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 버라이어티 팩 세트 - 12g, 5개입
알라딘 커피 팩토리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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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맛을 즐길 수 있어서 좋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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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의성을 지휘하라 - 지속 가능한 창조와 혁신을 이끄는 힘
에드 캣멀.에이미 월러스 지음, 윤태경 옮김 / 와이즈베리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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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표지를 보면 실루엣에 가려진, 지휘봉을 든 캐릭터가 무언가를 지휘하고 있다. 〈토이 스토리〉를 봤으면 이 캐릭터의 정체를 한눈에 알 것이다. 제목에 어울리는 표지다.


2010년대에 디즈니 계열사 영화들을 많이 봤었다. 디즈니, 픽사, 마블, 스타워즈까지. 물론 그 이전에도 디즈니 · 픽사 애니메이션을 자주 보았고, 그 경험이 디즈니 계열사들에서 나온 영화에 더 끌리게 만들었을 것이다. 아마 이 책을 샀던 이유는 픽사를 더 잘 알고 싶어서 였던 것 같다. 그런데 한 번 읽다가 무슨 이유인 지는 모르겠지만 한 번 덮었다. 2023년, 다시 이 책을 꺼내 읽게 되었다. 


픽사의 유명세는 말할 필요가 있을까? 당장 떠오르는 것만 해도. 〈토이 스토리〉, 〈니모를 찾아서〉, 〈몬스터 주식회사〉, 〈업〉, 〈라따뚜이〉, 〈월-E〉등등. 만드는 영화마다 하나 같이 극찬받는 영화사는 드물다. 헐리우드의 많은 영화사들이 툭하면 실패작을 내곤 한다. 그런데 픽사는? 1990년대 말부터 2010년 이전까지 픽사는 감독으로 치면 크리스토퍼 놀란이나 제임스 카메론 같은 영화제작사다.(물론 픽사도 간혹 실수는 한다. 저자 캣멀의 표현을 빌리자면 '멍청한 짓'을 저지르곤 한다. 다만 2010년대 이후로 그 빈도가 좀 늘어난 것 같다.)


이 책은 1986년 픽사를 창립하고 2018년 은퇴를 선언하기 전까지 수 십년간 픽사를 경영한 픽사의 前 사장 에드 캣멀의 회고록이다. 이 책의 독자는 누구일까? 머리말에서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이 책은 픽사 직원이나 애니메이터, 엔터테인먼트 기업 경영자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창의성과 문제 해결 능력이 필요한 환경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을 위해 쓴 책이다."(p. 14) 그렇긴 하지만 픽사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흥미로울 책이다. 픽사의 경영 방침, 픽사가 장편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는 방식, 픽사나 픽사의 작품들에 얽힌 비하인드 스토리를 알고 싶은 사람, 픽사라는 애니메이션 제작사에 대해 알고 싶은 사람은 모두 이 책이 만족스러울 것이다. 


책은 총 4파트로 구성된다. 첫째는 저자 에드 캣멀이〈토이 스토리〉를 만들기에 이르기까지의 과정, 두번째 파트는 〈토이 스토리〉의 성공 이후 경영자로서 캣멀이 픽사에서 마주하고 극복한 경영상의 문제과 해결책들. 세번째는 픽사를 경영한 끝에 도달한 나름의 경영 지침들, 네번째는 여전히 계속되는 도전으로서 픽사에서 획득한 경영 노하우를 디즈니 애니메이션 부서에 적용하는 동시에 픽사를 픽사답게 유지하려는 저자의 계속되는 노력. 마지막에는 이 책에서 저자가 설명한 창의적인 기업 관리법을 간단히 요약하여 수록해놓았다.


알라딘에서는 책 분류를 자기 계발/경제경영으로 분류해놓았다. 그렇긴 하지만 애드 캣멀의 회고록이며 이 책에서 비중을 차지하는, 주인공격인 인물이 세 사람있다. 첫째는 책의 저자로서 주인공이면서 서술자라할 수 있는 에드 캣멀이다. 


이 책을 관통하는 스토리는 에드 캣멀이 픽사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픽사에서 〈토이 스토리〉로 성공을 거둔 후 픽사를 어떻게 경영해 나갈지 고민하는 두 부분으로 나뉜다. 다시 말해 어린 시절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보고 애니메이션을 만들겠다는 비전과 열정을 안고 실리콘 밸리와 할리우드 사이에서 조지 루카스, 스티브 잡스, 존 래스터 등을 차례로 만나면서 마침내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는 회사로서 픽사에 이르러 〈토이 스토리〉를 만들면서 1부가 끝난다. 이어서 2부가 시작된다. 2부는 〈토이 스토리〉이후 꿈을 이룬 저자가 다른 많은 실리콘 밸리의 기업들이 몰락하는 것을 보고 어떻게 픽사는 같은 전철을 밟게 하지 않을 것인가 고민한 끝에 그 답을 찾는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픽사의 여러 대표작들이 탄생하고, 동시에 시행착오를 겪는다.  


서술자로서 저자는 경영자로서 마주한 시련과 경험을 돌이켜보고, 그로부터 얻었던 깨달음을 책 곳곳에서 꾸준히 독자에게 전해준다. 가끔은 저자 자신이, 때로는 픽사에서 저자와 함께 작품을 만든 동료들의 표현을 빌려 이런 깨달음을 전해준다. 이 책에 보이는 저자의 노력들은 모두 픽사를 지속가능한 창의적 기업으로 만들기 위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책을 읽다보면 저자가 절대 보통 사람이 아님을 바로 알게 된다. 캣멀은 어릴 적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보면서 자랐다(이 점에서는 공통점을 가진 사람이 꽤 있을지도 모르겠다). 애니메이터가 되고 싶었으나 재능도 없고 정보도 부족해 과학자가 되는 길로 방향을 틀었다. 그럼에도 월트 디즈니처럼 애니메이션을 만들겠다는 비전과 열정은 고이 간직하여 컴퓨터 그래픽 기술 개발에 매진한 끝에 마침내 픽사에 이르게 되었다. 


그런데 캣멀이 픽사까지에 이르는 과정이 재미있다. 우선 캣멀은 유타 대학 출신이다. 이 대학은 무려 인터넷의 원형이 된 아르파넷(ARPANET)이 최초로 연결된 미국의 4개 대학 중 하나다. 이어서 캣멀이 경영자로서 두 번째로 경영을 경험한 회사는 다름아닌 〈스타워즈〉의 감독 조지 루카스가 설립한 루카스 필름의 그래픽스 그룹이다. 그리고 이 회사를 인수, 픽사라는 회사로 다시 태어나게 도와준 사람은 세상에 아이폰을 내놓은 사람, 애플의 스티브 잡스다. 


스티브 잡스는 이 책에서 캣멀만큼 중요한 또 다른 등장인물이다. 이 책을 펼쳐 속표지를 넘기다보면 저자의 헌정사가 나오는데 그 헌정사를 통해 이 책에서 잡스의 비중이 얼마나 큰지를 가늠해볼 수 있다. '스티브 잡스에게 이 책을 바칩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잡스는 에드 캣멀이라는 사람이 수 십년간 바로 옆에서 지켜본 잡스다. 잡스는 지금 우리가 떠올리는 픽사가 되기 전까지 픽사에 자금을 대주고 픽사를 외부의 온갖 부침에서 지켜주었을 뿐만 아니라 픽사가 제작한 작품들의 성공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친 인물로 등장한다(물론 갈등도 많이 빚는다).


