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석을 사냥하는 여자들
트레이시 슈발리에 지음, 이나경 옮김 / 하빌리스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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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석은 분명 특이한 즐거움을 준다. 생물의 잔해이다 보니 누구나 화석에 매료되는 건 아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오래전 죽은 사체를 손에 쥐고 있는 게 이상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게다가 지금 세상의 생물도 아니고, 상상하기도 어려운 먼 과거의 생물이다. 그래서 나는 화석에 끌리면서도 비늘과 지느러미가 뚜렷한 화석 물고기 수집을 더 좋아한다. 매주 금요일에 먹는 생선을 닮아서 현재의 일부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메리 애닝과 그 가족을 처음 접하게 된 건 화석 때문이었다.            p.25


<진주 귀고리 소녀>, <뉴 보이> 등의 작품으로 만났던 트레이시 슈발리에의 미번역 작품이 출간되었다. 영국의 화석수집가이자 고생물학자인 메리 애닝의 일대기를 소설로 재해석한 작품이다. 메리 애닝은  ‘공룡’이라는 말이 생겨나기 무려 30년도 더 전에 최초의 어룡 화석을 발견하고, 다윈의 진화론에 영감을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역사상 가장 과소평가된 과학자이자 최초의 고생물학자라고도 불리는 메리는 열두살의 나이에 어룡 화석의 두개골 부분을 최초로 발견했고, 스물넷에 거대 수장룡 플레시오사우루스의 완전한 골격을 최초로 발견했으며, 스물아홉에 익룡 프테로사우루스의 온전한 골격을 최초로 발견, 그리고 서른에 상어와 가오리의 특징을 모두 가진 멸종 물고기의 화석을 최초로 발견했다.


하지만 당시만해도 여성이라는 이유로 런던지질학회의 회원이 될 수 없었으며, 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칠 수도, 심지어 수업을 들을 수 있는 기회도 없었다. 그 어떤 과학 단체에서도 공식적으로 여성이 활동할 수 없는 시대였기에, 그녀의 놀라운 발견들은 모두 남성에 의해 발표되어야 했다. 2010년에 이르러서야 영국왕립학회가 과학사에 길이 남을 10명의 영국 여성 목록에 메리를 선정했으며, 현재 런던자연사박물관에는 메리 애닝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트레이시 슈발리에는 화석 사냥꾼 메리와 화석을 수집했던 엘리자베스, 두 여성의 우정을 통해 그들의 이야기를 드라마틱하게 현대로 다시 불러온다. 실화를 바탕으로 했지만 이야기 자체는 허구의 작품이며, 실존 인물이 다수 등장하지만 소설가의 개입으로 만들어진 부분이 존재하기 때문에 소설로서의 매력도 충분한 작품이다.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너처럼 본능적으로 아는 사람은 없다, 메리. 네가 아는 건 독학으로 배운 것이고 책이 아니라 경험에서 온 거지만, 그렇다고 가치가 없는 건 아니다. 너는 표본을 가지고 많은 시간을 보냈어. 해부학을 공부하고 그 종류와 섬세한 차이를 봤다. 익티오사우루스가 우리가 상상한 그 무엇과도 다른 독특한 존재인 것을 알아봤지."

하지만 나는 나나 화석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별이 너무나 많아서 셀 수 없었다. 그 숱한 지식 아래, 땅에 누워 있는 내 자신이 아주 작게 느껴졌다.              p.269



