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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중력의 사람들
발레리아 루이셀리 지음, 엄지영 옮김 / 현대문학 / 2017년 2월
평점 :
절판
시간, 시공간, 3차원, 4차원이란 복잡 다양한 언어들 속에 놓여있는 구조와 인물들 간의 관계는 마치 과거인 듯 현재인 듯, 그리고 실존 인물인 듯 죽은 자인 듯 모호한 경계를 드러내며 혼란에 빠뜨린다.
무중력이란 단어에서 느껴지는 평면적인 단어는 유령이 먼저 떠오른다. 큰아이도 책 제목을 보더니.. 무중력의 사람들이라면 유령 이야기냐고 바로 단정 지어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어의 고리를 만들어 본다면 삶의 중력의 범위를 벗어난 자들의 이야기, 즉 삶의 정상적인 궤도를 벗어난 사람들의 이야기인가보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소설은 역시나 친절하지 않다. 옮긴이의 친절한 해설이 없었다면 이렇게 불친절하게 나열되어있는 단락들을 조합하느라 애먹었을 것이다. 1920년대와 1970년대 그리고 현재를 오가며 그 시대의 인물들이 엮여 있는데 정말 집중해서 읽지 않으면 내가 지금 어느 시대를 지나고 있는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더욱이 짧은 단락은 누구의 삶인지 조차 헷갈린다. 그래서 내게 있어 중간 아이는 이 소설의 중심축이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중첩된 시간의 연결고리를 잘 찾아내는데 있다고 보아야겠다.
소설은 평범해 보이는 두 아이의 엄마이자 소설가인 현재의 그녀가 주축이 되지만 그녀가 쓰고 있는 소설 속 화자와 그 소설 속 그녀를 통해 또 다른 화자 힐베르토 오웬이 등장하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그의 목소리를 통해 과거의 장면으로 이동하지만 그 경계가 모호해진다. 그것은 오웬이 실존 인물인데다 그 외 등장하는 문학계의 여러 이름들 때문이기도 하다. 현재와 소설 속 그녀 그리고 오웬은 시공간이 분명히 다름에도 그들을 연결해 주는 말라죽은 오렌지 나무와 지하철이라는 공간들은 집중해서 읽지 않으면 놓쳐버리기 쉬운 대목이다. 또한 여기에 나오는 화자들이 하나같이 글을 쓴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보면 숨은 그림을 찾듯이 그림이 희미하게나마 그려진다. 중간 아이가 그렇게 하던 숨바꼭질 놀이가 왜 그렇게 등장한 건지 짐작하게 되면서 읽는 나조차도 숨바꼭질을 하고 있는 심정이 들었다. 심지어 이건 환상인가.. 환영인가.. 막연하게나마 짐작될 뿐이다.
등장인물의 성격들 역시 제대로 파악하기가 어렵다. 소설 쓰기를 열망하지만 그녀의 주어진 환경은 그렇지 못하다. 그래서 더욱 현재의 그녀가 소설 속 그녀로 반영이 된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그녀의 남편 또한 그녀와 소설 속 그녀를 혼동하기에 이른다. 그리곤 어느 날 사라져버린다. 그래서 중간 아이에게 남겨진 아빠의 이미지가 애처롭기까지 하다. 나중엔 벌레만큼 작아진 이미지로 변해버리고 중간 아이가 부르는 노래가 이 소설에서 제일 우울한 장면인듯했다.
" 무너진 집, 병든 아이들, 화난 아빠, 우는 엄마 ‥‥‥ 큰일 났어, 조심해야 돼!"
자신의 삶으로부터 도피하고 싶은 그녀의 무거운 심정을 대변하는 장소인 묘지와 그녀가 쓰고자 하는 소설의 목표만으로 만 그녀를 해석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도 어느새 그녀와 소설 속 그녀의 내면을 동일시하고 있는 듯하다.
