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의 구절>



사유하지 않음은 폭력이 될 수 있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경험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지배 이데올로기나 대중매체에서 떠드는 것 이상을 알기 어렵다. 알려는 노력, 세상에 대한 애정과 고뇌를 유보하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타인에게 상처를 준다. 한나 아렌트가 말했듯이, 사유하지 않음, 이것이 바로 폭력이다. - 정희진 저, <페미니즘의 도전> p35~36.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고 싶을 때가 있다. 그 상대가 친구일 수도 있고 이웃일 수도 있다. 문제는 도와 주려는 자신의 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기분이 상할 수 있다는 점이다. 도움이라는 것의 의미는 주관적 판단에 따른 것이기 때문에 한 쪽에서 생각한 그 ‘도움’이 상대방에겐 ‘도움’이 아닌 경우가 생길 수 있다. 또는 상대방이 고맙게 여기면서도 마음의 상처를 받을 수 있다.


내 친구한테 들은 얘기가 있다. 옷 정리를 하다가 키가 커진 아들들이 입지 못하는 옷들을 모아 이웃집 사람에게 갖다 주었다고 한다. 해진 옷도 아니고 다만 크기가 맞지 않아 버리기 아까운 옷이었으므로 당연히 받는 사람이 고마워할 줄 알았다는 게 그 친구의 말이었다. 그런데 결과는 뜻밖이었다. 그 이웃 사람이 그 옷들을 받는 걸 거절하더라는 것이다. “난 우리 애들한테 남이 입던 옷 안 입혀요.”하는 냉정한 말로써 그 불쾌한 기분을 표현하는 것을 듣고는 그 친구는 멍해졌다고 한다.


나는 깜짝 놀랐다. 나도 우리 애들이 입지 못하는 것들을 추려서 이웃에게 갖다 주곤 했기 때문이다. 어디 옷뿐이랴. 우리 애들이 학년이 바뀌어 쓰지 못하는 동화책이나 참고서까지 갖다 주곤 하는 나로선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혹시 내게서 받았던 그 사람도 어쩌면 언짢은 걸 억지로 참고 받은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또 이런 얘기도 들었다. 한 친구가 어느 모임에 갔다가 모임이 파해 귀가할 때였다. 자신만 빼고 모두들 자동차가 있었는데, 그 중 한 사람이 차가 없는 자신을 위해 집까지 바래다주겠다고 말한 것이다. 자기를 배려해 준 것은 고마운 일이었으나(정말 그 마음은 고마웠다고 함) 그 말을 하는 바람에 다른 사람들까지 자신이 차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게 문제였다. 그 친구는 차가 없는 자신의 처지가 자각되면서 창피하고 자존심이 상하더라는 것이다.


누군가를 배려해 줄 때는 꼭 그 사람의 처지에서 한 번 더 신중히 생각해 봐야 한다는 것은 우리 모두 기억해야 할 진리이다. 자신이 경험하지 않은 것을 잘 알기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페미니즘의 도전>이란 책에서 저자 정희진은 사유하지 않음이 폭력이라는 한나 아렌트의 말을 인용하면서, 세상(또는 타인)을 알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우린 타인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너와 내가 다른 부류의 사람이라는 인식으로 인해 성차별을 비롯하여 장애인과 비장애인, 백인과 흑인, 부자와 빈자 등 사람들 사이에 차별이 존재한다. 차별로 인해 상처가 생기는데, 그 차별이란 것도 결국 사회적 약자의 입장에서 사유하지 않음으로써 생겨난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살면서 불쾌하거나 상처 받는 일은 거의 ‘말’에서 비롯되는 게 아닐까 한다. 무기로 사람을 해치는 것과 달라서 말은 가까이 있지 않아도 전해 듣는 사람에게 독기를 품어낼 수 있다. 가령 자신에 대해 누군가가 심하게 험담한 사실을 제삼자의 전화통화로 전해 받고선 괴로워할 수 있다. 그래서 무기보다 말이 더 무서운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친절로써 한 선의의 말인데도 마치 험담처럼 상대방에게 마음의 병을 앓게 할 수 있음을 생각할 때 인간관계가 좋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새삼 깨닫게 된다.


