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정한 시대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 및 사회 조건이나 그네들의 세계인식을 드러내는 하나의 방식으로 우화, 민담, 동화라는 유사성의 장르는 당대 사람들은 물론 변하지 않는 사람들 일반에 대한 이해를 위한 효과적인 경로가 된다. 특히 인문학을 비롯해 문학서들은 전해오는 이들의 인용을 통해 인류라는 인간 종()에 대한 어떤 본질적 성격을 헤아리기도 하고 하는데, 아마 오래되었다는 고대 우화에서 토속적 민담이나 17세기부터 공식화되어 집필되기 시작한 고전동화에서 상징화되거나 은유된 양상들이 오늘의 사람들이나 사회 속에서도 여전히 발견되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듯 우화 또는 동화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지펴진 것은 조금 뜬금없어 보이지만 작품을 통해 일생을 삶과 죽음의 문제와 윤회와 구원의 문제임을 궁구(窮究)했던 박상륭 소설가의 雜說品속 발견으로부터이다. 이 장편소설은 성배(聖杯)를 안치하고 있다는 문잘베쉐(Munsalvaesche)라는   생기를 잃어 찬바람과 대막(大莫;엄청난 적막함) 휩싸인 악취 맡고 날아든 까마귀들이 떼 지어 울부짖는 곳이 배경인 소설이다. 아마 그이의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의 이해가 대중에 다가서지 못함을 안타깝게 여겨 그나마 조금 부연 설명을 곁들여가며 다시금 인간 생에 대한 그의 철학을 풀어 반복하려했던 작품으로 여겨진다.

 

 박상륭 소설 雜說品』 문학과지성사, 80쪽 부분 발췌


낳지 않는 상처를 지닌 왕의 치유를 위해 불새를 찾아 떠난 시동(侍童)의 꿈 속 이야기인지, 현실 속 대화인지 모를 장황한 이야기가 초반부에 등장하는데, 아마도 작가의 작품 속 칠조(七祖)로 추정되는 순레자로 불리는 노승과 11’로 불리는 문잘베쉐로 유학 온 어느 나라 공주가 주고받는 설법을 가장한 시론에서 고대 인도의 우화인 판차탄트라(Pancatantra), ‘빤짜딴뜨라로도 읽음와 이와 동일유사 내용을 지닌 이솝 우화중 하나의 이야기가 그 시발(始發)이다.

 

미루어 짐작컨대 왕을 세워 달라 요구한 개구리들로 번역되는 이야기인 듯한데, 이 이야기가 씨앗 불이 되어 내 읽기의 욕망에 불을 싸질러댄 것이 화근(?)이 된 것이다. 이 근심을 해소하는 것은 그것으로 찾아드는 것인데, 그것이 그저 들불로 확 번져 동화(童話)의 세계로까지 번져 페로와 그림형제, 안데르센으로 대표되는 체제와 권력 유지를 위한 기성 질서의 내면화라는 역겨운 고전동화에 반기를 든 전복의 문학을 도모했던 조지 맥도널드와 오스카 와일드의 동화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서력 3세기에 써진 것으로 추정되는 인도의 우화집인 판차탄트라(Pancatantra)'다섯(panca) 논설(tantra)'이라는 뜻처럼 다섯 장으로 구성된 작은 이야기 논집이다. 매우 어리석고 아둔한 세 왕자의 아버지인 왕이 이들을 가르칠 선생을 찾고, 마침내 위싀누샤르만(visusarman)’이란 현자가 세 왕자에게 통치학을 깨닫도록 가르친 논설집이라 할 수 있다. 이 통치학의 개념이 이솝우화의 개구리 이야기로 연결된 것으로 이해되는데, 개구리들은 인간 대중을 가리키는 것이고, 연못 속 개구리들은 그들 집단의 리더를 찾는다.

 

신은 이들에게 나무토막을 내려준다. 그런데 처음에는 이 말없는 나무토막의 다스림없는 다스림에 만족하지만 이내 그 무용함으로 짜증을 낸다. 결국 신은 그 웅덩이에 뱀을 보내는데, 개구리들, 즉 이 노예근성의 피학쟁이들에게 가학적 능동성을 구비케 하려면 독사(毒蛇)로 인한 혼비백산의 허둥거림과 살기위한 극악한 발버둥만한 처방이 없는 것이었을 테다. 노승(老僧)은 말한다. 미온적, 수동적, 또는 노예근성의 피학적, 반 잠에 들어있는 질료를 독사(毒死)시키기 같은 것이 아니겠다구?” 라고. 이는 수많은 동화들에서 공주가 개구리에게 행하는 입맞춤이 바로 이같은 충격요법 이라는 것이다. 이러함으로써 人間의 저 적나라한 재림(再臨)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라고. 곧 인간 삶의 고달픔으로 안일한 삶을 살 수 있었던 나무토막을 그리워하게 될 터이다. 이 이야기가 노승에 의해 발설된 까닭은 황폐해져가는 문잘베쉐의 진짜 현상은 바로 이러한 독()날것-썩히기날것-익히기라는 두 변용을 도모하기 위함이라 설명하며, 어떤 특정 사회가 무엇을 선택할 수 있는가는 그 구성원의 깨우침일 것이라고 미루는 것 같다. 여기서 정치철학을 얘기할 것은 아니고, 이 야기기로부터 작금의 우리네 정치현상이 이 독과 같은 것 아니겠는가? 하는 자문으로 이어졌다는 말에 그치기로 한다.

 

아무튼 이 기발한 인간세(人間世)에 대한 은유 이야기는 우화와 동화의 의도, 그 정체성에 대한 호기심으로 이어졌는데, 17세기 샤를 페로로부터 시작되어 19세기 후반 그림 형제크리스티안 안데르센으로 이어진 고전 동화(이후 이들을 대표하는 명칭으로 사용함)의 그 던적스럽고 위선적이며 체제 옹호적이었던 문학적 보수주의를 띤 것들은 차치하고 20세기 전후하여 이러한 질서 수호와 강화에 이바지했던 사회정치적 조류에 반기를 내걸고 전복의 문학을 도모했던 작가들의 동화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다. 박상륭의 소설 속 화자인 패관(稗官)이 전하는 우화는 17~19세기 보수주의 동화의 지배질서 내면화 동기와는 다른 것이고, 이는 오히려 이들에 비판적이고 전복적 시선을 가했던, 즉 기성의 관습과 관행, 규범 일반적 담론을 변경하고자 권력과의 타협을 거부했던 일군의 작가들과 그네들의 동화에 고대 우화의 전통이 연결된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기독교 신비주의자라는 편견 때문에 그의 환상소설에 대해 오해를 가지고 있던 조지 맥도널드에 대한 재발견은 내겐 앎에 대한 겸허를 다시금 환기토록 했다. 오히려 그의 기독교 신비주의가 인간 존엄에 대한 근본적 신념의 자양분으로 작동했으며, 종교적 에피파니가 그의 동화 속 상징들과 연결되어 인간의 창조적 잠재력 계발의 자극원으로 동원되었음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맥도널드와 함께 위선에 대한 혐오, 상층계급의 위선적 관습과 고전동화의 체제 수호적 문명화 담론에 반대하여 문명화과정의 재()맥락화를 시도한 오스카 와일드는 동화의 또 다른 방향을 보여준다. 와일드는 전통적 동화 담론에 개입하여 그 방향을 급진적으로 바꾸어 동화의 사회 미학적 경향을 위한 새로운 길을 만들어냈다. 그는 비판 대상의 언어와 행위를 차용하여 그것이 내재한 부정과 불합리, 불명예를 지적함으로써 그것에 반기를 들게 하는 전복의 문학을 저돌적으로 밀고 나갔다.

