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숭이와 본질
올더스 헉슬리 지음, 유지훈 옮김 / 해윤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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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물학이 동원된 디스토피아에 정치, 종교적 상징을 추가했다. 거기에 시나리오 형식을 차용했다. <유인원들의 행성(The Planet of the Apes)>에 상당한 영향을 준 듯하다. 호언장담하는 문구에 비해 오타가 상당히 거슬리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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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 짐 열린책들 세계문학 266
조셉 콘래드 지음, 최용준 옮김 / 열린책들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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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술자리나 모임에서 다수의 관심을 끄는 것은 어떤 이야기이다. 이야기의 주도권을 지닌 사람은 흐름에 따라 분위기를 좌우할 수 있다. 코로나19로 인해 많은 인원이 모이는 일이 줄어들었을 때, 사람들이 눈을 돌린 것은 OTT와 유튜브였다. 그들은 이야기의 바다 속에서 자신이 원하는 이야기를 선택하고, 또 언제든지 중단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체험이나 사람들과 대화를 나눴을 때 느꼈던 감정보다 더 강렬하지 않음은 분명하다. 내가 이야기를 이끌거나, 그 흐름에 완전히 따라가야 몰입이 잘 되는 법이다. 만들어진 이야기가 재생되는 것을 사용자가 주도하는 경험은 그다지 흥미롭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서로에게 컨텐츠를 추천하고 관람하는 이유는 이야기에 대한 갈망이 있기 때문이다. 


 『로드 짐(Lord Jim)』은 이야기의 힘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작가인 조지프 콘래드를 알게 된 계기는 잭 런던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던 그들은 서로에게 공통점이 있었다. 가장 큰 공통점은 두 사람이 선원 생활을 겪었다는 점이었다. 이 때문에 그들은 서로의 작품에 담긴 뱃사람의 면모에 감탄했고, 특히 잭 런던은 공개적으로 그의 작품에 찬사를 남겼다. 게다가 『암흑의 핵심(Heart of Darkness)』의 명성은 문학을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들어본 소설 아닌가? 그래서 그의 작품들 중 무엇을 먼저 읽을지 행복한 고민을 하고 있을 때였다. 


 아마 많은 독자들은 전반부의 이야기를 보고 이끌리듯 책을 집었을 것이다. 뛰어난 항해사 짐은 파트나호를 타고 가던 중, 배가 침몰할 것이라는 사실을 안다. 승객은 800명이지만, 구명정은 일곱 척뿐이었다. 짐은 고민하다가 승객들을 깨우지 않고 구명정으로 몰래 빠져나간다. 하지만 배는 침몰하지 않았고 선장을 비롯한 다른 선원들은 행적을 감춘다. 결국 짐만 재판정에 서서 증언을 한다. 당연하게도 유죄가 선고되고 짐은 항해사 자격을 잃은 채 고국을 떠나게 된다. 그러던 그가 파투산에 정착하고 그곳 원주민을 다스리는 '로드 짐'으로 발견된다. 하지만 속을 종잡을 수 없는 행적으로 방문자들과 원주민들 모두의 원성을 산 그는 총에 맞아 쓸쓸히 사망한다. 


 대부분의 이야기는 말로라는 서술자의 입을 통해 전달된다. 콘래드는 이것을 소설이 아니라, 어떤 구전된 이야기로서 독자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전반부 이야기의 중심 소재인 파트나호 사건을 실화에서 끌어온 것이 아닐까 싶다. 물론 후반부 이야기는 기존의 제국주의적 가치관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상상력의 한계가 엿보이기도 한다. 또한, 작가 자신도 인정했듯이, 전반부의 이야기와 후반부의 사건들이 완전히 분리되어 있지 않느냐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소설을 다 읽고 나면, 정확히 말해 말로의 증언을 끝까지 경청하고 나면 알게 된다. 그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 것을. 


