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무를 갖춘 양반의 나라 조선의 사대부 5
김강식 지음 / 한국학중앙연구원(한국정신문화연구원) / 2015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리뷰를 다시 작성한 시간이 너무 오래 된 것 같다. 그동안 글을 올릴 수도 없었고, 글을 올리기 위해 책 1권조차 제대로 볼 여유가 없었다. 아버지가 그동안 말기 암으로 고생하다 결국 다시 넘어올 수 없는 머나먼 세계로 떠나갔다. 아버지와의 지난 추억을 생각하면, 그렇게 좋은 기억은 없다. 아버지는 배를 타는 선원이고, 집에 있는 시간이 어린 시절을 돌이켜보면 112달 중에 1~2개월 정도, 집에 온다고 해도 여유는 없다. 그동안 하지 못했던 업무를 해야 했고, 집에 가만히 쉬는 게 아니라 오래된 집을 수리하기에 바빴다.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도 제한적이고, 같이 있는 시간이 길지 않기에 유대감이 다른 집안의 아이들보다 크지 않았다. 어느 정도 대화를 할 수 있었던 것은 20대 후반 회사에 취업하면서이다. 그때는 배도 멀리는 가지 않았고, 집에 자주 왔으며, 나도 하사 군복무를 마친 후라 집에 계속 있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평생 고생만 하신 분이다. 어린 시절은 추위와 배고픔, 청장년은 배만 탔고, 노년은 그동안에 고생한 삶에 의해 암으로 마감했다.

 

이런 아버지이기에 우리 가족에게 아버지와 추억은 별로 없다. 단지 예전에 아버지가 어린 시절에 있었던 이야기를 들으며 어떤 삶을 살았고, 할아버지와 증조할아버지 그리고 가족의 내력만 자주 들었다. 기억나는 일화 중에 증조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우리 친할아버지는 증조할아버지 유산 중 아무 것도 가져가지 않고, 오로지 집안의 족보만 가져갔다. 어린 시절 집에 족보가 있었는데, 한지로 된 책이 3권이 있었다. 할아버지도 가난한 농부의 자식이고, 농부로 살아왔기에 한자를 제대로 읽지는 못한다.

 

아버지도 배운 것이 없지만, 그래도 혼자 독학하여 한자를 어느 정도 읽으시고, 집안의 족보를 이야기해주었다. 집안 제사를 지내면 나는 8대조 할아버지를 시작하여 증조할아버지까지 제사를 지낸다. 시제를 올리면 할아버지의 이름이 누군지 어떤 사람인지 알려면 족보를 읽어야 했다. 아버지나 형도 요새 같은 시대에 무슨 조상의 덕을 보겠냐고 하나, 그래도 아버지는 족보를 챙기시던 분이었다. 자신에게 유일하게 남은 것은 집안의 족보, 즉 자신이란 존재가 어디서 왔는가에 대한 정체성이 유일한 끈이고, 그 끈은 나와 형, 그리고 형의 아이까지 이어진 것이다.

 

제사를 지내면서 제일 먼저 가는 8대조 할아버지(그 이상의 할아버지는 큰댁에서 먼저 제사를 가져가므로)는 조선시대 벼슬을 했다. 첨지(僉知),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로 정삼품 무관이었고, 통정대부라는 직책이 주어진다. 아마 대략 영조시대 정도인 것 같은데, 무덤을 보면 묏자리는 정말 좋으나, 그렇게 권력이나 재산이 많지는 않았던 것 같았다. 비석이나 묘비는 없고, 단지 봉만 존재했다. 우리 집안은 조선시대 붕당계열에서 남인(南人)에 속했다. 남인은 정조대왕 이후 거의 몰락했으며, 남인 지식인들이 천주교와 많은 연루된 관계로 정치적으로 박해를 당한 일도 많다.

 

아버지 말로는 천주교 박해나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날 경우 다산 정약용의 제자나 주변인들이 화를 당했다고 하는데, 거기에 우리 집안도 끼여 있었던 모양이었다. 신해사옥과 황사영백서가 일어날 때 당시 우리 할아버지와 조금 먼 친척분이 관아에 끌려가 문초를 당했다는 기록이 있다. 지금 시대 양반이 뭐고, 상놈이 무엇인가에서 의미는 없겠지만, 그래도 그런 역사가 있다는 것은 버려서 안 될 기록이다. 그것은 한국이 그동안 가진 역사이란 점이고, 다른 나라에서도 과거의 기록과 역사를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

 

나의 가계를 알아가는 것은 과거를 보는 것도 되지만, 우리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알아가는 길이기도 하다. 다른 한편으로 나에겐 아무 것도 남긴 것도 없이 그저 고생만 하다 저승으로 가신 아버지가 그나마 그분께서 마음속으로 지켜오던 것을 계속 유지시켜주는 가교에 불가하다. 이런 내 모습이 고지식하다 여겨도, TV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조선시대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그런 것이 아무 것도 아니라면 우리는 그런 것을 볼 이유는 없다.

 

한국에 태어난 이상 한국인이란 점과 한국의 역사에서 우리는 멀어질 수 없다. 또한 한국 이전에 조선이란 국가, 유교문화를 중심으로 사대부가 통치하던 국가가 어떤 곳인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여태 문치를 내세웠지만, 나름 조선도 무예를 중시한 점이 의외였다. 내가 집안의 내력을 다시 돌아본 계기도 그런 점이다. 양반(兩班)은 문관인 동반(東班), 무관이 서반(西班)을 가리키는 말이다. 조선시대 무관의 이름보다 문관의 이름을 많이 알지만, 무관이 문관을 하고, 문관이 무관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게다가 아버지와 아들의 직급이나 업무에서 문무를 오고가는 것이 많았다.

 

조선역사를 보면 600년이다. 600년 동안 유지한 단일 국가는 세계에 내놓아도 좀처럼 없다. 물론 고조선 역사가 2,000년이란 말도 있지만, 그래도 600년이란 역사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긴 시간이다. 어리석고 잔인하고 교만한 양반사대부가 많은 점은 확실하나, 그런 사람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무관들이 직접 목숨 걸고 전쟁에서 싸우고, 문관들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인의예지를 지켰다. 대신 그런 집안의 가족들은 큰 화를 당했고, 그런 가족들의 후손들까지 그 여파가 닿기도 했다.

 

이 책에서 우리가 흔히 아는 인물인 서애 류성룡이 나온다. 류성룡은 조선시대 임진왜란을 극복한 명재상이고, 이순신을 천거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끈 뛰어난 책략가이다. 그러나 선조와 반대 당파의 논쟁으로 고향인 안동으로 은거하게 되었고, 친구인 이순신도 전쟁터에서 죽음을 당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병법이나 전략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면 위기를 모면하지 못했을 것이다. 임진왜란 이전에 왜구의 침입을 어느 정도 예상했는데, 명종 때 을묘왜변이 일어났다.

 

이때 재상이면 동고 이준경이 직접 군사를 정비하여 적을 무찔렀는데, 그는 기묘사화 때 화를 입은 탄수 이연경의 사촌동생이었다. 이준경이 전남 연안에서 적을 칠 때 우연히 우리 집안의 어른도 계셨다. 그 당시의 할아버지의 동생, 만호(萬戶)라는 무관을 지녔고, 이준경의 막하에서 무장을 맡으며, 왜구를 소탕했다. 그리고 만호를 지낸 분의 형인 나의 직계 할아버지는 본래 훈련원(訓練院) 봉사(奉事)를 시작한 무관이었고, 나중에 순천부사로 부임했다.

 

아버지가 집에 계실 순천부사를 지낸 할아버지 이야기를 많이 했다. 그리고 그분의 아버지는 문과 급제하여 현감을 맡았고, 당상관인 통정대부까지 이르렀다고 말해주었다. 그때는 몰랐으나 대부분 할아버지들이 문관일줄 알았는데 오히려 무관들이 더 많았던 것이다. 조선시대 개국 전에는 군기소윤(軍器少尹, 군수를 관리하는 참모)을 하신 분이 있었고 그분의 형은 대호군(大護軍, 수도방위를 책임지는 참모)으로 무관을 맡았다.

 

그러나 조선으로 넘어가자, 군기소윤의 아들이 무관 창신교위(彰信校尉), 그 창신교위 아들이 진위장군(振威將軍)과 사간원 사간(司諫院 司諫)을 맡았다. 무관이면서도 사간원에서 언론을 맡은 사간을 맡은 것이다. 문무를 동시에 수행했던 것이다. 그 다음은 무관이 아닌 문관 중 하급관리인 참봉, 그 다음은 현감, 그 다음에 순천부사를 지낸 분이었다. 그 다음은 진사로 성균관에서 학업을 하시다 정암 조광조를 따르는 이유로 기묘사화 때 화를 당한 후 몇 십년 뒤 영의정 동고 이준경의 천거로 어모장군(禦侮將軍)이 되신 분이 계셨다.

