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줄도 좋다, 그림책 - 여기 다정한 인사가 있습니다 한줄도좋다 8
구선아 지음 / 테오리아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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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 되어가는 어른들에게 건네는 다정한 인사


한 줄도 좋다, 그림책

: 여기 다정한 인사가 있습니다

구선아 지음 | [테오리아] | (2021)




작가는 그림과 그림책을 좋아하는 책방지기다. 책방 이름은 연희인데, 위치는 홍대입구역근처에 있다. 지난 주말에 야외에서 진행된 도서 관련 행사에 가서 업어온 책이 한 줄도 좋다, 그림책이었다. 저자가 읽어나간 그림책 24권에 대해 간결하게 글로 남겨놓은 책이다. 나이가 들어가며 눈이 점점 나빠지는 반면, 점점 읽고 싶은 책은 많아지니 조바심내며 책을 찾게 된다. 이 책은 손에 들면 잠시 숨을 고르듯 보게 되는 책이다. 그림책을 좋아하는 아내를 따라 그림책을 조금씩 보다보니, 이 책에 소개된 몇 권은 다행히 본 책이어서 저자의 감상에 보다 공감하며 읽었다.   




여러 글 중에서 어른이 되는 일의 어려움을 이야기한 대목이 기억난다. 나의 이십 대를 떠올려본다. 그 때 내 모습은 어땠을까. 아마도 이십 대의 내가 십대였던 동생에게 이러저러하게 살아한다고 훈수두었을 것이다. 나아가 삼십 대의 나는 이십 대에게 그렇게 살면 안된다고 얘기하며 지냈을 테다. 웃음이 피식 나온다. 재미있는 건, 사실 난 지금도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점이다. 어른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하나?

저자 역시 어른이 되는 일의 지난함을 이야기한다.



여전히 난 어른이 아니다. 어른의 나이가 되었지만, 아직 어른은 어렵다. 이십 대엔 삼십대가 되면 어른의 삶으로 살 줄 알았고, 삼십 대엔 사십 대가 되면 어른이 될 줄 알았다. 어쩌다보니 사십 대가 되었다. 어이쿠, 맙소사다. 그러나 다행히도 사십 대가 되며 나는 특별하지 않다라는 걸 깨달았다.(32)



어른이 되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정말 모르겠다. 다시 생각해보니, 어쩌면 나의 질문이 애초에 잘못 만들어졌는지 모른다. 다만 어떻게 살아야 할가에 대해 한 가지 실마리를 한 줄 발견했다.



살면서 포기하지 않는 것을 가져보면 어떨까 하는 이야기다.(47)



이 문장을 보는 순간 확 공감이 되었다. 그렇지. 살면서 우리는 사회의 규범에 신경쓰고 이를 쫓느라 소진해버리기도 한다. 특히 내가 타인의 눈에 어떻게 보일지에 많은 시간을 무의식적으로 허비해버린다. 나아가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고 나의 결정을 스스로 검열하기도 하지 않은가. 나의 나이와 역할을 고려하면, 재테크를 어떻게 할지, 아파트는 몇 평짜리를 얻을지, 자가용은 어떤 브랜드로? 우리는 스스로를 개성이라고 부르지만, 사실 산업사회의 다양한 기성품에 길들여진 획일적인 질서 속에 속박되어 있는 셈이기도 하다. 문명은 이런 조건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열정과 활력을 갉아먹는다. 살면서 우리 안에 무언가에 몰두할 만한 무언가를 하나 지니지 못한 삶은 우리를 얼마나 메마르게 만드는가. 곰곰이 생각해보게 하는 대목이다. 우리 안의 작은 열정을 붙드는 대상, 아무리 여건이 어려워도 포기하기 힘든 무언가를 지닐 수 있다면 얼마나 든든한 삶일까. 나는 저자의 이 한 마디가, 내가 나다운 시간일 수 있는 그 무엇을 찾아보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얘기해주는 듯 싶었다.




그냥 나는 나의 삶으로 살고 있다.(66)



이 문장은 슥 지나치기 쉬운 문장인 듯 하지만, 또한 어디로 튈지 모르는 동그란 털실같은 문장처럼 다가왔다. 저자가 오롯이 경험하고 느낀 삶의 고갱이들이 동그랗게 모인 털실말이다. 그래서 눈길이 오래 머무는 한 줄이다. 무엇보다 내 삶을 오롯이 스스로 책임질 줄 아는 어른이 되었으면 하는 소망이 생긴다. 그래야 내 주변의 가족을 돌 볼 수 있을 테니말이다.



