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 『기생수』는 이렇게 시작한다. 어느 날, 지구상에 정체 불명의 생물체가 나타난다. 생물체는 인간의 몸에 침투하여 뇌를 차지하고 그 사람 행세를 한다. 생물체들은 인간 사회에 녹아들어 인간을 포식하기 시작한다.


현실에서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으리란 법은 없다. 외계인이나 지구상의 생물체이지만 미발견 상태인 생물체가 존재하지 않을거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으니까. 16세기까지 유럽, 특히 가톨릭교권에서 이런 생물체의 존재를 거론했다간 조르다노 브루노처럼 화형당했겠지만, 지금은 그런 시대도 아니고, 그런 유아론적인 대책이 통하는 시대도 아니니까(가끔 그런 대책이 논의되긴 하지만).


하지만 여기서는 조금 다른 이야기를 풀어보려고 한다. 만화 『기생수』에 범접할만한, 오히려 그 보다 더 한 현실이 지구상에 일어나는 중이기 때문이다. 『기생수』에서는 기생수들이 인간을 죽이지만 사실 그 수는 그리 많지 않다. 처음에는 속수무책으로 당하던 인간측이 대응에 나서자 기생수들이 소탕당하는 장면까지 나온다. 현실에서 인간보다 신체능력이 뛰어난 생물체들을 생각해보면 될 것이다. 사자, 호랑이, 고래처럼 인간보다 신체적으로 뛰어난 동물은 지구상에 많다. 그러나 그 생물체들은 인간 앞에서 무기력했고 인간의 보호를 받는 신세로 전락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속한 인간종의 현실은 『기생수』와 다르다. 우리의 현실은 20, 30년전 우리가 예측하거나 예언한 것들을 보란듯이 빗나가버렸다. 


20세기 후반 당시의 예측이나 예언은 크게 둘로 나뉜다. 첫째는 과학과 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인간과 인간 사회가 직면한 모든 문제가 해결되리라는 장미빛 전망이었다. 이 같은 예측은 당연히 지금의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 물론 어떤 측면에서 그러한 전망이 들어맞은 지점도 있다. 예컨대 스마트폰이라던가. 그러나 완전히 들어맞은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이 같은 사상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기술적 특이점이 올 것'이라는 주장과 같은 식으로 여전히 그 생명력을 이어가고 있다. 어떻게 보면 구원자가 강림할 것이라는 식의 옛 종교적 믿음에서 구원자를 '기술'로 치환한게 아닐까 하는 의심도 든다. (당연히 차이가 있을 것이다. 이건 단지 공통점만 따진 셈이니까) 그렇긴 하나, ai의 발전 속도나, 신석기 시대를 거치며 '역사'가 시작된 이래 인간의 기술 발전 속도를 보면 갈수록 가속도가 붙었다는 확실한 근거가 있기 때문에 이 같은 주장은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이다. 


여기서 확실한 것은 기술의 발달이 한편으로 문제를 해결하기도 하지만, 거기서 또 다른 문제를 제기한다는 점이다. 자동차가 적절한 사례다. 19세기 말 20세기 초 자동차가 보급되기 전 길거리에는 마차가 가득했다. 사람들은 선택해야 했다. 말똥과 그 악취로 도시가 뒤덮이느냐, 새로운 대체 수단을 찾느냐. 선택은 자동차였다. 자동차는 말똥을 남기지 않으니, 도시가 더럽혀질 일도 없었다. 그 대신 자동차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오염물질을 배출하는 새로운 문제를 낳았다.(교통사고는 마차나 기차만 다니던 시대에도 있었을테니까)


두 번째 범주에 속하는 것은 낙관론과 정반대되는 비관론적, 나아가 종말론에 가까운 예언이나 예측이었다. 어린 시절 환경 보호와 관련된 책을 읽으면 항상 나오는 이야기가 지구상의 인구가 너무나 빠르게 증가하여, 지구가 버틸 수 있는 수준을 넘고 말 것이라는 암울한 예언이었다. 그런 무시무시한 예언 뒤에는 인구 증가에 따른 환경파괴에 대한 묘사가 그에 뒤따랐다. 어떻게 보면 맬서스의 재림이라 할만한 수준의 주장들이었다. 


막상 부닥친 현실은 종말론과는 거리가 가까우면서도 멀었다. 미세먼지가 대표적인 사례다. 황사와 미세먼지는 겨울, 봄마다 한반도에 찾아오는 불청객이자 당연한 현상으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미세먼지를 보고도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않는다. 그러려니 하면서 마스크를 끼고 일상샐활을 하거나, 그냥 평소대로 생활할 뿐이다. 20세기 말 환경운동가가 봤으면 이 무슨 디스토피아인가하고 절규했을지도 모른다.


자, 이제 진짜 현실은? 물론 여기서 기후변화(혹은 위기)를 다루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무시하려는 의도는 아니다. 단지 만화 『기생수』보다 더한 현실이 펼쳐지고 있다는 점에 초점을 맞추고자 할뿐이다. 


