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담론을 좋아해서일까? 글을 적은 것에 대해 그동안 생각해보면 대략 그런 느낌이 든다. 뭔가를 결론적인 부분만 언급하기 보다는 그 과정과 원인에 대해 해부를 한다. 그러다 보니 글의 내용이 화생방 훈련에서 최루탄 가스를 마시는 기분일 것이다. 눈물, 콧물, 침까지 다 흘리는 현상을 만들려고 하니 그것을 보는 이에게 뭔가 뻥! 하고 뚫리는 기분과 함께 한편으로 뭔가 불편한 기분을 준다. 화생방 훈련실의 최루가스를 마시는 것은 비단 코가 막힌 사람보다 안 막힌 사람이 더 많지 않은가?

 

예전에 진중권 교수의 놀이와 예술 그리고 상상력이란 책을 읽으면서 그동안 내가 생각했던 내용을 조금 정리한 느낌이었다. 이른바 한국에는 문화콘텐츠산업이 부실한 점과 거기에 대한 대안 및 문제점을 지적하면 자유로운 사고가 없다는 점이다. 자유로운 사고는 이미 우리 교육에서 막은 지가 옛날이다. 착하고 바른 어린이의 기준은 학교와 학원 잘 가고, 집에서 공부만 하는 아이들이다. 그 이상의 아이들을 바라지 않는다. 그런 아이들을 어른들을 귀찮게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굴레는 어찌 하면 좋으리까?

 

그 아이들은 어른이 되면 더 심각하게 변해 있을 것이다. 인간에게 감정의 폭은 중요하다. 감정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인 감각, 인간은 총 5가지 미각, 후각, 시각, 청각, 촉각 여기에 하나를 추가하면 느낌의 육감일까? 사람이 몸으로 느낄 수도 없는 것을 관념의 세계에서 느낀다. 우리는 바로 그 관념의 세계가 말라가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다른 감각에서 보인다. 시각에서는 항상 회색 빌딩과 검은 아스팔트만 보고 푸른 숲과 강물은 보기가 어렵다. 특히 콘크리트가 발라진 강가에선 수변식물을 제대로 볼 수 없다.

 

이미 정보를 받아들이는 시각에서부터 우리의 감정을 가뭄에 물 마르듯이 사라져간다. 청각은 어떤가? 숲의 소리, 벌레의 울음소리, 물의 흐름소리, 바람의 노래 등을 들어야 한다. 고전 이전의 시대에 신화가 자연과 마주한 것은 인간의 상상력이 풍부하기 때문이다. 자연이 마치 하나의 생명인 것처럼 물과 돌 심지어 풀까지 생명이 있다고 보았다. 애니미즘 내지 샤머니즘, 토템이즘이란 것은 결국 자연에 대한 인간의 외경심이다.

 

이제는 자연의 세계를 그런 신비의 눈으로 보는 외경심이 아니라 재앙의 대상이 되는 외경심이 되었다. 인간이 가진 심리적인 요소가 안정되지 않으니 뭔가 불안하게 된다. 인간의 심리를 자극하는 이 많은 조건에서 인간 스스로가 돌파구를 찾지 아니하면 안 된다. 결국 그것은 정신의 파괴로 이어지는 최악의 상황이 연출된다. 가령 우리 주변에서 평범한 가정인데도 자살하는 사람들이 많다. 우울증에 걸린 주부, 성적에 시달리는 학생, 소외감에 시달리는 가장 등을 말이다. 우리는 행복을 위해 살아가려고 하나 행복을 느낄 수 없다. 나 역시 그다지 행복감이란 것을 느끼지 못한 인간이다.

 

감각이 마비되었는가? 그렇게까지는 아니나, 상당히 시니컬한 요소가 강한 것 같다. 주변에서 내가 제대로 웃는 것을 보지 못했다고 했으니 아마 그럴 것이다. 웃는 모양이 마치 비웃음과 비뚤어진 성격이 드러나는 어설픈 웃음, 인간에게 행복이란 무엇인가? 왜 사는가? 무엇을 하고 싶고 무엇을 원하며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인간의 감정이란 결국 그런 것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 따분하고 지겹고 권태로운 일상에서 최고의 해방구는 죽음이란 타나토스라고 하더라도 그건 역시 좋지 못한 방법이다. 동원되는 요건에서 고통과 공포가 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인간이라면 어떻게든 자신의 해방구를 찾을 수밖에 없다. 인간 내면에 즐거움과 괴로움, 그리고 그 괴로움을 이기고 싶고 벗어나고 싶은 하나의 이상적 세계, 이런 요소들이 어지럽게 버무려지고 상이하게 흘러가서 하나의 이야기 거리가 될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표현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오늘 이 글을 적기 위해 어제 아침부터 구상했다. 너무 짜증나는 부분이 많았기 때문이다. 항상 말하고 싶은데, 인간의 표현과 창의에 대한 부분에서 우리나라 교육시스템으로 해결하기 어렵다. 진짜 천재 혹은 뛰어난 자가 아니면 자신의 탁월한 세계를 보여줄 수 없다.

 

여전히 나에게 루소의 <사회계약론>과 영화 <당통>에서 로베스피에르와 그의 아내의 남동생의 대화가 생각난다. 왜 그럴까? 사람들은 대한민국 헌법을 본적이 있는가? 약간 다르지만 영화 <당통>에서 그 남자아이와 말과 대한민국 헌법과 비슷한 말이 나온다. 법 제1조 제1항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어느 인간은 민주공화국이 자본주의다! 라고 하는데, 우리나라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맛 들여서 토크빌처럼 그 나라 정치수준이 곧 국민수준이란 말을 실감하게 하는 매우 정확한 사례를 보여준다.)

 

2항은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영화 <당통>을 보면 이 말과 유사한 느낌이 든다. 대사가 흐릿하나 모든 주권은 인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인민으로부터 나온다.” 이것이 꼬맹이가 로베스피에르에게 한 말이고, 로베스피에르가 당통과 그 일행을 죽이는데, 자신 스스로가 패배자가 된 이유는 우리나라의 헌법 제19조처럼 모든 국민은 양심의 자유를 가진다.”  라고 명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양심의 자유는 언론과 방송이 제일 선행되어야 가치관이다. 언론은 진실성보단 공정성이 우선시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법 제21조 제1항을 보면 모든 국민은 언론·출판의 자유와 집회·결사의 자유를 가진다.”라고 되어 있다. 우리는 그것에 대해 제대로 누리고 있는가?

 

그러면 이제부터 내가 적으려고 하는 담론인 만화, 그것이 참 문제로다. 보시다시피 만화라는 것은 분명 자유로운 발언의 기회를 가질 언론과 출판물이란 점과 동시에 한편으로 법 제22조 제1항에서도 모든 국민은 학문과 예술의 자유를 가진다.”라고 되어 있다. 만화 역시 예술적 가치가 있고, 미학적 가치가 있다. 미학자 진중권 교수도 오히려 만화, 애니메이션, 게임 등과 같은 서브컬쳐의 발전을 주목한다. 인간이 가진 가장 원초적인 부분을 드러내기 좋은 것이 서브컬쳐다. 다양성의 공존에서 인간이 억지로 조성된 게 아니라 스스로 표출할 수 있는 것들이 좋은 문화콘텐츠 상품이다.

 

그런데 왜 내가 만화에서 암흑기인 만화분서갱유 시대를 말하려고 하는가? 아직도 법률, 시행령, 시행규칙도 구분하지 못하는 자기 바보인증 하는 인간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내가 헌법을 들고 나온 것은 모든 국법에서 헌법이 모법이고, 다른 법과의 마찰에서도 헌법이 먼저 되어야 하는 것이다. 헌법의 전문으로 통해 그 정신을 볼까?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 조국의 민주개혁과 평화적 통일의 사명에 입각하여 정의·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고, 모든 사회적 폐습과 불의를 타파하며, 자율과 조화를 바탕으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더욱 확고히 하여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하게 하며, 자유와 권리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완수하게 하여, 안으로는 국민생활의 균등한 향상을 기하고 밖으로는 항구적인 세계평화와 인류공영에 이바지함으로써 우리들과 우리들의 자손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을 영원히 확보할 것을 다짐하면서 1948712일에 제정되고 8차에 걸쳐 개정된 헌법을 이제 국회의 의결을 거쳐 국민투표에 의하여 개정한다.”

 

분명 항일정신과 민주주의 운동 그리고 자유롭고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헌법이다. 그런데 유신헌법이 발동한 19721017일 이전에 만화분서갱유가 발생한다. 이때 초등학교 6학년에 다니던 정병섭이란 어린이가 197221일 당시 목을 매 숨진 사건이 발생한다. 정부와 언론은 이 문제를 모두 만화의 영향이라고 하여 대대적인 공세를 취했다. 지금 딱히 정치적인 비판이나 문제를 심각히 걸고 싶지 않으나 그 당시 정부의 만화정책을 주도한 자들이나 또는 그것을 이어받은 사람이 만화정책을 건들 수 있는 위치에 있다.

 

 

법률, 시행령, 시행규칙에서 아동청소년 성보호에 관한 법률에서 이 법은 주관하는 부서는 여성가족부이나, 발의한 자는 국회의원이다. 정치적으로 국회의원이 국회에서 법률을 발의하여 가반수가 넘게 되면 그 법이 통과된다. 그러니깐 여성가족부가 주관해도 이 법은 국회의원 누가 했는가가 중요하다. 만화산업을 짓밟는 행위가 왜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생각했는가? 이런 법이 용인되는 이유는 국내 교육체계에서 경쟁위주의 입시체제가 그렇다. 다양성과 창의성을 모두 무시하고 오로지 똑같은 것만 강요하기 그렇다. 전체주의적으로 국민들을 하나의 집합체를 만들면 그만큼 정치적 헤게모니는 강화될 수밖에 없다. 그러면 신문기사가 정병섭의 어린이의 죽음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볼까나?

