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업사회]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무업 사회 - 일할 수 없는 청년들의 미래
구도 게이.니시다 료스케 지음, 곽유나.오오쿠사 미노루 옮김 / 펜타그램 / 2015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무업사회 無業社會>

구도 게이 & 니시다 료스케 지음 | 곽유나, 오오쿠사 미노루 옮김

 

 

 

한 회사의 여러 자리를 지원한 것을 포함하여 200군데 넘는 곳에 지원했으나 면접은 10군데 정도 봄. 대부분은 연락도 없이 낙방. 겨우 한 군데 취직하여 1년 남짓 일하고 관둔 후 1년 정도 히키코모리 생활 경험 있음.

 

   눈치 챈 분도 계시겠지만 이 보잘것 없는 구직 이력은 바로 나의 것이다. 그렇다. 한 때 나는 언론에서 이야기하는 은둔형 인사였다. 심각한 외톨이는 아니었으나 친구를 보는 것마저 경제적으로 심리적으로 부담으로 다가왔던 적이 있다. 따라서 히키코모리, 니트족, 은둔형 외톨이라고 불리우는 사람들이 일상에서 어떤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버텨나가고 있는지, 그 느낌이 무엇인지 나는 어느 정도 알고있다. <무업사회>를 읽으며 나는 나의 가까운 과거의 모습들을 떠올리면서 나의 모습들을 또한 그대로 발견할 수 있었다. 이 책에 나오는 예는 어느 정도 나의 이야기이기도 했으며, 따라서 내 경험이 곧 나만의 것이 아님을 어느 정도 확신할 수 있었다.

 

   이 책의 저자는 두 명으로, 청년 취업을 지원하는 소다테아게넷(길러내는 네트워크)를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는 구도 게이와 젊은 사회학자 니시다 료스케이다. 이들은 청년의 취업을 실제적으로 지원하는 현장에서의 경험과 사회학적 접근 방식으로 여러 가지 통계적 자료를 통해 사회에 드러난는 현상들을 이해하고 해석을 시도하고 있다. 한 사람은 현장에서 직접 취업을 하지 못하고 있는 젊은 이들의 모습을 지켜보며 이들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바탕으로 현실적인 문제들을 고민하고 이를 해결해나간다. 또 다른 한 사람은 실제적인 자료를 통해 현상에대한 보편적인 의미를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두 사람은 서로가 아주 적절한 보완 관계를 이루고 있다. 한 사람은 구체적인 사례, 실제로 한 사람 한 사람의 존재에 초점을 맞추며, 통계적인 자료가 가질 수 있는 한계를 보완하며, 다른 한 사람은 보다 거시적인 안목에서 객관화된 시각으로 현상을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저자들은 2010년대의 일본사회가 무업사회라고 규정한다. 이들이 정의하는 무업사회란 누구나 무업 상태가 될 가능성이 높으며, 무업 상태에 처하게 되면 그로부터 빠져나오기가 힘든 사회라고 말한다. 우리 사회 또한 일본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적어도 나의 무식 상태의 경험에 비추어 본다면. 이제는 내가 어렸을 때 접했던 개미와 베짱이의 이야기에 수긍이 가는 사회가 아닌 것이다. 열심히 일하면 안락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다라는 교훈은 이제 그 설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노력하면 그만한 보상이 따르는 사회는 일본이 패전 후 한국 전쟁과 베트남 전쟁을 통해 고도로 성장하던 시기의 이야기라고 저자들은 말한다. 이제는 잃어버린 10, 잃어버린 20이란 말처럼 일본의 장기 침체기로 그 회복을 예측하기도 힘든 상황이다. 우리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경제에대한 강한 회의감과 피해의식이 팽배해있는 것처럼 보인다. 더욱이 신자유주의 경제 가치가 도입되고 전세계적으로 보편화된 이 시점에서는 이러한 무업 상태에대한 책임이 개인에게 있다는 논리로 포장되고 비판없이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하지만 저자는 분명히 이 무업사회의 현상은 사회의 구조적 문제라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미끄럼틀 사회, 도미노 현상과 같이 한 번 추락하면 멈출 수가 없는 상태가 되어 버린 것은 단순히 어느 개인의 게으름에 기인하는 문제가 아니라 보다 큰 전체의 문제, 구조의 문제, 시스템의 문제라는 것이다. 나아가 이런 문제는 사회 구성원들의 핵가족화, 가족해체, 나아가 개개인으로의 원자화 현상과 함께 더욱 사회적으로 고립이 되어버리는 구조에 기인한다.

 

   서경식 교수가 흔히 쓰는 표현대로라면 나는 사회 구조적 문제로 인하여 노동 시장의 외부로 밀려나 유동하는 이들을 새로운 형태의 디아스포라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다. 왜냐하면 이러한 현상은 이미 전 지구적인 현상이기 때문이다. 기업이 주도하는 노동시장 밖으로 밀려난 개인들은 다시 이 노동시장 카르텔에 진입하는 것이 만만치 않으며, 상당수가 결국 사회에서 탈락하게 된다. 곧 이들은 한 사회 내에서 정당한 시민권을 가지고 한 국가의 정당한 국민임에도 보이지 않는 무한 경쟁의 전장(battle field)에서 밀려나 유동하는 인구가 되고 있다. 따라서 이 유동하는  난민들은 새로운 형태의 사회경제적 요인에 기반한 디아스포라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책에서 지적하고 있는 바와 같이 개개인이 직장을 잃고 고립이 되기 쉬운 무업사회는 인간관계마저 파괴한다. 책에 언급된 실제 사례를 보면 상당수가 내가 처한 상황이나 내가 느꼈던 감정들을 공통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특히 일단 취직이 어려워지면 경제적인 사정도 안좋아지게되고, 그러면 결국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 지게 된다. 사실 이런 경우는 부모님을 비롯한 가족이 곁에서 말없이 도와주고 지원해주고 할 수 있는 운이 좋은 경우에만 해당할 것이다. 내가 힘든 상황일 때 곁에서 격려와 실질적인 도움을 줄 가족이 없는 사람들은 당장 길거리로 내몰리게 되는 것이다. 일단 집 밖을 나간다는 것은 차비 및 식비가 필요할 수 있다. 따라서 아주 친한 친구라도 만나는 것이 부담이 될 수 있다. 이것마저 부담이 된다면 결국 한 무업 청년이 머물게 될 곳은 대부분 가정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무업사회>에 등장하는 청년들은 상당 기간을 집에서, 자신의 방에서 고립된 채 시간을 보내고 있었고, 집 밖을 나간다면 주로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낸다고 했다. 나는 나스스로 고립이 되지 않기 위하여 아침마다 헌책방을 다니며 구경하고 앉아서 책을 읽곤 하였다. 그리고 인터넷 서점에서 마련하는 무료 강연회에 나가기도 하면서 나 스스로를 지켜나가도록 노력했던 때가 있었다. 나는 가족들의 지원과 격려가 있었기에 버틸 수 있었던 운이 좋은 경우였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경우 기본적인 인간 관계마저 어긋나게 마련이다. 나아가 자신감을 잃어가고 자신에 대한 가치를 스스로 부정하기도 하는 등 자존감마저 잃기가 쉽다. 결국 장황하게 이야기 했으나 무업사회라는 현상의 기저에는 구조적인 문제가 숨어 있으며 언론과 미디어에서 표명하기도 하듯 게으른 청년들로 치부하고 비난하기 보다 서로를 향한 따뜻한 시선으로 청년들을 품어주는 사회로의 전환이 필요함을 저자들은 이야기하고 있다.      

