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비 Moby-Dick or, The Whale

허먼 멜빌(Herman Melville) 지음  |  김석희 옮김  |  작가정신

 

[5] 아침식사(Breakfast)

 

[5장의 기본 줄거리]

물보라 여인숙에서 침대, 이불을 덮고 하루 밤을 지낸 이슈메일과 퀴퀘그는 여인숙의 술청으로 내려가 아침식사를 한다. 술청에는 간밤에 들어온 투숙객들로 가득 있었다. 아직 선원용 재킷을 입고 있던 사내들로서 입항한 포경선의 선원들이었다. 이슈메일은 식탁에서 이들과 퀴퀘그의 식사예절을 관찰한다.

 

 


 

5장의 배경은 물보라 여인숙의 아침식사가 준비된 술청이다. 이번 장도 매우 짧은 장이며 이슈메일이 본격적으로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기 전의 풍경, 포경선원들의 모습, 퀴퀘그의 식사법 등에 관한 관찰이 이루어지는 장이다. 밤새 만원을 이루던 여인숙에서 주인장 코핀의 장난으로 침대, 이불을 덮고 자게 퀴퀘그와 이슈메일 사람은 아침 식사를 하러 술청으로 내려간다.

 

히죽거리는 주인에게 이슈메일은 원한을 품고 있지 않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이슈메일의 독백이 흥미롭다.

 

실컷 웃는 것은 아주 좋은 일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보기 드물게 좋은 일이다. (…)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자신을 유쾌한 웃음거리로 제공한다면, 사람이 부끄러워서 꽁무니를 빼지 않고 기꺼이 자신을 웃음거리로 삼고 남의 웃음거리가 되게 해주어라. 자신에 대해 실컷 웃을 거리를 갖고 있는 사람에게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이 들어 있을 분명하다.

 

  부분은 스치듯 지나가는 부분이며 작품을 이야기할 어떤 역할을 하지는 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저자의 내면에 보관되어 있다가 무의식적으로 불쑥 드러나는 저자의 이런 생각들을 발견하는 것이 흥미롭다. 이런 행동은 저자인 멜빌이 수긍하고 동의하는 행동양식일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자신도 이런 생각을 하곤 했기 때문에 잠시 멈춰가게 되는 부분이다.

 

나는 언젠가 이런 생각을 했었다. 우리가 유머라고 하는 것의 기본적인 정신이자 자세는 자기 자신에 대한 희화화 과정에서 시작한다 말이다. 자기 자신을 낮추고 스스로를 유쾌한 웃음거리로 대상화하고 거리두기 있는 사람은 정서적으로 안정된 사람일 뿐만 아니라, 용기있는 사람이기도 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슈메일의 독백대로 스스로 타인에게 웃음거리가 되게 제공하면, 기꺼이 남의 웃음거리가 되게 하는 행위는 성경의 가르침과 닮아 있기도 하다. ‘누군가 나의 왼쪽 뺨을 때리면, 나의 오른쪽 뺨도 대주어라 같은 논리의 성경문구를 떠올리게 한다. 유머의 관점에서 자기 자신을 객관화하여 바라볼 있는 사람이 정신적으로 건강한사람이며, 유머가 있는 사람일 것이다. 아울러 도덕적인 관점에서도 타인의 시선에 개의치 않고, 스스로 자유로운사람이 있는 조건이기도 것이다. 소설의 전개에서 중요한 부분은 아니겠지만, 멜빌이 생각하고 공감하는 바를 170년이 지난 독자가 공감할 있는 이런 부분은 천천히 읽을 발견할 있는 부분이 아닐까한다.

 

여인숙 주인이 식사들 !’라는 말에 술청의 투숙객들은 모두 아침을 먹기 시작한다. 이슈메일은 아침 식사가 이루어지는 식탁에서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흥미로운 관찰을 한다. 그런데 세상을 두루 돌아다니며 많은 경험을 쌓은' 이들의 태도가 성숙한 사교술이 아닌 깊은 침묵으로 일관된 아침 식사 풍경을 보고 희한한 광경이라고 말한다. 서양에서는 특히 같은 식탁에서 침묵으로 일관하는 태도는 예의바르지 못한 사교술이라고 판단하는 같다. 귀항한 포경선원들로부터 재미있는 바다 이야기를 들을 기대에 부푼 이슈메일에게 이런 깊은 침묵은 마뜩잖다. ‘처음 보는 고래를 수줍음도 없이 죽이는 노련한 포경선원들이 식탁에 앉아 목장의 양들처럼 서로 바라보기만 하며식사를 하는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 이슈메일은 이들을 수줍어하는 곰들! 겁쟁이 전사 같은 고래잡이들!이라고 생각한다.

 

퀴퀘그 역시 날카로운 작살을 식탁에 올려놓고 설익은 비프스테이크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겨 말없이 먹는 집중한다. 이슈메일은 고드름처럼 차가운 그의 예절을 높이 평가할 없다고까지 말한다. 물론 오지를 여행하는 과거의 탐험가들처럼 사교술을 터특하기에 어울리지 않은 환경에 있던 사람들이 있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사교술은 어디서나 얻을 있다고 평한다.

 

다시 보면 서양에서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이 침묵으로 서로를 무시한 , 음식을 먹는 행위에만 몰두하는 일은 예의바르지 않은 행동이다. 다시 말하면 행위가 예의바르지 못하다는 것을 배운 이들이 아니라는 말이다. 깊은 침묵 속에서 이루어지는 아침식사 풍경은 오히려 이들 대부분이 지니고 있는 교양의 수준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그나마 이슈메일은 카토와 피타고라스를 이야기하고, 성경에 익숙한 교양인이라고 있다. 그러므로 당시에 교양인이라면 으레 하게되는, 혹은 갖게되는 행동양식으로부터 온전히 자유롭지 못한 면을 이슈메일에서도 발견할 있다. 식탁에서의 침묵행위를 예절바르지 못하다고 언급하는 것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같다.

 

이번 5장에서는 아침식사 풍경을 통해 포경선원들의 일면을 보여줌과 동시에 퀴퀘그의 세세한 행동양식을 보여주기에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사람이 포경선을 타고 많은 사람들이 등장하기 전에 소설의 장면은 이들이 다니는 뒤를 밟아 퀴퀘그의 면모를 조심스럽게 보여주고 있다. 이슈메일이 퀴퀘그를 관찰하는 부분은 당분간 간간이 나오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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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비 Moby-Dick or, The Whale

허먼 멜빌(Herman Melville) 지음  |  김석희 옮김  |  작가정신

 

[4] 이불(The Counterpane)

 

[4장의 기본 줄거리]

여인숙 주인 요나의 중재로 퀴퀘그라는 이름의 작살잡이와 침대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이슈메일. 퀴퀘그의 팔이 다정하게 자신의 위에 있는 것을 확인한 이슈메일은 퀴퀘그를 힘겹게 깨운다. 이슈메일은 마침내 일어나 침대 밖으로 나온 퀴퀘그의 몸치장을 비롯하여 외출을 위한 아침 준비 과정을 관찰한다.   

