감옥에 수감 중인 류샤오보가 노벨상 시상식장에 가지 못하게 하는 것은 물론 류사오보에게 상을 준 것은 중국을 공격하기 위한 서방의 술수라며 공격 했고 아예 다른 나라 인사들 역시 그 시상직장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많은 나라에 압력을 넣기까지 했던 것이다. 이는 중국의 민주화가 얼마나 중국에게 있어 예민한 사안인지 드러내는데 이로써 거꾸로 중국의 민주화가 스스로도 밖으로 감히 드러내지 못할 만큼 낮다는 걸 반증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경제만큼은 여전히 평균 7%대의 성장을 보이고 있는데 이것은 또한 일당체제의 효과적인 정책 결정과 수행과정(통칭 이것을 거버넌스라고 부르나 중국에서는 '집정기능'이라고 부른다고 한다.)에 의한 것이기도 해서 악영향만 있는 것은 아니어서 중국 모델에 대한 평가를 어렵게 만든다.

 

 

 

  때문에 시진핑 이후에 중국 모델이 어떻게 변할지 더욱 관심이 높게 되는 것이다. 중국은 지금 안으로는 13억 인구 56개 민족의 분화와 민주화의 압력에 경제적으로는 극심한 빈부 격차에 대한 감소의 압력에 직면하고 있다. 후진타오 총리는 이러한 요구를 받아들여 체제의 큰 틀거리는 변화시키지 않는 차원에서 당 내부의 민주화를 점진적으로 감행했고 경제에 있어서는 더더욱 '서민 정치'를 표방하여 보다 많은 이들에게 그 열매가 돌아가도록 했다. 하지만 시진핑은 공공연히 그러한 후진타오의 정책에 반대 입장을 천명하고 있어 귀추가 주목된다. 이것은 후진타오와 시진핑이 서로 다른 중국 정치 내부의 파벌을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인데 후진타오는 공청단파, 즉 중국공산주의청년단을 시진핑은 중국 고위 간부 자제들로 구성된 태자당을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공청단파는 대부분 정치계 인사들로 구성된 반면 태자당은 재계의 인물들이기 때문에 후진타오가 적극적으로 취하고 있는 서민 중심의 경제 정책은 그들에게 있어 환영해 줄 수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사토 마사루 역시 예측하는 바이지만 시진핑 시대에 이르면 후진타오의 경제 정책 만큼은 이제 부자 위주로 재편될 가능성이 크다. 반면 정치체제에 있어서는 대부분 기업주나 고위 간부의 2세들이 그러하듯 조금 유동적일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수적인 시진핑의 입지상 일당체제 자체 만큼은 여전히 유지될 것이라 마사루는 예측한다. 그런데 만일 그렇게 되면 현재 오로지 하나에 권력이 집중됨으로써 생겨나는 부작용들을 해결하기가 곤란할 것이라 한다. 현재 중국의 부정적인 모습(사토 마사루는 이것을 '부채'라 표현한다. 책에서 그는 대차대조표에 근거하여 중국의 장점과 단점을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은 점점 심화되는 빈부의 격차, , 민주화의 억제, 언론 통제, 높은 부패지수 그리고 지방 정부가 토호들과 결탁해 개발을 빌미삼은 땅 투기로 서민들을 몰아내는 것(이건 지아장커의 영화 '스틸 라이프'에서도 나온 바 있다.)등 인데 이러한 문제들은 일당체제가 있는 한 해결하기가 참으로 곤란한 문제들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저자 사토 마사루는 이렇게 다양한 각도에서 장차 시진핑의 중국이 어떻게 될 것인지 풍부한 자료와 통계 그리고 인터뷰를 통하여 보여준다. 그리고 그 모은 자료와 취재를 토대로 지극히 현실적인 시각으로 예측한다. 예측이란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지만 지금 중국은 한 일본 대사의 말을 빌면 6개월만 공백이 생겨도 중국의 오늘을 전혀 알 수가 없다라고 말할만큼 빠른 속도로 변하고 있기 때문에 정말 시진핑 시대의 중국이 어떻게 될지에 대해서는 그 정확한 답을 내어놓기는 어렵다. 해서 사토 마사루는 자신이 이러이러 할 것이다 하고 확실한 예측을 내어놓는 대신 가급적 정확하고 많은 정보를 체계적으로 선별해서 독자 스스로 그 답을 찾아가도록 만든다. 그렇다고 겁먹을 필요는 없다. 일본에서 보통 이런 책들은 대부분 주 소비층이 샐러리맨들인지라 그들이 가장 많이 책을 읽는 장소인 지하철에서 읽을 것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지므로 그렇게 복잡하고 흔들리는 상태에서도 충분히 책을 읽을 수 있을 만큼 쉽게 만들어지기 마련이다. 그대로 이 책 역시도 이해에 별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더구나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책의 내용을 정리한 도표들까지 나와 있다. 해서 얼마든지 자기만의 예측도를 그려볼 수 있다.

