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 세상 - 카를로 로벨리의 기묘하고 아름다운 양자 물리학
카를로 로벨리 지음, 김정훈 옮김, 이중원 감수 / 쌤앤파커스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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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과학 관련으로 어렵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가볍지 않고, 문학적인 아름다움도 함께 느낄 수 있는 책이 없냐고 묻는다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이탈리아의 이론 물리학자 카를로 로벨리의 책을 권하겠다. 그는 주로 시간과 양자 이론에 관련한 책들을 집필했고 그의 저작 대부분이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됐다. 그렇다고 그가 대중의 취향에 영합하는 데에만 집중하고 자기 연구에 소흘한 사람이라고 착각하면 곤란하다. 파인만은 "양자역학을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했지만 카를로 로벨리는 아마 양자역학 연구의 최전선에 서서 그것을 가장 깊이 넓게 이해한 학자가 아닌가 한다.


스물세 살, 하이델베르크의 새벽 세 시의 발견으로 시작하는 이야기는 에르빈 슈뢰딩거의 확률의 이야기로 확장되어 세계의 입자성, 양자의 중첩을 지나 결국 불확정성으로 귀결된다. 관찰하는 주체에 따라 달라지는 실재는 결국 실재의 존재 자체를 의심하게 한다. 고전 물리학과 실재의 확실성은 해체되고 결국 우리 눈앞에 남는 것은 '관계의 맥락'이다. 의심하고 회의하고 삭제하고 다시 수정하고 재정립하고 또 해체하는 과정이 삶이듯이 카를로 로벨리의 양자론 또한 그러하다. 양자역학이 삶의 역학을 재현하는 듯한 환각이 드는 것은 결국 우리가 탐구하고 희구하는 그 어떤 결정적인 사물의 실재가 부재하는 그곳에 남는 나와 너의 관계의 매듭이 묶이고 풀어지는 현장이 생명이자 삶의 터전이기 때문일 것이다. 로벨리가 2,3 세기의 나가르주나를 데리고 오고 불교의 공사상을 대입한 것은 어쩌면 이런 양자역학의 당연한 결론일지도 모른다. 


얘야, 너 몹시 심란한 얼굴이구나,

당황했나 보구나. 자, 기울 차려라.

여흥은 이제 끝났어. 여기 있는 배우들은

이미 말했듯, 모두 요정이었고

공기 속으로, 옅은 공기 속으로 녹아 사라지지.

그리고 주춧돌도 없이 지어진 환영처런

구름 걸린 탑도, 화려한 궁전도

장엄한 사원도 거대한 지구 그 자체도

그래, 그 안의 모든 것도 녹아내려

이 실체 없는 광경이 사라지듯, 

구름 한 조각 남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꿈을 만드는 재료, 우리 짧은 인생은

잠으로 끝맺는 것.


셰익스피어의 마지막 희곡 <템페스트> 4막 1장의 대사를 인용하며 카를로 로벨리의 양자역학의 대여정은 막을 내린다. 결국 실재를 찾아, 나를 찾아 헤매는 그 긴 여로는 우리가 옳다고 믿는 것과 내가 그 무언가를 할 수 있고 나라는 존재가 홀로 고고하게 우뚝 설 수 있다는 오만의 벽을 해체하고 무로 돌아가는 것이다. 다만 남는 것은 서로의 얽힘과 서로를 반영하며 확인했던 이미지의 환각일 뿐이다. 양자역학을 읽으며 무너지는 확신과 진리의 해체가 무의미하게만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이런 서로의 관계의 맥락에 대한 재점화 때문일 것이다. 