 


4장의 제목은 이불 번역되어 있는데 영어로는 counterpane라고 되어 있다. 단어는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침대 덮개용 이불, 침대보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있다. 하나의 이불을 덮고 남자는 침대를 매개로하여 마치 부부나 다름없이 허물없는 우정을 시작하는 계기가 된다. 따라서 침대란 공간은 이불을 함께 덮고 남자들만의 우정을, 그리고 앞으로 동고동락하게될 운명을 암시하는 소품일 것이다. 그리고 이들의 인간적인 우정은 마치 부부의 연을 맺은 사람들처럼 죽음만이 이들을 갈라 놓을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이번 4장은 우스꽝스러운 장면을 통해 퀴퀘그의 인물을 소개하고 이슈메일과 퀴퀘그의  조우를 묘사하고 있기도 하다

 


(이슈메일) (퀴퀘그) 팔을 움직이려고 했다. 신부를 끌어안은 신랑 같은 그의 팔을 풀려고 애썼다. 하지만 그는 깊이 잠들어 있는데도 나를 끌어안고 있어서, 죽음만이 우리를 갈라놓을 있을 같았다. (…) 대낮에 낯선 집에서 식인종과 도끼와 침대에 누워 있다니!  퀴퀘그! 제발 일어나, 퀴퀘그!’ 나는 한참 동안 몸부림을 치고, 남자끼리 부부라도 되는 것처럼 다정하게 끌어안는 것이 얼마나 온당치 못한 짓인가에 대해 끊임없이 훈계를 늘어놓은 끝에 마침내 그에게서 하는 소리를 끌어내는 성공했다.

 


이런 당황스러운 상황에서 마침내 퀴퀘그는 잠에서 깨어나고, 상황판단을 식인종 친구는 침대를 나와 몸치장을 시작한다. 때부터 이슈메일은 퀴퀘그를 다시 보기 시작한다. 퀴퀘그를 미개한 식인종으로만 보았던 이슈메일은 그를 예의바르고 예민한 감수성을 지닌 인간으로 보기 시작하는 것이다. 자신은  낯선 야만인에게 무례하게 굴었음에도, 야만인은 도리어 이슈메일을 예의바르게 대하고 존중해주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멜빌이 설정한 침실과 침대보는 이불을 덮고 남자의 우정의 시작을 매개하고, 문명인 야만인(식인종) 만남에서 인간 인간의 관계로의 전환이 이루어지는 상징적인 공간이자 소품으로 생각해 있겠다.  

 


먼저 침대 밖을 나와 몸치장을 시작하게된 퀴퀘그과 그를 관찰하는 이슈메일을 상상해보라. 1인칭 화자인 이슈메일은 호기심을 가지고 예의바른 식인종 식전 아침일과를 묘사한다. 이슈메일에 따르면, ‘문명화된 기독교도 누구나 세수를 했을 것이지만, 퀴퀘그는 가슴, 손과 팔만을 씼었다. 이어 면도를 시작하는 퀴퀘그는 작살의 날을 부츠에 문질러 날을 벼린 다음 곧바로 면도를 하는 것이다. 이슈메일은 그를 보고 얼굴에 작살질을 시작했다라고 재미있게 묘사하고 있다. 어쨌든 물보라 여인숙에서 만나게 이슈메일과 퀴퀘그는 앞으로 포경선에 올라 함께 생사를 나누게 관계가 된다. 그대로 죽음만이 둘을 갈라놓게 된다. 4장은 모비 에서 상당히 짧은 장에 속한다. 멜빌이 서서히 드러나는 등장인물과 배경을 설정함에 있어서 상당히 중요한 인물에 해당하는 이슈메일과 퀴퀘그가 조우하는 배경을 마련하고, 이들의 관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며 잠시 쉬어가는 장으로 있다. 아울러 20세기 후반까지도 금기시되었던 화제인 동성애적인 상상을 유발하는 이런 상황을 유머러스하게 활용하여, 거친 일도 마다하지 않는 선원들(남자들) 우정을 예비하는 설정이 매우 흥미롭게 다가온다. 소설을 집필하던 시기가 거의 170 전인 1850 여름이라는 것을 염두해둔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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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2019년 8월 1일), <모비 딕>의 작가 허먼 멜빌이 태어난 지 200주년 되는 날이네요. 다소 늦은 시기에 책을 읽기 시작하여, <모비 딕>을 만난 게 작년이었는데요, 읽으면서 <모비 딕>이 좋아졌습니다. 두 번째 읽으면서 뭔가 천천히 읽되 재미있게 읽는 방법이 없을까를 고민하다가 135장 전체를 읽으며 각 장마다 독후 기록을 남겨보자하고 제 나름대로 이름붙인 '모비딕 마라톤'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모비딕 마라톤'이 끝나게되면 최소한 135편의 독후 기록이 남게 되는 셈이죠.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싶지만, 쓸모없어 보이기에 오히려 흥미가 생깁니다. 오늘은 멜빌의 200주년을 기리는 의미에서 그동안 중단하고 있었던 <모비 딕>을 천천히 읽고 쓰기 프로젝트를 다시 시작해보려고 합니다. 그동안 개인적인 일들로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고 할까요. 이제는 다시 시간을 내보려고 합니다. '모비딕 마라톤'은 제 개인적인 독서 경험에 대한 반응의 기록입니다. 한 줄을 읽다가 딴 생각이 나면 딴 생각을 하고 다시 돌아옵니다. 소설 속에서 사소해보이는 것들이 제게 말을 걸어오면 그 대상에 한눈팔던 기록을 남기는 겁니다. '모비딕 마라톤'은 이런 취지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책 한권이라는 '심연'을 두고 허우적대고, 삼천포로 빠졌다가 다시 길을 찾아오는 제 지극히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독서 경험의 기록이 되겟죠. <모비 딕> 전체가 135장으로 되어 있고, 매주 한 장에 대한 독후 기록을 작성한다고 해도 2년이 넘게 걸리는 지난한 작업이 될 겁니다. 제게는 <모비 딕>이 그만큼 매력적으로 다가옵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쓸모없어 보이는 것'에 대한 각자 나름의 취향이 있다는 것 자체가 멋진 일입니다.