 

“31일 오후 55분경 서울 성동구 하왕십리동 34312호에서 졍병섭군(12, 신성국교 6)이 안방 높이 1.5m 되는 나무선반에 나일론 목도리로 목을 매고 죽어있는 것을 정군의 누나 영지양(15)이 발겨나, 경찰에 신고했다. 가족들에 의하면 정군은 평소 만화를 탐독하고 만화의 주인공 흉내를 잘내는 등 장난이 심했는데, 이날도 만화가게에서 만화를 보고 온 후 누나 영지양에게 만화에서는 사람이 죽었다가도 살아나더라. 나도 한 번 죽었다가 살아날 수 있는지 시험해 보고 싶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경찰은 영지양이 부엌에서 저녁밥을 짓고 있을 때 정군이 혼자 방안에 남아 목매달아 죽는 자살흉내를 내다가 아주 숨져 버린 것으로 보고 있다(동아일보197221일자).”

 

이 기사 이외에도 정군의 집 주변에 만화점이 10개소나 있어서 만화책이 어린 학생들을 유혹하여 파괴한다고 했다. 그러나 막상 흉내라는 것을 보면 TV 드라마나 혹은 기타 방송국에 나오는 프로그램이 더 심각할 것이다. 지금 아동청소년 성보호에 관한 법률에서 세세히 읽지 않으나 어떤 문제점이 발견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를 잡으려다 집을 태우는 것만은 분명하다. 1명의 어린아이가 사회적으로 파급적 효과를 만든 점은 당시로서는 매우 큰 일은 분명하다. 하지만 당시 고문이나 의문사로 죽은 사람들의 상황을 생각해보면 너무 비교되는 현상이다.

 

당시 가수 이장희가 그건 너라는 노래가 있었는데, 그 노래가 금지곡으로 설정되어 있었다. 수많은 문화통제 속에서 만화 역시 피할 수 없는 통제대상이었다. 만화라는 것이 어떻게 보면 유치하고 저속하고 주변에 쉽게 구할 수 있는 오락물이나 그 만화를 보는 사람들이 주로 어린 학생이란 점과 만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주로 표현력을 중시하는 점이다. 표현력을 중시한 만화작가에 대한 검열은 만화작품을 만들 수 있는 기회가 상실되고, 그 상실로 인해 만화가들의 입지는 줄어들었다. 게다가 만화와 출판은 분리할 수 없는 상황이기에 만화탄압은 곧 언론과 출판탄압과 연결 짓게 된 것이다.

 

이때 나온 만화로는 일본에서 빼기는 것이나 혹은 순정, SF, 스포츠, 고전 등이다. 이때도 애니메이션이 나오니 바로 <똘이 장군>이다. 아마 나도 어린 시절 본 듯한 기억이 든다. 워낙 유명했기 때문이다. 리얼리티를 감추고 적군이나 혹은 적군에 대항하는 자국이나 모두 파시스트이나 그쪽의 파시스트는 더욱 심각한 존재로 만든다. 북한이 괴뢰정부는 맞으나 인간이 살고 있지 않고 돼지가 살고 있었다. 당시 어린아이들은 실제 북한군들이 인간이 아니라 돼지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표현력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좋으나 현실과의 괴리를 만들어내는 것에서 무엇이라고 봐야 할 것인가?

 

만화는 기본적으로 자유로운 이야기다. 뭐든 만들고 즐기고 펼치는 것이다. 하지만 당시로는 그것이 어려웠다. 사회적으로 왜곡된 인식으로 피해를 받았으며, 심의구조 때문에 작가들의 상상력이 차압당했다. 기본적으로 만화는 욕구불만 내지 원하는 욕망에 대한 작가의 상상이 들어 가있기에 가끔 야한 장면이 안 나올 수가 없다. 특히 일본 만화의 경우 성적인 자극력이 매우 강하여 국민의 정부 시절 일본문화 전면개방 때 여러 가지 사회적 문제를 걱정했다. 그런다고 지금 특별한 문제가 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 게임 샷다운 제도나 만화나 애니메이션 심의가 걸린다. 다양한 담론과 주제가 나오려면 작가들의 자유가 필수적이다. 모든 것에는 시나리오가 존재하기에 그 시나리오는 결국 상상력이다. 상상의 이야기가 무형의 존재인 캐릭터로 보여주면서 새로운 이야기가 생긴다. 그러나 헌법보단 이상하게 헌법 아래가 더 강력하다. 그리고 부처도 문제다. 사실 정부부처는 서로 견제하고 보완하는 기능이 있다.

 

가령 환경부와 국토해양부에서 국토해양부는 국토개발을 해야하기에 건설사업이 주가 된다. 하지만 건설사업이 지나치게 주가 되면 환경이 파괴되기에 환경부가 제재를 가한다. 이른바 환경법규로서 개발행위에 대한 조건이 성립하기에 어느 정도 물과 공기를 마실 수 있는 것이다. 예전에 낙동강 페놀사건을 기억하는가? 페놀이 인체에 들어가면 단백질을 침전시키므로 산모가 마실 경우 아이가 낙태되고, 실제 발생되었다. 공기와 같은 경우 황산이나 염산이 나와 기관지를 자극하고 산성비가 되어 토양과 산림, 강물을 오염시킨다.

 

또한 여성가족부와 대립되는 것은 국방부다. 여성문제와 군인문제가 나오는데, 헌법을 보면 군인들의 피해가 큰 것은 맞다. 하지만 여성가족부라면 여성문제만 다루는 것이 아니라 남녀문제를 같이 다루어야 한다. 지금 여성가족부가 문제되는 것은 일부러 존치했다는 점이고, 그들이 하는 행위는 집에 아이들에게 공부만 강요하는 어머니와 같은 모습만 보인다. 그들이 무사히 정치적으로 행위가 가능한 것은 주변 정부기관의 묵인 아래와 국민 내부적인 지지가 있었다. 여성가족부의 패악 질은 집에서 아이들보고 공부! 라고 소리를 지르는 부모들이 있기에 가능하다. 게다가 문화콘텐츠 사업을 죽인다는 문화체육관광부와 같은 부서가 어느 정도 중재를 나서야 하나 전혀 나오지 않고 있다.

 

일본에서나 미국, 혹은 유럽국가에서 문화콘텐츠 사업을 국가 장기적으로 관리하며 운영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영화산업이나 게임 산업 등의 문화콘텐츠사업에 대한 관리를 여성가족부가 주관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체육관광부가 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문화산업을 여성가족부가 간섭하는 게 아니라 문화체육관광부가 관리하는 것이 바람직하며, 그 중에서 문화콘텐츠산업을 주도하는 부서가 책임지는 것이 바르다. 그 외에도 문화예술, 미디어정책 등의 부서가 존재하고 있다. 그래도 제일 중요한 것은 문화콘텐츠산업이다. 이곳에는 문화산업정책과, 영상콘텐츠정책과, 게임콘텐츠산업과, 디지털콘텐츠산업과가 존재한다. 관련기관에서 한국콘텐츠진흥원이라든지 영상물등급위원회도 연결되어 있다.

 

단순히 아동청소년 관련하여 콘텐츠를 여성가족부 주관하는 성보호법에서 문화산업 정책은 충분히 문화체육관광에서 가능하다는 점이다. 만약 견제적 역할이라면 모르지만 지금 문화체육관광부에서 하는 행동들은 너무 소극적이다. 최근에 영상 및 게임, 만화, 애니메이션 콘텐츠 산업이 발달을 위해 전국 대학교에서 영화, 만화, 애니메이션, 게임 학과가 신설되고 있고, 심지어 고등학교 특성화에 따라 만화애니메이션고등학교 내지 예술고등학교 내의 만화애니메이션학과가 신설되고 있다.

 

한국에서 최초로 만화애니메이션학과 계열이 생긴 대학이 공주대학교라고 하나, 1990년대 중후반부터 2000년 중반가지 꾸준히 만화애니메이션학과 학부와 고등학교가 늘어 가는데, 여성가족부 주관하는 아동청소년 성보호법이 발목을 잡고 있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장관의 임명과 정부부처 개편은 국회 법률에 의해서가 아니라 대통령의 권한이란 점이다. 자꾸 여성가족부의 한국 콘텐츠산업에 대한 패악 질에서 여성가족부를 욕할 게 아니라 그렇게 정책적으로 위임한 사람이 문제라는 점이다. 이번에 도래할 정부에서는 해양수산부가 다시 재설치 되는데, 전의 정권에서는 해양수산부를 폐지하였고, 그 이전 정권까지는 해양수산부가 존재했다.

 

결국 국가기관 운영자에 의해 기관의 운영이 다르게 되는 셈이다. 최근 방송통신위원장의 문제점이나 TV방송국 종편에 따라 언론의 편파성에서 크게 실추되었다. 어느 정권이든지 자신의 유리한 요소를 내세우는 것은 할 수 없는 정치적 방법이겠으나, 그 범주라는 것이 엄연하게 존재한다. 지금으로부터 약 40년 전에 발생한 만화분서갱유를 일으킨 사람들과 그리고 사람의 위아래의 사람이 누군지, 또한 당시 국회의원을 잘 생각해보자. 분명히 말하지만 여당에서 법을 상정하여 국회통과할 때 누가 했고, 그들이 누구 옆에 있는지 잘 생각해야 한다.

 

여성부가 여성가족부로 변경되면서 2010년부터 보건복지가족부에서 청소년과 다문화 가족 등을 포함한 가족 기능을 여성부가 흡수하여 여성가족부가 되었다. 그 기능과 권한은 바로 여성가족부 내가 아니라 정부기관 설립, 통폐합을 추진할 수 있는 결재권자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법률 시행 후에 시행령이 있어야 하는데, 시행령은 대통령이 결재권자라는 점이다. 결국 법률로 제정된 패악 적인 아동청소년 성보호법이라는 것은 결국 국회와 청와대의 공통작품이다. 여성가족부에서는 할 수 있는 것은 시행규칙과 고시, 훈령, 공고 수준이다.