우리 모두는 서로 같은 처지에 있어 보지 않은 각각의 타인들이다. 또 누구나 한 가지 이상의 열등감을 갖고 있기 쉽다. 그러므로 타인에게 말하고 행동하는 것에 주의가 따르는 건 당연한 일이다. 우리 주위엔 결혼하지 않은 것에 열등감이 있는 사람도 있고 학벌 열등감이나 외모 열등감이 있는 사람도 있다. 또 가난함에 열등감이 있는 사람도 있다. 특히 자신에게 열등감이 있는 부분에 대해선 타인이 무심코 던진 말도 민감하게 작용한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대학을 가지 못한 사람에게 어느 대학 졸업했냐고 물어 그 사람에게 상처를 줬다면 그것은 폭력이 될 수 있다.


사물을 보는 시각은 자신의 생활에 따라 각자 다를 수 있다. 만약 방송을 통해 내일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를 접한다면, 직장인은 내일 출근시 우산을 챙겨야 한다고 생각하고, 우산 장수는 내일 얼마나 우산이 팔릴지를 기대하며, 비가 새는 집에 사는 이는 내일 지붕이 샐 것을 걱정할 것이다. 지붕이 샐 것을 근심하는 가난한 사람에게 누군가가 비 오는 날의 낭만을 얘기하며 비가 많이 왔으면 좋겠다고 늘어놓는다면 그 말도 폭력이 될 수 있다.


타인을 알려고 노력하고 세상을 알려고 노력해야 하는 것은, 인간은 혼자 사는 게 아니라 타인과 더불어 살아야 하는 사회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타인(또는 세상)에 대해 사유를 게을리 함으로써 약점 있는 누군가에게 폭력을 행사한 게 되고 마는 현실이 안타깝기는 하다. 열등감이란 것도 따지고 보면 우열을 가리는 우리 사회의 산물이니까.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우열을 가려야 하는 이 치열한 경쟁 사회에서 우리가 타인을 위해 ‘사유’하는 일은 꼭 필요할 것 같다. 그 사유로 인해 타인에게 정신적 스트레스를 주는 일이 예전보다 줄어든다면 그것은 좋은 사회를 향해 한 걸음 나아가는 걸 의미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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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달샘 2009-08-28 17: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알게 모르게 우리는 타인에게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고 앓다가 시간이라는 약으로 인해 아물고 상처엔 딱지가 앉게 되지요. 딱지가 자연스럽게 떨어지게 놔두면 되는데 긁어부스럼을 만들기도 하고 다시 덧나게 하기도 하여 한참동안 상처를 끌어안고 살기도 하지요. 한번더 생각한 뒤에 말하고 행동해야 겠어요.

페크pek0501 2009-08-29 00:14   좋아요 0 | URL
그래요, 조심해야겠단 생각 들어요. 인간관계가 힘들다는 걸 새삼 느끼며 살게 돼요. 서로에 대한 이해와 배려가 중요하겠죠.
 


논술은 생활 속에 있다


대입시험에서 논술이 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지 모르겠다는 학생들이 많다. 여느 과목과는 달리 정해진 답이 있는 것도 아닌 논술을 왜 공부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학생들도 있다. 이는 논술이 우리 생활과 얼마나 밀접한지를 잘 몰라서다. 우리는 어제도 오늘도 논술을 접했는지 모른다.


예를 들어 설명해 본다. 아이가 재밌다는 표정으로 텔레비전 시청에 빠져 있어서 어머니가 이렇게 묻는다. “그 방송 프로그램이 왜 재밌니?” 어머니의 이 질문을 논술문제로 생각할 수 있다. ‘그 방송 프로그램이 왜 재밌는지 그 이유를 논술하시오.’ 라고 고쳐볼 수 있기 때문이다. 또 결혼 적령기의 딸이 결혼할 상대를 집에 데리고 왔을 때, 사윗감인 남자에게 아버지가 묻는다. “내 딸과 결혼하면 어떻게 살 건가? 그리고 자네의 직업관에 대해 말해보게.” 이를 논술문제로 표현하면 ‘결혼생활과 직업관에 대해 논술하시오.’와 같이 된다.