일하는 엄마는 회사에서 퇴근하면 집으로 출근한다고 한다.(117)



, 그렇다. 뜨끔한 문장이다. 어쩌면 많은 가정이 각자의 이유로 불행하기도 한 이유는 행복한 가정 이미지가 엄마/아내 한 사람의 희생으로만 유지되고 있기 때문은 아닌가 반문해본다. 이 문장을 보고 눈길을 회피하는 남자 가장들이 많지 않을까 싶다. 이 상황은, 물론 당연한 것이 아니다. 평등이라는 거창한 용어까지 들먹이지 아도, 가정은 구성원 모두 함께 만들어나가는 공동체라는 것을 생각해본다. 저자는 이것이 구성원들 모두가 자신 잃지 않는 삶의 모습이라고 내게 말해주는 듯했다.




저자는 아파트 층간 소음에 관해서도 이야기한다. 내가 사는 아파트는 위층에서 전화기 진동소리가 들리고, 화장실 물내리는 소리가 들리는 기숙사 같은 건물이다. 층간 소음의 고통을 호소하는 민원이 끊이지 않는다. 나아가 아이가 있는 세대의 부모는 언제든 조마조마하기 일수다. 의도하지 않아도 아이가 불가피하게 만들어내는 자연스러운 소리들이 있기 때문이다.  



무조건적인 배려는 없다. 배려의 시작엔 공감이 필요하다. 공감empathy은 타인의 상황과 기분 등을 이해하는 데서 시작된다. 누가 어떤 삶을 사는지 어떤 하루를 보내는지, 누군가의 삶의 한 모퉁이를 공감하게 되면 층긴소음도 그 삶의 한 소리로 들릴까. 소음은 매우 주관적이다. 누군가에겐 시계 소리가, 누군가에겐 발걸음 소리가, 또 누군가에겐 웃음소리가 소음일 수 있다.(133)




소음은 주관적이며, 배려에 공감이 필요하다 말에 공감한다. 같은 크기와 높낮이의 소리라고 해도, 상황과 맥락에 따라 사람을 지옥으로 보내는 소음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도시의 아파트 앞집, 옆집에 누가 사는지 무관심한 채 소통이 단절된 이웃이 모여 사는 환경에서는 이웃으로 삶을 이어가는 과정에서 소음 이유를 애써 알 길이 없다. 이웃을 위해 배려하는 길이 때론 참 멀게 느껴지는 이유다. 가벼운 마음으로 읽긴 했지만, 생각은 이미 여러 갈래로 많아지고 있다.





[1] "여전히 난 어른이 아니다. 어른의 나이가 되었지만, 아직 어른은 어렵다. 이십 대엔 삼십대가 되면 어른의 삶으로 살 줄 알았고, 삼십 대엔 사십 대가 되면 어른이 될 줄 알았다. 어쩌다보니 사십 대가 되었다. 어이쿠, 맙소사다. 그러나 다행히도 사십 대가 되며 "나는 특별하지 않다"라는 걸 깨달았다."(32)

[2] "살면서 포기하지 않는 것을 가져보면 어떨까 하는 이야기다."(47)

[3] "그냥 나는 나의 삶으로 살고 있다."(66)

[4] "일하는 엄마는 회사에서 퇴근하면 집으로 출근한다고 한다."(117)

[5] "무조건적인 배려는 없다. 배려의 시작엔 공감이 필요하다. 공감empathy은 타인의 상황과 기분 등을 이해하는 데서 시작된다. 누가 어떤 삶을 사는지 어떤 하루를 보내는지, 누군가의 삶의 한 모퉁이를 공감하게 되면 층긴소음도 그 삶의 한 소리로 들릴까. 소음은 매우 주관적이다. 누군가에겐 시계 소리가, 누군가에겐 발걸음 소리가, 또 누군가에겐 웃음소리가 소음일 수 있다."(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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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 한자 일력 365 - 하루 한 자로 과목별 어휘 완전 정복
유대영 지음, 김재희 그림 / 상상아카데미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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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들어갈 조카가 한자에 흥미를 보인다고 해서 구매해봅니다. 초등학교 필수한자를 대상으로 매일 한 자씩 익힐 수 있고, 글자가 들어간 단어를 더 익힐 수 있네요. 선물하고 조카의 반응을 볼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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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
박태원 지음, 이상 그림 / 소전서가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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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대를 목격하고 삶을 누렸던 두 문학 청년의 환상 콜라보!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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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국가 - 19세기 후반 일본 사진(들)의 시작
김계원 지음 / 현실문화A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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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국가