노동자 계급의 가정에서 태어난 메리는 교회에서 배우는 읽고 쓰기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다. 뼈와 화석에 대해 궁금한 게 너무 많았기에, 책을 빌려 읽고 과학 연구 보고서를 베껴쓰고, 자신이 찾아낸 것들을 그림으로 옮기고 설명을 빼곡히 적어 넣기도 했다. 오빠와 함께 바닷가와 절벽을 탐험하며 조개껍데기며 화석들을 찾아 판매하고 수집했다. 가파른 절벽과 험한 산도 기어올랐고, 절벽 아래 묻혀 있던 고대 지층을 발견했으며, 어떤 위험도 마다하지 않았다. 메리가 수집한 뼈들은 대부분 수집가들에게 판매했는데, 먹고 살 돈을 마련해야 하는 형편이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끊임없이 탐구하고 연구했던 메리 덕분에 고생물학이라는 학문이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비록 스스로는 과학자라는 인식도 없었고, 시대적으로 인정받을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이 작품은 실존 인물의 일대기를 그리면서도, 나이대와 배경이 완전히 다른 두 여성의 우정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어 굉장히 드라마틱하다. 서로 협력하고, 때론 경쟁하기도 하면서 특별한 우정을 이어간 메리와 엘리자베스, 두 여성의 연대가 이 작품을 정말 특별하게 만들어 주는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특히나 이 작품에는 원서에 없는 네 점의 화석 삽화가 실려 있다. 작가와 저작권사의 허가를 받아 한국어판에 특별히 수록한 것으로, 작품 안에서 주요하게 등장하는 화석들을 클래식한 펜화 스타일로 작업해 그려 넣어 더욱 의미가 있는 판본이 되었다. 겉표지를 벗겨내면 속표지와 표지 안쪽 면에 모두 화석 도감이 수록되어 있는데, 굉장히 아름답다. 19세기 사회의 풍경을 엿볼 수 있다는 점도 이 작품의 매력이고, 화석처럼 평범하지 않은 것에 관심을 보이는 재능있는 '여자들'에 대한 이야기라는 점도 아주 흥미로웠다. 뛰어난 두 여성 과학자의 찬란한 삶을 만나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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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은 깊고 아름다운데 - 동화 여주 잔혹사
조이스 박 지음 / 제이포럼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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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설공주 이야기는 대상화되는 여성들의 유형이 어떠한지, 여성들이 대상화라는 작용에 어떻게 반응하며 어떤 반작용을 일으키는지 보여준다. 백설공주의 어머니 왕비와 계모 왕비, 백설공주는 모두 대상화된 여성들의 원형이다. 계모 왕비가 끊임없이 자신의 가치 평가를 거울에 의존하는 것은 거울이 가부장 권력의 시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울에 비친 외모로만 존재의 가치가 오롯이 매겨지는 심사대에 고분고분 오르는 여자들의 삶은 생각만큼 단순하지 않다.            p.31~32


왜 동화 속에 등장하는 용은 어린이나 아저씨나 아줌마는 잡아가지 않고, 아가씨 또는 공주만 잡아갈까? 그리고 왜 기사나 왕자는 공주를 구하러 가는 걸까? 용과 공주, 기사가 거듭 등장하는 유형의 이야기는 왜 생겨난 것일까? 전래 동화 혹 여주인공들은 왜 모두 곤경에 빠지는 것이며, 그들은 집을 떠나면 죄다 숲으로 간다. 빨간모자는 할머니를 만나기 위해 숲을 지나가야 하며, 백설공주는 계모를 피해 숲으로 도망쳤다. 


영어교육전문가이자 에세이스트인 조이스 박은 바로 여기서 의문을 제기한다. 우리는 모든 이야기에 "왜?"라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고. 그리고 지금 21세기의 우리에게 전래 동화는 무슨 의미인지, 숲으로 간 여주인공들은 그곳에서 무엇을 발견했는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하얀 피부와 붉은 입술, 부모의 욕망을 투영한 백설공주부터 숲으로 들어가는 여자의 이야기인 <빨간 모자>와 <아름다운 바실리사>, 그리고 <끔찍한 용>, <데이지 공주와 수수께끼 기사>, <라푼젤>, <미녀와 야수>, <늑대와 여우> 등 오랜 세월 전해 내려온 동화들이 담고 있는 깊이 있는 메시지를 읽어 낸다. 





