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권 중산층 - 한국 중간계층의 분열과 불안
구해근 지음 / 창비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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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은 빈곤층부터 상위 중산층까지 모두 계층 하락의 불안에 시달리는 특이한 나라다. 언제부터 그랬냐 묻는다면 정확한 연도는 모르지만 적어도 80년대는 그렇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아시아의 네 마리 용. 1989년의 대한민국은 국민의 75%가 '나는 중산층이다'라고 대답하는 나라였다. 실제 이 중 일부는 소득을 기준으로 볼 때 중산층이 아니었음에도 말이다. 이는 당시 한국인들의 계층 상승에 대한 자신감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불과 20년 만에 상황은 완전히 달라진다. 2010년대에 이르러 이 수치는 20%대로 떨어진다. 흥미로운 점은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 중 일부는 소득상 중산층에 속해있었다는 점이다. 2010년대의 한국인은 80년대에 비해 확실히 기가 죽어 있었다.


80년대에는 중소기업을 다니든 대기업을 다니든 동네 슈퍼를 하든 다 고만고만하게 살았다. 원하면 누구나 일자리를 구할 수 있었고 성실히 저축하면 주공, 시영 같은 대단지 저층 아파트와 자가용을 소유하고 둘 정도의 아이를 낳아 기르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 당시의 중산층은 비교적 동질적이고 상향이동의 꿈과 경험을 공유하고 있었다.


분열은 9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시작됐으나 결정적 계기는 누가 뭐래도 IMF일 것이다. 이 경제 재앙을 시작으로 부는 급격히 양극화했으며 비정규직이 폭발적으로 증가하여 소득에서도 큰 격차를 보이기 시작했다. 문제는 고연봉을 받는 대기업 직장인이라고 평화를 찾은 게 아니라는 것이다.


2020년 연말정산 세액결정소득을 기준으로 상위 10%의 연봉은 6,590만 원이었다. 사람에 따라 이는 높게도 낮게도 보일 수 있지만 실제 저 연봉을 받는 사람에게 당신은 중산층이냐고 물어보면 대다수가 그렇지 않다고 대답할 것이다.


주적은 높은 부동산 가격이다. 연봉 6,590만 원의 직장인 A가 중급지에 위치한 전용 59제곱미터의 7억 원짜리 아파트를 구매한다고 가정해 보자. 27살 때부터 저 연봉을 받았다고 가정하고(편의상 이후의 연봉 상승은 없다고 치자) 실수령액의 70%가량인  300만 원을 저축했다 치면(자린고비 뺨치는 구두쇠라고 하자) 33~4살 정도에 현금 2억 원을 확보할 수 있었을 것이다. 대출은 5억 원에 5%. 이를 30년 간 원리금균등분할 상환할 경우 월 납입 원리금은 260만 원에 달한다. 고소득자 A는 넉넉한 중산층 가정을 꾸릴 수 있을까?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외식을 하고 일 년에 한두 번은 해외여행을 다니며 가끔은 문화생활도 하고 중형 세단을 끌며 아이를 둘 정도 낳아 기르는 게 중산층의 조건이라 한다면? 산술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A에게 부모가 물려준 중급지의 7억짜리 아파트가 있다고 해보자. 인생은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갈 것이다.


두 번째 적은 망가진 공교육이다. 대한민국에서 고소득 전문직이 되기 위한 첫 관문은 명문대 입학이다. 명문대 입학생과 부모의 소득이 높은 상관관계를 보인다는 사실은 더 이상 놀라운 일이 아니다. 공교육의 붕괴와 반비례해 사교육비는 증가했다. 상류 중산층은 자신의 지위를 물려주기 위해, 일반 중산층은 어떻게 해서든 그 위치를 따라잡기 위해 경쟁적으로 사교육비를 지출했고 모두가 가난해지는 결과를 낳았다.