 

지침이라는 이른바 세세한 업무는 만들어도 기본적 합의나 운영에 대한 강한 규제성은 오로지 법률에서만 적용된다. 아직도 법을 모르면 법에 대한 기본적 개념을 찾아보면 될 듯하다. 이런 문제는 결국 정치적 헤게모니를 이용한 군중심리 자극이다. 프로파간다의 수준으로 봐서는 같은 정부기관의 운영에서 만약 여성가족부가 문화체육관광부 소속기관이랑 어느 갈등이 있다면 몰라도 그렇게 보인 적은 없었다. 정부가 대신 얻어맞아줄 끄나풀만 풀어놓은 것이다. 여성가족부는 가실 여성부의 기능만 하지 가족개념은 보건복지로 돌리고, 문화부분은 문화체육관광부로 이관하는 것이 옳은 일이다.

 

대부분 좋은 대학교에 집에서는 높은 직에 계신 고급관료들에게 만약 집에 자녀가 있으 면 게임하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라고 한다면 결코 긍정적인 방향이 될 수 없다. 차라리 문화콘텐츠를 다루는 문화체육관광부야 말로 그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 전체주의적 국가운영 수단에 성이란 것은 항상 정치적 수단으로 이용할 수 있다. 성적인 부분을 자꾸 위축하고 억압하고 숨기려 들면, 그만큼 말할 수 있는 부분이 적어진다. 세상에 인간들이 있으면 그 중에 반은 여성이고, 반은 남성이다. 당연히 인간이 살아가는데 생존의 에로스와 쾌락적 본능의 리비도는 피할 수 없다.

 

중학교까지 음란물을 안 봐도 고등학교로 올라간 남자아이들이 주변에 여학생을 보고 성적인 욕망에 올라가는 것은 당연한 본능이다. 인간이 가진 동물적 유전자는 피할 수 없는 본능이다. 문제는 그것을 해소할 수 있거나 혹은 다른 방향으로 돌릴 수 있는 조건을 찾기보단 무조건 억압한다는 점이다. 왜 이것이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인가에 대해 알려주기보단 아예 그 통로를 막고 있을 뿐이다. 지금 그런 억압을 추구하던 세력의 과거를 보면 국민들에게 성적인 음란함을 막으면서 뒤에서는 양주마시면서 자신의 성욕을 마음껏 즐긴 사람과 그 주변인들이 있다. 그것을 아는가? 밤의 제왕이라고 말이다.

 

민주적 자유주의에서 민주주의 조건의 그 사회는 결코 조용할 수 없다. 오히려 갈등이 표면이 드러나고 그것이 공론화되어 해결할 수 있는 조건이 되어야 진정한 민주주의이다. 사회적 갈등을 강제적으로 배제하는 이상 민주주의의 가치란 없다. 예술로서의 표현에서 당연히 작가의 내부에 담긴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세계를 보는 눈도 있지만, 아름답지 못하고 추하며 경멸스런 세계도 존재한다. 피카소의 게르니카나 아비뇽의 여인들의 그 괴이함은 결국 전쟁과 파시즘에 대한 저항의식이 담긴 것이다.

 

 

시대는 현대라도 예술이란 표현적 가치에서 중세 고전주의적 요소만 강조하는 헤게모니의 안에서도 충분히 자유로운 표현을 보일 수가 있다. 특히 만화와 같은 경우는 여러가지 방법에서 표현하기 매우 좋은 방법이다. 만약 그 누군가에게 가진 것이라곤 볼펜과 연필, 종이, 그 종이조차도 이면지나 신문지라도 충분하다. 어디든 그릴 수 있으니 말이다. 또는 수업시간의 지겨움에서 잠시 벗어나기 위해 교과서 끝에다가 만화를 그린 후에 연속으로 페이지를 넘기면서 페이퍼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학생들, 그것 역시 창조적 활동이다. 유희라는 것은 일상적으로 존재해야 예술의 현실성을 더욱 일상 속으로 파고들어간다.

 

지금 우리에게 자유라는 것은 무엇일까? 프리드리히 니체의 <선악의 저편>에서 프랑스 대혁명의 광기 속에 죽음을 기다리던 롤랑 부인의 대사인 자유여, 당신의 이름 아래 얼마나 많은 죄가 저질러졌는가!”처럼 우리는 자유라는 정의에 대해서 더욱 큰 부정의를 저지르고 있지 않은가? 자유란 내 안의 자유와 우리만의 자유가 아니라 타인의 자유가 보장될 때에만 비로소 나의 진정한 자유가 성립된다. 거기서 자신의 목소리를 담을 수 있는 표현력이란 매우 중요하다. 잘못된 것을 이야기하고 싶으나 그것에 대한 스토리텔링으로 전환된 곧 예술과 문학으로서 승화되기 시작할 수 있다. 조지 오웰의 <1984><동물농장>의 경우 얼마나 지독한 패러디와 암울한 미래가 보이는가?

 

각해보면 우리나라에서는 조지 오웰이나 피카소가 나오기 어려울 것 같다. 이들의 기본적 예술적, 문학적인 발상은 자신의 표현세계의 보장이다. 아무리 능력을 갖추고 있더라도 거기에 대한 사회적 인프라가 제공되지 않으면 이들을 한국에 있을 수가 없다. 아마 세계적 아티스트인 백남준 선생님의 경우 국내보단 외국에서 더 활동적이었다. 1984년에 발표했다는 굿모닝 미스터 오웰, 30년이 지난 우리에겐 왠지 낯설어 보이는 전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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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라킬>이란 작품은 가이낙스에서 퇴사한 이마이시 히로유키를 비롯한 몇몇 스텝들이 만든 트리거의 애니메이션이다. 하지만 트리거에서 제작한 <킬라킬>의 모습에선 상당히 가이낙스적인 요소가 많다. 류코의 친구인 민간쇼쿠의 경우, 그녀가 누구에게 물리적인 충격을 받으면 거기에 의한 충격으로 인해 심각한 부상이나 또는 타격을 입는 것보단 차라리 테니스공처럼 팅겨 나가는 모습이 많다. 이른바 가이낙스에서 사용한 배치기 기법으로 주로 많이 사용된 작품은 <아베노바시 마법상점가>와 <프리크리>이다.

 

특히 <프리크리>의 요소가 다분한 기법이 많은데, 아마도 대부분 가이낙스가 한창 잘 나가던 1990년대말과 2000년대 초반인 인물들이 많을 것이다. 안노 히데아키 감독이 <신극장판 에반게리온 서>를 제작하게 되면서 카라스튜디오로 새로 이전하면서 가이낙스에선 이미 내부적으로 기존의 가이낙스와 다른 경로를 가지게 된다. 그런 점에서 <킬라킬> 역시 가이낙스의 작품과 비교하여 2000년대 초반에 가까운 형태에 지니고 있고, 오히려 현재의 가이낙스에서는 배치기 기법을 잘 사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충격을 받게 되면 물리적 반응이 따른다.

 

<특례조지단체 스텔라 여학원 고등과 C3부>에서도 보여주다시피 서바이벌 게임에서 총알을 맞으면 그 물리적 반응이 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서바이벌 게임에 사용된 탄환이 살상용이 아니더라도 맞으면 약간의 통증에 반응하는 모습이 나온다. 그러나 <킬라킬>에서는 매우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감독의 이마이시 히로유키의 작품에서 생각하면 <천원돌파 그렌라간>과 <팬티 & 스타킹 with 가터벨트>에서도 그런 기법을 사용한다.

 

그러나 지금의 가이낙스에서는 그런 기법을 전혀 차용하지 않는다. 따라서 <킬라킬>의 작품은 가이낙스가 아닌 시점에서 가이낙스의 고유의 기법을 차용한다. 가이낙스는 동화에서 주로 캐릭터에 주력을 쏟는 점이 많은 반면 배경에는 중점을 두지 않았으나, 2010년 <하나마루 유치원>과 2011년 <단탈리안의 서가>에서 배경에 더욱 부각을 주었다. 그러다가 사에키 쇼지의 <메다카 박스>에서는 다시 캐릭터 중심으로 갔으나, 그런다고 배치기 기법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가이낙스는 지금의 모습이 가이낙스 예전과 다를 수밖에 없다. 종종 가이낙스에서 제작한 감독들을 보면 본래 가이낙스에서 제작한 감독이 아니라 다른 작품들을 만든 감독들이 제작하는 경우다. 가이낙스 원래의 애니메이터들이 부족한 시점에서 <킬라킬>같은 작품들이 더욱 가이낙스 코드에 부합할 수 있다. 그러나 가이낙스를 알려고 하면, 가이낙스는 기존의 것들을 따라하기 보단 하나의 계보로서 계속 다르게 창출되는 점이다.

 

그러나 <킬라킬>이 가이낙스와 지금 다른 느낌이 드는 것이 있는데, 바로 그것은 상징성에 대한 부분이다. <킬라킬>에서는 극제복이란 특수한 의복에 대해 강한 의미를 부여하는데, 일정한 능력을 가진 인간이 별이 새겨진 옷을 입으면 필요이상의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별은 1개부터 3개까지며, 류코가 다니는 혼노지학원에 모든 학생들이 입고 있다. 유일하게 입지 않은 사람은 류코의 친구인 마코와 학생회장인 사츠키다.

 

그런 마코와 류코, 사츠키를 제외한 학생들의 의복에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바로 의복이란 것은 하나의 계급이란 상징이 따른다. 왜 계급이 생겨나고, 그 계급의 원점을 어디서부터 보는 것이 좋은 것인가? <킬라킬>에서 사츠키의 어머니가 회사에서 강연하는 장면에서 찾아보면 그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다. 그것은 인간이 옷을 입는 것은 죄를 지었기 때문이고, 에덴동산의 사과를 따먹어 신에게 화를 사서 의복을 입었다고 한다. 어떻게 보면 인간은 자연의 세계에 있다가 문명의 세계에 들어오게 된 동기는 바로 노동이란 점이다.

