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산 타고 날아온 메리 포핀스 네버랜드 클래식 14
파멜라 린든 트래버스 지음, 메리 쉐퍼드 그림, 우순교 옮김 / 시공주니어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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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뱅크스씨네 유모가 갑자기 일을 그만두었다. 제인, 마이클, 쌍둥이 존과 바브라는 유모가 필요하다. 뱅크스씨는 ‘돈은 되도록 적게 받고 일은 아주 잘 하는 유모’를 구한다는 신문광고를 낸다. 교통이 마비될 정도로 많은 유모들이 찾아올 거라고 생각했지만, 찾아온 유모는 『우산 타고 날아온 메리 포핀스』 한 명 뿐이었다.


우리가 만화영화에서 흔히 보아왔던 상냥하고 넉넉해 보이는 유모와는 달리 메리 포핀스는 아이들에게는 불친절하고 집주인에게는 언제나 말대꾸를 하는, 그야말로 “불친절한 메리 포핀스씨” 되겠다. 그녀의 주특기는 무슨 말에든 ‘흥’하고 내뱉는 콧방귀이며 취미는 찌푸린 모습을 유리창이나 거울에 비춰보며 자아도취에 빠지는 것이다. 한가지 특이사항은 동물들과 의사소통이 가능하며, 마음만 먹는다면 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불친절한 메리 포핀스씨”와의 만남에서 가장 큰 수혜자는 바로 제인과 마이클이다. 처음에는 그녀의 불친절함에, 그녀의 콧방귀에, 그녀의 엄포에 겁을 먹기도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제인과 마이클은 그녀의 희한한 매력에 푹 빠지게 된다.


제인과 마이클의 쌍둥이 동생인 존과 바브라는 갓난아기이다. 어른들은 존과 바브라가 말은 할 줄 모르고 단순히 울고 보채기만 한다고 생각하지만, 존과 바브라는 메리 포핀스처럼 동물들과의 의사소통이 가능하며 어른들의 말과 행동에 웃음을 날리기도 한다. 한때 엄청난 인기를 누렸던 “병아리 유치원”의 재우와 그의 일당들의 모습을 떠올리면 된다. 하지만 존과 바브라는 나이가 들수록 점점 바보가 된다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고 자신은 절대로 바보가 되지 않을 거라며 슬퍼한다.


그렇게 “불친절한 메리 포핀스씨”와 아이들은 친절한 금자씨도 부러할 정도로 멋진 날들을 보낸다. 하지만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도 있는 법, “오래 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로 끝나는 동화가 있으면 그렇지 않은 동화도 있는 법이다. 동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날아온 “불친절한 메리 포핀스씨”는 계절이 바뀌어 바람의 방향도 바뀌자 하늬 바람을 타고 훌쩍 날아가 버린다. 언젠가 바람이 바뀌면 다시 돌아올 것처럼 말이다.


『우산 타고 날아온 메리 포핀스』의 명장면 하나.

그녀에게는 웃으면 공중을 둥둥 떠다니는 삼촌이 한명 있다. 제인과 마이클과 함께 그녀의 삼촌에게 초대를 받아 갔던 날, 그날도 삼촌은 둥둥 떠있었다. 그녀와 아이들을 만날 생각에 웃음 가스가 그치지 않았다고 한다. 원래 전염성이 강한 웃음은 이내 아이들에게도 전염되어 공중에 둥둥 떠있는 상태로 함께 차를 마신다. 그러나 “불친절한 메리 포핀스씨”가 “이제 돌아갈 시간이야”라는 말을 내뱉자마자 그들의 웃음가스가 몸 안에서 빠져나가 바닥으로 떨어진다.


『우산 타고 날아온 메리 포핀스』의 명장면 둘.

공원을 산책하다가 우연히 발견한 나침반 하나. 그녀와 아이들은 나침반 하나로 세계 여행을 나선다. 나침반의 바늘을 돌리면 ‘순간이동’ 기능이 작동하여 북극곰이 사는 북극이든 열대우림이든 어디든지 갈 수 있다. 하지만 나침반으로 세계 여행을 할 때는 반드시 “불친절한 메리 포핀스씨”를 동반해야 한다는 것, 한밤중에 몰래 나침반을 들고 세계 여행을 떠난 마이클은 동물들에게 봉변을 당할 뻔 한다.