픽사는 스티브 잡스의 정신세계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했다. 픽사에서 잡스의 역할은 계속 진화했다. 초기에는 픽사가 계속 굴러갈 수 있도록 돈을 대주는 후원자였고, 나중에는 픽사의 보호자(픽사 내에서는 건설적인 비평가, 밖에서는 가장 적극적인 옹호자)가 됐다. 우리는 함께 힘든 시기를 보냈고, 이 과정에서 보기 드문 유대감을 형성했다. 나는 언제나 픽사를 잡스에게 사랑받는 양자라고 생각했다. 픽사는 잡스가 개입하기 전부터 존재했지만, 그가 오랜 세월 정성 들여 키운 덕분에 성장할 수 있었다. 나는 그의 인생 막바지 10년간 그가 픽사를 바꾸고 픽사가 그를 바꾸는 과정을 지켜봤다. - P415


처음 잡스가 픽사를 인수할 때 잡스의 대리인으로 온 변호사는 캣멀과 동료들에게 "잡스가 운행하는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을 각오해야할 것"이라 말한다.(p. 76) 한편 책의 마지막에서 캣멀은 잡스와 함께한 시간을 두고 "롤러코스터가 종점에 도착하고 좋은 친구가 롤러코스터에서 내렸지만, 참으로 굉장한 체험이었다. 우리는 얼마나 엄청난 여정을 함께했던가.(p. 423) 저자의 잡스에 대한 감정이 잘 드러나는 지점이다.  


이 점에서 스티브 잡스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으면서 스티브 잡스의 또 다른 면모를 조금이나마 엿보게 될 것이다. 건방지고, 참을성 없어보이고, 독단적인 것 같지만 자신에게 논리적이며 합당한 이유를 들면서 자신에게 반박하는 직원의 의견을 존중해주는 의외의 면모를 보여준다. 바로 위에서 말한 것처럼 롤러코스터를 몰아대는 인물이라는 표현이 참 어울린다.


이 책에서 캣멀, 잡스와 더불어 빼놓을 수 없는 제 3의 등장인물은 디즈니 출신의 애니메이터, 존 래스터다. 존 래스터는 디즈니에서 해고된 후 픽사에 합류, 초창기부터 픽사의 애니메이션 제작을 진두지휘하였다. 이 책에서 잡스, 캣멀, 래스터의 역할 분담을 보면 마치 몽테스키외의 삼권분립을 연상시킨다.(세 인물이 조직을 주도한다는 점에서 로마 공화정 말기의 삼두정을 연상할 수도 있겠다.)


픽사의 이점 중 하나는, 픽사가 처음부터 기술, 예술, 비즈니스를 아우르는 경영진의 지휘 아래 성장했다는 점이다. 픽사에서 나는 기술 부문을, 존 래스터는 창작 부문을, 스티브 잡스는 비즈니스 부문을 총괄했다. 픽사는 세 경영자의 열정적인 노력 덕분에 무너지지 않고 성장해 나갈 수 있었다. 픽사의 비즈니스 모델, 영화 제작 방식. 기술은 계속 변했지만 예술, 기술, 비즈니스 사이에서 균형을 잘 잡은 덕분에 어느 한 부문도 엇나가지 않고 세발 의자의 다리처럼 픽사를 지탱했다. 픽사에서 예술, 기술, 비즈니스는 서로 혁신시키는 추진력으로 작용한다. - P280


다시 책의 내용으로 돌아가보자면, 책의 전반적인 흐름은 캣멀이 시간순서에 따라 자신의 발자취를 돌이켜보고 그 과정에서 자신이나 픽사의 성공이나 실수를 떠올리고 어떻게 피드백하였는지 말하는 식이다. 예를 들어〈토이 스토리 2〉제작 과정에서 하마터면 소중한 작업물이 모두 날아갈 뻔한 해프닝을 돌이켜본다거나, 역시〈토이 스토리 2〉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직원들을 너무 혹사시켜 하마터면 한 직원의 자녀가 생명을 잃을 뻔한 사건까지도 들춰보면서 그로부터 어떻게 이런 사태를 미연에 방지할 것인지 고민한 점 등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저자는 1980년대 태동기 당시 실리콘 밸리(픽사의 원형이 된 루카스필름의 그래픽스 그룹은 실리콘 밸리와 할리우드의 중간 지점에 위치했다. 실리콘 밸리도, 할리우드도 모두 캘리포니아에 위치한다는 점을 보면 상당히 의미심장한 지점이다. 캘리포니아에 관해 브루스 커밍스가 지은 벽돌책『미국 패권의 역사』가 캘리포니아의 역사를 잘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이 책은 절판되었다 중고로 구하기보다는 도서관에서 대출을 추천한다.), 스티브 잡스, 주지 루카스 같은 유명 인물들의 조금 다른 면모들, 픽사만의 독특하고 창의적인 경영 방침, 픽사의 창의성과 직원들의 자유롭고 원활한 소통 환경을 위해 항상 조직 내부의 문제점을 찾아 해결하려 고군분투하는 저자와 존 래스터, 〈토이 스토리〉시리즈를 비롯한 유명한 픽사 작품들의 제작 비하인드, 디즈니와의 합병 과정 속에서 픽사를 계속 해서 창의적인 제작사로 지속가능하게 만드려는 노력 등을 보여준다. 


이 책에서 특별히 강조되는 점 중 하나는 저자인 캣멀이 직원을 보호하고, 직원 간의 자유로운 소통 환경을 만드려는 노력들이다. 처음에 제시되는 대표적인 사례가 회의실의 테이블과 명함이야기다. 테이블 좌석 배치와 직급을 나타내는 명함이 놓인 탓에 회의실 내부에 보이지 않는 역학 관계가 형성되어 직원들이 중역들의 눈치를 보게 만들었다. 저자는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 테이블을 바꾸었고 다른 사람이 명함도 치워버린다. 책의 마지막에 이르러서 캣멀은 '노트 데이'라는 것을 기획하여 근무일 하루 동안 픽사 직원들이 일하는 대신 만남과 토론의 장을 가져 현재 픽사라는 조직이 가진 문제의 해결법을 모색하는 동시에 직원들 간의 교류를 증진하는 기획을 시도하고 성공을 거두었다고 자평한다.


저자가 책에서 보여주는 태도는 본 받을만 하다. 부끄러울 수 있는, 자신이 저지른 멍청하고 한심한 짓을 가감없이 털어놓는다. 그러면서 자신이 놓친 문제점을 어떻게 해결하여 픽사를 개선시켰는가라는 결론으로 이어간다. 캣멀이 책에서 보여주는 끊임없는 자문, 자성, 자기쇄신은 읽는 독자를 반성하게 만든다. 


책에서 저자가 보여주는 통찰은 어느 독자에게나 유용하다. 크게 실패에 대처하는 방식, 무작위성과 변화에 대처하는 방식, 인간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꼽을 수 있겠다. 먼저 실패에 대처하는 방식이다. 우선 캣멀이 실패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들어보자.