동양의 이야기에서는 청동 거울이 자주 등장한 다. 고대에 청동 거울은 방울과 함께 샤먼의 주술 도구였다. 그 시절에는 거울이 가지고 있는 주술적인 힘, 현실을 비추어 환상의 이미지를 보여주는 힘, 그렇게 현실을 바꾸는 힘을 실제로 믿었던 것 같다. 하지만 청동 거울에 깃든 힘은 다른 힘을 바탕으로 한다. 청동 거울은 유리 거울과 달리 매일 정성스레 닦아야 이미지를 비출 수 있다. 이렇게 매일같이 닦으며 쌓아가는 기원의 힘이 주술을 가능하게 한다. 그러므로 꿈을 현실로 불러와 현실을 바꾸고 싶은 자, 자신의 참모습을 비추어 보고 싶은 자는 청동 거울을 닦듯 매일매일 마음을 닦아야 한다.               p.172


사회에 깔려 있는 여성 차별의 구조적인 기제를 깨닫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말하는 저자는 여성을 대상화시키는 서구의 로맨스 이야기부터 짚고 넘어간다. <신데렐라>에서 의붓언니들이 발가락이나 발뒤꿈치를 잘라 유리 구두에 발을 맞추는 것처럼, 어떤 이미지로 이상화되면 여성들은 그 이미지에 못 미치는 부분을 잡아 늘려 맞추거나, 관련 없는 부분을 잘라내 왔다는 것이다. 여성은 개인으로서의 남성에 의해 감정을 투사 당하는 성애의 대상으로 그려져 왔고, 이는 <백설공주> 이야기에서 대상화되는 여성들의 유형에 대해 고스란히 보여지고 있다. 왕비는 가부장 사회의 요구에 순응하는 전형적인 예이며, 백설공주는 남자들이 바라는 욕망을 모두 투사해서 태어나, 그 욕망을 고스란히 구현하는 존재이다. 


저자에 의하면 여성은 용감하고, 제멋대로인가 하면 신비한 능력과 깊은 지혜가 있으며, 용처럼 제멋대로인 야성과 파워를 함께 지닌 존재이다. 하지만 가부장제가 자리를 잡던 시절, 용맹하고 제멋대로인 여자는 필요 없었기 때문에 예쁘고 여린 여린 공주의 모습만 그려졌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완전히 새로운 시대가 되었고, 더 이상 여자가 공주로 사는 것이 최고의 행복이 될 수 없다. 이 책은 전래 동화를 새롭게 해석하여 여성의 성장과 역할, 가부장 권력에 대한 고찰, 현대 사회에서의 성별에 대한 역할에 대해 이야기한다. 숱한 옛날이야기의 주인공이 숲으로 들어가는 이유가 궁금하다면, 끊임없이 읽히고, 탐구되고, 추구되며, 창조되는 이야기의 힘이 알고 싶다면 이 책을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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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욕 - 바른 욕망
아사이 료 지음, 민경욱 옮김 / 리드비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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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키는 생각했다. 다이키가 지금 하는 짓은 살아가기만 하면 자연스럽게 얻고 누릴 여러 사회적 연결 고리를 스스로 끊어 내는 일이나 마찬가지라고. 그리고 곰곰이 생각했다. 사회적 연결 고리란 곧 억제력이다. 법률로 정해진 선을 넘으려 하는 인간을 어떤 형태로든 그 선 안에 머물게 해 주는 힘이라고. 하지만 그 연결 고리는 학교나 회사라는 일상적인 길에서 벗어 나는 순간 자연스럽게 멀어진다. 그 안에 있으면 마치 석양처럼 자연스럽게 얻을 수 있는 연대감을 직접 두 손을 뻗어 움켜쥐고 가야만 한다.              p.150~151