모비 Moby-Dick or, The Whale

허먼 멜빌(Herman Melville) 지음  |  김석희 옮김  |  작가정신

 

오늘은 미국문학사에서 의미 있는 행사가 전역에서 계획되어 있을 같습니다. 바로 오늘 2019 8 1 모비 저자 허먼 멜빌(Herman Melville) 탄생 200주년 되는 날입니다. 작가정신에서 출간한 한글본 모비 》에 보면, 작가의 연보가 나옵니다. 뉴욕의 유복한 상인 집안에서 8남매 셋째로 태어난 멜빌은 어머니의 가문 또한 네덜란드의 귀족 가문 출신에 칼뱅주의자의 배경 속에서 성장한 것으로 보입니다. 할아버지와 외할아버지 모두 영국군에 대항하여 미국의 독립을 지지하고 전쟁에 참여한 인물들이며, 뉴욕 항에서 보낸 어린 시절을 통해 배와 바다에 익숙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동안 개인적인 사정으로 차분하게 모비 읽을 마음의 여유를 찾기 힘들었는데요, 다시 멜빌의 탄생 200주년을 기점으로  모비 세계로 돌아오려고 합니다. ‘모비 마라톤’, 135 전체를 다시 천천히 읽으며 장에 대한 인상과 저의 반응 그리고 다른 맥락으로의 연결짓기를 다시 시도해보려고 합니다. 그동안 [3]까지 읽다가 집중을 하지 못했는데요, 오늘은 멜빌의 탄생 200주년을 기념하여 잠깐 [1]에서 생각을 덧붙이려 했던 부분을 추가하며 다시 모비딕 마라톤 시작해봅니다.

 


 

모비 마라톤’ - 다시 [1] 더하여

 

1장을 다시 들여다보다가 계속 아쉬운 부분이 있었다. 바로 세상에 노예 아닌 사람이 있는지 묻고 싶다(35)” 대목이다. 여기에서 멜빌이 주목했을 계급의식’, ‘계급문제 대한 생각을 떠올리게 배경이 무엇이었을까 생각해보게 되었다. 앞서 2장을 읽고 옮긴이의 주석을 참조했지만, 멜빌은 유복한 개신교 집안의 아들이었는데, 아버지의 사업에 어려움을 겪고 재기를 못하게 되어 집안이 몰락한 , 생계문제를 해결하고 집안을 돕기 위해 학교를 중퇴하여 일을 시작하게 된다. 멜빌은 화물선의 급사가 되어 선원 생활을 시작하기도 하고 21 포경기지 뉴베드포드에서 포경선의 일반 선원으로 고용된 기록이 보인다. 분명 31살의 나이에 모비 집필했을 이미 글쓰기에 없어서는 안될 주요한 경험을 상태였던 것이다. 특히 2장에서 멜빌이 일개 선원으로 바다로 나가는 젊은이들이 뉴베드포드를 선호하는지에 대한 설명도 사실상 개인적인 경험이 역할을 했을 것으로 이해된다.         

 


다시 1장에서 멜빌이 언급했던 세상에 노예 아닌 사람이 있는가?라는 명제로 돌아가본다. 멜빌은 1장에서 뜬금없이 노예 관련하여 당시에 논란의 여지가 있을 법한 표현을 소설의 초입부터 밀어넣었다. 다시 생각해보니 부분은 분명 나의 소심한 호기심과는 달리 저자의 머리와 의식 속에서 무시되는 것이 아니라 목에 걸린 가시처럼 그를 지속적으로 붙들고 불편하게 하던 문제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모비 집필하던 시기의 미국 사회는 어떠했을까. 점을 상상해보면 멜빌이 뜬금없이 노예문제를 거대한 소설의 1장부터 언급했던 이유를 짐작해볼 있다. 멜빌이 모비 집필하던 1850 여름을 전후한 미국 사회는 지금 못지 않게 역시 다사다난했던 같다.

 


 

【《모비 집필 당시 미국 사회를 생각해보며

 

당시 미국사회는 자본주의의 폐해를 이미 겪으며 몸살을 앓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옮긴이의 추가적인 설명에 따르면 1837년에 미국 최초의 금융공황이 발생했다고 언급되어 있다. 하지만 어떤 기준에서 이렇게 설명했는지는 모르지만 미국내 금융공황의 발생 시점을 조금 다르게 설명하는 연구자도 있다. 버지니아 유뱅크스의 자동화된 불평등에서는 토지로 인한 과도한 금융 대출을 규제하면서 발생한 금융공황 1819, 그러니까 멜빌이 태어난 해에 이미 미국 내에서,  그것도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자본주의의 필연적인 문제점이라고 강조했던 자본주의의 폐해를 겪고 있었고 어쩌면 상인의 집안이었던 멜빌 가문 역시 이러한 자본주의가 영향력을 장악하던 시대에 보다 민감하게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자본주의가 강력한 힘을 발휘하던 프랑스에서 제품을 수입하던 멜빌의 아버지 였으니, 멜빌 집안의 부침은 어느 정도 예견되어 있던 것인지도 모른다. 특히 1789 프랑스 혁명(부르주아 혁명)이후, 프랑스 사회를 지배하는 계층이 부르주아 계급에서 귀족, 그리고 다시 황제의 권위로 넘어가는 다양한 정치 세력과 사상이 끊어오를 준비를 하던 아닌가. 유럽 사회(특히 프랑스) 크나큰 변화를 가져왔던 1848 당시 미국에서는 멕시코 전쟁에서 승리하여 현재의 대륙처럼 양쪽에 바다를 영토를 확보한 시기였다. 그뿐만 아니라 서부 캘리포니아에서는 금광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전국을 들끊게 만들었다. 이른바 골드러시 서막을 알리기 시작한 때에 멜빌은모비 집필을 구상했던 것이다. 헛된 희망과 사회의 암울함이 뒤섞인 미국사회를 바라보며 멜빌의 관점에 이렇든 어느 정도의 냉소와 비판의식 또한 포함되게 것은 아니었을까. 그리고 작가라면 사회의 모습을 보다 면밀하고 관심을 가지고 바라보고 있었을 터이다.    


 

모비 출간(1851)하고 10 , 미국 사회는 거대한 내전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리게 된다. 미국 사회의 중요한 역사적 사건으로서 남북전쟁 1861 발발한다. 흥미로운 것은 전쟁의 중심에 인권 대한 문제의식, 특히 노예제도 관련한 사항이 있었다는 점이었다. 좀더 범위를 좁혀 검토해보자면, 1850 도망노예법 미국 내에서 통과가 되었던 사건에 주목해보게 된다. 법은 미국 내에서 탈주 노예가 발각되면 상부에 넘기는 일을 강제하는 법률이었다. 당시 남부의 면화 농장 등에서 도망친 노예들은 결국 북쪽으로 대거 이동해와 국경을 넘어 캐나다로 월경을 하곤 했다는 기록을 적이 있다. 현재 미국 사회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남부의 멕시코-미국 국경에 높은 담을 만들어 멕시코계 이민자들이 합법적인 절차를 통하지 않은 경우 통제를 하고 있는 것처럼, 19세기 중엽에는 미국의 흑인 노예들이 미국을 떠나려고 목숨을 걸고 국경을 넘어갔던 것이다. 결국 이러한 사회 속에서 멜빌은모비 집필하던 시기(1850 여름) 사회가 돌아가는 모습과 노예주의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었을 것이다.

