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펙타클의 사회란 이미지가 매개로 하는 사회다. 스펙타클이 존재하는 것은 우리 눈에 보이는 것에 익숙해져 그 자체로서만 스펙타클은 우리 일상의 모든 것을 지배한다. 스펙타클은 이미지가 매개된 것이라고 하여도 이미지는 가상의 영상이 아니라 현실의 물질적 요소로도 드러낸다. 스펙타클의 발생범주는 단순히 이미지 영상매체 전부가 아니다. 사람들의 인식이나 사고방식에 크게 미친다. 스펙타클의 영향은 바로 우리 일상생활에서 모든 것을 차지한다고 볼 수 있다. 스펙타클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은 자신의 의지에 의해 그리고 자신의 판단력에 의해 살아가지 않는다.

 

그들은 기만성으로 가득한 TV, 라디오, 영화, PC, 핸드폰 등의 매체로 영향을 받는다. 21세기에 도래하면서 정보과잉은 인간에게 주어진 정보 이상의 혼란을 준다. 미디어의 발달은 결국 그 미디어의 주인가 누구냐에 따라 변수가 결정된다. 미디어란 자본력이란 경제와 사회적 영향을 주는 정치적 입장이 크게 반영되어 있다. 미디어를 지배하는 사회에서 그 미디어를 통제하는 사람이야말로 그 사회의 지배자란 것이다. 미디어에 의해 수동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을 돋보이기 위해 미디어의 영향을 따라 더 가속화시킨다.

 

가령 어느 영화에서 나온 상품이나 이미지를 보고 구매하거나 따라하며, 어느 특정 장소에 몰두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자신의 입장이 아니라 미디어의 환경에 따라 좌우된다. 스펙타클은 언제나 일정한 모습이 아니라 늘 새로운 모습으로 대체된다. 물론 그 근본적인 스펙타클적인 요소는 항상 동일한 규칙은 가지고 있으나, 인간에게 보이는 매체적인 콘텐츠는 늘 바뀐다. 즉 사라지는 것을 대신하여 새로운 것이 등장하고, 그것은 새로운 상품소비와 더불어 인간사회의 이데올로기로 자리 잡는다. 인간에게 지나친 미디어의 간섭은 인간에게 자유로운 사고를 정지시킨다.

 

영상 안의 주어진 이야기들은 우리에게 그 어떤 비판적 요소를 끌어 올리려 하지 않는다. 자신들의 입장에서 유리한 상황만 전개해놓고 거기에 반대되는 의견을 무시하려고 한다. 스펙타클의 사회에서 그런 정보에 의해 좌우되는 인간들은 자신의 입장을 미디어에 의해 지배되면 될수록 자신의 발언을 포기한다. 포기라는 의미는 자신이 정말 추구해야할 가치이며, 그 가치 대신 미디어로 전파되는 스펙타클로서 완성된다. 그렇다면 이런 스펙타클에 저지할 수 있는 방도는 무엇인가?

 

인간은 하루 24시간 중에서 대략 7


시간 내외를 수면으로 보낸다. 인간의 생물학적 능력과 사회적인 시간에 따라 조금 다르겠지만, 인간이 수면시간을 보내고 나서 나머지 시간은 식사, 세면 등과 같은 생리적 행위를 빼면 15시간 이상을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정작 우리에게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이란 얼마인가? 학교에서 학생은 수업을 받고, 일반적인 직장인들은 근무시간을 보내야 한다. 그러면 여유시간 여가로 활용할 수 있는 문화적인 시간이 과연 얼마나 남을까? 거의 남지 않는다고 보면 된다. 9시 출근과 6시 퇴근이 정각으로 이루어지더라도 그가 집에 오면 여유시간은 4시간 내외다. 4시간 동안 인간들은 취미생활과 자기계발을 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정말 자신이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미디어의 영향, 스펙타클적인 관계요소에 의해 이루어진다. 게다가 많은 인간들은 자신만의 시간, 그 누구의 간섭으로부터 배제되기 보단, TV와 PC로 통해 살아간다. 자신이 선택하는 콘텐츠보단 자신에게 주어진 콘텐츠만 소비한다. 이 시간은 휴식시간이라 여기겠지만, 그 시간조차 노동이다. 왜냐하면 TV에서 수많은 상품이 광고되며, 그 시청시간은 기업에 대해서는 이윤을 증대한다. 자신에게 이윤이 도달하지 않고, 기업에게 혜택이 돌아간다. 상품을 직접적으로 구매하지 않아도 상품을 간접적으로 구매하는 셈이다.

 

그런 관계에서 인간은 자신의 사고방식을 미디어에서 일방적으로 제시하는 것에 의해 생활양식이 완결되는 셈이다. 그런 생활을 하게 되면 인간은 자신의 존재에 대한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하고, 자신의 시간은 빠르면서도 지루하게 흘러간다. 시간이 남아도 한가로운 것이 아니라 시간이 부족하더라도 무엇이 자신을 억누르는 것인지 이해하지 못한다. 사고체계가 이미 자신에 의해 판단할 수 없는 지경에 빠졌기 때문이다. 그런 인간에게 하나의 거대한 틀에 빠져있다면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의 삶을 통제하게 만드는 스펙타클을 해체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에게 애초부터 스펙타클 자체를 해체할 수 있어도 그 자체를 소멸시킬 수가 없다. 인간에게 스펙타클의 사회로부터 격리되기 위해서는 통신과 전화가 두절되는 산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인간은 루소의 말대로 곰과 같이 자연에서 살아갈 수 없다. 그렇다면 여기에 자신의 자연성을 회복하고 자아의 정체성을 찾는 것은 그 어떤 계기이고, 그것은 충격이다. 인간에게 충격을 주는 것으로 기존 생활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게 한다. 그게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예술이다. 예술은 근대 이전 탄생하여 근대시대에 무섭게 성장하여 현대에서 예술은 일상에서 자주 접하면서도 멀기만 느껴지는 아이러니한 단어가 되었다.

 

루소의 <학문과 예술에 대하여>를 읽으면 루소가 제기한 예술은 이미 부르주아 시대로 흘러가는 18세기 프랑스처럼 예술은 인간의 순수한 감정을 토대로 탄생하는 물질적(영화와 음악이 저장되는 시기가 아니므로) 혹은 시청각적인 것이 아니라 단지 자신의 부와 권력을 과시하게 만드는 수단이었다. 루소가 생각하는 예술성에서 그는 피아노 하나에 혼자 또는 다수의 사람이 노래를 부르는 것만으로 영감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물론 웅장한 오페라 곡을 만들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단지 고급문화로서 지배계층의 우월성을 보증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했다.