 

   <무업사회>는 일본 사람에의해 일본 사회의 모습들에 기반하여 지어진 책이지만 우리가 이 책을 들여다 보는 일이 중요한 이유가 있다.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문제들은 일본에서는 우리보다 조금 먼저 경험한 것들이 많이 있다. 곧 일본 사회의 모습을 보면, 가까운 미래의 우리 사회의 모습이 보이기 때문이다. 특히 저자가 일본형 시스템이라고 말하는 일본 사회의 단면들의 특징들은 곧 우리 사회가 많이 닮고 있는 모습이기도 하다. 주로 대기업 위주의 기준이기는 하지만 일본은 신규졸업자의 일괄적인 채용, 종신 고용(평생 직장), 연공서열형 임금(직장 내 호봉) 등의 모습을 최근까지도 유지하였으며, 이는 가까운 과거가 간직하던 우리 사회의 모습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일본형 시스템은 점점 급변하는 세계화의 추세로 요구되는 변화와 충돌이 일어나고 있으며, 기존의 가치들은 이미 아무런 흔적도 없이 사라져가고 새로운 형태의 구조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눈에 띄는 사실은 일본 사회에서 저출산/고령화가 일찍부터 예견되었으나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개혁을 미루어 중요한 기회를 놓쳤다는 점이다. 사실 우리나라도 저출산/고령화 문제는 이미 눈에 띄게 드러나고 있으므로 서둘러서 해결책을 찾아야하는 실정이다.

 

   <무업사회>는 크게 1부와 2부로 나뉘어있는데, 1부는 무업사회의 개념과 현상에대한 고찰을 시작으로 청년 무업자들에 대한 언론과 미디어의 오해를 언급하며 청년 무업자를 지원하는 일의 필요성을 언급한다. 그리고나서 청년 무업자 문제의 구조적 조건과 역사적 측면을 살펴보고 있다. 마지막으로 저자 구도 게이가 설립한 소다테아게넷과 같은 NPO의 역할에 대해 정리하면서 1부를 마무리하고 있다. 청년 취업 지원 프로그램이 고려해야할 사항으로 첫 째, 작은 성공 사례를 만들 어서 사회에 널리 알리는 것이 필요하며, 둘 째, 오로지 현장에서 축적이 가능한 작은 데이터들을 지속적으로 축적해나가야 한다는 점이다. 그러면 이러한 데이터들은 여러 종류의 가치로 변모될 수 있는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에코 시스템을 만들라고 주문하고 있다. 곧 해결하려는 사회적 문제에 대해 기여할 수 있는 환경 조성과 기회를 제공하기 위한 생태계(에코 시스템) 구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가 무엇인지 많은 사람들이 인식하도록 알리는 일의 중요성도 잊지 않는다. 이는 사회의 청년 무업자에 대한 오해를 불식시키고 문제의 본질을 바라보도록 하는데 중요한 일일 것이다. <무업사회> 1부가 대략 이런 이론적이고 원리적인 내용을 여러 통계적인 자료와 함께 담겨 있다면, 2부에서는 일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실제로 히키코모리 생활을 경험해 본 6명의 사연을 통해 구체적으로 들여다 보고 있다.     

 

일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1부에서 저자는 누구나 무업자가 될 수 있다라고 강조하고 있는데 2부에서는 실제로 짧게는 6개월 정도에서 길게는 15년 정도 히키코모리 생활을 한 청년들의 사례가 나온다. 6명의 청년들의 경험으로부터 파악할 수 있는 점은 모두 일하기를 기피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시작할 수 있는 계기와 적절한 기회가 없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내성적이고 예민한 성격인지는 몰라도 인간 관계로부터 상처를 받거나 상당한 부담을 가진 경우가 많았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직장 내에서 경험한 부정적인 대인관계의 기억을 가진 이들이 많다는 것이다. 이는 같이 일하는 사람들 또한 중요한 요소가 되고 있다는 말이다. 동료, 상사, 후배 등에 대한 작은 배려가 중요함을 깨닫게 해준다. 아울러 청년 무업자들에게는 다시 일할 수 있게 하는 동기가 되기도 하였다. 나아가 잡 트레이닝 프로그램을 통해 손님 뿐 아니라 동료에 대한 배려를 현장에서 배워나가는 과정에 주목하게 된다. 이러한 부분은 좋은 취지를 가지고 만들어진 취업 서비스 프로그램이 명목상의 무미 건조한 지원 사항을 열거하는 일보다도 인간으로서 심리적인 고민과 일할 수 있도록 의미를 찾아주는 일이 필요하다는 점을 말해주고 있다.

 