 


한편 노예 존재 자체 아니라 노예 주요 수요지였던 남부의 면화 농업은 결국 자본주의 번성의 역사와 궤를 같이 하고 있음을 상기해볼 있다. 특히나 면화 산업은 지극히 미국적인 자본주의의 주요 특징으로 삼을 있다. 물론 당시 미국 사회는 흑인들에게만 힘겨웠던 것이 아니라 공황의 여파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이 이미 일반 사람들의 삶을 힘들게 하고 있었다는 점을 기억해둘만 하다. 멜빌이 처음 대서양을 오가는 상선의 선원으로 배를 타게된 1841년처럼, 1장에서 이슈메일이 교사직을 그만두고(멜빌도 교편을 잡은 적이 있다) 고래잡이 배를 타기로 결정하는 장면은 당시 경제가 어려웠던 사회 속에서 자신의 삶을 헤쳐나가려는 젊은이들의 보편적인 출구이자 로망이었는지도 모른다. 특히 배에서 고된 일을 정직하게 하고  이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받는다는 청교도적인 윤리의식이 뒷받침되고 있다는 조건에서 말이다.    

 


 

【다른 문인이 평가하는 멜빌과 《모비 》에 관한 짧은 만남

 

가지 주목해보는 것은 멜빌이 1장에서 이슈메일의 입을 통해 자신이 바다로 가서 고래잡이 배를 타려고 하는지를 다소 신비적인 운명 혹은 신의 섭리 같은 소재를 처음부터 이끌어가는 부분이다. 물론 이런 배경에는 청교도적인 배경에서 나온 발상이라는 점도 이해는 되지만, 흥미로운 것은 채털리부인의 연인 작가 D. H. 로렌스에게도 멜빌이 신비스러움에 의지하는 서두를 상당히 거슬렸던 모양이다. 미국 고전문학 연구  위대한  모비 의 문체가 거슬린다고 말하기도 하고, 어설픈 설교를 늘어놓는 멜빌을 가리켜 자신감이 없기 때문으로 풀이한다. 게다가 이 설교가 참 아마추어적이라고 한 방을 더 날리고 있다. 로렌스에 의하면 인간 멜빌은 지긋지긋한 뉴잉글랜드 도덕주의자-신비주의자-초월주의자 부류에 속한다고 평한다. 에머슨, 롱펠로, 호손 등의 그 부류 말이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 로렌스는 예술가 멜빌의 위대성을 인정하고 있다. 로렌스가 남긴 에세이의 마지막에서는 결국 모비 이 세상에서 가장 이상하고 가장 경이로운 책 가운데 하나라고 인정하고 있기도 하다.    

 



 

[참고도서 자료]

모비 , 허먼 멜빌 지음, 김석희 옮김, [작가정신]

자동화된 불평등, 버지니아 유뱅크스 지음, 김영선 옮김 [북트리거]

미국 고전문학 연구, D. H. 로렌스 지음, 김정아 옮김, [아카넷]

사악한 , 모비딕, 너새니얼 필브릭 지음, 홍한별 옮김 [저녁의책]

생명을 넣는 노동, 고병권 지음 [북바이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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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물보라 여인숙(The Spouter-Inn)

 

모비 마라톤’ - 모비 3 천천히 읽기

 

[3장의 기본 줄거리]

추운 겨울 저렴하게 잠잘 곳을 찾아 전전하던 이슈메일은 물보라 여인숙이라는 음침하고 바람이 들이치는 여인숙에 들어간다. 불길해보이는 유화와 거대한 고래 턱뼈가 장식된 현관을 지나 술청(public room) 들어간 이슈메일은 성경에서 저주받은 요나(Jonah)’ 같은 이름을 쓰는 여인숙 주인에게 하룻밤 묵을 방을 요청한다. 마침 방이 모두 있어서 요나는 이슈메일에게 침대가 있는 방에서 작살잡이와 침대를 쓰라고 권한다. 추운 겨울 이상 여인숙을 전전할 없어 이를 수락하게 된다. 커다란 침대에서 잠들 무렵 찾아온 퀴퀘그라는 이름의 작살잡이는 식인종이었다. 와중에 이슈메일은 여인숙 주인 요나의 중재로 퀴퀘그에 대한 편견을 깨고 침대에서 단잠을 자게 된다.

 

 

3장의 주요 사건은 이슈메일이 물보라 여인숙에 들어가 곳을 찾는 과정에서, 우연히 침대에서 밤을 보내게 되는 식인종 작살잡이 퀴퀘그가 등장한다는 점이다. 퀴퀘그는 남태평양에서 작살잡이로 몸에 문신을 고래의 향유로 처리한 뉴질랜드 원주민의 머리를 팔러 나간 상황이었다.모비 놀라운 점은 소설의 중간중간에 지금부터 170 정도 전의 작가가, 백인들이 사람의 피부에 대해 갖고 있던 보편적인 사고 방식과 확연히 다른 에피파니(순간에 다가오는 깨달음 같은 ) 순간들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내가 미지의 작살잡이에 대해 부당한 편견을 품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잠시만 기다려보자.”(51)

 

식인종에게 붙들려 강제로 문신을 당했다는 어느 백인-그도 역시 고래잡이였다- 이야기가 기억난 것이다. 작살잡이도 바다를 항해하다가 그와 비슷한 일을 당한 분명하다고 나는 결론지었다. 결국 그게 어쨌단 말인가! 그것은 그의 표면일 뿐이다. 사람은 어떤 피부를 가졌든 관계없이 정직할 있다.” (56)

 

이런 생각들을 노예제가 존재하던 시기에, 그것도 백인의 집단에 있던 사람이 으레 있는 사고는 분명 아닐 것이다. 이슈메일이 잠시만 기다려보자라고 스스로에게 말하고 있는 순간이 바로 에피파니의 순간이며 반성적 사고의 순간일 것이다. 멜빌은 내가 내린 결론, 내가 판단이 과연 옳은가라고 반문할 아는 소양을 갖춘 인물이다. 그렇다고 해도 당시에 백인 작가가 사람은 피부색과 무관하게 정직할 있다라고 말하는 것은 1장에서 세상에 노예가 아닌 사람이 있는가?라고 반문했던 것처럼 당시의 시대 상황 속에서 놓고 , 상당한 논란의 여지를 남겼을 같다. 하지만 작가 허먼 멜빌은 어떤 사람인가. 몰락해버린 자신의 가족을 건사하기 위해 지금으로 말하면 고등학교 졸업할 즈음에 거친 바다로 나가 배를 타기로 사람이었다. 이런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1장에서 언급한 있는 대가를 받은 에는 신분이나 피부색도 가리지 않았던 것이다. 가난한 이들이 당시 경제 공황의 여파로 더욱 극심한 곤궁 속에서 살아가던 , 젊은 남자들이 있는 일로서 배를 타는 일은 나름의 보상과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을 충족시켜줄 창구가 되었을 것이다. 멜빌의 경험은 당시에 많은 젊은이들이 이러한 경험을 했으며, 멜빌과 같은 성찰적인 사고를 있는 이들에게는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아도 놀랍고 한편으로 귀담아 들을 만한 지혜를 모비 통해 우리에게 남겨놓았다고 있겠다.

