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카 로드 - 라이더를 유혹하는 북미 대륙과 하와이 7,000km
차백성 지음 / 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 / 2008년 8월
평점 :
절판


 

예전에 배낭여행이란 단어가 아예 없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리고 얼마 후에 배낭여행이라는 개념이 생겨나면서 그것은 하나의 도전으로 받아 들여졌었다. 누군가 주위에서 배낭여행을 다녀왔다고 하면, 대단하다~하고 감탄을 연발해댔다. 또 어느 순간이 되니 자전거 여행이 대세라고 했다. 그리고 우후죽순처럼 그렇게 자전거로 세계를 누빈 이들의 여행 서적들이 출간되기 시작했다. 평생을 자전거와 함께 해왔다는 지은이 차백성 씨 역시 그 대열에 <아메리카 로드>로 출사표를 던졌다.

아, 시작하기 전에 저자에 대해 잠깐만 운을 띠자면 그는 혈기 넘치는 이십대의 청년도 아니고, 그렇다고 어느 정도 세상맛을 본 삼십대 장년도 아닌 바로 25년간 유수의 기업체에서 일하다가 제2의 삶을 시작하기 위해 과감하게 도전장을 던진 장성한 두 아이의 아버지라고 한다. 언제나 그렇듯이 배낭여행이 되었던, 자전거 여행이 되었던 간에 나이나 기타 조건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발턱에 걸리는 문지방이 문제인 것이다.

각설하고 본론에 들어가 보도록 하자. <아메리카 로드>의 주인공이 애마 MTB를 개조한 자전거로 달리고자 하는 곳은 바로 광활한 대륙 아메리카이다. 어쩌면 젊어서 아프리카 수단의 오지 누비아 사막에서 생사의 갈림길을 경험한 이에게 우리에게는 선진국으로 알려진 미국 땅을 누비는 것쯤이야 식은 죽 먹기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개관적인 추측에 불과하고, 어느 여행이든지 간에 고유의 아우라와 그에 수반하는 고난이 따르기 마련이 아니었던가.

<아메리카 로드>는 크게 삼부작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첫 번째는 바로 미국의 서북단에 위치한 워싱턴 주의 시애틀에서 출발해서 US101 도로를 타고 오리건 주를 거쳐 캘리포니아와 멕시코 국경에 위치한 산이시드로에 달하는 장장 2,700km의 코스였다. 그리고 두 번째 코스는 캘리포니아의 샌프란시스코에서 출발을 해서 오리건, 아이다호, 몬태나, 와이오밍 그리고 사우스 다코타를 거치는 서부 개척 루트가 그것이었다. 마지막 코스는 마치 지난 두 번의 코스들에 보상인 것처럼 미국이 자랑하는 세계적인 휴양지 하와이 코스였다.

책을 읽는 동안, 왜 지은이는 우주선으로 달나라 여행을 하는 마당에 그야말로 순전히 아날로그적인 자전거라는 가장 기초적인 이동수단을 선택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됐다. 순수하게 우리가 가진 육체의 힘으로 동력을 만들어서 두 개의 바퀴에 전달을 하고, 앞으로 나가는 자전거야말로 가장 정직하면서도 기타 공해물질 전혀 없는 운송 수단이 아니겠는가. 게다가 그 장거리를 여행하다 보면, 많은 동지들과도 해우하게 되지 않는가 말이다. 여행길에서 만난 이들은 모두 친구라는 말처럼 지은이 역시 많은 장소들에서 많은 이들과의 멋진 만남들을 독자들에게 보여 주고 있다.

게다가 자신이 계획한 대로 목표한 지점에 시간 내에 도착했을 때의 그 성취감이란 어쩌면 보통의 평범한 여행객들은 느낄 수 없는 고유의 감정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No pain, no gain"이라는 격언처럼 고생 없이 얻어지는 것은 없다지만 자신과의 치열한 싸움 끝에 얻어낸 것일수록 더 값지게 느껴지는 법이 아닐까. 세계적으로 아름다운 US101의 해안도로를 따라 역경 끝에, 첫 목표를 이뤄낸 작가는 이번에는 좀 더 야심찬 목표인 서부개척사에 도전하게 된다.