 

아담이 에덴에 살던 시절에 식량이나 재화가 풍부했으나, 인구증가에 따라 문화인류학적인 견해로서 본다면 자신들이 잘 살던 곳이 아니라 다른 곳으로 이동하게 되는 경우다. 본래 중동지역에 돼지를 먹지 않으나, 본래는 먹었다고 한다. 뼈나 고문서들이 발견되는 점에서 기후의 변화나 환경적 조건이 따르기에 인간은 자연 그대로의 과일채집이나 사냥을 할 수 없을 것이다. 낯선 환경에 가면 추위나 더위, 그리고 병충해에 의해 생명이 위협에 처해진다. 의복이란 개념은 본래 하나의 상징적 신분보단 인간 신체적 생존에 위한 도구이다.

 

의복이 처음 생긴 것은 아담이 에덴에서 쫓겨나갈 때 무화과나무의 잎사귀로 가렸다고 한다. 무화과나무의 용도를 성경에서 의미하는 이유는 알 수가 없으나, 무화과나무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면 “로마에서는 바쿠스(Bacchus)라는 주신(酒神)이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많이 달리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고 다산(多産)의 표지로 삼고 있다. 꽃말의 ‘다산’이란 뜻은 여기에서 유래되었을 것이다. 아시아 서부에서 지중해에 걸쳐 자생한다. 한국(제주)에 분포한다.”라고 되어 있다.

 

쿠스라는 것은 포도주를 의미하고, 그것은 제우스의 아들 중에 하나인 디오니소스라는 신이다. 인간에게 불가항력적으로 즐거움과 고통을 주는 이 자비로우면서도 무서운 신은 니체의 <비극의 탄생>에서 예술이란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이 있다고 소개한다. 결국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살아 움직이게 하는 삶의 원동력이다. 그런 점에서 포도주는 남성의 성적욕망을 자극하여 다산(多産)의 기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개인적인 추론으로(설마 진짜 누군가 의미를 해석했는지 알 수 없으나) 들어가자면 아담의 무화과나무로 가린 잎은 결국 다산의 상징이었다. 이브는 사과를 먹은 죄로 출산이란 고통을 받게 되었다. 결국 인간은 자연의 세계에서 문명의 세계로 나가게 되고, 문명의 조건에서 필요한 것은 노동이다. 즉, 자연이 문명화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노동력이 필수적이었다. 노동력의 조건은 당연히 인력이다. 남자의 한문에서 남(男)은 밭전(田)자와 힘력(力)자로 이루어져있다. 남자는 결국 밭을 힘으로 가꾸는 사람이다.

 

노동력의 필요성에서 신은 이브에게 출산의 고통을 아담에게 노동의 고통을 준 것은 그것이 하나의 문명의 시작이다. 무화과나무가 다산의 상징이고, 농업기반사회에서 인간의 노동력은 중요한 요소다. <킬라킬>까지 노동력의 집중화된 농경사회라는 관계없어 보일지는 모르나 인류에 대하여 연구하는 인류학영역에 들어가는 순간 그것은 하나의 프로세스에 해당된다. 문명의 발생은 결국 인간이 생계활동에만 전념하는 게 아니라 그 이상이 되어야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적당한 인구로 유지할 수 있다면 문명은 큰 의미가 없다.

 

그것은 밀림의 우거진 곳에 가면 수 십 명으로 이루어진 원시부족의 삶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부족이 밴드라는 한 구성체를 이루고 일정한 영역에 만족하지 않으면, 충돌이 일어난다. 전쟁의 원인은 원초적으로 식량문제다. 문화인류학자 마빈 해리스의 <식인과 제왕>처럼 식인의 원인은 바로 식량의 문제, 그리고 단백질의 공급이서다. 인간의 영양소에서 지방과 탄수화물은 에너지가 되기 위해서는 산소가 필요하나, 단백질은 바로 에너지로 전환이 가능하다. 단백질은 에너지 보충과 면역력, 그리고 생존조건에 필요한 영양소의 근본이다.

 

그것이 부족하면 병에 걸리기도 하고, 생존에 치명적이다. 단백질의 공급은 결국 사냥이나 가축을 도축하는 방법이 있으나, 그것이 없다면 인간의 살이야 한다. 식인문화에서 점차 포로문화가 된 것은 처음에는 식량의 부족이나, 농경사회로 이전되면서 포로들에게 공급할 식량이 생기고, 대신 포로는 노예로 부리게 되었다. 하지만 식량이 부족하게 되면 노에는 죽음을 피할 수 없게 되고, 혹은 맛있는 고기로 될 수도 있다. 전쟁의 시작은 문명사회에서 인구증가에 따른 식량부족의 원인이란 전제 아래서 말이다.

 

그런데 만일 식량이 풍족해지거나 혹은 어느 특정세력만 많이 얻게 되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농경사회에서 농민이란 계급에서 점차 부족과 씨족사회를 벗어나 하나의 무리 내지 사회로 구성되게 된다. 그 중에서 지식을 가지거나 혹은 강력한 무력을 가진 자에게 권력이 오게 된다. 그런 점에서 권력자나 지식을 가진 자는 하나의 상징성을 부여받게 된다. 그들이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위해서 하나의 도구가 필요하다. 원시부족의 유품을 보면 주로 가면이나 머리장식, 그리고 의복에 의거한다.

 

눈에 직접 보이지 않는 권력적 관계를 하나의 상징성으로 통해 드러내는 점이다. 조금 우습게도 보일지도 모르나, 현대 우리가 살아가는 시점에서 볼 수 있는 문화재나 예술품들은 그런 것에 의해 시작했다. 하이데거에 명명한 말 중에 “부정신학”이란 단어가 있는데, 가령 서양에 아주 오래된 교회나 성당이 있을 경우, 우리는 문화재로 여기나, 당시 사람들에게 하나의 신앙이고, 신적인 존재가 깃든 신성한 곳이다. 지금도 그 종교를 믿는 사람에게 종교적 신앙이 존재하겠으나, 기본적으로 문화재라는 것이다.

 

하다못해 고대시대의 왕족이나 지배계급들이 사용하던 물품이나 무덤 역시 그렇다. 당시에는 하나의 정치적 상징 내지 종교적 상징이라면 지금에 와선 문화재다. 경주의 천마총을 비롯한 많은 신라왕들의 무덤에 대해 우리는 그들을 신화 속에 등장하는 후손이라 하여 신의 후에가 잠든 장소보단 그저 역사적 가치가 있는 하나의 상징에 불과하다. <킬라킬>에서 그런 상징적 요소에 왜 농경사회와 종교적인 부분 그리고 의복이 연계되는가?

 

결국은 의복이란 것은 인간에게 처음으로 필요할 때는 추위와 더위, 병충해로 시작했으나 어느 순간 하나의 권위를 상징하는 요소로 된 것이다. 계속 역사적인 조건에서 덧붙여 설명하면, 우리가 드라마나 영화 혹은 만화나 애니메이션조차도 계급에 따라 의복이 다른 점이다. 왕이 입는 옷과 장식, 신하가 입는 옷과 장식, 평민이 입는 옷과 장식, 성별에 따라 입는 옷과 장식이 모두 다르다. 결국 옷이라는 것은 하나의 계급을 상징하는 요소이다. 농경사회와 전쟁에서 그 상징적 요소는 지배계급의 권위를 부여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었다.

 

의복이 계급에 따라 바뀌는 것이 고대사회라고 하나, 대신 <킬라킬>에서는 의복에 따라 계급이 결정되는 사회라고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조금 이해하기 어려울지도 모르나, <킬라킬>에서 의복의 권력화와 계급화는 전혀 근거 없는 모티프가 아니다. 프랑스 후기구조주의학자인 장 보드리야르에 의하면 현대사회는 “이미지가 상품이고, 상품이 이미지”라는 명제와 더불어 이미지가 가지는 기호에 따라 권력을 가지는 것을 알 수 있다. 단지 <킬라킬>에서 상품의 이미지에서 극제복에 새겨진 별의 개수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별이 1개, 2개, 3개에 따라 계급이 다르게 되고, 거기에 대한 대우나 지위도 다르게 된다. 그렇다면 별이 없는 사람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본래 혼노지학원의 학생이 아닌 류코의 경우는 관계자 외부라는 속성이 따르고 있었고, 남은 것은 사츠키와 마코이다. 마코의 경우 원래 테니스부이나, 옷에 별이 없었다. 그녀는 학교 자체에 가는 것조차도 어려웠고, 다른 학생들과 차별대우를 받았다. 이른바 호모사케르라는 것으로 생물학적으로 존재해도, 사회적으로 존재하지 못하는 존재이다. 그녀에게 혼노지학원이란 학교라는 사회에 인정받지 못한 사회적 존재이다.

 

처음 류코가 올 때부터 테니스부원으로부터 집단 괴롭힘을 당하고 있었으며, 친구조차 없어서 류코가 처음 친구였던 것이다. 존재해도 존재할 수 없는 마코에게 그 상징성은 교복에 별이 없다는 점이다. 그런 그녀가 류코가 부를 만들면서 2성의 극제복을 얻자 새로운 능력을 발휘하는 모습이 보이고, 어느 순간 혼노지학원의 보통학생처럼 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결국 의복이란 하나의 계급적인 상징과 더불어 사회적 존재성에서 <킬라킬>은 의복이 결국 권력이고 사회라는 점이다.

 

인간의 언어는 사회적 기능을 하기 위해 존재한다. 하지만 언어는 권력을 생산하고, 권력을 언어를 다시 편성한다. 그런 점에서 극제복이 없는 자에게 살아있지 않은 호모사케르에서 죽은 사회성이고, 죽은 언어라는 점이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또 입지 않은 자가 있었다. 그것은 사츠키다. 문제는 사츠키는 제복 대신 다른 의복을 입고, 순결이란 의상을 입게 된다. 그것이 바로 호모사케르와 다른 노모스라는 법 위에 군림하는 자이다. 사츠키는 학생회장이면서 가장 강력한 무력을 가진 사람이다.