실패를 다르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 실패에 적절하게 접근하면, 실패는 성장의 기회가 될 수도 있다. 그런데 대다수의 사람이 이 같은 주장을 ‘실패는 필요악‘이라고 해석한다. 실패는 필요악이 아니다. 실패는 전혀 ‘악하지‘ 않다. 실패는 새로운 일을 하는 과정에서 경험하는, 피할 수 없는 귀결이다(그리고 실패는 가치 있다. 실패 없이 독창적인 작품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실패를 받아들이는 것은 중요한 학습 기회이지만, 이런 진실을 인정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실패는 고통스러운 경험이기에, 실패에 대한 감정이 실패의 가치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실패의 좋은 점과 나쁜 점을 구분하기 위해선 고통스러운 현실과 그 결과 달성하는 성장의 혜택을 둘 다 인식해야 한다. - P160


실패는 분명 고통스럽고, 머리로는 실패를 성장의 계기로 삼으려 해도 가슴으로는 실패를 받아들이기 힘든 법이다. 캣멀은 이 같은 실패 혐오 문화를 조직에서 추방시키기 위해서는 경영자가 바뀌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경영자가 솔선수범하여 나서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직원들이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직면하도록 할 수 있을까? 답은 간단하다. 경영자가 자신의 실수, 자신이 실패에 기여한 부분을 솔직히 털어놓으면 직원들이 실패해도 괜찮다고 생각하게 된다. 경영자는 실패에서 도망치거나, 실패가 존재하지 않는 척하지 말아야한다. 이 때문에 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다가 난관에 부딪쳤을 때 숨기지말고 솔직히 털어놓으라고 직원들에게 강조한다. 문제를 공개하는 것은 문제에서 교훈을 얻는 과정의 첫걸음이다. - P163


그렇다면 이처럼 실패를 받아들이는 문화로부터 얻는 혜택은 무엇이 있을까?


실패를 (인간 본성이 허락하는 한) 두려워하지 않는 기업문화를 조성할 경우, 직원들은 새로운 영역을 탐구하고, 가지 않은 길을 찾아보고,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행위를 훨씬 덜 꺼리게 된다. 또한 과감한 행동의 좋은 면을 인식하게 된다. 막다른 길에 당도했을 때, 자신이 제대로 된 길로 왔는지 되돌아가야 할지 고민하면서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 것만 해도 큰 이득이다.

길을 선택하는 것만으론 충분치 않다. 선택한 길로 가야 한다. 그렇게해야 전에는 보지 못했던 것을 보게 된다. 새롭게 알게 된 것이 쓸모 없을 수도 있고, 혼란만 더할 수도 있지만 최소한 ‘몰랐던 곳을 탐색해봤다‘는 의미는 있다. 잘못된 곳을 헤맸다고 뒤늦게 깨달았어도 올바른 길로 되돌아갈 시간이 여전히 존재한다. 잘못된 곳을 헤매는 동안 경험한 일들은 헛된 것이 아니다. 당장 업무에 도움되지는 않지만 솔깃한 아이디어를 탐색했다면 기억해뒀다가 나중에 활용할 수도 있다. - P164


실패를 겪으면 흔히 정신적, 감정적으로 힘든 상황을 맞이하기 마련이다. 실패를 혐오하는 문화에서는 실패가 가져다주는 이득마저 가져갈 수 없게 만든다. 이 점에서 저자에게 적극 동의하는 바이다. 어떤 일을 실패했다는 것은 당장은 시간이나 돈처럼 소중한 자원을 허비한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실패가 나중에 성공의 밑바탕이 되어줄 수도 있지 않은가?


진짜 피해야할 것은 실패가 아니라 실패를 회피하려는 태도라고 생각한다. 캣멀 역시 그리 생각하는 듯 하다. 단기적으로는 작은 실패들을 피할 수 있을지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더 큰 실패로 어이질 수밖에 없다.


픽사 경영진이 직원들에게 독려하는 ‘시행착오 반복‘은 최대한 빨리 틀려 학습하고 해법을 모색하는 접근법이다. 모든 가능성과 결과를 염두에 두고 치밀하게 계획을 세워 성공 확률을 높이는 접근법을 쓰는 경영자도 있다. 그러나 창의적인 제품을 생산하려는 기업에서 모든 문제에 이런 방식으로 접근하는 경영자는 자기기만의 함정에 빠질 위험이 있다. 실패 확률을 낮추는 데 집착하면, 과거에 성공한 제품이나 방식을 복제하기 십상이다. 따라서 세밀하고 완벽하게 계획을 세운 뒤에 일을 추진하려는 경영자는 독창적이지 않은 제품을 생산할 확률이 높다. 아니, 무엇보다도 문제해결 방법을 미리 계획하기란 불가능하다. - P167


저자는 어떻게 하든 실패는 피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어지는 저자의 말은 기업경영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대인관계에서도 중요한 통찰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지금까지 관찰한 바로는 접근 방식을 오래 고민하고 선뜻 행동에 나서길 주저하는 사람이 오류를 저지를 확률은 빨리 뛰어들어 일하는 사람과 비슷했다. 지나치게 계획하는 사람은 실패 확률을 낮추지 못한다. 실패할 때까지 걸리는 시간이 길어질 뿐이다(투입한 시간이 증가하는 만큼 실패할 때 느끼는 좌절감은 더 커진다). 더군다나 계획에 시간을 많이 들일수록 효과가 없는 것으로 드러나도 받아들이지 못하고 집착하기 십상이다. 현재의 접근 방식으로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두뇌가 다른 접근 방식을 생각하지 못한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필요한 행동은 바로 현재의 방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방식을 시도하는 것인데도 말이다. 창의적인 제품을 만들려는 기업이 실패 확률을 낮추는 데 집착하는 것은 오히려 더 큰 실패를 부르게 마련이다. - P168


저자가 보여주는 또 다른 통찰은 변화와 무작위성에 어떻게 대처하는가이다. 좋은 일이든 좋지 않은 일이든 인생에서는 무슨 일이든 겪게 된다. 저자는 브레드 버드 감독의 말을 인용한다.


브래드 버드 감독은 애니메이션 스튜디오건 음반사건 간에 모든 창조적 조직은 하나의 생태계라고 말한다. "모든 창조적 조직에는 계절이 필요합니다. 폭풍우도 필요하고요. 생태계와 똑같아요. 충돌이 없는 상태를 최적의 상태라고 보는 것은 화창한 날을 최적의 상태라고 보는 것과 같아요. 화창한 날은 태양이 비구름을 몰아낸 날입니다. 이때는 충돌이 없고, 승자가 명백하죠. 하지만 매일 화창하기만 할 뿐, 비가 오지 않으면 생물이 자랄 수 없습니다. 밤도 없이 항상 햇볕만 내리쬐면 지구가 말라붙고 모든 생물이 멸종할 겁니다. 충돌은 기업에 필수불가결한 요소입니다. 충돌을 통해 최고의 아이디어가 나오고 검증받기 때문이죠. 화창한 날만 있으면 생태계가 존재할 수 없듯, 충돌이 없으면 창조적 조직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P199


이 책의 통찰들이 다 그렇지만, 브레드 버드 감독의 말은 창조적 조직 뿐만 아니라 일상생활과 대인관계 등 인생에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낮과 밤이 있는 것처럼, 맑은 날과 어두운 날이 있는 것처럼, 여름과 겨울이 있는 것처럼 인생에는 좋은 시절도 있고 나쁜 시절도 있다. 중요한 건 그 모든 게 인생을 이룬다는 점이라고 할까.