 

어모장군의 동생은 만호를 지냈고, 어모장군의 아들은 무관 훈련원 사정(司正)을 맡다가 훈련원정과 북청군을 지키다 변방에서 숨을 거두었다. 이분이 명종 때 무관으로 임관하여 광해군 2년 때 돌아가셨는데, 나이가 70세가 넘은 노장이니 조선시대 이 나이에 변방에서 근무해서 운명했다면 순국하신 것과 것이다. 이때까지 보면 순수 문관은 2분이고, 나머지는 다들 무관을 맡았다. 변방에서 순국하신 분의 아들은 동몽교관(童蒙敎官, 아이를 가르치는 교사)이였고, 그 다음은 가선대부 좌승지이었다.

 

좌승지를 하신 분의 아들은 벼슬하지 않았지만 그분의 아들이 중추부첨지사를 맡게 되어 벼슬하지 않은 분이 증 동부승지로 되었다. 이 뒤로는 벼슬한 분은 없고, 마을에서 훈장선생을 하신 분은 계셨지만, 남인세력이었기에 그대로 몰락양반이 되었다. 몰락한 양반의 가계가 지금까지 거의 200년을 안고 갔다. 아버지나, 할아버지, 증조부나 고조부조차 가난한 농부로 살아야했던 운명은 조선시대에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위에 말한 것처럼 조상의 덕을 본 게 없다면서 형은 집안내력에 신경 쓰지 않고, 아버지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집안내력을 소상히 나에게 말해 주었다. <문무를 갖춘 양반의 나라>를 읽은 것도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다음날에 읽었다. 아무래도 아버지가 남긴 유일한 유산은 나와 형이다. 어떻게 보자면 할아버지가 남긴 유산도 아버지와 아버지의 형제지만, 그래도 아버지만 할아버지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다 내게 이야기해주었다.

 

20세기를 걸쳐 21세기 대한민국은 물질만능주의 사회이다. 민주주의라고 해도 돈에 따라 인생의 굴곡이 달라진다. 그래서 돈이 넉넉지 못한 한 개인이 이런 피폐한 세상에 살려면 무엇을 의지해야 할지 난감하다. 조상을 잘 안다고 해도 돈이 나오거나 출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알아야 하는 이유는 내가 지금 살아있는 현재를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사농공상이 얼마나 심각한 폐단이 있었는지 알고, 개혁론자 사대부들이 천민들도 능력이 되면 벼슬을 줘야 한다는 이유로 죽음을 당하고 몰락한 사례도 많았다.

 

지금도 사회적 문제가 만연하고 있고,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도대체 우리는 어디에서 배워야 하고, 무엇을 찾아 배워야 하는가? 결국은 역사를 알아야 한다. 개인가족이 지닌 역사와 국가가 지닌 역사의 규모는 비교할 수 없겠지만, 그 개인가족이 전승해온 기록에서 당시 살아간 인간들을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문무를 갖춘 양반은 필요했다. 비겁하지만, 문자를 알아야 지식을 찾고, 지식이 있어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지난 과거가 멀다 하지만, 우리도 먼 미래 후예들에게 단지 과거의 존재일 뿐이다. 과거라는 이유로 우리가 앞을 것을 모두 부정하면, 먼 미래의 주인공 역시 우리를 부정할 뿐이다. 존재의 부정성은 곧 다시 자신의 부정으로 이어진다. 정체성 없이 산다는 것은 결국 마지막에 우리가 어떤 존재이었는지 알 수 없게 되는 미궁 속에 빠질 수밖에 없다. 티베트에서 탈출하여 미국으로 망명한 한 예술가를 보았다. 티베트의 흙을 가지고 와서 티베트에서 도망친 사람들이 만든 마을공터에 뿌려주었다.

 

티베트의 유민들은 그 흙을 기리며 자신들의 역사와 문화를 지키고 언젠가 다시 돌아가기를 약속했다. 예술가 본인의 아버지는 이미 사망한지 옛날이고, 어머니 역시 노년에 이르렀다. 과거가 좋든 말든 그 과거 자체는 받아들이는 것이 인간의 선택이다. 그래야 어떤 삶을 살아갈 건지 다시 보게 되는 것이다. 양반의 사회 조선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문제가 심각했다. 그래도 병자호란 이후 근 270년 정도를 유지했다. 아무리 정치적으로 섞어도 나라가 굴러간 점에서 그 근원이 있었던 것이다. 물론 후로 갈수록 무예를 소홀해지면서 일제에 조선이란 나라를 사라지게 만들었다.

 

지금도 삼면이 바다고, 북한과 러시아, 일본, 중국, 미국 등 수많은 나라와 접한 이 환경에서 우리나라가 문무를 고르게 가지지 못한다면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 반면교사, 온고지신이란 단어는 괜히 나온 말이 아닌 것 같다. 그리고 이 책을 읽고 서평을 작성하면서 아버지의 죽음을 애도하며,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지켜온 집안의 내력을 생각했다. 조선개국 아래 할아버지 9분이 계속 벼슬자리에 올랐으며, 역사적인 사건 속에서도 삶의 흔적을 발견했다.

 

인간의 진정한 죽음은 육신이 다하는 것인지 아니면 누군가의 기억에서 사라지는 것인지는 각자의 가치관마다 다르지만, 아버지의 삶을 내가 기억하고 싶다면, 그 이전의 사람도 기억하고 싶을 따름이다. 그리고 이 앞에 살았던 자들은 자신이 있던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다는 점을 간직하고 싶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7-03-05 23: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3-06 09: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3-06 10: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사도세자가 꿈꾼 나라 - 250년 만에 쓰는 사도세자의 묘지명, 개정판
이덕일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1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역사소설이나 드라마, 영화 등에서 많은 소재가 되는 것이 영조와 정조의 이야기이다. 그 사이에는 사도세자라는 비운의 왕세자가 한에 맺혀있기 때문이다. 당시 급박한 상황들을 현대사회의 영상이나 이야기로 드러내려면 우선 그 기록이 필요하다. 모티브가 되는 역사적 사실에 인물과 사건 그리고 배경에 대한 여러 가지 상상력을 발휘하여 내러티브가 완결된다. 그런데 최근에 읽은 <사도세자가 꿈꾼 나라>를 읽어보자 조금 나는 당혹스럽게 느꼈다. 기본적으로 나는 사도세자가 붕당정치에서 심각한 피해를 본 군주의 후예라는 점을 안다.

 

그런 점에서 예전에 본 <사도>라는 영화처럼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히기 전과 갇힐 때 그리고 그가 죽은 후 정조가 즉위하여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생일에 보여주는 장면으로 끝이 난다. 정조가 들고 있는 부채는 사도세자가 가지고 있던 부채이고, 부채를 들고 춤을 정조의 모습을 보고 어머니 혜경궁 홍씨는 무척 흐뭇하게 웃고 있다. 영화에서 혜경궁 홍씨는 영조와 사도세자 그리고 주변 대신들이 맺어진 상황에서 큰 실의를 겪는 것으로 나온다. 마지막으로 왕세손 정조가 사도세자로 인해 폐위 내지 화를 당하지 않게 위해 사도의 형 아래로 입적을 올린다.

 

그녀는 정조가 생사에 대해 무척이나 고민하고, 부군의 죽음에 통곡하는 여인으로 나온다. 그러나 이 모든 게 관점이나 권력성이 달린 문제였다. 정조가 처음 등관하여 정사를 볼 때 노론의 암살사건에 휘말린 적이 있었다. 암살의 주모자는 홍인한 외 여러 일가들이고, 홍인한의 사도세자의 장인 홍봉한의 동생이다. 형의 사위 아들을 왜 죽이려 했는가? 그런데 그들은 풍산 홍씨 혜경궁의 친족들이다. <역린>이란 영화를 보면 영조의 마지막 아내인 정순황후와 혜경궁 홍씨와 기 싸움을 보여준다.

 

나이가 자신보다 어린 정순황후가 혜경궁 홍씨는 항상 공손하게 대해야 한다. 하지만 잘못 생각한 점이 있다. 정순황후는 지독한 노론 일당의 후예이고, 혜경궁 홍씨 역시 자신의 가족들이 남편 사도세자를 죽이게 만들어도 수수방관하던 사람이었다. 결국 노론 일파의 2사람이 적보단 오히려 동지에 가까웠다. 1804년 혜경궁 홍씨는 자신의 가족들이 역모를 저지른 것에 대해 사면 받으려고 정조에게 부탁을 했다.

 

<한중록>이란 책도 혜경궁 홍씨가 사도세자의 죽음을 두고 정조 그리고 순조에게 변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책이다. 자신은 사도세자의 죽음에 아무런 관계는 없고, 단지 힘없이 자신의 부군을 잃어버린 것처럼 또는 사도세자가 미친 광인이 되어 이상한 사람인 것처럼 적기도 했다. 그런 방식이 만들어진 <한중록>이라면 영화 <사도>는 그야말로 혜경궁 홍씨의 기억으로 조작되어진 작품이 된 것이다. 물론 감독이 어느 관점인지에 따라 다르게 해석하겠지만, <사도>는 인간 그 자체인가? 아니면 예법이 중요한가라는 딜레마를 두고 영조의 모습이 드러난다.