   청년 무업자들은 자신들이 존중받고 싶어하는 욕구를 잘 말해주고 있다. 신뢰를 받는 다는 것의 기쁨, 감사와 기쁨을 느끼는 경험들이 직장에서 일한다는 것에 대해 긍정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잡 트레이닝 프로그램을 통해 다양한 일을 경험하며 작은 성취를 쌓아가고 자신감을 얻는 것이 중요하다. 개인적으로 나자신은 똑똑하지 못한 사람을 본적이 없다. 다만 상당수는 심리적인 원인에 의해 성취를 해내는 양상이 사람마다 달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일에대한 지식이나 경험도 중요하지만 그만큼 중요한 요소는 사람의 의식이라고 할 수 있을까. 혹은 심리적 요인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기계가 아닌 사람으로서 어떤 대상에 대한 태도나 자세는 분명히 이러한 내적 요인에도 크게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사례에 등장하는 6명의 청년들은 자신감을 쌓아나가는 과정은 매우 중요하며 이는 자존감을 되찾는 과정이기도 함을 말해준다. 자신에 대한 긍정이 곧 삶에 대한 용기를 얻는 과정인 것이다. 더욱 주목해보게 되는 것은 상당수의 히키코모리를 경험해본 사람들이 일하고 싶다라는 열망보다도 현재의 상태로부터 변하고 싶다라는 심정이 더 본질적이고 강하다는 점이었다. 어느 청년이 내가 사는 이유를 느낄 수 있게 되었다.라고 말한 대목에서는 일한다는 것의 근본적인 의미를 깨닫게 해주었다. 그것은 바로 살아가는 이유. 좀더 극단적인 사례이기는 하지만 아우슈비츠 집단 수용소에서 빅터 프랭클 박사가 경험했던 비참하고 비인간적인 상황에서 사람들이 이를 견디게 해준 것은 살아야할 의미였다고 말하기도 했다. 사람은 분명 기계가 아니므로 혹은 기계처럼 느껴질 때가 있음에도 사람은 그 이상의 창발적인 생명현상을 가지는 존재이다. 이 부분은 청년 취업 서비스 혹은 프로그램을 구상할 때 고려해야할 가장 본질적이고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책의 마지막 부분에는 커리어 상담과 교육을 주로 관여하고 있는 마츠오 사아키 교수와 함께 일 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대해 대담을 하고 있다. 여기서 내가 주목하게 되는 두 가지는 자기 자신에 대해 알아야 한다는 것과 부모의 경험에 대해 서로 이야기해보는 것이었다. 우리는 각자 자기 자신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고 흔히 생각하지만, 6명의 청년들을 통해 보아도 그리고 나의 개인적인 경험들을 돌이켜보아도 나 자신을 제대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지 않다는 점을 주목하게 된다. 일과 관련하여 나 자신의 진실한 욕구가 무엇인지 파악하는 일이 중요하겠다.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를 알아야한다는 말이다. 그만큼 자신에대해 안다는 것은 아마도 인류가 이성적으로 생각이라는 것을 할 수 있게 되면서부터 쭉 지속되고있는 가장 어려운 일인지도 모른다. 한편 마츠오 교수는 청년들이 부모와 함께 대화하면서 부모의 청년 시절의 경험과 커리어 결정을 어떻게 했는지 자녀와 이야기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부분은 아주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한다. 다만 부모로부터 이런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유용한 방법이 아니다. 6명의 청년들로부터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히키코모리 생활을 하게 되면 사실상 가장 가까운 친구들과도 어울리는 일에 부담을 느끼게되고 결국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나아가 자신의 방에서 보내게 된다는 점이다. 결국 친구로부터도 고립되는 경우가 흔하게 된다. 이럴때 부모는 가장 가까운 조력자이자 멘토가 될 수 있는데, 이런 여건마저 없는 청년들에게는 (특히 핵가족화, 가족의 해체를 많이 겪는 현대 사회에서는) 이러한 기회마저 얻기 힘들므로 이는 청년 취업 프로그램을 준비할 때 고려해봐야할 중요한 사항이라고 생각한다.

 

   저자들은 청년들이 다시 일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곧 하나의 납세자로서 의무를 다하며 사회를 지탱하고, 소비자로서 경제를 움직이며 지역사회를 짊어진 청년이 우리 사회에 한 사람 더 늘었다는 것이라고 그 의미를 되짚고 있다. 나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납세자로서 사회 구성원이 한 사람 더 늘었다는 것 이상의 가치가 청년 취업 프로그램에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人間)이라는 개념적인 단어가 의미하듯, 사람은 고립된 존재가 아니다.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를 암시하는 이 단어에는 사회학적 의미에서의 인간이라는 의미가 더욱 강하게 내포되어 있다. 한 청년이 사회의 한 몫을 담당한다는 것은 곧 이들이 맺는 사회 구성원들에게 (작게는 가족들에게) 보다 중요하고 큰 사회적 파급효과를 지닐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중요성에 주목하게된다. 나의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서도 나는 스스로 고립된 상황으로부터 벗어나기위해 노력을 한 셈인데, 우선 나는 나자신을 비하하지 않고 비난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이러한 자세를 견지했기에 고립된 기간 동안 나 자신에대해 존중하는 법을 배워나갈 수 있었던 것 같다. 나는 <무업사회>를 읽으면서 나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을 돌이켜볼 수 있었으며, 내가 혼자가 아니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일을 한다는 것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으며, 나아가 삶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볼 기회를 가졌던 것 같다.

  

   끝으로 내가 고립된 생활을 할 때 큰 힘이되었던 책의 한 구절을 인용하며 마무리 하겠다.

 

   어떤 사물의 속성이 고귀할수록 그것이 성공할 가능성이 희박해진다. 여기 있는 그대들 보다 높은 인간들이여, 그대들은 모두 실패한 자들이 아닌가?

   용기를 내라. 그게 어쨌단 말인가! 아직 얼마나 많은 일이 가능한가! 사람들이 웃지 않을 수 없도록 그대 자신을 비웃는 법을 배워라!

   그대들이 실패했고 아직 반밖에 성공하지 못했더라도 그게 뭐가 이상한가. 그대들 반쯤 부서진 자들이여! 그대들 속에서 서로 밀치며 부딪치지 않는가 인간의 미래가!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펭귄 클래식, 442)

 

 

 

(첨언)

<무업사회>에는 꽤 많은 자료들이 그래프의 형태로 나오고 있는데 불편한 점이 한 가지 있었다. 예를 들면 연령대별로 데이터를 표시한 자료에서 연령대의 구별이 흑백의 명암으로만 나와있어서 여러 대상들을 한 눈에 쉽게 알아보기 힘들었다. 명암 뿐 아니라 무늬 같은 것을 추가하여 눈으로 보다 쉽게 확인이 가능하도록 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한편 이 책은 주로 청년 무업자(주로 15-39)를 대상으로 한정하고 있는데, 아마도 저자가 청년 취업 지원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기에 저자가 경험한 사항들을 대상으로 하다보니 주제가 한정된 부분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무업사회를 언급하면서 청년 무업자의 증가, 장기화로인한 이들 세대의 고령화는 곧 다가올 것이다. 따라서 연령을 한정하는 일은 문제의 본질을 간과하고 있다라고 저자들은 인정하고 언급하면서도 이부분은 아쉬움이 남는다. 무업 사회의 본질적은 특징 중의 하나가 누구나 무업상태가 될 수 있다라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장년층, 노년층의 무업 상황도 다루었으면 더 온전한 보고서가 좋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아니면 책의 제목이 청년 무업 사회라 되어야하지 않았을까. 물론 연령대를 폭넓게 고려했다면 아마도 세대별로 조금은 다른 방식으로 문제에 접근해야 했을 것이고 그렇다면 책의 분량이 많이 늘어났을 것이다.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안나 카레니나> 느릿 느릿 읽기 [2]

 

 

 

 

 

 

 

 

 

 

 

 

   청년 레빈은 여전히 키티에게 청혼을 주저하고 있다. 1부에 보면 레빈이 키티를 만나기위해 스케이트장에 가는 장면이 있다.

