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트 로커 - The Hurt Locker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이 영화는 일단 너무나 잘 만들어졌습니다.

다른 건 다 제쳐두고서라도 132분이라는 긴 러닝 타임을 내내

잔뜩 긴장한 채 보게 만드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죠.



그러면서도 일순 당혹감을 느끼는 건,

흔히 ‘전쟁 영화’라고 했을 때 우리가 떠올릴 수 있는 것,

그러니까 대규모 전투라든지 아니면 전쟁으로 인해 인간성이 황페화 된 것이라든지

그것도 아니면 동료 병사들간의 진한 휴머니즘 같은…

것들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는 거겠죠.

거기다 이 영화는 이라크전을 소재로 삼으면서도

이라크전 자체에 대해서는 아무런 발언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캐슬린 비글로우의 ‘허트 로커’는 전쟁 영화가 아니라

단순히 ‘전쟁’만을 빌려온 ‘액션’영화라는 게 더 맞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제 생각에 이 영화는

만일, 전쟁 영화가 전쟁의 본질을 보여주는 영화라고 정의를 내린다면

가장 전쟁 영화다운 전쟁 영화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니까 이 영화 만큼 전쟁의 본질을 잘 보여주는 영화가 없다는 것이죠.

아니, 보여주기 보다는 관객으로 하여금 생생하게 체험하게 해 준다는 점에서

아주 뛰어나다고 보여집니다.



그렇게 <허트 로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관객이 직접 전쟁의 현장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리들리 스콧의 ‘블랙호크다운’을 떠 올릴 수 있습니다.

그 영화도 그냥 관객으로 하여금 그 현장에 직접 뛰어들게 했지요.

하지만 그 영화는 그 하나의 사건이 어떻게 전개되는지 그 시간적 추이를

다 보여줍니다. 그렇게 전체적인 사건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역시

전쟁을 객관화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죠.

하지만 <허트 로커>에는 그나마도 없습니다.

<허트 로커>엔 오직 조각 조각난 단편만이 있습니다.

더구나 그 단편들마저 그리 잘 연결이 되지 않습니다.



이건 폭발물 처리반 EOD의 실제 처지와도 같습니다.

언제 어디서 나타나서 그들을 출동하게 만들지 모르는

폭발물들에게(특히 급조된 IED 같은 것들은 더더욱) ‘인과’라는게

있을리가 없을 테니까요.

이와 똑같이 전쟁에 참여하는 모두도 그저 자신이 속한

지금-여기의 상황만 알 뿐, 전쟁의 전체적인 모습은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전쟁에 참여하는 자들에게 ‘시야의 한계’는 절대적입니다.

<허트 로커>에서 병사들이 망원 렌즈를 통해서야

비로소 사물을 식별할 수 있는 것 처럼 말이죠.



게다가 캐서린 비글로우는 내러티브를 구성하는 것도

관객이 EOD와 동일한 체험을 갖도록 하기 위해서인지

주로 ‘출동-해체’의 과정으로 이루어 놓았습니다.

관객은 그들과 똑같이 아무런 사전 설명없이 느닷없이 폭발물이

있는 장소로 안내되고 그들의 시야와 똑같이 제한된 시야 속에서

사방이 한껏 열려진 장소에서 어디서 날아올지 모르는 총알과

어디서 튀어나와 폭발할지 모르는 공포를 느껴야 합니다.

(관객은 자주 등장인물의 주관적 시점을 공유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건 해체된 이후에도 아무런 설명이 없습니다.



마치 “대체 내가 왜 이걸 해야하지?”

라는 의문이 군인에게 허용되지 않듯이

“대체 제가 왜 저러는거야?”

라는 의문이 관객에겐 허용되지 않습니다.

여기에 사유의 틈은 낄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영화의 마지막에

“어떻게 그렇게 목숨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고

덤빌 수 있느냐?”에 질문에 “나도 모르겠다.”라는 대답은

그야말로 이 영화에서는 정확한 것입니다.



전쟁이 요구하는 것은

질문과 생각이 아니라

오로지 상황이 닥쳤을 때 요구되는 반응을 위한

반사신경일 뿐이니까요.

그것이 바로 엘드리지가 군의관 앞에서 했던

“제가 요즘 생각하고 있는 것은 이것 뿐입니다.