 

 

 

  굳이 이렇게 사토 마사루의 예측에 구애받지 말고 자기만의 예측도를 그리라고 말하는 것은 이유가 있다. 왜냐하면 저자 사토 마사루가 가지고 있는 분배 형평과 복지에 비판적인 시장주의적 입장과 그보다 더 문제인 일본 중심주의적 입장 때문이다. 이 책은 장차 일본이 시진핑 시대의 중국에 어떠한 전략적 입장을 취할 것인가 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 쓰여진 것이다. 그러므로 오로지 일본 입장에서 중국의 문제를 바라본다. 일례로 2010년 9월 일본 오키나와 앞 바다에서 일어난 일본 경비정과 중국 어선 충돌 사건의 경우 사토 마사루는 지극히 일본의 입장에서 중국의 고압적인 태도를 비판한다. 여기에 대한 글을 읽다보면 혹시 우익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다. 그렇게 사토 마사루는 장차 동아시아의 지배권을 두고 다투게 될 중국과 일본을 염두에 두고 어떻게 하면 거기서 일본이 좀 더 나은 위치를 점유할 수 있을까를 위해 썼기 때문에 정작 우리 한국에 대한 것은 빠져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작 한국에 장차 어떤 파급이 닥칠까를 알기 위해 이 책을 잡았다면 그러한 사토 마사루의 시각에 물들지 않아야 하고 그를 위해 스스로가 책의 논지에 객관적 태도를 유지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에서 자기만의 예측도를 그릴 필요가 있다라고 말한 것이다.

 

 

 

  이러한 사토 마사루 자체에서 근거하는 위험성을 논외로 한다며 '시진핑 시대의 중국'은 가장 현실적인 시각으로 모든 방향에서 상세히 그것을 검토하게 함으로 정보적인 측면에서 효과가 상당하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앞으로 더욱 긴밀해질 중국과의 관계를 생각해보면 한 번 읽어 둘 가치는 있지 않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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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03-10 1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치이야기만 나오면 머릿속이 핑핑 돕니다... 특히 중국은 싫어요. 그냥 싫기도 하고, 역사를 따져보면 더 싫구. 후후... 그리고 시진핑이 누군지 일단은 모르겠답니다.

ICE-9 2012-03-11 18:18   좋아요 0 | URL
사실 미국 방문까지는 전혀 일반인이 모르는 이름이었죠^ ^
일 때문에 정보를 좀 얻을까 해서 읽었던 책이랍니다. 중국에 대해선 저 역시도 딱히 좋은 감정은 없지만 어쩌겠어요, 동아시아에서 중국에 대해 완전히 모르쇠하기는 쉽지 않은 나라인 걸...^ ^

맥거핀 2012-03-11 0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무래도 우리 입장에서는 우리 주위의 강대국들, 특히 남북문제와도 밀접하게 얽혀있는 중국의 향후 행보에 대해 어느 정도의 우려섞인 관측을 할 수 밖에 없어 보이는데, 현재 MB 정부의 대중 외교력은 거의 낙제점 수준이니 걱정이 됩니다. 또 (어느 정부가 되었던) 새로 정권을 잡게될 사람들에게도 이 대중문제는 중요한 이슈가 될텐데, 현재 국민정서도 중국에 대해 상당히 나빠져 있는 상태이고 보면, 어떤 묘한을 찾아낼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좋은 내용 전달과 더불어, 책을 읽을 때의 주의해야할 점까지 말씀해주셔서 향후의 독서에 큰 도움이 될 듯 합니다.^^