변화는 좋든 싫든 다가오는 것이다. 저자는 무작위성을 인생의 묘미로 받아들이라고 조언한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이 대목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변화를 반기든 거부하든 상관없이 변화는 일어난다는 사실뿐이다. 많은 사람이 예측할 수 없고 무작위로 일어나는 사건들을 두려워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 내가 생각하기에 무작위성은 피할 수 없는 게 분명하지만, 이는 인생의 묘미이기도 하다. 이 점을 인식하고 인정하면 뜻하지 않은 상황이 닥쳐도 건설적으로 대응할 수 있다. 사람들은 공포에 짓눌려 확실하고 안정적인 것을 추구하지만 확실한 것, 안정적인 것을 추구한다고 안전해진다는 보장은 없다. 나는 다르게 접근한다. 나는 무작위성을 두려워하는 대신 인생에서 무작위성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무작위성을 긍정적으로 활용하는 선택을 내릴 수 있다고 믿는다.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은 창의성의 산실이다. - P211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은 오히려 창의성을 낳기 때문이다. 마감 기한 직전에 오히려 아이디어가 샘솟는 것도 같은 맥락 아닐까? 무작위성과 관련해 마지막으로 한가지 더 짚고 넘어가야할 점은 인간이 인식하는 한계가 있다는 점이다. 


지금도 수많은 사건이 자신이 보지 못하는 곳에서 벌어지고 있고 다양한 방식으로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사고의 유연성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된다. 내가 여기서 주장하려는 바를 리더의 겸손함을 강조하는 것으로 해석할 독자도 있겠지만, 리더가 진정으로 겸손해지려면 먼저 자신의 삶과 기업을 형성하는 보이지 않는 요소가 얼마나 많은지 이해해야 한다. - P248


사람의 두뇌가 아무리 뛰어나다지만, 세계의 모든 외부 요인을 계산해 결과를 정확히 예측하는 컴퓨터와는 거리가 있다(그리고 그런 컴퓨터가 존재하더라도 아주 먼 미래에나 존재할 것이다). 사람이 머무는 집이라는 한정되고 통제된 공간에서 조차도 아끼는 물건을 잃어버려서 찾지 못하거나, 집에서 벌레를 발견하고 어디서 기어들어왔는지 모르는 경우가 있다. 하물며 집밖의 공간에서는 더 말할 것도 있을까. 이 점에서 겸손해지라는 캣멀의 말이 설득력있게 다가온다.


이와 관련해 인간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으로 넘어가보자. 캣멀은 인간의 두뇌가 정보를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를 두고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인간의 두뇌는 실로 어려운 일을 수행한다. 인간은 안구의 뒷면을 덮고 있는 신경조직인 망막 중 상의 초점이 맺히는 부분인 중심와를 통해 눈앞에 펼쳐진 지극히 방대한 시각 정보 중 극히 일부만을 받아들인다. 쉽게 말해 인간은 눈앞에 보이는 정보를 대부분 인식하지 못하거나 무시한다. 하지만 인간의 두뇌는 부족한 세부 정보를 즉시 보충해 넣는다. 이것이 인간 두뇌의 심성모형mental model(세상에서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이나 상황을 묘사하는 마음의 표상. 사람들은 경험이나 훈련을 통해 심성모형을 형성한다-옮긴이)이다. - P251


심성모형이라는 전문용어가 등장한다. 바꿔 말하자면, 인간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세상을 자기 나름의 관점대로 이해해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더 들어보자.


사람들은 자신이 현실을 온전히 인식하고 있다고 굳게 믿지만, 사실은 현실의 일부분만을 인식하고 있을 뿐이다. 다시 말해, 사람들은 자기 두뇌가 처리한 ‘결과‘는 인식하지만, 두뇌의 정보 처리 과정‘은 인식하지 못한다.

사람들은 보통 의식을 두뇌 ‘내부‘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인식 이론을 연구한 알바 노에Alva Noe UC버클리 철학 교수는 의식을 인간이 주변 세계와 역동적으로 상호작용하는 과정에서 만들어내거나 수행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즉, 의식이란 문맥 안에서 벌어지는 현상이다. 알바 노에 교수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인간은 타인과 함께 사는 환경 속(p. 253)에서 구현된 삶을 살아간다. 인간은 외부의 영향을 받는 데 그치지 않고, 스스로 발휘한 영향력에 영향을 받도록 태어난 존재다. 인간은 세계와 분리된 존재가 아니라 역동적으로 세계와 상호작용하고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다." 알바 노에 교수는 돈을 예로 들었다. 돈은 상호연결된 방대한 경제사회 시스템 안에서만 가치와 의미를 지닌다. 비록 사람들은 화폐 표면에 찍힌 숫자에 신경을 쓰지만, 사람들의 돈에 대한 관념은 훨씬 복잡한 심성모형에 따라 결정된다. 이 심성모형은 인생관, 자기이익, 자신이 생각하는 사회적 지위, 타인과 자신에 대한 판단에 영향을 미치기도 하고, 영향을 받기도 한다. - PP. 252-253.


이 대목을 읽으면서 이 책은 단순한 회고록이나 경영지침서를 넘어 인생의 중요한 교훈을 전달하는 책이라고 확신할 수 있게 되었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인간은 '심성모형'이라는 정신의 감옥 속에 갇힌 채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나 다름없다고도 할 수 있다. 물론 이건 극단적인 비유를 든 것이다.


그렇기에 저자는 타인의 인식과 경험이 자신과 다르다는 사실을 중대하게 받아들일 것을 요청한다.


누구나 나름의 독특한 심성모형을 가지고 있기에, 인간관계에 대한 관점은 제각기 다르다. 이 점을 명심해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이 자기 관점이 최고라고 생각한다. 그가 아는 관점이라고는 자기 자신의 관점 하나밖에 없기 때문이다. 혹시 다른 사람의 말과 생각을 오해하는 일을 겪으면서 자기 현실 인식의 한계를 저절로 자각하게 될 것이라고 기대할 독자가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저절로 자각할 수는 없다. 타인의 인식이나 경험은 자신의 인식이나 경험과 완전히 다르다는 사실을 공부하고 거듭 복습해야만 한다. 창조적 기업 환경에서 이런 차이들은 자산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각자의 차이를 인정하고 존중하지 않으면, 이 같은 차이는 창조적 업무에 도움이 되기보다는 방해가 된다. - P253


저자는 심성모형을 도구에 비유한다. 우리가 현실을 바라보도록 도움을 주는 도구다. 우리는 이 도구로 세상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도구와 주인의 관계가 뒤바뀌지 않게 주의해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인간의 심성모형은 현실이 아니다. 인간두뇌의 심성모형은 기상학자가 날씨를 예측하기 위해 사용하는 모형같은 것, 즉 도구다. 기상학자가 비가 내릴 것이라고 예측하지만 실제로는 화창한 날이 많듯, 도구는 현실이 아니다. 도구와 현실을 구분해야 한다. - P256


이상의 세 가지 통찰은 기업경영이라는 영역을 넘어 개인의 삶에서도 중요한 삶의 태도, 혹은 지혜라고 생각된다. 어떻게보면 기업경영 자체가 인간의 여러 행위들 중 하나에 속하니, 저자가 기업경영에서 얻은 교훈이 인간사에 고스란히 적용될 수 있다는 말은 당연한 말을 쓸데없이 중언부언하는 것일 수 있겠다.