 

이들은 고전동화가 현실 세계의 가치를 비판하고 위반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 가치에 사후적이고 우의적으로 의문을 제기하는 데 그치고, 결코 현실 사회를 문제 삼거나 그 대안 세계나 관념들에 어떠한 봉사도 하지 않았음을 비판한다. 즉 이들 그림형제나 안데르센 등의 고전동화들은 지배 계급이 도모하는 안전한 세계의 질서를 옹호하고 그 질서에 편입되기 위한 고통의 내면화에 몰두했다는 지적이다. 안데르센의 경우는 마치 하층계급의 고난에 관심을 보내는 듯 하지만 결국 상층 계급이 원하는 질서에 편입하고자 그네들의 규범과 권위에 타협했다. 이는 안데르센 부류의 동화가 '부르주아의 교양 이데올로기'의 내면화에 헌신함으로써 일반 사람들의 보편적 심리 속에서 작용, 인간 제반 기억 내지 판단을 왜곡시키도록 작용했다고 지적한 발터 벤야민의 비판 그것이다. 바로 이러한 비판의 관점에서 맥도널드와 와일드는 지배관계와 지배담론에 대해 강도 높게 불만을 표시했으며, 동화의 세계에서 이를 역전시키고 전복시켰다.

 

두 사람은 전통적 고전동화 담론이 분명 아이들에게 해악을 미치고 있다고 생각했다. 지배계급의 관습과 규범, 가치를 내면화시켜 그에 순응하고 복종하는 시민을 양성하려는 의도를 사회와 타자에 책임을 가지는 인간, 창조적 인간상이라는 가치로 문명화과정의 담론을 변형하고자 한 것이다. 여전히 안데르센 부류의 굴종적이고 순응적 인간을 만들어 체제에 길들이고자하는 동화가 출판과 영상 시장에서 활개를 치는 세상이지만, 왜 이러한 것이 우리들의 세상이 아름답지 않음을 멈출 수 없게 하는지에 대해 자성의 필요를 요구하는지의 반면교사가 되기도 할 것이다.

 

맥도널드의 동화 한 편을 읽는다면 그의 대표작이라 할 가벼운 공주를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잠자는 숲속의 미녀, 라푼젤에 대한 경멸적 태도를 반영한 패러디 작품이랄 수 있다. 아이가 없어 슬퍼하는 왕과 왕비에게 늦게나마 공주가 태어나지만 아기를 태어나게 도와준 마녀에게 이를 전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공중에 떠다니는 가벼움의 마법에 걸린다. 이 과정에서 맥도널드는 관습적 사회질서와 사회관계를 희화화하는데, 왕실 형이상학자들은 바보로, 전형적 왕자는 푼수 짓으로 조롱당한다. 그럼으로써 상층계급의 어법과 규약의 가면들을 벗겨낸다.

 

떠다니는 공주의 가벼움, 공주는 중력(重力)을 체득하지 못하는 것인데, 여기서 중력은 사회적 책임과 연민의 은유로 사용되고 있다. 중력은 추상적으로 강요하거나 가르친다고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감정과 경험을 통해서 체득되는 것이기에 그녀는 수영을 통해 이를 알아간다. 이때 왕자는 수영장의 물이 빠져나가지 않도록 물속에서 물마개로서의 역할을 수행한다. 공주는 물속에서 물마개를 하는 왕자의 고통을 느끼기 시작하고, 연민의 감정을 갖게 된다. 사회적 책임과 연민을 말하고 있지만, 여성과 낭성의 역할도 전복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작가는 이 이야기를 통해 새로운 가치와 성의 행동양식과 가치를 창조할 가능성을 제시하고 이를 인식하는데 주력하는 것이다. 아마도 라푼젤을 읽는 아이와 가벼운 공주를 읽은 아이는 자기 성의 행동양식이나 사회관계에서 많은 사유와 행위의 차이를 보이지 않을까?

 

맥도널드의 작품으로 황금 열쇠라는 내면세계의 탐색을 떠나는 상징 여행의 이야기가 있다. 남녀 상호존중과 상호의존 관계라는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하는 다른 사람들과 외부 세계에 대한 이해의 토대를 구축토록 하는 정말 아름다운 동화다. 인생의 진짜 보화는 물질적 부가 아니라는 통찰의 실현을 약속해주는 다른 세계가 있는 길로의 안내이며, 유토피아적 성적 탐색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맥도널드는 상상력과 도덕적 위력의 끊임없는 발휘를 재촉하여 이상사회를 향한 인류의 걸음을 재촉하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사회적 명성에 연정을 품고 권위와 지배 계급이 요구하는 질서에 순응적이었던 안데르센의 대척점에 오스카 와일드가 있다고 해도 될 것 같다. 그는 사회적 관습과 권위에 머리 조아리기를 거부했으며, 규범을 깨뜨리면서 잔인한 계급의 정의 체계가 보여주는 억압적 관용을 끊임없이 시험한 용납될 수 없는 사람이라 불릴 정도였다. 그는 동화 창작의 근본 목적을 전복이라 공언했으며, 기성사회 옹호론과 결별하고, 빅토리아 시대의 사회 문제를 반영하여 변혁하고자하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던 작가였다.

 

다행스럽게도 국내에 그의 동화집 두 편인 행복한 왕자와 그 밖의 이야기들(이하 행복한 왕자로 표기함 『석류의 집이 한 권의 책으로 엮여 오스카 와일드의 아홉 가지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어 있다. 그는 여기서 사회가 청소년들에게 조건반사 체계를 주입하는 방식, 정해진 규칙에 순응하지 않는 자에게 가하는 처벌방식의 부조리함에 강력하게 저항하며, 엄청난 불평등의 사회가 지배계급에 얼마나 큰 책임이 있는지를 깨우치게 한다.

 

동화집 행복한 왕자에는 동명의 동화 행복한 왕자가 있는데, 이는 납으로 제작된 죽은 왕자의 동상이다. 왕자는 비로소 높게 세워진 동상이 됨으로써 백성이 얼마나 고통 받는지 알게 된다. 생전의 무관심과 이기심을 보상하기 위해 헌신적 제비를 통해 재물을 나눠주고 구휼한다. 결국 제비는 추운 겨울에 왕자 곁을 지키다 세상을 등지고, 시장과 의원들은 왕자의 동상을 녹인다. 그리고는 자신들의 동상을 세우기를 갈구한다. 동화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왕자라는 한 인간의 개인적 행동은 빈곤과 불의와 착취를 끝내기에 충분치 못하다는 것을 드러낸다. 도시는 여전히 시장과 시의원들의 지배하에 있다. 우쭐대는 이 광대들이 분명 사리사욕을 채우기에 급급할 것이고 왕자와 제비의 박애적 행동은 곧 잊혀지고 말 것임을 안다. 탐욕과 허세를 조장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가치 체계와 질서의 근본적 변혁 없이는 결코 새로운 세계는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암시한다. 와일드 동화의 강력한 힘은 바로 여기에 있다. 결코 해결되지 않는 긴장에서 나온다는 말이다.

