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데카르트......

Erszébet Baerveldt - René Descartes, Landgoed Endegeest Oegstgeest By Biccie - Own work, CC BY-SA 3.0, 위키미디어커먼즈


데카르트 - Daum 백과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b04d4073b





악령은 아무리 교활해도 내가 실존하지 않았다면, 나를 기만할 수 없었을 것이다. 여기서 나는 신체를 갖지 않을 수도 있는데, 신체는 환상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유는 다르다. "내가 모든 것이 거짓이라고 생각하기를 원했던 동안에도 그렇게 생각했던 나는 필연적으로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이러한 진리는 너무 강하고 확실하여 회의주의자들이 아무리 허황된 가정으로 뒤집으려해도 뒤집지 못한다. 따라서 나는 이 명제를 그토록 찾아 헤매던 철학의 제일 원리로서 주저 없이 수용하겠다."

데카르트 이후 철학자들은 대부분 인식론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는데, 이러한 경향은 대체로 데카르트에서 비롯되었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라는 주장은 물질보다 정신을, 타인의 정신보다 나의 정신을(나에 대해) 더 확실한 존재로 만들었다.

데카르트는 ‘생각thinking’을 아주 넓은 의미로 사용한다. 생각은 의심하고 이해하고 개념을 적용하고 긍정하거나 부정하고 의지하고 상상하고 느끼는 정신 활동을 가리킨다. 이때 꿈속에 나타난 느낌도 생각을 표현하는 한 형식이다. 사유는 정신의 본질이므로, 정신은 언제나 생각하며 깊은 잠을 잘 때도 생각한다.

"나는 생각한다"라는 명제는 데카르트의 궁극적 전제다. 여기서 ‘나’라는 말은 논리적 차원에서 보면 잘못 사용된 예다. 그러니까 그는 "나는 생각한다"가 아니라 "생각들이 있다"라는 형식으로 자신의 궁극적 전제를 진술해야 했다. ‘나’라는 말은 문법적으로 편리하게 쓰지만, 이미 알려지거나 주어진 것을 기술하지 않는다.

『성찰』은 신체가 목이 마를 때 왜 정신이 슬픔을 느끼는지 논의하는 데 꽤 많은 부분을 할애한다. 데카르트의 정확한 대답은 신체와 정신이 두 시계처럼 신체가 ‘목이 마름’을 가리킬 때 정신은 ‘슬픔’을 가리키도록 맞추어져 있다는 것이었다.

데카르트의 철학은 물질계 전반에 걸친 이론의 측면에서 엄격하게 결정론적 체계다.

따라서 데카르트주의자들은 자유의지에 관한 난점에 부딪친다. 데카르트의 인식론보다 데카르트의 과학에 더 많이 주목했던 사람들에게 동물이 자동 기계라는 이론을 확장하는 일은 별로 어렵지 않았다. 왜 인간에 대해 똑같이 말하지 않고, 결정론적 체계를 일관된 유물론으로 단순하게 만들지 않는가? 이러한 확장은 18세기에 실제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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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elbert von Chamisso: Peter Schlemihl By George Cruikshank 1823, Public Domain, 위키미디어 커먼즈


「안나는 모스끄바 여행 이후로 완전히 딴사람이 되었어요. 뭔가 이상해요.」 안나의 친구가 말했다.

「가장 중대한 변화는 알렉세이 브론스끼라는 그림자를 달고 돌아왔다는 거죠.」 공사 부인이 말했다.

「그게 뭐 어때서요? 그림 형제의 동화 중에 그런 우화가 있잖아요. 그림자가 없는 사람, 그림자를 빼앗긴 사람 말이에요.* 그건 그 사람이 저지른 잘못에 대한 벌이었죠. 그게 어째서 벌인지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지만요. 어쨌든 여자로서 그림자가 없으면 그리 유쾌하지 않죠.」

「그래요, 하지만 그림자가 있는 여자는 보통 결말이 좋지 않더군요.」 안나의 친구가 말했다. - 제2부의 6

* 그림자를 잃어버린 사람에 관한 동화는 독일 작가 아델베르트 폰 샤미소의 「페터 슐레밀의 기이한 이야기」이다. 그림 형제의 동화 중에는 그림자가 없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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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크 디네센(카렌 블릭센) 소설집 '일곱 개의 고딕 이야기' 수록작 '꿈꾸는 사람들' 497쪽. 샤미소의 '그림자를 판 사나이(페터 슐레밀)'를 연상시키는 내용.


[네이버 지식백과] 샤미소 (독일문학사, 1989. 4. 1., 프란츠 마르티니, 황현수)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050904&cid=60603&categoryId=60603


독일문학사(지식을만드는지식)의 'IX. 낭만주의' 편에 '아델베르트 폰 샤미소 ≪페터 슐레밀의 기이한 이야기≫ '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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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fore the Wedding, 1890 - Konstantin Makovsky - WikiArt.org


아래 옮긴 글에 안나가 어떻게 결혼에 이르렀는지 과정이 나온다.


그가 현 지사로 재직 중일 때, 현의 부유한 귀부인인 안나의 숙모가 이미 젊은 나이는 아니었지만 현 지사로서는 그래도 젊은 편이었던 그에게 자기 조카딸과의 만남을 주선해 주었고, 청혼을 하든지 아니면 그 도시를 떠나든지 양단간에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는 입장으로 그를 몰아넣었다.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오랫동안 망설였다. 긍정적인 근거만큼 부정적인 근거들이 있었으며, 의심스러운 경우에는 삼가야 한다는 자신의 원칙을 위배하도록 강요할 만한 결정적인 요인도 없었다. 그러나 안나의 숙모는 지인을 통해서 그가 이미 처녀를 농락했으니 명예의 의무에 따라 청혼을 해야 한다고 자꾸만 암시를 불어넣었다. 결국 그는 청혼을 했고, 신부이자 아내에게 할 수 있는 한 모든 감정을 바쳤다……. - 제5부의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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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4-05-14 2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개인적으로 알렉산드로의 처신이 정말 본받을만하다고 느꼈습니다. 대놓고 바람피운 자기 아내에 대해 이혼을 요구하는 여자에 대해 그가 보여주는 인내심과 상대에 대한 존중은 말할 수 없는 품격이 느껴진다랄까요. 요즘 안나 까레리나를 다시읽으며 알렉산드로의 처신이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저라면 절대 용서할 수 없을 거 같아요. 모든 불륜 아내를 둔 남자의 윤리적 교본 같습니다. 그 고뇌까지여..
 

'여자를 위해 대신 생각해줄 필요는 없다'(이라영 지음)로부터



'버닝'을 해석하는 숨은 코드 5 https://www.joongang.co.kr/article/22658447



버닝burning. ‘불타는’, ‘타오르는’ 등의 의미인 이 버닝은 무언가를 불태워 없애버리는 어떤 열정이며 힘이다. 버닝은 소멸되는 대상과 태우는 힘 모두를 암시한다. 생성과 파괴 모두를 가능하게 만드는 이 버닝은 많은 의미를 품은 은유로 활용된다. 그렇기에 젊은이에 대한 이야기를 만들었다는 이창동 감독의 영화 제목도 ‘버닝’이다. 이 영화에서 모호하게 사라지는 젊음은 여성이다. 여성은 야망을 불태우는 젊음의 주체가 아니다. 그 젊음을 타오르게 만드는 불씨로 나타나 결국 불태워지는 대상이다. 젊음을 다루고, 시사를 다루는 등 모든 사회 현안에서 여성은 그야말로 ‘버닝’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게 웃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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