   네시에 레빈은 자신의 심장이 뛰는 것을 느끼면서 동물원 입구에서 세낸 썰매를 세우고 스케이트장으로 가는 좁은 길을 따라 걸어갔다. 입구에서 쉬체르바쓰키네의 사륜 여행마차를 보았기 때문에 그곳에 가면 틀림없이 그녀를 만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 그는 자신의 마음을 사로잡은 환희와 두려움으로 그녀가 거기 있음을 알아챘던 것이다. 그녀는 한 부인과 이야기를 하면서 스케이트장 건너편 끝에 서 있었다. 그녀의 복장이나 자세에서 특별히 눈에 띄는 점은 없어 보였다. 그러나 레빈에게는 이러한 군중 속에서 그녀를 찾아내는 것이 쐐기풀 속에서 장미를 찾아내는 것처럼 손쉬웠다. 모든 것이 그녀로 인해 빛나고 있었다. 그녀는 주위의 온갖 것을 환하게 밝히는 미소와 같았다. (1 62-63)

   흔히 내사람을 처음 보았을 때 그 사람으로부터 같은 아우라가 퍼져나온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130년도 전에 톨스토이는 우리가 이야기하듯 그런 빛이나는 순간을 이야기하고 있는 점이 흥미롭다. 키티의 사촌오빠가 레빈을 알아보고 러시아 제일의 스케이터!라고 친근하게 부르는 대목을 통해 레빈은 스케이트를 매우 잘 타는 것으로 나온다.

   역시나 오늘은 처음부터 삼천포로 빠지자면, 나는 이 대목을 읽고 문득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을 떠올렸다. 크리스마스 즈음 기숙학교에서 쫒겨난 주인공 홀든 콜필드는 여자 친구 샐리를 만나기전 뉴욕 맨하탄을 배회하면서 스케이트장에 이르는 장면이 나왔던 것이 기억났기 때문이다. 물론 이 두 사건 사이에 어떠한 연관성도 찾아낼 길은 없지만, <샐린저 평전>(케니스 슬라웬스키 지음)을 보면 꽤 젊은 나이에 단편 소설로 데뷔한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는 1941 12월 일본군이 진주만을 폭격한 이후 군에 입대하게 되는데, 군 복무 중(1943년 즈음으로 보인다) 도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의 책을 열심히 읽어댔다(104)라고 적힌 대목이 보인다. 샐린저는 실제로 맨하탄에서 학창시절을 보냈고, 실제로도 <호밀밭의 파수꾼>에서 홀든 콜필드가 나도 어렸을 때 똑같은 장소에서 스케이트 타는 걸 좋아했기 때문이다.라고 혼자 생각하는 대목이 나온다. 나는 이 부분에서 자연스럽게 혹은 무의식 중에 <안나 카레니나>를 읽으며 레빈이 스케이트장에서 키티를 만나는 장면이 <호밀밭의 파수꾼>과 연결되었을 뿐이다.

  

   딸의 운명은 부모가 결정지어주어야 한다는 프랑스의 관습은 배척당하고 비난받았다. 딸에게 완전한 자유를 줘야 한다는 영국의 관습도 역시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러시아 사회에서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중매쟁이를 고용한다는 러시아식 관습은 뭔가 상스러운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남들처럼 부인 자신도 그것을 비웃었다. 그러나 그렇다면 어떻게 시집을 가야 하고 시집을 보내야 하는가는 아무도 몰랐다. 부인이 이 문제에 대해 상의했던 사람들은 모두 부인에게 똑같은 말을 했다. 생각해봐요, 이제는 그 낡은 관십을 버려야 할 때예요. 결혼하는 건 젊은 사람들이지 부모가 아니잖아요. 그렇다면 당사자들이 알아서 하게끔 내버려둬야 해요. 딸을 가지지 않은 사람들은 그렇게 얘기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부인으로서는 딸이 사내들을 가까이하면 사랑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을, 그것도 결혼할 의사가 없는 사내나 혹은 남편감이 되지 못하는 사내를 연모할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95-6)

   결혼 적령기가 된 키티의 어머니인 부인의 입장에서 톨스토이가 써내려나간 이 대목을 보면 작가가 인식하는 당시 결혼 문화의 단면을 엿볼 수 있다. 톨스토이의 표현에 의하면 프랑스의 결혼은 과거 우리처럼 부모가 정해준 결혼이 대세였을 듯하고, 영국은 자유연애가 사회적으로 인정되는 분위기였던 것 같다. 반면 러시아의 결혼문화는 회원제로 운영되는 결혼정보회사를 통해 배우자를 선택하기도하는(물론 자유연애와 부모의 주선에의한 결혼도 혼재해있지만) 현재 우리의 모습과도 닮은 구석이 있다. 아울러 러시아의 문화는 특히나 프랑스 문화에 큰 영향을 받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교계 모임에서 러시아어 대신 프랑스어를 쓰기도하고, 하인이 있는 자리에서 비밀스러운 이야기나 껄끄러운 이야기를 할 때 프랑스어를 쓰는 장면이 계속 등장하고 있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롤리타>의 작가)가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연애소설로 꼽은 이 <안나 카레니나>에서는 특정 한 사람이 주요 인물이 아니고 바로 두 남자와 두 여자의 사랑과 운명을 대립시키고 있다. 한 쪽은 유부녀인 안나 카레니나와 사랑을 하게되는 브론스키 백작(알렉세이 키릴로비치 브론스키)이 있고, 그 대척점에 키티(카테리나 알렉산드로브나)와 레빈(콘스탄틴 드리트리치 레빈)이 있다. 따라서 이 두 커플이 조우하고 고백을 하는 시점이 비슷하게 나오는 것도 흥미롭다. 물론 레빈이 키티에게 처음 고백하고 청혼을 했을 때 처음에는 키티에게 거절당하게 되는데, 반면 브론스키와 안나는 기차역에서 서로 첫 눈에 반하게 된다. 이 두 커플의 시작은 이후 이들이 맞게되는 운명과 반대로 레빈은 청혼을 거절당하는 쓰라림으로 시작하며, 브론스키는 무난하고 좋은 분위기로 두 사람사이의 관계가 시작하고 있다.