 

그래서 와일드는 지배와 착취의 메커니즘에 맞서 투쟁하기 위해서는 먼저 기존의 문명화과정이 인간성의 퇴화에 이바지 하는 방식을 이해하는 것이었고, 이의 작동 방식을 매우 분명하게 묘사한 동화들이 석류 나무집에 수록된 어린 왕, 별 아이 등 네 작품이다. 어린 왕의주인공은 염소 치는 소년이 어느 날 왕족 할아버지의 유일한 상속자로 밝혀지면서 왕으로 즉위하게 되는 이야기다. 소년은 사교계의 아름다움이 노동자에 대한 잔인한 착취에 토대를 두고 있다는 사실에 눈을 뜨고, 대관식에 화려한 복식과 빛나는 왕관을 쓰기를 거부하고 염소 칠 때 입었던 옷과 찔레나무 관을 쓰고 대관식을 치른다. 구경꾼들은 왕의 허름한 모습에서 더 없는 품위와 찬란함을 본다. 자신의 잠재력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이 진정으로 자유로워야 한다는 깨달음에서 비롯된 장면이다.

 

그런데도 역시 작가는 사회적 반목이 작품이 끝날 때까지 해결되지 않은 상태로 열어둔다. 한 사람의 실천으로 사회의 케케묵은 수구성이 사라지지 않는 것과 같다. 그는 이렇게 열어 둠으로써 왜 우리가 사는 세계의 사회관계는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가에 대한 반성의 물음을 하게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 동화는 위선적 사회 관습과 지배질서가 지닌 이중적 척도가 부당하게 지배체제를 유지하는 방식을 묘사하여 그 실체를 숙고하게 만드는 노력이라 할 수 있다. 이 작품과 흡사하면서도 또 다른 울림을 전하는 동화인 별 아이는 안데르센의 미운 오리 새끼를 역전시킨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일종의 본질주의에 대한 철저한 조롱을 담고 있다. 오만함과 잔인성과 이기심을 모두 갖춘 준수한 외모의 소년이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함부로 대하지만, 그 자신이 추하게 됨으로써 함부로 대했던 사람들의 입장에 처하게 된다. 이후 시련을 겪고 왕이 되어 백성을 자비로 다스린다는 이야기다.

 

와일드는 주인공 한 사람의 끝이 좋으면 다 좋다는 식으로 끝나는 고전 동화의 위선을 전복시킨다. 그리고는   그러나 그는 오래 다스리지 못했다. 3년을 보내고 세상을 떠난 것은 그가 겪은 고통이 극심했고, 그를 시험한 불길이 너무 뜨거웠음이라. 그의 뒤를 이은 자()는 다스림에 악()했도다.” 작가는 아름다움, 선의 본질이 드러나기 위해서는 사회에서 지배관계 자체를 제거해야 한다고 천명하는 것이다. 이처럼 와일드는 안데르센의 동화 작품을 역전시켜 새로 쓴 작품들을 많이 썼다. 인어 공주를 역전시킨 어부와 그의 영혼도 그 한 예가 될 것이다. 인어공주가 자신의 꼬리가 다리가 될 때의 고통이 이 작품에서는 인어를 사랑하게 된 어부의 사회적 관습의 상징인 영혼의 복수로 인한 고통으로 대치된다. 성과 계급의 전복이다. 그리고 어부가 죽는 순간 비로소 인어와 하나가 된다. 안데르센이 고통을 합리화했던 기독교의 위선을 고발하는 것이고, 이렇게 훌륭한 사람이 왜 우리 사회 내부에서는 자신의 꿈을 이룰 수 없나를 자문케 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성차별적이고 인종차별적이며, 성역할을 엄격하게 구분하는 사회과 과정을 강조하고, 권위주의와 지배질서에의 순응을 내면화시키고자 한 페로, 그림형제, 안데르센 부류의 고전동화의 획일적 사회화 과정에 적응시키려하는 순응주의적 동화가 더 이상 우리 아이들의 고전독서 목록에 자리 잡지 못하게 되어야하지 않겠는가? 라는 물음을 꽤나 오래 한 것만 같다. 조지 맥도널드와 오스카 와일드, 그리고 프랭크 바움의 창조적 사유와 자신과 외부세계와의 관계 등에 대한 사유로 안내하는 동화들의 세계가 더욱 바람직하지 않겠는가? 또한 우리에게 낯설지만 인도를 비롯 페르시아, 그리스 등 고대 우화의 세계가 특정 이데올로기에 편향되지 않고 드넒은 삶의 세계를 탐험하는 유익한 읽기가 되리라 생각된다.

 

살욕(殺慾,파괴)과 생식욕(生殖慾,창조)의 이 상극(相剋)적 질서 체계가 바로 우리네 인간이 사는 지상의 현실계임을 말하며, ‘->->마음을 토대로 하는 인간의 진화론적 틀을 규명하고자 했던, 그래서 , 小說하기의 스러움!”이라 수없이 반복하여 뇌까려야 했던 한 작가의 잡설이 이렇게 전복의 동화에까지 이르게 했다. 독서란 어쩌면 이렇게 널뛰는 정신의 방랑인지도 모르겠다. 그러함으로써 예기치 못한 앎의 세계를 거닐게 되고, 아주 작은 앎의 지평이 조금 축적된다. 아마 지배 질서에 켜켜이 내려앉은 곰팡이를 제거하는 데는 동화만큼 적절한 형식도 없으리라. (, 讀書하기의 스러움이란!)

 

사회적 행위를 가능케 하기 위해서는 도덕적, 미학적 감수성을 길러야 한다.” 는 오스카 와일드의 문장은 우리를 에워싼 회색빛 세계를 벗어날 출구를 보여주고, 창조적 에너지를 일깨우는 동화의 위력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고 경고한다. 출판과 영상시장에 감시를 게을리 하는 순간 우리의 아이들은 길들여지고 체제에 순응하는 이솝의 왕을 요구한  연못 속 개구리들처럼 우리의 세계는 나락으로 가는 과정에 있을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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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나는 사랑에 목말라하고 있는가 보다. 계절이 바뀌는 까닭일까? 부쩍 사람의 마음이 그립다. 그러다보니 읽는 책들의 글마다 마음, 손길, 친구, 선한 영향력, 동고와 같은 단어들에 시선이 붙들려 꼼짝하지 않곤 한다. "모든 참되고 순수한 사랑은 동고(同苦)이고 동고가 아닌 모든 사랑은 사욕이다." 라는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4의지로서의 세계에 대한 제 2고찰의 한 문장이 그 시작점이 될 것 같다.

 

예스런 동고(同苦)’라는 단어를 말하는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의 사유로부터 우리 인간의 모든 고민과 고통을 읽는다. 그가 말하는 의지(wille;意志)란 인간의 욕망에 따라 통제, 지향할 수 없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그것 자체로 존재하게 하는 힘을 의미한다. 때문에 우주 전체를 관통하는 목적 없는 충동인 이 의지를 인간은 다만 오감으로 직관하여 파악할 뿐인 표상으로서 이해할 수 있을 밖에 없다.

 

이 목적 없는 움직임인 의지를 이해하지 못함으로 인해 야기되는 인간의 모든 번민과 고통은 바로 타자인 개체가 바로 의 의지의 표상에 불과함을 인식하지 못하는데서 오는 착각이라는 것을 수시로 망각하곤 한다. 타자인 실재와 내 의지의 표상과의 불가피한 간극, 그로부터 출현하는 서로 다른 의지들의 충돌로 갈등하고 적대한다.