오랜만에 이 책을 다시 읽으면서, 픽사의 비하인드 스토리에 피식 웃기도 하고, 저자가 보여주는 통찰에 감탄하기도 하고, 픽사 영화들을 보던 추억을 떠올리기도 했다. 글을 마무리하기에 앞서, 지금 시점에서 이 책을 가장 시급하게 읽어야할 독자는 누구일까라는 질문을 던져보고자 한다. 내 생각에는 현 픽사 경영진이 아닐까 한다. 


픽사 사장으로서 내 목표는 언제나 픽사가 창업자들(스티브 잡스 회장, 존 래스터John Lasseter 최고크리에이티브책임자, 그리고 나)보다 오래 생존할 수 있게 픽사에 계속 생명력을 불어넣는 창의적 기업문화를 구축하는 것이었다. 예술과 상업이라는 상호충돌하면서도 상호보완적인 동력을 관리하느라 애를 먹고 있는 경영자들과 창의적 기업문화에 관한 철학을 공유하는 것도 내 목표다. 이 책은 픽사를 지탱하는 기업문화를 구축한 아이디어들을 공유하려는 시도에서 나왔다. 이 책은 픽사 직원이나 애니메이터, 엔터테인먼트 기업 경영자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창의성과 문제 해결 능력이 필요한 환경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을 위해 쓴 책이다. - P14


이 책은 2014년에 출간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2023년이다. 이 책에서 픽사를 이끈 3인방 중 스티브 잡스는 2011년에 이미 세상을 떠났다. 에드 캣멀은 2018년에 은퇴했다. 존 래스터는 2018년 성추문으로 인해 해고되었다. 픽사의 창업자 세 사람 모두 픽사를 떠났다. 2020년대 픽사는 창업자  세 사람이 픽사에 불어넣은 창의적 기업문화를 꾸준히 유지하면서 지금까지 우리가 기억하는 픽사로 남을 수 있을지, 그런 기업문화를 상실하고 그저 그런 할리우드의 흔한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로 전락할지 중대한 기로에 서있는 듯해서다. 


나는 (이들이 "넉넉한 여유, 발칙한 상상력, 엉뚱한 이탈")이라고 표현하는 픽사의 기업문화야말로 픽사가 성공하는 데 있어서 필수불가결한 요소였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픽사가 성공할 수 있었던 핵심 비결은 따로 있다.
그것은 ‘문제는 항상 존재하는 법이고, 그중 상당수는 자신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직원들이 인정한다는 점이다. 픽사 직원들은 자신이 그냥 지나쳐버리는 문제들을 찾아내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다소 불편해도 노력을 중단하지 않는다. 그리고 문제를 발견하면 모든 에너지를 문제를 해결하는 데 투입한다. 바로 이것이 내가 즐겁게 출근할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다. 나는 미지의 문제들을 발견하고 해결하는 과제를 수행하며, 직원들도 이 같은 과제를 수행할 수 있게 돕고 싶다. 이것이 내가 픽사에서 일하는 동기이자, 내가 느끼는 사명감이다. - P8

만약 픽사가 성공적인 기업이 된다면 우리도 멍청한 짓을 저지를까? - P13

앤드루 스탠튼은 설명한다. "항해하면서 궂은 날씨와 파도를 피하는 것이 목표인 선장은 애초에 배에 타지 말았어야 합니다. 항해란 통제할 수 없는 요소들에 직면해야 하는 일입니다. 항해하다 보면 좋은 날도 있고, 궂은 날도 있습니다. 어떤 날씨라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어요. 항해의 목표는 결국 맞은편 육지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모두 통제할 순 없습니다. 항해란 이런 일입니다. 편하고 간단하게 가는 것이 목표인 사람은 배를 타면 안 됩니다."
- P312

예컨대, 나는 사람들이 기업을 기차에 비유하는 것이 과연 적절한 것인지 늘 궁금했다. 기차는 선로를 따라 산을 넘고 평야를 가로지르고 짙은 안개와 어두운 밤을 뚫고 달려간다. 기업의 상황이 나빠질 때 사람들은 기업이 ‘탈선했다‘, ‘기차가 충돌 사고를 일으켰다‘라고 말한다. 픽사 제작팀을 정교한 기관차에 비유하며, 이 기차를 운전해 작품을 제작하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은 자신이 이 기차를 운전할 능력이 있는 기관사라고 믿고, 기관사가 기업의 미래를 창조할 권력을 가진 사람이라고 착각한다. 사실은 그렇지 않다. 기관사는 기차의 진로를 결정하지 못한다. 기업의 미래를 창조하는 가장 큰 힘을 가진 사람은 기관사가 아니라, 선로를 놓는 사람이다. - P320

‘현재를 충실히 살라‘는 동양 철학의 가르침을 들어본 미국인이 많을 것이다. 현재 마주친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해법을 찾으면, 과거나 미래에 대한 불안을 떨쳐낼 수 있다. 그러려면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훈련이 필요하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그 밑바탕에 깔려 있는 철학 즉, ‘모든 것은 변화한다‘라는 철학을 이해하는 것이다. 모든 것은 항상 변한다. 그리고 이것은 결코 막을 수 없다. 막으려고 시도하다간 험한 꼴을 당할 뿐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고통을 겪으면서도 여기서 교훈을 얻지 못하고 계속 변화를 막아보려고 한다. 더 나쁜 것은 변화에 저항하다가 초심자의 마음(새로운 것에 열린 마음가짐)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 P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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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3-09-16 23:4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정성껏 요약하고 소개해주신 책을, Heath님 덕분에 날름 엑기스만 받아가는 미안함도 있네요.

어떻게 잘 나갈까?가 아니라, 다른 반짝스타 기업들 왜 망할까? 어떻게 하면 몰락하지 않을까?를 고민했다는 지점이 특히 확 들어왔습니다. 도움이 될 내용이 가득하네요.

Heath 2023-09-17 09:18   좋아요 1 | URL
읽으면서 저자가 고민하는 지점들에 저도 눈길이 많이 갔습니다. 도움이 될 수 있으면 좋겠네요 :)
 
세계를 바꾼 아이디어
펠리페 페르난데스아르메스토 지음, 안정희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4년 8월
평점 :
절판


표지 이미지를 보면 알겠지만, 이 책의 표지는 특이하게도 ISBN 바코드로 되어 있다. 북적북적이나 북플 앱으로 바코드를 검색하면 실제로 인식된다. 아마 책 도중에 제시되는 아이디어 중 하나인 '몇 개일까? - 수(數)가 실재라는 아이디어'(pp. 120-121.)에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 해당 페이지 도판도 실제 ISBN 코드이기도 하고.