허무하지만 그 허무로 뻗은 길에 기꺼이 오르게 만드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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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05 00: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12-05 16: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무도 죽음을 모르지만
김수이 지음 / 유어마인드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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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관한 책은 많았지만, 이런 책은 처음이었다. 저자가 얘기하는 죽음은 실무적인데 그 어떤 책보다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만드는 시간을 주는 이야기. 적절한 거리감과 정갈한 문장이 역설적으로 울림이 더 크다. 내 경험을 어떻게 확장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모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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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가지는 일에 흔히 연상되는 이미지는 귀여운 아기다. 임신하기 이전에 내가 아픈 아이를 낳을 수도 있다는 상상을 하거나 극심한 사춘기 반항아를 떠올리지는 않을 것이다. 비단 임신, 출산뿐만은 아니다. 완벽한 인생의 당연히 그래야만 한다는 이미지는 역설적으로 현재 내가 겪는 일들을 비정상적인 것이나, 과도기적인 측면으로만 폄하하게 한다. 이 어려움만 지나가면, 다음에는 완벽한 이상향의 시기가 올 거야, 와야 마땅해 같은 생각. SNS에 수시로 업데이트되는 타인들의 찰나의 이미지는 행복한 장면들 뿐이다. 인생은 그런 순간들로 이루어져야 마땅하다는 생각은 더 강화된다. 


아이를 낳았다. 귀엽기야 이루 다 말할 수 없었다. 그러나 아무도 아이를 낳으면 두 시간마다 일어나서 아이에게 수유를 해야 한다는 사실을 미리 알려주지 않았다. 잠이 들 만하면 다시 반사적으로 일어나 아이의 배고픔을 달래줘야 한다. 이 시기만 끝나면 평화로울 거야. 그러나 이후 아이가 걷기 시작하며 사방의 모든 것을 입안으로 집어넣기 시작했다. 잠시도 방심할 틈이 없었다. 높은 곳에 올라가 굴러 떨어지는 일도 다반사였다. 이제 유치원에만 가면 나에게도 자유가 올 거야. 기관에 가면 평화로운 시간은 막간에 아주 잠깐뿐, 끊임없이 각종 집단생활 때문에 감염병에 걸려온다. 뭔가 장기적인 계획을 세울 수 없다. 중요한 약속도 잡지 못한다. 아이가 드디어 학교에 간다. 드디어 본게임 시작이다. 사교육을 시켜도 시키지 않아도 온전히 그 선택은 나의 몫이다. 그렇게 비장하지 않아도 괜찮았겠지만, 그러나 내 아이 앞에서 완벽하게 쿨하기란 어렵다. 

그리고, 드디어 클라이맥스가 펼쳐진다. 사.춘. 기. 내 생살 같았던 아이를 떼어 놓으려면 이 시기의 혼란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다. 언제까지나 엄마가 세상의 전부고 엄마 말이 전부라면 그 아이는 영원히 성장할 수 없다. 반항도 하고 거부도 하고 나만의 비밀스러운 세계도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말만 쉽다. 아이를 키우는 일은 이 세상의 불완전함과 불합리함, 삶의 부조리를 가장 실시간으로 농축하여 체험하는 일이다. 노력한다고 선의를 가진다고 다 제대로 풀리지는 않는다. 


















이 세 책에는 우리가 부모가 되는 일에서 감히 상상하지 못할 반경을 넘어 성장한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공통점은 이 세 아이들이 아프기 전 모두 부모에게 기쁨을 주던 빛나던 사랑스러운 아이였다는 점과 이들을 그 누구보다 사랑하고 최선을 다해 키우려 노력했던 부모들이 뒤에 있었다는 점이다. 바깥에서는 비난할 수도 있는 아이들의 모습 안에는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한 부모의 헌신과 사랑이 있었다. 이들 중 그 누구도 자기 아이가 자라나 다른 아이를 가해하거나 약물에 중독되거나 양극성 질환을 앓게 될 거라 상상하거나 생각하며 아이를 대한 적이 없다. 그럼에도 그런 일은 우발적 사고처럼 일어난다. 