 

우리 인간 모두는 의지의 현상체에 불과한 것을, 의지에 어쩔 수 없이 좌우될 수밖에 없는 존재들인 것을 이해하게 된다면 우린 서로 애틋하게 바라볼 수 있을 텐데 말이다. 그래서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의 고통을 자신의 것으로 느낄 수 있는 사람의 성정을 뜻하는 '동고(同苦)'야말로 모든 참되고 순수한 사랑의 유일한 동기라 말할 수 있는 것일 게다. 모든 존재가 의지의 맹목성에 좌우되기에 고통에 시달린다는 것을 인식할 줄 아는 삶의 의지에 대한 통찰이 아무렴 요구되는 즈음이다. 사실 안다고 해결되는 일은 아닐 것이다.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각성하고 의지로부터 자유, 의지의 부정으로 나아가는 평정의 길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치열한 자기 성찰의 길은 가까우면서 한없이 멀게만 느껴지기도 한다,

 

이제 얼추 나이든 세대에 속하게 되면서 내 삶에서 친구나 신의(信義)의 자리에 고작 메마른 성()이나 자리를 차지하고, 게다가 우정은 동성애라는 의심의 눈초리로까지 변질되어 우정이 발 딛을 공간이 극히 협소해졌음을 느끼게 된다. 사람간의 유대를 점점 상실해가는 지금, 내 주변의 공동체는 부쩍 약화되어가고, 동고의 연민은 극단적으로 희소해졌음을 체감한다. 18세기 실학자 이덕무는 청장관전서63권에 이렇게 쓰고 있다.

 

"마음에 드는 계절에, 마음이 맞는 친구를 만나, 마음에 있는 이야기를 나누며, 마음에 드는 글을 읽으면, 이보다 더한 즐거움이 없다. 하지만 이런 기회가 얼마나 드문지! 일생을 통틀어 몇 번이나 올까?"

 

청장관(靑莊館) 이덕무(李德懋, 1741~1793)는 지성과 사랑, 아름다움과 윤리가 함께 어우러진 벗과의 이 드문 교류를 '최상의 즐거움'이라 말했다. 오랜 굶주림으로 팔 만한 물건이라곤 맹자일곱 권이 전부였던 청장관은 이를 팔아 밥을 실컷 먹고 희희낙락하여 벗 유득공(柳得恭 1748~1807)을 찾아가 자랑한다. 이 말을 들은 영재(冷齋, 유득공)또한 굶주리고 있던 터라 좌씨전을 팔아 술을 사다 함께 마시며 이렇게 맹자와 좌구명을 칭송한다. "맹자가 친히 밥을 지어 나를 먹이고, 좌구명이 손수 술을 따라 나에게 권한 것과 무엇이 다르겠소.(간본아정유고6)"

 

찾아 온 벗을 대접할 길 없는 가난했던 영재의 마음이나, 책을 팔아 밥을 먹었다는 거짓없는 삶의 얘기를 들려주는 청장관의 스스럼없는 대화가 그들이 아끼는 책의 이야기와 어울려 삶과 우정이라는 그 소소한 일상의 진의를 엿보게 해준다. 이것이 동고이고 사랑이 아니라면 그 무엇을 사랑이라 할까?

 

중국 공푸전옌 영화사 부사장이자 신시대 여성을 대표하는 후이구냥(輝姑孃)은 의기소침해진 우리들이 결코 혼자가 아니라고 말하며, 세상은 몰래 당신을 응원하고 있다.”고 사방팔방 온통 장벽으로 막힌 듯 어떤 돌파구도 찾지 못해 좌절과 체념으로 포기와 죽음같은 나락으로 떨어진 우리들에게 용기를 불어넣어준다. 우리들이 미처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곳에서 응원하고 부축하고 기도해주는 누군가가 반드시 있다는 믿음의 존재함을 강조한다.

 

그것은 어느 날 무심히 내민 손길이나 신경 쓰지도 않던 평범한 말 한마디가 우리의 영혼을 두들기고 구원의 한줄기 빛이 되어 용기와 희망의 언어가 되어준다는 것이다. 세상은 어쩌면 전혀 기대치 않는 때에 우리에게 온기를 보내고, 고통스런 인생을 바꿀 용기를 주어 그 자신을 증명하는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라는 개체를 중심으로 세계를 생각하고 자신의 구현된 의지만을 긍정하려 할 때 얼마나 무시무시한 오류, 오판을 저지르는가? 내 외로움은 어디선가 응원하고 있을 또 다른 의지의 이해로 위안을 받는다. 고작 표상에 붙들려 갈구하는 이 척박한 외로움에 대한 소박한 이해가 나의 걸음에 용기를 불어넣는다.

 

불현 듯 "추론이라는 것은 대부분 우리가 믿고 있는대로 계속 믿기 위한 논리를 찾는 과정일 뿐이다."라는 구절이 떠오른다. 한없이 우호적인 환경 속에서도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의 생각으로 바꾸기는 사실 불가능하다는 것을 느끼곤 한다. 아마 나는 서로 다른 의지의 소산인 그 분개하는 마음을 알기에 오히려 내 마음을 걸어 잠그기 일쑤였던 것 같다. 아마 내 믿음이라는 자존감을 형성하는 근본 축의 훼손을 방어하기 위한 무의식적 행동이었을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인간관계에 대한 힌트를 제공한다. 이를 반대로 투영하는 것이다. 타인의 자존감을 존중해주어 그의 믿음이 훼손당했다고 생각지 않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또한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동고일 것이다. 상대의 의견을 진심으로 인정하는 것, 공감이라는 우호적 존중은 곧 친근감으로 돌아오고 그럼으로써 상대가 자신의 의견을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는 여유와 관대함으로 이어지고, 급기야 자신의 추론을 변경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낸다는 것. 우리 인간의 신념이란 수많은 약점을 태생적으로 지니고 있다, 이를 인정한다면 우리들은 서로 동류(同類)에 대한 연민을 바탕으로 한 관계를 마련해 낼 수 있지 않을까?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파듯, 사랑을 찾기 위한 내 인식을 돌아보는 시간을 갖는다. 선한 영향력을 주고 우정을 쌓는데 인간의 생래적 취약점을 어루만지는 능력을 갖는 것이 당연히 그 시작이 되어야 한다는 가르침들은 분명 나만 모르는 비밀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제 조금은 어제보다 나은 세상이 펼쳐지기를 기대해 본다. 서로의 마음이 부둥켜안고 어루만져주는 그런 동고의 세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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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니스와프 렘 <존재주식회사>의 예술적 존재론

 

폴란드 출신의 Sci-Fi 작가 스타니스와프 렘의 소설 존재주식회사(Being Ins.)라는 익살맞은 제목을 한 다분히 과장된 상상력의 작품을 읽다가 존재론에 얽혀있는 한 문장이 스치듯 떠올랐다. 존재론의 근본적 특징은 사람다움을 이해하기 위한 인간 조건을 규명하기 위한 것이라는 문구다. 우리는 대개 지금 사는 자신의 삶의 여정과는 다른 삶의 가능성을 꿈꾸는 존재들이다. 물론 이를 부정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건 그들의 생각에 맡겨두고 논의의 대상으로 할 생각이 없다.

 

다시 말해 인간조건이라는 존재의 비밀을 찾으려는 필요가 존재론이라는 말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따라서 존재론이란 여기 있는 세계와는 다른 세계에 대한 탐색이고, 무언가 성취를 위해 달려가야만 할 것 같은 시대에 번번이 실패하는 것들이나 어떤 불명확한 모호함을 말해야겠다는 생각이라 할 것이다. 이 소설을 읽으려니 존재론에 대한 간단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했기에 기억을 떠올려 봤다. 어쩌면 이 문장이 이 소설의 전제이자 주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다.

 

렘의 <Being Inc.>는 미국도서관이 발행, ‘앨리스타 웨인라이트가 지은 동명의 소설 Being Inc.에 대한 일종의 비평문의 형식을 한 소설이다. 사실 비평의 대상이 된 웨인라이트의 소설은 이 지어낸 존재하지 않은 허구의 작가와 저작물이고, 하나의 유머로서 비평 임직한 형식을 취하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렘은 인간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삶의 영역에 대해 말하기 시작한다. 존재주식회사란 바로 이러한 개인들의 삶의 영역에 존재하지 않는, 지금 여기 없어서 있지만 없다고 간주되는 것을 더듬어 찾는 일을 해주는 비즈니스 회사다.