『우산 타고 날아온 메리 포핀스』의 명장면 셋.

잠을 자다가 제인과 마이클은 동물원에 가는 꿈을 꾼다. 하지만 그 동물원은 여느 동물원과 달랐다. 인간들이 우리 안에 갇혀있고, 그런 인간들을 구경하는 것은 바로 동물들이었던 것이다. 인간들이 우리에 갇힐 수 밖에 없는 이유를 말하는 동물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같은 인간인 나조차도 “그래, 그랬을거야”하며 고개를 끄덕이게 돼 온몸이 오싹할 정도였다. 그날은 “불친절한 메리 포핀스씨”의 생일이어서 제인과 마이클이 특별 초대된 것이었다.


『우산 타고 날아온 메리 포핀스』의 명장면 넷.

아직 말조차 할 수 없는 갓난아이 존과 바브라가 아주 능숙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다. 어른들의 말을 알아들을 뿐만이 아니라 동물들과도 이야기를 나눈다. 존이 발가락을 입에 물고, 바브라가 양말을 벗어던지는 것은 그렇게 하면 어른들이 좋아해서 서비스해 주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렇게 똑똑했던 갓난아이들이 점점 나이가 들면 바보가 된다는 것이다. 걸음을 한발자국 떼기 시작하면서 그들은 말하는 법을 잊어먹고, 동물들과 이야기도 나눌 수 없다는 것이다. 자신만은 절대 나이가 들어도 그런 바보 같은 짓은 하지 않으리라 울며 슬퍼하는 존과 바브라에게 난 너무 바보일 정도로 어른이라서 어떻게 위로의 말을 건네야할지 모르겠다.


불친절과 자만심이 가득한 메리 포핀스지만 그녀에게서는 남들이 갖지 못한 “꾸미지 않음”을 발견할 수 있다. 싫으면서 겉으로는 좋은 척하기, 겉으로는 안 그런척, 자신은 보잘것 없다고 말하면서 속으로는 자신이 최고라고 생각하기, 그녀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덕목(?)이지만 그런 그녀의 “꾸미지 않음”이 마음을 사로잡는다. 냉정해 보이지만 따뜻하고 포근함이 느껴진다고나 할까. 보면 볼수록 정이 드는 스타일이라고나 할까. “불친절한 메리 포핀스씨”에게는 그런 매력이 가득하다.

이 책이 나온 후에 영국에서는 “유모를 찾습니다”라는 광고 대신 “메리 포핀스를 찾습니다”라는 광고가 실렸다고 한다. 나도 이렇게 광고를 내고 싶다.

“우리 집에서도 메리 포핀스를 찾습니다. 유모가 아닌, 우리의 친구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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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인간 1 - 북극성
조안 스파르 지음, 임미경 옮김 / 현대문학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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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중앙의 어느 숲 속에 나무인간이 살고 있다.

그 나무인간은 목수나무로, 가구를 만들어서 선물하는 것을 좋아한다. 절대 살아있는 나무로는 가구를 만들지 않는 나무인간, 가만히 생각해보면 정말 웃긴다. 나무가 살아있든 죽어있든 그것은 상관없는 것 같아 보이기 때문이다. 만약 인간이 살아있는 사람이든 시체든 간에 그것으로 무엇을 만들었다고 생각해보자. 두 경우 모두, 절대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끔찍한 일이지 않는가.

그 나무인간에게는 친구가 있다. 엘리아우라는 노인인데, 그는 나무인간에게 글 읽는 법을 가르쳐준 사람이다. 그는 숲속에서 책방을 운영하는데, 그의 책방에서는 오래되고 절판된 책들도 구할 수가 있다.

엘리아우 곁에는 항상 골렘이라는 덩치 큰 친구가 따라 다닌다. 골렘은 엘리아우가 만든 진흙 인형으로, 피노키오와 재패토 할아버지처럼 골렘과 엘리아우도 그런 사이다.