미디어의 발달은 중산층을 더욱 불행하게 만드는 기폭제 역할을 한다. 사실 당신은 중산층입니까?라고 묻고 대답하는 건 '체감 중산층'을 조사하기 위한 방법이다. 이렇게 볼 때 80년대와 2010년대의 큰 차이는 이들의 준거집단이 달라졌음을 암시한다. 앞서 얘기했듯 80년대에는 사람들이 다 고만고만하게 살았고 이웃과의 실제 교류를 통해서 이 사실을 확인했다. 하지만 지금은 방구석에 앉아서도 세상 모든 사람들의 삶을 엿볼 수 있다. 인스타그램의 친구들은 30만 원짜리 오마카세를 가고 신상 골프웨어를 입고 라운딩을 나가며 풀빌라를 빌려 새해를 맞이한다. 넘쳐나는 소비는 아주 특별한 일상 또는 동일한 정보의 재생산에 불과하지만 보는 이들에겐 이것이 아주 평범한 일이라는 착시를 일으킨다. 나는 꽤 괜찮게 산다고 생각했는데, 스마트폰만 켜면 그렇지 않다는 증거가 쏟아져 들어오는 것이다.


슬픈 건 이런 삶에 '아니요'를 외치며 모범을 보일 집단이 없다는 점이다. 대한민국은 일제 강점과 분단이라는 재앙으로 스스로 자유와 평등을 쟁취해 근대를 일궜다는 시민의식을 기를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모범을 보일 상류층에는 반민족행위자 또는 권력자가 바뀔 때마다 요령껏 행동하여 계층 상승을 이룬 사람들이 많았다. 이들에겐 문화적 향취나 높은 도덕의식이 없었기 때문에 중하층과 자신을 구분할 방법은 과시적 소비가 유일했다. 더 큰 집, 더 비싼 차, 명품 옷. 다른 선진국이 중산층을 정의하는 방식은 '자기만의 요리 레시피를 2개 이상 갖고 있는가'처럼 문화적인데 반해 우리나라는 '연봉이 얼마고 어느 정도의 자산을 갖추고 있느냐'와 같이 물질적인 기준만 존재하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모든 사회는 좋든 싫든 각 계층의 사람들이 상위 계층의 소비와 행동을 모방하는 방식으로 나아간다. 세속적 성공을 보장하는 필수 조건이 명문대 합격이고 성공을 인정받는 방식이 좋은 지역의 부동산과 비싼 자동차뿐이라면 어떠한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그것을 쟁취하려는 사람들이 많아진다. 인간 세상에선 어떤 일이 많이 발생하면 점점 당연한 일이 되고, 결국엔 옳은 일이 돼버린다.


성공의 조건이 매우 한정적인 데다, 계층상승의 기회가 희박하고, 그것이 세습되는 경향이 강해지기 때문에 경쟁은 모든 계층에서 치열할 수밖에 없다. 높은 놈은 떨어지지 않기 위해, 밑엣 놈은 올라가기 위해. 여기서 가장 절망적인 건, 이런 사회를 바꾸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가족이기주의를 버리고 다른 계층보다 특권적 기회를 많이 향유한 상류층이


공공의 이익을 중시하고, 나눔의 문화를 강조하며, 성공의 기준을 학벌과 소득의 서열이 아닌 다양한 가치관으로 대체하고, 노동의 진정한 가치를 존중하는 방향으로 바뀌는 것(p.250)


이라는 무력하고 추상적인 말 뿐이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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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유의 종말은 없다 - 세계 부와 권력의 지형을 뒤바꾼 석유 160년 역사와 미래
로버트 맥널리 지음, 김나연 옮김 / 페이지2(page2)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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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점을 줘도 아까운 번역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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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유의 종말은 없다 - 세계 부와 권력의 지형을 뒤바꾼 석유 160년 역사와 미래
로버트 맥널리 지음, 김나연 옮김 / 페이지2(page2)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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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짧은 서평들을 보다 보면 내가 그들과 같은 책을 읽은 건지 헷갈릴 때가 있다. <석유의 종말은 없다>는 거창한 제목을 달았지만, 이는 저자의 논지와 너무 거리가 멀다. 이 책은 최초의 석유 시추 시대부터 최근에 이르는 유가의 변동을 지루할 정도로 세세히 늘어놓는다. 어떤 의견을 뚜렷이 제시하기보다는 최대한 정확한 사실을 수집하여 박물관처럼 전시하려는 목적을 가진 것 같다. 출판사도 초월 번역을 의식했는지 원제 <Crude Volatility>(유가 변동성)을 더 크게 써놨다.