 

우리가 삶에서 기대하는 것

 

사람들은 상품이나 서비스를 구입할 때 그것만을 구입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어떤 친밀한 감각이나 호의적 관계에 대한 기대가 포함된 비용을 지불한다고 여긴다. 이를테면 변호사를 선임한다는 것은 전문가적 조언 + 안전하다는 감각을 함께 구입하는 것이고, 비행기표 가격에는 목적지 도착을 위한 기체의 이용 + 승무원들의 아름다운 미소와 정중한 친절’”이 포함된 것이라 생각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소위 프라이빗 터치(Private Touch)’에 비용을 지불하는 경향이 있다는 말이다.

 

문제는 우리들의 삶 자체는 이러한 접촉만으로 흘러가지 않고, 그 반대로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접촉과 관계는 돈을 내고 구입하는 서비스 영역을 넘어서는 영역에 있다는 것이다. 참 얄궂은 것이 인간이 삶에 기대하는 태도다. 이제 세상은 전통적으로 비시장 규범이 지배하던 삶의 영역으로 시장이 확대되면서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란 없다는 듯, 시장의 도덕적 한계가 붕괴되고 있다. 생명과 죽음까지 거래 대상으로 밀고 들어오고 있어 아마 우리의 민법 103조   선량한 풍속이나 기타 사회질서에 위반하면 무효라는 조항은 사문화될 가능성이 높다고 예상할 수 있을 정도다.

 

소설로 돌아가서, 돈 내고 구입하는 서비스 영역을 넘어서는 것이란 우리가 기대하거나 꿈꾸던 대로 행동해주기를 주문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이를테면 어떤 호의나 타인이 자발적으로 나에게 느끼는 호감이나 충직함을 구입하는 것이 불가능 한 것처럼, 이해관계와 상관없는 감정들에 대한 그리움으로 사람들은 괴로워한다는 것이다. 이같이 삶의 기대란 어떤 강력한 권력이나 돈으로 강요해서 구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결국 막대한 재력이나 특권을 가지고도 넘을 수 없는 이 벽이 자신들을 갈라놓을 때, 이들은 특권을 내려놓고 진정성이란 것을 찾아 나선다. 우리네 일상에서 이러한 예는 곧잘 화제가 되기도 하는데, 재벌총수가 뒤늦게 순수한 사랑을 찾아나서는 것이나, 대중 속에 은근히 다가서려는 사회관계망 속에 나타나는 행위 등등을 이러한 징후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존재론적 물음으로써 존재주식회사

 

거의 모든 것이 상품화되고 거래의 대상이 되었지만 친밀하거나 공식적이거나 사적이거나 공적인 일상생활의 본질적 본분이며 그 결과 저 자질구레한 패배, 비웃음, 근심, 반목, 경멸에 우리는 시달릴 수밖에 없는 것이고, 때문에 돈 주고 피할 수도 없으며, 결국 개인의 운명에 달린 문제로 이해될 도리밖에 없다는 것이다. ‘존재주식회사는 바로 이 지점을 거대한 일상생활의 서비스 산업으로 삼은 기업이다. 즉 인간의 모든 삶을 강력한 서비스 산업의 주의 깊은 통제 하에 놓아 그 어떤 우연한 사건들도 존재할 수 없도록 완벽하게 미리 준비된 사건들로 조직하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 삶에서 어떤 우연도 없는 개인 자신이 원하는 삶만이 펼쳐지는 인생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이전 사회의 불행은, 타고난 성정과 실제 삶의 길을 조화시킬 방법을 찾아내지 못했다는 데 있다는 것, 즉 역할이 무작위적 운이 결정하는 일이 얼마나 자주 일어났던가.”

 

존재주식회사는 바로 이 무작위적 운이 결정하는 삶을 개인의 타고난 성정에 부합하는 삶으로 완벽하게 일치시켜주는, 즉 개인의 의지가 타인이나 운에 의해 충돌하는 경우를 제거한 완전히 소망이 충족된 삶을 보장해주는 일을 하는 곳이다. 예를 들어 어느 고객이  엄격한 판사가 되어 사형을 언도하고 싶어 한다고 하면, ‘존재주식회사는 그 소원에 따라 사형으로만 다스릴 수 있는 범죄자들이 기소되어 그의 앞에 늘어서게만들어내는 것이다. 이 고객은 자기 삶의 의지에 반하는 어떤 경우도 일상에서 만나지 못함으로써 그 어떤 조잡한 실패조차도 끼어들지 않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존재주식회사는 수천 명의 사람들이 연관되는 우연의 덩어리를 조직해서 완벽하게 한 인간의 삶에 펼쳐질 모든 사건을 조작해 내는 것이다. 다시 말해 고객의 운명을 돌보면서 눈에 보이지 않게 모든 실패와 좌절, 장벽이 말끔히 제거된 삶을 펼쳐주는 것이다.

 

이제 모든 인간 삶의 세계에는 더 이상 아무도 자연적으로 태어나지도 사망하지도 못하고, 아무도 아무것도, 직접 자기 혼자서 끝까지 경험하지도 못하는데, 모든 사람의 생각 하나하나, 모든 두려움, 고통 또한 존재주식회사의 거대한 컴퓨터의 대수학적 계산들을 연결하는 고리가 되었기 때문이다. 삶의 완전한 조정으로 시장 바깥의 가치들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기에 죄와 벌이라든가, 선악의 개념도 공허한 개념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완벽하게 미리 마련된 삶, 책임감이라는 짐을 영원히 벗어던진 삶을 살 수 있게 된 세계만이 펼쳐진다. 일체의 우연이란 존재하지 않는 삶, 완벽하게 논리적 조작에 의해 주체의 자발성과 자유라는 감각과도 충동하지 않는 조작을 만들어내는 서비스가 제공되는 세계가 진정 펼쳐질 수 있다면  누가 알겠는가, 삶은 덜 괴로워질지도 모른다.”고 소설은 비평의 글을 맺는다.

 

마이클 샌델이 지적했듯, 우리는 어떤 대상이 돈으로 거래되는 것에 대해 거북함과 불쾌감, 부정적 의식을 느끼며, 이 감정을 느끼게 하는 본질적 요인을 설명하는데 애를 먹는다. 아마 그중 가장 불쾌한 것은 인간의 생명자체를 상품으로 취급하고 우리의 도덕적 감정을 잠식하는 생명, 인륜, 개인의 자유 등에 대한 파괴의 감정들일 것이다. 결국 이러한 비시장의 규범이 지배하는 삶의 영역에 부패성을 내재한 시장이라는 것이 침식해 들어오는 것에 대한 반감이다. 그것은 우리들이 지니고 있는 도덕적 미덕이나 도덕적 양식의 파괴이고, 그러함으로써 계층의 구별짓기와 소통의 단절, 적대화 등 인류 사회의 건강성 훼손에 대한 강한 거부감이다.