ICE-9 2012-03-11 18:24   좋아요 0 | URL
말씀 감사합니다. 맥거핀님. 제 생각엔 MB 자체가 별로 외교에 관심이 없는 것 같아요. 아마도 그저 미국에 기대어 해결할 생각 뿐이 아닐까 싶네요. 강정 해군기지 문제도 사실 그와 같은 MB의 사고가 깔려 있는 것이겠구요. 로버트 길핀은 패권국가가 바뀔 때 그 계기는 전쟁 뿐이다라고 했는데 정말 그 길핀 말대로 중국과 미국이 전쟁이라도 치른다면 MB는 지금 해군기지라는 빌미를 참으로 잘 제공한 셈이 아닌가 싶어요. 그 짧은 견식 때문에 구렁비가 저리도 참혹하게 파괴될 것을 생각하니 더 안타깝네요. 시진핑은 이전 주석들과 그 출신과 선정에 있어 많이 차이나기도 하고 지금 후진차오와는 전혀 반대의 성향을 가진 인물이기에 더욱 관심을 가질 수 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더구나 북한에 대한 중국의 입김을 생각한다면 더욱 그렇구요. 시진핑의 중국이 지금보다 더 나빠지면 나빠졌지 더 나을 것 같지는 않기에 더욱 답답한 심정이네요.
 
무엇이 우리의 생각을 지배하는가 - 현혹시키는 세상, 착각하는 대중
엘든 테일러 지음, 이문영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2년 2월
평점 :
절판


 

  아마도 인간에 대한 가장 유명한 정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다.'일 것이다. 생각이라는 것이 과연 인간과 동물을 가르는 절대적 기준이 될 수 있느냐에 대해서는 오늘날 사회생물학으로 부터 참 많은 공격을 받고 있지만 이 리뷰에서 정작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생각을 하는 능력이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의 저 말에 심어져 있는 또 다른 뉘앙스, 그러니까 마치 우리 인간은 그 무엇에도 좌우되지 않고 자유로이 생각을 할 줄 안다는, 달리 말해, 특히 기독교적 용어로는 바로 '자유의지'라고 부르는 것을 문제삼고자 한다.

 

  우리의 흔한 상식으로는 우리는 온전히 우리의 자유의지로 생각하며 그 생각에 있어서는 그 무엇의 간섭도 지배도 받지 않는다고 여긴다. 남의 생각을 자기 뜻대로 지배하는 걸 특히 세뇌라고 하는데 우리들 중 그 누구도 자신이 이미 세뇌되었다고 여기는 이는 없을 줄로 안다. 그렇게 우리는 자유의지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나도 모르게 그 누군가의 이해관계에 따라 주입된 생각에 따라, 판단에 따라 행동한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건 다만 우리의 착각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자가 있으니 그것이 바로 이 책' 무엇이 우리의 생각을 지배하는가'의 저자 엘든 테일러이다. 그는 최면과 잠재소통 분야의 전문가이다. 외부의 주입으로 생각에 간섭하고 지배하는 것이라 말 할 수 있는 최면의 전문가라는 그의 이력에서 짐작해 볼 수 있듯이 그는 얼마든지 타인에 의해 우리가 알게 모르게 생각이 주입되거나 통제될 수 있으며 사실 우리가 그 무엇에도 방해받지 않고 자유롭게 생각한다고 하는 자체가 환상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그는 말한다.