   여기서 주목하게 되는 부분은 브론스키와 안나가 처음 만나는 곳이 기차역이라는 것, 그리고 이들이 처음 만난 날 기차역에서 한 남자가 열차에 치여 죽는 사건을 맞게 되는데, 안나가 불길한 징조예요.라고 하는 말은 아무 의미없이 지나가는 말이 아니었다. 말이 씨가 된다고 기차역은 불행한 일이 벌어지고, 불행을 잉태하는 장소로서 톨스토이가 사용하였다. 흥미로운 것은 톨스토이가 말년에 집을 나와서 돌아다니다가 영면한 곳도 어느 기차역이었다는 점이다. 톨스토이에게 있어 기차역은 인생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지도 모르겠다. 삶과 죽음을 기억하라는 톨스토이 말년의 잠언집을 읽다보면 인생이 갖는 은유적 의미(지나가는 곳으로서의 인생)또한 떠올리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톨스토이에게는 기차역과 부합하는 인생의 의미가 아닐까한다.

  

   여기서 잠깐 안나 카레니나와 사랑에 빠지는 인물인 브론스키 백작에대해 간단히 정리해보자면, 브론스키는 좋은 집안 배경 출신이며,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의 손에서 성장하는데, 초반에는 마마보이처럼 보이는 착한 아들로서 등장한다. 그러나 어머니와의 관계가 썩 좋지는 않으며, 그림을 잘 그리는 것으로 나온다. 브론스키는 유부녀인 안나 카레니나와 첫 눈에 반해 두려움을 무릅쓰고 열정적인 사랑을향해 나아가지만 사교계의 냉담한 시선과 사회의 관습에 고통을 받는다. 좋은 집안에 학식은 있지만 20세 연상인 남자(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 카레닌)와 결혼 후 무덤덤한 결혼생활을 하던 안나는 브론스키를 만나 새로운 삶에 모든 것을 걸고 뛰어든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촛불에 달려드는 나방처럼 사랑하는 아들마저도 자신이 생각하는 가치에 있어서 우위를 점하지는 못한 듯하다. 이런 사건을 내 주변에서 마주하게 된다면 언제나 타인의 행동을 비난하기는 쉬운일이다. 하지만 이런 상황이 내게도 일어났다면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냉정하고 합리적으로 문제를 해결해나갈 수 있을까? 그리고 나는 타인을 도덕적으로 비난할 수 있을까? 안나의 남편인 카레닌의 입장이라면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타인에 대한 도덕적 비난을 퍼부으며 복수와 응징의 길을 선택할 것인지, 아니면 다른 합리적 대안을 선택할 수 있을것인지 확신이 서질 않는다. 이런 문제에 대해 당시( 130여년 전)에는 지금보다도 훨씬 억압적이고 배타적인 사회의 분문율에 톨스토이는 소설에서 질문을 던지고 편견에 도전하고 있다. 안나는 단순히 자신의 쾌락을 쫒는 여자일까? 그리고 어쩌면 쾌락이라는 단어가 주는 부정적인 이미지와는 달리 쾌락을 구하는 것이 과연 잘못된 일일까하는 의문을 던져볼 수 있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우리가 갖고있는 도덕적인 기준이야말로 모호하고 자의적이며 상대적인 것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도덕적인 문제에 있어 정답이란 없는 것 같다. 앞으로도 계속 이러한 문제는 생각해볼 일이다.  

 

"인생의 온갖 변화와 매력과 아름다움은 모두 빛과 그림자로 이루어져 있는 거니까."
(91면)

"All the variety, all the charm, all the beauty of life are made up of light and shade." (펭귄 북스, 42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안나 카레니나> 느릿 느릿 읽기 [1]

 

 

 

 

 

 

 

 

 

 

   앞으로 몇 달이 걸릴지 모르겠다. 하지만 아주 천천히 읽어 나가면서 밑줄 그은 부분을 옮겨 적고 삼천포로 빠지기도 하고 그 때 그 때 나에게 든 생각들을 옮겨 놓는 지극히 개인적인 독서 일기가 될 것 같다. 이 독서 일기는 박형규 교수가 번역한 문학 동네의 <안나 카레니나> 3부작에 기반하여 읽어 나갈 것이다. 대학을 졸업한지도 한 참 지난 내가 아마도 제작년 부터 문학 책을 들여다보다가 결국 이름만 들어왔던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를 만나게 되었다. 책의 뒤 편에 나온 유명 소설가들의 <안나 카레니나>에대한 짦막한 서평만이 아니더라도 가깝게는 <책은 도끼다>를 쓴 박웅현 선생이 <안나 카레니나>를 읽으면 최소한 길을 잃지는 않을거에요.라고 한 언급이 이 책에 대해 더욱 흥미를 갖도록 했다. 번역본으로 해설을 제외하고 순수하게 소설 지면으로 1560페이지에 달하는 이 책을 나는 어떻게 읽어 나갈 것인가가 처음 이 책 세 권을 앞에 두고 들었던 생각이었다. 그래도 태어나서 한 번은 남들이 고전이라고 하는 책을 읽어볼 필요는 있지 않을까하는 막연한 사명감에 읽기 시작한 것이 작년 12월 초 였는데, 느릿 느릿(그려나 꽤 부지런히) 읽어나간 지 2달 남짓만에 다 읽어내어 후련하다. 나는 여기에서 나아가 천천히 읽으며 딴 생각으로 멈추기도 하고 메모도 해 둔 부분을 서재에 기록해두고 싶다. 그렇게 해서 나만의 <안나 카레니나> 다시 읽기 프로젝트를 생각해낸 것이고, 이렇게 하면 또 한 번 인상깊었던 부분들, 삼천포로 빠졌던 기억들을 다시금 그러 모을 수 있을 것같다.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고전을 통해 정답을 찾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내 삶에 질문을 던지는 일이었던 것 같다. 자 그럼 시작해보자!

 

 

 

   원수 갚는 것은 내가 할 일이니 내가 갚아주겠다.

   소설은 성서에 나온 이 알쏭달쏭한 표현으로 시작한다. 책의 뒷 표지에 언급된 것처럼 미국 작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안나 카레니나>세계문학사상 가장 위대한 연애소설의 하나라고 표현했는데, 이 성서의 표현은 처음 읽을 때 무심코 지나쳤던 문구이다. 지금 다시 책을 펼치고 눈에 들어온 이 문구를 다시 생각해보면 비극적인 소설의 결말과 관계된, 그리고 이 소설을 관통하는 삶과 신앙의 문제와 관련한 문구가 아닐까 하는 인상을 받았다. 당연히 작가가 아무런 의도 없이 소설의 첫 페이지를 이 문구로 시작하진 않았을 것이다. 다시 소설을 읽으며 생각해볼만한 꺼리가 생겼다. 처음 보는 것처럼 생소하면서도 무언가 중요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은 분명하니까.