 

그런데, 렘의 이 소설은 인간 삶의 여정 자체가 상품화되어 거래되는 세계이다. 이러한 세계에서는 소위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라는 비시장적 규범에 의해 전통적인 가치라는 것이 존재할 여지가 없는 세계이다. 이렇게까지 시장이 끝까지 밀어부친 세계에 도달하면 존재론이란 것도 무용해지는 데, 인간 조건의 규명이라는 것도 더 이상의 의미를 상실해버리기 때문이다. 이제 갈등도 충돌도 없이 소망하는 세계만이 펼쳐지는 삶으로, 모든 인간들이 완전히 충족하는 세계가 펼쳐질 수 있다면 렘의 긍정적 비평처럼 제법 쓸만한 세계라고도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소설의 사기성, 그 실패로서의 예술

 

한편, 이 소설이 사기인 것은 소설의 대상인 소설에도 이야기하듯 존재주식회사는 독점이 아니라는 것이다. 담합 금지법에 따라 거대한 경쟁기업인 헤도니틱스(Hedonitics)와 참삶사(True Life co.,)가 있어 어떤 고객에 펼쳐질 미래의 사건이 경쟁사 고객의 미래 사건과 충돌하는 경우가 발생한다는 점이다. 경쟁사들의 컴퓨터에 의한 조작이 각자 자기 고객 삶의 전개에 충실하려 하기 때문에 조작의 격렬화(조격)’라는 대재앙이 발생한다. 소설은 이러한 재앙이 9년에 2회 발생했다고 축소 과장하지만, 이는 경쟁사간의 충돌 문제를 떠나서 인간 삶의 문제란 바로 이러한 무수한 갈등과 충돌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이다. 사실 소설이란 과장된 허구로, 가능성의 예술로 이해하는 것이지만, 잠깐의 허풍스러운 상상에 취하는 즐거움이면 충분하다고 관대함을 베풀면 될 것이다.

 

정말 중요한 이야기가 남아있다. 괴짜 백만장자인 제사민 체스트 부인이란 여인이 자신이 가진 모든 재산을 마지막 한 푼까지 지불할 준비가 되어있다며, 모든 조작의 개입에서 벗어난 순수하게 진정한 삶을 갈망하며 이러한 소망을 실현시켜 달라고 주문하는 것이다. 이미 조작된 세계에서 조작의 부재를 조작하는 것은 이제 그 어떤 요청보다 어려운 것으로 판명된다. 그리고 이 조작의 부재 가능성을 탐구한 결과 삶의 자발성이란 없으며, 이미 오래전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임을 밝혀낸다.

 


, 오늘 우리들이 사는 삶이란 이 말처럼 어느 만큼은 이미 조작된, 미리 연출되지 않은 채로 진행되는 사건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는 말이기도 하다. 젠장, 정치에서의 권력이 하는 작의적인 무수한 조작들, 기업들과 상업시장에서 이루어지는 또한 무한한 조작들, 인간들 간의 자질구레한 인위적이고 전략적 조작들 속에서 이미 살아가고 있는데 이 조작들의 개입에서 완전히 벗어난 순수한 삶을 산다는 요구야말로 실현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단 번에 지금까지의 존재주식회사의 세계는 한 방에 와해되고 만다. 한바탕 꿈속을 거닐다가 추락한 느낌이다.

 

삶의 가능성을 탐사하는 존재론이란  우리를 인도하는 빛이 아니라 모든 규정이 지워지는 어둠이다.”라는 말이 성큼 마음 깊은 곳을 깨어나게 한다. 존재론은 거절당한 자의 사유이며,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존재를 읽기위해서는 예술이 필요하다.”고 철학자 이진경예술 존재에 휘말리다에 썼다. 이렇게 생각하면 렘의 이 소설은 인간 삶의 존재란 무엇인지 분명하게 인식시키려했던 것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취약함을 간취하고, 모호한 다의성 속으로 끌고 들어가려 한 것이라는, 존재의 확실한 이유를 찾기보다는 이유없이 말려들게 되는 운명적 사태를 보여주려 했다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한 방에 와해되었다고 느낀 것, ‘앨리스타 웨인라이트의 소설 Being Inc.의 드러난 사기성, 그 실패란 뜻하지 않은 것을 보게 함으로써, 세계의 진실은 실패 속에 있음을, 비록 존재주식회사라는 과학의 성공을 향한 걸음에도 불구하고 예술은 실패를 향해 감으로써 진실을 보여준다는 정말의 존재론을 증명하는 것이라는 지점에 이르게 된다. 존재는 밝은 빛으로 비추면 달아난다고 한다. 인간 존재의 가변적이며 모호한 존재를 붙잡는 것은 이렇듯 실패의 예술을 통해서만 어렴풋 다가서는 것일 테다.

 

스타니스와프 렘의 소설들은 하나의 에피소드적 상상력이자 아이디어에 대한 실험 사고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을 불가해한 인간 존재를 탐험하는 미래의 철학자라 말하지만 나는 그를 타고난 예술가라 말하고 싶다. 그는 결코 근거의 확실성을 확인하고 진리와 거짓을 입증하는 데 관심을 두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존재론을 설명하거나 주장하는 이가 아니라 단지 지금 여기없는 것들을 불러내는 예술가인 까닭이다. 뒤늦게 예술작품을 발견한 기쁨을 만끽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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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 같군, 내가 죽고 나도 수치는 살아남을 것 같다.” -프란츠 카프카, 소송

 

프랑스의 사회철학자 프레데리크 그로는 그의 저술 수치심은 혁명적 감정이다에서 장 폴샤르트르  우리는 대중 앞에서만 수치심을 느낄 수 있다.’ 빈틈 많은 주장을 인용하면서 타자는 꼭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인간 내부에 있는 수많은 눈과 같은 무엇이 있음을 지적한다. 요즈음 많은 사람들이 사욕으로 똘똘 뭉친 한 인간의 끔찍한 짓, 비열한 짓거리와 그 타락하고 부패한 처신을 보며, “대체 저 인간은 어떻게 수치심도 안 느끼고, 자기 눈길을 견딜까?”라며 수치심이 부재한 인간에 대한 의아의 탄식과 분노를 쏟아낸다.

 

프란츠 카프카의 단편작품에 개의 연구(이하 연구로 표기함)라는 의미심장한 미완성 소설이 있다. 카프카의 생애 말년 소설인데, 주인공인 는 작가를 대변하는 유대인이다. 이 개는 그 유례가 명확히 밝혀진 존재인데, 갈색 노트로 알려진 1922년에 기록된 글을 담은 카프카의 네 번째 노트에 제목도 없이 미완성으로 써진 이야기다. 카프카는  이것은 전기가 아니다. 하지만 더없이 축소된 요소들에 대한 발견이자 탐구이다.”라고 썼다. 이 말은 그의 생애를 장악한 당치 않는 모욕으로 벗어날 수 없는 해결 불가능한 수치심에 고뇌했던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의 집요한 연구임을 의미한다.

 

조금 사유를 건너뛰어, 유대인을 향해 적들이 사용하던 ()’가 왜 프란츠 소설의 주인공이 되었는가부터 이야기를 풀어가야 할 것 같다. 개는 주변의 부정적 시선이 유발하는 수치스런 단어다. 그런가하면 이 단어를 유대인 내부에서 다른 유대인을 향해서도 뱉어내는 단어이기도 했다. ()들과 함께 누워있으면 벼룩이 옮는다.”. 프란츠와 우정을 나누는 동유럽 출신의 유대인 친구인 뢰비를 향해 아버지 헤르만 카프카가 모욕적 언사로 내뱉기도 한다. 프란츠는 아버지에게 격렬한 분노를 터뜨리고, 즉각 이 말을 기원으로 문법적으로 반박할 수 없는 두 개의 문장을 만든다.