 

사도는 황후의 자식이 아니라 후궁의 자식이다. 사도세자의 생모가 사도의 죽음 앞에 무력하게 좌절하나, 사실 <영조실록>을 정리한 내용에서 사도세자의 죽음에 기여한 사람은 그의 생모와 아내이다. <한중록>과 영화 <사도>의 주변인물은 자신들이 가한 죄를 보여준 게 아니라 오히려 감정적으로 사도의 죽음을 애도한 것처럼 보여준다. 실록의 기록이나 정조가 남긴 자료나, 하다못해 노론이 아닌 소론이나 남인이 증언되는 자료에서도 그 기원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자신의 가족이 왕의 세자와 세손을 죽이려 했고, 실제 사도는 죽었다. 그런 점에서 역모로 풍산홍씨 일족 스물 명 넘는 사람이 죽고, 멸문을 당했다. 그런데도 그 죄에서 복귀시키기 원하는 혜경궁 홍씨가 그 모든 원흉의 조력자인 것이다. <정조실록>에서 정조가 역모사건을 다루면서 혜경궁 홍씨의 일족을 처단해야 할 때 그녀는 식사를 하지 않고, 정조에게 불편한 감정을 드러내는 모습이 나온다. 실록은 사실을 기록하지만, 사실도 사관에 따라 다르겠지만, 그때 그 순간 일어난 일이나 나온 말들은 거짓이 아니다.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주워 담은 후 사관의 사견을 넣는 것이라면 몰라도, 사관의 기록은 그대로 반영된 것이다.

 

심지어 노론의 사관 신료가 영조 옆에서 사도를 엄하게 대할 때 붙어있고, 홍씨 집안의 위선을 드러낸다. 사도가 죽을 때 뒤주를 내어놓은 것은 홍봉한이고, 사도가 죽을 때 배 위에서 놀고 있는 사람도 홍봉한이다. 사도에게 정조를 지켜달라고 했지만, 그 정조마저 나중에 불편한 것을 느끼던 홍봉한과 홍인한이다. 사도세자가 왜 그렇게 모든 이들에게 두려움과 공포 그리고 제거되어야 할 대상이었을까? 책을 보면서 놀란 점은 택군이란 단어이다. 왕은 왕족과 대신의 합의가 아니라 대신들의 권력을 위해 선택된 점이다. 그런 점이 세도정치에서 철종과 고종황제가 그러하다.

 

택군되지 못한 왕은 그들에게 위험한 존재이고, 제거되어야 할 대상이다. 사도는 문학적 지식과 소양이 깊었지만, 힘이 장사였고 아주 훌륭한 용장이었다. 태조 이성계부터 조선의 군주는 뛰어난 무장이고, 태종 이방원과 효종대왕과 헌종 역시 뛰어난 무장이었다. 사도는 건장한 장정도 들기 힘든 청룡도를 들고 수십 합을 말 위에서 휘두르고, 활을 쏠 때 명궁 중에 명궁이었다. 사도의 기운을 받아 정조 역시 명궁인 점에서 무장의 혈기가 흘렀고, 영조처럼 다혈질이 아니라 차분하여 군왕의 자질이 뛰어났다.

 

바로 이런 점이고, 경종의 독살설과 소론과 남인을 배제한 노론정치가들에게 매우 곤란한 존재이다. 조선 르네상스 정조시대, 정약용과 채제공이 백방으로 노력하여 많은 업적을 남겼다. 이때 간신들을 축출할 때 쉽게 하지 못했던 것은 노론이 묻은 권력구조가 깊게 뿌리박힌 것이다. 책에서 사도는 백호 윤휴의 건의에 따라 북벌론을 제기한 효종을 이은 최후의 왕족이었다. 게다가 사도가 분조하여 지방에 나갈 때 많은 백성들을 만나보고 그들의 억울함을 풀어주기 원했고, 왕가의 행렬에서 백성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노력한 인물이다.

 

궁궐 안의 이야기는 쉽게 내놓지 못하나, 궁궐 밖의 백성들은 다 안다. 사도가 어진 임금이 될 것이고, 자신들을 핍박하는 탐관오리에게 큰 벌을 내릴 것을 말이다. 사도의 죽음과 정조즉위 후 사도의 이장행렬에서 많은 백성들이 나와 눈물을 흘렸다. 정조는 자신이 왕좌에 오르자,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고 공표한다. 정조가 만든 세상, 정조가 꿈꾼 세상은 사도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그런 사도가 역사 속에는 미치광이 내지 문제 많은 세자로 등장한다. 사도에 대해 내가 접해본 것은 다산 정약용을 알아가면서이다.

 

정약용은 정조의 신임을 받는 신하이나, 한편으로 아버지 정재원은 사도의 죽음으로 벼슬을 버리고 귀향한다. 아버지의 영향에서 남인이던 정약용은 사도세자의 죽음이 이미 자신의 집안에서부터 비극이란 점을 알았고, 사도세자가 머문 자리에 기리기도 했다. 사도세자가 꿈꾼 나라란 바로 정조와 정약용처럼 군주의 나라, 군주는 백성을 사람을 임금이어야 했다. 정암 조광조 이후 소학(小學)이 매우 중요한 학문이 되었다. 소학의 가르침에서 작은 것을 실천하고, 그 작은 것이 모여 크고 큰 거대한 조류로 이어진다. 그 작은 실천에서 백성의 괴로움이 비록 소리가 작게 들리고, 사소한 일이라도 군주에게는 큰 고민이 되어야 했다.

 

그러나 사도세자가 그렇게 하기엔 주변이 너무 힘들었다. 고독한 철장 안의 새는 억지로 미치광이가 되어야 했고, 때로는 치명적인 병을 앓아도 영조 아래서 엎드린 채 며칠을 보내야 했다. 권력의 암투 속에서 생명의 불꽃이 꺼진 사도나, 역사의 기록에도 억울함을 풀어주지 못했다. 오히려 그를 불쌍히 여기고 애도하고, 항의하는 자들까지 반역의 무리가 되어야 했다. 사도의 아들 정조가 죽자, 노론은 1801년 신유사옥을 일으키고 남인의 많은 신료들을 사형 내지 귀양을 보냈다. 남인이 후에 등용되어도 언제나 정치적으로 박해를 받았으며, 정약용의 책은 일제강점기 때도 함부로 세상에 드러낼 수 없었다.

 

사도를 찾아 떠나는 여정은 조선시대 권력의 독점화가 결국 현실의 한국으로 이어진 것을 알 수 있다. 역사라는 것은 과거의 축척된 것을 현대적인 감각으로 돌아보는 것이고, 현재는 과거의 시간이 축척된 하나의 과정이고, 미래란 과거와 현재의 시간이 축척되어 만들어지는 현재진행형이다. 역사를 다시 본다는 것은 지나간 것만이 아니다. 오히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또 다른 서사로 등장한다. 개인은 사라져도 개인이 속한 사회는 사라지지 않는다. 먼 미래의 내 후예들에게 물려줄 세상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역사라는 거대한 물결은 우리에게 답을 내놓으라고 하지 않으나, 내놓지 않은 순간 우리는 역사의 죄인 내지 방조자로 될 것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7-01-13 00: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1-13 09: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혐오의 미러링 - 혐오의 시대와 메갈리아 신드롬 바로보기
박가분 지음 / 바다출판사 / 2016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정의라는 개념을 어디에 두고 말해야 좋은가에서 참으로 난감할 때가 많다정의라는 개념이 그 사회와 시대적 특성상황에 따라 변화하기 때문이다그래서 정의라는 것은 도덕적 관념즉 사회적 통념이란 의미에 치중한다과거 조선시대 군왕과 사대부가 통치하던 때와 지금 민주주의 국가와의 가치관은 다를 수밖에 없다그러나 아무리 시대가 다르고 변화해도 인간의 근본에서 계속 유지되고 인정되는 부분이 있다그것은 윤리적 가치관이다살인을 해서는 안 되고폭력을 휘두르면 아니 되며더욱이 사리분별이 있는 자라면 약자들을 괴롭히면 안 된다그러나 약자를 괴롭혀도 용납되는 것은 윤리적 가치관보단 그 사회적 권력 혹은 프레임에 의해 조성된 하나의 이데올로기또는 이데올로기를 정당화 하는 헤게모니로 볼 수 있다.

 

정의라는 개념에서 무서운 실행방법에서 응징이란 수단이 있다응징은 하나의 서사이고 하나의 신화에 가깝다기존 사회에 적이 혼란시킬 경우적의 위기에 모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적 자체는 섬멸하는 서사로 흐른다역사적인 기록에서 전쟁이나 각종 사변들을 보면 이런 서사를 이용하는 경우가 많다우리는 너희들에게 피해를 보았으니 우리는 이에 대한 보복을 실행하여 보상 내지 처벌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다정의라는 이름 아래라는 것은 따지고 보면 폭력과 광기에 의해 합리화되는 경우가 많다.

