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사전이란 부동의 질서와 조화를 담고 있는 총체적인 체계이고 의심할 수 없는 권위를 지닌 책이라고 생각한다. 사전에 담긴 사실을 의심하지 않고권위를 신뢰해야만 사전은 참고 서적으로서 기능할수 있다. 하지만 현실은 고정되지 않기 때문에, 현실에 대한 기술은 객관적일 수 없기 때문에, 사전의 무오류성은 환상일뿐이다. 사전은 현실을 비추는 거울이지만, 그 거울은 현실을 왜곡해서 복제한다. 그렇지만 틀뢴의 백과사전은 다른 거울을 비추는 거울일뿐이라 불완전하고 혼란스러운 현실에 의해 침해되지 않은 완벽한 질서를 이룬다. - P126

지금 인터넷은 우리가 사는 현실에침투하고 현실을 장악하며 인터넷이 곧 현실이 되고있다. 영화 <인셉션>에서 맺은 완벽하고 영원하고 무한한 꿈속의 세상을 떠나기를 거부했다. 지금 우리도 맬처럼 그 자체로 완벽하고 자족적인 웹의 세계를 떠나기 어려워 혼란을 겪는다. - P127

사투리는 사전에서 배제되는 단어군 가운데에서 아마도 가장 아깝고 가장 억울한(수도권에서 쓰이는 말이 아니라는 이유로 배제되다니!) 부류가 아닐까싶다. 나는 서울에서 나고 자랐지만 엄마와 이야기를할 때는 어설프게 전라도 말을 섞는다. 엄마가 쓰는전라도 말씨를 자연스레 따라가는 것이기도 하지만,
전라도 사투리에 표준어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어감을 담은 단어들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 P142

한편 나에게 ‘빼다지‘라는 말은 아버지의 잡동사니 물건이 가득 들어 있던 서랍을 떠올리게 하고,
‘덕석‘이라는 말은 어릴 때 겨울이면 코끝이 시릴 정도로 추운 집에 살 때 엄마가 손뜨개로 떠준 연초록색 조끼를 소환한다. 감정적 기억과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단어들. 그러니 사람은 누구나 자기만의 정의가가득 쓰인 사전, 요즘 쓰는 말과 알고는 있지만 이제는 쓰지 않는 말, 나만 아는 것 같은 말, 좋아하는 말과 싫어하는 말이 담긴 사전을 하나씩 가슴에 품고 있는 셈이다. - P149

그래서 우리에게는 더 많은 단어가 필요하다.
이를테면 나는 집 안의 항상성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눈에 보이지 않는 노동(화장실에 휴지 채워 넣기, 다떨어진 생필품 사놓기, 쓰레기 버리기, 구석구석에 앉은 먼지 닦기 등)을 드높이는 장려한 단어가 있었으면 좋겠다. 또 내 마음속에 늘 어지러이 떠다니는 감정을 딱 집어 고정해놓을 단어도 있었으면 좋겠다.
곤란한 상황에 처한 사람을 돕고 싶은데 용기가 없어서 돕지 못하고 마음에 남은 짐, 누군가를 현실에서 만났을 때보다 꿈에서 만났을때 더 반갑고 애틋한 현상, 예전에 내가 저지른 어떤 실수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잊히지 않고 늘 지금의 일처럼 떠오르는것 등. 그런 마음을 가리키는 단어들이 있다면, 다른사람들도 쓴다면, 나만 그런 것은 아니구나 생각하고안심이 되기도 할 것이다.  - P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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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일시적인 일탈이 곧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그 방에는 수백 권의 책이 남아 있었다. 한 이야기가 끝나면 또다른 이야기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다. 나는 그 이야기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고 느꼈다. 책이 나를 이곳저곳으로 끌고다녔다. 집으로 갈 때면 아쉬움에 입이 말랐다. 아이들과 저녁을먹으면서도, 밤에 남편과 침대에 누워서도 작업실의 빈 공간을떠올렸다. 나는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정한아 <일시적인 일탈> 중에서 - P154

속살거림은 십여 분간 지속되다가 사라져버렸다. 집안은 고요속에 휩싸였다. 나는 주춤주춤 거실로 나갔다. 그때 어떤 한기가느껴졌다. 그곳에 누군가 남아 있었다. K의 마지막 여자. 작품 속에서 단 한 번도 깨어나지 못하고 정물처럼 누워만 있던 여자. 그여자는 긴 스커트 아래서 뭉개진 발을 질질 끄는 것 같은 걸음으로 작업실 안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나는 그 여자의 검게 그을린발, 덜덜 떨리는 두 손, 벌어진 입에서 흘러나오는 침, 일그러진눈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숨을 삼키며 물러섰다. 여자는 나였다. K는 나를 본떠서 여자를 그린 것이다. 여자는 나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정한아 <일시적인 일탈> 중에서 - P163