 

그것은  벼룩이 옮은 자는 그 자신이 벼룩이다.”와  개들과 함께 누운 자는 그 자신이 개다.”이다. 아마 카프카를 읽은 사람이라면 모두 아는 잠에서 깬 잠자가 자신이 거대한 갑충임을 발견하는 변신이 바로 변형시킨 첫 문장을 출발점으로 한 것임을 알아차릴 것이다. 그리고 후자는 여러 작품에 사용되는 데, 그 첫째가 소송의 마지막 부분인  개 같이죽는 자신의 모습이고, 두 번째가 <유형지에서>의 탐험가 행위다.  내가 이 일을 보고도 묵인한다면 난 개다!”라고 말하면서 곧 네 발로 달리기 시작하는 장면이다.

 

그리고 그 대단원이 바로 연구. 즉 유대인들 자신들이 처한 해결 불능의 수치심에 작동하는 메커니즘의 집요한 탐사 이야기다. 제목이 아주 얄궂은 데, 이는 두 번째 문장을 변형한 2차 변형문장으로부터 출현한 것이다.(이 모두 카프카의 일기와 노트에 근거한 것이다.)  유대인이 개라면 개는 유대인이다.”라는 것이다. 즉 소설 연구의 주인공인 개는 바로 유대인인 작가의 분신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소설의 줄거리를 장황하게 늘어놓을 생각은 추호도 없다.

 

다만 이 이야기는 개를 주인공으로 한 우화가 절대 아니며, 절망한 유대인 남자가 또렷한 정신으로 내면으로부터 세세하게 관찰한 구체적 현실의 이야기라는 것만을 밝혀둔다.  사회적으로 아주 그럴듯한 직책을 맡고 있던 나였지만 말이다. 아니 매우 자주 주변의 친밀한 관계에마저 어떤 불편한 감정이 깃들어 있었다. 그래서 내 동료들을 그저 보기만 해도, 어떤 새로운 각도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나는 불편함과 두려움, 당혹감을 느껴야 했다.”  소설의 이 한 단락만을 인용해도 곧바로 유대인이라는 단어가 텍스트에서 절로 떠올라 유령처럼 쫓아 버릴 수 없음을 경험하게 된다.

 

자기애성 수치심을 말하기 위해 에둘러왔다. 수치심은 대중 앞에서만 느끼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의 타자로 인해서 느끼는 것이라는 말로 다시 돌아가면, 카프카는 자기의식의 판관이 될 수 있는 완벽하게 분리된, 즉 외재성처럼 투사하는 내면의 법정이 있었다. 압도하는 도덕적 의식이라는 내면의 지엄한 눈에 사로잡힌 존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우리들은 내면에 무수한 타자를 지니고 있다. 프레데리크 그로가 자아의 형태에 따라 세 가지 수치심을 설명하는 글이 카프카로 냉큼 건너뛰게 했는데, 이 널뛰기의 욕구는 현실 한국사회의 수치심 부재, 혹은 수치심을 자기 것으로 삼을 줄 모르는 원초적 나르시시스트, 정신이 성장하지 못한 어린아이 짓거리에 대한 그 불모성의 이론적 확인 가능성 때문이었다.

 

프란츠 카프카는 삼중의 수치심에서 해방되지 못했는데, 개인성을 주눅 들게 하는 주변 환경의 시선이 일차적이고, 그 수치심의 근원인 유대 집단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주류 사회에 동화(同化)하려는 행위에 내재된 부당함을 지지하고 승인하는 스스로에 대한 수치심이 이차적이며, 동화를 희구하는 유대인과 다른 유대인이 서로 경멸하는 유대공동체 내부에서 벌어지는 꼴사나움, 스스로에게 눈먼 바로 그들과 동족이라는 데서 연원하는 수치심이다. 이처럼 한 인간은 온통 도덕의식에 휩싸여 인간 실존의 고통에 대한 후대를 향한 풍부한 탐구의 초석을 남겼는가하면, 오늘 이 땅의 어떤 인간들은 이 엄중한 실재하는 도덕적 정서가 어떻게 부재할 수 있는가의 의문을 던지게 한다.

 

이 물음이 중요한 이유가 있다. 수치심이란 개인의 심리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역학에 달린 것이기에 카프카를 에워싼 수치의 고뇌는 자신과 가족, 유대 집단에 대한 연민과 유대를 토대로 한 것일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때문에 수치심이 부재하다는 것은 애초에 사회 공동체에 대한 자신의 뿌리를 내리지 않거나 않으려는 인간임을 의미한다는 점이다. 즉 공동체의 이익과는 무관한 사적 이익에 집착하는 무리는 절대 수치심이란 것을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dl 이 수치심을 야기하는 내면에 대해 좀 거칠게 프로이트의 자아 분류를 사용한다면 초자아, 이상적 자아, 자아 이상’, 세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

 

초자아란 나를 제압하는 내면의 판관으로서의 눈이다. 즉 나의 도덕적 의식을 키우는 기준이기에 내면의 법정이 야기하는 수치심은 내 행위에 앞서 조심성과 신중함을 부여해 부당하거나 불의한 것을 하지 않도록 제어하게 해준다. 사실 수치심을 좋은 것 나쁜 것이라 말하는 것이 그리 적절한 표현이 되지는 않겠지만, 이를테면 윤리적 수치심이라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수치심이 마냥 유익한 것만은 아니어서 엄격한 판관일 경우 지나치게 삶을 옥죄게 되어 과잉의 수치심, 즉 굴종이 예사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사회적 문제를 크게 야기하는 것은  이상적 자아 또는 자기애성 자아란 것이다. 바로 지금 한국의 정치권력에서 볼 수 있는 것인데, 자신의 정신이 전능한 힘을, 완벽히 제어할 수 있는 전제적 자아를 지니고 있다는 환상을 지니고 있음을 의미한다. 해서 이 전능함이 현실의 벽에 부딪칠 때 자기애성 수치심은 손상을 입게 되고, 패배의 자각을 하게 한다. 이때 이 이상적 자아는 스스로에게 수치심을 허용하지 못하게 하는데, 바로 손상된 상처를 회피토록 하는 것이다. 자신의 무가치함을 참을 수 없는 전제적 자아이기에 이 수치심은 곧바로 타인에게 전가시키는 작업에 돌입하고, 타인을 향해 고함과 욕설을 퍼붓는다. 다시 말해 자신을 희생자로 여기고 자기애성 자아를 쓰다듬는 것이다. 이상적 자아에 결박된 이 자아를  원초적 나르시시즘, 또는 광적 자기애, 아기 폐하로 부르는 이유이다. 학교 폭력의 주체인 아이들, 제왕처럼 군림하려는 작금의 검찰 독재 권력 집단이 수치심이 부재한 뻔뻔함으로 일관하는 것이 바로 이 자기숭배라는 얼빠진 넋을 먹고 자라기 때문이다.

 

이것은 프란츠 카프카를 억압하던 반사된 수치심이기도 한데, 바로 주류 사회에 동화하려는 유대인들에게서 발견되던 그것이기 때문이다. 헤르만 카프카로 대표되는 유대인이면서 반유대주의자인 인간, 프란츠는 아버지로 상징되는 이 어리석음에 대한 수치심과 초자아로서 법이라는 사회적 주류의 시선이 부여하는 수치심에 얽매여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여기에 자아-이상이라는 타인들의 눈에 보이고 싶거나 그들 담론 속에 어울리고 싶은 모습으로서 자아인, 사회적-모델로서의 실패로 인한 수치심, 즉 자기 비하 메커니즘의 작동으로 인한 수치심에 더불어 얽혀있음을 자각하는 것이다. 사회-이상적 수치심은 그 메커니즘의 본질로 인해 프란츠 개인이 돌파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불능성으로 인해 그의 모든 연구는 실패할 수밖에 없는 숙명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리라.