어디 이뿐인가. 제품을 만들어내는 대기업체에 취직한 회사원도 논술과 접하는 일이 많다. 신제품에 대한 아이디어회의 시간에 팀장이 회사원들에게 말한다. “어떤 신제품을 만들면 좋을지 발표해 보시오.” 또는 “그 제품의 장단점을 설명해 보시오.” 이 모두가 논술로 답변해야 되는 물음들이다.


이렇듯 논술은 우리 생활 속에 있다. 학생들이 논술을 공부해야 하는 것은 대입시험을 잘 보기 위해서만이 아니고, 문장력과 사고력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만도 아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실제 생활에서 논술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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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블로그에 있는 글을 그대로 여기에 옮겼습니다. 물론 제가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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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0-06 17: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0-07 16: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어떻게 써야 좋은 글이 될까



누구나 다 아는 일이지만 학급에서 한 번이라도 일등을 해본 경험은 하나의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길 뿐만 아니라 목표의 기준점이 뚜렷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 뒤로 또 일등을 해야지 하고 마음먹는 그 자체가 공부를 열심히 하는 동기가 된다. 이때 자신이 이룬 성과는 높을수록 좋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한때 초등 3학년인 딸애의 일기 지도를 한 적이 있다. 어느 날엔가 일기를 잘 써서 많이 칭찬을 해 주었다. 그러자 아이의 태도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학교 숙제라서 마지못해 일기를 쓰던 아이가 정성들여 쓰게 된 것이다. 자신감이 생겼는지 일기를 쓰고 나선 내게 자주 묻곤 하였다.


“엄마, 그때 칭찬한 일기처럼 이번에도 잘 썼어?”


아이는 자기 나름대로 잘 쓴 일기의 기준을 갖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그 일기보다 못 쓴 것 같은 기분이 들면 더 잘 쓰려고 노력했다.


이런 심리를 이용하여 아이들에게 독후감 쓰기 훈련을 하라고 권하고 싶다. 우선 잘 쓴 독후감을 만들어주는 일부터 해야 할 것이다. 잘 쓰는 기법을 터득했다는 점에서도 좋지만 하나의 기준점이 생겨서 더 좋은 것이다. 독후감을 잘 쓰려면 우선 정독해야 한다. 책을 꼼꼼히 읽어 완전히 이해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여러 번 반복해서 읽어야 하며, 읽다가 모르는 낱말은 국어사전으로 찾아야 한다. 이 작업을 아이와 엄마가 함께 하면서 인터넷을 통해 잘 쓴 독후감을 찾아보면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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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조선일보에 기고했던 글입니다.  

주제가 잘 드러나지 않아서 잘 쓴 글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이미 일간지에 실렸던 글이라 고치지 않고 그대로 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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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칼럼>


더 추락할 게 없는 사람은 행복하다 - 부제 : 고 노무현과 엄행수


이번에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5월 23일) 소식을 접하며 행복의 조건에 대해 새삼 생각하게 되었다. 그 높은 권좌에 오르지만 않았다면 자살하는 죽음에 이르지도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것은 평범한 삶을 살았더라면 좋은 생애를 살았을 것이라는 말로 바꿔 말할 수 있다.


최근 어느 일간 신문(5월 14일자)에 흥미로운 연구결과가 게재되었다. 평범해 보이는 사람이 가장 안정적인 성공을 이뤘다는 내용이었다. 이 연구는 하버드 의대 정신과의 조지 베일런트 교수가 주도한 것으로, 미국 하버드대 2학년생으로 전도유망했던 남학생 268명의 일생을 72년간 걸쳐 추적해 본 것이다. 연구 대상자의 약 3분의 1은 정신질환을 한때 겪었음을 알아냈다. 하버드 엘리트라고 해서 다 좋은 인생을 산 것은 아니었던 것. 이 연구에서 행복하게 늙어가는 데 필요한 요소는 7가지로 추려졌다. 그 첫째가 ‘고통에 적응하는 자세’였고, 교육과 안정적 결혼, 그 밖엔 금연ㆍ금주ㆍ운동ㆍ적당한 체중 등의 건강을 위한 것들이었다.