분명한 것은 기생수보다 더한 것이 현실의 우리들 사이에 퍼져나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효과는 『기생수』의 기생수들이 인간을 포식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출산율(혹은 출생률) 이야기다. 한국의 90년대 생이 학교를 다닐 때는 한 반에 30, 40명이 있었던 반면, 00년대 생이 다닐 때는 20명으로 줄어들더니, 지금은 전국 각지에서 입학생 숫자가 두자리수를 못 채우고 한 자리 수에 머물다가 폐교되는 초등학교가 속출하기 시작했다. 대학교들은 몇년 전부터 입학생 정원을 채우지 못하고 있다. 그나마 사정이 나은 지방거점국립대학들 조차도 학과별로 정원 미달이 발생하여 대학 간의 통폐합 논의가 급물살을 타고 있다. 이 여파는 군대에 이미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고 취업시장에도 상당한 충격을 줄 것이다. 


『기생수』에 등장하는 히로카와 시장은 포식자로서 기생수의 역할을 강조한다. 그러나 히로카와 시장의 말처럼 기생수들이 아무리 기를 쓰고 인간의 개체수를 조절하려 들더라도, 한국에서 일어나는 사태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것이다(그러려면 기생수의 개체수가 인간 전체의 개체수와 비교가 가능한 수준이 되거나, 기생수들이 국가 권력을 장악하고 인구를 통제하는 상황이 연출되어야할 것이다).


한국만의 이야기는 아니다(한국이 대단히 극적인 변화를 보이긴 하고 있지만). 전세계 선진국들이 나날이 줄어가는 출산율 혹은 출생율로 인해  여러 대책을 세우고 있긴 하다.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등등 전세계의 산업 중심지, 금융 중심지, 문화 중심지라 할만한 지역들에서 출산율이 감소함에도, 뚜렷한 대책이 없어서 이민(을 빙자한 타 국가로부터 인구 빼오기)에 의존하고 있다.


게다가 이는 선진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인구 대국으로 알려진 중국, 인도, 나아가 종교적 영향력이 지대한 이슬람권 국가들도 출산율이 수십년 사이에 급락했다. 동남아 국가들은 아직 선진국도 되지 못했는데 벌써 출산율이 급락하고 있다는 우려가 터져 나온다. 선진국으로 이민 간 이민자들도 세대가 지날수록 현지 문화에 동화되어 2세대부터는 출산율이 현지인과 비슷한 수준으로 하락한다. 


앞으로의 전망에 따르면 아프리카 대륙 국가들을 제외한 나머지 대륙의 국가들은 출산율과 인구 감소로 인해 인구 성장이 정체되거나 심하면 감소할 것이라 한다. 그에 비례하여 타국의 이민자를 차지하려는 국가 간의 경쟁도 심화될 것이다. 


즉, 인구가 너무 늘어나서 지구가 감당하지 못할 것이라는 예언도 빗나가기 직전인 셈이다. 오히려 지구상의 국가들은 너도나도 확정된 미래, 그러니까 줄어드는 인구를 어떻게든 유지하려고 발악해야하는 상황이 되었다.(여기서 환경문제와 관련해 중요한 점은 인구라는 통계 수치보다는 개개인의 소비 패턴이 더 중요할 것이다. 전 세계인이 선진국 최상류층처럼 소비하고 다닌다고 가정해보자.)


이렇게 지난하게 인구 이야기를 한 이유는, 『기생수』의 기생수는 '따위'라고 만들만한 가공할만한 무언가가 이미 전 세계에 확산된 게 아닐까 하는, 간단한 의문에서 시작한 것이다.


'전염병 주식회사'라는 게임이 있다. 스마트폰으로도 가능한 게임이다. 이 게임에서 플레이어는 각종 다양한 유형의 전염병을 발생시키고 변이시켜 지구상의 인간을 말살시키는 것이 목적이다. 물론 게임 상의 인간들도 가만있지 않는다. 어느 정도 전염이 확산되면 전염병을 인식하고(현실의 우리가 코로나 바이러스를 인식하였듯이) 대응에 나선다(현실의 백신 접종, 사회적 거리두기처럼). 이때 인간 사이에 전염병을 퍼뜨리는 매개체는 다음과 같다. 바이러스, 세균, 박테리아, 프리온, 기생충, 나노머신.


하지만 이런 매개체를 통해 퍼져나가는 질병은 그 실체가 있다. 감염된 사람들의 신체에 실제로 이상 증상이 나타난다. 체온이 높아지거나, 미각과 후각을 상실하거나 등등. 그러면 사람들은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는다. 『기생수』의 기생수들도 실체가 있다. 만화 상에서 그 식별법이 나온다. 사람으로 위장하지만 위장한 기생수의 머리카락을 뽑아보면 바로 판별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마주해야하는 것은 실체가 드러나지 않는다.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대부분의 기준이 이 것 앞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그 점에서 정신병과는 다르다. 정신병 역시 구체적인 증상을 수반하는데, 이것은 그런 증상이 없기 때문이다. 감염된 사람이 감염되었는지, 그렇지 않은지도 모른다. 우리 주변, 바로 옆 사람, 지나가다 마주친 사람, 버스에서 옆 자리에 앉은 사람, 지하철에서 부대껴 가는 사람, 아니면 우리의 삶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정치인이나 기업가들, 그 한명 한명이 감염자일지, 정상인일지(비감염자가 더 적절할지도) 알 수 없다.


그럼 바이러스보다, 인간이 상상한 기생수보다 더 독한 이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영화 「인셉션」에서, 정보를 빼내려 사이토에게 접근한 주인공 돔 코브는 이런 말을 한다.