 

프레데리크 그로는 이상적 자아라는 자기애성 인격장애의 일화로 199319일 프랑스에서 발생했던 아내와 두 아이의 살해, 그리고 부모와 개까지 살해한 장클로드 로망이란 인물을 소개하는데, 이는 후일 에마뉘엘 카레르의 실화소설 L'adbersaire으로 알려져 제법 많은 이들이 알게 된 사건이기도 하다. 가짜 의사 면허, 국제 보건기구 관리라는 날조된 삶으로 점철된 거짓말의 악순환을 거듭하던 인간의 이야기다. 자기 전능성의 손상이 전부 외부의 탓으로 전가되어 기만적 삶이 축적된, 가면이 자신의 얼굴이 된 인간이 종국에 돌이킬 수 없게 되자 벌인 희대의 파국적 사건이다.

 

이 이야기는 안느 브레스트의 소설 우편엽서에 등장하는 유대인 에브라임 라비노비치라는 인물을 호출하게 하는데, 바로 주류사회에 동화하기 위해 유대인의 표식을 알아차릴 수 있는 자신의 이름을 프랑스식으로 바꾸려하고, 프랑스인이 되기 위해 귀화신청까지 하는 사람이다. 독일의 프랑스 침공이 눈앞에 다가오고 반유대주의 열풍이 불 때조차 그는  이 모든 건 파리로 쳐들어 온 독일 출신 유대인들 때문이야. 프랑스가 침범 당했다고 느낀 거지, 그래. 그게 맞아.” 라며, 붕괴된 자아를 남의 탓으로 싸매려 한다. 이 자기애성 자아인 이상적 자아는 수치심을 수용하지 못하기에 결국 가족과 자기 파멸이 눈앞에 다가올 때까지 현실을 이해하지 못한다. 가장이 이러할 때, 나아가 국가의 리더가 이렇게 자기애성 자아에 매몰되어 있을 때, 가족과 국민은 파멸에 끌려들어가게 된다.

 

연구의 개는 철학자이자 현자이다. 작가의 이 지적 분신은  내가 아직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그 공동체의 모든 근심을 공유하면서 개들 중에서도 개였을 당시를 뒤돌아보며 세밀히 관찰해 본 결과 애초부터 거기에 뭔가 비정상적인 것, 작은 균열이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소설의 도입부에서 무엇을 말할 것인지를 미리 고지하고 시작한다. 카프카는 자기 자아의 성분과 그 작동 메커니즘을 간파하고 있었다. 소설 연구는 유대인이라는 단어에 깃든 끊임없는 억제의 역동성에 작용하는 요소, 힘들을 집요하리만큼 꼼꼼하게 질문하고 답하는 치열한 자기 탐사다.

 

늦었지만 오늘 우리 사회가 잊어버리거나 상실한 것이 무엇인지 스스로 성찰해 볼 때인 것 같다. 우리들은 수치심을 느끼고 있는가? 프란츠 카프카의 문학 전부가 온통 자신과 공동체 내면의 성찰인 것에 동종의 인간으로서 겸허와 경외를 느끼게 한다. 더 이상 이 땅에서 수치를 모르는 것들!’이란 외침이 나오지 않도록 하기 위해 다시금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갖는다.



참고 문헌 (이 글은 프레데리크 그로와 마르트 로베르의 아래 책에 많은 부분 빚을 졌습니다.)


1) 프란츠 카프카 프란츠 카프카,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37

2) 프레데리크 그로 수치심은 혁명적 감정이다, 책세상

3) 엠마뉘엘 카레르 , 열린책들

4) 안느 브레스트 우편엽서, 사유와공간

5) 프란츠 카프카 소송, 문학동네

6) 마르트 로베르 프란츠 카프카의 고독, 동문선

7) 막스 브로트 나의 카프카, 출판사 솔

8) 장 폴 샤르트르 존재와 무, 동서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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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권() 수를 좀 줄여 조금은 가벼운 한 달을 준비했다. 해서 좀 두꺼운 것으로, 한 권의 책에 긴 호흡을 가져가고 싶은 마음으로 오직 다섯 책만을 선택했다. 우선 옥스퍼드 영문학 교수인 존 캐리가 엮은 역사의 원전(The Faber Book of Reportage)을 읽기 시작했는데, 이제 거의 종착지에 이르렀다. 해설의 덧칠이 없는 순수한 현장기록이라는 서문을 하고 있는데, 서구 중심의 2,500년 인간역사의 기록들이 목격자 기록이라는 기준을 모두 충족하기는 어려울 것이겠지만 나름 근접한 기록물들을 담아내고 있다.

 

현장의 목소리라는 신빙성과 긴박성이 진실을 전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지만, 그 현장성이 진실이라 할 수 있는 것인지는 생각해 볼 또 다른 문제가 될 것이다. 아무튼 이 기록들을 살인 선집이 되지 않도록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르포르타주라는 인간의 관심사는 죽음의 기록들을 벗어나기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시간이었다.

 

각기 MIT와 프린스턴에서 문학과 독문학을 가르치는 하워드 아일런드와 마이클 제닝스 두 교수의 공저인 발터 벤야민 평전(A Critical Life)은 원제목처럼 일생을 비평가의 삶으로 지낸 인간에 대한 전기이다. 다만 이 평전은 개인의 사적 생활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그의 저술들을 근저로 한 사상에 중점을 둔 연대기라 할 수 있겠다. 아마 벤야민을 읽는 이들에게는 개별 저작들의 사유의 기초가 되었던 정황들을 접할 수 있어 독서에 유용한 도움을 받을 수 있으리라 여겨진다.

 


독일 낭만주의 문학운동의 기수였던 프리드리히 슐레겔의 그리스 시문학 연구에 관하여는 새로운 문학의 가능성으로 낭만주의를 탐색하는, 그러면서 기성의 문학에 대한 일견 잔혹한 비평을 담아내고 있는 저작으로 보인다. 지적 자만심에 가득 찬 청년기의 저작으로 현학적 글쓰기가 보인다. 그의 소설들이 근간으로 출간되고 있는데, 참고 도서로 읽을 만할 것이다.

 

그리고 두 편의 소설 작품을 선택했는데, 프랑스 작가 안느 브레스트의 우편엽서와 중국 작가 찬쉐의 격정 세계. 안느 브레스트의 소설은 단 네 사람의 이름만이 적힌 엽서가 도착함으로써 그 이름들의 역사가 술회되는 작품이다. 소설의 주요 제재인 홀로코스트보다는 20세기 유럽사회를 휩쓸던 반유대주의에 어린 인종주의와 그것의 근저를 차지하는 인간 본성에 대한 성찰로 보인다. 욕설을 꽤나 주절거리면서 읽어 나갈 것 같다.

 

찬췌의 소설은 더럽고 악취나는 절망의 양상으로 채워졌음에도 한껏 우아함을 뽐내며 오늘의 정치적 문화적 곤경에 빠진 우리 개별 인간들을 떠올리게 했던 전작(前作) 황니가의 생생한 매혹 때문에 다시 시선이 간 작품이다. 무미건조한 삶, 먹고 사는 게 빠듯한 삶, 대충 건성건성으로 사는 삶, 목표도 의미도 없는 삶....” 이렇게 살아가는 수많은 우리네 삶을 과연 문학이 구원할 수 있을까? 그런 삶들에 다시 격정을 불러 낼 수 있을까를 질문하는 소설 같다. 아마 또 한 번 찬쉐의 세계에 빠져들어야만 할 것 같다. 작품만으로 이미 거장의 반열에 오른 작가에게 하버드, 코넬등에서 문학교재로 찬쉐의 소설이 활용되고 있다는 선전문구는 사족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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