 

소설을 읽다가 흥미로운 부분은 무언가 불쑥 지나가듯 작가가 자신의 의식을 문장으로 드러내는 부분이다. 마침내 문신으로 가득한 새로운 룸메이트 퀴퀘그가 등장한 , 이슈메일은 그의 몰골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하지만 이내 생각을 고친다. “결국 그게 어쨌단 말인가! 그것은 그의 표면일 뿐이다.”(56)라고 말하는 것이다. 원서의 표현으로는 ‘outside’ 번역자는 표면으로 옮겼다. 결국 상대방의 겉모습 보고 판단해서는 안된다는 멜빌의 판단이 드러나고 있다. 하지만 소설 속의 이슈메일은 온전히 멜빌의 분신은 아니기에 일반적인 백인의 편견을 보여주기도 한다. 결국 3장에서 화자인 이슈메일이 퀴퀘그라는 인물을 만나면서 백인들의 시선을 보여주며 멜빌의 인식과 처음으로 충돌하고 있는 장이기도 하다.

 

(퀴퀘그) 30 전쟁에 참전했다가 속옷 대신 고약을 처바르고 전쟁터에서 방금 탈출한 것처럼 보였다. 게다가 다리도 짙은 초록색의 청개구리 떼가 어린 야자나무 줄기를 뛰어 올라가고 있는 것처럼 얼룩덜룩했다. 그가 남양에서 포경선을 타고 기독교 국가에 상륙한 혐오스러운 야만인인 것은 이제 분명해졌다.”(58)  

 

백인들의 사회, 특히나 기독교가 지배하고 있는 미국과 같은 서양 문명의 사람들이 이교도를 바라보는 무의식적이고 일반적인 시선으로 이해할 있겠다. 따라서 다시 정리해보면 3장에서는 새로운 인물 하나를 자연스럽게 소개하면서 등장 인물의 면면을 재미있는 에피소드 속에서 보여주며, 동시에 이슈메일과 퀴퀘그의 만남을 준비한 장이다. 상징적으로는 서양 문명에 속한 사람과 비서양 문명의 사람이 만나는 자리, 이들의 삶과 문화가 충돌을 시작하는 장면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들의 만남에서 우여곡절 끝에 사람이 같은 침대에서 단잠을 자며 마무리하는 모습은 재미있는 장면이면서도 의미심장하다. 특히나 이슈메일이 여인숙의 현관에 있던 거대한 턱뼈를 통과하여 들어온 것을 떠올려본다면, 둘은 마치 거대한 괴물 리바이어던, 혹은 성서에 나오는 요나의 이야기처럼 고래 뱃속에서 이루어지는 서구인과 비서구인의 만남, 우정이 시작되는 장면이라고 바라볼 수도 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부분은 다시 말하면 저자가 자신을 소설 속에서 불쑥 드러내는 부분인데, 3장의 마지막 부분에 가서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견해를 드러낸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사람(퀴퀘그) 나와 똑같은 인간이야. 내가 사람을 두려워했다면, 같은 이유로 사람도 나를 두려워했을 아닌가. 술에 취한 기독교도보다는 취하지 않은 식인종과 함께 자는 나을지도 몰라.”(61)

 

170 가까이 과거에 이러한 말을 있었던 것도 놀랍지만, 부분도 멜빌이 자신이 남태평양 마르키즈 제도의 식인종족 타이피족과 수개월간 생활했던 경험이 없었다면 이런 문장은 나올 없었을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멜빌은 함께지내던 타이피족에게 잡아먹히기 전에 탈출했다고 하는데, 그의 이러한 경험을 고려한다면, 문장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는 것을 알게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멜빌 자신의 목숨을 경험을 통해, 그리고 살아남았기에 우리에게 전하고 있는 문장을 나는 좋아하게 되었다.

 

 

식인 풍습과 야만 대한 시각

 

우리가 고전이라고 하는 작품을 읽다 보면 은연중에 지나치는 부분이 바로 식인 풍습 관한 사항을 만나게 되곤 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부분은 내게 흥미를 주는 주제다. 왜냐하면 나이가 들수록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의 정체는 무엇일까?’라는 의문이 더욱 커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멜빌은 135장이나 되는 소설의 앞부분인 3장에서 이미 퀴퀘그라는 식인종 등장시키고 있다. 게다가 퀴퀘그가 밤늦게 돌아다니는 이유가 고래의 향유로 처리를 뉴질랜드 원주민의 머리를 기념품삼아 백인들에게 팔러다니고 있다는 설정은 독자의 궁금증과 호기심을 무척이나 자극한다. 나는 부분에서, 그리고 3장의 마지막 부분, ‘술취한 기독교도보다 멀쩡한 식인종과 침대에서 자는 것이 낫다라고 말하는 대목에서 수상록 몽테뉴를 떠올렸다. 분명하게 예상해볼 있는 사실은 멜빌도 몽테뉴의 수상록 읽었다는 점이다. 모비 표지 다음에 바로 나오는 어원편을 지나 발췌록 보면 멜빌이 수상록 읽고 고래 관해 언급한 부분을 발췌한 부분이 나온다.

 

짐승이든 배든, 다른 것들은 모두 괴물(고래) 아가리, 무시무시한 심연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당장 삼켜져서 모습을 감추지만, 오직 바다모샘치만은 그곳으로 안전하게 물러가 잠자리로 삼는다.(14, 재인용)

[미셸 몽테뉴의 에세(수상록) 수록된 레이몽 스봉의 변호’]    


지금 부분을 다시 읽어보면서 떠오른 생각은 3장에서 이슈메일과 퀴퀘그가 여인숙의 침대에서 자게 되는 에피소드는 마치 부분에서 아이디어를 따온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마저 든다. 여인숙에 있던 고래의 턱뼈를 통과하여 여인숙 내부(고래 뱃속) 들어간 이슈메일과 퀴퀘그는 바다모샘치마냥 고래의 심연에서 안전하게 잠자리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심연이라고 하는 장치는 무지와 죽음의 세계를 상징할 있다. 그리고 인간에게 근원적인 공포를 주는 개념의 한가운데에서 이슈메일과 퀴퀘그는 마치 죽음이 갈라놓을 때까지 함께 것을 맹세하는 부부처럼 침대에서 우정을 나누는 계기를 마련하고 있다. 심지어 여인숙의 주인장 별명을 요나라고 설정해둔 것도 생각을 더욱 그럴듯하게 하지 않은가.