"가장 생명력이 강한 기생충은 무엇일까요? 박테리아? 바이러스? 장내 기생충? '생각'입니다. 일단 생각이 뇌에 자리잡으면 제거하기란 거의 불가능합니다. ..." 


'생각'


트럼프가 당선되었을 때를 떠올려보자. 그 당시 상황을 돌이켜보면, 트럼프가 당선되었다는 말은 트럼프가 내세우는 가치관, 세계관, 일련의 사상체계를 받아들인 사람들이 전략적 승리를 거두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문제는 그로부터 발생하는 심리적 문제다. 즉, 한 번 투표를 했을 뿐인데, 그 결과를 보고나니 이웃집에 사는 스미스 씨는 트럼프의 생각을 받아들인 지지자일 수도 있다는 의심이 머리 속에 자리잡게 된다. 물론 그 반대도 가능하다. 스미스씨 입장에서는 이웃에 사는 존스 씨가 트럼프의 생각을 받아들인 지지자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할지도 모른다. 순식간에 엄청난 수의 사람들 머리 속에 의심이라는 감정과 그로부터 나오는 생각이 자리잡은 것이다. 그 어떤 전염병의 매개체보다도 빠른 속도로.


저기서 트럼프를 다른 나라나 미국 내의 다른 선거에 출마한 정치인으로 바꿔도 적용가능할 것이다. 


미국은 1950년대에 매카시즘이 유행했다. 누구나 소련의 스파이일 수 있었다. 지금 우리는 매카시즘을 보고 어떻게 저런게 유행했나 생각하겠지만, 그 당시 사람들 입장에 서보면 이해가 안가는 것은 아니다. 저 사람이 나와 생각이 다를 지도 모르는데(=다른 생각에 전염되었을 수 있는데=공산주의에 감염되었을지도 모르는데) 그 사실을 뭘로, 어떻게 판별한단 말인가? 


'나'와, '나'가 속한 집단과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같은 사람' ,'같은 부류', '같은 집단'으로 취급하지 않은 경우는 사실 인간 역사에서 늘상 있었던 일이니 새삼 지적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 사례를 일일이 들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같은 생각의 차이가 현실에서 일으키는 변화는 인간의 상상력을 한참 뛰어넘는다. 다시 인구 문제로 돌아가보자. 위에서 말했지만, 한때 인구가 무한히 불어나 지구가 급증하는 인구를 감당하지 못할 것이라는 맬서스적인 종말론이 유행했다. 현실은 반대로 가고 있다. 많은 나라들이 통계를 보고 인구 감소를 우려하며 여러 대책을 내놓는 중이다. 그러한 변화의 기저에, 여러가지 요인으로 인해 사람들의 '생각'이 바뀌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한국만 해도 한때는 나이가 들면 무조건 결혼해서 아이를 낳아야 한다는 생각이  당연했지만, 지금 그런 생각은 당연하지 않다. 구시대의 사고방식은 신시대의 사고방식에 밀려났거나, 밀려날 예정이다. 게다가 지금은 구시대의 사고방식을 강요할 수단도 모조리 사라졌다(정책 결정권자들이 시대착오적인 결정이 가끔 내리긴 하지만). 게다가 인구 문제는 '올바른 생각'과 '그릇된 생각'을 구분해서 '그릇된 사고'를 가진 다른 사람을 탄압해서 통제될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보통 '올바른 생각'을 강요하는 것은 사실 사슴보고 말이라 우기는 지록위마를 실천하는 사례가 될 수 있다).


그 같은 생각의 변화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은밀히 퍼져나가는 것처럼 보이고, 대다수 사람들이 변화를 눈치 챘을 때는 이미 변화가 상당 부분 진행된 이후다. 물론 그런 변화를 일찍이 눈치 채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의 수는 많지 않다.


어쨌거나, 현실은 늘 상상 이상이라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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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4-05-17 14: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생각을 유기체로 볼 수도 있군요.
지구를 유기체로 가정하면 인구 감소도 맬서스의 종말론에 대비하는 지구 자정작용의 하나일 수도 있겠네요. 현실은 늘 상상 이상이니까요.

Heath 2024-05-17 14:14   좋아요 0 | URL
현실만큼 알기 어려운 것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
 


『남겨진 것들의 기록』은 죽은 자의 흔적을 정리하는 유품 정리사의 책이다. 책을 읽다가 떠오른 생각들을 정리해본다. 


돌이켜보면, 인간은 자연 상태를 벗어나 사회를 이루면서 자연이 알아서 할 일을 인간이 도맡아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리고 그 중에서 꺼름칙한 일들, 불쾌한 일들, 혐오스러운 일들은 사람들의 입에 잘 오르내리지 않고, 눈에도 잘 띄지 않는다. 분명 이 사회를 이루는 한 부분인데도! 그 대표적인 사례가 누군가의 죽음 이후 남은 사람들이 맡는 일일 것이다.


그 사례를 들어보자. 일본의 장편 애니메이션 제작사, 스튜디오 지브리의 대표 감독 하면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다. 작년에는 하야오 감독의 최신작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가 개봉했다. 그런데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도 첫 장면은 주인공 마히토의 어머니가 죽음을 맞이하며 장면으로 시작된다. 