 

루소가 보던 시기에 연극조차 마찬가지다. 가령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은 배고픈 프랑스 파리의 비참한 시민들의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그 작품에서 불쌍한 시민들은 추위와 배고픔 그리고 질병으로 비참한 삶을 마감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 작품을 보던 후대사람들은 작품에서 전달하는 메시지를 보고 감동하나, 문제는 그 감동은 극장 내부에서 끝나고 밖에 나오는 순간 전혀 다른 인간으로 된다는 점이다. 인간에게 예술을 보여주는 이유는 새로운 감정과 사고 그리고 기존의 자신으로부터 새로운 모습을 찾아가기 위해서다. 대중이 아무리 그런 예술을 접하더라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과연 무엇이 문제인가?

 


강연을 하시는 교수님은 문학적인 요소 즉 공감대가 없다는 것이다. 문화적 인간이 되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이고, 왜 예술이 필요한가? 인간은 참으로 이율배반적이고 비겁한 모습이 많다. 자신은 남에게 좋은 인간이고 싶으나, 한편으로 자신의 이익을 손해 보지 않으려 한다. 결국 그런 이중적 잣대가 개인이 아니라 단체로 뭉치면 루소가 말하는 일반의지 대신 전체의지가 탄생한다. 자신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으면 아무 상관없고, 자신들의 이익에 피해가 가면 그 누구든지 단결하여 과다한 응징과 처벌이 이루어진다. 양심의 가책보단 다수라는 제도적 이익에 치중한다.

 

이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롭게 되기 위해서는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고정관념과 틀에서 벗어날 수밖에 없다. 그 시작은 자신의 계몽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계몽적 요소를 마주하기 어렵다. 대부분 대중들은 자신들의 현실에서 부당한 일에 휘말릴 경우가 적다. 그렇다면 결국 그런 상황이 만약 온다면? 라는 것에서 시작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시가 왜 역사보다 더 철학적인가? 결국 우리는 나에게 일어날 수 있다는 개연성에 의거하여 철학적 사유를 시도한다. 철학의 시작은 형이상학에서 시작되었다. 물리학에서 물리적 존재 너머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에 대해 연구한 것이 철학에서 많은 검토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현대로 넘어오면서 철학은 눈에 보이지 않은 존재보단 눈에 보이나 그 현상을 물리적으로 해석할 수 없는 인간에게 시선을 돌린다.

 

윤리학은 철학에서 제1의 학문이 되었고, 윤리학으로 통해 인간에게 부여된 고통과 억압에 대해 탐구가 시작된다. 문학과 예술로서 인간이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란 결국 인간의 감성과 공감능력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하는 논리와 이성적 판단이다. 인간의 논리보단 오히려 인간의 감정이 앞서는 것이라면 인간의 감정이 어떤 것이냐 따라 논리적 판단력조차 달라진다. 논리에서 윤리적 요소가 선행되지 않을 경우 그것은 진정한 논리가 되지 않는다. 어느 시대에 흐름과 대세라는 것이 있다. 그런데 그 상황적 요소가 바르지 못할 경우가 상당하다. 예술이란 것은 바로 이런 흐름에서 새로운 물꼬를 틀게 하는 샘물과 같다.

 

예술을 알기 위해서는 그렇게 쉬운 길이 아니다. 이미 그 시대의 흐름에 빠져 그 자체에 길들여진 인간에게 새로운 가치관을 생각할 수 있는 것이란 매우 어렵다. 인문학에서 많은 사람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것은 바로 기존의 사고방식으로 그 새로운 길을 찾아가려 하기 때문이다. 이때까지 보아온 것들과 전혀 다른 세계를 주어지므로 낯설고 어려우며 때로는 혐오감까지 들 수 있다. 예술은 단순히 미술, 문학, 영화, 연극, 음악 등이 아니다. 예술은 그런 매개체로 통해 전달될 뿐이다. 그 어떤 경로로 오던지 그 매체로 통해 자신이 새로운 관점으로 볼 수 없다면 영원히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대중들은 예술이 너무 낯설게 느낄 것이다. 자신들이 생각하는 바를 따라주지 않으면 관객들은 재미없거나 유용하지 못하게 느낀다. 영화에서 이미 제목과 포스터를 보고 자신의 시나리오에 일정부분 만족하지 않을 경우 배신감을 느낀다. 이게 대부분 관객이고, 외국에서 인정받는 예술작품들은 오히려 외면당한다. 당연히 “그래야만 한다!”라는 집단심리는 그 외에 대해 배타적인 시선으로 제외시킨다. 대중에게 물론 효과적으로 현실적인 문제를 비꼬거나 지적하는 콘텐츠는 존재한다. 그러나 대중들이 그것을 보고 이해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쉽게 접근해도 무리수가 있다는 점이다.

 

어떤 매체를 감상함에 있어서 전후맥락 관계 등을 파악하여 현실적으로 무슨 문제를 지적하는지 알려면 그 방법자체가 막막하다. 이미 길들어진 현상에서 조금이라도 세상에 대한 의문과 문제의식을 소유하지 못한다면 예술 그 자체를 받아들일 수 없다. 단지 예술 대신 대중문화라는 소비로 통해 자신들만의 세계적 틀을 구축한다. 인간의 틀을 깨어도 다른 틀이 존재하고, 다시 그 틀을 해체되어도 또 다른 틀에 봉착된다. 그러나 틀이 존재하는 이유는 어느 특정 부문에 몰입하기보단 우리 인간이 사회적 관계로 통해 존재할 수밖에 없는 한계성이다. 사회성의 포기는 말 그대로 숲에서 곰과 함께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연인이 아닌 문명인으로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예술을 이해할 수 있는 자격을 찾아야한다. 대중에 대한 인문학에서 인문학 그 자체가 대중의 옆으로 갈 수 있어도 대중의 시선으로 하락할 수 없다. 대중의 관점 그 자체가 사유의 해답이라고 한다면 기존의 모순이 되풀이되는 현상만 보일 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인간이 소외되는 세상을 방치할 수만은 없다. 예술은 인간에게 기존 세상과 다른 것을 보게 만드는 힘이 있다. 예술은 왜 인간에게 필요한가는 플라톤이 자신의 스승인 소크라테스로 통해 왜 인간은 아름다움을 포기할 수 없는가? 같은 말이다.