: 19세기 후반, 일본 사진()의 시작

김계원 지음 | [현실문화A] | (2023)




이 책의 의의를 간단히 표현해보자면, 일본이 근대화의 과정에서 사진의 쓸모 알아보고 이를 어떻게 활용했는지에 대해 탐구한 작업이라 하겠다. 사진이 기록과 보존의 역할을 담당하며 계급의 위계를 구분하고, 타민족을 타자화하는 과정에 활용된 역사가 담겨있다. 아울러 우리는 일본의 근대화 과정이 우리에게 미친 영향에서 결코 자유롭지 않기에, 책에서 주목한 문제의식에 흥미를 가질 독자들이 많을 .


 

또 하나 주목해보는 부분은, 일본의 근대화 초기에 이루어진 홋카이도 개척 사업 미연방 농업국의 위원을 지낸 미국인 기술 전문가가 참여했다는 사실이다. 미국 사진가 도로시아 랭이 농업안정국(FSA) 의뢰를 받아 미국 시골지역의 농부와 광부들과 이들의 삶에 대해 조사하려는 목적으로 사진을 이용한 것과 매우 유사하다. 그렇다면 사진 및 사진술의 역사를 하나의 축으로 미국의 식민-제국주의의 물결이 일본을 거쳐 한반도에 와 닿은 과정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런 맥락에서 과거를 다루는 역사는 여전한 현재진행형이 아닌가 싶다.

 


여기에 더하여 한국사진사(박주석 지음, 문학동네, 2021) 역시 사진 국가에서 탐구한 일본 사진술의 전개과정과 연관지어 들여다볼 수 있을 것이다. 한국사진사의 선구자들은 상당수가 일본에서 사진술을 배워왔기 때문이다. 근대화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던 시기에 사진술은 서양문물에 대한 접근성이 좋았던 지식인들의 전유물이었다. 빛에 대한 물리적 이해, 카메라 구조와 작동에 대한 기계적 이해, 현상과 인화의 화학적 지식이 어느 정도 필요했기 때문이다. 사진 및 사진의 역사, 식민주의, 이미지 매체의 역할 등에 대한 관심이 있는 독자에겐 흥미로울 책이다.



1857년에 제직된 이 목판화에는 일본 사진의 선구자들이 대형카메라를 설치하고 인물 사진을 찍는 광경이 묘사되어 있다.





현재 일본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1857년 촬영) 다게레오타입의 사진





1878년 일본 육군성이 올린 경기구 사진(시아노타입)





정부의 대대적인 홍보처럼 홋카이도 개척은 미 서부 정착 사업을 모델로 삼았다. (...)

  역사학자 데이비드 하월(David L. Howell)은 홋카이도의 공격적인 이주 정책이 아이누 고유의 정체성을 말살할 뿐만 아니라, 일본이라는 주권에 방해되는 모든 것을 깨끗이 삭제하는 효과가 있었다고 지적한다.(277)



근대화의 이상과 낭만적 미래가 홋카이도에 투사되면서 북방 곧 기회의 땅을 의미했다.(278)



외국인 자문단의 역할은 단순한 지식 전달에 그치지 않았다. 이들은 구미-일본-아이누의 발전 단계를 시각화하는 프로그램에 복무했다. (...)