예전에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인용된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화두(話頭)가 차백성 씨의 두 번째 코스에서 여실하게 드러난다. 영국과의 독립전쟁 이래 확장을 계속해 가던 미합중국이 마침내 국가의 건설방향을 서부로 잡게 되면서, 프런티어 정신으로 무장한 수많은 이주자들은 이 시기에 비옥한 땅과 황금을 찾아 서부로 향하게 된다. 하지만 그 밑바탕에는 미국이 세계에 알리고 싶어 하지 않을 사실이 있으니 바로 그 땅의 원주민들이었던 아메리카 인디언들과의 투쟁이었다.

루이스와 클라크 탐험대를 도운 인디언 여성 사카자웨아는 지금도 미국의 1달러짜리 주화에 주인공으로 그려져 있는데, 그 이면에는 외면하고 싶은 미국사의 상흔들을 엿볼 수가 있었다. 정말 직접 그네들의 땅에 발을 디디지 않고서는 나올 수 없을 것 같은 감상들이 책 가운데 부유하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들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시작한 테마 여행이 부럽다는 생각이 불현 듯 솟구쳤다.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하와이 투어는 정말 뭐랄까 그동안 고생한 그대, 떠나라~라는 카피가 연상됐다. 물론 우리나라 사람들의 미주이민사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 하와이 플랜테이션 농장으로 이민 온 한인들의 이야기들도 있기 했지만 상대적으로 부족한 것이 좀 아쉬웠다. 그리고 부록처럼 달려 있는 자전거 여행에 대한 팁도 자전거 여행을 계획하는 이들에게는 아주 유용한 정보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디지털 세상 가운데, 자전거와 패니어 가방에 단출하게 꾸린 살림살이를 가지고 어디라도 떠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유목민 정신을 가진 그대, 당장 떠날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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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시간의 도시에서 나를 보다 - 뿌듯한 여행을 위한 베이징 지침서
권삼윤 지음 / 동아일보사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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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재밌는 책이란 무엇일까? 아마 잘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닐까. 그야말로 손에 책장들이 착착 달라붙는 그런 맛이 나는 책 말이다. 아마 그렇다면 권삼윤 씨가 쓴 베이징 견문기인 <거대한 시간의 도시에서 나를 보다>가 그 재밌는 책일 것이다.

이미 전 세계의 각지를 여행하면서 쌓은 내공에 더해 수차례 중국 현지방문을 통한 경험이 이 책 곳곳에 배어 있음을 책을 읽으면서 느낄 수가 있었다. 가까우면서도 먼나라 일본만큼이나 우리 역사와 함께 유구한 관계를 해왔으면서도, 그 속을 알 수 없다는 중국인들의 표정만큼이나 잘 알지 못하고 있는 중국 그 가운데서도 유네스코가 선정한 문화유산을 자그마치 6점이나 품고 있는 베이징으로의 여정에 선뜻 따라 나서본다.

작가의 여정은 중국 봉건 왕조의 마지막 국가였던 청나라의 발생지였던 만주의 선양에서 시작된다. 물론 우리나라를 침공해서 인조에게 씻을 수 없는 치욕이었던 삼전도 항복을 받아냈던 청태종 홍타이지와 청태조 누르하치의 이야기가 빠지지 않는다. 곧 베이징에 입성하면서 오늘날의 중국을 만들어내고 지금은 중국 인민들의 우상이 된 마오쩌둥의 이야기가 소개된다.

개인적으로 중국 근현대사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1930년대 국공합작으로 항일전을 전개하고 종전이 되자 발발한 내전에서 장제스가 이끄는 국민당 군을 패퇴시키고, 결국 1949년에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을 선포한 마오쩌둥의 연혁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중화인민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그도 말년에 이르러서는 홍위병들이 이끄는 문화혁명으로 중국의 문화를 반세기나 후퇴시켰다는 비판도 함께 받는 그의 이미지들이 중첩되고 있었다. 이제는 하나의 상품이 되어 버린 체 게바라의 이미지처럼, 인민폐의 새겨져 있는 그의 이미지들은 사회주의 국가 체제 하에서도 상품화되어져서 일상적 소비의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을 책에 실린 삽화들을 여실하게 느낄 수가 있었다.