 

인간에게 아름다운 것을 보고 듣고 즐기는 이유는 즐거움을 찾기 위해서다. 즐거움을 찾는 이유는 인간이 인간다운 생활을 즐기기 위해서고, 인간은 영원한 생명이 아니라 그 존재적 대상으로 한정적으로 살아간다. 윤회를 하던 혹은 저승에 또 다른 삶이 있든 또는 동물적인 죽음으로 이 세상에 전혀 상관없는 존재가 되더라도 인간은 자신이 그 자체로 살아가는 기회가 1번뿐이다. 단 하나의 인생을 고통과 절망에 의해 살아간다면, 혹은 그런 세상에 놓여있어도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면 그건 매우 비참한 인생이 되는 것이다.

 

인간이 예술이 필요한 것은 자신의 삶만 충족이 아니라 타인의 삶 역시 충족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감정이란 마음이 있다. 감정이 없는 인간들은 차가운 냉소와 이기심으로 팽배하여 있다. 물론 나 역시 다소 세상에 대한 냉소적인 시선과 회의적인 관점이 다분하다. 즉 나는 내 인생관이 절대 긍정적으로 보지 않고, 오히려 비판적인 것을 넘어 부정적 시야가 강하다. 예술은 물론 행복만이 아니라 때로는 아픔과 고통도 줄 수 있다. 내가 세상을 살면서 정신적 고뇌와 현실에 대한 무기력을 느끼는 것조차 행복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인가? 하지만 정말 마지막 인생 끝 지점에 내 인생에 대한 후회는 있는가에서 대다수 사람들은 과거의 자신을 보고 두려워하여 미신과 광신에 빠질 수 있을 것이다.

 

예술은 그런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힘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것은 결국 자신의 의지고, 판단이다. 자신의 인생에 자신이 주인이 되어 타인과는 어떤 이미지의 매개로서 만나기보단 자신들의 의지와 사유로서 만나 서로 소통을 한다면 외로움의 고립감은 느끼지 않을 것이다. 고독이란 인간에게 무서운 것이다. 아무도 자신의 이야기를 귀담아주지 않은 것이란 눈앞에 태양의 빛이 있어도 보이는 것은 어둠의 절망이다. 왜 예술인가? 자신의 인생을 즐기기 위해서다. 그 누구의 강요나 눈치가 아닌 자신의 의지로 말이다. 물론 타인의 인식과 배려는 소중하다. 이미지로 꾸며진 관계란 지속될 수 없다. 늘 새로운 스펙타클이 기존의 스펙타클을 밀어내어 사람들을 열광하게 만들 것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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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에서 만남을 추구하면 안 되는 걸까>라는 애니메이션은 클리쉐(Cliche)적인 요소가 강한 전형적인 모험물이다이런 클리쉐적인 요소는 대부분 일본 애니메이션만 아니라 영화만화드라마 등에 깊숙하게 뿌리깊이 박혀있다이런 작품들을 볼 때 단순히 소재로 파악하는 것보단 전후맥락 즉 Context라는 요소를 생각해야 한다물론 작품은 이미 시작과 끝의 진행은 충분히 알고 남을 정도로 단순했다서사의 흐름에서 영웅의 탄생에서 그 영웅이 초반부터 강한 게 아니라 조금씩 강해져 어느 순간 신의 영역에 도달하는 것은 주변에 흔한 이야기다.

 

우리는 그 이야기가 너무 패턴이 보이거나 또는 이미 안 봐도 비디오라는 생각은 아마 당연할지도 모른다그러나 정작 알아야 할 점은 그런 이야기가 잘 팔리고 대중이 선호하는 점이다대중의 기대를 벗어나는 작품을 극장에서 발표하는 순간 대중들은 난동을 일으킨다난동이라 해봤자 항의 내지 재미가 없었다는 불평이겠지만그런 모습은 어디에나 있다만약 20세기 최후의 아방가르드 작가들의 영화를 본다면 어떻게 받아들이는 것이 옳은가예술(물론 아방가르드는 전위예술로서 상당히 파격적이지만)과 대중문화의 사이는 늘 이런 아슬아슬한 긴장감이 타고 온다.

 

예술과 대중문화를 동일하게 보게 힘들 것이고그런다고 서로 간의 벽을 올릴 수도 없다선택의 그것을 바라보는 이들의 미적인 감각이라 볼 것이다. <던전에서 만남을 추구하면 안 되는 걸까>는 분명 후자에 속한다너무 철저하게 후자에 속하지만전자의 눈인 예술로서는 뭐라 해야 하는가예술적 요소는 없다고 하나예술의 기원은 반영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인간의 예술 그리고 문학적인 공간에서 신화란 늘 전해지고 읽어지는 보물이다. <던전에서 만남을 추구하면 안 되는 걸까>에서는 바로 그 신화를 작품 내 모티브로서 작동한다.

 

고대 그리스신화에서 던전이란 개념은 없지만단지 그 신화의 인물을 던전에 참가하는 파밀리아의 우상으로 내세운다우상의 대상에서 곰이나 호랑이 같은 토템이즘이라 하겠지만그 신들은 올림포스에 거주하는 그리스의 신들이다주인공 벨의 경우 헤스티아 파밀리아에 속해 있다헤스티아는 본래 제우스의 누이이며그녀는 처녀로서 건강과 가정의 불을 담당했다상당히 가정적이고 포근한 처녀여신인 것이다그러나 제우스는 그녀를 아내로 삼지 않고다른 누이인 헤라와 결혼을 했다.

 

<던전에서 만남을 추구하면 안 되는 걸까>에서 보면 이상한 점이 바로 그것이다헤스티아는 크로노스와 레아의 딸이고제우스와 헤라의 누이다그런 헤스티아가 헤파이스토스와 친한 것으로 나온다헤파이스토스는 본래 헤라의 아들이었다제우스와 상관없이 헤파이스토스는 헤라에 의해 나온 아들이며제우스는 헤파이스토스를 태어나자 버리려 했다등장인물 요소로 대장장이신인 헤파이스토스는 여성으로 나온 것이다헤파이스토스는 그리스신화에서 다리 한 쪽을 절고 있으나, <던전에서 만남을 추구하면 안 되는 걸까>에선 눈 한 쪽을 가린 채로 나왔다.