이 작품의 제목인 <정욕>은 正欲, 즉 '바른 욕망'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바른 욕망이란 무엇일까. 그다지 긍정적으로 쓰이지 않는 단어인 욕망에 바르다는 표현이 붙으니 어쩐지 어색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궁금했다. 올바른 욕망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아사이 료는 이 작품에서 바르지 않은, 사회적인 시선으로 볼 때 이상하다고 여겨지는 욕망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올바르지 않은 것을 욕망하며 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고독과 절망에 대해 보여주면서 '바른 욕망'이라고 정의된 개념 자체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검사인 히로키에게는 등교 거부 중인 아들이 있다. 근속 연수와 상관없이 이삼 년마다 계속 전근을 다녀야 하는 업무 적은 특수성 속에 아들이 희망한 사립학교에 합격했다는 이유로 집에서 통근할 수 있는 범위에서 지켜냈는데, 정작 그 아들이 초등학교 4학년 이후 등교 거부 상태가 되어 버린 것이다. 검사 생활을 해오면서 인간이 걸어야 할 평범한 길에서 벗어난 사람들을 많이 만나왔기에, 히로키는 아들이 학교로 돌아가길 바랐다. 하지만 아내인 유미는 억지로 학교에 보내는 게 정답인지 모르겠다고, 학교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아이의 생각에 더 힘을 실어주고 싶어 한다. 다이키는 우연히 본 유튜브 동영상 속 소년의 모습에 힘을 얻어 학교에 가지 않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겠다고 말하지만, 히로키가 보기에는 아들이 정말 바른길로 가고 있는지 의심스럽기만 하다. 그렇게 점점 히로키는 아내와 아들과 소통하는 길에서 멀어지게 되는데, 이들 가족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세상에는 사람들이 상상할 수 없는 것도 정말 많은데."

이름도 모르는 이웃의 생활 소음이 어렴풋이 들려온다. 

인간은 결국, 자기밖에 모른다. 사회란 궁극적으로 좁은 시야를 지닌 개인들의 집합이다. 그런 주제에 늘 한 줌의 인간들이 모든 인간에게 다른 형태로 주어진 욕구의 형태를 정한다. 

"그 덕분에 우리 같은 사람은 도망 다닐 수 있잖아."            p.319


침구 전문점에서 일하는 나쓰키는 타인과의 인간관계에 관심이 없다. 함께 일하는 쇼핑몰의 건너편 매장 직원이 휴식 시간마다 말을 걸어오는 것을 부담스러워할 정도로 타인에게 관심이 없다. 나쓰키에게는 남들과 다른 욕망이 있었는데, 그 비밀을 지키기 위해 ‘타인이나 사회와의 연결’을 최대한 멀리하는 것이 인생의 목표가 되어 버린 것이다.  하지만 겉으로는 적당히 그들의 말에 맞장구를 쳐주면서 관계를 유지한다. 마음이 불편하지 않으려면 이 세상의 흔해 빠진 인간 형태를 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애당초 자신은 세상이 설정한 커다란 길에서 벗어나 있다고 생각하는 나쓰키의 삶은 자신이 원하는 방향대로 흘러갈 수 있을까. 한편 대학생인 야에코는 방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는 오빠가 보던 동영상으로 인해 남자에 대한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다. 당연히 남자 친구가 있어 본 적도 없고, 가족 이외의 남성과 어떤 관계를 개인적으로 맺어본 적도 없다. 그런데 시선이 무섭지 않은 남자를 알게 된다. 과연 야에코는 첫사랑에게 자신있게 다가갈 수 있게 될까.


이 작품은 이렇게 검사인 히로키, 침구 전문점 직원 나쓰키, 대학생 야에코의 일상을 보여주면서, 전혀 관련 없어 보이는 이들의 삶이 연결되면서 벌어지는 사건을 그리고 있다. 그저 살아가기만 하면 자연스럽게 얻고 누릴 여러 사회적 연결 고리를 스스로 끊어 내는 사람들과 학교나 회사라는 일상적인 길에서 벗어나지 않고 사회적 연결 고리 안에서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 공존하는 것이 세상이다. 이 작품은 '다양성'이라는 가치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이들조차 끌어 안기 힘든 '소수자'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파격적이지만,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그들의 욕망에 대해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문제 자체는 분명 보편적인 정서를 건드리는 부분이 있다. 물론 상식을 뒤엎는 욕망에 대해 공감하거나 이해하기 어려울 수는 있겠지만 말이다. 누구와도 연결될 수 없는 욕망을 가지고 있지만, 그럼에도 누군가와 연결되기를 욕망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도대체 ‘바른 욕망’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한번쯤 생각해 보면 좋을 것 같다. 2023년 이나가키 고로, 아라가키 유이 주연 영화로도 만들어졌으니, 영상 버전과 비교해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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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 잔혹사 - 약탈, 살인, 고문으로 얼룩진 과학과 의학의 역사
샘 킨 지음, 이충호 옮김 / 해나무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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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이야기 때문에 해부학에 역겨움을 느낀다면, 여러분만 그런 것이 아니다. 해부학자들도 서로 다른 관행의 윤리에 대해 계속 논쟁을 벌이고 있고, 심지어 해부학이 정말로 좋은 일을 하는 사례들(예컨대 법의학 분석을 통해 살인 사건의 범인을 밝혀내는 경우처럼)에서도 연구의 밑바탕에는 늘 섬뜩한 측면이 자리잡고 있다. 사실, 법으ㅢ해부학 중 상당 부분은 1849년에 하버드의학대학원에서 일어난 엽기적인 사건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많은 점에서 이 사건은 이 분야의 과거와 미래 사이에 벌어진 대결이었다.            p.125