그리고 작가의 시선은 베이징 관광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자금성(紫禁城: Forbidden City) 안으로 돌려진다. 지금 현대 중국의 수도가 된 베이징은 명조 영락제 시대에 비로소 한 국가의 국도(國都)가 되면서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어가기 시작했다고 한다. 물론 몽골족에 세운 원나라 시절에도 수도였었다고 한다. 아마 조카인 건문제를 폐위시키고 제위에 오른 영락제는 백성들을 복속시키고, 불만을 품은 반대파들을 제압하기 위해서 웅장한 황궁건설을 했을 것이다. 물론 당시의 명나라의 국력으로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작가가 이 책을 통해 많이 언급하는 인물 중에 한 명이 바로 청조의 6번째 황제인 건륭제이다. 보기 드물게 문화 예술에 조예가 깊은 황제로 시서화에 정통하며, 다도에도 지대한 관심을 가졌던 황제로 청나라를 최대의 전성기로 이끌기도 했다고 한다. 아마 제위기간만으로 중국 역대 황제 중에 챔피언급일 것이다. 또 다른 중요한 인물로는 함풍제의 후궁이었던 서태후가 등장한다.

호사스러운 궁중생활을 위해, 국운이 기울어져 가는 가운데서도 해군경비마저 전용해서 이화원을 개축을 하고, 수렴청정을 통해 황제에 버금갈만한 권력을 행사했던 그녀가 죽은 후 결국 청나라는 신해혁명으로 그 수명을 다하게 된다. 계속되는 서구 열강들의 침탈과 혁명 이후 군벌들의 발호로 중국인들을 도탄을 빠지게 하는 원인제공을 했다는 비난을 받고 있는 서태후. 죽은 후에도, 영면을 취하길 원했지만 유랑군벌에 의해 자신의 능이 철저하게 도굴 당하게 될 거라는 사실을 사전에 알았더라면 그렇게 많은 비용을 들여서 능을 만들기 원했을지 궁금하기만 했다. 다시 공수래공수거 인생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됐다.

책의 마무리는 역시 중국하면 빼놓을 수 없는 만리장성 답사로 끝을 맺게 된다. 동쪽의 산하이관에서 시작한 만리장성은 서쪽의 쥐용관에서 끝나게 된다고 하는데, 2000년도 전인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하고 그전에 각국이 북쪽 유목민족들의 약탈을 피하기 위해 세웠던 장성을 연결했던 것을, 명대에 들어 다시 전면적으로 개축을 하고 강화를 하게 되면서 오늘날의 모습에 이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전부터 사진을 통해 많이 봐왔던 바다링 장성은 물론이고,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다는 쓰마타이 장성 답사에까지 나선 작가의 탐험정신이 놀라웠다. 역시 고수 여행객의 풍미가 절로 엿보이는 장면들이었다.

개인적으로 책을 읽으면서 아쉬웠던 점 중의 하나는 중국 예술인들의 아지트가 된 다산쯔 798 지구에 대한 보다 자세한 설명과 사진들을 기대했었는데 그 부분이 기대했던 것에 비해 좀 부족했던 것 같다. 하지만 예전 조선시대 연행길에 나섰던 완당선생과 당대 금석고증학의 대가 옹방강 옹과의 만남에 대한 예화와 베이징판 인사동이라고 할 수 있는 류리창 지구에 대한 부분은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웠다. 인간사 새옹지마라고 했던가. 아쉬운게 있으면 또 그대로 더 채워지는 부분이 있는게 인지상정 아닌가.