이렇게 방아쇠를 당기면 톰은 살아요.

안 당기면 그는 죽어요. 이것 뿐이에요.”

말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그가 살인이라는 것에 머뭇거리지 않고

전쟁이 요구하는 대로 반사신경처럼 행했다면

지금 그가 가지는 죄책감도 가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엘드리지가 그렇지 못했던 것은

바로 이 전쟁이란 것에 그다지 중독되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엘드리지는 영화 초반에 샌본에게 이라크에서 잔디 사업을 하면

크게 히트할 것이라는 말을 합니다. 그에겐 이 전쟁에서 벗어났을 때

그렇게 보통의 삶으로 돌아갔을 때 하려는 계획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임스는 그가 해체한 폭탄의 숫자에서 드러나듯이

전쟁에 너무도 중독된 나머지, 전장이 아니고는

그가 살아있다는 느낌을 가질 수 없습니다.



때문에, 영화의 가장 앞부분에 나오는

“전쟁은 마약이다.”라는 말은 마약에 깔려있는 중독성이야 말로

가장 전쟁의 본질을 잘 요약해 주는 말임과 동시에 캐서린 비글로우가

<허트 로커>를 통해 말하고 싶은 핵심적인 주제입니다.

하지만 캐서린 비글로우는 그것을 보여주는데 그치지 않고

관객으로 하여금 체험하고 느끼게 하는 것 까지 나아갑니다.



‘중독’에는 아무런 이성적 판단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중독엔 오로지 그것을 충족시키기 위한 행위만 요구되어질 뿐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게, 불을 켜면 침을 흘리는 ‘파블로프의 개’ 처럼

자극이 있으면 단순히 반응할 수 밖에 없는 즉각적인 반사신경적 행위와

같습니다. 중독은 ‘의지’와 ‘가치판단’을 뛰어넘는 영역에 있습니다.

아마도 그 때문에, 중독이 더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의문이 없어지고 생각이 없어지고 감정도 메말라

점점 자극과 반응만이 전부인 일차원적 동물로 퇴화되어 가는 것일테죠.

그리고 이건 그대로 전쟁에 참여하고 있는 자들에게도 적용됩니다.

영화는 자주 임무를 수행하는 병사들 뿐만 아니라 주위에서 무심히

지켜보고 있는 군중들도 자주 보여줍니다. 하지만 곧 코 앞에서 폭탄이

터져 사람들이 죽어나갈지 모르는데도 그들의 얼굴엔 전혀 어떤 표정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그저 무심한 표정만이 전부입니다.

후반의 ‘인간 폭탄’은 그러한 중독된 상태에서의 인간성 부재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장면일 것입니다.



영화에서 머무르는 날짜를 카운트 하는 게 아니라

본국으로 돌아갈 날짜를 카운트 하는 것도 의미심장 합니다.

마치 이 카운트는 중독중의 사람이 그것을 끊기 위해 얼마 만큼

참았나 헤아리기 위해 날짜를 카운트하는 것과도 비슷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담배 같은 것을 끊을 때,

‘오늘이 끊은 지 며칠이나 되었지?”하는 것 처럼 말이죠.



거기다, 단순히 출동-해체’의 과정으로만 이루어진 이 영화는

점점 출동하는 대원들 앞에 더 더 강력한 폭탄을 준비합니다.

처음엔 대전차포 로켓 하나이던 것이 여러 개가 되고

급기야는 자살 폭탄에 인간 폭탄까지 등장하게 됩니다.

처음엔 여유있게 대처하던 EOD 대원들도 이제는 말수가 없어지고

미래에 대한 계획 보다는 단지 살아남기 위한 본능만이 남아 있게

됩니다. 이렇게 영화는 전쟁이 일종의 중독성을 가지고 있다면

참여하는 사람들은 왜 중독되는가에 대해 그 이유를 보여줍니다.

그건 바로 전쟁이 마약이 주는 체험과도 같이, 평범한 일상이 제공할 수

없는 극단적 체험을 하게 하기 때문이라고…

극단적인 체험은 일종의 ‘경이’를 느끼는 감정과도 비슷해서

거기서 인간은 아무런 사고와 판단을 할 수 없고 그저 그것에 짓눌릴 뿐이니까요.