다만 여기서 묘사되는 그녀의 죽음은 많은 이야기에서 다뤄지는 '낭만화된' 죽음에 가깝다. 그녀의 시신은 나오지 않는다. 죽은 후의 모습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죽음을 맞이하는 마지막 순간만 기억에 남는다. 하야오 감독의 이전 작(무려 11년 전) 〈바람이 분다〉도 보면 비슷하게 '낭만화된' 죽음이 나온다.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은 사라지듯이 세상을 떠나고, 죽음을 기억하는 사람은 죽은 이를 마지막으로 본 순간만 기억한다.

 

비슷한 사례는 많다. 어느 신화든 간에 누군가가 죽고 그 시신을 수습했다는 식의 이야기보다는 누군가가 '승천'했다거나, '실종'되었다거나 하는 식으로 죽음을 신비롭게 표현하고 동시에 죽은 이의 시신을 처리한다거나 같은 현실적인 일은 대개 생략된다. 예를 들어 헤라클레스는 불 속으로 사라지고 그의 영혼은 올림푸스로 승천한다. 물론 그 반대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다시 지브리 이야기로 돌아가서, 지금은 세상을 떠난 다카하타 이사오 감독 역시 스튜디오 지브리의 대표 감독이었다.



다카하타 이사오 감독의 마지막 작품은 다케토리 이야기를 각색한 〈가구야공주 이야기〉였다. 썸네일은 아쉽게도 블루레이가 없어서 아트북으로 대체했다. 이 영화에는 하늘에서 아미타와 함께 천인들이 음악을 연주하며 내려오는 장면이 나온다. 해당 장면에 깔리는 배경음악은 신나고, 생동감이 넘치고, 흥겹다. 



해당 OST의 영상에 달린 댓글들을 보면 '가장 슬픈 장면에 가장 행복한 음악이 깔린다' 라거나, '어떻게 행복한 음악이 슬픔을 가져다 줄 수 있을까?'라는 식으로 이 이 행복한 음악에 대한 감상을 알 수 있다.


하늘에서 천인들이 내려오는 장면이 인상적이어서, 그 후로도 뇌리에 남아있었다. 그 덕분에 우연히 다른 책을 읽을 때 '아! 그 장면이었구나'하는 부분을 바로 알 수 있었다.



일본의 정토종 예술에 있어서 선호 받는 테마는 '내영(來迎)', 즉 죽음의 순간에 있는 신도에게 구세주 아미타가 몸소 강림하는 것이었다.

코야산[高野山]에 있는 세 폭의 내영도(來迎圖)에서 나타난 것처럼 초기 '내영'의 방향은 마치 관찰자가 임종을 맞은 것처럼 관찰자를 향해 있었다. 여기서 커다란 아미타를 구름 위를 떠다니는 스물다섯 명의 보살이 수행하고 있는데, 그들은 관찰자를 바라보며 관찰자를 향해 오고 있다. 그들은 가운데 그림의 왼쪽과 꼭대기 뒤쪽에 자리 잡고 구름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다. 이들의 아래로는 자연풍경이 펼쳐지는데, 왼쪽 아래의 자연 풍경은 분명하게 드러나는 반면 오른쪽 자연풍경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자연풍경은 그림 전체에서 아주 작은 부분을 차지하며, 조심스럽게 한쪽 귀퉁이에 자리 잡고 있다. 그래서 전체적으로는 상상 속의 장면을 사실적으로 그려낸 것이기라기보다는 도상학적 효과를 더 크게 지닌다. 각 인물의 세부묘사는 장식적인 디테일과 색감과 사실성의 뚜렷한 발전을 보여준다. 특히 음악을 연주하는 천사들이 흥미롭다. 그들은 자연 속에서 관찰하는 포즈로, 춤을 추거나 악기를 연주하고, 관악기를 부느라 뺨을 잔뜩 부풀리고 있다.......

내영(來迎)은 아마도 일본 예술에서 1053년, 교토에 있는 뵤도인[平等院] 사원의 본당인 봉황당(鳳凰堂)의 문에 처음으로 나타난 주제일 것이다. 내영도가 일본의 공헌이자 창조품이며, 어떤 믿음에 의해서라도 획득된 신격의 가장 시적인 장면들 중 하나를 나타내고 있을 가능성은 매우 크다. 밀교(密敎) 도상들의 비밀스럽고 금기적인 성격과는 대조적으로 내영도의 핵심적인 부분은 밀종의 태도를 역전시키며 붓다가 그를 보는 자에게 바로 온다는 것이다. 아미타는 단지 우리가 다가갈 수 있는 것만이 아니라, 그 자신이 보는 자에게 다가온다. 이 그림은 죽어가는 신도가 보게 되는 장면을 묘사한 것으로, 그 신도의 영혼은 붓다에 의해서 서방 정토로 받아들여지고 환영받는다. pp.278-279.


조지프 캠벨, 『신화의 이미지』



간단히 말해, 과거 일본인들이 상상한 죽음의 순간이었다. 구세주 아미타가 죽어가는 우리에게 다가오리라. 아미타가 그대를 응시할 것이니. 