이 연구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행복의 조건의 으뜸이 ‘고통에 적응하는 자세’라는 사실이다. 이것은 곧 ‘고통을 견디는 능력’의 유무를 말할 것이다. 이 연구에 근거해서 생각할 때, 결국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사람들 중엔 고통을 견디는 능력이 부족한 사람들이 많을 거라는 추측을 할 수 있다. 한때 이어졌던 연예인들의 자살 사건도 고통에 견디는 능력이 중요함을 깨닫게 한다. 물론 자살의 원인은 본인만 아는, 더 복합적인 원인이 있을 수 있겠지만 말이다.


더 추락할 게 없는 사람은 오히려 행복할 수 있다


박지원 저, <예덕선생전>이란 작품에 매력적인 인물 두 사람이 나온다. 한 사람은 엄행수라고 불리는 사람인데, 그는 동네를 돌아다니며 똥을 져 나르는 일에 종사한다. 그는 남이 그에게 고기 먹기를 권하면 ‘허허, 목구멍을 지난 다음에야 나물이나 고기나 마찬가지로 배부르면 그만이지, 하필 값비싸고 맛 좋은 것만을 먹을 것이 무어냔 말이오’하고 사양하며, 또 새 옷 입기를 권하면 그는 ‘저 넓디넓은 소매돋이를 입는다면 몸에 만만치 않고, 새 옷으로 갈아입는다면 다시금 길가에 똥을 지고 다니지는 못할 것이 아니오’하고 사양한다. 그는 더럽고 힘든 일을 하면서도 자기 삶에 불만이 없고 분수를 지키며 평화롭게 산다.


또 한 사람은 선귤자인데, 그는 남들이 모두 무시하는 엄행수를 존중한다. 그에 의하면, 엄행수는 하는 일이 더럽고 신분은 미천하지만 마음이나 행동은 의롭기 때문에 존경할 만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엄행수를 ‘예덕 선생’이라고 부른다. 선귤자는 말한다.


“나는 음식을 먹을 때마다 그 차린 음식이 너무나도 먹을 것이 없을 땐, 반드시 이 세상에 나보다도 못한 가난뱅이가 있음을 생각했네. 그러나 이제 저 엄행수의 경지에 이른다면 무엇이라도 견디지 못할 것이 없겠지.”


엄행수는 더 이상 추락할 게 없는 사람이기에 오히려 행복할 수 있는지 모른다. 그는 챙겨야 할 가족이 없으니 가족으로 인한 불행한 일이 생기지 않는다. 남의 인생을 좌지우지할 정도로 권력을 가지고 있지도 않고 명예도 없다. 그러므로 근심도 없다. 그저 배고플 때 먹는 한 끼의 식사와 달콤한 밤잠이면 충분한, 그런 삶을 산다.



중요한 건 삶이 아니라 삶에 대응하는 방식


엄행수의 삶을 통해서 보면 행복의 조건이란 따로 있는 게 아닌 것 같다. 오히려 어둠 속에서 빛이 더 밝듯이, 불행 속에서 더 아름답게 꽃 피울 수 있는 게 행복이라는 역설도 가능하다. 결국 중요한 것은 개인의 삶 자체가 아니라 그 삶에 대응하는 방식일 것이다. 이것이 행복 또는 불행의 인생길로 갈라놓는다.


명예가 실추되는 일로 또는 다른 불행한 일로 큰 고통을 받을지라도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게 과연 최선일까, 그러한 시련을 새 인생을 사는 계기로 삼을 수는 없을까, 이렇게 누구나 한번쯤 생각해 볼 것이다. 자살로 죽느냐 굳건히 이겨내고 사는냐의 선택이 바로 삶에 대응하는 방식의 문제이다.


누구나 잘못을 저지르기도 하고 후회를 하기도 한다. 그만큼 인간은 부족함이 많은 불완전한 존재이다. 그러므로 이미 반성과 뉘우침으로 얼룩져 불행해진 사람에 대해선 그 누구도 마음의 돌을 던질 수 없으리란 생각이 든다.