 

  닭장의 닭 처럼 우리는 모두 복사되는 것이다. 행동과학자들은 동물이 집단에서 수용되기 위해 동물을 모방하는 과정을 '복사'라고 명명했다. 닭장에서 자란 독수리나 오리 새끼는 닭처럼 행동한다. 미운 오리 새끼 이야기 처럼 백조가 되지는 않는 것이다. 여기서 요지는 간단하다. 인간은 제한된 사고, 더 나아가 훈련된 사고를 하도록 사회화 된다. 실로, 이 과정은 매우 효과적으로 진행돼 우리 안에는 어떤 맹목성이 존재하게 된다. 이러한 무지는 때때로 인지 이론가들이 말하는 '맥락에 갇힌 사고'로 쉽게 설명된다.(p.113)

 

  이 말은 인간이 언어를 습득하면서 부터 더 이상 고유의 자신은 없어지고 사회라는 맥락에서 형성된 존재만이 남는다라고 했던 라깡의 말을 연상시킨다.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가 사회화가 이루어지는 순간 더 이상 내 순수 자의로 생각하는 건 불가능하고 누군가를 모방하기 위해 혹은 이미 외부로 부터 조건지어진 그 위에서 그 외부가 이미 내 안에 설정한 매커니즘에 따라 생각할 수 밖에 없는 존재다 그런 의미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내가 임의로 항로를 설정하여 생각을 비행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나 말고 다른 누군가에 의해 생각의 항로가 설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 내가 비행기를 몰고간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그 안에 미리 탑재되어 있던 운항 컴퓨터가 몰고 간 것이며 그것을 다만 내가 몰았다고 착각하고 있었을 뿐이라는 거다. 바로 이것이 '맥락에 갇힌 사고'의 의미이기도 한데 그 말을 쉽게 하자면 '편견' 정도가 될 것이다. 인간에게 있어 그 생각의 폭을 가장 많이 제한하는 것이 바로 편견일 것이다. 가난한 자에 대한 편견, 더러운 자에 대한 편견 그리고 인종에 대한 편견 등 그 수많은 편견들은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자의에 의한 생산물은 아니다. 사실 그 모든 대부분의 편견들은 사회화 과정을 거치면서 외부로 부터 주입된 것들이다. 특히나 인종에 대한 편견이 그렇다. 예전에 EBS에서 해 줬던 다큐 하나가 생각난다. 우리가 백인을 대할 때와 동남아시아인들을 대할 때 얼마나 다른가를 보여주는 다큐였다. 대표적으로 백인이 영어로 길을 물으면 영어를 잘 모르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다들 친절하게 대해주는데 동남아시아인들이 물으면 아예 상대를 하지 않거나 한국말도 못하면서 왜 여기를 왔냐 하고 면박주기 일쑤였다. 특별히 동남아시아인들이 그런 대접을 받을 까닭이 없는데 한국인들이 한결같이 그런 반응을 보인 걸 보면 분명 거기에는 편견이 작용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그 개인들이 모두 동남아시아인들에 대해 안좋은 경험을 가진다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니 자기의 경험 때문이 아니라 어느새 사회가 가진 동남아시아인에 대한 편견이 개인이 내재화되어 바로 그러한 일이 일어난 것임을 또한 알 수 있다. 그렇게 어느새 사고가 무엇에 의해 닫혀버리는 것. 그것이 편견이고 그것이 바로 맥락에 갇힌 사고다.

 

  저자 앨런 테일러가 이러한 복사, 편견을 강조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우리는 인정하기 싫겠지만 알게 모르게 사회로 부터 세뇌당하고 있음을 밝히기 위해서이다. 그는 우리의 마음이라는 것이 초대형 쓰레기통과 같아서 무엇이든지 닥치는 대로 집어 넣을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그것을 집어넣는 주체는 대부분 우리가 아닌 남이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특히 개인의 욕망을 창출시키고 일정한 방향으로 흐르도록 통제하는 미디어들이 맡고 있는데 그중 가장 많이 행하고 있는 것이 바로 '광고'라고 말한다. 그는 아예 미국의 한 광고인 양성소(이 양성소는 전문 광고인을 육성하는 곳으로 그 모든 테크닉들은 모두 비밀리에 이루어지므로 사실 거기서 사용되는 교재를 외부에서 보기란 어렵다고 한다.)에서 실제 교재로 사용되고 있는 자료를 입수하여 보여주는데 거기서 우리는 광고라는 것이 보이는 것과 다르게 얼마나 교묘하게 사람의 마음을 뜻대로 가지고 놀 수 있는지 똑똑히 보게 된다. 그 뒤 그는 단적으로이렇게 말한다. '광고란 잠재의식 조종 기술이다'라고.