  카메라는 일부러 수유하는 장면을 찍어 아이누 여성을 자연이나 비문명으로 타자화하는 반면, 두 명의 문명인 남성에게 아이누 여성을 보호, 통제할 주체의 위치를 부여한다.(279)



요컨대 홋카이도 기록 사진은 20세기 전후까지 엽서, 교과서, 신문, 자료집, 국내외 전시, 잡지를 통해 지속적으로 복제, 유포되었고, 식민지의 성공적인 근대화를 표상하는 이미지로 기능했다.(289)



사진은 사실적 재현과 정확한 정보, 신속한 소통의 조건을 확보할 수 있는 매체, 즉 근대화의 수사로 미래의 결합했다. 새로운 행정체(개척사)와 새로운 매체(사진술)의 결속이야말로 변방의 식민지를 미래의으로 전시, 홍보, 소비하는 추동력이었다.(291)




[1]
"정부의 대대적인 홍보처럼 홋카이도 개척은 미 서부 정착 사업을 모델로 삼았다. (...)

역사학자 데이비드 하월(David L. Howell)은 홋카이도의 공격적인 이주 정책이 아이누 고유의 정체성을 말살할 뿐만 아니라, ‘일본’이라는 주권에 방해되는 모든 것을 깨끗이 삭제하는 효과가 있었다고 지적한다."(277)

[2] "근대화의 이상과 낭만적 미래가 홋카이도에 투사되면서 ‘북방’은 곧 기회의 땅을 의미했다."(278)

[3]
"외국인 자문단의 역할은 단순한 지식 전달에 그치지 않았다. 이들은 구미-일본-아이누의 ‘발전’ 단계를 시각화하는 프로그램에 복무했다. (...)

카메라는 일부러 수유하는 장면을 찍어 아이누 여성을 자연이나 비문명으로 타자화하는 반면, 두 명의 ‘문명인’ 남성에게 아이누 여성을 보호, 통제할 주체의 위치를 부여한다."(279)

[4]
"요컨대 홋카이도 기록 사진은 20세기 전후까지 엽서, 교과서, 신문, 자료집, 국내외 전시, 잡지를 통해 지속적으로 복제, 유포되었고, 식민지의 성공적인 근대화를 표상하는 이미지로 기능했다."(289)

[5]
"사진은 사실적 재현과 정확한 정보, 신속한 소통의 조건을 확보할 수 있는 매체, 즉 근대화의 수사로 ‘미래의 땅’과 결합했다. 새로운 행정체(개척사)와 새로운 매체(사진술)의 결속이야말로 변방의 식민지를 ‘미래의 땅’으로 전시, 홍보, 소비하는 추동력이었다."(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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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삶은 흐른다
로랑스 드빌레르 지음, 이주영 옮김 / FIKA(피카)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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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해브 선장을 위한 변론

- 모든 삶은 흐른다


: 삶의 지표가 필요한 당신에게 바다가 건네는 말

로랑스 드빌레르 지음 | 이주영 옮김 | [FIKA] | (2023)

 



모든 삶은 흐른다를 읽다보니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모비 딕을 언급한 글 한 편을 만났다. 바로 이전 글(‘깃발’)에서 저자는 이상주의자 돈키호테에 대해 이야기했다. 돈키호테가 결투하려던 풍차를 병든 시스템, 타락한 사제, 관료를 의미’(214)한다고 말이다. 이 관점에서 볼 때, ‘풍차에 맞서는 돈키호테를 단순히 무모한 이상주의자로만 치부할 수 있을까. 그러면 모비 딕을 이야기하는 글(‘모비 딕’)에서도 에이해브 선장을 19세기 버전의 돈키호테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19세기의 돈키호테, 에이해브 선장은 모비 딕에서 자신의 한쪽 다리를 물어 뜯어간 모비 딕에 대한 편집광적인 복수심에 불타 파멸하는 인물로 그려졌다. 증오의 감정은 불길하면서도 거대한 흰 고래를 지구 끝까지 추적하게 만드는 강력한 원동력이었다. 선과 악의 이분법적인 도식을 벗어나 생각해보면, 이런 질문을 던져볼 수 있겠다. 고래에 대한 에이해브 선장의 복수심을 단지 광기로만 치부할 수 있을까? 어쩌면 모비 딕은 에이해브의 다리를 앗아가버려 한 개인의 삶을 송두리째 뒤바꿔버린, 사회의 부조리나 악습 같은 것은 아니었을까? 나아가 좀 더 구체적인 맥락에서, 흰 색으로 상징되는 순수성에 대한 집착으로 볼 수 있다면? 이를 거대한 서구 백인 중심의 공고한 세계 질서와 병들어버린 관습으로 볼 수는 없을까? 여러 가지 생각들이 가지를 뻗으며 여러 모습을 드러낸다. 소설 속 배경을 우리 사회와 병치시켜 보면, 에이해브 선장의 분노는 부패한 기득권이 구축해놓은 질서에 표출해내는 정당한 분노는 아닐까 싶은 것이다. 비록 에이해브 개인으로서는 실패하지만 말이다.