나 역시도 어리석은 행동으로 괴로워 할 때가 있는데, ‘난 왜 이리도 어리석을까’하면서도 그래도 위안이 되는 건 내가 어제보다는 오늘이,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 나은 모습일 수 있다는 기대 때문이다.


이번 전직 대통령의 자살 사건은 국민들에게 많은 충격과 슬픔을 안겨 주었다. 그동안 있어 온 연예인들의 자살 사건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공통점은 세인들로부터 주목을 받는 높은 위치에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명예 훼손과 같은 일로 ‘추락’할 가능성이 많은 사람들이었다.


추락한 자의 비애를 ‘자살’로 마무리한 그들의 고통스런 마음을 헤아려 보며 엄행수가 떠올랐다. 그를 통해서 더 이상 추락할 게 없는 밑바닥의 삶이어서 오히려 불행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엄행수는 행복의 조건 따윈 갖추고 있지 않은 삶을 살면서도 불평 없이 사는, 아름다운 덕을 가진 사람이다. 그의 ‘삶을 대하는 태도’가 존경스럽고 본받고 싶어진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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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무엇을 단정하거나 확신하는 것은 위험하다’라는 깨달음은 ‘독서’가 준 선물이었다. 우리가 독서를 하는 것은 결국 살면서 갖게 될 이런 저런 고정관념과 편견을 깨기 위해서가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오늘은 이렇게 글을 썼다. 하지만 내일 쓰는 글은 오늘과 다른 견해를 가진 글이 될 것이다. 사람은 고여 있는 물이 아닌, 흐르는 물과 닮았기 때문이다. 또 그래야 한다고 믿는다. 사람은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미완성’의 인생을 사는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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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신. 유형지에서 (외) 범우비평판세계문학선 19
프란츠 카프카 지음, 박환덕 옮김 / 범우사 / 1999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변신'을 읽고 - 인간이란 무엇인가


어느 날 아침, 그레고르는 잠에서 깨어나 자신이 어느새 거대한 벌레로 변신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것이 이 소설의 시작이다.


그레고르는 상과대학을 나와 군대생활을 마쳤고, 아버지가 5년 전 파산한 이후 세일즈맨이 되어 성실하게 일하며 부모와 17살의 누이동생을 부양하며 살고 있었다. 이렇게 평범하게 살던 그에게 이런 기이한 변신이 일어난 것이다.


그가 한 마리의 벌레로 변하자 가족에게도 변화가 일어난다. 그를 대신하여 돈을 벌기 위해서다. 아버지는 은행의 말단 수위로 취직하고, 어머니는 삯바느질을 하고, 여동생은 가게 점원으로 취직을 한다. 그리고 살림에 보탬이 되기 위해 한 방에 세 명의 하숙생을 받게 되어 그로 인해 그레고르의 방은 짐으로 가득 찬 창고처럼 되어 버린다. 그래서 그는 불행하게도 벌레로서 마음껏 기어 다닐 수 있는 공간조차 없게 된다.


벌레란 어떠한 가치도 지니고 있지 않은 혐오스러운 존재이다. 가족은 한때 가족이었던 그에게 식성에 맞지도 않은 음식만 그의 방에 가져다 주고는 할 일을 다 했다는 듯 상대하려 들지 않았다. 이제 그는 그들에게 가족이 아닌 것이다. 가족 모두 그를 점점 소외시키고 짐스러워함으로써 그레고르의 외로움은 깊어만 간다.


이 소설은 한 인간이 벌레 같은 존재가 되었을 때 주위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우리에게 잘 보여 준다. 벌레로 변신한 그레고르에 대해서 가족은 처음엔 무척 놀라고, 그 다음엔 가엽게 여기고, 무서워하고, 분노하고, 화내고, 나중엔 귀찮아한다. 그러던 어느 날 그레고르는 아버지가 던진 사과에 맞아 중상을 입게 되며, 그로부터 점차 식욕을 잃고 비실대다 시체가 되어 하녀에게 발견된다. 결말에는 벌레가 죽은 뒤 가족은 소풍을 갈 정도로 마음이 가벼워진다. 귀찮은 존재가 죽었으므로 예전의 삶의 즐거움을 되찾은 것이다. 이것이 ‘인간’임을 이 소설은 말하고 있다.