 

  사람은 자신이 눈으로 인지하는 것 이상으로 더 많은 것을 사실은 보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그걸 못 느끼는 이유는 보기는 하지만 의식에 떠오르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잠재의식은 그 모든 걸 다 보고 있다. 그것은 이미 과학적으로 증명된 사실이기도 하다. 실제로 코카콜라 회사가 한 극장에서 실험까지 했었다. 그러니까 영화 필름에다가 코카콜라를 찍은 필름을 사이사이 끼워 넣는다. 하지만 눈으로는 인지하지 못하도록 아주 찰라에 지나가게끔 끼워넣는다. 그래서 관객은 영화 도중 코카콜라를 전혀 보지 못한다. 그 어떤 방해도 없이 편안하게 관람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영화가 끝난 뒤 대부분의 관객이 코카콜라가 마시고 싶었다고 하는 놀라운 결과가 나왔다. 즉 그들의 눈은 코카콜라를 보지 못했지만 그들의 잠재의식은 영화 도중 내내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코카콜라를 보고 있었다는 사실이 증명된 것이다. 그렇게 세뇌란 우리의 의식이 아니라 잠재의식을 대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영화 내내 반복적으로 나왔지만 전혀 코카콜라를 보지 못한 관객들 처럼 우리 역시도 그것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렇게 별 대중적 저항을 일으키지 않고도 얼마든지 할 수 있기 때문에 정부마저 집단 의식 통제를 위하여 광범위한 세뇌 프로젝트를 더러 시작하기도 하는데 엘든 테일러는 그동안 미국 정부나 세계 곳곳에서 정부 주도로 행해져 온 각종 세뇌 프로그램들 역시 소개한다. 바로 이처럼 우리는 우리가 모르는 가운데 광범위한 세뇌의 매트릭스 속에서 살고 있었던 것이다.

 

  이 모든 이야기를 통하여 엘든 테일러가 하고 싶은 말은 나의 생각이란게 나만이 생성하고 판단하고 평가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사실 우리의 생각이란 많은 편견으로 얼룩져 있으며 그 대부분은 내가 아닌 남이 생성하고 판단하고 평가한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은 총 1부와 2부로 이루어져 있는데 바로 이것이 1부의 결론이다. 그렇게 무엇이 자신의 생각이고 남의 생각인지 알 수가 없으니 되도록 모든 가치 판단에 있어 나만의 생각이란 걸 고집하지 말고 마음을 비워두고 근본부터 따져 차분히 생각하라는 것이 2부의 메세지다. 사실 나도 읽고나서야 알았지만 이 책은 1부와 2부가 이처럼 기묘하게 결합되어 있다. 1부가 생각이란 게 많은 부분 외부로 부터 주입된 것이다에 대한 상세한 논의의 과정이라면 2부는 그러한 마음의 현실을 인정하고 되도록 마음을 다치지 않고 살아가기 위한 방법론 같은 것들이 나와 있는 자기개발서 같은 뉘앙스를 풍기기 때문이다. 해서 1부에선 흥미를 돋구며 신나게 읽었지만 2부에선 어쩐지 좀 맥이 풀려버린 느낌이었다.(사실 개인적으로 스티븐 코비의 성공하는 사람들의 일곱가지 습관 같은 책을 별로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생각에 정직한 모습을 대면할 계기를 준다는 것에서 이 책은 1부만으로도 읽을 가치는 있다. 나와는 달리 그런 장르도 좋아하시는 분들이라면 2부 역시도 즐겁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미디어의 범람, 광고의 범람, SNS의 범람 등등 내가 영향 받을 수 있고 혹은 나도 모르게 주입 받을 수 있는 정보들이 매일 쓰나미 처럼 우리 머리 위로 덮쳐 오고 있는 게 오늘의 현실이다. 나만의 생각, 나만의 취향, 나만의 성격을 고집하기 보다 그 모든 것이 사실은 외부에 의해 결정되었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하고  좀 더 나 아닌 것에 스스로를 열여가면서 그 부단한 '나'의 변화 가운데서 오히려 하나의 조합으로서의 '나'를 만들어가는 게 오늘을 사는 가장 현명한 방법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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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03-09 18: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후후, 헤르메스님께서는 이런류의 책도 읽으시는 군요. 저는 도저히 이런 책에는 손을 못대겠습니다. 중학교 시절 잠깐 지적수준을 높여보고자 꺼내들긴 했는데... 한숨만 내쉬고는 다시 집어넣었습니다. ㅎㅎ
그건그렇고 헤르메스님 물만두 추리소설 1등타셨던걸요! 알고보니 제가 댓글을 달았던 리뷰였습니다. 제게도 의미가 깊군요. 헤헤, 축하드려요!