 

이번에 읽은 박가분 작가의 <혐오의 미러링>, 프로이트 “id”라는 집단적 폭력적 기질이 ego 내지 super-ego로 대체될 경우 상당한 무서운 작용을 보여준다그 폭력적 광기에 정의를 내려줄 하나의 이름만 내걸면 뭐든지 해도 정당화 될 수 있다가령 조선의 역사는 외세의 침략과 내정간섭으로 많은 고통을 받았다왜국의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을 일으키고이에 중국 명나라가 지원 왔다명나라가 오면서 많은 도움이 되었지만많은 불편함을 주었다상국(上國)의 천병(天兵)이 오니이에 대한 대접과 보상을 요구하는 것이다.

 

보상심리가 단순히 위에서 누르는 입장과 여기에 반대되어 밑에 있는 자의 입장은 다르다하지만 어느 쪽이든 보상심리에 의해 폭력을 휘둘리는 순간그 누구라도 같은 존재가 된다이스라엘 민족이 나치에 의해 희생당했지만결국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무고하게 살해한다보상심리에 의해 작동된 광기는 그 모든 폭력과 비인간적 행위를 정의라는 이름으로 덮는다거기에 신이라는 관념적 존재와 이데올로기적 사상을 더하면 완벽한 은폐가 일어난다물론 피해자가 계속 피해당하는 일이 없도록 만드는 것이 올바른 사회고그들의 아픈 상처를 드러내서 그 부분을 치료할 수 있게 금 처방해주는 것이 바람직한 행동이다.

 

하지만 그 상처가 본인이 받은 것이 아니라 그동안 누적된 형태고상처를 말하는 자들이 직접적인 피해자가 아니라 단지 같은 부류로 볼 수 있다는 것으로 지나친 요구 내지 폭력적 행동을 틀려먹었다일본이 조선을 지배하면서 수많은 악행을 일삼았다현재 그 당시의 지도자의 후예들은 당시 시대를 영광스러운 과거로 생각한다우리가 이에 대해 일본 권력자 내지 정부에게 항의하고 경계하는 것은 옳을 수 있지만일본인 관광객에게 그런 적대감을 보이는 것은 잘 못된 일이다군위안부에서 강제로 성노예로 착취당한 여성들의 원한을 생각하여 이번에 우리가 피해의식으로 인해 일본 여성을 집단 성폭행한다면 말이 되겠는가?

 

인간에게 어느 정도 폭력이란 수단이 허용되는 범주가 있고그 이상해서는 안 되는 일도 있다더구나 그 행동에 대한 하나의 가치관 내지 이데올로기의 신성화는 단순히 정의라는 이데올로기 가치관을 넘어 윤리적 가치관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어느 사회이든 불평등은 존재하고모순과 부조리로 넘쳤다그런 부당한 일이 존재해서 당연한 것은 아니나 늘 있었다는 점은 당연한 사실이었다그런 당연해서 안 될 일들을 당연한 일로 만드는 게 바람직한 사회의식이다.

 

모든 사람들이 완벽하고모든 사회가 정상적이지 않다모든 게 완벽한 세상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지만거기에 도달하는 것이 인간의 이상이다플라톤의 스승 소크라테스가 지향한 철학이란 신의 사랑을 찾아가는 것이고민주주의 가치관이 인간의 자유와 평등인권을 찾아가는 것이라면 지금 현실이 온전하지 않은 것이다하다못해 마르크스가 말한 공산주의 운동이란 현실에 없는 것이고오히려 그 과정을 말하는 것이다원래의 사상적 시초는 철학적 사유와 고찰에서 시작되나사상의 지배를 받는 사람들은 그 범주의 근원에 가는 것보다 단순한 답과 쉬운 길을 찾는 것을 원한다.

 

쉬운 길과 단순한 답을 찾으면 눈앞에서 할 수 있는 행동은 매우 쉽다그냥 자기가 그러고 싶은 것만 믿고 계속 행동만 하면 된다하지만 신념과 광기는 다르다신념에는 왜 그래야 하는가에 대한 명제와 더불어 이에 대한 대안과 해결책을 요구한다광기는 대안과 해결책은 없이 자신들의 행동을 두고 정의집행이란 이름만 거론한다정의집행이 광기와 조우하면 폭력은 그저 자위행위에 불과하고문제해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고갈등만 조장한다갈등을 빚으면 갈등의 당사자가 가해자 내지 피해자로 될 수 있다피해자가 아니더라도 자신들을 잠재적 피해자로 생각하는 순간 이들은 자신이 언제 피해볼지 모른다는 불안감과 공포로 광기를 표출한다.

 

박가분 씨의 <혐오의 미러링>은 이런 현상이 한국사회에서 메갈리아 혹은 워마드란 여성우월주의 집단 태생 및 근원을 밝히고 있다솔직하게 말하면 작가 분은 조금 더 연구해볼 필요한 분야가 있었다그것은 중세시대부터 지금도 이어져 오는 마녀사냥이다책을 읽으면 마녀사냥에 대한 기본적인 맥락을 알고 있다군사정권시절 용공조작 사건을 거론한 점에서 분명하다또한 마녀사냥은 피지배계층현대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계층에서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부유한 계층이나 혹은 지배계층이 마녀사냥을 당할 이유는 특별히 없다.

 

마녀사냥이 일어나는 것은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를 해소해야 하나그것이 해소되지 않은 채 그 피해를 고스란히 일반 사람들에게 돌아오기 때문이다원인을 사회구조적인 요소에서 바라보고 서로 해결하는 수단보단 더 간단한 길을 선택한다그리고 그것이 먹히면 하나의 이슈가 된다세월호 사건을 보면 참으로 마음을 아프게 혹은 분노하게 만든 일이 있다유가족들이 진실규명을 위해 호소하고어느 분들은 단식투쟁을 하는데극우사이트 회원들이 찾아와서 그 앞에서 피자와 통닭을 먹고 있던 것이다세월호 침몰된 어린 학생들을 두고 어묵이라며 비하하는 인간도 있었다.

 

윤리적 가치관으로 도저히 용납하지 못할 수준이었다게다가 그들은 방송에서 나온 것처럼 국가정보원 및 국가기관의 치밀한 공작에 의해 교묘히 넘어가서 넘지 말아야 행동을 했다세월호부터 시작하여 518광주시민의 죽음을 두고 조롱하던 일베그리고 박가분 씨가 이번에 적은 책은 일베의 미러링이라고 하는 메갈리아/워마드에 대한 책을 내었다나는 솔직히 일베도 문제지만메갈리아는 더 심각하게 여긴다일베는 사회적으로 공공의 적이 되었고어디 가서 일베라고 들키는 순간사회적 단절을 맞이할 수 있다.

 

그러나 메갈리아는 다르다이들은 일베(국가기관의 첩보에 의해 돌아가나 국가기관은 은밀히 은폐했지만)처럼 자신들을 스스로 병신이라 하지 않고오히려 피해자란 입장에서 정의를 외친다박가분 씨가 잘 지적한 백색테러와 적색테러난 피해자이니 모든 행동이 정당하다는 식이다결국 일베와 다르게 메갈리아는 피해자란 입장에서 일베를 미러링하고잠재적 피해자라는 피해의식이 보상심리와 폭력의 정당화로 이어진 것이다결국 여자라는 이름으로 페미니즘을 동원하고내가 그동안 읽은 페미니즘 개념과 전혀 다른 양상이 페미니즘이란 이름으로 나온 것이다.

 

사실 나는 메갈리아 그 자체에 대해 문제를 삼기보단 메갈리아라는 존재에 대해 무조건적인 지지를 내보내고 있는 여성학자들이다오히려 현장에서 오랫동안 활동한 여성운동가라면 이들에게서 이질감을 보일 것이다현장의 여성인권운동가들은 여성의 인권을 넘어 장애인노인어린이(고아같은 약자까지 모두 보호해야 할 대상이다그러나 메갈리아에게 그런 것은 없다노인이란 한국남자로 살아왔으니 비난해야 하고어린 남자아이는 앞으로 한국남자로 살아야 하기에 비난해야 한다는 논리다이들에게 어떤 논리도 필요 없고 단지 자기 말만 내세운다.

 

그들의 입장그들의 정의에서 충분히 가능성이 높다작가의 글에서 아쉬운 감정이 드는 부분이 바로 지식인들 혹은 엘리트들이 보는 어설픈 짝사랑이다일베나 메갈을 알기 전에 먼저 디시인사이드 내지 인터넷문화를 알아야 하는데이들이 그런 문화에 깊이 들어갈 일도 없다디시인사이드가 원래부터 문제가 많은 일부 극소수 회원들이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바가 있다그런 사이트에서 남자연애인갤러리에 활동하던 회원들이 기존 남성들이 사용하던 비속어 내지 욕설을 따라하면서 같이 오염되고메갈리아는 그런 공간에서 더 진화하여 새롭게 나온 것이다.