이 책은 인간의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여러 아이디어들이 무엇이며, 언제, 어디서,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추적하고, 각각의 아이디어들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밝힌다. 


어떤 아이디어는 손에 잡히는 결과를 만들어 냄으로써 직접적으로 세계를 변화시키지만, 또 어떤 아이디어는 사람들의 세계관에 영향을 줌으로써 간접적으로 세상을 변화시킨다.

 이 책은 이 두 가지 유형의 아이디어를 모두 다룬다. 각 아이디어에 대하여 필자는 그것이 무엇인지, 또는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할 뿐 아니라, 어떻게 생겨났으며 어떻게 영향을 남겼는지도 말하려 애썼다. 그리하여 각 아이디어의 기원, 전후 배경, 성격, 그리고 결과를 하나의 텍스트 안에 담았다. - P6


이 책이 다루는 아이디어는 Idea 그 자체다. Idea는 한국어로 생각, 방안, 견해, 신념, 사고방식 등등 다양한 의미로 번역되는 단어다. 저자가 사용하는 Idea는 Idea가 의미하는 개념을 모두 포괄하는 광의의 Idea로 보인다.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자면, 이 책이 말하는 Idea는 선사시대 및 역사시대 인간이 특정 사물이나 행위를 바라보는 방식, 특정 행동을 수행하게 만드는 의도나 가치관, 세계관, 특정 행동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강화되는 믿음, 신념, 관념 등등을 모두 아우르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에 이 책은 제일 먼저 '식인 행위'를 제시하여 선사 시대의 인류가 어떤 '의도'로 식인행위를 저질렀는지 추정하는 것으로 시작해, 여러 시대에 걸쳐 나타난  종교, 사상, 과학적 아이디어를 다룬 후 마지막 페이지 '지구촌'에서는 문화적 다원주의라는 '사상'의 필요성을 제시하며 끝난다. 'Idea'라는 단어를 'Idea' 그대로 받아들이는 영어 사용자 입장에서 이 같은 시도는 흥미로울 것으로 보인다. 


책의 구성을 살펴보면, 총 7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책이 다루는 시간적 범위는 기원전 30000년전부터 기원후 2000년까지다. 


각각의 장은

1. 사냥꾼의 정신(기원전 30000~10000년 전)

2. 진흙탕에서 나와(기원전 10000년전~기원전 1000년)

3. 부처님 가라사대(기원전 1000년~기원 원년)

4. 생각하는 종교(기원 원년~기원후 1400년)

5. 미래로의 회귀(1400년~1800년)

6. 진보의 환상(1800년~1900년)

7. 불확실성의 시대(1900-2000년)으로 나뉜다.


각각의 장은 해당 시대를 개괄적으로 설명하면서 시작된다.


여타 역사책과 비교했을 때 시대 구분이 독특한데, 이 책은 고고학이나 인류학에서 다루는 선사시대에서 시작해 역사학에서 다루는 역사시대로 나아간다. 역사 시대 시대를 나누는 연도도 서양 역사서에서 주로 제시되는 고대/중세/르네상스/근대 같은 시대 구분과 차이가 있다. 선사시대를 아우르려는 점에서 빅뱅 이래 우주의 역사까지 포함하고자 하는 '빅히스토리' 보다는 범위가 작지만 역사시대만 다루는 보통의 역사책들보는 그 범위가 넓다. 이 책이 다른 역사책들과 어떻게 다른지 저자 본인의 말을 들아본다면,


오늘날에 존재하는 중요한 아이디어 대부분은 그 기원이 고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필자는 그 사실을 반영하기 위해 통상적인 관습을 버렸다. 많은 아이디어들은 문자가 발명되기 전에 인간의 마음속에 최초로 떠올랐다. 그런 아이디어들은 오로지 고고학적 연구와 드물게 나마 살아남은 예술 작품과 상상력을 통해서만 재구성할 수 있다. 아이디어의 역사를 다룬 대부분의 이야기는 고대 그리스에서 시작한다. 기껏해야 고대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에서 시작된다. 이것은 이중의 오해를 낳는다. 우선 그것은 서구 전통에 특권을 부여함으로써 역사를 왜곡하고, 다음으로 역사에서 가장 긴 시대를 배제한다. 이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독자들은 그리스 현자들의 아이디어에 도달하기 전에 책 전체 내용의 4분의 1이상을 지나온 것을 발견할 것이다. - P7


각각의 장에는 각 시대에 등장한 아이디어들이 제시된다. 2페이지에 걸쳐 하나의 아이디어를 개괄적으로 설명한다. 아울러 이해를 돕기 위해 각각의 아이디어를 한 눈에 보여주는 도판이 수록되어 있다. 또한 본서에서 해당 아이디어와 관련이 있는 아이디어가 몇 페이지에 있는지 제시하여 아이디어끼리의 연계성을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영어 원서만 제시되긴 하지만) 해당 아이디어와 관련해 어떤 책을 읽어보면 좋을지 저자가 추천하는 참고 도서가 2~3권 가량 제시된다. 


책의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저자의 방대한 학식과 기존의 틀을 깨는 사고방식을 느낄 수 있다. 저자는 고고학, 인류학, 역사, 종교, 철학, 과학, 예술 등 경계를 넘나들면서 선사시대부터 현재까지 인간의 다양한 '아이디어'들의 기원과 변화를 추적한다. 이때 저자의 말처럼, 현재의 우리가 평소 당연하다 생각하는 많은 아이디어들은 사실 선사시대나 역사시대 초기에 등장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다. 예를 들어 자본주의는 5장에 배치되어야할 것 같지만 3장에 배치되어 있다.


덧붙이자면 저자가 되도록 '서구중심주의'를 탈피하고자 비유럽권의 아이디어들도 책에 담으려는 노력도 눈에 띈다. 가령 5장 미래로의 회귀에서는 중국의 '천명'이라는 아이디어를 다루고, 6장에서는 인도, 중국, 일본이 서구화를 어떻게 수용했는가에 관해 지면을 할애하기도 한다. 몇몇 장은 글씨체를 바꾼다거나 책의 구성을 달리하는 식으로 해당 아이디어의 필요성을 체험하게 만드는 구성도 돋보인다. 


물론 단점이 없지는 않다. 첫째로 가끔 오탈자가 있고, 타언어권 인물명을 영어식으로 표기하는 경우가 간혹 보인다.(프리드리히 2세를 프레데릭 2세로 표기한다던가) 그리고 수록된 도판이 본문의 텍스트와 겹치는 경우가 간혹 있어서 가독성이 떨어지는 페이지도 있다. 다행히 읽는데 크게 지장은 없는 단점들이다.  


두 번째 단점은 저자도 인정하는 단점으로, 이 책의 아이디어들은 저자가 주관적으로 선택한 아이디어들이다. 읽는 독자에 따라서는 '왜 저자는 이 아이디어를 이 장에 수록하지 않았을까?' 혹은 '왜 저자는 이 아이디어를 이 장에 수록했을까?' 같은 의문을 자연히 품을 수밖에 없다. 특히 자본주의처럼 논쟁적인 개념이라면 더더욱.