아이들을 키우는 일은 인생에서 가장 취약한 우발적 사건, 사고에 내 생살을 내어놓는 일과 다름 아니니까. 내 아이가 가해자가 되거나 피해자가 되거나 아플 수 있다. 언제나 건강하고 언제나 나를 으쓱하게 해줄 훈장으로 아이를 여기게 된다면 그것 또한 바람직하지 않다. 나의 에고는 아이로 인해 부풀어 오를 것이고 인생의 본질적 취약성, 유한성을 인정하지 않게 될 가능성이 높으니 말이다. 나의 성취를 나에게서 쉽게 떼어 놓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건강한 분리는 그리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 


세 책의 공통점은 또 하나 있다. 아이들이 정신적으로 아팠다는 점이다. 바깥으로 드러내어 놓지 않은 정신질환에 대한 편견은 사춘기를 만나 발현된 아이들의 질환에 대한 대처 또한 어렵게 했다. 사람들은 비난하고 쉽게 비판한다. 때로는 심지어 예비 범죄자로 아픈 아이들을 대한다. 최근 일어난 각종 사건, 사고들로 이런 편견들은 더 강화되고 있다. 정신질환자의 범죄에 대한 부모의 책임론에 대한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그건 정말 쉽게 이야기할 대목이 아니다. 내 품에서 벗어난 아이들에 대한 부모의 책임이 어디까지인가에 대하여 그 임계점을 상정하는 건, 가장 가깝지만 가장 멀어지는 그 부모, 자식 관계의 아이러니에서 가장 어렵고 복잡한 일이 될 것이다.


하지만 아이는 태어난 순간부터 활시위에서 떠난 화살처럼 자유로운 존재이고 부모에게는 그 화살의 경로를 강제로 수정할 어떤 권리도 힘도 없다. 아이가 질병을 얻어 방황하거나 심지어는 부모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게 되는 것도 인간사에서 다반사로 일어난다. 이 사실을 인식하고 아이가 준 행복했던 기억들은 이따금씩 열어보는 보물상자로 간직하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딸이 조용히 무너져 있었다> 김현아


아이 대신 삶을 대입해도 말이 된다. 세 부모가 예상치 않았던 경로로 틀었던 아이들과의 시간을 통해 고통 속에서 성장하는 이야기는 우리의 성장과 도약이 때로는 우리가 가장 바라지 않았던 형태로 이루어질 수도 있음을 시사한다. 그 통제할 수 없는 고통의 시간이 지나고 난 자리에 남는 심오한 깨달음을 공유하게 해주어 저자들에게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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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지 않음으로 말하는 이야기가 있다. 그 여백과 공백 사이로 핵심 메시지가 들고 난다. 많은 것을 말한다고 해서 그 모든 것을 이해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느 지점에서 멈춰야 하는지 덜어내야 하는지를 기민하게 의식하는 것만으로도 예술은 성립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윤희에게>는 드라마틱한 서사가 없다. 대학 입시를 앞둔 딸 하나를 이혼 후 홀로 키우는 윤희가 일하던 곳에서 휴가를 얻지 못하자 충동적으로 그만두고 딸과 함께 일본 오타루로 여행가는 게 주요 이야기다. 핵심은 윤희가 왜 하필 일본으로 무리해서 딸을 데리고 가느냐는 것이다. 거기엔 고등 시절 우정과 사랑의 경계를 넘나들었던 일본인 혼혈 친구 쥰이 있다. 쥰은 일본으로 가고 윤희는 결혼하고 아이를 낳는 과정에서 연락이 끊겼다 우연히 쥰에게서 편지를 받는 것이 그 계기다. 이렇게 이야기해도 이 영화의 깊이와 감동은 쉽사리 설명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영화가 울림을 가지는 지점은 그런 여백과 공백을 김희애라는 노련한 배우가 소화해서 연기하는 곳이고, 오타루의 눈이 부시는 설경과 그 설경 속에서 잔잔하게 흐르는 아름다운 ost고, 많은 것들을 서로 이야기하지 않지만 사랑하고 독립해 나가는 큰 딸과 엄마의 현실적인 교감의 지대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모든 것을 너무나 조화롭게 형상화해낸 연출의 역할이다. 