 

모두가 자신의 아래에 있으며, 자신보다 위에 있는 자가 없다. 결국 사츠키 아래에서는 모든 학생은 같고, 단지 별의 개수에 따라 계급은 존재해도, 그 별의 개수가 차이나더라도 학교생활에 전혀 불편함은 없다는 점이다. 심지어 혼노지학원의 극제복에 따라 학생들의 가족들의 생활의 혜택까지도 다르게 된다. 결국 모든 극제복을 입는 것은 혼노지학원 학생으로 학교교칙 앞에 평등한 것이고, 그것을 위해서는 그 평등을 결정하고 만들 수 있는 법위의 군림자가 필요한 것이다.

 

그것이 노모스라는 의미고, 그 노모스는 바로 사츠키다. 사츠키가 극제복가 필요없다는 것은 극제복을 입는 순간 자신 역시 의복에 의해 권력을 가지게 되고, 그렇게 되면 밑의 4천왕을 비롯하여 학원 내의 모든 학생과 동일한 조건이 되는 점이다. 자신과 남들과 다르게 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상징성이 필요했고, 그것이 바로 별이 없는 교복과 순결이란 점이다. 그리고 사츠키가 순결을 입든지 안 입든지 그녀는 혼노지학원 주인은 변하지 않는다. 혼노지학원의 수학여행에서 사츠키는 혼노지학원 안에서 군림하는 자가 아니라 일본 전 지역에 군림하는 자로 되기 위해 나선다.

 

수학여행에 극제복을 보급받은 학생들이 모든 학원을 점거하여 모든 교복을 자신의 어머니가 만든 회사에서 나오는 것으로 대체하려고 한다. 결국 의복을 입는다는 것은 하나의 통제에 들어오게 되는 셈이고, 그것이 하나의 감시의 역할을 한다. 미셀 푸코의 <감시와 처벌>에서 프랑스 왕정시대의 열병행사에 대해 나오는데, 군인들이 의식 속에 그들은 모두 개인으로 생명은 소진하나, 그들이 속한 군부대는 영원하기에 그들은 영원한 존재로 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 믿음은 감시가 감시자에 의해 조성되는 것이 아니라 그 조직 스스로가 감시자 역할이 되는 것이다.

 

같은 의복과 같은 동작에서 개인성은 사라지게 된다. 사츠키의 행동에는 결국 의복을 통일하고, 같은 모습을 하는 점에서 모든 권력을 가진 자로서 숨은 감시자가 될 수 있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사츠키는 판옵티콥이란 일망원형감시탑과 같으며, 그녀가 판옵티콘의 주인으로 있을 수 있는 것은 의복의 상징성이다. 모두가 같은 옷을 입어도 오직 하나만 다르다는 점을 말이다. 그래서 선혈을 입고 온 류코에게 강력한 위기의식을 받은 것은 그런 이유다. 마코는 별이 없으나 학교교복의 기본적인 틀은 같지만, 류코는 기본적으로 교복모양조차도 달랐다.

 

그러나 선혈이란 교복이 지닌 힘은 매우 강력하며, 오직 자신과 대등하게 싸울 수 있는 학생은 류코라는 점이다. 또한 강한 이질적인 힘은 학원 내에서 큰 문제로 되었다. 하지만 이에 반해 사츠키는 오히려 류코를 이용하여 극제복의 약점과 문제점을 보완하여 수정하며, 그것을 토대로 수학여행의 전투용 체육복을 만든다. 그렇다면 교복은 결국 전투복이고, 고대사회로 따지면 갑옷이 된다.

 

전투적 기능이 별의 개수에 따라 달라진다는 점은 결국 불과 천 년 이전의 중세유럽사회의 전투에서도 충분히 가늠하게 한다. 갑옷, 무기 등 장비가 좋은 기사단이 부족한 무기체계를 가진 국가를 손쉽게 이긴다. 싸울 수 있다는 것은 싸울 수 있는 자리에 있다는 뜻이고, 싸우기 위해서 기사라는 자리가 결국 지배계급에 속하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당시 중세유럽에서 기사는 전체 인구대비에 비해 많은 수가 아니었다. <킬라킬>에서는 전투요원은 오직 류코와 마코를 제외한 전 학생이다.

 

의복의 시작이라고 하는 아담의 무화과나무의 잎사귀는 생식과 더불어 노동력의 조건이라고 한다면, <킬라킬>의 의복은 하나의 권력체계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그렇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문화인류학적으로 따지자면, 충분한 잉여자원 내지 특정계층에 대한 독점이다. 의복과 관련된 각종 옷과 장식들이 하나의 상징성이 되면서 의복은 생물학적인 단점을 보완하기 위한 수단보단 사회적인 관계를 보여주기 위한 수단이 되었다. 가령 조선시대까지 우리는 저기 지나가는 사람이 왕인지 양반인지 알 수 없으나, 단지 의복으로서 확인이 가능하다. 도포마루에 긴 갓을 착용한 사람이 양반계급인 점이다.

 

그것은 의복의 실용성에 의해 착용하기보단 의복의 상징성에 의해 착용된 것이라고 보면 된다. 문명사회로 넘어가면서 계급의 분할로 피지배계층의 노동계급과 지배계층 분리에서 그것을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이 의복이다. 의복으로서 자신의 위치를 알 수 있다는 점이다. <킬라킬>이 비록 단순히 교복에 의해 구분되나, 사실 우리도 마찬가지라고 위에서 언급했다. 그것은 상표의 메이커에 따라 다르다. 우리가 사는 의복은 실제 가격적인 가치는 10%에 지나지 않는다. 나머지 90%는 상표의 브랜드가격이다. 즉 이미지의 소비로 통해 하나의 기호를 획득한다.

 

남자들의 시계, 여자들의 가방은 실생활에 의해 필요하나, 그 필요의 이상으로 과다하게 소비된다. 그것이 바로 소비의 사회에서 볼 수 있는 이미지의 권위다. 어느 사람이 가지고 있는 상품의 브랜드가 바로 그 사람의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위치를 알려주는 요소가 되는 것이다. 단지 <킬라킬>에서는 극제복으로 대체되었을 뿐이다. 극제복을 입는 것은 권력과 사회성을 얻는 것이고, 입지 못하면 권력과 사회성을 상실하는 것이다. 만약 그런 시스템을 파괴하고 다른 시스템이 구비된다면 그것은 곧 Revolution, 혁명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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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위대한 사상가인 장 자크 루소가 1762년 인류를 뒤흔드는 책을 창간했다. 하나는 <사회계약론>이고, 하나는 <에밀>이다. <사회계약론>이란 민주주의국가에서 자유와 평등을 중심으로 대한 정치체에 대한 서적이다. 민주주의가 있는 모든 국가에서 통용되는 것이 바로 이 책이다. 민주주의를 논하면서 <사회계약론>을 고려하지 않음은 민주주의국가에서 담론조차 꺼내지 못할 수준이라 여겨도 좋을 것이다. 그 정도로 삼권분할에서 입법, 행정, 사법에 대한 이야기와 더불어 인간의 자유로운 존재였으나, 사회에 종속되면서 그 자유가 박탈되기에 자연주의자인 루소의 관점에서 인간의 인위적인 문명이야 말로 인류를 괴롭게 하는 원인이다. 

 

그런 논리로 따지면 틀린 말이 아니다. 문명의 발전은 인간에게 이익과 행복을 준 만큼 그 이상의 댓가를 치르게 했다. 전쟁이나 질병 그리고 환경오염은 늘 우리에게 생존위기를 부여한다. 그런 점에서 루소의 <에밀>은 인간이 살아가는 것은 결국 자연주의적인 요소가 필요한 것과 동시에 그러한 인간을 키우기 위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알려주는 책이다. 철학서적이고 교육학 도서이기도 하나, 그렇게 딱딱하지 않고, 하나의 소설처럼 꾸며진 책이다.

 

에밀이란 소년은 가상의 고아로 등장하며 글쓰이는 에밀의 가상의 후견인으로서 에밀을 어릴 때부터 자립이 가능할 때까지 같이 동고동락한다. 인간에게 가장 좋은 스승이 누굴까? 에밀에겐 저자의 역할은 아저씨 정도나, 그 책에서는 제일 좋은 선생님은 아버지고, 그래 따지자면 부모라는 점이다. 현대사회의 문제는 바로 가족과의 단절감이고, 인간이 인간으로 갖출 교양이 가정보단 학교라는 집단에서 시작된다. 그렇기에 인간의 집단주의적 성향이 인간을 하나의 부품처럼 만들게 된다.

 

문명의 사회라는 집단에서 지식을 가르쳐주는 학교는 지식만 가르쳐주지 어떻게 살아가는지 알려주지 않는다. <에밀>이란 서적은 바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적는다. 자연에서 나무를 베거나 물고기를 낚거나 혹은 각종 물건을 만든다. 자신의 노동으로 스스로의 가치를 매기는 점에서, 루소의 살던 시절인 유럽에선 사실 어린이란 어린이보단 작은어른에 가깝다. 즉, 인간이 태어나면서 노동의 시작은 결국 정식교육절차를 밟은 중고등학교 이상이란 점이다. 최근엔 대학과 대학원까지 마치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이들에게 노동의 시작은 20대 후반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근대이전이나 혹은 근대라도 아이들은 일을 하고, 스스로에 대한 생계의무를 부여했다. 농사를 짓거나 공장에서 일을 했다. 어른의 1명의 노동량을 채우지 못해도, 노동의 1인이란 개념은 할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에밀이란 사람이 살아가는 것을 억지로 주어지는 게 아니라 그 자신이 스스로 알아서 찾을 수 있게 한다. 사실 프랑스 절대왕정 사회에서 루이 16세는 루소에 대해 무척이나 비웃었으나, 루이의 아버지는 루이에게 열쇠와 자물쇠를 만드는 법을 알려줬고, 루이 16세는 자물쇠 만들기가 취미였다고 한다.