 

메갈리아 존재는 올해 처음 들어본 것 같고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봐도 그렇게 신경 쓰지 않았다내가 메갈리아 위험하다고 여긴 것은 단순히 한국남자만 욕하면 그렇다고 넘어가겠지만어린이 성추행넥슨사에서 펼친 민폐강남지하철 사건 뒤 행동산업재해로 죽은 청년에 대한 조롱세월호 희생학생에 대한 조롱독립운동가와 노동운동가 전태일의 비하시위 중 물대포의 충격으로 사망한 백남기 농초에 대한 조롱 등이다이들이 이런 짓을 하는 점에서 인륜의 가치를 물어보는 것도 어려우나이런 이들을 이때까지 지지한다고 말하는 지식인들의 착각이 더 무서운 일이다.

 

만일 일베가 스스로 정화능력이 있었다면 지금과 같이 일반 사회에서 인간 네트워크 속으로 님비(Not in my Back-yard) 현상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페미니즘이란 탈을 쓰게 되면 인간 네트워크 속에서 오히려 큰 소리를 낼 것이다사람들은 보고 싶은 것만 보려고 하고자신이 느낀 피해의식 내지 공감대가 조금이라도 닿게 되면 그 대열에 참여하기 쉽다문제는 그런 불편함을 내비치는 게 아니라위에서 말한 것처럼 대안과 해결책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강남역에서 살해당한 여성은 참으로 안타깝다아직 젊고 가족들의 사랑을 받고 사는 구성원이었다.

 

그런 가족들이 딸동생을 잃었다오빠가 억울함을 토로하자 동생시체 팔아 보상비를 노리냐는 말을 하거나심지어 뺨을 때리는 사람도 있다어느 이는 이들에게 찾아와 자신들만의 페미니스트 가치관을 강조한다메갈리아가 이때 여동생을 잃은 오빠를 두고 진심의 위로보단 한국남자이니 여성의 죽음을 슬퍼할 자격이 없다는 말을 했다메갈리아 전체가 그런 말을 하지 않으면 모르나그런 식의 글이 호응이 높고이에 대한 비판이 없다는 점이다이런 문제를 두고 내가 블로그에 글을 올리면이상한 덧글들이 달린다.

 

메갈리아는 아니나메갈리아에 동조한다는 지식인들의 착각으로 가득 찬 믿음이 두려울 뿐이다그런다고 해서 한국사회가 문제없는 것도 아니고한국 사회 내 남성들이 문제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단지 한국사회에서 남성도 힘들게 살고무조건적으로 적은 아닌 점이다왜 이런 피해의식들에 의한 혐오범죄가 일어나고그 근원은 무엇인가작가 분이 조금 더 마녀사냥에 치중하면 좋겠다는 점이 바로 마녀사냥은 대다수의 일반 국민들이 경제적으로 힘들고 여유가 없을 경우 그 책임을 구조적으로 판단하기보단 눈에 보이는 만만한 존재로 전이되는 점이다.

 

메갈리아들이 한국남자들을 욕을 하지만특히 제일 심하게 조롱하는 것은 가난한 남자이다지하철역 스크린 도어 수리 중 사망한 청년은 비정규직에 가난한 집안에서 자란 사람이다그의 죽음을 왜 욕되게 하는 것인가이에 반해 부유하고 권력이 있는 자에게 그런 욕을 날리지 않는다과거 집권여당 시초들은 군사정권 시절권력가와 결탁하고이중에는 과거 검사나 경찰국군장성도 많았다이들이 국민을 감금하고 고문할 때 남자들은 과도한 폭행여자는 성폭행을 자행했다남자가 결혼하면그의 장모와 아내를 눈앞에서 성폭행하겠다고 협박하여 간첩으로 조작했다.

 

이런 자들은 왜 페미니스트들은 비판하지 않은 것인가현재 재벌들은 한국 산업화시절 어린 여공들의 노동력을 착취하여 성장했다여공들에게 좁은 공간에서 환기도 되지 않아 폐병 내지 위염으로 고생해도 계속 일을 시켰고잔업과 야근임금체불 등 잔혹한 행위를 가했다. <전태일 평전>에서 병을 앓아 혼자 외롭게 자취방에서 죽어가는 어린 소녀를 바라본 전태일의 마음을 보자참으로 한숨만 나왔다왜 그런 여성들에 대한 추모의식은 없을까하다못해 위안부에서 슬프고 아픈 기억만 가진 할머니들에 대해 진심으로 관심을 가졌을까?

 

내가 지식인들이나 혹은 주변에 본 지식인 내지 예술계에 몸담은 분들이 이런 문제를 제대로 고찰하지 않은 점이다예술인들이 노동인권을 위해 작품을 만드는데메갈리아가 산업재해로 죽은 노동자를 조롱한다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거기에 대하여 메갈리아 비판하니지식인이나 예술인들이 왜 여성인권을 왜 무시 하냐는 식으로 나온다그들의 주제와 대상이 어긋나게 되는 현상으로 일어난다전에 읽은 책으로 <섹스와 돈>이란 책이 있다백인중심의 미국에서 자본주의는 여성의 예속화를 미디어로 통해 자본으로 합리화 시킨다.

 

남성에게 주어진 경제적정치적 특권이 여성을 예속화했다면여성이 정치적경제적 자율성을 가지게 된다면 남성과의 관계가 수직이 아닌 수평으로 가야 한다하지만 수평의 관계성에선 책임성이 따른다메갈리아 분석글에 혐오로 가득하나그 속에서 돈 없는 남자에 대한 혐오는 더 심각하다돈 많은 남자에게 얻어먹으면 행운이고돈 없는 남자를 만나면 운이 없다는 것을 말한다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나여기에 대한 비판이나 고찰은 없다가 사안에 대한 일부 문제를 전체적으로 일반화는 위험한 발상이나그 일부의 문제 중에서 어느 사안에 대해 전혀 비판의식이 없다는 것은 심각하다.

 

반남성주의자라면 남성을 만나지 않아도 되는데만나서 막상 그들의 주머니를 탐색하는 점에서 메갈리아는 단순히 남성혐오로 이루어진 집단만이 아니다그들의 집단성에는 부익부 빈익빈에서 등장하는 청년 혹은 젊은 세대들의 실업빈곤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만이 엉뚱한 사람들에게 불똥을 튄 것이다물론 한국남성 중 기성세대의 꼰대의식은 참 문제가 많다청년세대들이 겪는 고충을 이해하지 않는다이미 나온 서적 중에 <88만원 새대>, <사천원 인생>이나 경제적 불평등에 대한 책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

 

거울은 상이 반사되어 비추어진다상을 비추는 거울이라 해도상이 원래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상이란 물체가 스스로 움직이거나 또는 누군가 거기에 있어야 한다미러링이란 말만 하고미러링이란 상의 변화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광기만 넘치는 현상에서 답은 없어 보인다대안과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한 채혐오만 내세울 경우 그 최후는 허무함이다메갈리아를 운동권에서 이용하려 했지만 오히려 실패했다그들을 두고 이란 지칭하며 경계의 대상이 되었다기존 페미니즘 진영에서 메갈리아에 대해 세력권을 확장하려 했지만적어도 최소한의 가치관이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지 말아야 했다.

 

현재 2016년 11월 말국가기관의 비리와 부패무능한 지도자와 정치 권력자들의 민낯이 드러나고국민들은 분노한다여기 주모자가 여성대통령과 여성이 있다고 해서 이들을 단순 옹호하고비판하는 사람에 대해 불만을 느끼는 자칭 페미니즘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현재 대통령은 정치적 역량으로 선택받은 것이 아니라 독재정권 시절 아버지의 이름으로 선택되었다저번 대선 때 사무실에서 다른 부서 상급자와 말다툼이 있었다대통령이 되는 이유에서 여자도 대통령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여자가 대통령을 하지 마란 법은 없다.

 

단지 그 자질과 역량을 제대로 간파하여 선택해야 한다그 상급자는 여성이라 대통령이 되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의 아버지 딸이란 사실에서 선택한 것이다페미니즘은 원래 진보적인 가치관이고진보적이지 않은 사람이 여자가 대통령을 해야 되라는 말에서 상당한 논리부조리가 있다그런 말을 이제는 메갈리아 워마드 진영에서 나온다국가를 문란하게 만든 자들을 두고 대단한 여자라고 말하는 이들의 모습에서 상식적인 일반여성이라면 받아들일 수 있는가?