 

작가가 그리스신화를 잘 이해하고 있지만신에 대한 모에적 요소를 다른 식으로 표현한 것이다신의 지상의 강림은 신의 존재가 그 이전의 시대보다 약해진 것으로 볼 수 있다따라서 신의 절대적인 존재보다는 다소 불안정한 존재로 드러난다대장장이신인 헤파이스토스가 헤스티아에게 벨의 단도를 제작하여 줄 때신의 권능보단 마치 인간의 노동으로서 제작하기 때문이다단지 신의 노동은 무기에 큰 위력과 잠재능력을 부여한다헤스티아는 벨의 신체가 특이한 것을 알고 있으며그에게 절대적인 힘을 부여하기보단 그의 잠재능력을 끌어올린다일정 수치의 레벨을 올리면 벨의 신체능력과 공격력 그리고 마법능력은 증가한다헤스티아의 철자가 추후에 health, 즉 건강이다.

 

건강을 부여하는 주신 헤스티아에게 주인공 벨은 모험하면서 많이 다치지만빨리 회복하는 모습을 보여준다정말 헤스티아의 능력인지 아니면 주인공은 아슬아슬한 위기를 해결하는 플롯의 구조로 활용하는 것인지 조금 의아하지만주신의 능력이 결국 파밀리아 일원에게 큰 힘이 되는 점이다헤르메스의 능력 중 하나가 제우스의 전령이듯이 헤르메스 파밀리아 일원 하나가 헤르메스에게 축복받은 능력을 사용하는 것이 나온다하지만 신은 자신의 봉인을 해제할 때 나오는 권위를 제외하고는 특별한 능력을 사용할 수 없다.

 

신의 존재는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후에 해당되는 시기로 볼 수 있다그리스 신들은 제우스 주도로 한 신들의 전쟁까지와 달리 인간세계에 등장한 반인반신의 등장 그리고 신들이 관여하는 전쟁이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시대일 것이다인간의 중심으로 던전을 침범하는 점에서 신은 그저 인간의 힘을 극대화시켜주는 촉매에 불과하다그러나 신은 영원한 존재이고인간은 유한한 존재다특히 신의 사랑을 받는 인간이란 언제나 시련과 아픔이 있게 되는 마련이다테티스의 아들 아킬레우스는 트로이전쟁에서 사망하고제우스 아들인 사르페돈 역시 사망한다.

 

그리고 <오디세이아>의 오디세우스 역시 오랜 전쟁과 모험 끝에 집에 도착한다모험이란 서사에서 인간은 언제나 신의 사랑과 시험을 받는다그럼에도 인간은 왜 모험은 포기하지 못하는가그런 요소들을 철학적으로 사유하기보단 그저 서사적으로 보여줄 뿐이다그러나 많은 인간들은 열광한다. <던전에서 만남을 추구하면 안 되는 걸까>에서 아주 재미있는 말이 나온다승자는 많은 패자 속에서 등장한다신화란 인간의 욕망의 억압 그리고 해방과 은폐에서 생기는 이야기다인간의 숨은 욕망에서 드러나는 이야기에서 패자들의 욕망에서 영웅이 탄생된다쉽게 말하자면 내가 혹은 우리들이 이렇게 쓰러질 때 누구 한 명 나서서 해결해주면 안 될까?”라는 심리다.

 

우리들이 <던전에서 만남을 추구하면 안 되는 걸까>에서 보이는 욕망은 무엇인가주인공 벨은 무척 순진하고 착하고 마음이 여린 청년이다그러나 주변에 많은 미소녀와 미녀들이 모이는 전형적인 하렘 작품의 캐릭터로 등장한다그 내부의 심리는 나는 이렇게 좋은 사람이고 착한 사람인데왜 내 주변에 여자들이 모이지 않은 것일까라는 심리적 박탈감이 하나의 신화로서 등장한다대놓고 세상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기보단 뭔가 어떤 상황의 흐름에 따라 등장하려는 수줍은 마음이 깃들어 있다그러나 현실에서 일어날 일이 아니고빈곤한 심리적 기제에서 발생하는 상상력이니 언제나 우리는 우리만의 던전을 만들어 그곳에서 만남을 추구하고 싶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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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5-07-02 09: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리스 신들이 인간의 성질을 은유화한 거라 해석되듯이, 요즘 그 신들의 힘이 촉매 역할로 약화되었다고 보시는 건 매우 타당한 해석이시네요.

만화애니비평 2015-07-03 08:57   좋아요 0 | URL
아무래도 일본이라 그런가 봅니다.
그리스 신도 인간을 사랑하는 모습이 나오나, 이 작품의 헤스티아 너무 노골적입니다. 그들은 인간보다 조금 우월할 뿐, 인간과 거의 별반 차이 없으니, 단지 촉매역할제라는 보조역할이 두드러집니다. 하지만 다들 미소녀란 점이....흠....
 

<사이코 패스> TV판을 보면 주제가 바로 감시와 처벌이다. 코가미 신야가 자신의 스승에게 찾아가 마키시마 쇼코를 추적할 때, 스승과 제자는 시빌라 시스템에 대한 문제점 그리고 그것을 피해가는 쇼코에 대한 추리를 한다. 그때 나온 단어가 푸코와 벤담의 파놉티콘이란 일원감시망이다. 시빌라 시스템이란 모든 정점의 최고에 올라 자신의 볼 수 있는 시선으로 모두 감시한다. 즉 전 지구적인 감시, 인간의 눈이 아니라 신이 준 눈으로 보는 것이다. 시빌라(Sibylla)라는 단어를 찾아보면 시빌(Sibyl)의 원조로서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무녀를 지칭한다.

 

그녀는 제우스의 아들 아폴론에 의해 축복을 받은 무녀로서 신탁을 내리는 재능이 있다. 신탁을 내리는 것은 곧 신의 말을 전하는 것, 인간의 신체로 인간이상의 존재의 말로서 모든 인간을 지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신화 내지 또는 비극, 특히 위대한 그리스시인 호메로스가 저술한 일리아스를 조금 읽으면 조금 감이 올 수 있다. 시빌라 시스템의 의도를 보자면 곧 인간이 만든 제도이나, 인간 이상의 존재가 만든 체계 이다.

 

시빌라 시스템은 자신들의 원류가 면역체질의 인간, 즉 마키시마 쇼코 같은 인간들의 뇌가 밀집하여, 자신들의 판단으로서 모든 사회를 지배한다. 그들은 육체가 존재하지 않고, 뇌라는 정신적 기능을 수행하는 부분만 남는다. 육체가 사라진 인간에게 필요한 욕망은 무엇인가? 신체를 가진 인간에게 제일 필요한 것은 식욕이다. 음식을 섭취하여 자신의 체력을 유지하며, 그것이 만족하면 성욕이다. 성욕은 자신의 성적 무의식 리비도에 의해 성행위를 나누고, 그것은 새로운 자신의 분신, 후손을 남긴다.