 

잠시 옆길로 빠졌지만 다시 식인의 풍습으로 돌아오면, 몽테뉴 역시 흥미로운 점을 기록하고 있는 대목이 나온다. 몽테뉴의 수상록(동서문화사판, I, 218면부터)에는 식인종에 대하여라는 항이 있는데, 스키타이 족을 예로 들면서 이들 전사 각자는 자기가 죽인 적의 머리를 전리품으로 가져와 자기 문에 매달아 두는 습속을 언급하고 있기도하다. 마치 남태평양의 식인부족에서 서양문명을 보기위해 자신의 부족을 떠나왔던 퀴퀘그의 행동처럼 말이다. 물론 스키타이 족의 행위는 몽테뉴가 지적하고 있듯이 먹기 위한 행위가 아니라 극단적인 복수를 보여주기 위함이긴 하지만 말이다.   몽테뉴는 수상록에서 유럽에 발을 들여놓은 식인종 3명과 만나 대화하는 대목이 나오는데(이후에 정확한 부분을 찾게 되면 다시 언급해보겠다), 이들과 대화하며 이들을 야만인으로 보기보다는 다른 풍습을 가진 이들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고 이들에 대해 관심을 갖고 알아낸 사항들을 기록한 대목도 있다. 멜빌이 모비 쓰면서 읽었던 수많은 책들과 자신의 30 상당시간을 보낸 바다에서의 경험을 통해 몽테뉴의 책을 읽고 공감하는 바가 많았을 것같다. 수상록을 다시 들쳐보며 눈에 띄는 부분은 몽테뉴가 사람들이 자기 습관이 아닌 것을 야만적이라고 부르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는 대목이다.

 

그들을 야만이라고 부르는 것은 자연이 그 자체로 여느 상태로 나가며 이루어 놓은 성과를 야만이라고 부르는 의미에서 하는 말이다. 그러나 사실은 오히려 우리의 기교로 사물을 그 평범한 질서에서 틀어 변경해 놓은 것들을 차라리 야만이라고 불러야 할 일이다.

[미셸 몽테뉴의 수상록, (동서문화사, 222) ‘식인종에 대하여’]    

이 표현이 다소 어려운 듯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상당히 흥미롭고 놀라운 표현이다. 마치 현대를 살고 있는 내게 나의 편견을 지적하고 있는 듯한 목소리가 들리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연 그대로의 것, 문명화되지 않은 것을 야만이라고 부르고 있던 것인데, 몽테뉴는 바로 이 점을 지적하고 있다. 과연 야만이란 무엇일까를 생각해보게 해주고 있는데, 몽테뉴는 자연의 순리대로 그렇게 존재하는 것들을 인간의 잔꾀와 기술로 이 자연의 질서를 변경시키는 것이 오히려 야만이라고 불러야 하는 것이 아닌가 반문하고 있다. 허먼 멜빌이 수상록을 읽다가 이 부분에서 자신의 작고 깊은 눈을 깜빡이며 생각에 잠기지 않았을까 싶다.   

 

앞서 언급했듯이 나는 몇몇 고전을 읽으면서 발견하게되는 인류의 식인풍습에 대해서 점점 관심이 많아지게 되었다라고 했다. 우리가 흔히 듣는 나치 정권의 유대인 학살의 표현으로 사용하는 홀로코스트(holocaust)는 사실 번제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고대 유대교의 풍습에서 어린아이를 제물로 삼아 불에 태워 신에게 바치는 의식으로서의 번제말이다. 이를 히틀러의 나치는 자신들의 민족주의와 결부시켜 만들어낸 유대인 학살로서의 의미로 사용했는데, 이 용어의 의미를 살펴보면 결국에는 인류의 유아살해 내지는 식인풍습의 흔적과 만나게 된다.

 

식인풍습과 관련하여 동양의 기록도 보인다. 청나라를 수개월간 여행하고 《열하일기》(1783)를 남겼던 박지원 선생도 중국 도사들이 어린 아이를 먹는 풍습에 대해서 언급하는 대목이 나온다. 우리가 《열하일기》에서 재미있는 부분만 많이 접할지 모르지만, 박지원 선생은 여러 군데에서 이 식인풍습에 대해서도 잊지 않고 기록하고 있다. 이 부분은 나중에 여러 자료와 함께 인류학적인 관점에서 다시 고민을 해볼 생각이다. 식인풍습은 인간이란 과연 어떤 존재인가를 생각할 때 한번쯤 만나게 되는 주제가 아닐까한다.  

 

 

여인숙 현관에 있는 그림이 주는 불길한 전조와 숭고미

 

3장에서 이슈메일이 물보라 여인숙 현관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발견하는 것이 한쪽 벽에 걸려있던 커다란 유화 이었다. ‘불가사의한 그늘과 그림자들의 집합체 보였던 그림의 정체에 대해 이슈메일은 궁금증을 갖는다. 마치 마녀 시대에 야심 있는 젊은 화가가 저주받은 혼돈의 세계를 나타내려고 듯한 그림, 정체불명의 그림을 유심히 뜯어보는 장면이 페이지 넘게 지속되고 있다. 마치 괴물과도 같은 무언가 길고 유연하고 불길해보이는 검은 덩어리 가닥의 푸르고 희미한 수직선 위에서 떠돌고 있는 형상에서 이슈메일은 상상할 없는 숭고함 있다고 까지 말한다. 그림의 정체에 대해 더욱 궁금해진 이슈메일은 여러가지 상상의 나래를 펼치지만 그가 생각하는 화가의 의도를 정리하면 다소 불길한 내용이다. 이슈메일의 해석은 곶을 돌다가 허리케인을 만나 좌초한 배의 돛대에 성난 고래 마리가 선체를 뛰어넘으려다가 돛대에 꽂힌그림이라는 것이다. 황당하기도하고 기발하기도 이슈메일의 평가는 결국 무서운 장면으로 결론을 내리게 되는데, 마치 소설의 방향이나 결말과 관련이 있는 불길한 전조가 아닐까 생각되는 대목이기도 하다. 이슈메일이 여러 공상을 하며 그림의 의미를 알아내는 과정은 마치 스위스 정신과 의사가 개발했다는 '로샤(Rorschach) 테스트'를 닮았다. 오늘날 검사 방법이 얼마나 신뢰성을 얻고 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어떤 추상적인 그림을 보고 자유 연상을 하는 과정을 통해 개인의 심리적 특성을 알아낼 있다는 것이 검사의 목적일 것이다. 정체불명의 , 신의 섭리에 의해 이슈메일이 바다로 다시 나가게 1장의 사연을 떠올린다면 멜빌이 3장의 시작을 정체모를 유화에다 페이지를 할애하고 있다는 것은 소설의 기본적인 전말에 대한 저자의 의도를 추측하게 해주는 부분이다.