그날 나는 지각을 했고, 학교에 도착하자마자 교무실로 호출당했다. 담임은 나를 보자마자 엎드리라고 말한 다음 항상 들고 다니는, 끝을 잘라낸 하키 스틱으로 엉덩이를 다섯 번쯤 내리쳤다. 지각이그렇게까지 잘못한 일인가, 쓰라린 엉덩이를 잡고 억울해하며 일어섰을 때 담임은 씹던 껌을 뱉듯 말했다.
"죽은 줄 알았잖아, 새끼가."
나중에 알고 보니 학교에서는 그날 아침 사고가 나자마자 반별로 강북에서 통학하는 학생들을 조사했고, 그중 그때까지 등교하지 않은 학생들은 따로 분류해서 교무실에서 자체적으로 생사확인을 하던 중이었다.  문지혁 <우리가 다리를 건널 때> 중에서 - P186

"그날 넌 뭘 하고 있었어?"
아야가 물었을 때 머릿속에서는 별다른 노력 없이도 어떤 장면이 선명하게 재생됐다. 2001년 9월 11일 화요일 밤, 나는 군대에서 당직을 서고 있었다. 밤새 틀어놓는 당직실 텔레비전에서 월드 트레이드 센터를 들이받는 비행기를 목격했다. 한 대, 그리고또한 대, 너무 비현실적인 장면이라 도통 실감이 나지 않았다. 뻔한 재난 영화의 한 장면처럼 느껴졌다. 내 뒤에서 라면을 먹던 당직사관은 탁 소리가 나게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씨발, 이러다 전쟁 나는 거 아냐? 그 순간 나는 현실로 돌아와 다음다음날로 예정된 휴가를 걱정하기 시작했다.
결국 휴가는 취소되었고 전쟁은 시작됐다. 그 전쟁이 이후 이십 년 동안 아프가니스탄에서 지루하게 이어질 거라고는 아직 아무도 알지 못하던 때였다.
"군대에 있었어."
문지혁 <우리가 다리를 건널 때>중에서
- P189

아야에게 책갈피는 2011년 3월에 끼워져 있었다. 당시 그녀는이미 일본을 떠나 미국 시카고에서 시각예술을 전공하고 있었는데 나와 비슷하게 텔레비전으로 고국에서 일어나는 비극을 실시간으로 지켜봐야만 했다.
"학교 카페테리아에서 파스타를 먹고 있었어. 누가 CNN 뉴스를 틀어놨는데, 갑자기 밑에 NHK 자막이 뜨기 시작하는 거야. 왜일본 뉴스 화면을 받고 있지? 심장이 먼저 뛰기 시작하더니 곧 브레이킹 뉴스 표시가 나타났어. M8.4 QUAKE HITS JAPAN. 우중충한 색깔의 바다에서 하얀 물결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었어,
그래, 쓰나미, 파스타를 감아쥔 포크가 너무 흔들려서 순간적으로 나는 저 지진이 일만 킬로미터나 떨어진 시카고에까지 영향을미치고 있는 건가 싶었어. 당연히 그럴 리가 없잖아? 아래를 내려다보니 나도 모르게 다리를 떨고 있는 거였어. 식탁이 흔들릴 만큼.
문지혁 <우리가 다리를 건널 때>중에서 - P190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작지만 분명한 놀라움이 그녀의 늙고 지친 몸 깊은 곳에서부터 서서히 번져나갔다. 수없이 많은 것을 잃어온 그녀에게 그런 일이 또 일어났다니. 사람들은 기어코 사랑에 빠졌다. 상실한 이후의 고통을 조금도 알지못하는 것처럼. 그리고 그렇게 되고 마는 데 나이를 먹는 일 따위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백수린 <아주 환한 날들> 중에서 - P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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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똑같은 뜻인데 팔구십 개 중에서 아무거나쓰면 되는 거 아니냐고? 아니다. 아무나 지나가는 사전 편찬자를 붙잡고 물어보라 (그런 직업을 가진 사람이 멸종하지 않았다면), 팔구십 개 단어가 전부 미묘하게 다르다고 할 것이다. 나도 동의한다. - P37

한국어사전 중에도 아주 재미있는 사전이 있다.
국립국어원에서 만든 온라인 사전 한국어기초사전』은 한국어를 외국어로 공부하려는 사람을 위한 사전이라고 한다. 이 사전의 특히 재미있는 점은 예문이다. 이 사전은 예문으로 다른 문헌에서 가져온 인용례가 아니라 직접 작성한 작성례만 사용했다. 어떻게 알았냐면 예문에 꾸준히 등장하는 주인공이 있기때문이다.  - P45

나도 지금 하고 싶은 말이지만 내 입으로 하기는 조금 그런 말을 도서 암호를 써서 여기에 남겨놓으려 한다.