 

그러나 성욕과 식욕이 만족되면 인간을 무엇을 추구하는가? 결국 인간은 문화적 존재로 살아가고, 그 문화에서 문명의 발전과 사회적 진보는 결과적으로 진행된다. 문제는 그 문화적 존재로 살아가는데, 그 정치사회적 체계가 달려있다. 22세기 세계는 분쟁으로 인해 단절되고, 본 작품의 세계에서 일본은 시빌라 시스템이 모든 것을 정한다. 시빌라 시스템이 추구하는 목표는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다. 이른바 공리주의라는 사회제도로서 이것은 사회주의, 자유주의 이념에서 빼놓을 수 없는 체계다. 공리주의는 그 자체로서 사회주의, 민주주의, 자유주의 정치체계를 우위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사이코 패스>에서 공리주의가 모든 정치제도의 머리 위에 존재한다. 즉 시빌라 시스템이 모든 인간 위에 군림한 것이다. 시빌라 시스템은 법위에 존재하는 통치자, 즉 노모스(nomos)로서 존재하고, 이 통치자는 육체가 없는 정신적 영역만 존재하므로 이상적인 정치사회를 구현하려 한다. 문제는 인간의 정치제도의 이상은 과연 무엇인가? 라는 점이다. 인류의 역사는 투쟁의 역사다.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대립은 고대사회부터 현대사회로 이어지는 게 우리의 역사다.

 

이 역사적 흐름에서 계급투쟁이 처음에 족장과 부족(고대 이전 사회), 신화적 왕과 신민(고대사회), 왕족귀족과 성직자와 농노(봉건사회), 다음으로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트라는 자본주의 체계로 이행된다. 이런 관계에서 인류의 역사는 전쟁과 혁명, 반동과 반란의 세상이다. 인간이 그토록 투쟁하며 살아온 이유는 자신이 인간이기 때문에 자신의 삶에 자신의 주인으로 되기 위한 몸부림이다. 시발라 시스템이 일본을 제패한 이유는 무엇인가? 저 투쟁의 역사에서 인간은 자신 스스로가 주인으로 살아가기보단 자신의 욕망과 안위를 위해 살아간 것이다.

 

민주주의사회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국민의 선택이다. 국민이 선택하는 것은 결국 자신의 의지와 사유로서 이성적 비판으로 선택하는 것이다. 이성의 자유를 최고의 자유로 여기는 것은 고대그리스부터 근대사상 그리고 현대까지 이어진다. 문제는 인간은 이성의 자유를 지킬 수 있는가이다. 오히려 자유라는 의지를 이성보단 자신의 감정과 무의식이란 욕망에 의해 스스로의 자유를 파괴한다. 자신의 의지가 아닌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여 만든 사회화는 자신이란 존재는 군중의 벽 뒤로 숨어버린다.

 

시발라 시스템이 왜 일본에서 최적화되었는가? 마키시마 쇼코가 왜 그런 테러를 준비했는가? 정의는 과연 무엇인가? <사이코 패스> 1기에서 쇼코의 행동은 분명히 테러이고, () 사회적인 행위이며, 명확한 악으로서 보여준다. 하지만 쇼코의 입장에서 쇼코의 논리로 들어가면 테러리스트들의 행동에서 그 역시 정의가 존재한다. 정의는 선악의 이분법으로 나눌 수 있는 게 아니다. 단지 정의는 그 집단이 가지고 있는 의지이고, 하나의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 쇼코의 정의는 시빌라 시스템이 인간을 가축으로 길들이고, 결국 인간은 자신에게 주어진 사람에 아무런 선택도 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인간 스스로에게 선택할 수 있는 힘이나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런 식으로 쇼코는 인간의 불안한 충동을 실험하고 사회에 대한 공격을 가한다. 시빌라 시스템이 우려하는 것은 사회의 분란이 아니다. 단지 자신들이 이상적으로 만들려고 하는 세상에 불순물이 생기는 것이다. 정신분석에 따른 두뇌스캔에서 인간의 심리가 어떤 감정과 생각을 가진 것에 따라 그 사회의 불순물이 될지 혹은 그런 가능성이 있는지 분리한다. 인간의 심리란 후천적인 영향을 받지만, 인간의 심리 혹은 영혼 역시 선천적 영향을 받는다.

 

시빌라 시스템에서 운영되는 뇌들은 선천적인 존재이고, 자신들은 선택받았기에 신을 대신 신탁자로서 인간을 통치하고, 모든 것을 감시한다. 그런 시스템이 일본이 아니라 타국에 간다면? 여기서부터 <사이코 패스> 극장판의 본질적 문제가 드러난다. 시빌라 시스템은 동남아시아 연합이 국가적 기능이 붕괴한지 2년이 넘었다고 한다. 그것은 국가가 아니라 내전만 존재하는 비국가적인 체계다. TV판에서 아카네가 시빌라 시스템의 부조리를 인정하고 그것을 지지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시빌라 시스템이 하나의 법적 제도적 체계가 되었다.

 

아카네는 시빌라 시스템을 인정하는 게 아니라 시빌라 시스템이 만들어낸 법적인 체계를 인정했다. 즉 아카네는 법을 존중한 것이다. 그런 TV판의 모습과 극장판 모습에서 아카네 감시관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온다. TV판에서 시빌라 시스템을 부정하지만, 그 시스템이 만든 공리주의 사회체계는 긍정한다. 그러나 동남아시아 연합에서의 시빌라는 부정한다. 동남아시아연합은 계속 내전 중이고, 군벌과 반정부 게릴라는 계속된 내전으로 많은 인명을 희생시킨다. 이때 반정부에 대한 시빌라 시스템에 대한 개입을 두고 아카네는 중요한 이야기를 한다.

 

바로 인도네시아의 인민들이 선택할 수 있게 해라는 점이다. 아카네의 역설적인 반응을 이해하기 어렵지만 그것은 아카네가 사회계약론을 토대로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아카네는 동남아시아 연합의 인민들의 선택에 의한 정치를 만드는 게 합당하다고 했다. 시빌라 시스템이 동남아시아 연합에 개입한 이유는 그것은 군벌에 의한 압제로 인해 하나의 국가로 보기 어렵다는 점이다. 국가적 기능에서 국민이 없으면 국가로 볼 수 없다. 국민이 없는 이전의 사회, 그곳에 주거하는 인간에 대해 인민이라 한다.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에서 인민은 오로지 법에만 복종하고, 법 위에 군림하는 인간에게 복종하지 않아야 한다고 한다. 법 위에 군림하는 인간은 모든 인민을 억압하는 독재자가 되기 때문이다. 통치자 내지 정치가 역시 법에 복종하여 정치를 실행하여야 한다는 논리가 바로 아카네의 논리다. 이런 논리로 보자면 인도네시아 군벌세력은 법 위에 군림하는 인간으로 관료주의의 폭력성을 정당화하여 인도네시아 연합 주민들을 탄압한다. 그들은 자신의 힘과 권력으로 다른 군벌세력과 반정부 게릴라를 섬멸한다.