 

인류 역사와 문화의 맥락에서, ‘순수성에 대한 욕망이 집착이 될 때 파멸에 이르기도 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허구적 개념인 인종순수성을 잣대로 내세워 이를 지키고자 했을 때, 인류가 겪어야 했던 비극은 이미 잘 알려진 바다. 나치에 의한 유대인 학살, 장애인 및 성소수자 학살, 백인의 순수한 혈통을 지키기 위한 우생학의 유행과 그 결과 파괴된 개개인의 삶을 떠올려 볼 수 있다. 또 이념적인 순수성에 대한 집착이 세계 곳곳에서 자행된 대량학살을 불러온 역사를 통해서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우선 에이해브 선장을 보다 보편적인 관점에서 검토해볼 수 있다. 그를 자신의 생각만을 따르고 복종하는 작은 집단을 유지(‘member Yuji’)하기 위해 사회 전체를 위험에 빠뜨리는 지도자로 생각해볼 수 있다. 이 상황은 모비 딕을 추적하여 복수하겠다는 그의 일관된 행동과 복수심이 초래한 결과에서 확인가능하다. 물론 모비 딕을 어떻게 보느냐는 독자에 달려 있다. 모비 딕을 인간 사회/시스템의 거대한 부조리라고 해보자. 고착된 부조리함 속에서 개인이 희생되었다면, 홀로 이 모순에 맞서는 일은 부질없어 보인다. 바위에 날달걀 던지기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저자는 에이해브가 표출하는 복수심이 분노에서 온다고 보았다. “부당한 일을 당해 억울할 때, 누군가에게 자신의 것을 빼앗겼다고 확신할 때, 인정을 받지 못하거나 감사의 표현 혹은 답례를 제대로 받지 못할 때 분노가 생긴다.”(219)라고 말이다. 저자는 에이해브 선장이 바로 이 분노를 상징한다고 본 듯하다. 그럴듯하지 않은가?


 

저자는 이제 모비 딕에 눈길을 준다. 그는 모비 딕을 에이해브 선장이 당한 피해와 잔인한 운명’(220)이라고 해석했다. 에이해브는 이 운명에 맞서 싸우고자 했다는 것이다. 모비 딕에 부정적, 혹은 불길한 상징성을 부여했던 나의 해석과 다르지만, ‘가혹한 현실과 운명을 상징한다고 본 저자의 해석도 천천히 음미해볼 수 있는 설득력 있는 해석이라고 본다. 이런 맥락에서 더 나아가자면, 모비 딕으로 상징되는 거대한 모순, 혹은 악이라 여겨지는 부조리함과 맞서 싸울 때, 나 역시 일종의 괴물이 되어갈 수 있는 위험성도 생각해봄직하다. 어느 쪽이든 두 존재가 격렬히 대립하고 충돌할 때, 서로가 파멸적인 결과로 치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에이해브의 분노는 인간적인 한계라는 막다른 길을 만나기도 할 테다. 저자는 이 시점에서 한 발 물러나 자신의 분노를 다스릴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흰 고래는 놔주고 상처를 치료해야 한다. 세상은 우리가 바라는 대로 돌아가지 않고, 따뜻하지도 포근하지도 않다. 바다에는 숱하게 많은 악마와 고래가 지나간다. 분노가 악마와 고래를 물리치지는 못한다.”(223)


 

한 발 물러나 자신의 분노를 들여다볼 때, 우리가 무엇을 쫓고 있는지 자문해볼 수 있겠다. 우리가 쫓는 대상에 대한 저자의 해석도 흥미롭다.