   소설의 첫 부분은 소설의 성패를 좌우하는 결정적인 영역으로서 모든 소설가를 비롯한 작가들이 공을 들여야한다는 데에 이견이 없을 것이다.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1 11) 또한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로리타>와 마찬가지로 인상적인 소설의 첫 문장으로 빼놓지 않고 언급되는 문장이기도 하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고만고만하지만 무릇 불행한 가정은 나름나름으로 불행하다.

우리글로 표현한 이 문장은 나름 괜찮은 번역이라 생각했다. 특히 가족이라는 다소 좁게 느껴지는 표현보다 가정이라는 단어의 선택이 복잡한 현대의 삶을 좀더 유연하게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아울러 고만고만나름나름의 리듬감과 대칭적인 구조는 역자가 상당히 고민했다고 느껴지는 점이다. 나는 러시아어를 모르니 영역으로 번역(Richard Pevear & Larissa Volokhonsky 번역한 펭귄 북스 참조)한 문장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All happy families are alike; each unhappy family is unhappy in its own way.

   이 문장의 원래 의미가 어떻든 나는 이 문장이 참으로 많은 인생의 진실을 담고 있다고도 느꼈다. 부자든 가난한 이든 누가 더 행복한가를 가늠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행복해보이는 사람 누구든지 각자 나름의 고민을 안고 이 생을 살아가고 있다는 데에서 나만의 소심한 위로를 받기도 하는 것이다. 안정된 직장과 빚이 청산된 내 집을 갖고있고, 행복한 가족이 있다면 그야말로 행복할 것 같지만 그런 조건에 부합하는 사람들마저도 어김없이 말못할 아픔이나 고통, 고민거리는 늘 존재한다. 이것은 지금까지 내가 견지한 인생의 참모습이다. 곧 고민의 개별적인 대상은 다르더라도 고민 자체는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것일게다. 그러므로 잘나가는 내 동창들의 모습에 배아파하지 말고 지금 이 순간을 살아나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 같다.

   소설의 두 번째 문장(1 11), 오블론스키 집안은 모든 것이 어수선하게 들떠 있었다. 어수선함이라는 단어는 앞에서 말한 펭귄 북스에서 confusion이라는 단어로 나타나고 있는데, 나중에 더욱 자세히 나타나겠지만, 톨스토이가 이 <안나 카레니나>를 쓸 당시에 고민하던 신앙과 이에 무관한 듯 살아가는 러시아 민중의 현실적인 삶과의 괴리감 내지는 혼란스러움을 더 잘 함축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박형규 교수의 해설에도 잠깐 언급되지만 <안나 카레니나>를 집필 중이던 당시에 톨스토이는 민중의 삶과 인생의 의의, 그리고 선의 의미에대한 입장이 확고히 정리 되지 않았다고 말하는 대목이 나오는 것처럼 소설가로서의 인생에서 비교적 초기(<안나 카레니나> <전쟁과 평화>이후에 쓴 대작이다.)에 집필한 소설이기에 이러한 혼란스러움은 소설 전반의 전개 방식이나 주인공의 혼돈스러운 의식의 전개에서 곳곳에 반영되고 있는 듯하다. 

   어쨌든 <안나 카레니나>의 첫 부분은 행복한 가정보다는 불행한 가정에대한 암시를 전달하며 소설의 주인공 안나의 오빠인 스테판 아르카디이치 오블론스키가 프랑스인 가정교사와 바람이 나서 험악해진 분위기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잠깐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을 조금 소개하자면, 소설이 시작하는 시점에서 34세로 나오는 스테판(애칭은 스티바)은 모스크바에 거주하며 모스크바나 페테르부르크 지역에서 영향력있는 사람으로 나온다. 스테판의 부인 다리야 알렉산드로브나(애칭은 돌리, 여기서 알렉산드로브나middle name으로 보인다.)는 쉬체르바쓰키 공작 집안의 세 째 딸 중 큰 딸로 결혼 전 이름은 다리야 쉬체르바쓰카야 (애칭은 다쉐니카)이다. 둘 째딸은 나탈리 알렉산드로브나이며 나중에 외교관과 결혼하여 외국생활을 주로 하며 소설 전반에 큰 역할을 하지 않으며, 결혼 후 리보바 부인으로 불린다. 그리고 막내 딸 카테리나 쉬체르바쓰카야(애칭-키티, 레빈과 결혼 후 카테리나 알렉산드로브나 레비나 부인으로 불린다.)는 위에서 외도 사건으로 곤혹을 치르는 스테판의 처제인 셈이다. 소설의 시작 당시에는 18세의 앳된 숙녀로 등장하며, 가장 중요한 등장 인물인 레빈과 결혼하는 아가씨이다. 레빈은 원래의 이름이 콘스탄틴 드리트리치 레빈으로서 키티와 결혼하게 되는데, 키티의 큰 언니 돌리의 남편인 스테판과 오랜 친구이다(스테판은 레빈을 코스티야라는 애칭으로 부르곤 한다). 레빈은 대학시절 자연과학을 공부한 과학도로서 시골에서 살며 농사를 지으며 독서와 농업에 관한 저술작업도 하는 젊은이 이지만 사회적으로 아무런 경력이나 지위를 얻는데 무관심하다. 소설의 시작에서 32세의 청년으로 등장한다. 

   이처럼 소설에는 복잡한 이름들이 등장한다. 내가 <안나 카레니나>를 느릿 느릿 읽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일단 러시아 이름들이 수도 없이 나오는 이 장편 소설에서 인물들을 구분하기 쉽지 않다는 점이다. 인물들은 앞으로 조금씩 소개를 하며 기회가 되면 종합적으로 정리하는 때가 있을 것이다. 

   레빈은 키티에게 연모의 정을 품고 있으며 청혼을 하려고 기회를 엿보는 중이다. 하지만 시골에서 살던 레빈은 모스크바의 사교계에서도 영향력을 갖고있던 쉬체르바쓰키 공작 집안의 막내 딸 키티에게 다가가려고 하지만 번번이 자신감을 잃고 머뭇거리는 대목이 나온다.(1 53)

   상대방 부모의 눈으로 볼 때 자기는 아름다운 키티에게 도저히 어울리지 않으며 한참 처지는 배필이라는 것과, 키티 또한 그를 사랑할 수 없으리라고 여겼던 것에 있었다. 부모의 입장에서 볼 때, 서른두 살인 그와 동년배인 누구는 벌써 대령이나 시종무관이 되었는가 하면 누구는 교수, 누구는 은행장이나 철도청장이나 혹은 오블론스키처럼 관청장이 되어 있는데 그는 사회적으로 아무런 경력과 지위를 갖지 않은 사내였던 것이다. 그는 그저 (남의 눈에 비치는 자기의 모습을 그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암소들을 치고 도요새를 쏘며 건축에 열을 올리고 있는 지주, 말하자면 무능하고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는 소심하고 전도도 없는, 세상 사람들의 눈으로 보자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인간들이 하는 것과 똑같은 짓을 하고 있는 사람에 불과했다.