 

반정부 게릴라는 본래 민주주의국가를 정착시키기 위해 활동하는 무리다. 인도네시아 연합 수도에 들어가면 일부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목에 목걸이를 차고 있다. 그 목걸이는 만약 군벌세력에 복종하지 않으면 바로 처벌할 수 있게 만든 도구다. 감시와 처벌이 실시간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런 체계로 군벌세력은 소수의 인원으로 다수를 지배하는 체계를 만들 수 있던 것이다.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다. 하지만 여기저기 쇠사슬에 묶여 있다. 자기가 남의 주인이라고 생각하는 자도 사실은 그 사람들보다 더한 사슬에 묶인 노예이다(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구절)."

 

군벌은 남의 주인이라 생각하고, 시빌라 시스템을 이용하여 그보다 더 심한 사슬에 묶인 (권력의) 노예였다. <사이코 패스> 극장판에서 TV 1기 실종된 코가미 신야를 쫓아 인도네시아 연합으로 간 아카네지만, 그 스토리 이면에 가려진 작품세계는 인간이 가진 자유와 의지다. 왜 반정부 게릴라는 거대한 군벌의 무기 앞에 무참히 죽어가도 그 총을 놓지 않은 것인가? 왜 코가미 신야의 친구인 게릴라지도자는 죽을 줄 알면서도 옆의 동료 옆에서 적에게 총구를 겨누는 것인가?

 

나는 노예의 평화보다는 위험한 자유를 택할 것이다(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 구절).”

 

사실 아케네가 일본에서 일어난 테러범들의 출처가 코가미 신야의 연계성을 보고 넘어간 것이나, 그곳의 정치적 상황과 사회적 모순, 그리고 아카네와 코가미의 활약에서 그들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의지다. 인간은 자신의 의지로 살아가는 것에서 가치가 있다.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카네 친구의 결혼이다. 그녀는 드레스를 고르면서 상대남자가 자신의 의지가 아닌 시빌라 시스템에서 정해준 것이라 말한다. 사랑과 가족관계 역시 시빌라 시스템으로 이어지면 인간은 자신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들은 없다.

 

단지 정해진 틀에 의해 기계적인 삶만 살아간다. 그런 완벽하게 돌아가는 인간의 삶을 바라는 것이 시빌라 시스템이다. 인간의 의지가 아니라 인간 이상의 의지가 존재하기에 그렇다. 글 초반에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를 거론한 이유는 이 작품에서 인간은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신들의 의지에 의해 농락당한다. 제우스와 그 주변 신들의 힘에 의해 전사들은 하데스의 신전에 찾아가야 하는 운명에 처한다. 신의 입 바람으로 활과 창이 상대방의 심장과 머리에 박힌다. 이런 신화적 세계관이 인간세상에서 하나의 정당성이 되면 인간은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을까? 쇼코를 죽인 코가미는 오히려 쇼코처럼 되어간다. 단지 쇼코는 개인적 취향, 미적감각에 의해 인간들을 움직이나, 코가미는 인간의 자유와 의지를 위해 싸우는 지성인으로서 투쟁한다.

 

나는 인류 속에서 두 종류의 불평등을 생각한다. 그 하나를 나는 자연적 또는 신체적 불평등이라 부른다. 그것은 자연에 의해 정해지는 것으로, 연령이나 건강이나 체력의 차이와 정신, 또는 영혼의 질의 차이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일종의 약속에 의존하여 사람들의 합의에 따라 정해지든가 정당화되는 것이므로, 이것을 사회적 또는 정치적 불평등이라 부를 수 있다. 사회적 또는 정치적 불평등은 얼마간의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손해를 끼침으로써 누리게 되는 갖가지 특권, 이를테면 다른 사람들보다 부유하다든가 존경을 받고 있다는가 권력이 있다는가, 나아가서는 그들을 자기에게 복종시킨다는 특권으로 이루어지고 있다(장 자크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

 

<사이코 패스> TV판과 극장판에 등장하는 불평등은 2가지로 볼 수 있다. TV판에서는 자연적 또는 신체적 불평등이고, 극장판은 사회적 또는 정치적 불평등이다. 그래서 전자는 이미 인간의 운명은 정해진 굴레에 살아가고, 후자에서는 투쟁할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사이코 패스>에서 일본의 인간들은 과연 인간의 자유의지를 찾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지배받는데 익숙해진 국민은 이미 지배자 없이 지낼 수 없게 되지요. 만일 속박에서 벗어나려 한다면 그들은 자유에서 점점 멀어질 뿐입니다. 그들은 참된 자유와 반대되는 방종을 자유로 착각하므로, 혁명을 한다고 해도 거의 언제나 자기들의 족쇄를 더욱 무겁게 만들어버릴 뿐인 선동가들에게 스스로를 내맡기게 되지요(장 자크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

 

<사이코 패스>는 먼 미래를 사회적 배경을 삼은 SF범죄 장르다. 이 작품에서 시빌라 시스템은 완벽한 사회를 구현하려고 하는 이상적인 가치관을 주장한다. 하지만 그 주장은 시민의 자유의지가 아닌 시빌라 시스템 내에 존재하는 소수 인간의 뇌만으로 결정된다. 비록 그 세상이 안정되더라도 어떻게든 인간사회에선 특이한 존재가 나올 수밖에 없다. 이런 존재에 대해 우리는 배타적으로 대해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새롭게 받아들여 하나의 가치로 인정할 것인가? 시빌라 시스템은 자신 이외의 가치를 모조리 부정한다. 그곳 세계는 민주자유주의가 아니라 신이란 존재 아래 자신의 기계적 삶을 살아가는 인간만 존재할 뿐이다. <사이코 패스>에서 쇼코가 가진 책으로 조지 오웰의 <1984>가 있다. 하지만 작품을 계속 보면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로 가고 있다. 그것은 무슨 말인가? 이미 당신의 삶은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정해져 있다 말하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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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 신문기사를 보고 놀랬다.


‘땅콩회항’ 사건으로 징역1년의 실형을 받아 수감됐던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41)이 2심에서 집행유예를 선고 받고 석방됐다. 