아주 오랜만에 많은 것을 이야기하기 위해 반드시 많은 것을 동원할 필요는 없다는 각성을 준 좋은 작품을 만났다. 좋은 이야기를 좋은 방식으로 하는 일은 언제나 설득력을 지닌다. 



















라디오 PD 정혜윤 작가의 글에는 실재가 있다. 언제나 산 체험이 있고 절실한 경청이 있다. 물론 그 글이 언제나 전부 다 내 의견과 같다거나 전적으로 긍정할 수 있었다는 것은 아니다. 때로 다른 생각도 있었고 의문을 가질 때도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의 글을 적극적으로 찾아 읽을 수 있었던 건 함부로 쉽게 무언가를 재단하고 쓰는 작가가 아니라는 신뢰가 있었기 때문이다. 정혜윤 작가의 글에서는 어떤 에너지가 있다. 그 에너지는 이 세상의 연약하고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뜨거운 애정이다. 그 애정은 잊고 살았던 것들을 환기시킨다. 


예를 들면, 우리가 대구 지하철 참사 피해자 유족들과 지하철 노조 덕택에 불연재로 된 지하철 좌석에 타고 다닐 수 있다는 것. 그 이전에는 지하철 내부에서 화재가 생기면 쉽게 옮겨 붙는 가연재 재질의 지하철 좌석에서 위태롭게 졸고 있었다는 것. 아직도 그날 그 불붙은 지하철 안에서 "미안하지만 돈까스는 못해줄 것 같아." 라고 마지막 메시지를 자녀에게 보냈던 어머니의 죽음에 관련한 사연으로 울컥한다.


저자는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전범이 되어 사형당해야 했던 조선인 포로 감시원들의 잊혀진 사연도 이야기한다. 일본 식민지 시절, 다만 배를 안 곯기 위해 지원했던 연합군 포로 감시원직은 청년들을 졸지에 BC급 전범으로 만들어 버렸다. 평범한 대다수의 사람들처럼 대단한 명분도 악의도 없이 일본이 위에서 시킨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던 그들은 종전 직후 갑자기 천하의 몹쓸 죄인이 되어 사형당하거나 설사 석방되었다 해도 정신, 육체의 피폐함으로 평생 고통받으며 살아나간다. 자녀에게 때로는 자신의 과거를 숨기고, 당시 함께 일하다 죽은 동지들의 이름과 고향 주소를 적은 종이를 "우와기"에 넣고 다니며 세상에 드러내어 놓고 한탄할 수 없는 고통을 사는 그들의 증언은 뼈아프다. 왜 하필 그런 일을 했냐? 거부할 수는 없었냐? 고 묻는 일은 가볍고 그런 일들을 할 수밖에 없었던 당시 상황과 이후의 그들의 비극적 삶은 한없이 무겁다. 자신의 무지를 죄악이라 여기며 죽어갔던 이십대 젊은이의 유서. 역사적 비극의 현장에서 개인의 개별적, 구체적 삶은 통째로 무시되고 폄하됐던 그들의 삶과 죽음 앞에서 숙연해진다. 


죽은 아기 돌고래 주위에서 먹이도 먹지 않은 채 계속 그 돌고래를 수면 위로 펌핑하듯 띄워 올리는 엄마 돌고래의 마음은 어떤 것이었을까? 해경이 그 아기 돌고래를 보트에 묶어 운반하자 엄마 고래 '시월이'는 휘슬 소리를 내며 계속 따라온다. 아기의 죽음을 알고 그 슬픔을 표현할 길 없었던 돌고래의 마음이 전해져 와 눈물이 났다. 세월호, 이태원, 그밖에 많은 사건, 사고들로 자녀를 잃은 부모의 마음은 차마 언어로 표현할 길이 없다. 