 어떤 사람들은 영화나 책의 서평에 적힌 대략적인 줄거리와 감상, 비판점을 보고 난 후, "그 작품을 봤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실제로 말이 통하기도 한다. 직접 작품을 감상한 사람도 사소한 사항들은 놓치기 마련이고, 대략적인 평가는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사람은 "이야기를 봤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야기는 흐름이 있고 고유한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났을 때 작품에 대한 인상은 희미해지겠지만, 이야기에 대한 기억은 더 오래 남으리라. 조셉 콘래드는 짐이 <우리 중의 한 명>이라고 자신있게 표현하지만, 말로야말로 독자가 주목해야 할 대상이다. 흥미로운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해 끈기있게 기억하고, 시작한 말을 끝마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리고 그의 곁에는 진심으로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이 있다. 

 

 이야기는 인생과 같다. 시작된 이상 반드시 끝난다. 존재하지 않는 이야기는 어디에도 없다. 짐의 고민과 선택, 후회와 도피, 지배와 최후는 각자의 매력적인 지점이 있다. 독자는 원하는 만큼 그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흥미가 떨어진다면, 즉시 책을 덮고 한쪽 구석으로 치워버린 다음, 먼지가 쌓일 때까지 내버려둘 수도 있다. 만약 계속 읽을 준비가 되어 있다면, 하루만에도 가능하다. 누군가의 인생을 그토록 쉽게 접할 수 있다는 것은 독서의 큰 특권이다. 모두에게 이야기가 가진 힘을 다스릴 주도권이 있다. 컨텐츠가 넘치다 못해 만연하는 지금의 세상에서 기억해야 할 것은 그에 대한 인식이다. 이야기가 가진 힘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그것이 우리가 이야기를 찾아다니는 이유이다. 


 이 소설이 처음 책의 형태로 나왔을 때, 작품이 나를 이끌었다는 말들이 있었다. 어떤 평론가들은 단편소설로 시작된 이 작품이 급기야 작가의 통제를 벗어나 버렸다고 주장했다. 그 가운데 한두 명은 그 사실을 뒷받침하는 내적 증거를 찾아내고 흥미로워하는 듯했다. 그 사람들은 서술 형식의 한계를 지적했다. 한 사람이 그토록 오랜 시간 혼자서 이야기하고 다른 사람들은 내내 그 이야기를 듣고만 있을 수는 없다는 주장이었다. 그런 상황은 그리 설득력이 없다고 말했다. 

 약 16년을 이 문제로 숙고해 보았지만, 아직도 그 주장에 수긍이 되지 않는다. 열대와 온대 지역 사람들은 밤늦게까지 자지 않고 모험담을 주고받는다고 알려져 있다. 그리고 이 소설에는 하나의 모험담만 담겨 있으며, 숨 돌릴 시간을 주기 위해 몇 차례 중단되기도 한다. 듣는 이들의 참을성에 관해 말하자면, 이야기가 <흥미로워야 한다>는 조건만 충족하면 그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는 처음부터 가정되는 필수사항이다. 재미있다는 <믿음>이 없다면 나는 애초에 이 이야기를 시작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p.577~5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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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전한 기독교 (개정무선판) 정본 C. S. 루이스 클래식 2
클라이브 스테이플즈 루이스 지음, 장경철.이종태 옮김 / 홍성사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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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기 자신을 믿는 것은 확실히 위험한 일이다. 사람은 종종 스스로를 잘 안다고 확신하지만, 자신의 신념만큼 흔들리기 쉬운 것도 없다. 믿음의 영역은 의심을 뛰어넘어야 하고, 그 중간에 걸쳐 있는 사람들은 아주 힘든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것을 신앙에 적용해 보면 이런 것이다. 전적으로 믿기로 다짐했다면, 흔들릴 일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아예 믿지 않기로 결심했다면, 그것 나름대로 마음이 편할 것이다. 하지만 주변 환경이나 순간의 생각으로 믿음이 흔들리는 사람은 매순간을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된다. 그 사람은 "내가 가는 길이 맞을까?"라는, 다른 누구도 대답할 수 없는 질문에 직면하게 된다. 그에 대해 자신 있게 옳고 그름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순전한 기독교(Mere Christianity)』를 보며 유독 많이 든 생각은 기독교인이 끝나지 않는 회의와의 싸움을 벌이고 있다는 것이었다. 목회자들이 영적 '전쟁'이라고 종종 표현하는 까닭이 이 때문인가? 아마 그들도 끊임없는 의심을 겪었을 것이다. 설령 신이 존재한다는 것이 개인적인 차원을 뛰어넘어 우주적인 초점에서 증명되었다 하더라도, 전능한 창조주가 나를 택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일은 쉽지 않다. 인간은 빠른 속도로 믿음의 궤도를 벗어나려고 애쓴다.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는 컨테이어 벨트를 거슬러 가려는 것처럼, 애초에 방향성이 다르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과 신을 믿는 것은 완전히 다른 개념이다. 작용과 반작용처럼, 믿음과 의심은 한 몸처럼 따라간다. 가끔은 믿음의 내용이 삶으로 나타날 때, 회의감은 극대화된다. 내가 믿음이라고 부르고, 신앙을 실천하는 일이 사실은 자기 만족이며,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것을 정당화하지는 않을까? 라는 생각 말이다.