어떻게 보면 '사람이 죽으면 먼저 가 있던 반려동물이 마중 나온다는 이야기가 있다'와도 일맥상통한다고 생각한다. 맞이하러 오는 대상이 아미타와 천인들에서 반려동물이 되었을 뿐.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남은 사람들은 떠난 사람의 자리를 정리 해야 한다. 그게 가족의 손을 거치든, 아무런 연고 없는 타인의 손을 거치든 간에. 그렇지 않은 사회가 있다면, 아마 우리가 생각하는 사회와는 거리가 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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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겨진 것들의 기록 - 유품정리사가 써내려간 떠난 이들의 뒷모습
김새별.전애원 지음 / 청림출판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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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도 잘 모르지만 죽은 후의 이야기에 대해서는 거의 깜깜하다. - P162

일반인이 죽음을 마주하는 경우는 드물다. 우리가 죽음을 마주하는 경우는 대체로 미디어를 통해서다. 일면식이 없는 사람의 죽음은 신문이나 인터넷 뉴스에 난 부고로 알기 마련이다. 반대로 가족, 친척, 친구, 동료, 지인일 경우에는 문자 메시지, 전화, 메신저 앱을 통해 알게 된다. 장례식장에 고인을 떠나 보낼 때 마지막으로 보는 고인의 마지막 모습 역시도 영정 사진 속 고인의 모습이다. 고인의 시신은 대체로 관 속에 담겨지기에, 고인의 진짜 마지막 모습을 보는 경우는 없다. 


그렇기에 우리는 죽음에 대해 왜곡된 이미지를 가지기 쉽다. 문학 작품을 떠올려보면 쉽게 이해가 갈 것이다. 예를 들어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베르터의 고뇌/고통으로 번역되는 경우도 있다)을 떠올려 보자. 주인공 베르테르는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다. 여기서 그의 시신이 어떤 상태였을까라고 생각을 떠올리는 것은 사실 달가운 일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카뮈의 『이방인』에서 뫼르소에게 형이 집행된 후 그의 시신은 어떻게 되었을까 떠올리는 사람은 딱히 없을 것이다. 


많은 문학 작품, 만화, 영화 등에서 흔히 '더럽다,' '불결하다,'라고 간주되는 일상적인 일은 대체로 생략되기 마련이다. 그런 일상 중 특히 가장 보고 싶지 않은 것이 있다면 역시 죽음일 것이다. 매체에서 묘사하는 죽음은 현실의 죽음과 거리가 멀다. 죽음을 맞이한 사람은 마치 가동을 멈춘 기계처럼 멈춘다. 


현실의 미디어로 전해지는 각종 사망 소식도 마찬가지다. 가족처럼 정말 가까운 사이이면 모를까, 그 외에는 고인의 실제 마지막 모습이 어떠했는지, 세상을 떠난 후 고인의 시신의 모습이 어떠한 지 굳이 찾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단지 고인에 대해 듣는 순간 마지막으로 떠올리는 이미지만 기억할 뿐이다. 고인의 모습은 그때 떠올린 이미지로 영원히 얼어붙는다.


누군가의 죽음을 실제로 목격하거나, 세상을 떠난 이의 남은 시신을 직접 보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전자의 경우는 정말 운이 없는 경우일 것이다. 반면 후자에 해당하는 이들이 있다. 예컨대 정확한 사인을 알아내기 위해 부검 해야하는 법의학자들을 첫 번째 사례로 들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 사례가 바로 유품정리사들이다. 유품정리사들은 떠나간 이들의 자리를 정리한다. 책의 뒷표지에서는 저자를 두고 '천국으로의 이사를 돕는 유품정리사'라고 소개된다. 


아픈 사람이 의사를 찾고 범죄 피해를 입은 사람이 경찰을 찾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고독사 현장에는 시신을 수습하는 사람, 경찰, 가족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가 다녀간다. 현장 모습을 아는 사람 중 내가 가장 편하게 대할 수 있는 사람일 것이다. 속속들이 사연을 알게 되는 사람이기에 유족들은 내게 마음을 털어놓고 조금이나마 속을 풀어내려 한다. - P22



『남겨진 것들의 기록』은 유품정리사로 활동하는 저자들이 쓴 에세이이다. 이 책은 2015년에 출간된 『떠난 후에 남겨진 것들』 이후 7년 만에 다시 나온 책이다. 저자들은 사람이 떠난 자리이자 남은 자리를 방문하는 것이 일상이다. 


모든 현장에는 저마다의 사연이 있고, 떠난 이들 대신 그들의 사연을 말해주는 유품을 하나하나 정리할 때마다 안타까움이 밀려든다. - P13


이 책은 프롤로그, 1장 떠난 자리에 남겨진 것들, 2장 돌아올 봄을 기다릴 힘이 남았더라면, 3장 인생에 드리워진 그림자를 걷으며, 4장 늦기 전에 손을 맞잡을 수 있다면, 에필로그, 그리고 짧은 부록으로 이루어져 있다. 4개의 장은 저자들이 현장을 방문하여 겪은 사례들을 재구성한 것으로, 고인의 사연을 알게 되고, 안타까움을 담은 저자들의 단상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책에서 저자들은 다양한 형태의 죽음을 마주한다. 저자들이 방문한 현장은 책을 통해 간접적으로 전해지는 경험임에도 떠올리기 꺼림칙한 경험들이다. 