 

육체적 노동을 하지 않을 왕이란 계급에서도 루이의 자물쇠란 취미는 루소의 교육철학에서 나온 것이다. 물론 루소의 교육철학의 소중한 부분은 모유의 수유다. 아이의 영양분을 어머니의 유방에서 나오는 젖이 아니라 유모나 혹은 우유에 의지하나, 사실 최근 의학계에서도 모유로 성장한 아이들이 튼튼하고 정서적으로 안정되었다는 사실이 있다. 과학적 근거보다 하나의 교육철학관념인 <에밀>이나 우리의 교육철학에서 루소의 사상은 엄청난 것이다.

 

그것은 억지로 가두는 게 아니라 스스로 땅을 달리고, 물을 헤치며, 하늘을 보며 자라는 것이다. 그런 점을 생각하면 최근에 나온 <논논비요리>와 <은수저>는 루소의 교육철학과 부합된다. 고등학생이 노동에 대한 의무를 가지는 것은 아니나 집안일이나 혹은 학교교육과정에서 이론적인 것보단 실제 농축산에 필요한 교육과정을 보여준다. 학생 스스로가 농축산품을 만들어 팔기도 먹기도 하며, 그것을 토대로 가사일을 돕거나 이어간다.

 

<논논비요리>에서는 4명인 소녀들이 작은 학교에서 자연과 친구하며 보낸다. 도쿄에서 전학온 소녀가 시골에 와서 직접 자연과 체험하고, 산에 들나물을 캐어 그것을 먹는 것은 삶의 경험이란 교육이다. 지식과 소비에 의해서 우리는 먹는 음식물이 아니라 직접 생산과 생활에서 나오는 음식물이다. 삶의 자리에서 얻어지는 교육에서 인간의 감정을 풍부하게 해주고, 타인의 교류를 활발하게 해준다. 혼자만의 세상이 아니라 모두와의 세상에서 말이다. 학교에서는 지식만 알려주고 좋은 학교에 가기를 원하지 어느 인간이 되고 어떻게 살기를 알려주지 않는다. 오히려 비겁하나 냉정하고 흉폭한 인간으로 키워지도록 만드는 하나의 시스템만 제공한다.

 

미셀 푸코의 <감시와 처벌>에서 학교, 공장, 직장은 하나의 감시체제를 만든 통제기구라고 한다. 우리는 통제된 세상에 살며, 타인의 눈에 의지한다. 물론 타인과의 공존과 공감이 중요하나, 그것이 아닌 통제라는 공동적인 감시는 우리의 자율성을 떨어지게 한다. 타성에 젖은 시기에 <논논비요리>나 <은수저>와 같은 작품은 즐거울 수밖에 없다. 자신의 이익보단 모두의 즐거움을 바라니 말이다. 그리고 그 속에 자아찾기도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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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14-01-15 15: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은수저를 영화로 만든다고 하는데 예정대로라면 올해엔 개봉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그런데 워낙 농사짓고 가축 사육하는 모습이 자세하여 이걸 어떻게 영상으로 담을지 염려되는군요.

만화애니비평 2014-01-15 21:50   좋아요 0 | URL
저도 참 기대되는 소식이군요. 가축을 키우는 시간과 노력은 이루 말하기 어렵겠죠. 말이 연기지만, 연기라도 기본이 있어야 하는법, 궁금합니다.
 

포스트모던한 사회에서 원본과 사본의 차이가 없는 오히려 사본이 원본보다 더 가까이 느껴지는 것이 시뮬라크르(simulacre)이다. 그런 점에서 sub-culture에서 코스튬 플레이 문화는 원본이 사본을 대신하여 존재하는 것이 된다. 그 이유는 예를 들어 <코스프레 다이어리>의 저자이면서도 아주 유명한 코스튬 플레이어인 키르아라는 사람을 보자. 그 사람의 본명은 박유송이다. 그러나 그 사람이 코스튬 플레이를 하는 순간 키르아라는 존재로서 연기하는 것이지 결코 박유송으로 연기하는 것이 아니다. 심지어 그 연기 대상이 헌터헌터X에 나오는 캐릭터(키르아라는 이름이 여기서 연유)가 아니라 다른 캐릭터로 된다.

 

 

그것은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레이와 아스카가 될 수 있고, 마르크스의 란카나 쉐릴이 될 수 있다. 한 마디로 보면 실존적인 이름과 지어낸 가명이 실제적으로 코스튬 하는 시기에 아무런 관계가 없다. 단지 그 캐릭터라는 존재만이 여기에 존재한다. 그래서 코스튬 플레이야 말로 최근 한국에서 담론하려는 pata-phycisc와 가장 가까울 것이다. pata란 것은 meta 뒤에 나오는 것이다. 즉 mata-physics란 형이상학이란 것이다. 물리적인 피직스 너머에 보이는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것은 존재하는 것인가? 존재하지 않은 것인가? 지금이야 기술이 좋아 화학식에서 H20 구조를 가진 물을 실제로 수소와 산소로 나누어 볼 수 있고, 보통 공유결합과 다른 구조로서 물은 연결되어 있다. 물은 그저 물리적으로 보면 액체로 되어 있어 있고, 인간의 신체비율에서 약 70%에 가까운 물질이다. 그러나 물 안에 산소와 수소가 있다는 것 자체를 안 것은 오래 되지 않은 사실이고, 그것을 볼 수 있다는 것 역시 더 최근의 일이다. 게다가 산소와 수소는 전자와 중성자, 양성자와 같은 미립자로 구성되어 있고, 이 미립자 역시 또 다른 미립자로 구성되어 있다.

 

 

meta-physics로 본다면 과학은 고대에서는 현실과 현실 너머의 관계이나, 현대로 오면서 과학기술은 오히려 그것을 내파 즉 경계를 없앴다. 생물학에서 인간의 피부에 조직이 있고 세포가 있고, 세포 안에 핵이 있으며, 핵조차도 산소, 질소, 인, 탄소와 같은 유기물로 구성되어 있는 것 역시 중요한 사실이다. 따라서 meta-physics는 과학기술에 따라 변하게 마련이고 meta-physics에서 철학 역시 시대적으로 변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역시 철학 서적이다.

 

 

코스튬 플레이와 meta-physics의 관계의 해석에서 코스튬 하는 대상이 현실 속의 존재가 아니라 가상 속의 존재이다. 그러나 가상이기에 그 너머에 있는 존재가 현실에서 현상을 하는 것을 불가능하다. 오로지 구현하는 것은 이미지의 연출이었다. 가령 고대그리스 신화를 소재로 하는 그림이나 혹은 지금 moe라고 하는 자신(들)만이 원하는 인물을 그려낼 수 있다. 인간이 가진 상상의 대상을 그려 넣는 것이야 말로 자신의 욕망을 보이는 것이다. 문제는 그 욕망을 타인이 욕망하는 것이란 점이다.

 

 

코스튬 플레이가 왜 pata-physics 적인가? 그것은 가상과 현실의 구분을 해체했기 때문이다. 분명히 현실에 존재할리 없는 존재가 존재해야 한다. 시뮬라크르 세계의 존재가 다시 현실에서도 시뮬라크르로서 재현되고, 심지어 그것을 피사체로 삼아 사진을 찍으면 다시 시뮬라크르가 된다. 그 사진 속의 인물은 본인인가? 아니면 본인이 아닌가? 결론적으로 보면 실존적으로 본인이나 본인이 아니다. 분명 박유송이란 사람이 쉐릴을 연기하면 그것은 쉐릴이 되기 위함이지 박유송이고자 한 것은 아니다.

 

 

그런다고 pata-physics의 코스튬 플레이 세계라도 결함이 없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결함투성이라고 볼 수 있다. 기본적으로 sub-culture에서 코스튬만큼 놀이에 가까운 문화가 없다. 예술이란 것은 하나의 상징적 요소를 부여받기에 하나의 숭고함을 지니게 된다. 숭고함에서 인간은 자신을 개인의 영역이 아니라 집단의 가치에 따를 수밖에 없다. 물론 그런 거대한 조류에 저항하기 위해 아방가르드란 반-예술이 태어났으나, 그것 역시 대중들에 의해 그저 대중문화로 소비되던지 혹은 숭고함을 부여받아야 했다. 

 

코스튬 문화에서 인간은 항상 옷을 입어야 하는 것이고, 의상을 입는다는 것은 자신의 개성을 보여주기 위한 행위이다. 하지만 대중문화는 자본주의 구조에서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라는 소비문화가 맞물리게 된다. 지금 코스튬 문화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는 코스튬 자체가 마치 공장에서 찍어내는 레디메이드처럼 되었다. 마르셀 뒤샹의 <샘>이란 작품을 보면 웃기기 그지 없다.

 

 

마르셀 뒤샹이 남성용 소변기에 서명을 했는데, 그것을 예술품이라 올려놓다가 큰 소동이 벌이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아방가르드 예술과 네오-다다에서 중요한 요건이 된다. 공장에서 찍은 생산품이 오히려 인간에게 가장 생활을 윤택하게 하는 것이 아닌가? ART라는 예술은 상징적 요소로 보기보단 고대 그리스에선 하나의 테크닉인 기술이다. 과학적 실용성에서 오히려 예술이란 장인적 면모를 보았다.

 

 

생각해보면 고대시대의 예술품은 왠지 모르게 박물관 같다는 느낌이 든다. 그 이유는 주로 실질적으로 왕이나 관료의 신분을 나타내거나 또는 전장에서 휘두르는 칼과 방패 등에서 보이기 때문이다. 가끔 고대 내지 중세의 갑주나 칼, 방패가 발견되면 상당한 가치를 받는다. 당시로서는 그것은 장인이 만들어낸 생존의 도구다. 기사가 전장에서 죽지 않으려면 왜만한 무기에 견딜 수 있는 방패와 갑주가 필요하고, 적을 빨리 죽이기 위해서는 좋은 칼이 필요하기에 그렇다.