나는 이 책이 나름대로 독특하고 의미가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이 책에도 한 가지 중요한 한계가 있다. 그것은 이 아이디어들이 개인적으로 선별되었다는 사실이다. 이 선택의 문제는 오로지 필자의 책임이다. - P7


간단히 마무리하자면,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행하는 행위와 생각들이 사실은 상당히 오래전부터 이어져 왔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아이디어'라는 단어를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책이기도 하다. 

이 책은 마음속에서 먼저 일어난 역사, 즉 아이디어에 의하여 추진된 역사를 다룬다. 이것은 우리 인간의 기록이 왜 변화로 가득한가에 대한 설명이 될 수 있다. - P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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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립백 에티오피아 예가체프 하루 수케 - 12g, 5개입
알라딘 커피 팩토리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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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미가 마음에 듭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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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을 발칵 뒤집은 판결 31 - 역사적인 미국 연방대법원 사건들과 숨은 이야기
L. 레너크 캐스터.사이먼 정 지음 / 현암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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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도 여러 종류의 책이 있다. 그중에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담고 있는 내용의 가치가 높아지는 책이 있는 반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내용의 가치가 퇴색하고 마는 책이 있다. 이 책은 아쉽게도 후자에 가깝다. 저자들의 잘못은 아니다. 단지 이 책이 2012년에 나왔기 때문에 그 한계가 드러나는 것일 뿐이다.


이 책은 미국 연방대법원에서 심의한 31가지 역사적 재판을 다룬다. 각각의 판결은 크게 다음의 테마들로 구분된다. 개인의 자유와 권리 / 종교, 사상, 양심 / 정의롭고 공정한 사회 / 대통령 대 연방대법원 / 비즈니스 / 긴급판결. 이중 단 하나의 판결만 다루는 긴급판결을 제외한 나머지 5개의 테마들은 대체로 5~8가지 판결을 다룬다.


각각의 개별 판결은 판결이 시작된 배경을 다루는 '프롤로그', 대법원의 판결을 요약정리한 '판결문', 대법원의 판결에 대한 '반대의견'이나 '보충의견', 판결 이후의 뒷이야기를 다루는 '에필로그' 순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서 판결이 만장일치로 나왔을 경우, 반대의견이 생략되는 경우도 있다. 드래드 스콧 대 샌포드 판결이나 고레마츠 대 정부 판결에서는 반대의견이 판결문보다 더 중요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러한 구성을 통해 독자는 첫째로 해당 판결이 일어나게 된 배경을 알 수 있고, 둘째로 판결의 내용을 파악할 수 있으며, 셋째로 해당 판결에 대한 반대의견이나 보충의견을 확인할 수 있고, 마지막으로 판결 이후 어떤 일이 있었는가도 알 수 있다. 


아울러 지루하고 어려울 수 있는 법률 문제를 당시의 시대적 배경에 맞추어 읽기 쉽게 풀어 냈다는 점이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다. 가령, 나 자신의 사례를 들자면, 작년에 번복된 로 대 웨이드 판결은 그 이름은 많이 들었지만 정작 해당 판결이 나오게 된 배경이나 전개 과정, 판결 이후의 영향 등에 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이 책을 통해 로 대 웨이드 판결의 전개 과정은 어떠했는지, 제인 로라는 이름을 내세워 실제 소송을 걸었던 인물은 누구였으며, 판결 이후 어떤 삶을 살았는지 개략적으로나마 알게 되었다.


각각의 판결을 전부 다 소개할 필요는 없을 듯 하다. 다만 31가지의 다양한 판결들을 보면 시대상의 변화를 잘 체감할 수 있다. 예컨대 1856년 드래드 스콧 대 샌포드 판결과 1954년 브라운 대 토피카시 교육위원회의 판결을 비교해보자. 책에서 두 사건은 연이어 배치되어 있고, 두 사건 사이에는 98년의 격차가 있다.


먼저 드래드 스콧 대 샌포드 판결을 보자. 판결부터 정신이 아득해진다. 여러 내용 언급할 필요 없이 핵심은 간단하다. "흑인 노예는 인간이 아니다" 실제로 이 판결은 대법원 역사상 최악의 판결로 회자되며, '스콧 대 샌포드 판결 이래 최악의 ...' 같은 수식어구로 자주 활용된다. 


이어서 1954년 브라운 대 토피카시 교육위원회 판결이다. 이 판결은 인종 격리정책에 관한 판결이다. 드래드 스콧 대 샌포드 판결 이후 98년이 지난 후 미국 연방대법원은 "격리는 곧 차별이다" 라는 판결을 내렸다. 거의 1세기 걸려 이룬 진보라 할 수 있겠다. 


앞서 언급한 판결 중 코레마츠 대 정부의 판결도 충분히 놀랍다고 할만하다. 정부가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일본계 미국인(그것도 미국 시민)의 권리 제한을 위헌이 아니라고 판결한 것이다. 이 판결도 연방대법원 역사상 수치스러운 판결로 남았다. 


여기서 다시 드래드 스콧 대 샌포드 판결로 돌아가 조금 다르게 보자. 지금 미국이라는 나라는 트럼프 시대 이래 좌우가 극단적으로 갈려 소위 '문화 전쟁'을 겪고 있다. 이런 극단적인 분열은 19세기에도 있었고, 그때는 원인이 노예제 문제였다. 어떻게 보면 미국이라는 나라의 분열성과 극단성은 21세기 들어 처음 나타난 것이 아니라 아메리카 대륙에 정착한 시점부터 존재했고, 각종 제도적 장치로 그동안 억눌러오긴 했지만 간간히 터진 게 아닌가 싶다. 


물론 세계사에서 다른 나라들과 비교해보면 이 역시 달리 볼 여지가 있다. 규모상 미국 보다 한참 더 작은 나라들에서조차 민족 갈등이나 종교 갈등과 같이 여러 요인에서 기인하는 갈등과 충돌이 빚어지고, 가끔 내전으로 번지거나 국가가 분열되는 경우로도 이어진다. 교과서에 이름이 나온 제국이나 왕국(그리고 공화국)치고 반란과 내전이 없는 경우는 드물다.  


여기서 미국은 공공연하게 '제국'으로 불리고 연구될 정도로(제국으로서의 미국에 관해서는 역사학자 다니엘 임머바르가 지은 『미국, 제국의 연대기』(2020)를 추천한다) 거대한 국가이다. 50개의 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인종도 다양하고 매일 새로운 이민자가 유입되는 나라다. 매일 뉴스만 보면 인종 관련 이슈가 빠지는 날이 없음에도, 미국이 국내 갈등을 법적 절차에 따라 수습하고 봉합하면서 국가적 분열을 어떻게든 차단하는 모습을 보면 경이로워 보일 정도다.