스스로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삶의 의지를 놓은 채 죽은 사람처럼 살아가고,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현장을 매일 정리하다보면, 전쟁터 한복판에 서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곤 한다. 나라끼리 벌이는 전쟁만 전쟁이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린 이미 하루하루를 격렬한 전쟁통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 아닐까. - P63


하지만 때로는 그런 마주하고 싶지 않은 것들과 마주해야 한다. 그 또한 세상의 일부일 뿐이며, 그 같은 현실을 외면한다는 것은 손으로 하늘을 가리는 것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저자들이 담담하면서도 먹먹하게 서술하는 내용들은 독자들에게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의 이면이 어떠한 지를 잘 보여준다. 우리는 벚꽃이 피는 길을 걸으면서 아름다움을 느낀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아주 냉정한 현실이 도사린다. 자연의 일부인 인간사도 마찬가지다. 이 책에서 저자들이 알게 된 사연들도 그와 같다. 이 책에는 흔히 '고독사'라 잘 알려진 죽음의 사례가 자주 소개된다. 물론 '고독사'만 소개되진 않는다. 혼자 사는 사람들이 갑작스럽게 돌연사하거나, 범죄 사건이 소개되기도 한다. 극단적 선택을 한 경우도 소개된다. 저자들은 유족을 통해, 주변인들을 통해, 혹은 고인들이 남긴 서류를 통해 고인들의 사연과 내막을 알게 된다. 고인들의 사연은 천차만별이다. 그 모든 사연을 여기 다 담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렇긴 하나 이 책에서 펼쳐지는 현실들을 보고 있으면, 현실 감각이 사라지고, 우리 사회의 상식, 도덕, 윤리에 회의가 들게 되며, '모르는 게 약'이라는 속담이 왜 나왔는가 저절로 짐작할 수 있게 된다.


책을 읽다보면 저자들이 이 책을 쓴 이유를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느낄 수 있게 된다. 


죽은 사람은 그걸로 끝이지만 남겨진 사람에게는 그때부터 새로운 고통이 시작된다. 사느냐 죽느냐는 온전히 자신의 선택으로만 여겨지겠지만 그렇지가 않다. 남겨진 사람에 대한 책임과 도리도 잊어서는 안 된다. 내가 세상에 태어나게 한 아이들이 있는 한 선택에 대한 완전한 자유는 없다. - P32


쉽게 상상할 수 있는 죽음의 형태, 즉 병원에서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세상을 떠나는 경우는 이 책에서 소개된 사례들과 비교하자면 축복받은 경우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책에서 저자들이 보여주는 사람이 떠난 자리, 그리고 남은 자리는 남은 사람들에게 잊지 못할 고통으로 다가온다. 아무 관련없는 제3자인 독자의 입장에서 공감할 정도라면, 나머지는 더 말할 필요가 있을까? 


고인의 유품을 정리하면서 사연을 듣다 보면 ‘세상에 사연 없는 사람이 없구나‘ 하는 생각이 절절히 든다. 돈이 많아도, 돈이 없어도, 가족이 있어도, 가족이 없어도 저마다 사정과 사연이 있고, 또 그 때문에 생기는 아픔과 걱정도 제각각이다. 타인이 자기 입장에 서서 배놔라 감놔라 할 일이 아니고, 타인의 고통을 자기 기준에서 판단할 일도 아니다. 아니, 고통을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일이다. - P192


이 글을 시작하면서 죽음을 마주하는 경우가 드물고 죽음의 이미지가 왜곡되는 경우가 많다고 시작하였다.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언젠가 떠나기 마련이고, 떠나는 순간까지 자신의 흔적을 남긴다. 그리고 떠난 자리에 남은 흔적은 상상만큼 아름답지 않다.


떠난 고인도, 남겨진 자식도 생각하면 숨이 턱 막힐 듯이 안타까웠다. 누구도 그 끝을 장담할 수 없다. 그러니 사랑하는 사람이 생각나면 미루지 말고 그때그때 마음을 전할 일이다. 잘 있겠지 무턱대고 믿지 말고, 자주 연락하면 번거롭겠지 눈치 보지 말고. - P45

마지막에 가서 중요한 것은 돈도 명예도 아닌, 관계라는 말이 있다. 서로의 안부를 궁금해하고 도움이 필요할 때 서로 돌볼 수 있는사회관계자본이 결국에는 돈보다 더 필요하고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수많은 사람의 외로운 마지막을 지켜보며 이 사실을 뼈저리게 실감할 수 있었다. 우리의 마지막을 채워주는 건 돈이 아닌 사람이다. - P227


저자들은 원자화, 파편화되는 우리 사회에서 관계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저자들이 이런 말을 한다는 사실, 나아가 유품정리사라는 직업이 존재한다는 것 사실은 우리 사회의 민낯을 보여주는 근거다. 이러한 근거를 사회와 단절된 채 방치된 사람들이 죽음에 이르는 과정이 당연한 것으로 자리 잡았다는 의미라고 해석해야만 한다면 대단히 우울할 것이다. 물론 인간사가 항상 아름다울 수는 없고, 인간이 직면하는 여러 상황 중에는 고독과 절망도 포함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저자들은 자신을 지키는 7계명을 두 번 알려준다. 처음에는 부록으로, 두번째는 뒷 속표지에서.