 

 

그런데 현대에 오면서 장인이란 존재는 없고 공장이 등장한다. 1차 산업인 농업사회는 인간이 직접 수공예로서 생산했다면 2차 산업은 공장에서 돌아가고, 3차 산업인 정보화 시대는 2차 산업의 기반으로 움직인다. 그렇기에 공장에서 나온 변기가 가장 흔해서 너무 잘 사용해도 고대 그리스처럼 인정받지 못할 물건이 되었다. 아마 고대 그리스에선 변기 하나도 장인이 손수 제작해야 할 것이다. 지금은 공장에 나온 물건을 기술자가 그저 시멘트와 모르타르로 연결할 뿐이다.

 

 

똑같은 모습들이 나오니 그 차이점은 없다. 단지 차이점은 변기가격이 얼마나 비싼가? 혹은 얼마나 디자인에 신경 쓰고 있는가이다. 내가 이런 샘이란 주제로 코스튬 문화와 접목하는 이유는 지금의 코스튬 문화는 레디메이드의 천지이다. 인간이 공장에서 찍어내는 존재는 아니나, 현대사회의 인간은 직접적으로 조우하기보단 다른 방식으로 조우한다. 그것은 생산과 소비양식이다.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는 인간의 거래관계에서 물물교환이 아니라 자본을 통한 매개교환이다.

 

 

즉 화폐가 매개로 되어 인간의 가치를 나누는 것이다. 코스튬 문화에서 가장 악질적 부분이면서 한편으로 발전적으로 되는 부분이 바로 금전적인 투자이다. 코스튬의 질적 가치가 가끔 자본력이란 사실이 불편한 문제를 일으킨다. 자본력이란 사실만으로 문화가 물화되어 버린다. 물화되어 버린 인간관계에서 코스튬의 가치가 자본력이 되는 점은 코스튬 플레이어의 의상과 사진가의 사진기가 되어버린다. 물론 도구의 능력은 기계적 성능에 좌우되는 것은 사실이나 물화되어버린 관계는 분명한 것이다.

 

 

다시 레디메이드로 가보자. 코믹행사에 가면 너무 똑같은 존재가 많다. 마치 공장에서 찍은 옷을 입은 사람이 레디 메이드처럼 보인다. 단지 차이는 마르셀 뒤샹이 어느 변기에 서명을 함으로서 <샘>이 되었다. 그렇다면 그 서명을 부여받은 사람, 즉 자신의 아이디나 존재적 각인을 부여받은 인정받게 된다. 똑같은 모습과 의상이니 결국 차이점은 외모이다. 따라서 바비 인형에 가까운 존재일수록 가치를 부여받는다. 바비 인형은 자신의 의지로 움직이지 않는다.

 

 

오로지 그것을 타자가 명령하는 것에서 움직인다. 그래서 멈춰있는 것처럼 큰 감화가 없다. 코스튬에서 플레이어가 보이고자 하는 것은 자신이 되고자 하는 대상이지, 그 대상의 겉만 묘사하고 일정한 주문만 요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칸트의 <판단력 비판>에 따라 미적 감각을 판단하는 경우 외재적 미를 어느 정도 인정한다. 하지만 외재적 미와 더불어 내재적 미가 공유하지 않으면 그것은 미적 가치를 부여받을 수 없다.

 

 

너무 같은 존재들이 넘치면 인간의 시야에선 결국 외재적 미를 추구할 수밖에 없는 한계점이 노출되고, 결국 외재적 미를 가진 자들이 레디메이드 세계에서 우위를 점지한다. 문제는 점지하더라도 같은 느낌만 나온다는 점이다. 만약 다른 역할의 부여를 생각해보자. 위에서 meta-physics에서 형이상학적 미를 추구하는 것은 결코 좋은 인상만 주지 않는다. 남에게 보기 좋은 떡만 찾는 것은 한계가 오는 점이다.

 

 

미의 미학이 아닌 추의 미학을 조금씩 건드려 보는 점에서 다양한 개성이 나온다. 혹은 기존의 모던의 미, 즉 일정한 요건에 해당되는 게 아니라 자신이 포스트모던의 미인 자신의 개인적 연출로 통해 새로운 연출이 좋은 연출인 것이다. 레디 메이드적인 연출은 개성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개성을 죽이는 것으로 간주된다. 코스튬은 현실에 없는 것에 대한 존재를 현실이고자 하는 pata-physics적인 놀이다. 즉 상상력이 우선이 되는 놀이라는 점이다. 상상력이야 말로 미래의 윤리학이란 것처럼 상상력을 죽이는 코스튬 문화는 인간의 개성을 죽이는 것에 동조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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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나는 대중문화에 대한 주변의 압력을 불편하게 여긴다. 나는 나이기 때문에 나의 취향과 취미 그리고 판단력과 사유의 자유를 가지고 싶으나, 한국에서는 가지기가 어렵다. 가령 요새 무슨 영화를 하는데 본 적이 있느냐? 아니면 요새 어느 드라마가 잘 나가고, 배우가 나오고, 가수가 나오고 이런저런 이야기로 내가 들어갈 자리는 없다. 그러다보니 사람들이 모여 있는 자리에서 나의 발언할 수 있는 공간이 없어진다. 조금 특이하거나 또는 괴짜, mania 세계에서만 숨을 쉴 수 있다.

 

한국에서 이른바 오타쿠라 불리는 자들에서도 속하는 나이지만, 그런다고 그 세계에서도 여전히 이방인이다. 나는 goods와 같은 상품을 중시하는 게 아니라 그 goods의 상품으로 나오기 전에 방영된 작품에 관심을 가지기 때문이다. 담론을 펼치는 것을 좋아하기에 다소 현학적 요소가 많다. 사람들은 현학적인 요소에 대해 생각하기 싫으나, 그런다고 현학적인 요소가 없다고 하면 상당히 화를 낸다. 무식함을 추구하는 삶을 살면서도 무식함을 인정하기 싫은 것이 요새 사람들의 공통된 관점이다.

 

왜냐고? 1년에 책을 보는 것에서 과연 몇 권을 읽고, 그 책이라도 무슨 책을 보는가에서 대답하면 금방 답이 나온다. 차라리 요새 유행하는 베스트셀러 연애소설까지도 보는 것도 제법 독서가이시군요.”라고 말이 튀어 나온다. 1권을 한 달에 보는 것도 어려운 사람들, 게다가 철학이나 사회학 같은 도서는 아예 취급조차 않는다. 그러한 사람일수록 깊은 지식보단 얇고 흔하고 흔한 것을 찾는다. 그래서 대중문화에서는 아주 흔하고 흔해 cliche가 넘치고 넘친다.

 

인간들은 패턴주의를 참 좋아한다. 새로운 것이라고 해도 결국 그 속성은 변하지 않는다. 아이돌 여자가수들이 얼굴과 이름만 바뀌지 타켓이 되는 몸매와 의식은 돌고 돈다. 모두 남자가 당장이라도 성적 욕망만을 자극하기 좋은 것에 말이다. 그것이 코드라면 코드이고 흐름이라면 흐름이다. 문제는 가수 박지윤 씨가 성인식의 음란한 가사와 댄스를 원하지 않았으나 기획사의 압력으로 했다는 점이다. 그래도 대중들은 열광하고, 그 당시 많은 여자들이 노래와 춤을 따라했다. 결국 대중문화란 기본적 명제와 상관없이 있으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존재다. 문제는 거기서 이질감이란 존재가 있어도 어느 것은 받아들인 반면 그러지 못한 게 많다.

 

모두가 같아야 하고, 같은 모습이 아니면 모두가 무서워하거나 짜증내하거나 회피하기 시작한다. 이런 대중문화의 파시즘의 요소들은 나라는 사람의 얼굴을 상대방의 얼굴을 그대로 이식하기를 바란다. 그런데 나라는 사람들의 얼굴들이 너무 많아 자기들의 얼굴을 보고 맞는지 틀렸는지 구분하지 못할 수준까지 이르게 되었다. 세상은 정의라는 단어가 존재하는데, 정의라는 기본적 상황이 있다면 정의의 부재란 단어도 필요하다. 그것에 대해서는 절대적인 불가침의 영역이 존재하고, 그것에 대한 신성함은 그 누구도 범하지 못할 수준이다.

 

내가 왜 이런 대중문화와 파시즘, 그리고 인간의 욕망과 Cliche를 언급했냐고? 최근에 노회찬 의원에 대한 일에서 화가 났기 때문이다. 법정 심판에서 패소당해 의원직을 상실하게 되었는데, 그 승소자가 삼성이란 대기업이다. 우리나라의 신화는 바로 삼성을 보면 딱 알 수 있다. 원래 삼성을 사카린 밀수를 하여 성공했고, 지금은 불굴의 대기업이다. 참고적으로 내 폰은 갤럭시라는 삼성에서 만든 핸드폰이고, 자가용은 2005년 수동 SM5 모델이다. 삼성자동차를 몰고 삼성폰을 사용한다.

 

내가 아예 삼성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 삼성에 대한 국민적 욕망과 신화적 은폐, 어리석은 현실의 외면에서 비웃고 싶다. 내 자가용이 SM 시리즈인데, 그 단어처럼 한국은 정말 SM의 관계가 삼성과 국민, 그리고 국민 내부의 SM이 존재한다. 왜 그런 것인가? 삼성은 자기 스스로 sadist가 된 게 아니라 국민들이 sadist가 만들어주었다. 곧 국민 자체들이 masochist로 되길 바란 것이다. 자 예를 들어볼까? 나는 누가 공부 열심히 해서 공무원이든 대기업이든 연구소든 어딜 가도 자신의 노력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기업과 국가적 시스템이 돌아가기 위해서는 커다란 상부조직이 있는 만큼 하부조직 역시 필요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상부경제가 돌아가기 위해 하부경제구조가 있어야 한다. 상부구조와 하부구조는 정확하게 말하면 문화인류학에서 나온 단어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최고의 모던걸은 지하경제라고 한다. 지하경제? 어디에 학술적 단어로 나온 단어인가? 그러나 다행히도 대중문화에 의해 철저한 하나가 된 파시스트적 민주주의에서는 가능한 발언이다.