역사상 최초의 비윤리적 과학 실험을 설계한 사람은 클레오파트라였다고 한다. 태어나기 전 아기의 성별을 구별하기 위해 사형 선고를 받는 여종이 나올 때마다 끔찍한 실험을 했다고 하는데, 집착에 사로잡혀 무언가를 극단적으로 추구하는 사람의 광기를 보여주는 클레오파트라의 사례는 시작에 불과하다. 이 책은 사람들이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선을 넘어 범죄와 비행을 저지르는 원인에 대해서, 위대한 과학적 성취의 어두운 이면을 조명하고 있다. 


미국 최초의 해부 폭동은 터무니없는 농담에서 시작되었다. 1788년 어느 날 오후, 뉴욕종합병원에서 한 의과대학생이 한 여자의 시신을 해부하고 있었다. 그런데 거리에서 놀던 꼬마들이 창밖에 서서 그 모습을 놀란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고, 해부에 집중할 수 없어 신경이 쓰였던 학생은 아이들에게 겁을 준다. "이건 네 엄마 팔이야! 내가 방금 파낸 거야!"라고 소리친 것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중에 실제로 얼마 전에 어머니를 잃은 소년이 있었고, 집으로 달려가 아버지에게 울어내며 그 이야기를 전한다. 그는 삽을 들고 아내의 무덤으로 갔고, 예상대로 무덤은 텅 비어 있었다. 사실 당시만 해도 가난한 사람의 무덤에서 시신 도굴은 자주 일어나는 일이었다. 소년의 아버지는 격노해 이웃들과 함께 뉴욕종합병원으로 쳐들어가자고 제안했고, 수백 명의 군중이 폭도가 되어 병원으로 향한다. 그걸 계기로 폭도 수는 수천 명으로 늘어났고, 또 다른 병원 건물로 이어지게 된다. 오늘날에도 의과대학교들이 시신을 충분히 확보하는 데 애를 먹고 있다고 하는데, 과거에 벌어졌던 시신 발굴과 매매, 살인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을 보고 있자니 더욱 오싹해지는 느낌이다. 





아인슈타인은 “많은 사람은 위대한 과학자를 만드는 것이 지성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 생각은 틀렸다. 위대한 과학자를 만드는 것은 인성이다.”라고 말했다. 오래전에 이 인용문을 처음 읽었을 때 나는 코웃음쳤다. 과학자가 착하건 말건 누가 신경 쓴단 말인가? 중요한 것은 오로지 발견이 아닌가! 하지만 이 책을 쓰고 나서 나는 그 말을 이해하게 되었다. 과학은 세계에 대한 사실들의 집합체이며, 그 집합체에 뭔가를 추가하려면 발견이 필요하다. 하지만 과학은 그것을 뛰어넘어 더 큰 것이기도 하다. 과학은 세계에 대해 추론하는 사고방식이자 과정이자 방법으로, 우리의 희망 사항과 편견을 드러내고 그것을 더 심오하고 신뢰할 만한 진실로 대체하도록 도와준다.                 p.436