여기서 벌레라는 설정이 현실적으로 와 닿지 않는 독자라면 벌레 대신,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던 아버지가 병에 걸려 누워서만 지내는 환자로 변했다고 가정하고 읽어도 좋을 것이다. 혹은 각자의 삶에서 소외된 적 있는 자신의 모습을 벌레의 처지에 놓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인간의 비인간적인 면을 다룬 이 소설의 핵심은 물질만이 최고의 가치가 되어 버린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한 인간이 수단으로서의 가치를 상실하게 되었을 때, 그 자신은 어떻게 변화하고, 또 주위 사람들이 그를 대하는 태도는 어떻게 변화할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벌레로 변했다는 사실이 아니라 변신이 있는 상황에서 인간이 대응하는 방식일 것이다. 벌레가 되어 버린 그레고르는 자신이 인간이었던 사실을 점점 잊게 되고 진짜 벌레로서의 삶에 적응하게 되는데, 그것은 그의 가족이 그를 가족이 아닌 벌레로서만 취급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레고르는 몸은 벌레일망정 가족과 함께하고 싶어 하나 가족은 그를 벌레로만 인식하고 소외시켜 버린다. 그가 가장 사랑한 누이동생마저 처음엔 벌레가 된 그를 잘 돌봐 주다가 나중엔 마음이 변하여 그를 쫓아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의 어머니 역시 모성을 가지고 늘 그를 걱정하지만 그레고르를 쫓아내자는 의견에 반대하지 않는다.


그레고르가 변신한 벌레는 일상적 세계(가정과 사회)에서의 소외됨을 상징한다. 누구든지 한번쯤은 소외감이 느껴지는 경험을 한 적이 있을 것이다. 친구들 사이에서도 사소한 일로 이런 경험은 가능하다. 예를 들면 친구들과의 모임에서 외국 얘기가 나왔는데 나만 외국 여행을 한 적이 없어서 친구들의 화제에 끼지 못한다거나, 친구들의 직업은 모두 화려해 보이는데 나만 무직자임을 자각할 때 마치 이 소설 속의 그레고르처럼 소외감과 고독을 느낄 것이다.


벌레로 변신한 그는 비로소 자신이 무엇을 원하고 있었는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볼 시간을 갖는데, 이것은 인간으로서의 삶을 살면서는 그런 진지한 사색 없이 그저 기계적으로 일상 생활을 했다는 걸 의미하기도 한다. 윤택한 생활을 하기 위해서, 또 하루라도 일하러 나가지 않으면 생활에 타격이 오기에, 한가롭게 생각할 여유가 없이 바쁘게 살았던 그는 어떻게 사는 것이 좋은 삶인지에 대한 고민은 빠져 있었던 것.


이처럼 벌레로 변신하기 이전엔 노동이 그레고르를 자신으로부터 소외시켰다면, 변신한 이후엔 자신의 경제적 무능함이 그를 인간세계로부터 소외시킨다. 결국 가족이라는 것도 무조건적인 사랑에 기초를 두는 인간관계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논리에 영향을 받는 관계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문학은 인간에 대한 탐구이다. 즉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를 연구하는 것이다. 그래서 문학을 인간학이라고도 한다. 이 소설을 통해 독자는 이런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이 돈을 못 버는 쓸모없는 존재가 된다면 이렇게 구박을 받아도 마땅한가, 상대방으로부터 무엇을(혜택을) 받아야만 호의적으로 대할 수 있는 것인가, 만약 물질만 중요시하여 인간의 정신이 황폐해진다면 너무 몰인정하고 살벌한 세상이지 않은가, 만일 가족 중 누군가가 벌레와 같은 존재가 되었다면 어떤 태도를 갖는 게 바람직한가, 인간의 운명이란 원래 모순과 불안과 허무 등으로 점철되어 있는 것일까 등등….