ICE-9 2012-03-10 03:00   좋아요 0 | URL
존 버거의 '이미지'와 스티븐 핑커의 '빈서판'을 읽은 뒤로 이런 책을 좋아하게 되었답니다. 이 두 책은 소이진님께도 정말 추천드리고 싶은 책이기도 합니다. 뭐랄까 공룡을 멸종시켰던 유카탄 반도에 떨어진 혜성의 충돌 만큼 인식을 획기적으로 전환시킨 충격적인 책이었어요. 리뷰한 책은 별로 어렵지 않으니 혹시가 관심이 있으시면 읽으셔도 별 무리는 없을 듯 싶어요. 그리고 축하 감사합니다. 저도 제세공과금 메일이 와서 알았어요. 1회에 이어 2회도 타게 될줄은 정말 몰랐는데 그래서 그런지 물만두님과 장르소설에 대해 생전에 얘기할 기회가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굴뚝 같네요. 그래서 소이진님과 이렇게 댓글을 나누는 것도 소중히 여길 생각입니다. 아무튼 감사합니다.^ ^
 
유로의 미래를 말하다 - 끝없이 반복되는 글로벌 금융위기, 그 탈출구는 어디인가?
조지 소로스 지음, 하창희 옮김, 손민중 감수 / 지식트리(조선북스) / 2012년 1월
평점 :
절판


 

 

  '유로의 미래를 말하다'는 1973년 퀀텀 헤지펀드를 설립하여 오래도록 헤지펀드의 왕으로 군림하여 부자를 꿈꾸는 이들에게 하나의 롤-모델이기까지 했었던 조지 소로스가 4년간 미국과 유럽 경제에 대한 미국 유수 경제 일간지에 기고한 글들을 모은 책이다. 그러니까 2008년 미국의 서브프라임 사태로 인해 촉발된 글로벌 금융위기에서 부터 현재 진행중인 유로 경제 위기에 관한 조지 소로스의 시각과 나름의 해법이 들어있다고 할 수 있는데 작금의 돌아가는 경제 상황을 자본주의의 첨병 역할을 해 온 소로스는 어떻게 보고 있을까 하는 호기심에서 보게 되었다.

 

   소로스는 칼 포퍼의 영향을 받아 경제 행위를 하나의 되먹임(책에서는 '재귀성(Reflexivity)'이라 부르고 있다.) 현상으로 보고 있다. 그러니까 단순히 말하자면 경제에 있어 모든 행위자들은 그 자체로 완결되는 독립적인 변수가 아니라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 상호적 관계라는 것인데 그렇게 자기가 한 경제적 행위가 다른 이로부터 다시 자기에게로 돌아올 것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하나의 경제적 행위가 어떤 효과를 불러올 것인지는 예측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과정상에 자꾸만 행위자들간의 되먹임이 일어나 무수히 많은 변수가 초래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소로스는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시장 가격이 알아서 수요와 공급을 맞출 것이라는 시장만능주의자들의 생각을 순진하다고 공격하며 때문에 모든 것을 시장 자체에만 맡겨둘 수 없고 필요한 경우 정부가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나마 이 많은 불확실한 변수들을 확실한 권위를 갖고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정부 당국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2008년 미국의 재정 위기에 정부 주도의 구제 프로그램을 환영하며 오바마의 대책 또한 지지한다. 아니 그는 오히려 한 발 더 나아가 자본주의의 첨병이라는 소로스로서는 다소 의외라고 할만한, '은행 국유화'까지 주장한다. 그런 면에서 단순히 부실자산만 해결하려는 오바마의 현 구제 정책은 문제가 있다고 말한다.(p.87)