석유도 시장의 다른 상품들과 마찬가지로 수요와 공급에 따라 가격이 변한다. 그런데 석유에는 좀 특별한 점이 있다. 우선 수요의 측면에서 보면, 유가가 수요의 영향을 받는 건 맞지만, 수요가 반드시 유가에 따라 움직이지는 않는다는 점이 그렇다. 이유는 석유가 '필수재'이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자. 유가가 오른다고 갑자기 자동차를 안 탈 수 있나? 석유 부산물로 만들어내는 각종 생필품은? 유가가 소비 패턴을 완전히 바꿀 임계점에 도달한다 한들 석유 위에 띄운 이 사회를 순식간에 바꾸기는 어렵다. 가격이 하락할 때도 수요는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기름값이 떨어졌다고 갑자기 출퇴근 거리를 두 배로 늘리고 가스보일러를 석유로 대체하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수요는 오히려 소득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 최근 수십 년간 석유 수요를 이끌어 온 건 빠르게 성장하는 중국의 경제였다. 반대로 자가용 대신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연비가 좋은 차가 인기를 얻는 시기는 경기가 침체되어 소득이 줄어들 때였다. 2008년으로 돌아가보자. 그 해 1월 유가는 배럴 당 100달러를 넘어섰고 7월이 되자 150달러를 돌파했다. 그러나 불과 3개월 뒤 가격은 60달러로 폭락했다. 서브프라임 모기지가 세계 경제를 묘지에 묻어버렸기 때문이다.


공급면에서도 석유는 특별하다. 그게 어디에 얼마나 묻혀있는지 아무도 모를뿐더러 시추 설비를 만들어 진짜 퍼올리기까지는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기존 유정의 최대 산유량을 넘어 수요가 폭증한들 어디선가 새유정이 곧장 나타나 은혜의 비를 내려주는 게 아니란 말이다. 한편 한 번 구멍을 낸 유정은 병뚜껑을 닫듯 산유량을 0으로 만들 수 없다. 일단 뽑아놓고 나중에 파는데도 한계는 있다. 석유 보관 시설도 무한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유가는 오를 때나 내릴 때나 브레이크가 없다. 개발도상국의 경제 발전으로 수요가 급증한들 기존 국가가 수요를 늦추지는 않으므로 가격은 폭발적으로 상승하고, 이제는 거의 한 덩이가 된 지구 경제가 동시에 침체를 겪을 땐 이미 파 놓은 유정을 닫을 방법이 없어 가격은 미친 듯이 떨어진다.


그래도 이런 가격을 어느 정도 적정 수준으로 유지하는 게 바로 '스윙 프로듀서'라 불리는 대장 산유국이다. 자신이 산유량을 조절하는 것만으로 국제 유가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절대자! 저자는 그 유명한 록펠러가 강력한 카르텔을 형성해 미국 시장을 독점했을 때와 OPEC의 석유 공급 점유율이 최고였을 때 오히려 유가는 안정적이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독점은 좋은 것인가?라는 질문에 아니라고는 하지만, 역사적 사실이 정반대의 대답을 하는 상황에서 그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잘 모르겠다.


<석유의 종말은 없다>는 내 독서 인생을 통틀어도 견줄 데가 없는 최악의 번역을 자랑한다. 사실 오타도 너무 많고, 문장이 뚝뚝 끊길 뿐만 아니라 의미조차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다. 편집자가 존재했는지 의심이 들 정도로 엉망이다. 출판 문외한이 원저를 읽고 감명받아 마음만 앞서 내놓은 책 같다. 나는 평소 알라딘의 추천 도서 목록에 깊은 신뢰를 가져왔고 이번에도 그 추천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 책으로 인해 그 믿음은 완전히 박살 났다.