 

폭력적인 남성성을 토대로 이루어진 대통령이 무슨 여성을 위한 대통령인가 말이다이성적 논리와 판단 없이 그저 광기와 독설로만 되돌아 올 뿐이다그리고 내가 진짜 걱정하고 있는 것은 이 현상에 대해 제대로 관찰하지 않은 지식인들의 오류다자신이 진보적인 지식인이라면 맨 처음 생각해야 인권이다타인의 인권(그것도 어린이노인장애인지하철 스크린도어 사망사고나 강남역 살인사건 유가족 등)을 무시하고 조롱하는 세력에 대해 단지 페미니즘이란 이데올로기만 내세운 것에 동조했다면지식인이 가져야할 최소한의 마지노선을 버린 것과 같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6-11-27 22: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1-27 23: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1-28 08: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1-28 09: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대통령의 말하기 - 노무현 대통령에게 배우는 설득과 소통의 법칙
윤태영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6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번과 저번 정권을 지나오면서 한국사회는 이상한 조류로 흘러들어간다. 대한민국 헌법에서 우리나라는 민주 공화국이어야 하는데, 만주 참주국으로 가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우려감이 든다. 사회적 변화와 정치권 파동에서 현실사회를 살아가는 국민들의 생활력이 계속 감퇴하고 있다. 정치에 대해 논하자면, 한국사회 특히 기성세대나 어른들은 정치학 9단이다. 정치학이나 철학, 기본적인 사회학 전공자도 아니요, 심지어 그런 책도 보지도 않았는데 사람들만 모이면 정치이야기이다. 정치에 대한 이야기에서 어디서 들어본 이야기, TV에서 카드라 하는 이야기들이 모이고 모여 우스꽝스러운 형태를 야기한다.

 

한국 정치사회적 이슈에서 다룰 것들이 너무 많으나, 최근 가장 위험요소가 된 것은 지진이다. 지진이 한국에서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믿었지만, 경주에서 6.0 밑까지 흔들리는 다소 강한 지진이 일어났다. 지진이 발생하면서 사람들이 원인을 찾아 나선다. 지진이 일어나는 원인 은 우선 지구과학에서 찾아야 한다. 과거 주술사들이 피지배계층에게 충성심이나 신앙심의 부족이 원인이 아니라 지구 기상이변에 대한 문제에서 찾아야 한다. 그리고 지구 지표면 아래 맨틀이란 마그마가 움직이는 곳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지진이 인위적으로 일어나는 것은 강한 폭탄이 폭발할 때이다. 그러나 화산활동에 의한 지진보다 위력이 약하다. 아는 동생이 추석 때 친척집에 가니 경주에서 일어난 지진을 두고 북한 핵실험이라고 말하던 분이 있었다고 한다. 지구과학 전공자까지는 아니나, 지구과학을 고교시절 이과전공으로 선택하고, 환경공학을 전공한 입장에서 본다면 웃음만 흘러나온다. 그러나 현실에서 사회적 이슈에서 과학적 근거를 두고, 정확한 사실성을 두고 이야기할 게 오히려 반대로 감정적으로 혹은 의구심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참으로 많다.

 

일반 국민들이 이런 이야기를 믿고, 혹은 이런 이야기를 믿도록 뒤에서 부채질을 하는 사람도 있다고 하니, 문제의 해결보단 오히려 문제의 회피를 노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문제가 발생하면 우선 대다수 국민들은 정부부처의 정보를 기대한다. 일반 국민들이 기상을 관측하거나 지진정보를 판단할 수 있는 지적 능력과 기술적 도구가 없다. 공공성으로써 기술력과 장비를 보유한 정부기관의 정보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만약 정부부처가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거나 또는 대응하지 못하면 국민들은 불신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이들 기관을 책임을 지어야 하는 정부수장 대통령이 어떤 말을 하는가에서 많은 희비가 엇갈린다. 국가는 정부로 이루어진 게 아니다. 국회, 정부, 법원에서 입법, 행정, 사법으로 구분된다. 그러나 국가기관 중에서 가장 큰 권력을 가진 자는 대통령이다. 정부기관 수장이 각 정부부처를 관리하지 국회에서 정부부처를 운영하지 않는다. 대통령의 말 한 마디는 국민들의 생활과 밀접한 행정으로 이어지고, 특히 재난의 경우는 생명과 직결된다. 대통령의 판단력이 많은 것들을 좌우하고 있는 것이다.

 

판단력이란 것은 생각하는 것이다. 생각은 자신의 사고세계에 존재하지 타인의 관점에서 알 수 없다. 이때 판단력을 전달하는 방법은 말과 글이다. 글은 적는데 시간이 걸리고, 많은 사람들이 계속 정보를 주고받기에 적정하지 못하다. 결국 실시간적으로 대응하려면 글이 아닌 말로써 사람들과 대화해야 하고, 그 상황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정보조차 말로 들어야 한다. 말을 한다는 것은인간에게 늘 있는 일이지만,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다. 말 한 마디가 진짜 여러 사람의 목숨이 오고가는 일은 역사적으로 흔한 일이다.

 

말을 하는 것은 자신의 생각을 남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제대로 전달해야 하는 게 옳은 것인가? 정치사회적으로 대통령은 늘 많은 일들을 마주친다. 오랜 검토 후 판단을 내리는 사무도 있지만, 실시간으로 처리할 일도 많다. 급박한 재난이나 혹은 갑자기 조성된 회의나 만남, 상대편이 날리는 예측불허의 질문 역시 그렇다. 여기에 얼마나 잘 대응을 하는가? 여기에 얼마나 상대방을 이해하는가에서 발언자에 대한 평가가 내려진다.

 

<대통령의 말하기>, 참여정부시절 청와대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비서로 활동하던 그가 이번에 노무현 대통령이 연설, 대화, 회의한 내용을 모아 책으로 내었다. 정권에 따라 대통령 및 정부기관의 국무위원들이 잘 한 업무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것들도 많다. 그때는 좋아도 뒤에 가서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 당시에는 문제라고 여긴 것이 뒤에 가서 다시 재조명 받는 일들이 허다하다. 노무현이란 이름은 어떻게 볼지는 관찰한 사람들의 몫일 것이다. 단지 그가 비교할 부분은 역대 대통령과 비교하여 대화와 토론을 중시했다는 점이다. 대화와 토론은 상대방을 이기기 위해 꺾으려 하는 것이 아니다.

 

내 생각을 토대로 상대방의 의견을 들은 후 더 나은 결과를 만들어가기 위한 하나의 방법론이다. 하지만 한국은 토론문화가 엉망이다. 평소 자신보다 어리거나 직급이 아래에 있는 사람의 말이 더 좋을 때도 받아들이지 않거나, 자신이 답을 틀리거나 몰라도 그냥 그대로 가는 경우가 많다. 대화는 결국 소통이고, 소통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과정이다. 말을 하면서 상대방에게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려면 상대방에게 잘 이해되거나 공감되어야 한다.

 

진보진영의 문제점은 아마 이런 부분일 것이다. 한국의 보수는 논리와 이성이 없지만 감수성과 감정을 내세우고, 진보는 논리와 이성만 내세우는 것이다. 최근 진보진영은 논리와 이성조차 상실(아니 왜곡)하고, 감수성만 잔득 내세우는 산파 극이 되어버렸다. 자칭 엘리트나 지식인들의 글에서 보이는 내용은 잘난 문구나 용어만 들어가 있다. 대중을 상대로 하면서 대중을 호응을 얻지 못하면 정치적 기반이 붕괴된다. 평소 나처럼 그냥 자신의 글쓰기를 하는 사람이 아닌 이상, 한국사회에 살아가는 국민들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으면 그 말은 살아있는 게 아니라 죽은 말이 되어버린다.

 

그래서 <대통령의 말하기>에서는 노무현이란 정치인이 대통령이 될 때와 집무할 때, 그리고 퇴임 후의 모습을 담았다. 대화에서 나오는 말이란, 그가 살아온 인생과 그가 가지고 있는 인생철학에서 나온다. 대화를 하는 것은 상대에 대한 배려와 입장이 필요하다. 단지 말의 방식에서 거창하기보단 담백하고 소박하게, 어려운 문구보단 쉬운 단어, 강렬한 의미를 전달할 때는 반복적인 배치가 인상적이다. 이런 대화법은 반드시 대통령만이 아니다. 2015년 가을 나는 학술세미나에서 한국의 신화와 문화콘텐츠 관계성에 대해 발표한 적이 있었다. 발표를 듣는 청중들이 만일 국내 교수나 연구자, 혹은 학생들이면 몰라도 외국인들이 많았다.

 

외국인들은 한국의 문화를 잘 모르고, 그 국가나 민족의 문화적 정체성인 신화에 대한 부분에서 한국 신화는 더욱 낯선 존재다. 그때 나는 프레젠테이션을 하면서 대본을 만들지도 않았고, 내가 작성한 논문조차 보지 않았다. 오로지 화면에 올라간 자료를 보았으며, 대사는 머릿속으로 암기하여 발표했다. 이때 착안점은 외국인이다 점이고,한국문화가 그동안 서구문화에 의해 가려진 것과 포스트모더니즘이란 탈근대 내지 탈서구화를 거치면서 한국 역시 한국 전통문화에 대한 연구가 다시 시작했다는 점을 밝혔다.