서울고법 형사6부(김상환 부장판사)는 22일 항공보안법 위반 등의 혐의로 기소된 조 전 부사장에게 징역10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함께 기소된 대한항공 객실담당 여모 상무에게는 징역8월에 집행유예 2년, 국토부 조사관 김모씨에게는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피고인 조현아가 항공기의 이동을 인식한 상태에서 사무장 박창진과 승무원 김도희에 대한 위력을 행사해 기장으로 하여금 푸시백을 중단하고 게이트로 되돌아가게 하여 이 사건 램프리턴에 이른 사실은 인정된다. 그러나 항공보안법 제42조의 해석상, 이 사건 램프리턴과 같이 ‘계류장 내에서의 램프리턴’은 ‘항로의 변경’에 해당하지 않는다”며 주요 혐의였던 항로변경으로 인한 항공보안법 위반의 점에 대해서는 무죄를 선고했다. 1심에서는 지상에서의 이동도 ‘항로’에 해당한다고 보고 이 혐의에 대해 유죄를 인정했다. 


아무리 법집행을 사법기관에서 한다고 하나, 법을 제대로 몰라도 법률에 대해 기본적인 지식과 한글만 봐도 안다.


법률 제12257호 항공보안법,


http://www.law.go.kr/lsSc.do?menuId=0&subMenu=1&query=%ED%95%AD%EA%B3%B5#liBgcolor20


법률은 국회에서 제정되고, 시행령은 대통령의 서명, 시행규칙은 장관의 서명으로 결정된다. 

그래서 법률은 대통령이든 공무원이든 그 누구나에게 적용되는 법이다. 그런 법률적 요소에서 항공보안법을 제2조 정의를 보자.


 이 법에서 사용하는 용어의 뜻은 다음과 같다. 다만, 이 법에 특별한 규정이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항공법」에서 정하는 바에 따른다.  <개정 2012.1.26., 2013.4.5.>

1. "운항중"이란 승객이 탑승한 후 항공기의 모든 문이 닫힌 때부터 내리기 위하여 문을 열 때까지를 말한다.

2. "공항운영자"란 「항공법」제2조제7호의2에 따른 공항운영자를 말한다.

3. "항공운송사업자"란 「항공법」 제112조에 따라 면허를 받은 국내항공운송사업자 및 국제항공운송사업자, 같은 법 제132조에 따라 등록을 한 소형항공운송사업자 및 같은 법 제147조에 따라 허가를 받은 외국인 국제항공운송업자를 말한다.

4. "항공기취급업체"란 「항공법」 제137조에 따라 항공기취급업을 등록한 업체를 말한다.

5. "항공기정비업체"란 「항공법」 제137조의2에 따라 항공기정비업을 등록한 업체를 말한다.

6. "공항상주업체"란 공항에서 영업을 할 목적으로 공항운영자와 시설이용 계약을 맺은 개인 또는 법인을 말한다.

7. "항공기내보안요원"이란 항공기 내의 불법방해행위를 방지하는 직무를 담당하는 사법경찰관리 또는 그 직무를 위하여 항공운송사업자가 지명하는 사람을 말한다.

8. "불법방해행위"란 항공기의 안전운항을 저해할 우려가 있거나 운항을 불가능하게 하는 행위로서 다음 각 목의 행위를 말한다.

가. 지상에 있거나 운항중인 항공기를 납치하거나 납치를 시도하는 행위

나. 항공기 또는 공항에서 사람을 인질로 삼는 행위

다. 항공기, 공항 및 항행안전시설을 파괴하거나 손상시키는 행위

라. 항공기, 항행안전시설 및 제12조에 따른 보호구역(이하 "보호구역"이라 한다)에 무단 침입하거나 운영을 방해하는 행위

마. 범죄의 목적으로 항공기 또는 보호구역 내로 제21조에 따른 무기 등 위해물품(危害物品)을 반입하는 행위

바. 지상에 있거나 운항중인 항공기의 안전을 위협하는 거짓 정보를 제공하는 행위 또는 공항 및 공항시설 내에 있는 승객, 승무원, 지상근무자의 안전을 위협하는 거짓 정보를 제공하는 행위

사. 사람을 사상(死傷)에 이르게 하거나 재산 또는 환경에 심각한 손상을 입힐 목적으로 항공기를 이용하는 행위

아. 그 밖에 이 법에 따라 처벌받는 행위

9. "보안검색"이란 불법방해행위를 하는 데에 사용될 수 있는 무기 또는 폭발물 등 위험성이 있는 물건들을 탐지 및 수색하기 위한 행위를 말한다.

10. "항공보안검색요원"이란 승객, 휴대물품, 위탁수하물, 항공화물 또는 보호구역에 출입하려고 하는 사람 등에 대하여 보안검색을 하는 사람을 말한다.


보다시피 항공안전법에서 운항 중이란 분명하게 항공기의 모든 문이 닫히어 내리기 위한 시간까지다. 그리고  

 

 위계 또는 위력으로써 운항중인 항공기의 항로를 변경하게 하여 정상 운항을 방해한 사람은 1년 이상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폭행·협박 또는 위계로써 기장등의 정당한 직무집행을 방해하여 항공기와 승객의 안전을 해친 사람은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운항 중인 항공기란 결국 최종 목적지 공항에 도착해 문을 열 때까지를 말한다. 법리적 해석이 항공안전법에 명백히 틀린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땅꽁회항의 처벌이 중요한 이유는 재벌의 가족이란 이유로 판례를 새롭게 내야하는 무리수다. 그 무리수가 적용되면 법률에서 정하는 평등의 원칙이 무너진다. 이미 법 자체가 법의 정신 즉 철학이 무너지고 있는 판국에서 그 규정자체까지 무너지면 대한민국은 법률에 의해 움직이는 국가라는 사실을 포기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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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15-05-22 15: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 그래도 더운데 열 오르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만화애니비평 2015-05-22 21:58   좋아요 0 | URL
확실히 열이 오르는 기사인데, 어떻게 합니까? 이렇게라도 기록해야죠...ㅠ.ㅠ

만병통치약 2015-05-22 2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심 유죄 내린게 기특할 뿐이죠. 여론 무서우니 잠시 벌주는 척.

만화애니비평 2015-05-22 21:58   좋아요 0 | URL
뭐 결국 쇼란 것이죠~
김원준 쇼처럼
쇼! 끝은 없는 거야!
 