1. 작은 일이라도 오늘 해야 할 일을 적어놓고 미루지 마세요.

2. 적어도 한 명 이상의 가까운 지인을 곁에 두세요.

3. 밥 대신 술을 찾지 마세요.

4. 취미를 만드세요.

5. 생활계획표를 만들되 시간을 정해놓지 마세요.

6. 꿈과 목표를 정확히 하세요.

7. 남의 행복 말고 자신의 행복을 보세요.


한 사람의 독자로서, 이 책을 통해서건, 다른 매체를 통해서건, 이 책의 저자들의 의도가, 바램이 부디 널리 전해지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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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논문 작성법
임경석 지음 / 푸른역사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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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논문을 쓰기로 마음먹은 사람이 가장 먼저 할 일은 무엇일까요? 도서관에 가서 분류번호 900번 역사학 서가에 꽂혀 있는 책들을 차근차근 읽어야 할까요. 아니면 수십~수백 권에 달하는 《조선왕조실록》이나 《한국독립운동사자료집》 같은 유명한 사료를 직접 들여다보아야 할까요. 아닙니다. 그런 일이 아닙니다. 가장 먼저 할 일은 연구계획 작성입니다. 논문 쓰는 일뿐이겠어요. 세상 모든 일이 다 마찬가지로 무언가를 시작하는 사람은 자신의 행동을 목적의식적으로 계획할 필요가 있습니다. - P15


『역사논문 작성법』은 성균관대학교 사학과 임경석 교수가 쓴 '역사' 논문 지침서다. 이 책의 대상 독자는 졸업 논문을 작성해야 하는 전국의 역사학과(혹은 사학과, 국사학과, 동양사학과, 서양사학과 등) 고학년 학부생들, 또는 연구자로서 석사논문을 작성하여 본격적인 논문을 처음 써보는 단계에 들어선 대학원 석사과정생들이다.


따라서 이 책은 두 가지 시각에서 평가를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이 책의 대상 독자로 상정된 역사학과 학부생 & 대학원생의 관점에서 이 책을 평가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역사학과 학부생 & 대학원생과 상관없는 독자의 입장에서 이 책을 평가하는 것이다.


졸업 논문을 작성해야 하는 학부생 및 석사 논문을 써야 하는 대학원생들에게 이 책은 연구자로서 필연적으로 마주하는 시행착오를 줄여준다. 어차피 논문을 쓰다보면 시행착오는 겪기 마련이다. A4용지로 십수장에서 길어봐야 수십장에 불과한 글을 쓰기 위해 연구자는 그 몇배, 몇십배는 되는 텍스트를 읽어야만 한다. 그런데 연구자에게 시간은 한정되어 있다. 학부생이라면 졸업 논문 제출 마감일이 정해져 있을 것이다. 석사과정생이라면 당장 취직한 친구들은 돈을 버는데 자신은 대학원에서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것 같아 조바심을 내기 마련이다. 


물론 학부생이나, 석사과정생이나, 주변에 그들을 다잡아줄 지도교수나 선배들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들도 각자 자기 일로 바쁘기는 매한가지이고, 특히 지도교수는 교수마다 개성이나 스타일이 천차만별이어서 어느 지도 교수를 만나느냐에 따라 지도학생이 겪는 시행착오의 질적, 양적 수준도 오락가락하게 된다. 그들이 건네는 충고나, 그들의 이미 완성된 논문을 지도 학생들에게 보여주는 것은 심리적으로 자극은 될지 몰라도, 학생들이 겪는 시행착오를 줄여주지는 못할 가능성이 있다. 어떤 학생은 지도교수의 말을 잘 알아듣고 문제를 잘 해결하겠지만, 어떤 학생은 그렇지 못할 수도 있어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역사학과 학생들에게 실제 논문 작성의 지침을 알려주는 유용한 메뉴얼이다. 이 책의 표지 하단에 드러나듯이, 저자는 연구 주제의 선정, 사료 및 연구 문헌에 대한 노트 및 메모 정리, 문제 제기와 원고 작성, 효과적인 서술 전략, 최종적으로는 원고를 마무리하는 인용, 각주, 참고문헌까지, 역사 논문 작성의 처음부터 끝, A to Z, α에서 ω까지 친절히 알려준다. 그리고 이 책에서 단계적으로 서술한 논문 작성 과정이 사실은 전혀 순차적이지 않으며 여러 과정이 중첩되어 이루어짐을, 달리 말해 연구 논문을 읽고 연구사를 정리하는 동시에 논문 집필도 진행해야만 한다는 점도 상기시킨다. 


이 책은 역사학과 학생들이라면 꼭 참고해야 할 유형의 책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책은 역사학도들의 가려운 부분을 긁어주는, 어두운 동굴 속에서 의지가 되어줄 등불과도 같은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책의 서문에서 저자가 직접 밝히는 바이지만, 시중에 유통 중인 논문 지침서는 대단히 많으나 그 중에서 '역사학'을 위한 논문 지침서는 드물다. 많은 경우 이공계, 의학, 사회과학을 위한 논문 지침서들이다. 