 C.S. 루이스가 이 책을 통해 하고 싶었던 말 중 하나는 "세상과 타협하는 신앙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세상에는 신이 있다는 증거만큼이나 신이 없다는 주장과 근거도 방대하다. 저자는 그러한 정보들 중 자신의 취향이나 이해에 신을 끼워맞추지 말라고 선언한다. 애초에 완전한 이해에 도달할 수 없는 존재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으려는 시도 자체가 무익하다. 특히, 창조적 진화론이 그렇다. 저자가 말했듯, "이 이론이 하나님을 믿는 데 따르는 감정적 위안은 듬뿍 제공하면서, 믿음에 따라오는 덜 유쾌한 결과물들은 면제해 주기 때문"이다. 창조적 진화론을 비롯하여, '비기독교적인' 세상과 '기독교적(이라고 자칭하는)인' 나 사이의 불편한 지점을 없애려는 모든 시도는 "종교의 감동은 모두 누리면서 그 대가는 하나도 치르지 않겠다"는 위선적인 태도이다. 요컨대, 기독교인으로서 사는 것이 일종의 싸움이라면, 취할 수 있는 입장은 두 가지밖에 없다. 믿거나, 믿지 않거나. 중간 지대에 있기에 인간은 너무 나약하다. 벨트는 불신을 향해 항상 움직이기 때문에, 바람이 불거나 넘어지면 금세 처음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저자가 경고하는 또 하나의 죄악은 "나는 잘하고 있다"는 교만이다. 즉, 교회에서 헌신하고 타인에게 모범을 보이는 사람도 스스로에 취해 넘어질 수 있다. 루이스는 그런 사람이 불신자보다 더 위험하다고 경고한다. 그리고 자신이 교만하다는 사실을 깨달으라고 촉구한다. 왜냐하면 내가 교만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만큼 큰 교만은 없기 때문이다. 자만심이나 교만을 정의하는 방법은 다양하지만, 기독교적으로 해석하면 '나를 세상의 중심에 두는 일'이고, 모든 죄의 시작은 바로 '자기중심성'에 있다. 기독교가 세상과 분명한 거리를 두는 지점도 여기에 있다. 대부분의 종교는 믿는 자 본인의 마음과 행동이 중요하다고 설파한다. 무수한 매체들이 자신을 사랑하라고 말한다. 마땅히 맞는 말이다. 하지만 누구도 적절한 정도를 가르치지 못한다. 길을 잃은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이기적으로 변한다. 자신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타인을 품는 법을 잊어버린다. 


 믿음이 끝나지 않는 싸움인 이유는, 자신과 세상과의 관계는 항상 변하기 때문이다. 내가 아무리 확신을 가지고 있어도, 내면으로 신을 받아들인다 해도, 믿지 않는 사람의 견고함 또는 믿는다고 말하는 자들의 교만 앞에서 무너진다. 그들에게서 도무지 사랑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길을 걷는 자들은 용서하고 사랑해야 한다. 처음에는 받아들이기가 참 어렵다. 그동안 나를 위해 살아가는 것이 너무 편했고, 이것이 맞는 방향이라고 굳게 믿었으니까. 그래서 실수하기도 하고, 내가 위선자인 것은 아닌가, 하는 회의에 젖는다. 그러다 발견하게 된다. 세상 어딘가에서 조용히 제 몫을 다하고 있는 동료들이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들은 영원한 침묵을 지킨다. 말은 자신을 드러낼 뿐이니까. 대신 누군가는 삶으로 믿음을 증명한다. 그 존재만으로 나는 힘을 얻는다. 