 

공통적인 영역에서 한 부분으로 선택하여, 문화적 가치와 형태, 그리고 흐름전개 과정으로 설명했다. 생각해보면 계속 이런 것들에 대한 지적연구와 관련 문화콘텐츠 작품에 대한 리뷰와 글쓰기가 바탕이 되었기에 가능했다. 말을 하면서 상대방이 이해할 수 있으려면 나 역시 제대로 완벽하게 이해해야 했다. 외국인들 특히 서구문화권 학자들이 동양에서 한국이란 나라가 어떤 신화를 가지고 있는지, 어떤 문화를 가지고 있는지 이야기한다는 것은 그들이 전혀 알지 못한 세계를 말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그들은 한국식 문화에 적응되지 않기에, 내가 발제를 하고, 질의를 받을 때 한국의 지식이 아닌 서구의 지식으로 응대해야 했다. 물론 영어까지 소화할 수 없더라도 기본적으로 그들이 보는 시각은 분명 다른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말을 한다는 것은 생각을 나만이 아니라 이 공간에서 공유해야 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일방적인 대화는 타인을 지루하게 만들 수 있기에 어떻게 하면 흥미를 끌고 부드럽게 넘어갈 수 있는가? 위트와 유머, 그것을 만들어가는 재치는 쉽게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삶이란 오랫동안 정제된 시간의 축척이다. 그가 살아온 인생은 그의 얼굴에도 그의 표정에도 그의 말과 글에도 드러난다. <대통령의 말하기>에서 비서관 윤태영은 노무현의 말을 정리할 수 있고 그 방법론을 제시할 수 있어도, 그렇게 말을 할 수 없다. 인간에게 주어진 삶은 모두 같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같은 말을 할 수 없더라도 말 그 자체에 담긴 의미에 대해서는 모두가 공감할 수 있다.

 

공감은 자신과 타인 사이에 거짓 없이 솔직한 맛이 필요하다. ()이란 한자어를 보면 사람 인()과 말씀언()자가 결합되어 있다. 사람이 말하는 것이 믿을 수 있다는 점이다. 말을 한다는 것은 말을 듣는 사람에게 믿음을 준다는 의미이다. 물론 그 말은 달콤할 수만은 없으며, 때로는 잔혹할 수도 있다. 상대에게 말을 할 때 그 어느 것보다 진실성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단지 그 진실이 담긴 말을 어떻게 상대에게 접근할지는 그것은 개인의 역량에 달려있는 것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6-09-23 18: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만화애니비평 2016-09-26 14:45   좋아요 1 | URL
슝~~~
 
과학 수다 1 : 뇌 과학에서 암흑 에너지까지 - 누구나 듣고 싶고 말하고 싶은 8가지 첨단 과학 이야기 과학 수다 1
이명현.김상욱.강양구 지음 / 사이언스북스 / 2015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담론에 대한 부분에서 한국은 이른바 spectacle에 의해 결정지어 진다. 그 말의 뜻은 어느 미디어나 혹은 다른 유행에 의해 흥밋거리가 끊임없이 변경된다. 자신이 관심을 두는 게 아니라 누군가 하니까? 그게 대세이니까? 라는 질문과 대답이 계속 이어진다. 물론 평소 관심이 없다가 새로운 분야에 눈을 뜨고 찾아가는 것은 좋은 일이라 여긴다. 인간은 누구나 호기심을 가지고 있고, 자신이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지식을 쌓고 인격을 배양한다. 그런 것들을 유지하지 못하면 지금에 비해 더 좋은 인간으로 성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번에 읽은 <과학수다 1>, 과학에 대한 담론은 솔직히 잘 볼 수 없다. 평소 TV를 즐겨 찾지 않기 때문에 요새 무엇이 대세인지 유행인지에 대해 관심을 가질 수 없다. 기껏 내가 TV를 보면 즐겨 보는 장르는 논픽션이나 영화 정도이다. 제일 좋아하는 프로그램은 내셔널지오그래픽이다. 다양한 종족과 문화, 자연의 다양한 모습과 야생의 세계를 알아가는 것은 인간이 사는 우리 세계란 매우 좁은 곳이기도 하고, 때로는 매우 넓은 곳이다. 하지만 당장 자신의 주변을 돌아보면 세상은 넓게 보이면서 좁다는 것을 느낀다.

 

아는 만큼 보이고, 보는 것에 대해 더 노력한 만큼 알아가는 것이다. 지식은 무조건 아는 것만으로 해결되는 게 아니다. 어제 우리가 알고 있던 것이 이제는 거짓 내지 오류로 결정 나는 일들이 다분하다. 책 제목이 <과학수다>인 것처럼, 과학의 시작은 어디인가? 현대사회는 이른바 지성과 이성의 사회로 구축해 왔다. 인문분야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이 도래했지만, 과학에서 포스트모더니즘 개념은 그렇게 인정될 수는 없다. 과학이란 것은 증명되어야 하고, 귀납적인 검토가 반드시 필요하다.

 

연역적 검토도 가능하겠지만, 그것이 증명되지 않은 이야기라면 영원한 헛소리에 불과하다. 지동설을 주장하던 이들은 교회권력에 의해 침묵을 강요당했다. 그들이 인정받는 날까지 많은 시간이 흘렀고, 이제야 교회라는 종교사회에서도 과학의 검토를 인정받았다. 과학이란 것은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검토될 수밖에 없는데, 인간은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존재는 아니다. 오히려 감정적이고 무의식적인 요소에 더 많은 결정권을 내려주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과학이란 학문이 시작된 것은 어디인가?

 

현재 우리가 과학과 철학을 대조해보면 서로 다른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원래 과학과 철학은 하나였다. 책에서 탈레스가 과학의 시작점이라 하지만, 탈레스는 과학자 이전에 수학자와 철학자까지 겸비했다. 고대 그리스 유명한 철학자인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존재했다. 플라톤은 형이상학적인 요소를 추구하고, 유물론적인 가치를 배제한 인간이다. 그가 스승 소크라테스를 책에 등장시킬 때, 과학적인 지식이 등장한다. 플라톤은 기하학을 모르는 이들을 제자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말이 있다.

 

기학학은 수학에서도 중요한 학문이고, 과학에서도 중요하다. 세상의 흐름은 직선이나 곡선처럼 단순하게 이어지지 않는다. 복잡한 형성으로 계속 변화한다. 기하학적인 라인은 과학적으로 중요할 수밖에 없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유명한 서적 중에 하나가 <형이상학(Meta-Physics)>이 있다. 형이상학은 과학과 물리학을 의미하는 PhysicsMeta라는 어두를 붙인다. 즉 물리학 너머의 존재하는 눈에 보이지 않은 그 무언가를 말이다. 형이상학을 읽으면 인간의 혈액과 남녀의 존재성에 대해 등장한다. 물론 지금 생각하면 약간 이상하고 이해할 수 없는 개념이 등장하지만, 당시 이 책은 철학, 과학, 의학 등 다양한 학문을 내재하고 있는 것이다.

 

형이상학에서 세포와 혈액의 구조를 관찰하지 못하기에 형이상학이 되었지만, 현대과학 특히 생물학에서는 세포와 혈액은 과학적으로 정리가 완료되었다. 당시에 현미경이 존재하지 않기에 눈에 보이지 않은 인간의 세부구조를 알 수 없었다. 생물학에서 생리학이나 해부학의 지식이 없었기에 인간 그 자체의 연구는 과학의 진보가 덜 된 점에서 한계점이 있었다. 그러나 과학이 필요한 이유는 인간의 형태, 세상의 형태를 알아볼 필요가 있었다. 과학적인 담론은 이미 거기서 부터다. 우리 인간이 현대문명의 혜택을 얻으면서 과학은 빠질 수 없는 서사이다.

 

최근 일본 애니메이션을 보면 전기나 전파 관련 과학자를 찾아가는 작품을 본다. , 에디슨, 헤르츠 등등의 과학자를 보면 그들의 발명이 없다면 우리는 어둠속에서 밤을 보냈을 것이다. 문명에 대해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인간 생활 속에 밤이란 시간을 없애주고, 어떤 산물이나 재화에 부여되는 인간의 노동력을 줄이는 양식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과학이 일상생활에 밀접하게 연결되면 그것은 과학이란 학문을 넘어 문화생활이란 영역으로 넘어간다. 사람들이 정전이 나면, 두꺼비집의 퓨즈가 나간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전기가 끊기는 이유는 제어장치가 필요이상의 전압이 오거나, 전봇대의 전기송신장치의 이상에 의해서도 가능하다. 단지 우리가 느끼는 것은 불편할 뿐이지 그 근본은 모른다.