어느날 이 조용한 숲 속에 불청객이 찾아온다. 알리트바라이의 왕은 나무인간이 엘리아우에게 만들어 준 나무 피아노를 자신에게도 만들어 달라고 한다. 단 숲 속에 있는 가장 오래된 나무인 아틀라스 떡갈나무로 1주일 안에 피아노를 만들어 달라는 것이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숲 속을 불태우겠다고 한다. 절대 살아있는 나무로는 만들지 않는 나무인간, 그러나 온 숲이 불타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하여 아틀라스 떡갈나무를 베러 간다. 떡갈나무를 베러 간 그들은 떡갈나무를 지키고 있던 땅도깨비 카카를 만나게 되고, 시간 관념이 없었던 그들에게 불 폭탄이 날아든다. 그들은 왕의 성 꼭대기에 있는 북극성보다 떡갈나무가 더 높아서 왕이 떡갈나무를 없애려 한다는 것을 알고 왕에게 맞서러 떠난다.

왕에게 맞서기 위해 떠난 그들은 감옥에 갇히게 되고 2년 동안 잠을 자게 된다. 잠에서 깨어난 그들은 세상이 재앙으로 바뀌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카카는 그의 동족에게 죽임을 당하게 된다.

세상이 재앙으로 바뀌게 된 순간에도 잠을 자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그들, 함께 길을 떠난 친구 카카가 죽임을 당할 때도 그냥 있을 수 밖에 없었던 그들. 그들은 다시 그들의 보금자리로 돌아와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살아간다.


나무인간과 동화 피노키오를 연상시키는 두 친구 덕분에, 게다가 책을 가득 채우고 있는 그림들 덕분에 따뜻한 동화일거라고 기대를 했었다. 하지만 나무로 가구를 만드는 나무인간의 잔인함을 유머러스로 가장하여 숨겨 놓았듯이 절대 따뜻한 동화는 아니다.

이 책에는 넘치는 그림들 속에 폭력을 감추어 두고 있다. 특히 카카가 상대의 성기를 잘라 죽였던 모습이나 자신의 성기를 잘라 털보들에게 할례하려고 하다가 죽는 모습에서는 그 폭력성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게다가 성기는 남성의 폭력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리라.


할례는 남성의 성기를 절개하는 의식으로, 일종의 성년식이었다 . 특히 유대교도에서는 엄격하게 행해졌는데, 이것을 어기는 사람은 계약을 깨는 사람이라 간주되어 졌다고 한다. 2년 동안 잠든 사이 성장한 카카는 규칙을 따르기 위해 스스로 할례 의식을 치른다. 그러나 카카는 바로 죽임을 당한다.

이 책에는 규칙을 따르다가 죽임을 당하는 사람이 또 있다. 살아 있는 식물을 들여오는 건 금지라고 주장하던 엔지니어는 나무인간을 태우던 병사들에게 죽임을 당한다.

그러나 유대 율법을 어기고 사슴고기를 먹은 엘리아우는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살아가고 있다.


규칙을 지키면 죽고, 규칙을 어기면 살아남는다는 이야기. 이것은 현실의 반영이자 작가가 하려고 하는 이야기의 역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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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시 - 눈을 감으면 다른 세상이 열린다
쓰네카와 고타로 지음, 이규원 옮김 / 노블마인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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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문자 a형의 피를 타고난 나는 "제12회 일본호러 소설 대상 수상작"이라는 문구를 보고 순간 멈칫했다. 한번도 일본호러소설을 읽어본 적은 없지만, 일본영화가 좀 엽기적이고 공포스러운가. 빨간 표지에 그려진 야릇한 표정의 일러스트를 보자 공포심보다 호기심이 더 충동질하여 결국은 한장 두장 넘기게 되었다.

이 책은 두 개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주의 : 스포일러 있음★

 

1. 바람의 도시

 

내게서 방향 감각이라는 것은 도통 찾아볼 수가 없다. 제로에 가까운 방향 감각 덕분에 나는 자주 가던 길에서도 방향을 잃고 헤매기가 일쑤이며, 매일 보던 길도 새로난 길이라고 인식할 정도이다. 그래서 나는 낯선 길 위에 섰을 때 묘한 공포감 같은 것을 품고 있다.