밀란 쿤데라(‘소설의 기술’의 저자)에 의하면, “역사가는 실제로 일어났던 일들을 이야기하고 소설은 실제를 탐색하는 것이 아니라 실존을 탐색하는 것이다. 그런데 실존이란 실제 일어난 것이 아니고 인간의 가능성의 영역”이다. 그러니까 소설가들은 인간의 이러저러한 가능성들을 찾아냄으로써 실존의 지도를 그린다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누구인가를 보게 하고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알게 해 준다는 것이다.


만난 지 얼마 안 된 연인들은 서로를 잘 알지 못한다. 연애기간이 길어지면 싸울 일이 생기는데, 싸움의 횟수가 늘어나면서 상대방의 밑바닥까지 본 느낌을 가져야 비로소 서로에 대해 알기 시작한다. 관계가 좋은 상태에선 상대방을 정확히 파악할 수 없고 인간의 실존은 극단적 상황에서 노출되기 때문이다. 이 소설을 쓴 카프카는 그런 극단적 상황을 만들어 인간의 실존을 보여 주려고 인간을 벌레로 만들었다.


이 이야기는 우리의 현실과 동떨어진 먼 얘기가 아니다. 우리에게도 그런 극단적 상황이 오지 않으리라고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소설을 읽은 독자는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질 수 있다. “소설 속 그레고르가 벌레로 변신한 것처럼 어느 날 나의 부모님이 치매에 걸린 환자로 변신한다면, 나의 실존은 어떤 모습으로 표출될까?”


인간은 자기 자신을 거울에 비추어 보듯, 주위 사람들이 자신을 보는 시각에 비추어 자신의 존재가치를 인식하는 존재다. 그러므로 대인 관계에서 우리가 상대방을 어떤 태도로 대하는가 하는 문제는 서로에게 아주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자기 자신에 대해 얼마나 알까. 누구든, 내가 어떤 사람이라고 단정적으로 규정하기란 쉽지 않다. 인간은 늘 변화가능성이 많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나’를 알려면 우선 ‘인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인간적인 삶은 무엇인가’에 대해 철학적 사색의 기회를 갖고 싶은 독자에게 ‘변신’의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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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책방IC 2009-06-06 15: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몇번을 다시 봐도 참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명작입니다.
늘 잊지 않고자 노력하지만, 쉽게 잊혀지는 것이 '삶의 본질'이 아닐까 합니다.
좋은 글 정말정말 잘 읽고 갑니다.

페크pek0501 2009-06-07 13:28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책을 읽은 뒤에 그 내용을 잊어버리는 경우가 있는데, 리뷰를 써서 좋은 점은 책의 내용을 훤히 꿰뜷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한 권을 읽고도 마치 두 권을 읽은 것처럼 좋은 공부가 됩니다. 좋은 글이라 하시니 고맙습니다.

옹달샘 2009-10-26 1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학창시절 변신을 읽고 많은 것을 느꼈었어요. 이 글을 읽으니 그 때의 감동이 밀려오는군요. 정확한 분석과 사색이 담긴 글을 읽으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좋은 글 읽게 하심에 감사드립니다.

페크pek0501 2009-10-26 12:30   좋아요 0 | URL
옹달샘님, 고맙습니다. 오늘 본 동화, 가능성 많은 작품입니다.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을 존경합니다. 행복한 작업, 많이 즐기며 하세요.

2010-02-07 11: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페크pek0501 2010-02-07 13:00   좋아요 0 | URL
반가워. 다음부턴 로그인 하지 않고 댓글 남겨도 돼. 그냥 이름 쓰는 칸엔 이름 적고 비밀번호는 아무거나 본인이 기억할 수 있는 숫자 적으면 돼. 비밀번호를 쓰는 이유는 나중에라도 본인이 댓글을 삭제하고 싶을 때 그 비밀번호를 써야 되기 때문이야. 아무나 삭제하게 만들면 안 되잖아. 내가 쓴 글 중 책 리뷰만 읽으라고 말하고 싶네. 공부에 도움이 될 듯 싶어서.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