그나마 인문계 학생이나 연구자들의 논문 작성에 도움을 주는 지침서로는 저자가 언급하듯이 움베르토 에코의 『논문 잘 쓰는 방법』이 있다. 이 책을 읽는 것이 읽지 않는 것보다는 낫다. 그렇긴 하나 에코의 책은 1970년대 이탈리아의 학부생들을 위해 쓰인 책이다. 에코가 보여주는 자료 조사 방식은 도서관에 들러서 참고문헌목록 도서를 읽고 참고 문헌들을 찾아가면서 독서 카드를 작성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다들 주지하다시피 지금은 컴퓨터로 연구 노트를 작성하는 시대인 만큼 에코가 시연하는 논문 작성법은 시간적으로도, 공간적으로도 현재의 한국과 조금 거리가 있다. 게다가 에코는 역사학 연구자가 아니라 문학과 기호학 연구자이다. 에코의 지침서는 인문계 연구자들을 포괄할 수는 있겠지만, 개별 분과학문 만의 연구방식이나 원고 작성법을 알려주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럼 이제 예비 역사학 연구자가 아닌, 일반 독자의 입장에서 이 책을 평가해보자. 이 책은 그 성격상 실용서적이며 앞서 수 차례 언급했듯이 역사학과 학부생이나 대학원생을 대상 독자로 설정하고 저술된 책이다. 이 책에서 일반 독자들은 무엇을 얻어갈 수 있을까? 얼핏 생각해보면 일반 독자들에게 이 책은 큰 의미를 지니지 못할 듯 보인다. 그러나 조금만 관점을 달리해보자.


가까이서 보면 이 책은 역사학자들이 어떻게 논문을 작성하는지 알려주는 논문 지침서다. 조금 멀리 떨어져서 보자. 역사학자들은 논문을 집필하여 학위를 수여받거나 학술지에 투고한다. 말하자면 이 책은 역사학자들의 역사 연구 과정을 보여주는 책이다. 이 책에서 역사학자는 연구 주제를 설정하고, 앞선 선행 연구자들의 연구 논문을 읽으면서 문제를 제기하고, 이를 바탕으로 사료들을 조사하여 자신이 제기한 문제에 대한 해답을 내놓는다. 그러면서 기존의 역사학 지식의 외연이 조금씩 넓어진다.


그렇다. 역사라는 좁은 분야에 한정되어 있지만, 이 책은 역사학이라는 학문 세계에서 지식을 생산하는 과정을, 나아가 지식을 소비하는 지식 소비자가 지식을 생산하는 지식 생산자로 발돋움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학생 시절에는 자신 앞에 제시된 역사 교과서의 한 문장한 구절을 빠짐없이 받아들인다는 마음가짐을 갖습니다. 일방적 수용자의 태도입니다. 지식 소비자의 관점입니다. 혹 책 속의 어떤 부분에 대해 의문이 생긴다 하더라도, 그 원인은 수용자 내부에 있는 것으로 간주됩니다. 학생이 사전에 미리 알았어야 할 선행 지식을 결여했거나 뭔가를 오해한 탓인 양 여기는 것인지요. 요컨대 역사 교과서의 내용은 무오류의 완전한 것으로 전제되어있습니다. - P73

여러분은 더 이상 수용자의 관점에서 역사논저를 읽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은 지식 소비자가 아니라 생산자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가져야 할 태도는 연구자의 태도입니다. 앞에 놓인 논문은 동료 연구자가 작성한 글입니다. 설혹 지도교수가 쓴 논문이라 하더라도 본질은 같습니다. 기존의 연구 성과를 요약하려는 의도를 갖고서 읽지 마십시오. 여러분에게 요구되는 것은 조사입니다. 선행 연구자가 어떤 문제를 제기했는지, 어떤 해답과 논지를 제시했는지, 그 논지를 뒷받침하는 근거로는 무엇을 제시했는지 등을 조사하기 바랍니다.
자신의 견해를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역사적 대상에 관한 지식을 자신의 연구 결과에 의거해서 구축하는 것이지요. - P73


이 책에서 역사가를 요리사에, 역사가가 참조하는 사료를 요리사의 식재료에 빗대는 비유가 자주 등장한다. 한편으로는 이해를 돕는 비유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사료에서 정보를 지식으로 가공하는 일련의 과정을 독자들에게 보여주는 비유이기도 한 것이다.


간단히 말해 이 책은 역사학자들이 역사학적 지식을 어떻게 가공하여 새로운 지식을 생산하는가,그 과정을 알려주는 책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물론 실제 논문 작성 과정은 늘 벽에 부딪치기 십상이고, 시행착오 속에서 기껏 연구를 진척시킨 주제를 다른 주제로 바꾼다거나 하는 돌발 사태가 생기기도 한다. 이 책 하나 읽었다고 실제 논문을 작성하는 과정에서 오는 경험을 획득할 수는 없다(이는 각종 논문 지침서를 읽을 때도 마찬가지다. 논문 지침서를 읽을 때는 언제고 논문을 바로 써내려갈 수 있을 것처럼 한껏 감정이 고양되지만, 막상 컴퓨터 앞에 앉으면 앞이 막막해지기 마련이다).  


어쨌거나 역사학과 무관한 독자들이라도 이 책에 나타난 역사학자들의 모습을 통해 타 분과학문의 전문 연구자들이 어떻게 새로운 지식을 생산하는가에 관해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그렇긴 하나 그 실제 연구 양상이 다르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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