   이 대목은 키티에게 청혼을 주저하는 레빈의 내면을 보여주고 있다. <안나 카레니나>의 단행본이 출간된 해가 1878년이므로 무려 130년도 전에 레빈이라는 청년이 고만하던 것들을 나 자신도 고민한 적이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묘한 안도감(?)마저 느꼈다. 지금 생각하면 공자의 말을 제자들이 정리한 <논어>에 등장하는 불혹이라는 나이가 의미하는 것이 바로 타인의 시선을 젊을 때처럼 의식은 하되 이전보다 타인의 시선이 중요하지 않게 되는 나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소설의 첫 문장처럼 고민의 내용은 각자가 다르겠지만 누구나가 다 고만고만한 고민을 하며 살아가듯이 이런 보편성을 깨닫게되면 레빈의 고민을 더이상 하지 않게 되겠지만, 역시 레빈은 32세의 청년이었다. 32세라는 나이는 잘 나가는 동료와 친구가 한다리 건너 누구든 있을 법한 세상 살이에서 여전히 자신의 결핍이 더 크게 느껴지는 나이일 것이다. 그리고 특히나 타인에 대한 동질감이 안정감을 주고 큰 역할을 하는 우리 사회에서는 더욱 공감이 많이 되는 부분이라 생각한다.  

   레빈은 자연과학을 전공한사람 답게 당시에 상당히 논쟁적이었을 찰스 다윈의 진화론에도 관심을 갖고 있는 것으로 나온다. 다만 소설을 통해 레빈의 사유가 전개하는 양상과 주석을 통해 톨스토이는 인생의 문제나 마음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주지 못하는 유물론적인 사고 방식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지녔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지극히 유물론적인 관점으로 보였을 진화론에 대해서도 레빈을 통해 잠깐 잠깐 소설 속에서 드러나는 점이 흥미롭다. 동물로서의 인류의 기원(1 56)에대한 언급은 나 스스로 대학시절 생태학 개론 수업을 들은 후 갖게된 인간관이기에 흥미로운 부분이 있었다. 나중에도 물론 생각해보겠지만, <안나 카레니나>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의 한 명인 레빈이 자연과학을 전공했다는 설정 또한 톨스토이의 치밀한 의도가 엿보이는 것 같다. 이 소설이 물론 몇 젊은이의 연애사건을 다루기는 했지만, 1800년대 중 후반 사회 변혁이 태동하던 러시아의 사회상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을 항상 염두해 두어야할 것 같다. 따라서 연애사건을 중심으로 다양한 계급에 속한 사람들과 삶의 현실, 그리고 농노제해방 등의 사회상이 폭넓게 반영되고 있다는 점도 내가 감탄하게 되는 점이다. 특히 톨스토이는 신앙과 무신앙의 문제, 삶의 의미를 찾는 문제(삶과 죽음), 공적 신앙과 개인적 쾌락의 추구의 문제 등을 고민하는 대목을 등장 인물을 통해 표면화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또 다른 작가의 일기장이라는 생각도 해보게 되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인문/사회/과학/예술 주목 신간 작성 후 본 글에 먼댓글 남겨 주세요.

 

 

 

 

 

 

 

 

 

 

 

 

1. <벤야민, 세기의 가문> 발터 벤야민과 20세기 독일의 초상

우베-카르텐 헤예 지음 / 박현용 옮김 / 책세상

- 내가 갖고 있는 벤야민에 대한 이미지는 물론 책을 통한 접한 아우라가 될 것 같다. 독일에서 자란 유대인이자 평생 직장에 다녀본 적이 없는 진정한 자유인이면서, 독일보다 프랑스의 파리를 너무나 사랑한 지식인으로 각인되어있다. 아직 읽지는 못했지만, 두꺼운 <아케이드 프로젝트>에서 엿볼 수 있듯 여러 학문 분야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벤야민의 사유는 무엇보다도 도시의 면밀한 산책자로서 형성된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에서 문학비평가 류신이 소설가 구보씨와 발터 벤야민을 끊임없이 불러내고 발터 벤야민을 현재의 서울이란 배경에 등장시키고 있는 것은 그만큼 그의 사유방식이 당대의 사람들과 많이 달랐기 때문에 그리고 그의 사상이 현재 우리의 삶에 잇닿아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오늘 대한민국에서 수많은 고학력 자발적 실업자의 모범이 되지 않을까도 생각해본다. 고미숙 선생이 <생각수업>에서 백수가 우리의 미래다.라고 외친 것의 구체적인 실천의 모습이 바로 발터 벤야민이 아닌가 생각해본 적이 있다. 고미숙 선생의 이 발언은 냉소적인 결론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삶을 자유롭고 주체적으로 살아가자는, 혹은 우리는 그래야하고 그럴 수 있다고 말하는 호소일지도 모르겠다.

   나치가 봉쇄해버린 국경 앞에서 자살해버린 이 벤야민이란 지식인, 파리의 거리를 끊임없이 산책하며 파리라는 도시를 사랑하고 관찰하며 사유했던 자유인 발터 벤야민을 키워냈던 가문은 과연 어떠했을까.궁금하다. 벤야민의 삶과 그의 가문을 추적해보면서 아울러 20세기 초 독일의 사회상을 좀더 이해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 같다.

 

 

 

 

 

 

 

 

 

 

 

 

 

2. <고딕건축과 스콜라철학> 한길그레이트북스 141  

에르빈 파노프스키 지음 / 김율 옮김 / 한길사  

- 개인적으로 에르빈 파노프스키하면 떠오르는 책은 인문주의 예술가 알프레히트 뒤러에 관한 책 <뒤러>이다. 이 책도 아직 만나지 못했지만, 뒤러는 롤랑 바르트의 <카메라 루시다>, 이반 일리치의 저작 뿐 아니라 이광주 교수의 저작 등 미술과 관련한 여러 주제에 자주 등장하는 판화가이다. 특히 해골이 있는 죽음의 기사멜랑콜리아라는 제목으로 불리는 판화가 수많은 미술관련 저작에 등장하는 단골 판화이다. 많은 이들이 인문학의 꽃이라 부르는 미술사학 분야의 교수를 지낸 파노프스키가 중세를 배경으로 한 고딕 건축과 스콜라철학을 어떤 방식으로 우리에게 전달하고 있을지 사뭇 궁금해진다.