빵점을 줘도 아까운 번역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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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바야가의 밤 - 각성하는 시스터후드 첩혈쌍녀
오타니 아키라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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홋카이도 출신의 신도 요리코는 야쿠자 수십 명을 한꺼번에 박살 내는 괴력의 여자다. 폭력을 갈구하는 욕망이 핏 속에 흐르고 있다. 화장이나 쇼핑, 자신을 가꾸는 일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주먹이 뼈에 닿아 부러지는 느낌, 오로지 그것만이 신도 요리코를 살아있게 한다. 그녀는 괴물이다.


독보적인 캐릭터와는 달리 이야기는 좀 갸우뚱하다. 야쿠자와 시비가 붙어 본거지에 잡혀온 요리코는 그곳에서도 한 바탕 난리를 치며 진실로 살아있는 야생의 짐승이 어떤 모습인지를 보여준다. 그녀를 제압한 건 40킬로그램이 넘는 도베르만이었다. 개가 강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요리코가 개를 사랑했기 때문이다. 무슨 수를 써도 말을 듣지 않던 요리코는 야쿠자가 기르는, 처음 본 개를 죽인다고 협박하자 마침내 마음을 꺾는다. 맡겨진 일은 오야붕의 외동딸을 수행하라는 것. 이렇게 요리코는 보디가드이자 운전기사가 된다.


일본의 장르 소설이라는 게 본래 개연성을 주특기로 하지는 않는다. 그래도 너무할 때가 좀 있는데 <바바야가의 밤>도 크게 다르지 않다. 오야붕의 딸과 요리코가 처음 만나 삐걱대는 대목에서부터 이 소설의 끝은 정해져 있었다. 물론 장르 소설의 결말은 어차피 다 똑같다. 차이를 만드는 건 그 과정을 기술하는 방식이다. 그런 관점에서 183페이지 밖에 안 되는 <바바야가의 밤>은 우려스러운 점이 많았다. 완전히 다른 삶을 살던 두 사람이 의기투합해 여자라는 존재를 움켜쥐고 옭아매는 세상을 깨고 나오는 모습을 보여주기에는 종이의 양이 너무 적은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바바야가의 밤>은 한 페이지 안에서 수십 년을 건너뛰는 필살기로 이 문제를 해결한다.


이 책은 소설 자체보다 그 뒤에 딸린 편집자 후기가 훨씬 뛰어나다. 나는 이 편집자를 미야베 미유키의 작품을 통해서 만났던 걸로 기억한다. 그때도 인상이 깊었다. 구매한 책 사이에 본인이 출간했으나 파본으로 반품된 소설의 일부를 잘라 견본처럼 끼워줬기 때문이다. 그 견본을 읽고 새 책을 사기까지 했다.


<바바야가의 밤>은 삼송의 김사장이라 불리는 이 출판인이 '첩혈쌍녀'라는 시리즈를 기획하며 내보낸 선봉이다. 첩혈쌍녀란 무엇인가? 재잘거릴 첩 + 피 혈 + 짝 쌍 + 여자 녀다. 즉 재잘거리며 핏빛 사건을 해결하는 두 여자,라는 뜻이다. 남성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전통적 모험, 탐정물의 서사를 탈피한 낯선 소설들을 소개할 요량. 좋은 기획과는 달리 따라 나온 장수들이 변변치 못한 게 아쉬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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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와 그들의 정치 - 파시즘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제이슨 스탠리 지음, 김정훈 옮김 / 솔출판사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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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에 극우가 만발하고 있다. 이유가 뭘까? <우리와 그들의 정치>는 파시즘 정치가 동작하는 방식, 그들이 어떻게 멀쩡한 시민들을 극단으로 이끄는지를 분석한다.