 C. S. 루이스를 만난 것은 참으로 오랜만이다. 어린 시절 『나니아 연대기』 시리즈를 모두 읽으며, 흥미롭고 감동적인 모험의 이야기에 빠져들어간 기억이 생생하다. 라디오 방송에서 했던 직설보다는 그러한 우화들이 나를 더 매료시키기는 하지만, 다양한 종파를 아울러 지향하는 공통의 가치를 탐구하려는 그의 노력은 기억할 만하다. 그의 작품들을 보며 나의 부족함을 확인한다. 조만간 작가의 다른 책도 살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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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다 2023-03-13 2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글 너무 잘쓰심..
 
좁은 문 / 전원교향곡 / 배덕자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36
앙드레 지드 지음, 동성식 옮김 / 민음사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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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과 추악함은 눈을 감고 뜨고의 차이일지도 모른다. 현실은 아름답다고 믿고 싶지만, 눈을 뜨는 순간 그 추악함에 경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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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텍쥐페리의 인간된 면모를 엿볼 수 있는 글들이다. 답장을 확인할 수 없기에 그의 편지들이 독백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그 안에서 보이는 애절함과 부족함이 작가를 이해하는 데에 한결 도움을 준다. 한편, 알베르 카뮈와 마찬가지로 생텍쥐페리의 글에는 생동감이 있다. 마음을 움직이는 무엇인가가 녹아 있다. 비평을 하기보다는 감상하려는 목적으로, 여기에 그가 쓴 글의 일부를 남긴다.

"글을 쓰기 전에 우선 살아야한다"라고 앙트완느는 대답했다. 다른 그의 말에 대해서도 상당한 반향이 일기 시작했다.
"글을 쓴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야!" - P22

리네트, 항공 비행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당신 알고 있소? 이 곳에서 비행이란 그리 쉬운 것이 아니오. 내가 비행을 좋아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오. 여기서의 비행은 부르제 공항에서 하던 것과 같은 스포츠가 아니고,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엇이며, 일종의 전쟁이오. - P73

밤새도록 나는 불안한 상태였소. 그리고 나는 내가 사랑하는 모든 것에 애착을 느끼고 있소. 누가 자고 있는가. 내 침대에 누워 내가 밤새우고 있을 때면 환자를 지키는 간호원보다 나는 더 불안하다오. 여러날 밤을 새울 때 나는 나의 보물들을 잘 지키지 못하지요. - P97

리네트, 아가씨들은 그를 잘 보살펴 주지 않았어요. 그 아가씨들은 행실이 바르지 못하여 아름다운 모든 추억을 간직하지 못하게 했어요. 그렇지만 바로 그곳으로 그는 아가씨를 찾으러 갔다오. 이렇게 한다는 것은 각자 충실한 노력이지요. 왜냐하면 자기 자신을 바친 사람에게는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주기 때문이지요. - P98

그렇지만 연극이란, 그것을 알기 위해 노력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연극은 눈에 보이는 세계에서가 아니라, 사람의 의식 속에서만 자주 상연되기 때문이다. 행복한 도시인 페르피냥에서도 병원 창문 위에서 어떤 암종 환자가 자기 고통을 피하기 위해 마치 냉혹한 소리개처럼 공연히 몸을 뒤척이고 있다. 그 도시의 평화는 그 때문에 바뀐다.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하고 보편적인 중요성도 띄지 않는 고통도 아니고 정열도 아닌 것이 바로 인류의 기적이다. - P119

밤을 새운 암환자가 바로 인간의 두려움의 중심 인물이다. 어쩌면 광부 한 사람이 수천의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과 비길 만하다. 나는 인간이 문제가 될 때 이 무서운 숫자를 사용할 줄 모른다. 누군가가 내게 이렇게 말한다면, "단지 인구 문제에서 볼 때 수십 명의 희생자는 무슨 뜻이 있습니까? 타버린 몇 채의 신전은 계속 생활하고 있는 한 도시의 입장에서 보면 무엇을 의미합니까? ……바르셀로나에서는 어디에 공포가 있습니까?" 나는 이런 관점을 거부한다. 아무도 인간의 제국을 측량하지 못한다. - P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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