 

   소로스는 헤지펀드 운용 당시에도 사람들의 상식을 뛰어넘는 급진적이고 공격적인 투자로 유명했지만 미국과 유로 경제 위기에 대한 그의 대안 역시 그러했던 그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미국의 경제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 은행 국유화를 주장했던 것고 그렇고 유로 위기에 대해서도 가장 시급한 것은 유럽 통합 전체에 실질적인 권한을 가지고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재정 기구 설립을 제안하는 것도 그렇다. 유럽 통합은 어디까지나 동일한 경제적 권역을 만들기 위해 형성되었지 정치적 통합 목적이 아니었기에 이렇게 통합된 모든 국가에 대해 막강한 권위로써 재정 정책을 진두지휘하는 기구를 만들자는 것은 일종의 파격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소로스는 유럽 통합이 현 위기를 제대로 해결하고 싶으면 그 기구를 만드는 일이 가장 급선무라고 한다.

 

   또한 그는 이 같은 정책들이 제대로 실효를 거두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통화 공급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미국의 구제 금융에서도 소로스는 오바마 행정부가 제안하는 액수로는 어림 없으며 그보다 훨씬 많은 8조 4000억 달라가 투자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유로 위기에 대한 대처도 이와 비슷하다. 그는 유로의 현재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긴축이 아니라 더 많은 통화의 공급이 필요하다고 하며 가장 채권부국인 독일이 결단을 내려 재정 지원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한다. 본디 경제가 위기 상황에 이르면 유동성 효과와 피셔 효과 때문에 통화 공급 보다는 긴축이 타당하다는 게 상식이다. 소로스가 이런 주장을 펴는 것은 자신만의 특유한 '슈퍼 버블' 이론 때문인데 그 이론에 따르면 금융 가격이라는 것이 단순히 수요과 공급만으로 결정되지 않고 더우기 재귀성 때문에 시장 가격 자체가 그 가격이 형성되는 기본 조건들 자체에게도 영향을 미쳐 시장의 왜곡마저 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러한 가운데 이제 시장에 대한 인식이 달라져 버린 사람들은 기존에 우리가 알던 경제 이론대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르게 행동할 수 있는 가능성들이 열리게 되는데 여기서 그들의 행위를 좌우하는 것이 바로 시장에 대한 인식이므로 그러한 그들에게 낙관적 인식을 심어주어 그들을 시장에 적극적으로 참여시키기 위해서라도 현 유로의 경제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긴축이 아니라 오히려 재정 공급 확대를 추구해야 한다는 게 소로스의 주장이다. 현재 유로 위기의 가장 화약고가 된 그리스는 일단 구제 금융 실시로 급한 불을 끈 상황이지만 소로스는 아직 그것만으로 불충분하다고 한다. 유럽 통합의 구성상 제대로 위기에 대처하려면 수립한 재정 정책을 막강한 권위로써 밀어붙일 수 있는 통합 재정 기구의 설립이 그 무엇보다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 책은 미국과 그리고 현재 진행중인 유럽 위기의 그 원인과 해법에 대해서 헤지펀드를 운용하며 자본주의 가장 적나라한 현실 속에서 움직였던 자의 말들이라 그것이 어떻게 초래되었고 그것에 대해 지금 각 국들이 어떻게 대처하고 있으며 그것의 문제점과 바람직한 해결점은 무엇인지 가장 현실적이고 적나라한 얘기들을 들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따라서 현 경제의 움직임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이라면 볼만한 책이지만 선뜻 추천을 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게 하나 있는데 그것이 바로 번역이다. 이 책은 번역이 그리 좋지 못하다. 특히나 앞부분(PART 3 까지)의  번역은 번역도 번역이지만 문장들 역시 그냥 직역만 하고 제대로 다듬지도 않았는지 앞 뒤가 맞지 않는 비문이 너무나 속출한다. 다시 한 번 전면적으로 번역과 문장들을 제대로 검토할 필요가 있지 않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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