어릴적 주인공은 길을 잃고 헤매다가 낯선 아주머니의 도움을 받아 무사히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 길은 아무나 드나들 수 없고, 아무나 볼 수 없는 길이었다. 나이가 들어 12살이 된 주인공은 호기심으로 친구와 함께 그 길을 찾아 나서게 된다. 그리고 그 길이 인간들이 아닌 다른 세계의 신과 요괴들이 다니는 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두려운 마음에 빨리 벗어나고자 하였으나, 친구가 요괴들의 세계에서 죽임을 당하게 된다.

친구를 두고 혼자서 인간 세계로 돌아갈 수 없었던 주인공은 한 여행자를 따라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릴 수 있는 사원으로 함께 가게 된다. 하지만 요괴의 세계에서 죽은 사람도 요괴의 세계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그곳에서 다시 살아난 사람도 요괴의 세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주인공은 죽은 친구의 영혼을 자유롭게 풀어주고 혼자 인간 세계로 돌아온다.

 

2, 야시

 

어느날 밤 야시가 섰다. 소년과 소녀는 야시를 구경하러 나서지만, 그 야시는 무엇이든 파는 곳이며, 무언가를 사지 않으면 절대 벗어날 수 없는 다른 세계의 야시였다.

어릴적에 소년은 그 야시에서 벗어나기 위해 함께 간 동생을 돈 대신 지불하고 야구를 잘 할 수 있는 능력을 얻을 수 있는 그릇을 샀다. 집으로 돌아온 소년은 부모님께 동생을 구하러 가자고 말하려다가, 처음부터 동생은 존재하지 않은 것으로 세계가 세팅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소년이 얻은 능력이라는 것은 전보다 야구를 잘하는 것이지 유명한 프로선수처럼 야구를 잘하는 능력은 아니었다.

항상 후회를 하며 살아온 소년은 다시 야시가 서자 동생을 찾으러 야시에 발을 들여 놓은 것이다. 소년은 소녀에게 돈 대신 자신을 지불하고 동생을 사라고 부탁하고, 수중에 돈이 얼마 없었던 소녀는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하고만다.

인간의 지나친 욕심을 우려하여, 인간들은 평생 3번만 찾아올 수 있다는 야시. 다음 야시가 서면, 소녀는 소년을 찾아 야시를 찾아가게 될까?

 

덮으면서

 

어릴적에 그런 상상을 한 적이 있다.

이 세계는 다양한 차원이 존재하는 곳이어서, 한발짝 발을 옮기면 내가 존재하는 차원의 세계에서 다른 차원의 세계로 이동할 수 있다. 그곳은 시간이 다른 곳일 수도 있고, 장소가 다른 곳일 수도 있으며, 혹은 인간이 아닌 다른 생물체가 사는 곳일 수도 있다.

마치 어릴 적 내 상상을 그대로 옮겨 놓은듯한 이 책을 읽으면서, 공포스러움보다는 친근함을 느끼게 되었다.

 

만약 내가 야시에 발을 들여 놓는다면, 나는 무엇을 주고 무엇을 얻으려 할 것인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얻고 싶은 것은 많지만, 포기하고픈 것은 도통 떠오르지가 않는다. 미우나 고우나 내 것이기에 포기할 수 없는 것인가보다. 나 또한 인간인지라 욕심이 많은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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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텍쥐페리의 전설적인 사랑
알랭 비르콩들레 지음, 호세 마르티네스 프룩투오조 자료협조, 이희정 옮김 / 이미지박스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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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에서는 내가 첫째지만, 일가 친척들이 모이면 내 위로 언니 오빠들이 한 부대씩 모여든다. 덕분에 나는 아주 어릴적부터 책 복이 터져서, 초등학생들이 읽는 한국전래동화 전집이나 세계명작동화는 물론이거니와 고등학생 오빠들이 읽는 위인 전집까지 섭렵하게 되었다. 초등학교를 입학하고 나서 그렇게 내리 4년을 나는 언니 오빠들이 읽었던 먼지 냄새가 폴폴 나고 누렇게 빛바랜 책들을 읽어야만 했다. 그렇게 물려받은 책들을 모두 읽어버린 초등학교 4학년 겨울방학 때, 나는 처음으로 새 책이라는 것을 선물받게 되었다.

뽀얀 종이에 그려진 알록달록한 그림이 너무 좋아서 수 십번을 읽어버렸던 책, 그래서 내 생애 가장 기억에 남는 책이 되었던 책, 그 책은 바로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였다.