이 세상의 모든 약하고 덧없는 생명들에게 연민과 사랑을 전하는 작가의 마음은 결국 우리가 그러한 이야기들을 경청함으로써 좋은 삶을 발명해낼 수 있다는 믿음으로 확장된다. 모르니까 그러는 것일 뿐, 우리는 이야기를 듣고 앎으로써 결국 공감과 사랑으로 만날 수 있다는 그 믿음이 소중하다. 오늘 하루도 나는 나의 이야기를 만들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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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3-10-31 09:3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말씀하신 것처럼 특별한 서사가 등장하는 게 아니고 요란하지도 않은데요, 저는 <윤희에게> 를 보면서 울어버렸습니다. 하아-

blanca 2023-10-31 12:00   좋아요 3 | URL
저 ˝나도 네 꿈을 꿔.˝라는 김희애 마지막 대사에 울었어요. 완전 울컥하는데...이제는 연락이 끊긴 고등 때 단짝 친구가 떠오르더라고요. 감독이 각본까지 다 썼다는 얘기에 놀랐고요. 이미 김희애 여배우를 떠올리며 작업을 했다는 이야기도 흥미롭더라고요.
 
프로방스 숲에서 만난 한국문학
장클로드 드크레센조 지음, 이태연 외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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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한국학 연구자가 쓴 한국 소설, 한국 문화에 대한 이야기다. 저자 장클로드 드크레센조는 마르세유에서 태어나 엘스마르세유 대학교에서 한국학을 창설한 사람이다. 이런 배경을 듣게 되면 흔히 설정하게 되는 기대치가 있다. 즉 대단히 심오하거나 한국적 정서에 대한 깊은 이해가 따르지는 않을 거라는. 그러나 이 책은 그런 기대를 보기 좋게 배반한다. 그 어느 한국인 평론가 못지않게 한국 소설에 대한 심오한 이해와 넓고 본질에 가닿은 해석이 놀랍다. 한유주, 장강명, 은희경, 김애란, 저자와 사적인 친분이 있는 이승우에 이르기까지. 미처 읽지 않은 소설에 대해서도 독자들이 충분히 그 내용이나 작가의 의도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게 하면서도 조심스럽게 스포일러가 되는 것은 지양하면서, 소설과 작가, 그것이 태어난 한국의 사회, 경제적 상황까지 심도 있게 고찰한다. 


특히나 이제는 사라져 가는 한국의 포장마차에 대한 아련한 정경에 대한 글은 한 편의 아름다운 단편 같다. 파란 눈의 한국 문학을 연구하는 프랑스인이 포장마차에서 한국어로 이제는 사라질 옛사람들과 밤새 나누는 일회성의 정담의 풍경은 박완서, 김승옥이 그렸던 포장마차의 풍경을 연상시킨다. 그는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을 우리보다 더 그리워하고 있다. 


한국의 MZ 세대가 느끼는 구조적 불안에 대한 해석 또한 냉철하다. 


그들은 그들의 자리가 없는 사회에서 살아야만 한다. 새로운 사회 규칙은 과잉 상태이다. 혼란스럽게 하는 것은 기준의 부족이 아니라, 기준의 과잉이다. 새 시대는 긍정의 과잉으로 특징 짓는다. 

-pp.42


우리가 기준의 과잉으로 억압하는 청년들에게 그들의 자리가 없는 사회에서 살기를 강요했다는 고백을 그 사회 속의 기득권인 기성 세대가 과연 과감하게 할 수 있을까? 이 책의 빛나는 지점은 여기에 있다. 애정을 가지고 이국의 문학을 연구하는 학자가 그곳에서 거주하고 그곳의 언어로 그곳의 글을 읽고, 그곳의 사람들과 교유하며 진단하는 여러 문제적 지점들은 우리가 흔히 연상하는 오리엔탈리즘에 근거한 것이 아니었다. 어쩌면 가장 오리엔탈리즘과 대척점에 있을지도 모를 저자의 신중한 제언의 울림이 크다. 그리고 그 진동의 폭은 결국 저자가 한국의 작가와 문학에 가진 진심어린 애정 덕택일 것이다.  


저자가 예견적 시각이라 상찬한 우리 작가들의 이야기를 진심으로 읽어보고 싶게 만드는 책이다. 누군가 하는 우리의 이야기 덕택에 우리의 이야기로 돌아올 수 있어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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