 

한편 멜빌이 사용한 숭고함(sublimity)이란 개념에 주목해 보게 된다. 용어 뒤에 숨어 있는 역사적 맥락은 연구해볼만할 주제라는 생각을 적이 있다. 우리가 숭고함이란 단어를 어떤 상황에서 사용하는지 떠오르는 대로 언급해보자면, 나는 우선 니체가 알프스 산맥의 실즈 마리아에서 보았다는 거대한 구름바다를 떠올리곤 한다. 니체가 영원회귀사상을 떠올렸다는 알프스 산맥말이다. 동시에 독일의 화가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가 그린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1818) 떠올리곤 하는데, 바로 인간이 대자연 앞에 섰을 느끼는 그런 압도감과도 같은 것일까 생각해본다. ‘숭고미 대해 미학자들이 책을 쓴다면 아마도 권을 써도 모자를 같다. 프랑스 혁명에 관한 성찰(1790) 유명한 영국 보수주의의 기수 에드먼드 버크는 숭고 개념과 미학적 개념에 대해서 저서(숭고와 아름다움의 이념의 기원에 대한 철학적 탐구) 남긴 것으로 알고 있다. 멜빌은 에드먼드 버크의 프랑스 혁명에 관한 저서와 숭고미에 대한 저서를 읽지 않았을까 상상해보게 되는 대목이다. 숭고함이라는 용어가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는 아마도 버크의 저서에 나와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아직 버크의 저서들을 읽어보진 못했으므로, 서적들은 앞으로 내게 남은 숙제가 될터이다. 멜빌은 모비 집필하면서, 그리고 20대의 대부분을 바다에서 보내면서 망망대해에서 거대한 해양동물과 마주친 경험, 자연의 숭고함 인간의 힘으로 어떻게 없는 불가항력적인 힘을 다시금 기억해 냈을 것이다.         

 

모비 3장은 다소 편이다. 하지만 멜빌은 소설이 나아갈 불길한 전조에 대한 짤막한 암시와 새로운 등장인물을 흥미로운 방식으로 독자들에게 제시해주고 있는 장이기도 하다. 더불어 내가 좋아하는 멜빌의 글쓰기 방식은 불쑥불쑥 저자 자신을 드러내는 부분이다. 부분을 조규형 교수는 영미 문학, 어떻게 읽는가: 감성과 실천(2019)에서 사건의 전개와 더불어 이에 대한 깊이 있는 사유로 구성되어 있다’(196)라고 정리한다. 결국 이슈메일의 입을 통해 멜빌의 사유가 드러나는 대목을 나는 좋아하게 되었다. 엄청난 독서량을 통해 고래와 포경업에 관한 백과사전적인 지식을 망라한 부분을 앞으로 지나게 것이다. 물론 나는 여기서 부분을 되풀이해서 정리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내가 기록해 두려는 사항은 모비 읽으며 내가 반응한 흔적을 입자 검출기처럼 기록해두자는 것이다. 생각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든, 자연히 흘러가도록 내버려두고 이를 들여다볼 것이다. 마치 멜빌이 모비 집필하면서 그랬을 처럼 말이다.  

 

 





[참고도서 자료]

모비 , 허먼 멜빌 지음, 김석희 옮김, [작가정신]

Moby-Dick or, The Whale, Herman Melville, [Penguin Classics]

수상록(I), 미셸 몽테뉴 지음, 손우성 옮김 [동서문화사]

영미 문학, 어떻게 읽는가: 감성과 실천, 조규형 [세창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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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21-08-14 0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미문학 어떻게 읽는가_는 어때요? 초란공님

초란공 2021-08-14 08:51   좋아요 1 | URL
제 기억으로는 평론가들처럼 어렵게 쓰지 않아서 저는 좋았습니다. 다만 책이 두께에 비해 작품을 여럿 다루기 때문에 글이 좀 짧다고 느꼈다랄까요. 좀 더 길었어도 좋았을 것 같은데 아쉬웠어요.

수이 2021-08-14 09:33   좋아요 0 | URL
감사해요 찾아볼게요 ^^
 


모비 마라톤’ - [2] 여행가방(The Carpet-Bag)

 

지난 1장을 읽고 두서 없는 글을 보니 앞으로 어떤 식으로 써야할지 걱정스럽긴 하다. 다시 변명을 해보자면 앞으로 적어 나갈 나의 독후 기록들은 결국 그때 그때 모비 천천히 다시 읽으며 내가 반응한 결과의 모음일 뿐이다. 훗날 글을 보고 유치한 생각들에 새삼 부끄러움이 든다면 나름대로 의미있지 않을까. 그동안 그만큼 생각이 달라지거나 자라났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서다. 아무튼 이러한 작은 바람을 가지고 계속 해보려고 한다.

 

지난 1장을 다시 떠올려보자면 1장은 독자가 쉽게 지나칠 있지만 중요한 정보들을 많이 담고 있다. 소설의 화자인 이슈메일의 내러티브가 곧바로 시작하며 자신에 대한 이야기와 공간적인 정보를 풀어 놓는다. 1장의 제목 어렴풋이 보이는 것들에서도 암시하고 있듯이 자신이 고래잡이배를 타려고 바다로 향하는지에 대한 동기를 설명하는데, 물이 내포하는 근원적인 마력을 포함하여 자신이 책임 있는 자리가 아닌 일개 선원으로 배를 타려는 이유에 주목해보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이 고래잡이 배를 타려고 하고 당시에 포경업의 주도권을 육지에 있는 뉴베트포드에 건네주고 쇠락해가는 낸터킷 섬에서 굳이 출항하려는 이유를 신의 섭리 기대고(청교도적인 배경을 찾아볼 있다) 있기도 하다. 아울러 1장을 마무리하며 멜빌은 덮인 거대한 산처럼 거대한 유령 같은 고래의 이미지를 상상하고 있는 대목에서 소설 전체의 방향, 소설의 어조를 어떤 느낌으로 설정할 것인지를 살짝 드러내고 있는 같다. 특히나 주는 공허함, 무지 혹은 무지에 대한 공포, 숭고함, 불가항력적 신비와 섭리와 같은 이미지와 오버랩되며 모비 딕의 숨결을 미리 느끼게 해주고 있다.