역시 베이징은 스케일 면에서 여타 도시들을 능가하고도 남음이 있다. 하지만 오늘의 베이징을 더 베이징답게 만들고 있는 것은 그런 단순한 물리적인 크기가 아니라, 겹겹이 쌓인 수천 년 중국 역사의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아우라가 오늘날에도 그 빛을 잃지 않고 계속해서 전 세계 각지의 여행객들을 금지된 도시(Forbidden City) 속으로 끌어 들이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제목 밑에 달려 있는 부제대로 정말 이 책을 읽은 다음에, 베이징 투어에 나서게 된다면 정말 마음이 “뿌듯해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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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도시가 내 삶에 들어왔다, 교토
이혜필 지음 / 컬처그라퍼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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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통해 미지의 세계와 만나게 되는 즐거움은 아마도 그 무엇에 비할 바가 아닐 것이다. 그런데, 많은 기행에 관계된 서적 중에 보다 큰 즐거움을 주는 책은 바로 개인적인 경험이 있는 곳을 다룬 책일 것이다. 나에게 <그 도시가 내 삶에 들어왔다, 교토>가 그랬다. 이 책을 읽는 동안, 2002년 처음으로 방문했던 교토에서의 그 무더웠던 여름이 내내 떠올랐다.

이제는 기억마저 희미해진 여행의 추억 가운데서 금각, 은각 그리고 기온과 청수사, 철학의 길 등의 지명들이 잔잔히 피어올랐다. 이 책의 지은이 이혜필 씨는 6개월 동안 교토에 살면서 그야말로 안 가본데 없이 다가보았지만, 열흘 남짓한 짧은 일정으로 간사이 지방을 다 돌아보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가지고 출발한 내가 간사이공항에서 내린 뒤에 바로 찾은 도시가 일본의 유구한 역사가 자리 잡은 천년 고도 교토였다.

그리고 교토 관광에서 첫 번째로 꼽는 금각사를 찾았다. 그리고 나중에 은각사와 철학의 길도 갔었는데 개인적으로는 은각사가 더 호젓하니 마음에 들었던 기억이 난다. 은각사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 미국에서 온 모녀와의 대화들이 참 인상적이었던 기억이 난다. 은각사 경내에서 미국에서 온 여자 분과 재밌게 이야기를 나누고, 내려오는 길에 척 봐도 그 둘이 모녀라는걸 알 수 있는 미국 할머니가 길을 잃고 있는 걸 보고서 따님이 은각사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알려 주었었다. 그렇게 타지에서 만난 이들은 서로 돕는 마음이 절로 생기는가 보다.

다시 책 이야기로 돌아가, 일상의 삶을 박차고 나간 지은이가 당차게 일본 교토의 레오팔레스에 작은 둥지를 틀고 언어를 배우고, 진짜 마음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는 일본 사람들 사이에서 부대끼며 살아가는 모습들이 보기에 참 좋았다. 나이가 점점 들면서 생기는 변명 중의 하나가 금전적이기 보다는 시간적인 게 아니던가. 느긋한 중년의 나이는 자연스럽게 인터내셔널한 우정을 쌓는데도 큰 도움이 되는 듯 싶었다. 물론 작가가 여성이라는 점도 상대방의 방어기제를 무너뜨리는데 일조를 했겠지만.

책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작가의 지기(知己) 안포토의 사진들도 꼭 필요한 구석에서 그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 사진들을 통해 수년 전에 들렀던 교토를 다시 여행하는 기분이 흠뻑 빠져 들고야 말았던가. 푹푹 지는 7-8월 무더위 속에서 꾸역꾸역 걷고 정말 며칠 사이에는 도저히 볼 수 없어서 나중에는 결국 자포자기하는 심정까지 들게 하고 말았던 교토의 그 수많은 사찰과 신사 및 유적들이란. 내가 본 여름 외에의 모든 계절이 담겨져 있어서 더더욱 반가웠다, 비록 내가 그전에 한 번 가본 곳이라 하더라도 안본 것에 대한 미련은 여전한가 보다.

교토의 거주자가 아닌 뜨내기 여행자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었던 교토의 구석구석을 파헤치는 지은이의 작가 정신이 못내 부러웠다. 그리고 그녀가 만들어내는 끝내주게 멋진 아름다운 인연들, 그야말로 사는 맛나는, 또한 참 아름답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래서 여행은 나를 찾고, 또 타인들과의 끊임없는 관계 속으로의 발전이라는걸까?