물론 어른이 된 지금도 생각날 때마다 꺼내어 보는 책이다. 다행히 『어린 왕자』는 읽을 때마다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는 묘한 매력이 있어 평생 읽어도 질리지가 않을 것 같다. 그러나 한가지 변하지 않는 건,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난 '어린 왕자'를 꿈꾼다는 사실이다.

 

그토록 사랑하는 장미와 다퉈 여행길에 오른 어린 왕자, 하지만 마음은 항상 장미에게 있었고 새로운 누군가를 만나든지 장미를 떠올리고 마는 어린 왕자.『어린 왕자』의 저자 생텍쥐페리는 분명 그런 사랑을 하고 있을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어린 왕자』 탄생 60주년 기념으로 출간된 『생텍쥐페리의 전설적인 사랑』에서는 그동안 꼭꼭 숨겨 두었던 그와 그의 유일한 장미였던 아내 콘수엘로의 사랑 이야기를 엿볼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사랑은 내가 상상해 왔던 그런 사랑이 아니었다.

책을 읽기 전에는 분명 전설적인 사랑임을 의심치 않았는데, 책을 읽고나자 과연 그들의 사랑을 전설적인 사랑이라 부를 수 있을까? 하는 의문부터 시작해서 남녀간의 사랑은 과연 무엇인가? 하는 근원적인 문제까지 고민하게 되었다.

항상 그리워하지만 곁에 있으면 서로를 못 견뎌하는 그들, 많은 어려움 속에서 시작한 사랑이지만 정작 주변 사람들로부터는 인정 받지 못하는 그들의 곡예와 같은 사랑만이 책 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분명 『어린 왕자』속 이야기는 그들의 이야기가 맞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사랑은 동화처럼 그리 아름답지 못했다.

 

나는 죽기 위해 떠나는 게 아니야. 고통을 받고, 그렇게 해서 나 자신의 소유물들과 일체감을 느끼기 위해 떠나는 거야. <by 생텍쥐페리, p144>

 

"내가 당신을 기다리며 인생을 보낼 거란 사실을 알아 줘요. 늙고 기억이 모조리 사라진다 해도 당신을 기다릴 거예요." <by 콘수엘로, p164>

 

이 책은 생텍쥐페리와 아내 콘수엘로가 주고 받은 편지들, 그리고 콘수엘로의 자취를 따라 쓴 이야기들을 토대로 펴낸 책들이다.

따라서 자연히 생텍쥐페리보다는 아내 콘수엘로의 감정이 많이 녹아있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나는 비행을 떠난 남편을 기다리는 콘수엘로의 마음이 느껴져서 안타까웠다. 시댁 식구들은 물론이고, 주변 사람들마저 인정해주지 않는 생텍쥐페리와의 사랑을 혼자서 감당해 내고 있는 그녀가 너무나도 안스러워 나라도 그녀 편에 서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시도때도 없이 등장하는 편지와 사진 때문에 글을 읽으면서 깊이 몰입할 수는 없었다. 어찌나 맥을 뚝뚝 끊어버리는지, 나중에는 텍스트만 먼저 읽어버리고 다시 앞 페이지로 돌아와서 사진과 편지를 함께 보아야만 했다. 두서없는 편집이 정말 안타까운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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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림트
엘리자베스 히키 지음, 송은주 옮김 / 예담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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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젬병인 것이 한 두개가 아닐지언대, 그 중에서도 그림이라는 것은 도통 이해할 수가 없다. 이게 무슨 기법으로 그려진 그림인지, 인상파 화가들은 어떤 사람들인지, 아무리 설명을 들어도 그때 뿐이다. 다음에 다시 마주하게 되면 마치 처음 듣는 이야기인냥 그렇게 대하곤 한다. 나의 안목으로는 도저히 구별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그림들 앞에서 언제나 좌절을 맛보곤 한다.

 

그런 나임에도 불구하고 이건 누구의 어떤 그림이라고 큰소리로 말할 수 있는 화가가 있다. 바로 빈센트 반 고흐와 구스타프 클림트이다. 그들의 그림에는 다른 사람들은 절대 흉내낼 수 없는 터치와 언어가 담겨져 있다. 장황한 설명이나 묘사가 없어도 한눈에 고흐의 그림이구나 혹은 클림트의 그림이구나를 말할 수 있는 그런 것이 담겨져 있다.