과학과 스토리텔링, 두 가지 관심사를 결합해 현재 과학 작가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작가 샘 킨은 이 책에서 과학적 성취와 얽혀 있는 잔인하고 섬찟한 범죄를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 찰스 다윈이 존경한 당대 최고의 박물학자였던 윌리엄 댐피어는 약탈을 일삼은 해적으로 유죄를 선고받았으며, 흰개미집 연구자 헨리 스미스먼은 연구 자금 조달을 위해 노예 거래를 했으며, 해부용 시신이 부족했던 해부학자들은 무덤에서 시신을 훔치거나 도굴꾼과 거래를 하기도 했다. 미국에서 영웅으로 칭송받던 토머스 에디슨은 개와 말에게 전기 실험을 감행했고, 나치 의사들은 끔찍한 실험을 강제 수용소 재소자들을 대상으로 행했으며, 명성에 눈이 멀어 얼음송곳으로 뇌 수술을 감행한 의사도 있었다. 


지식에 대한 집착과 광기 어린 야망으로 타락한 의사와 과학자들의 사악한 행위들, 그리고 그 위에 세워진 과학의 잔인한 역사는 웬만한 범죄 소설 못지 않게 오싹하고 스릴 넘친다. 한때 세상을 들끓게 했던 과학 범죄 사건들은 실화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잔인하고, 엽기적이고, 끔찍한 부분이 많았다. 대체 과학자들은 왜 악행을 저지른 것일까? 범죄자가 아니라 과학자들이, 과학적 목적으로 비열한 범죄를 저지르거나 책임을 져야 할 행동을 했다는 것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게다가 이러한 짓을 저지른 이들이 미치광이가 되는 이유가 논리나 이성이나 과학적 안목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과학을 너무 철저히 하려고 하다가 도가 지나쳐 자신의 인간성을 잃어 버린다는 점이 아이러니했다. 이 책에 수록된 자극적인 사건 사고들은 과학과 의학 분야에서의 도덕성과 윤리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 보도록 만들어 준다. 위대한 과학자를 만드는 것이 지성이 아니라, 인성이라고 한 아인슈타인의 말이 긴 여운을 남겨준다. 과학과 의학의 어두운 역사가 궁금하다면 이 작품을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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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세 좌절의 시대
장강명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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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하다'는 느낌이 한 사회의 도덕 수준을 높이는 데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해 요즘 자주 생각한다. 우리가 불편함을 더 많은 곳에서 더 자주 느끼는 예민한 사람이 되면 사회가 더 나아질까? 타인에게 불편한 존재가 되지 않는 것, 다시 말해 무해한 존재가 되는 것이 도덕적 목표가 될 수 있을까? 2020년 한국사회의 뉴 노멀 중 하나가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면 안 된다'이다. 이 '사람들'의 자리에 '대중'을 넣느냐 '시민'을 넣느냐에 따라 이 명령에 대한 평가도 천지 차이로 달라질 테다. 그런데 '사람들'은 대중과 시민으로 명쾌하게 분리되지 않는다.         p.66


작년에 장강명 작가가 중앙일보에 발표한 칼럼이 한참 화제를 불러일으킨 적이 있다. <흥미로운 중년이 되기 위하여>라는 제목의 그 글은 젊었을 때는 생각의 깊이보다 속도에, 완결성보다 경쾌함에 끌렸었지만 나이를 먹고 중년이 되고 보니 젊을 때 반짝반짝해 보였던 또래들의 이야기가 얄팍하고 껄렁해서 놀란 적이 여러번 있다고 말하며, '독서의 중요성'에 대해 말했다. 중년들에게 주름 제거 시술보다 시급한 문제가 바로 책을 읽어야 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주장이 요지인 글이었는데, 재미있는 것은 이후 그의 명쾌하고 단호한 조언에 대한 다른 중년 남성들의 반응이었다. 그를 공개 저격하는 교수의 글에 이어 장강명 작가가 반박글을 올리기도 했었고, 한 동안 SNS가 떠들썩 했던 기억이 난다. 