이혜필 씨가 교토 속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라, 교토라는 유무형의 도시가 그녀의 마음에 들어간 것이 아닐까? 책을 읽는 내내 그런 생각이 들었고, 그럴 수 있었던 작가가 마냥 부럽다는 생각만이 들었다.

끝에 달려 있는 에필로그식의 이야기들도 한 권의 책을 마무리하는데 있어서 더할 나위 없이 좋았던 것 같다. 교토에서의 생활을 바탕으로 해서, 이상향에나 등장할 법한 카페 <님>을 삼청동에 차리셨다고 했던가. 그 카페 <님>을 찾아가 말없이 한 잔의 차로 뜨내기 여행객의 다리를 쉰다면 그것 또한 안분지족(安分知足)의 삶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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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쟁이 톨로키
자케스 음다 지음, 윤철희 옮김 / 검둥소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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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한 기회에 남아프리카 출신의 작가 자케스 음다를 알게 되었다. 우리나라에는 음다의 작품 두 권이 도서출판 검둥소를 통해 소개가 되었는데 <행복한 마돈나>와 <곡쟁이 톨로키>가 그것이다. 왜 <행복한 마돈나>가 아닌 <곡쟁이 톨로키>를 먼저 선택을 했는지 아이러니하다. 아마 제목에 들어가 있는 “곡쟁이”라는 낯선 단어가 주는 자극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물론 <행복한 마돈나>도 수중에 있어서 곧 읽을 예정이다.

<곡쟁이 톨로키>의 주인공은 두말할 것도 없이 곡쟁이라는 희귀한 직업을 가진 톨로키이다. 그는 스위스 롤에 파를 곁들여서 먹으면서 일상 가운데 죽음이 흘러넘치는 남아프리카의 어느 곳에서 곡을 하면서 하루하루의 삶을 영위하고 있다. 그러던 중에 그는 어느 꼬마아이의 장례식에서 18년에 떠난 고향의 동향인인 노리아를 만나게 된다. 그 ‘건방진 계집’ 노리아는 자신의 아버지 즈와라의 죽음과 관련이 있는 애증의 관계이다.

톨로키가 지금 살고 있는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고향에서, 아버지 즈와라는 대장장이였다. 그리고 노리아는 즈와라의 친구 제시베와 ‘산골 여자’의 딸이었는데, 노리아는 즈와라의 창작의 마르지 않는 샘물 같은 존재로 그녀가 노래를 부르면 즈와라는 자신만의 입상들을 만들곤 했다. 즈와라는 자신의 자식인 톨로키보다도 노리아를 더 사랑했다. 인물이 변변치 않은 톨로키는 내내 그렇게 이웃들이나 친구들로부터 그리고 심지어 자신의 아버지로부터도 인정을 받지 못했다.

소설은 계속해서 현재에 벌어지는 톨로키와 노리아의 관계 가운데서, 플래시백으로 독자들을 과거로 향한 시간여행을 인도한다. 마치 하나하나 그 둘에 얽힌 이야기들이 풀어져 나가면서 그들의 삶에 대한 궁금증들이 풀려 나가는 재미가 쏠쏠하다. 특히나 우리에게는 전혀 낯선 남아프리카 공동체들의 다양한 삶의 방식들은 물론이고, 부족 간들의 갈등, 극단적인 폭력과 그에 수반한 죽음들이 일상화되어 버린 그네들의 삶은 가히 충격적으로 다가온다.

주인공 톨로키가 고향을 떠나 도시로 도망쳐 갔을 때, 얼핏 그 이유를 댔던 것처럼 “사랑과 부”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도시에서의 삶은 외롭고 신산하기만 하다. 특별한 기술이 전무했던 톨로키가 어디서나 벌어지는 일상의 죽음에서 자신의 천직이라고 생각한 ‘곡쟁이’라는 직업을 개발해낸 것도 우연이 아닐 것이다. 게다가 그는 남들이 가지지 않은 “슬픈 눈동자”를 소유하고 있지 않았던가.