 

2장의 줄거리를 간단히 정리해본다. 이슈메일은 맨해튼을 떠나 코넥티컷주 뉴베드퍼드에 도착했다. 때는 12월의 어느 겨울 , 매서운 추위로 유명한 미국 동부의 겨울 밤이었다. 이슈메일은 당시에 포경산업의 독점적인 지위를 누리기 시작하며 번성하던 뉴베드퍼드에서 고래잡이 배를 있었지만, 이제는 쇠락해가던 낸터킷 섬으로 건너가서 고래잡이 배를 타기로 결심한다. 이슈메일이 전하는 말에 따르면 낸터킷은 오랜 역사를 지닌 포경업의 발상지이며, 미국에서 최초로 고래의 시체가 해안에 떠밀려 이었다. 게다가 아메리카 원주민인 인디언들이 통나무배를 타고 고래를 잡으러 처음 출격한 이었다. 실제로 멜빌이 20 초반에 포경선을 탔을 뉴베드퍼드에서 출발했다고 한다. 낸터킷 주민이자 작가인 너새니얼 필브릭(Nathaniel Philbrick) 사악한 , 모비 보면, 멜빌이 낸터킷 섬에 대한 묘사를 보면 낸터킷 섬에 와보진 않았으리라 말한다. 따라서 멜빌의 경험은 뉴베드퍼드에서 출항한 것에 기반하지만, 소설 속의 극적인 묘사를 위해 자신만의 낸터킷섬을 구상했으리라 보는 편이 설득력이 있다.

 

다시 줄거리로 돌아와서 늦은 밤에 도착하여 낸터킷섬으로 떠나는 배를 놓친 이슈메일은 이틀밤을 머물고서야 다시 낸터킷섬으로 떠나는 배를 있기에, 가벼운 주머니를 의식하며 저렴한 숙소를 찾기 시작한다. 흑인 교회를 비롯하여 여러 군데를 전전하다 이슈메일이 발견한 여인숙은 피터 코핀이라는 사람이 운영하는 물보라 여인숙이었다. 코핀이 뜻하기도 한다는 것을 멜빌은 다시 일깨우며 소설의 불길한 전조를 예고하는 듯하다. 2장의 하이라이트는 바로 여기에 있다. 이슈메일이 여인숙에 들어와서 겨울 외풍이 휙휙 느껴지는 초라한 여인숙에서 옛날 어느 작가가 남긴 말을 떠올린다.

 

유로클리돈이라는 폭풍에 대해서 생각할 , 바깥쪽에만 성에로 덮인 유리창으로 밖을 내다보고 있느냐, 아니면 안팎에 서리가 내려 있고, 민첩한 죽음의 사자만이 유리를 끼울 있는, 창틀도 없는 창문으로 밖을 관찰하고 있느냐에 따라 놀라운 차이가 있다.”(42)

 

붉은 비단옷으로 몸을 감싼 부자 영감 다이비즈는 말하겠지. 유로클리돈? 그게 어쨌다는 것이냐. 서리가 내려서 정말 멋진 밤이군. 오리온자리의 별들은 얼마나 밝게 빛나는가. 북극의 오로라는 얼마나 아름다운가!”(42)

 

옮긴이의 주석에 따르면, 유로클리돈은 지중해의 강한 북동풍으로 매섭고 차가운 바람을 의미할 테다. 바깥쪽에만 성에로 덮인 유리창은 난방이 되는 방을 뜻할 것이다. 안팎에 서리가 내려 있는 방은 난방이 거의 안되는 외부와 내부의 온도 차이가 거의 느껴지지 않을 법한 그런 방을 뜻한다. 따라서 추위로 거동도 하기 힘든 사람이 아닌 죽음의 사자만이 유리를 끼울만한 그런 방에서 밖을 내다보는 것과의 차이를 이렇게 얘기하고 있다. 멜빌은 여기서 인간의 보편적인 습성을 이야기해주고 있다. 따뜻한 방에서 추운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사람들에게 별들은 얼마나 아름답게 보이겠는가. 하지만 난방이 안되는 곳에서 추위에 덜덜 떠는 사람들에게는 이럴 겨를이 없다. 흥미롭게도 멜빌은 이슈메일의 입을 머리 속에서 추운 겨울 난방이 안되는 이들이 바라보는 시각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도를 한다. 혹은 추운 겨울 밖에서 떨고 있을 사람들의 입장을 떠올려보고 있다.

 

하지만 나사로는 무슨 생각을 할까? 푸르뎅뎅하게 손을 웅대한 오로라쪽으로 들어올린다고 해서 손을 녹일 있을까? 나사로는 여기보다 수마트라 섬에 있고 싶지 않을까? 적도를 따라 길게 몸을 눕히고 싶지 않을까?”(42)

 

멜빌은 유복한 상인집안의 아들이었다. 아버지는 스코트랜드 , 어머니는 데덜란드 계의 명문가였다. 하지만 멜빌이 성인이 때까지 유복한 집안의 자녀였다면 이런 생각을 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12 아버지의 사업이 실패하고 가족이 경제적으로 몰락하는 상황이 아니었다면 말이다. 가족은 외가로 옮겨가 살게되고,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하는 멜빌은 우리의 나이로 따지면 초등학교 고학년, 중학생의 나이에 학교를 중퇴하고 일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고 19 상선의 선원으로 바다로 나아가는 멜빌의 삶을 떠올려보면, 청소년기에 거친 사회로 나가 스스로 책임지는 삶을 배워야 했던 그가 바라본 사회의 모습들은 모비 구석구석에 각인되듯 드러나고 있다. 그대로 자신이 난방이 되어 창문 밖에만 성에가 끼어있는 에서 살다가 어느 갑자기 창문 안팎에 서리가 내리는 환경에서 지내게 되었을 것이다. 이런 경험이 멜빌에게 사회의 다양한 층위를 있는 눈을 갖게 해주었던 같다. 멜빌은 사회 구성원 각자가 처해있는 입장의 상대성에 대해 생각할 아는 작가였고, 그래서 내게는 더욱 놀랍고 새롭게 발견하는 재미를 주는 것이 바로 모비 이기도 하다.  

 

이어 이슈메일은 신발에 얼어붙은 얼음을 털어내고, 물보라 여인숙 어떤 곳인지 알아보기로 하자.”(43)라고 3장의 내용을 예고하며 독자를 여인숙 안으로 끌어들인다.

 



 


[참고도서 자료]

모비 , 허먼 멜빌 지음, 김석희 옮김, [각가정신]

사악한 , 모비 , 너새니얼 필브릭(Nathaniel Philbrick), 홍한별 옮김, [저녁의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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