<허트 로커>는 전쟁에 대해 아무것도 얘기하지 않는 것 처럼 하면서

사실은 관객으로 하여금 절절하게 전쟁이 가지고 있는 무시무시한

중독성을 정말 잘 느끼도록 해 주는 영화입니다.

전작 'K-19 위도우메이커' 의 후반부에서 리암 니슨은 재판정에 선

해리슨 포드를 위해 이런 옹호 발언을 합니다.

“당신들은 그 때 그 자리에 없었지만 나는 거기서 모든 걸 지켜봤습니다.

그 자리에 없었다면 당신들은 함장님을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함장님을 판단할 수 있는 건 그 때 그 자리에 있었던 우리들 뿐입니다.

그런 우리들이 보기에 함장님은 우리가 보았던 가장 위대한 함장이었습니다.”

<허트 로커>는 바로 이러한 리암 니슨의 말이 잘 어울리는 영화입니다.

그렇게 전쟁 속에 던져진 자가 어떤 느낌을 가지는가?에 대해서

가장 가까이 던져진 자에게 다가가 느끼게끔 해주는…





마침, 영화 얘기가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허트 로커>는

'K-19 위도우메이커' 와 어쩐지 좀 유사성이 느껴집니다. 리더가 교체되는 것도 그렇고

교체된 리더와 종래 있었던 구성원들과의 불화도 그렇고 거기다 엘드리지에게

“네가 할 수 있는 것이 되어라.”라고 상담해주는 군의관은

하필이면 에서 원자로 사고가 일어났을 때 그것을 수리하기 위해

가장 먼저 들어간 ‘크리스찬 카마고’였다는 것도 그렇고…

하지만, 결론은 전혀 다릅니다.

의 결론은, 마지막 그러니까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K-19’ 사건이

있은 지 25년이 지나 그제서야 그 때 동료들을 위해 희생된 동료들에 대한

추모가 허용되었을 때, 바로 그 자리에서 행한 해리슨 포드의 추모사에서

잘 드러나듯이 일종의 ‘동료애’ 입니다 하지만 <허트 로커>는 이와 정반대에

있습니다(특히나 제임스를 해리슨 포드로 보면 이 차이는 더욱 더 극명하게

벌어집니다.) 여기엔 남자들만의 끈적한 유대감도 없고, 유일하게 휴머니즘으로

보였던 행위들도 허무한 비웃음거리로 돌아올 뿐입니다. 남은 건 다만 점점

깊어지는 고독뿐이죠.

물론 고독은 중독된자의 유일한 동반자입니다만…



그리고 가장 중독된 자 제임스는 전작 <폭풍 속으로>의 패트릭 스웨이지의

또 다른 버전이기도 합니다. <폭풍 속으로>에서 패트릭 스웨이지는 익스트림

스포츠에 중독되어 그것의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대통령 가면을 쓰고 은행을 터는

리더였습니다. 영화 <폭풍 속으로>는 마지막에 그가 50년에 한 번 찾아온다는

거대한 파도를 타기 위해 그 파도 앞으로 서핑보드를 타고 헤엄쳐 들어가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허트 로커>에서 제임스가 다시 전장으로 돌아와 폭탄을 해체하러

가는 모습이 그와 똑같이 찍혔더군요.

어쩌면 그것을 통해 패트릭 스웨이지가 그 파도 속에서 사라졌듯이,

제임스도 결국 가장 자기가 좋아한 현장에서 사라져벼렸음을 암시하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촬영감독을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네요.

이 영화의 촬영감독은 Barry Ackroyd 입니다.

아마도 켄 로치 감독의 영화들을 많이 보신 분들이라면

꽤 낯 익은 이름이죠.
이 촬영감독의 커리어가 바로 켄 로치의 유명한 명작
‘RIFF-RAFF’와 더불어 시작했을 뿐만 아니라 그 외 ‘레이닝 스톤’
‘레이디버드 레이디 버드’ ‘칼라송’ ‘빵과 장미’ ‘내 이름은 죠’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등
수 많은 영화들을 켄 로치와 함께 만들었으니까요.
물론 이 말은 폴 그린그래스의 ‘플라이트 93’이 나왔을 때 해야만 했을 말이었겠지만요.
아님, 가장 최근의 ‘그린 존’ 에서라든가… 아무튼 너무나 반가운 이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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