 

 

<키스>, 1907~1908년

 

이게 어떤 화가의 그림이라는 것은 몰라도 누구나 한번쯤은 본 적이 있을 정도로 유명한 그림 <키스>, 이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많은 물음표들이 솟구친다.

부자연스러운 자세로 여자를 품에 안고 있느라 얼굴을 볼 수 없는 남자, 얼핏 구릿빛 피부에 오똑한 코를 가졌다는 것 정도만 짐작할 수 있는 이 남자는 어떤 얼굴을 가지고 있을까? 

벼랑을 등 뒤에 두고 불안하게 발끝으로 지탱하며 무릎을 꿇고 있으면서도 불안한 기색은 커녕 편안하게 눈을 감고 남자 품에 안겨 있는 저 여자는 과연 누구일까?

황금빛의 화려한 의상을 걸치고 있는 두 남녀, 어쩌면 저 여자는 지체 높은 신분의 남자를 상대로 벼랑 끝에 매달린 듯한 사랑을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래서 남자의 얼굴은 감추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나도 안 보여주는 것보다는 조금 보여주는 것이 더 궁금증을 유발한다고 하는데, 보면 볼수록 궁금증이 증폭되는 그림이다.

 

세상 모든 여자를 아낌없이 사랑했던 천재 화가, 클림트

으레 화가들 곁에는 많은 여자들과 추문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클림트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는 평생 독신으로 살았지만, 그의 곁에는 많은 여성 후원자들과 모델, 연인들이 있었다. 게다가 그녀들과의 사이에서 나온 12명의 사생아들도 있었다.

이 정도되면 클림트는 타고난 바랑둥이라고 어찌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의 곁에는 유독 순수한 사랑을 지키며 그가 죽는 순간까지 그의 곁에 있었던 한 여자가 있었다.

에밀리 플뢰게, 구스타프보다 12살 어린 그녀는 클림트에게서 그림 수업을 받으면서 그에 대한 사랑을 키웠다. 그녀의 첫사랑이었던 클림트, 그녀가 마음만 먹었다면 충분의 그의 여자가 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단지 그녀는 그와 그를 스쳐지나가는 많은 여자들을 애태우며 지켜볼 뿐이었다.

그녀는 싫었다. 그런 여자들과 같은 부류의 여자로 취급받는 것이 싫었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런 여자들처럼 온전히 그의 여자가 되길 원한다면 그녀들처럼 클림트에게 버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클림트가 평생 독신으로 살았던 것처럼 그녀 또한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하지만 그녀는 클림트처럼 많은 남자를 만나면서 욕망을 채우지도 않았다. 그녀는 오직 첫사랑인 클림트만 바라봤을 뿐이다. 다행히 클림트는 죽기 직전에 그녀를 찾았고, 그가 마지막으로 내뱉은 말도 그녀의 이름이었다. 덕분에 그가 죽은 후 36년 동안 그녀는 클림트와의 기억으로 살아갈 수 있었다.

우린 어렴풋이 <키스> 속 여자는 에밀리 플뢰게이며, 얼굴을 감추고 있는 남자는 클림트 자신이 아닐까 짐작하며 물음표들을 잠재울 수 있다.

 

이 소설의 화자는 클림트가 아니라 그를 사랑한 에밀리 플뢰게이다. 베르메르를 향한 소녀의 섬세하고 풍부한 감정묘사 때문에 소설로 몰입할 수 있게 해준 트레이시 슈발리에의 『진주귀고리 소녀』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는 그런 강력한 몰입은 없었다. 좀더 섬세하게 에밀리 플뢰게의 감정을 묘사해 주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반면에 책 요소요소에 배치되어 있는 클림트의 그림들은 보는 이들의 눈을 즐겁게 하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그 그림들을 그리게 된 과정이나 뒷 이야기들이 곁들여져 있어서 그것을 읽는 재미도 솔솔했다.

클림트, 그는 바람둥이에다가 자신의 자식조차 나몰라라 했던 냉혹한 남자였을지는 모르지만 여전히 내게는 매력적인 작가임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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