" 거기만 가면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책을 읽거나 생각에 잠길 수 있었기 때문에 나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장소였다. -p.27"
" 소리를 일절 내지 않고 환영과도 같은 우리의 삶을 이야기하는 것이 나의 목표다. -p.29"
결국은 그녀를 중심으로 시작되어 오웬이 소설의 중심축으로 자리를 잡다 다시 그녀에게로 돌아오지만 오웬의 무언가 절제되지 않은 삶에서 그가 잃어가고 있던 만큼 갈망한 것이 무엇이었는지도 생각해 보아야 하겠다. 그것이 문학이었는지 새로운 세상이었는지 말이다. 하지만 여전히 '수직으로 이야기하는 수평적 소설'이라던지 '수평으로 이야기하는 수직적 소설'이라는 단어가 의미는 어렵다.
지하철이라는 공간이 주는 의미를 또 다른 시간이 존재하는 4차원으로 본다면 그곳은 다른 시간과의 연결된 통로쯤으로 이해하련다.
시간은 처음부터 없었던 것일는지도 모른다. 그냥 모든 것들은 스쳐 지나가는 환영일 뿐이다. 지구는 그냥 자전과 공전을 할 뿐이고 우주의 무중력상태 속 지구는 무수한 생명을 탄생시키고 소멸시키고 있다. 모든 생명체 중 생각하며 진화한 인간들만이 그들의 삶을 계속 위태로운 공간 속에서 갈피를 잡지 못한다. 그러한 인간들이 유일하게 일구어낸 생각의 산물, 문학이 희망이며 쓰는 일을 멈추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인생의 결핍이 주는 욕망은 시대를 넘어 그 시대를 대변하던 예술가들의 목마름으로 대변하는 듯하다. 그래서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 속 장면이 떠오르기도 했다.
세상이 빠르게 돌아갈수록 인간들의 강박관념은 더욱 그들을 지배하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문학이 던지는 메시지는 끝이 없다.
이 소설 또한 우리의 의식의 모호한 경계선까지도 간지럽혀 주는 소설이다. 그래서 더욱 난해한 소설임엔 틀림없다.
그래서 난 소설을 제독해야 했고 제독을 통해 그녀가 조목조목 써 놓은 문장들이 눈에 들어왔다.
옹골차면서도 틈이 많은 소설, 마치 아기의 심장처럼 - p.60
즉, 틈과 불연속성이 더 두드러지게 보였다. 그의 사진을 가까이에서 관찰해보니까, 실제보다 더 견고하고 확신에 찬 -자기와는 다른- 성격의 일부를 끌어와 자신의 어떤 약점을 은폐하려고 했는지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p. 85
그리고 시작된 진통, 그것은 단순한 통증이라기보다는 번뜩이는 빛과 비슷했다. 뒤로 희미한 꼬리를 남기는 섬광, 흔적을 남기면서 언젠가 다시 돌아올 것처럼 감쪽같이 사라져버리는 빛. -p.86
누구든 다른 삶을 시작하기 위해 기존의 삶을 버릴 수 있다는 걸 제대로 이해하는 이는 거의 없다. -p.107
생소한 이 멕시코 작가 루이셀리는 어린 시절 서울에서 보낸 적도 있다고 한다. 또한 책 속 기와라는 단어가 더욱 반갑기도 했다. 다양한 나라를 다니며 배운 세상의 시각이 넓어서 일까, 실험적인 소설로 주목받고 있는 그녀의 첫 작품은 나에게도 실험적인 작품이다.
작가의 머릿속의 있는 구성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답답함이 들지만 그냥.. 느끼기로 했다.. 주석이라도 그냥 바로 밑에 달아놓지 왜 뒷장에 달아놔서 읽기 불편하게 해 놓았지 라며 거추장스러운 타박으로 마무리 하련다.ㅎㅎ
한 가지만 덧붙이자면 바퀴벌레를 끔찍이도 싫어한다. 그래서 책에서 자주 등장하는 바퀴벌레 때문에 며칠 전엔 악몽도 꾸었다. 사무실 물건을 정리하다 툭하고 떨어진 왕바퀴벌레에 소스라치게 놀라 남편에게 잡아달라고 뛰어갔다 다시 오니 그놈이 세상에 독수리만 한 사이즈로 커서 벽에 붙어 있다 밖으로 나갔다. 눈을 뜨곤 온몸이 저려오는 게 특히 종아리에 쥐가 난듯했다. 이건 다 책 속에 자주 등장하는 대왕바퀴벌레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