한편, 노리아의 형편 역시 나을 것이 없었다. 톨로키가 대개의 시골 청년들의 삶을 반영한다면 노리아의 경우는 시골 처녀들의 그것이었다. 나푸라는 남자와 눈이 맞아 가족들을 버리고 도시로 향했지만 그들에게 미래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남자의 경제적 무능력은 그들 가정의 파탄을 예고하고 있었다. 결국 첫 번째 아들 부타와 전 남편 나푸를 비참하게 잃은 그녀는 결국 도시의 판자촌에서 다시 자신의 삶을 찾게 된다.

아이들마저 놀려 대는 톨로키에 대해 살아가는 법을 안다면서 존경하는 마음을 숨기지 않는 노리아. 그리고 정말 어울리지 않는 실크해트에 망토로 무장한 소위 작업복을 입은 톨로키는 동향의 동생 노리아를 진심으로 도와주고 싶어 한다. 정착촌의 자경단인 젊은 호랑이들의 비행으로 두 번째 부타를 잃고 집마저 화재로 잃어버린 노리아를 돕는 톨로키. 그들은 절망 가운데서도 희망을 버리지 않고, 새로운 내일을 향해 달려가는 남아프리카 사람들의 표상처럼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동안 미국이나 유럽의 소설 혹은 한동안 금지되어 있던 이웃 일본의 소설들은 많이 읽을 수 기회가 있었지만 아프리카나 남태평양 같은 제3세계의 글들은 상대적으로 접할 기회가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마도 소재의 다양성이나 우리가 비교적 잘 알지 못하는 문화권의 이야기들이 전자들의 그것에 비해서 떨어지는 것은 절대 아닐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최근 출간되고 있는 제3세계권 문학들의 소개는 정말 바람직한 일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다.

얼마 전에 읽었던 에펠리 하우오파의 <엉덩이에 입맞춤을>에 이어 읽게 된 자케스 음다의 <곡쟁이 톨로키>는 이런 최근의 추세를 반영하고 있는 책 중의 한 권이다. 물론 우리에게 잘 알려진 작가들이 아니기 때문에 출판사의 입장에서도 고려하게 되는 수익성에서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다양성을 추구하는 독자들에게는 정말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죽음이라고 하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가장 피하고 싶어 하는 현실에 자신의 직업을 투영시킨 톨로키의 삶을 통해 우리는 오늘날의 남아프리카의 현실을 보게 된다. 농촌에 사는 이들이 모두 톨로키가 말했던 ‘사랑과 부’를 찾아서 나서는 모습은 산업화에 따라 전 세계적으로 발생했던 이촌향도(離村向都)의 모습을 닮아 있다. 우리네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게다가 서로 적대시하는 부족 간의 갈등에서 비롯한 유혈폭력은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는 비극적인 현실이었다. 상당수의 죽음이 바로 이 갈등에서 비롯되었음을 이 책을 통해 알 수가 있었다. 하지만 또 역설적으로 자신의 공동체에서 떠난 이들이 물설고 낯선 도시에서 의지하게 되는 것은 바로 그런 동질감을 가지고 있는 이들에게서였다. 노리아와 톨로키처럼 그들은 서로에게서 위안과 격려를 받고, 살아가는 법을 하나씩 배워간다.

죽음이라는 실존적 상실이 곳곳에서 불쑥불쑥 고개를 들지만, <곡쟁이 톨로키>는 사람간의 관계와 화해를 도모하는 따뜻한 소설이다. 곡쟁이 톨로키는 이렇게 우리에게 묻는다.
“그대, 살아가는 법을 아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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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
코맥 매카시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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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과 장소를 알 수 없는 곳에 한 아버지와 아들이 있다. 마치 지구 멸망의 날을 겪은 것 같은 그 곳에서 그 둘은 살아남기 위해 따뜻할 거라고 생각되는 남쪽 바닷가로 향한다. 그 둘은 단 한 번도 서로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 그들은 이미 자식과 부모의 관계만큼 서로에 대해서 잘 알고 있고, 역설적으로 철저하게 익명성이 보장되어 있다는 것처럼 말이다.