 

 

 

 

 

 

 

 

 

 

 

3. <스페이스 크로니클> 우주 탐험, 그 여정과 미래  

닐 디그래스 타이슨 지음 / 에이비스 랭 엮음 / 박병철 옮김 / 부키

원제 Space Chronicles: Facing the Ultimate Frontier (2012) 

- 이 책의 저자 닐 디그래스 타이슨은 천체 물리학자로서 백인 과학자가 주목을 많이 받아온 과학계에서 우뚝 서있는 흑인 과학자로서, 그리고 과거 칼 세이건이 자신의 저작을 바탕으로 한 과학 다큐멘터리 <코스모스>를 그동안의 연구 업적을 추가하여 다시 제작한 2014년 작 <코스모스>의 해설자로 잘 알려져있다. 무엇보다도 코메디언에 버금가는 그의 풍부한 표정과 유머는 딱딱하게 느껴질 수 있는 과학 특히 천체 물리 분야, 우주에 관한 여행에 사람들을 몰입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는 학자인 것 같다. 대중에게 우주에 관해 더욱 알리고 다가가고 싶은 그의 노력으로 이 책은 나왔을 것이다. 이 책은 <코스모스>와는 조금 다르게 우주 탐험에 관한 전반을 보다 집중적으로 소개해놓은 것으로 보인다.

 

 

 

 

 

 

 

 

 

 

 

 

4. <한나 아렌트의 말> 정치적인 것에 대한 마지막 인터뷰

한나 아렌트 지음 / 윤철희 옮김 / 마음산책

- 나에게 한나 아렌트하면 가장 깊은 인상을 준 저작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일 것이다. 악의 평범성사유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현대인들에게 회자되는 데에는 분명 아렌트의 역할이 크다고 할 수 있겠다.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도 그의 책 <도덕적 불감증>에서도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있듯이 나치 하의 아이히만은 구조적으로 만들어진 이며 따라서 어디에서나 나타날 수 있다는 점일 것이다. 책임감있고 명민한 공무원으로서 보여준 아이히만의 행보는 이미 100년도 전에 톨스토이의 <부활>에서 보여주는 관료제의 비인간성을 보여주는 대목에서 예견된 사태일지도 모른다. 아렌트의 이 책은 정치 이론가로서 아렌트가 생전에 했던 인터뷰 몇 개를 묶은 것으로, 글로 쓴 그녀의 책보다 좀더 느슨할 수 있겠지만 아렌트의 핵심적인 사상을 바로 앞에서 듣는 기회가 될 것 같다.

 

 

 

 

 

 

 

 

 

 

 

 

 

5. <마네의 회화>

마리본 세종 엮음 / 미셸 푸코 외 8명 지음 / 오트르망.심세광.전혜리 옮김 / 그린비

- 이 책은 9명의 미학과 철학 분야의 학자들이 마네의 그림 13점을 주제로 마네의 시각에서 이 그림들을 논한다고 한다. 미학-철학자들이 잘 알려진 마네의 그림을 분석한다면 어떻게 바라볼 수 있을지 궁금해진다. 푸코가 마네에 관한 강연 기록을 시작으로 8명의 철학자들이 푸코의 시각에서 마네의 그림을 어떻게 바라보았을지를 살펴본다면 마네의 그림에대한 이해 뿐 아니라 푸코의 일면을 새롭게 이해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흥미롭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오덕*권정생 <선생님, 요즘은 어떠하십니까>

(9-10) 바람처럼 오셨다가 많은 가르침을 주고 가셨습니다

 이오덕 선생님

다녀가신 후, 별고 없으셨는지요?

바람처럼 오셨다가 제()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고 가셨습니다. 일평생 처음으로 마음 놓고 제 투정을 선생님 앞에서 지껄일 수가 있었습니다.

선생님의 작품을 많이 읽었지만, 역시 만나 뵙고 난 다음, 더욱 그 진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선생님이야말로 가장 소중한 우리 것을 가지신 분이라 한층 미더워집니다.

어저께는 안동 김성영 씨를 만나, 선생님 얘기를 입이 마르도록 나누었습니다. 가슴이 따뜻해지고, 무엇이나 아껴 주고 싶은 마음이었습니다.

행복이란, 외모로 판단되는 값싼 것이 아닐 겝니다. 선생님이 걱정하시는 마음이 제게 많이 통하고 있다고 당돌하나마 말해 봅니다. 착하기만 해서도 안 될 것이죠.

소리소리 지르며 통곡하고 싶은 흥분이 일어날 때마다, 그것을 가슴으로 자꾸만 모아들이이는 아픔이란, 선생님은 더 많이 아실 것입니다.

체험하지 않고, 겪어 보지 않고는 절대 모르는 설움을 무엇 때문에 외면하면서 설익은 재롱만으로 문학을 한다는 것부터,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안동에 오시는 기회가 있으시거든 종종 들러 주시기 바랍니다. 원고는 며칠 더 기다려 주세요. 그동안 사정으로 아직 정리하지 못했습니다.

그럼, 추위에 몸조심하시기 바랍니다. 다음 뵈올 때까지 안녕히!

1973 1 30

권정생 드림

: 1973 1, 권정생 선생이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고나서 이오덕 선생이 직접 권정생 선생을 방문합니다. 당시 혼자 살던 권정생 선생은 서른일곱, 이오덕 선생은 마흔 아홉. 띠동갑(12년차) 두 남자는 이렇게 만난 이후, 권정생 선생이 보낸 편지 입니다. 이 두 분은 이후 30년 가까운 우정을 지속하게 됩니다. 한 평생 이런 인연을 만난다는 것은 참 행운이라는 생각을 하게됩니다.

특히 12살 나이 차이가 무색하게 이오덕 선생은 편지에서도 언제나 권정생 선생을 존대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참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리고 권정생 선생의 작품을 출판하도록 여러 모로 배려를 하는 이오덕 선생의 인품을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습니다. 이 두 분이 나눴을 문학에 대한 얘기도 조금 엿볼 수 있는데, 자신의 체험을 통한 솔직한 문학, 솔직한 글쓰기에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을까 추측해봅니다. 글이 표피적으로 나아가지 않으려면 개인의 체험이 녹아나야한다는 것. 글을 쓰는 과정은 결국 자신을 알아가는 길이라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글을 쓴다는 것이 어느 순간 부터 어렵다고 느낄 때, 내가 이전에 끄적거린 글들을 다시 보고 얼굴이 화끈거릴 때 무언가를 쓴다는 것이 너무나 큰 부담으로 다가오네요. 이럴 땐 다시 새로운 마음으로 소탈한 마음이 보이는 이러한 글들이 적힌 책을 가만히 넘겨보게 됩니다. 30년 가까운 남자들의 우정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이 흔적들을 보면서 다시금 길을 잃지 않으리라 다짐해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