파시즘 정치의 시작은 구별이다. 그들과 우리를 구별하기 위해선 우리가 특별해야 하므로 한 민족의 역사가 완전한 허구에 기반해 신화화된다. 보통 순혈에 대한 망상은 히틀러가 거의 모든 악명을 뒤집어쓴 덕분에 내로남불에 빠지기 쉬운데, 사실 전 세계에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현상이다. 심지어 왕까지 외국인과 결혼한 사례가 수두룩한 역사를 보고도 우리 배달인이 단일민족이라는 환상을 갖는 것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국가는 조작된 신화를 교육, 문화에 대대적으로 침투시켜 선전을 시작한다. 이에 딴지를 거는 사람은 민족혼을 부정하는 배신자. 진실은 매도, 비판은 폭력의 대상이다. 허구를 중심으로 우리와 그들의 역할이 정해지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경우 이 신화가 주로 근현대사를 중심으로 형성된다. '우리'를 자극하는 건 '피해의식'이다. 우리는 군말 않고 열심히 일해 대한민국을 여기까지 끌어올렸는데 '너희'는 우리가 이룬 걸 뺏어가려고만 한다. 노동조합은 귀족노조로 둔갑하고 복지 혜택의 증가는 '게으름'의 증거로 제시된다. 세계 유일의 분단국인 탓에 분배와 경제 정의는 아주 쉽게 공산주의와 연결되어 땀 흘려 가꾼 국가의 근본을 통째로 북쪽에 넘기려 한다는 망상에 공격당한다. 이런 공격을 하는 사람들의 대다수가 바로 그 공격 대상의 가장 큰 수혜자인데도 말이다.


파시즘 정치가 지키고 퍼뜨리려는 거짓 역사는 사실 가부장적 위계질서를 유지하려는 욕망과 맞닿아 있으며, 파시즘은 그 질서가 무너지고 있다는 공포심을 이용해 강력한 지지자들을 포섭한다.


사실 자유와 민주주의가 넘치는 요즘 세상은 전통적 가부장들에게 그리 안전한 사회가 아니다. 늘어난 성평등은 오랜 시간 경제 주체로서 군림했던 가부장의 권위를 심각하게 훼손한다. 페미니즘은 눈엣가시일 수밖에 없고 쏟아져 들어오는 이민자들은 내 일자리를 뺏어가는 적으로 간주된다.


여기에 기름을 붓는 건 바로 성적 불안이다. 성소수자의 등장은 가뜩이나 사회에서 역할을 잃고 불안에 빠진 가부장이 그나마 유일하게 지위를 누릴 수 있는, 가장 은밀하고 사적인 영역에서조차 역할이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민자를 강간범으로 묘사하는 것도 바로 이 불안을 추동하려는 파시즘 정치의 전형적 현상이다. 그들로부터 나의 아내, 딸, 누이를 지켜 더러운 피가 섞이지 않게 하는 것은 오랜 시간 가부장의 역할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성소수자, 여성, 이민자는 파시즘 정치의 주요한 먹잇감이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은가? 가부장적 질서를 지키는 한 축에는 항상 여자들이 있다는 사실이? 우리나라에서 퀴어 축제가 열렸을 때 가장 열렬히 반대했던 건 '엄마'들이었다. 뿐만 아니다. 대한민국에서 권위주의 정권이 무너지고 회복하는 과정에서 주요한 역할을 맡았던 것도 바로 '엄마부대'였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지정된 역할을 수행하는 한, 가부장적 위계질서가 지배하는 사회에서도 여성은 추앙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열녀, 효부, 현모, 양처라는 역할이 바로 여기에서 탄생한다. 나는 이것을 사회적으로 행해지는 가스라이팅이라고 정의한다.


파시즘 정치는 지금까지 언급한 것들이 모두 연결되어 단단한 토대를 형성한다. 완전한 허구에서 탄생한 신화가 '우리'와 '그들'을 구분하면 나머지는 알아서 자리를 찾아가며 손쉽게 한 국가를 찢어놓는다. 중요한 건 이성을 지키는 일이고, 만연한 비정상을 어느새 정상으로 받아들이는 현상을 경계하는 것인데, 말은 참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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