생존을 위한 기본적인 물자들은 하나도 없다. 도대체 소설이 시작되기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책 <로드>의 저자 코맥 매카시는 독자들에게 어떤 유추를 해낼만한 그 어떠한 정보도 허락하지 않는다. 단지 알 수 있는 것은 온 세상이 잿빛으로 가득하고, 사방에 죽음이 널려 있다는 것 정도다. 어쩌면 그렇게 저자의 의도대로 책을 읽는 이들은, 그런 인과관계보다 아버지와 아들의 생존에만 관심을 가지게 되는지도 모르겠다.

죽음의 유혹에 끊임없이 시달리는 아버지는 사방을 경계하고, 유사 이래 모든 아버지들이 그래 왔던 것처럼 자신의 가족을 지키기 위한 처절한 생존 게임에 나선다. 연명을 위한 식량 확보와 가족의 안전이라는 대의명분 앞에 이 부자(父子)의 일상적인 약탈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다가온다. 그리고 역시 자신들의 운명이 어떤 식으로 결정이 되리라고 예상하고 있는 어린 아들에 대해 계속해서 살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불어 넣어준다. 죽음을 꿈꾸는 이가 역설적으로 희망을 노래하고 있다.

아버지와 아들이 외부로부터 얻고 싶어 하는 생존에 필요한 물자와 식량 외에는 모두가 적대적이다. 앞을 보지 못하는 노인도, 그리고 자신의 아들 또래의 사내아이도 모두 자신들의 안전을 위협하는 잠정적인 위험요소들이다. 물론 총과 칼 혹은 원시적인 화살로 무장한 이들이 끊임없이 그들이 가지고 있는 얼마 안 되는 식량과 보잘 것 없는 물건들을 노리고 있다. 내부는 안전하고, 외부는 위험하다는 단순하기 그지없는 이 이분법적 사고는 오늘날을 사는 미국인들의 그것을 닮아 보인다. 9-11이라는 전대미문의 충격에 깜짝 놀란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의 감정적인 대응 말이다.

삶 가운데 행운과 불운이 교차하듯이 생명의 위협을 당하기도 하지만, 또 한 편으로는 우연히 음식과 각종 물자로 가득 찬 벙커를 발견하고 부자는 호사를 누리기도 한다. 하지만 계속해서 위험하다고 말을 하면서 이동을 해야 한다고 주장을 하는 아버지. 왜 이 소설에서 여성성은 제거되고, 남자들만이 등장할게 되었을까? 아마 아버지와 동등한 발언권을 가진 어머니가 존재했더라면 갈등은 더 심화되고 이야기는 복잡하게 전개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가부장적 시스템’은 노인과 자기 또래의 소년에 대한 인도적인 아들의 발언들에 대해 어떠한 여지도 남겨 두지 않는다. 아버지가 말하면, 아들은 따라야만 하다. 왜? 늘 그래왔으니까.

어쩌면 저자 코맥 매카시는 소설 <로드>를 통해, 인간의 최소한의 존엄성마저 무시된 세상의 끝에서 오늘날의 디스토피아를 말하고 싶어 했는지도 모르겠다. 문제의 해결이나 갈등의 해소를 위한 대화는 부재한 가운데, 일방적인 의사소통만이 넘쳐흐르는 현재의 모습은 오로지 생존을 위해 약육강식 같은 삶의 전쟁터에서 먹고 살아남는 것만이 유일한 목적으로 보이는 <로드>에 나오는 아버지와 아들의 초상이다. 이 소설이 현재, 코엔 형제의 <노인들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 이어 다시 영화화되고 있다고 한다. 이 소설을 읽는 내내 자꾸만 윌 스미스가 주인공을 맡았던 영화 <나는 전설이다>와 <행복을 찾아서>의 이미지들이 중첩되는지 모르겠다.

사족으로 카피에 ‘<성서>에 비견되었던 소설’이라고 하는데, 뭐 그 정도는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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