토크빌이 <구체제와 프랑스혁명>에서 이런 내용을 거론했다. “그 나라의 정치는 그 나라의 국민들의 수준을 알 수 있다고 말이다. 정치의 문제는 정치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그 나라와 국민의 총체적 문제이기 때문이다. 역사상 잔인한 독재자인 히틀러나 스탈린의 등장에서 단순히 그들이 광기에 젖은 살인의지가 시행된 게 아니다. 그들을 움직이게 하는 에너지 원동력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들이 움직이는 것이다. 그들이 세상을 암흑으로 만든 게 아니라 그들이 암흑으로 만들도록 내버려둔 것이다.

 

가끔 인간의 선택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이상한 지점을 고른다. 그리스 신전에 찾아간 여행객들이 신탁을 듣는 순간 도저히 이성으로 납득되지 않아도 결국 그 비극적 운명은 도래한다. 인간은 처음부터 이성적이라고 판단하는 것 자체가 모순이다. 차라리 인간이 이성적이지 못하기에 그것을 인지하는 것부터 모든 게 시작하다. 자신이 생각하거나 옳다는 것은 그 본인에게 그 자체만으로 정의다. 정의에 대한 윤리성은 배제되고 오로지 자신의 제도적인 요소와 입지로 통해 정의는 갈리기 시작한다.

 

오늘은 2015416, 세월호 사건이 발생한지 정확하게 1년이 되었다. 단원고등학교 학생과 그 밖에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빼앗아 가버린 비극적인 날에서 우리의 현실을 본다. 이 사건을 보면서 나는 인간의 이중성과 잔인성 그리고 욕망을 보았다. 포장마차에서 술 마시다가 또는 집에서 이야기하다가 보상금을 받는 화제가 나오면 인간의 추악한 모습을 본다. 보상금을 많이 받아 세금도둑이라 하는 자들을 볼 때, 나는 이래 생각한다.

 

저들이 저런 말을 하는 이유는 바로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어떤 요행으로 거액을 받고 싶은 것이다.”라고 말이다. 만약 평범한 가정에 자녀가 혼자라면 돈을 몇 억 혹은 몇 십억을 받는 무슨 의미인가? 내가 만약 당신들의 애들이 죽으면 어떻게 할 것이냐? 라는 질문에 모두 자신들이 도덕적인 인간인 것처럼 대답을 한다. 나는 그러는데 저들은 그렇지 않는다는 말에서 인간의 추악함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세금이 오른 것도 담배 값이 오른 것도 의료보험료가 오른 것도 모두 세월호라고 말하거나 또는 그렇게 인지하는 세상을 보면 우리나라 정치의 부패는 바로 국민들의 인식이란 점을 알 수 있다.

 

남의 고통을 보고도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한 망정, 아직 결정되지 않고 해결되지 않은 보상 및 배상을 두고 질투하는 모습이란 가히 코미디가 따로 없다. 언론에서 정확하지 않은 정보를 마치 인 것처럼 흘려 놓는 모습에서 우리 현실을 본다. 돈에 대한 욕망, 그것이 타인들의 고통에서 받은 보상을 질투하는 치졸함, 게다가 세금이나 조세에 대해 계산조차 하지 못하는 무지함까지도 말이다. 만약 3,000억이 총 보상비용이라 하자.

 

담배 2000원이 오른 점에 대해 논하자면 한국흡연인구가 2013년을 기준으로 남자 42.1%, 여자 6.2%이다. 5,000만 명에서 저 정도면 2500만 명인데, 2,500만 명은 과한 것으로 보고 대략 1,000만 명으로 설정하자. 하루 담배 2,000× 10,000,000= 20,000,000,000원이다. 200억이라는 점이다. 담배 1갑을 2일을 핀다고 해도 2개월이면 모두 해결된다. 그러면 2개월 후에 담배가격이 원래로 돌아가는가? 결코 아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논리가 판치고 있는데도 세금도둑이란 말을 어디서부터 시작인가?

 

무지와 질투로 어느 것부터 고치야 할 것은 보이지 못한 채 나약한 양심은 그 양심에 비해 훨씬 나약한 사회적 약자를 공격한다. 나약한 양심으로 정의를 말할 수 없기에 그들은 정의는 약자를 내모는 것으로 성립된다. 물론 이런 방법은 현재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과거 어느 시대에도 있었다. 당시에는 아주 유용하게 써먹은 방법이나, 후대에 와서는 모진 비판과 반사교면이 되던 실화가 되었다.

 

아직도 기억이 나는 작년, 나는 봉하마을에서 제초를 하고, 저녁 먹기 전에 잠깐 막걸리 한 잔 하고 쉬는 도중에 그 소식을 들었다. 내가 그때 생각하던 것은 진도라는 곳은 물살이 급한 곳이고 배가 만약 침몰했다면 시체조차 건져 오르기 힘들 것이라 생각했다. 근데 그 불안한 생각은 거의 들어맞기 시작했고, 아직까지 실종자 9인이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작년의 생각에도 나는 분명 시체라도 찾으면 다행일 것이라고 친구와 전화하던 일이 있었다. 내 친구는 나보고 너무 부정적이고 비관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개인적으로 나는 세상에 대하여 긍정적으로 보기 힘들고, 다소 비관적인 관점이 강하다. 마음에서 긍정의 심리를 따르지 않고, 뭐든지 부정적으로 바라본다. 부정적 시각은 사회구조적으로 또는 거시적인 판단을 나에게 주지만, 세상의 재미로서 그다지 맛을 보기 어렵다. 게다가 세월호 사건 이후 우리사회의 깊은 모순과 부조리를 그냥 무력하게 바라보는 나로선, 이 사회의 근본부터 뜯어고치지 않으면 방법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나보고 너는 왜 이렇게 세상에 불만이 많니?” 또는 세상을 왜 그렇게 부정적으로 보니?”라고 한다. 솔직히 나는 별 말을 하지 않으나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한다. “당연히 너희들이 그런 일을 당하지 않으니 그런 말을 하지. 만약 너희들이 그런 일들을 당하면 과연 어쩔까?”라며 지나친다. 모두 자신과 관계없으면 아무 상관없는 일이고, 마치 자신들에게 그런 일은 오지 않을 것이라 여긴다.

 

하지만 여태까지 이런 재난들이 일어난 이유는 바로 저런 사고를 가졌기 때문이다. 416일에 생각할 것들은 너무 많지만, 나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들에 추모해도 죽은 자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의 가족과 친구들에겐 아직 시간이 있다. 이 세계를 살아갈 시간을 말이다. 그날의 비극 이상으로 더 비극인 것은 이 비극이 계속 되풀이 될 것이란 점이다. 역사는 2번 반복되는 소극에서 우리 앞의 생은 무엇으로 살아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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