 

말이란 어떻게든 갖다 붙이면 완성된다. 소쉬르의 언어학에서 langue가 사회적 약속이 담긴 언어라도 푸코처럼 언어는 하나의 권력이기에 권력에 의해 언어가 새롭게 생산되고 정립된다. 이 얼마나 언어적으로 생산력이 높은 나라인가! 마치 황금알을 낳는 거위에서 황금을 캐기 위해 거위를 배를 갈라 황금 대신 살코기를 먹는 행위가 아닌가? 그런 나라에서 인간의 욕망은 스스로 masochist로 되기 바란다. 우리 집에 가족이 모르는 친구가 왔는데, 이 녀석이 공장이 많은 동네에 살았는데, 우리 엄마에게 그냥 공장서 일한다고 했다.

 

일은 다른 곳에서 일할 예정이고, 업종이 전혀 다르다. 공장이 많은 지역이라 어머니는 삼성에서 일하니? 라고 물어보는 것이다. 물론 아니라고 했으나, 속으로 어머니의 한심함에 짜증이 났다. 물론 부모님에 대해 공경하는 것은 맞으나 이런 속내를 가지는 한 우리에게 미래란 없다. 참고적으로 그 녀석은 삼성보단 현대가 가깝다. 대략 짐작하겠는가? 어째든 삼성하면 모두가 가야할 곳이거나 가고싶은 곳이다. 내 고교 동창 녀석이 르노삼성에서 일하는데, 다른 고교동창 결혼식에서 만나 명함을 받아서 그것에 대해 이래저래 말하는 어머니의 한심한 작태가 바로 우리 국민들을 masochist로 만든다.

 

정말 웃긴 이야기는 골목상권이 죽어간다고 푸념하는 부모들이 우리 아이들은 공부 열심히 해서 삼성에 가야 한다고 하면서, E-mart, 홈플러스에 대해 욕하는가? 당신네들 자식들이 일할 곳은 그런 계열사들이 있는 곳이다. 본사에 갈 수 있는 인원이 얼마나 있을까? 우리나라 국민들 착각들은 우리 자식 모두 삼성에 갈 수 있을 것이란 점이다. 가면 %? 가도 정규는 %? 정상적으로 퇴직 %? 그들이 노력해서 간 것에 대해 충분히 인정하나, 가면 매일 야근과 주말 잔업에 업무성과에 시달린다. 지역이나 협력 혹은 말단직은 몰라도 정규직은 당연히 그렇지 않은가?

 

물론 비정규직 역시 만만치 않다. 삼성에서 감추는 백혈병 이야기, 사람이 죽는데, 그것이 감춘다고 해결될 부분이 아니다. 내가 회사 다른 부서의 부서장과 말다툼한 적이 있는데, 잔업할 게 있어서 내가 그만하자고 했다. 삼성이 한국을 먹여 살린다는 말에 어처구니가 없었다. 삼성이 우리를 먹이는 게 아니라 우리가 먹이는 것이다. 한국 국민들의 제일 한심한 작태는 소비자 주권의식이 없는 것이다. 가라타니 고진의 <근대문학의 종언>에서 내용을 정리하여 내가 다시 말하자면 근로자가 곧 소비자고, 소비자가 곧 근로자인 것이다.

 

우리가 만든 재화나 상품 등을 일부 계층이 아니라 모두 다른 직종의 일을 가진 사람들이 이용한다. 가령 자동차공장의 근로자는 밥을 만들어먹는가? 음식점에서 먹거나 가게에서 재료를 사서 요리한다. 식당 종업원이 차를 만들어 타는가? 아니다. 공장에서 만들어 놓은 레디메이드를 이용한다. 그런 삼성이 먹여주는가? 아니면 소비자가 먹여주는가? 삼성이 우리 국민에게 월급을 주는 게 아니다. 우리에게 상품을 팔아 월급을 나누어준다. 그래서 삼성에 대한 우리 국민의 권리행세는 당연하나, 삼성에 대한 비판에 대해 나오면 촉각을 밝히고, 삼성은 절대적인 존재가 되었다.

 

누가 삼성제품 사용하지 말란 것도 아니고, 삼성에 들어가지 마란 것도 아니고, 삼성 망하라고 한 것도 아닌데, 나에게 삼성이 망하면 한국이 망한다! 라고 한 그 부서장의 말에서 자기 자식 삼성에 보내고 싶어 하나, 과연 갈 수 있는 확률은 얼마나 되고, 그런 생각은 남들은 하지 않는가? 라는 것에서 결국 제로섬 게임을 즐기는 masochist로 된 것이다. 확률 구분상으로 1% 정도 갈 수 있는가? 아니 그 이하일 것이다. 내 자식만 가면 되라는 생각에 삼성이 마치 절대적인 군주로 받드는 게 아닌가?

 

그러니 E-mart 같은 사건이 터지는 것이다. 안전사고 문제나 기본적인 근로수칙마저 어기고, 그것에 대한 문제점을 제기하면 어김없이 감시와 처벌이 따르는데도 우리는 여전히 삼성편이다. 삼성에 대한 문제점을 굳이 일일이 나열할 생각도 없으나, 노회찬 의원에 대한 일을 보면 토크빌이 말한데로 그 나라의 정치의 수준은 그 국민들의 수준에서 볼 수 있으니 결국 자기 스스로 삼성의 개가 되는 masochist를 선택한다. 그들이 masochist를 선택한 이유는 sadist가 되기 위해서다.

 

실제 주변에서 일하는 사람이 삼성과 업무하면서 삼성에서 업무하는 태도가 속된 말로 양하치다. 그런 게 있지 아니한가? 금요일 오후 4시에 메일을 보내, 이 프로젝트 월요일 11시에 가지고 오세요. 그러면 상대 업체의 직원들은 퇴근하란 것인지 마란 것인지? 6시 퇴근하여 주5일제를 생각하면 그 프로젝트가 간단하면 모르지만, 생각보다 어려운 것이라면 편안한 주말은 포기해야 한다. 이런 양하치 짓거리를 많이 본다는 말에 우리는 그렇게 여기지 않는다. 삼성에 일하면 사람들을 이렇게 구분한다. 삼성맨과 NO 삼성맨, 그들은 원래 masochist에서 sadist로 전환된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삼성에 대해 masochist에 매달린 이유는 sadist로 되기 위한 과정이다. samsungsadist는 같은 S가 아닌가? M에선 masochistmass라는 대중인 것이다. 대중문화를 왜 언급했냐고? 삼성은 대중매체에 큰 힘을 싣고 광고와 이미지 마케팅을 한다. 삼성이 원래 사카린 밀수로 했는데도, 그 진실이 은폐되어 최고의 대기업이 되었다. 결론은 미디어의 은폐와 프로파간다적인 현실이다. 그리고 거기서 얽매인 masochist같은 mass, 다행히도 sadist 같은 samsung man이라도 되면 다행이나 그들은 과연 몇 %나 될까 모른다.

 

결국 이들은 삼성에 대해 masochist이면서도 주변 사람들에겐 sadist로 되고자 한다. 아직 현실에 대해 파악하지 않고, 언젠가는 될 것이란 메시아주의에 물 들은 것이다. 나는 항상 삼성 제품 사용하고, 삼성이 제대로 외국에서 활동하기 바란다. 삼성의 기업이 국내에 영향을 미치니깐, 그러나 그 영향을 미치게 한 것은 소비자 주체자인 국민이란 사실을 놓칠 때에는 언제나 우리는 바보가 될 것이다. 노회찬 의원이 삼성에 패소한 것은 소비자주권 수준이 17897월 프랑스 대혁명 이전보다 못한 한국인의 수준이라 생각하면 되는 것이다.

 

한국인들 중고등학교 나오면 사회시간에 루소의 <사회계약론>과 프랑스혁명 정도 배울 것이나, 그것이 국내외 헌법의 기초라는 사실도 모르는 것 같다. 모르면 모를수록 그들이 많으면 사실 대신 이상한 논리가 사실로 된다. 그러는 이유는 언젠가는 그들도 타인의 머리 위에 올라갈 수 있다는 신화적 욕망이다. 바보 같으나 그렇게 될 확률은 너무 낮다는 점이다. 그렇게 영원히 SM 관계를 맺으면 된다. 대신 나는 SM5를 타고 출퇴근한다. 내 의지로 운전하고 싶기에 수동기어로 한다. 적어도 운전만큼은 내 마음대로 해야 할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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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4-01-11 06: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늘 주장하는 거지만, 삼성은 국민을 먹여살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삼성이 망하면 대한민국이 망한다는 것 또한 사실이 아니죠.
삼성 나부랭이 하나 망한다고 국가가 망한다고 하면
그런 나라는 차라리 망하는 게 낫습니다. 국가가 기업 하나와 비스무리하다는 것은
국가로써 수치죠. 삼성 비판할 때마다 듣는 소리가
삼성 망해서 좋을 거 뭐 있냐 ? 고 묻는데
아니 비판하는 것이 왜 삼성 망하라는 저주처럼 들리는지 이해가안갑니다.
노조 인정하고, 몇 가지 개선해라, 라는 게 왜 망하라는 논조인지.....

만화애니비평 2014-01-11 10:31   좋아요 0 | URL
멍청한 것들의 생각은 자신들은 절대로 그렇게 도태되지 않을 것이란 희망적인 망상이죠. 결국 소모품이 되는 것은 자신이지 남이 된다는 것만 보니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