"1209 C1 13 985 C2 7 1430 C2 13 1565 C2 5‘
(힌트: 우리나라 최초의 말뭉치 한국어사전 초판을 열쇠 책으로 썼다.)
----뭘까?
몹시 궁금,!
어디가야 이 사전을 볼수 있으려나???? - P50

당연하지만, 지식에 이르는 지름길이나 뒷문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전 하나를 통째로 외워보아야 대양의 가장자리에서 물장구만 치는 꼴일 뿐퍼즐은 영원히 완성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런 착각에 매달린다. 이 책을 읽으면 이 분야에 대해잘 알게 될 거야, 이 책을 제대로 읽어내면 세상의 비밀을 알게 될 거야. 그런 믿음이 없으면 우주에서 길을 잃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 P61

보르헤스가 상상한 바벨의 도서관은 세상에 존재할 수 있는 모든 책이 소장된 도서관이다. 따라서 그곳에는 우주와 인류에 관한 궁극의 수수께끼에 대한 해답을 담고 있는
"완전하고 완벽한 책"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신이아무리 인간의 언어를 흩뜨려놓으려 한들, 언어로 무한에 가까운 가능성을 구현하기만 한다면 신의 진리에 가닿을 수가 있는 것이다. 바벨의 도서관에 완벽한 책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알려진 순간, "우주는 정당화되었고, 순식간에 인류의 무궁무진한 희망과 일치하게 되었다." - P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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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와 지식을 축적하려는 욕구는 재화를 축적하려는 부르주아적 욕구와 다르지 않다. 우리는 동전을 모으듯 단어를 모은다. 힘을 갖기 위해서." 동전과단어의 차이점은, 단어는 아무리 써도 줄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사전에 돈을 쓰는 것도 아주 불합리한 소비는 아니라고 합리화할 수 있다. - P20

글을 쓰는 사람은 사전을닻으로 삼아 최대한 멀리 뻗어나가야 한다. 단어의새로운 쓰임을 만들어야 한다. 언어는 실제로 쓰이면서 의미가 증폭된다. 어떤 단어를 새로운 맥락에 갖다놓으면, ‘새로운 단어까지는 아니더라도 단어의 ‘새로운 의미‘가 만들어진다. - P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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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수업 덕에 ‘판교‘라는 단어를 접할 때마다 ‘친구‘에대해 생각했다. 삭막한 신도시라기보다 만남과 이별 사이에 있는 애틋함의 장소라 여겼다. 인문교양의 힘이란 남과같은 것을 보면서도 뻔하지 않은 또 다른 세계를 품을 수있도록 하는 데 있는 것 아닐까? 대학 교양 수업에서 가르치는 지식은 단편적이라기에는 무척 체계적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수업을 통해 엄청난 지식을 쌓는 걸 기대할 수는없다. 수업 시간에 습득한 것들은 젊은 날 잠깐 머릿속에 자리했다 세월이 지나면 이내 사라져버린다. 그렇지만 싹은 물 준 것을 결코 잊지 않고 무럭무럭 자란다고 했다. 식견이란 지식을 투입하는 것이 그 순간이 아니라 추수 끝난 논에 남은 벼 그루터기 같은 흔적에서 돋아난다. - P63

삶이란 퍽 짧으므로 우리는 촛불을 밝히고 어둠의 시간을 충분히 이용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 제임스 캐힐, 조선미 옮김, 『중국 회화사』(열화당)에서 - P79

무용한 일에 시간을 투자하고, 쓸모 없는 것을 배우리라 도전하고, 쓸데없어 보이는 일에 노력을 기울이는 것. 그것이 대학이라는 공간에서 젊은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가장큰 특권이자 가장 소중한 가치였다는 걸. 그 시절 무용해보였던 수많은 수업들이 지금의 나를 어느 정도 ‘교양 있는사람‘으로 만들어주었다. - P117

‘창의적이라는 것은여러 연구 끝에 합의된 기본적인 지식을 소화해 바닥을 잘다진 다음 단계에서의 도약을 뜻하는 것이지, 허공으로 무작정 날아오르는 것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런 ‘창의성‘은영화 속에나 있다. - P131

서양미술사 입문 수업을 듣던 대학 2학년의 나는 작품의 맥락이며 역사적 의미 같은 걸 깊이 이해할 새도 없이굶주린 새끼 짐승이 어미 젖을 빨듯 무조건 외워버렸다. 그때의 나는 ‘이런 암기가 무슨 의미가 있나?‘ 냉소했지만, 나이가 드니 삶의 어느 순간 옛 생각이 나면서 ‘그때 그 작품이 이런 의미였겠구나.‘ 하고 이해되는 경험과 깨달음의 기쁨이 종종 찾아온다. 누군가는 ‘암기‘를 ‘절반의 삶‘이라며비웃지만, 그 절반의 앎이 시작되지 않으면 완전한 앎이란것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 P131

창의성과 깊이에 대한 공허한 이야기들을 늘어놓기 전에 주입식 교육부터 알차게 하며 단단히 터를 잡아놓았으면 좋겠다. 소수의 천재를 제외한 우리 범인(凡人)들에게창의성과 깊이는 그 터 위에 세월을 통해 얻은 경험으로차근차근 쌓아올리는 것일 테니 말이다. - P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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