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점별점별점별점별점
  • 읽고싶어요
  • 읽고있어요
  • 읽었어요
과학이 바꾼 전쟁의 역사
프랑스 파리의 부유한 법률가 가문 출시인 라부아지에는 박애주의와 게몽주의에 푹 빠진 법학 전공자였다.하지만 일찍부터 천문학, 지질학 등 자연과학을 공부했고, 특히 물질과 물질 현상을 다루는 화학에 매료되면서 18세기 근대화학 혁명의 주역이 됐다. 그가 연구를 시작할 때는 아직 중세 화학의 전통이 지배하고 있어서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소설,이나 스위스의 화학자 파라셀수스의 '3원리설' 을 거쳐 게오르크 슈탈의 '플로지스톤 이론'으로 모든 물질의 본질과 현상을 설명하던 시대였다. (-18-)


혁명 정부가 왕립 과학 아카데미를 지원한 데는 사실 이유가 있었다. 동서고금을 망라하고 권력 집단에게는 통치 영역을 표시하고 곡식과 물자 등의 세금을 거두는 일이 중요했다.이를 위해서는 길이와 부피,무게의 기본 단위인 도량형의 표준화와 통일이 필수적이다. 중국 진시황이 척관법을 도입하고 ,이집트 등 고대 국가들도 모두 자체적인 단위로 도량형을 통일하고자 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영국도 1215년 대헌장에 길이(인치와 야드),부피(파인트),그리고 모게(파운드)의 도량형 단위를 명시한 바 있었다. 하지만 유럽 국가나 지역마다 도량형 단위는 달랐고,이는 근대적 국가 시스템 확립에 큰 걸림돌이었다. (-33-)


여기서 '과학'은 자연과 우주의 현상과 원리를 합리적익 체계적으로 설명하는 자연과학을 의미하고,'기술'은 인간의 필요에 따라 응용을 목적으로 개발된 지식을 뜻한다. 사실 근대에 이르기까지 서구에서의 과학은 자연철학으로 불리며 대체로 사회 상류 중심의 사색과 학문적 전통을 가졌던 반면, 기술은 사회 중하위 생산 계층이나 장인 문화를 중심으로 발전했다. (-65-)


단순화 효율화한 생산 라인에는 숙련 장인들 대신 노동자들로 대체돼 단순 노동을 했고, 그에 맞는 임금을 받았다. 이런 공장형 생산 방식은 현대적인 대량 생산, 대량 소비의 자본주의 산업화를 완성시키는 치트키였다.그야말로 놀라운 속도로 전 세계의 수많은 '공방'이 '공장'으로 탈바꿈했다.
이 시스템이 정착하는데 가장 큰공을 세운 사람은 미국의 기계공학자 프레데릭 테일러다. 공장의 관리직으로 일하고 있던 테일러는 생산 라인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을 지켜보면서 왜 업무 숙련도가 높아져도 생산 속도가 나지 않는지에 대해 의문을 갖게 됐다.그 이유는 하나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최대한 적게 일하려 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생산성이 향상돼야 노동자들의 이익도 높일수 있다고 판단한 테일러는 태업과 비효율을 없애기 위해 노동자의 작업을 기본 동작으로 분해한 뒤 생산과 무관한 일상적 행동을 모두 제거하도록 했다. (-124-)


전쟁에서 정비 또는 수리를 하는 과정에서 부품의 호환 문제가 빈발하면서 국가 별 산업 표준의 차이, 그리고 나아가 국제 표준의 중요성에 대해 여러 나라가 인식하게 됐다.
하지만 국제 표준 문제를 해결하는 일은 그리 쉽지만은 않았다. 2차 세계대전 직후인 1946년 국제 산업과 공업 표준의 중요성이 더욱 절실해지면서 현재의 국제 표준 기구가 설립됐고,비로소 현대적인 국제 표준화가 틀을 갖추게 됐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도 이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지는 못했다. (-141-)


1895년 빌헬름 뢴트겐이 고압 음극선관 근처에서 엑스선을 발견한 이후 음극선은 과학자들의 최대 관심사가 됐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음극선 연구에 매진하던 영국의 물리학자 조지프 톰슨은 1897년 드디어 그 실체를 밝히는 데 성공했다. 그는 음극선이 음전기를 띤 전자의 흐름이라는 사실을 발표하여'전자'의 존재를 공식화했다. (-190-)


핵무기를 놓고 방향 설정에 혼란스러워 하던 차인 1949년 8월 소련이 플루토늄 원자폭탄 실험에 성공했다는 소식이 들리고 세계는 다시 긴장하기 시작했다. 미국 군부와 위정자들은 자국의 핵 독점 실패를 자인하며 더 강력한 조치를 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에 과학자 사회의 분열은 더욱 가시화했다. (-230-)


『과학이 바꾼 전쟁의 역사』에서 첫머리에 과학에 대해,기술에 대한 개념이 소개되고 있다.중세 유럽사회에서, 과학은 상류층이,기술은 중하류층에서 주로 시작하였다. 두가지에 대해 계급이 구분되었던 근본이 깨지게 된 것은 산업혁명이 도래하면서,과학과 기술, 두가지를 융합한 공학이 등장하면서다. 공학이란, 과학과 기술, 두가지 요소가 필요한 일이며, 생산과 효율성,경제성을 중요하게 생각한다.증기기관차가 등장하고,직물 방직은 사양길로 접어들었으며,철강산업이 본격적으로 대두되었다.


생산성이 커지면서, 과학이 전쟁의 도구로 쓰여질 수 있도록 조건과 환경이 만들어진다. 철강산업으로 사회적 인프라가 확보된 상태에서, 본격적으로 전쟁을 시작할 수 있는 기승전결, 서론-본론-결론이 시작되었다. 나폴레옹(1769년 8월 15일~1821년 5월 5일)은 영국을 침투하여 승기를 잡을 수 있었던 이유도, 독일이 제1차 세계대전,제2차 세게대전에서, 유럽의 패권을 쥘 수 있었던 이유도 , 과학이 추구하는 힘을 가지고,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다.전쟁은 혼자 하는 게 아니며, 근대화학의 아버지 라부아지에(1743년8월 26일~1794년5월 8일)는 화학 을 전쟁에 쓸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 주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중세 자연철학이 라부아지에로 인해 근대과학으로 전환기를 맞이할 수 있었다.


핵무기는 절대적인 힘을 가지고 있었다.원자에 대해서,전자에 대해서, 우라늄과 플루토늄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었으며, 독일와 연합국은 전면전을 시작하였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에 거리를 두고 있었으나, 일본의 진주만 공습으로 인해 제2차 세계대전에,태평양과 대서양을 끼고, 두 국가를 상대로 전쟁을 수행하게 된다. 일본의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투하된 원자폭탄 리틀보이와 팻 맨은 기획된 맨해튼 프로젝트의 결과물이며, 구소련의 핵무기 개발로 인해, 미국과 소련 간의 냉전체계가 본격화되었다. 지금 우리가 풍요로운 21세기를 맞이할 수 있었던 이유를 『과학이 바꾼 전쟁의 역사』에서 찾을 수 있다.

  • 북플
  • 향기로운이끼님도 <과학이 바꾼 전쟁의 역사>를 재미있게 보고 리뷰를 남기셨네요. 리뷰를 읽어보시겠어요?
  • 2024-04-26 22:08 좋아요  l  좋아요 0
  • 비밀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