한편 1969년 브랜든버그 대 오하이오 판결은 미국이라는 나라의 아이러니가 집약된 KKK단과 관련이 있다. 브랜든버그 대 오하이오 판결은 판결 당시에는 인종주의적 표현도 표현의 자유로 보장해야 하는가 라는 주제와 관련이 있다. 대법원은 "폭력 행위에 대한 옹호와 실행은 구별되어야 마땅하다"는 판결을 내리며 KKK단 지도자 브랜든버그의 손을 들어주었다. 윌리엄 더글러스 대법관은 언론의 자유에는 예외가 없어야한다는 보충의견도 내놓았다. 요컨대 KKK단 단원이 "모든 유색 인종, 유태인, 가톨릭 신자들은 미국땅을 떠나라"(p. 187)고 울부짖을 권리는 있다는 것이다(해당 행위를 실행에 옮기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해당 판결은 각종 혐오표현이 난무하는 지금 시대에 '혐오 표현도 표현의 자유로 보호받아야하는가?'라는 문제에서 상당한 의미를 지니는 판결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KKK단이다. KKK단의 근거지는 주로 남부였다. 남북전쟁 이후 재건기 당시를 다룬 20세기 초의 영화 『국가의 탄생』이 바로 이 KKK단의 창설 과정을 잘 보여준다. 여기서 아이러니한 역사가 펼쳐지는 데, 한때 KKK단의 후견인 역할을 한 미국 민주당이 21세기 현재에는 진보적 어젠다를 내세우며 미국 역사상 최초의 흑인 대통령을 배출한 정당이 되었다. 반대로 19세기 중반 노예제 해방에 앞장선 공화당은 현재 보수 정당이 되었다. 


이외에도 이 책에는 흥미로운 판결들이 많다. 20세기 후반의 판결들을 보고 있으면 지금 한국 사회가 겪은 많은 문제들에도 참고가 될만한 판결들도 많다. 직장 성희롱 문제를 다룬 1998년 벌링턴 산업 대 앨러스 판결, 예술과 외설의 기준이 문제가 된 1973년 캘리포니아 대 밀러 판결, 학문과 사상의 자유를 둘러싼 1967년 케이시안 대 뉴욕 조립대 이사회 판결 등, 현대 사회의 여러 쟁점들에 참고가 될만한 판결들이 담겨 있다.


이 책의 문제를 꼽자면 이 책 자체가 지닌 한계다. 이 책은 2012년에 출간되었고 2012년까지의 판결만을 수록하고 있다. 2023년 지금 시점에서 몇몇 판결은 뒤집혔다. 대표적으로 2003년 그루터 대 볼링저 판결은 2023년 현재 대법원에서 적극적 우대 정책을 위헌으로 판결하면서 뒤집혔다. (2003년 당시 반대의견을 낸 대법원장 토마스 클래런스도 이에 관여했다) 1973년 로 대 웨이드 판결 역시 작년에 뒤집히면서 미국 선거 결과에 영향을 끼쳤다. 


부연설명 해보자면, 전자의 경우, 어떻게 보면 이미 예견된 결과일 수 있다. 2003년 시점에서 이미 대법원 측에서 적극적 우대조치의 한계를 인지하고 있었다. 당장 판결문에서부터 "지금부터 25년 후 쯤이면 입학 심사에서 소수 인종의 선호는 그 필요성이 없어지리라 본다"(p. 257)고 말한다. 이렇게 보면 25년 후에 일어날 일이 20년 후에 일어났을 뿐이다.(그만큼 미국이 빠르게 변해가고 있다는 증거일까?) 그렇기에 인종을 초월해 미국 여성 전반과 관련된 문제인 로 대 웨이드 판결이 뒤집힌 것에 비해 그 파급력이 세보이지 않는다. 한편, 여성의 낙태권과 관련해 로 대 웨이드 판결이 뒤집힌 것은, 작년 중간 선거에서 인플레이션 덕분에 한창 기세가 오른 공화당의 이른바 '레드 웨이브'가 별거 아니게 보일 만들 정도로 파급력이 컸다.


이처럼 과거의 판결이 뒤집히는 사례들을 보면 어떤 이에게는 역사의 진보로, 어떤 이에게는 역사의 퇴보로 비춰질지도 모르겠다. 특히 2020년대 들어 뒤집힌 두 건의 판례(로 대 웨이드, 그루터 대 볼링저)를 보자면 더더욱 그런 생각이 강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연방 대법원 역시 미국 사회의 제도 중 하나일 뿐이다. 


어떻게 보면 연방 대법원의 판결 자체가 미국 사회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기제가 아니라, 문제를 임시 봉합하는 미봉책이 아닌가 한다. 사회를 이루는 개개인 각자의 삶의 여정이 다르고, 이해관계도 다르고, 가치관도 다르다. 어느 사회나 사회를 이루는 구성원 간의 갈등은 필연적이다. 미국 대법원에서 동성결혼은 합헌이라 판결내린다고 미국 내의 동성결혼 반대자들이 하루 아침에 그동안 고수한 가치관을 버리고 전향할까? 여론조사에서 미국인의 동성결혼 지지율이 높은 것과는 별개로 개개인 각자의 신념이 하루 아침에 쉽게 바뀔 것 같지는 않다. 


이 책에서 소개되는 판결을 보고 있으면 사법부의 권위로 사회의 갈등을 잠시 억누르는 것에 불과하지 않는가 라는 생각도 든다. 그렇다고 법원이라는 중재 수단을 부정하자는 것은 아니다. 법원이 없었다면 미국의 모습은 지금과 너무 딴판일 것이다.


이 책이 법률 문제를 다루는 이상, 피해갈 수 없는 딜레마가 있다. 미국 사회도, 미국 사회의 연방대법원도 구성원이 끊임없이 변화하고 그에 맞춰 법률도 계속 재해석되며 판결도 달라진다. 때문에 새로운 판결이 나오거나 기존의 판결이 뒤집힌다면 그에 맞춰 내용을 갱신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한번 인쇄되면 수정할 수 없는 책이라는 매체로는 그 같은 변화를 반영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위키백과가 훌륭한 보완수단이 될 수 있다. 영어가 된다면 영문 위키에서 List of landmark court decisions in the United States 문서를 통해 이 책이 다루지 않거나, 이 책 이후의 이루어진 중요 판결에 관한 내용을 보충할 수 있을 것이다.

연방 대법관에 대한 미국 정부와 국민들의 기대는 그 호칭 자체에서 잘 나타난다. 미국에서 정의가 이루졌다Justice has been served는 표현은 악당을 처치하는 헐리우드 액션 영화 속의 히어로가 아니라 실은 재판의 결과를 일컫는다. 즉 적절한 법률적 절차(재판)를 거쳐 나온 공정한 판결에 대한 찬사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대법관을 일컫는 호칭이 정의Justice 자체라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알고 보니 정의를 수호하는 기사들은 영화 스타워즈에서처럼 멋진 망토를 입고 광선검을 휘날리며 우주 공간을 누비는 것이 아니라, 워싱턴 D.C. 1번가에서 검은 법복을 입고 앉아 말words을 휘두르고 있었던 것이다. - P22

그러나 대법관들이 항상 순도 100%의 공명정대한 판결, 즉 모두가 이견 없이 인정하는 정의를 실현할 수는 없다는 것이 연방대법원의 기능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를 내릴 충분조건일 수는 없다. 오히려 그러한 예들은 헌법을 통해 연방대법원의 설립을 구상한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의 의도, 즉 삼권분립을 통한 정부 기관들의 상호견제가 왜 필요한 지에 대한 반증일 뿐이다. - P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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