 


모비 딕은 손에 넣기 힘든 무엇인가를 쫓는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열렬하고 간절히 원한다. 그 모든 것은 흰 고래로 상징될 수 있다. 흰 고래는 복수의 대상뿐 아니라 마음속 깊은 곳에 간직된 알 수 없는 오래된 욕망이 될 수도 있다.”(224)

 


에이해브 선장은 분명 강렬한 욕망을 지닌 존재였다. 그만큼 그에게는 커다란 결핍이 상처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에게 아무런 욕망이 없다면, 선장이 말한 대로 모든 것은 무의미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사는 땅은 거대한 제로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225)


 

에이해브 선장은 지구 끝까지 추적해서라도 모비딕을 파괴하고자 했다. 지구 위의 바다에서 완전히 제거하려던 것이다. 달리 말해 모비 딕은 그 자체로 에이해브에게 살아가는 의미였던 셈이다. 다만 저자는 우리의 눈으로 에이해브가 품은 삶의 의미를 섣불리 평가하거나 재단하지 말라는 메시지도 주는 듯하다. 선장의 가슴 깊은 곳에 이 욕망이 없었더라면, ‘모든 것이 무의미해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에이해브 선장의 분노와 증오를 정당한 열정이라 부를 수는 없을 것 같다. 대신 분노라는, 이 수수께끼의 정체를 밝히려는 열망으로 터질듯 한 감정의 원인을 쫓아 에이해브는 자신을 던져 넣었다. 광기어린 추적이 무모해보이긴 하지만, 개인으로서의 에이해브 선장은 자신의 운명에 정면으로 맞섰다고 볼 수 있다. 분노와 증오의 원인을 쫓아 이 수수께끼를 밝히는 것은 결국 에이해브 자신의 몫이었다. 물론 한 배에 탄 선원들의 생명을 담보로, 집단 전체를 위험에 빠뜨린 무모한 행위는 비판받을 여지가 많긴 하지만. 어쩌면 모비 딕을 떠받치는 이런 비극적인 구도는 허먼 멜빌이 셰익스피어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은 부분이 아닌가 싶다. 비극은 문명의 오랜 전통이기도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시대를 떠나 인간의 실존적인 의미를 보여주는 세련된 장치로 볼 수도 있겠다. 많은 비극 작품에서 삶의 의미를 밝히는 일이 결국 우리 자신의 몫이라는 것을 일깨워주곤 한다.


 

결국 저자 로랑스 드빌레르는 광막하고 망망한 인생의 바다에서 각자 자신의 성배를 추구해보라고 제안하는 듯하다.

 


우리가 마음속으로 끈질기게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 수수께끼를 밝히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우리가 뒤쫓는 흰 고래가 무엇인지 아는 것도 우리가 해야 한다. 이렇게 보면 모비 딕은 성배와 같다. 어마어마하고 귀한 성배.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이름은 붙이기 힘들어도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욕망하는 것이다.”(225)


 

처음 모비 딕을 읽었을 때를 기억해본다. 내게 모비 딕은 불길함, 사악함의 총체였다. 그리고 흰 고래를 쫓는 에이해브 선장은 이기적이고 편집광적인 미치광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모든 존재가 애초에 사악함이라는 특성 혹은 지위를 타고나는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에이해브 선장 역시 처음부터 미치광이 같은 존재는 아니었을 것 같다. 이렇게 생각해본 이유는,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가 되어가는존재인 까닭이다. 모비 딕 역시 인간적 기준에 불과한 을 초월한 그 무엇인지 모른다. 물론 저자는 모비 딕을 우리 안의 욕망으로 읽었다. 내가 처음에 에이해브 선장을 의심과 비난의 눈으로 보았다면, 이제 다시 그와 만나 들여다보니 또 다른 내면을 가진 인간으로 볼 수도 있겠다 싶다.

 


저자 로랑스 드빌레르의 모든 삶은 흐른다를 읽으며 망망대해 같은 감상의 바다를 잠시 표류하다 돌아온 느낌이다. 문학작품을 읽으며 느끼는 점은, 인간이란 존재가 무척이나 복잡하고 모순적이라는 것이다. 내 안의 결핍을 확인하고, 나의 욕망을 발견하는 일, 그리고 이 욕망을 충족하거나 이 욕망이 불러일으킨 문제를 해결하는 일이야말로 보편적인 인간의 관심사가 아닌가. 이렇게 보면 에이해브 선장은 우리 안의 길들여진 선함을 표상하는 항해사 스타벅과 대척점에 있다. 그러니 에이해브 선장이야말로 우리 모두가 지닌 한 단면을 선명하게 드러내 보여주는 매력적인 캐릭터임이 분명하다. 저자의 생각을 읽고 나니, 우리는 이렇게 자문해볼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우리는, 혹은 나는 무엇을 쫓고 있는가?