장강명 작가의 글은 그렇게 칼럼뿐만 아니라 발표하는 작품마다 자주 이슈가 되곤 한다. 소재를 찾아내고, 이야기를 엮어내는 능력이 워낙 뛰어나기도 하고, 실제와 유사한 설정으로 실감 나는 리얼리티를 선사하는 동시에 불편함을 자극하기도 하며, 높은 시의성과 현실 감각으로 무장한 허구의 이야기들은 오직 장강명 작가만이 써낼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니 말이다. 이번에 만난 작품은 작년에 화제였던 바로 그 칼럼이 수록된, 신작 산문집이다. 장강명 작가가 2016년부터 2024년까지 한국일보, 중앙일보, 조선일보, 매일경제, 그리고 몇몇 잡지에 쓴 칼럼 백삼십 편 중에서 구십여 편을 추려 책으로 묶은 것이다. 200자 원고지 10매 분량에 복잡한 사유를 풀거나 논증을 치밀하게 펼치기에는 부족했다고 스스로 말하고 있지만, 사실 그의 칼럼들은 굉장히 시의 적절하고, 날카롭고, 통찰력 있어 읽으면서 새삼 11년간 일간지 기자로 일했던 그의 이력을 떠올리게 된다. 




내 관찰로는 영리한 청년이었다가 내용물 흐릿한 중년이 된 친구들에게는 공통점이 하나 있었다. 책을 읽지 않고 타고난 영리함과 순발력으로 삼심대를 버틴 것이다. 정신의 어떤 부분을 제대로 훈련하지 않은 것이다. 그 훈련은 근력 운동과 흡사하다... 다른 경험들이 독서를 대신할 수 있을까. 내게는 걷기 운동으로 코어 근육을 단련할 수 있다는 소리만큼 전망 없게 들린다. 한 업계에서 이십 년 정도 일하면 부장급 통찰력을 얻을 수 있는 것 같다. 그 이상을 원하면 정신에 꾸준히 간접 체험과 지적 자극을 공급해야 한다. 나는 독서 부족이 노년에 마음의 병을 일으킬 거라 믿는다. 삶이 얄팍해지는.             p.372~373


이 책에는 거의 8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한국사회의 다양한 이슈를 풀어내온 칼럼들이라 굉장히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한국이 싫어서>, <댓글부대>, <당선, 합격, 계급>, <재수사>등 치밀한 자료 조사를 바탕으로 현실에 단단하게 발 딛고 서 있는 작품들을 발표해온 작가답게 짧은 칼럼으로 만나는 글 속에도 날카로운 문장들과 예리하고도 정확하게 사회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담겨 있다. 여러 주제들을 모은 글이라 각각의 이슈를 네 개로 나누어 구성했다. 사회 분야의 이슈를 다루는 1부, 한국사회의 정치 풍경을 담고 있는 2부, 우리네 삶의 경험과 일상을 다루는 3부, 그리고 책과 영화 등 문화에 대한 작가의 해석을 만날 수 있는 4부로 구성되어 있다. 


흥미로운 글들이 많았는데,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표제작 '미세 좌절'의 시대라는 글도 인상적이었다. '인생 참 계획대로 안 되네'라는 말을 자주 하게 되는 상황에 '미세 좌절'이라는 이름을 붙인다고 했는데, 작가가 만든 말이지만 어찌 그리 찰떡 표현인지 밑줄을 긋는다. 별 것 아닌 불행들이 쌓이면 결국 제아무리 난관적인 이도 굴복하게 마련인 것이 사실이니 말이다. 게다가 그 '시원하게 풀리는 일이 하나도 없네'의 원인을 명확히 짚어낼 수 없다면 그 무력한 분노는 더해질 것이다. 그 외에도 영국의 '외로움 담당 장관' 임명, 코로나19 시절의 배달 노동 문제, 소셜 미디어를 통한 밈의 부작용, 인공지능 시대에 과학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 세대 간 충돌 문제, 진보와 보수 두 진영의 민낯, 정치 팬덤, 남북 대립 문제 등등 우리 사회의 여러 문제점들에 대해 사유하는 글들을 흥미롭게 읽었다. 언제나 부지런히, 성실하게 글을 써온 장강명 작가의 다음 작품은 또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 지 기대가 된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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