 

과학에 대한 담론이 왜 사람들이 알 수 없는 것일까? 철학이나 인문학은 우리가 일상생활에 자주 겪는 일이 아니다. 사람이 자연재해가 아닌 사고로 죽었다면 우리는 그냥 사람이 죽었다고 여길 것이다. 하지만 철학에서 윤리학적인 개념을 생각하면 다르게 생각할 수 있다. 죽은 자의 입장과 그 사람의 생활환경과 주변 조건들, 그런 사고를 일으킨 사회적 구조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점이다. 일반적인 현대인들은 타인의 고통에 대해 무관심하다. 나와 상관없기를 바라며, 스스로 기만적인 의지로서 현실 문제를 외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학은 일상생활 그 자체이다. 달리는 출근버스에서 차가 움직이는 원리, 사무실에서 사용하는 인터넷의 원리, 요리하는데 필요한 도시가스의 출처와 제조방식은 대부분 모른다. 그저 이용하는 수단에 불과하다. <과학수다>에서는 이런 과학적인 지식을 지식인(내가 볼 때 엘리트들이다)들이 모여 서로 이야기를 나눈다. 과학이 왜 알아야 하는가? 과학이 우리 생활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솔직한 말로 지구에서 발사한 우주선에서 사람이 장기간 생활한다 하여 우리 일상생활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이 문화적인 요소와 앞으로의 취업노선과 연결되면 말이 다르다.

 

미국 영화 중에서 재난이나 재앙이 소재로 한 영화가 많은데, 그 영화의 특성을 잘 살리기 위해 할리우드 제작진들은 NASA에 조언을 받는다. <인터스텔라>같은 영화 역시 우주의 원리나 새로운 개념을 찾기 위해 항상 NASA의 협조를 받는다. 재난영화에서 지진, 해일, 토네이도에서 기상학, 지질학, 해양물리학을 모르고선 개연성이 연결되지 않는다. 최근 일본 애니메이션은 시간여행에 대한 작품이 나오는데, 작품에서 SERN이란 기관이 나온다. 그런다 <과학수다>에서 그 기관이 유럽에 실존하는 연구기관이란 사실에 놀라울 뿐이다. SF 내지 재난영화에서 과학기술이 뒷받침되어 상영된 지 이미 오래 되었다.

 

하다못해 형이상학적인 철학적 요소도 연관된다. 사실 철학에서 특히 근현대 형이상학에서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같은 경우, 인간의 존재를 시간적 존재라고 명칭하고, 인간과 세상의 가능성을 새롭게 확장하는데 필수적인 요건이 되었다. 우리 인간이 사는 세계는 이른바 비가역적 세계이다. 인간이 과거로 날아갈 수 없고, 미래로 더 빨리 날아갈 수 없다. 하지만 시간에 대한 철학적 사고와 거기에 호응하는 과학적 상상력이 어울려져 다양한 이론이 나온다. 흔히 오타쿠 계열에서 중2병에 걸린 친구들이 슈뢰딩거의 고양이란 용어를 자주 사용한다.

 

가능성이란 처음부터 정해진 게 아니라 일단 열어봐야 안다. 모든 게 0에서 시작되는 게 아니라 설사 0.001%조차도 가능성은 있는 것이다. 인간은 가능성을 향하여 계속 과학기술을 발전해온 것이다. 그러나 과학은 이성적 판단을 중시하지 그 결과성에 대해서는 무척 어려운 맹점이 있다. 과학은 실험과 결과를 통해 자신의 이론과 가설을 맞추어 나간다. 책에서 80% 관측이 나오면 결과로 볼 수 있는 점에서 그 결과가 나오는 순간 어떤 모습으로 나오는 것인지 중요하다.

 

사람을 죽이거나 생명을 파괴하거나 지구를 오염시킨 것이라면 그것은 과학의 진보성이야말로 오히려 인류의 역사를 후퇴시키는 것이다. <과학수다>에서 복제인간의 문제도 대두하고, 특히 유전자 이식과 관련하여 정자와 달리 난자를 구하기가 어렵고, 보관하는 방법도 어렵기에 20대 젊은 여성의 배란일에 맞추어 구해야 한다. 그러나 법적으로 자국에서 구하기 어렵다면 외국의 가난한 여성들의 난소를 돈으로 구매할 수밖에 없다. 실험의 목적에서 윤리성이 부재된다면 그 과학의 결과가 과연 옳은 길을 제시할 수 있는 것일까?

 

한국에서 과학적인 문제가 바로 핵에너지 발전소이다. 개인적으로 핵에 대해 배웠다면 핵에너지 개발과 이용보단 환경과학적인 방법으로 관찰했다. 초반에는 핵에너지가 청정에너지로 대체될 수 있다고 설명한다. 대부분 전기에너지가 발전소를 통해 제공되나, 수력발전은 10%도 되지 못하고 대부분 화력에 의해 전달된다. 석탄과 석유를 연소하여 얻는 에너지는 처음에 대기오염을 비롯하여 산성비, 산성비로 인한 토양오염과 수질오염까지 이어진다. 게다가 대기오염물질이 인체에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다이옥신이나 퓨란 같은 다단계 결합 화학물질 역시 심각한 문제를 일으킨다.

 

최근 일본 후쿠시마 핵발전소의 사고나, 한국에서 경주에서 발생된 5.9의 지진현상은 한국 역시 일본처럼 핵사고의 안전지대가 아니라는 점을 보여줬다. 경주 인근에 위치한 울진, 영덕, 기장 같은 경우 핵사고가 일어날 경우 동해남부 쪽의 거주민들이 심각한 타격을 받고 환경오염까지 더해진다. 핵발전소 건설은 전문기관만 가능하고, 거기다가 핵발전에 필요한 운영기술과 자재 역시 특정 전문기관에만 가능한 업무다. 그것은 독점과 상업적 이윤이 연계되어 있다. 우리가 일상에 일어나는 많은 일들에서 송전탑이나 핵발전소 건설은 단순히 일어나는 문제가 아니라 누군가의 정치적 경제적 이윤이 깊게 묶인 점이다.

 

<과학수다>에서 제시한 것처럼 우리가 이런 사안을 두고 뭔가 정치적인 발언을 하거나 사회적인 담론을 하려면 뭔가 지식이 필요하다. 과학적 지식은 철학이나 인문학과 다르게 복잡한 답을 말하지 않는다. 과학 역시 어느 영역에 대해 일방통행적인 답을 주는 게 아니다. 단지 서울서 부산으로 갈 때 철도, 고속국도, 항공기 중에서 고를 수 있는 방안을 준다. 그렇지만 결론적으로 해결해야할 모든 것에 대한 대안은 이미 정해진 것이다. 단지 그것을 수행할 수 있는 인력과 자본력의 문제이다. 그렇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과학적 지식이다. 과학지식이 없다면 우주나 지구재난 같은 영화, 혹은 시간여행 같은 유쾌한 이야기도 풀어갈 수 없다.

 

아니라면 추석연휴를 지진으로 고민하는 경주시민들의 마음 속 깊이 의문을 풀어가는 것도 과학적 지식이다. 하지만 과학지식은 그렇게 쉬운 게 아니다. 상세히 알아가는 것은 그 학문을 연구하는 사람이 아니면 완벽히 이해하기 힘들다. 단지 이런 것들이 있구나! 하는 정도라면 충분히 <과학수다>에서 찾아볼 수 있다. 물론 이 책은 쉬운 책은 아니다. 공대출신인 나라도 접근하기 힘들 과학이론과 실험, 결과 등이 나온다. 생각해보면 뭔가 아쉬운 기분이 든다. 한국처럼 국토가 넓지 않고, 인구수에 비해 직업의 선택권이 적으며, 지하자원이 없는 국가에선 오로지 인간의 능력에 의해 좌우된다.

 

인간이 가진 과학기술력, 혹은 인간이 만들 수 있는 예술과 문화적 생산력만이 새로운 산업과 미래를 창출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인문학적 소양보단 돈을 먼저 요구하고, 과학적 기술보단 정해진 기술력에 의존하는 레드오션에 치중한다. 새로운 분야에 대한 도전은 새로운 인력을 요구하고, 새로운 영역을 창출하려면 기존의 인력에 의한 인프라 조성이 우선되는 효과가 있다. 과학이란 단어가 <과학수다>에서 아니라 우리 일상에서 다양한 사람에게 말할 수 있어야 하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좋은 책이기도 하나 나쁜 책이기도 하다.

 

우리는 모두 과학전공이나 공대전공자도 아니다. 더구나 여기 등장하는 과학자들은 명문대학에서 엘리트코스를 거친 사람이다. 대중에 의한 과학적 사고가 일반적인 현상이 된다는 것은 너무 막연한 것이 아닐까? <과학수다>란 책은 누군가 관심을 가지거나 우연한 기회가 되지 않으면 결코 접할 수 없을 책이란 생각이 든다. 물론 작은 시작은 그런 것이지만 작은 시작이 모든 시작이 될 수 있지만, 안 될 수 있는 점이 높다는 게 아쉬울 뿐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마천 2016-09-18 2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길고도 풍부한 과학적 상식을 키워주는 리뷰네요. 감사 ^^

만화애니비평 2016-09-19 08:49   좋아요 0 | URL
추석연휴 잘 보냈나요?
칭찬의 덧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