[책 속으로]



[1] "바다는 자유의 의미를 잘 보여주는 존재다. 우리는 어디에 갇히거나 무엇에 방해받지 않을 때 ‘자유롭다’고 한다. 이처럼 바다는 우리에게 삶에서 억지로 해야 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해준다. 늘 준비해서 대답을 할 필요가 없고, 아무 계산 없이 도와야 할 의무도 없고, 남의 말을 조용히 경청할 의무도 없다. 바다와 선원들은 따뜻하고 건강한 ‘이기주의’가 있어야 독립심을 유지할 수 있다고 말한다."(200)

[2] "그리스어에서 ‘자유’는 ‘개성’을 뜻한다. 개성은 분류되는 것에 저항한다. (...) ‘나를 나답게 해주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남들과 다른 존재로 살아간다. 그러니 남들의 기대에 맞춰 살 필요가 없다. 다른 사람들의 기대대로 움직이지 말고, 가택 연금에 묶여 있는 삶은 거부하자."(201)

[3] "영불해협 출신의 스페인 귀족 돈키호테는 풍차들과 결투하려고 한다. (...) 이상주의자인 돈키호테는 언제나 타협과 인정을 거부하고 비장할 정도의 고집을 보여준다. 결국 풍차들과의 결투에서 진만 빼다가 패한다. 여기에서 풍차는 병든 시스템, 타락한 사제, 관료를 의미한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풍차와 싸워서 이길 수는 없다. 인간은 혼자서 정의롭고 순수한 세상을 새롭게 만들 수 없다."(214)

[4] "복수심은 어디에서 올까? 분노다. 부당한 일을 당해 억울할 때, 누군가에게 자신의 것을 빼앗겼다고 확신할 때, 인정을 받지 못하거나 감사의 표현 혹은 답례를 제대로 받지 못할 때 분노가 생긴다."(219)

[5] "분노하는 사람들은 혼란을 원하지 않는다. 원하는 것은 질서다. 원래의 질서로 되돌려놓겠다는 마음에서 분노는 시작된다. 에이해브 선장은 이 같은 분노를 상징한다. 그리고 모비 딕은 그가 당한 피해와 잔인한 운명이다. 선장은 이 운명에 맞서 싸우고 싶어 한다."(220)

[6] "분노에 휘감겼을 때는 결정을 하지 말고 분노부터 어떻게 든 달래는 것이 좋다. (...) 흰 고래는 놔주고 상처를 치료해야 하다. 세상은 우리가 바라는 대로 돌아가지 않고, 따뜻하지도 포근하지도 않다. 바다에는 숱하게 많은 악마와 고래가 지나간다. 분노가 악마와 고래를 물리치지는 못한다."(223)

[7] "《모비 딕》은 손에 넣기 힘든 무엇인가를 쫓는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열렬하고 간절히 원한다. 그 모든 것은 흰 고래로 상징될 수 있다. 흰 고래는 복수의 대상뿐 아니라 마음속 깊은 곳에 간직된 알 수 없는 오래된 욕망이 될 수도 있다."(224)

[8] "잘못된 것을 알아도 그대로 두고 진실보다 거짓을 선택하면 악순환만 일어난다. 그러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더욱 어두워진다. 여기에서 두려움, 대화 단절, 공격성, 원한이 자란다. 유혹하는 사람, 거짓 슬로건을 내세우는 사람, 거짓말을 계속하는 사람들이 상대방을 의존 상태로 만드는 과정이다. 여기에 걸려들면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없고, 혼란 속에서 살게 된다."(231)

[9] "거짓은 전염성이 강하다. 진실보다 여행하기를 좋아하는 거짓은 반복적으로 퍼져가며 의식과 말 속으로 스며든다. 그래서 우리는 남의 생각을 자신의 생각인 양 말하고, 시류에 맞는 것을 쉽게 믿는다. 그 과정에서 정신과 의지는 오염되고 썩는다.
그렇다면 거짓은 어떻게 알아볼까? 확신할수록 거짓일 가능성이 높다. 거짓을 말하는 사람일수록 의심하지 않고 완고하며, 의문을 품지 않고 다 아는 체하고, 언제나 이해하는 척한다."(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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