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송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3
프란츠 카프카 지음, 권혁준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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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죄가 없습니까?” 그가 물었다.

“그렇습니다.” K가 말했다.

자신의 모든 유고를 불태워달라는 카프카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던 막역한 친구 막스 브로트 탓에 우리는 카프카의 장편을 읽는 고역을 감내하는 걸까. 도대체 왜?, 라는 의문은 소설의 마지막 문장을 읽고 책장을 덮고서도 해결되지 않는다. ‘내가 널 안다.’, ‘내가 그걸 이해했다’라고 생각한 순간 오해가 시작되어 스스로 불신을 만들고 배신감에 몸을 떨기도 한다. 스스로 자신의 원고를 태울 용기가 없었거나 미련을 남긴 카프카에게 요제프 K가 묻는다. 미완의 소설을 통해 독자에게 하고픈 말은 아도르노의 분석대로 “모든 문장이 ‘나를 해석해보라’고 하면서 어떤 문장도 그것을 허용하려 하지 않는다.” 이게 뭥미?

소설 도입부를 읽다 내려놓은 책들이 꽤 많다. 어디 소설뿐인가. 첫인상에 기대 선입견을 갖는 사람이어서가 아니다. 모든 텍스트는 저마다의 역할이 있고 픽션이든 논픽션이든 독자에게 발화되는 지점이 있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읽었다는 만족감을 위해, 또 누군가는 문제를 해결하고 색다른 방식의 위로를 받으려고, 그리고 누군가는 망각과 도피의 수단으로 책 속에 숨기도 한다. 목적이 무엇이든 내게 50쪽을 넘기는 책은 나와의 인연이 없다고 판단한다. 카프카의 『소송』을 꺼내 다시 읽기 시작한 건 필연을 가장한 우연일 테다. 인생 전체가 우연히 휘말린 소송에 불과하다면 지나친 해석일까.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고, 본의 아니게 피해를 입고, 아무 상관없이 욕을 먹고, 영문도 모른 채 불이익을 감내하며, 남의 잘못으로 손해를 보는 게 인생이라면 지나치게 부정적일까. 낭만적 사랑과 긍정 에너지를 뿜어내는 사람 곁에 머물러야 행복도 전염된다면 요제프 K 같은 사람 근처엔 얼씬도 하지 않아야 한다. 바틀비는 물론.

소송의 원인을 알지 못한 채 소설이 끝난다. 공소장을 확인하지도 못한 주인공은 건물 꼭대기층 다락에 설치된 법정을 기웃대며 이들의 피를 빠는 훌트 변호사와 법원 중재인 화가 티토렐리 같은 사람들 사이에서 길을 잃는다. 다소 그로테스크하고 초현실적인 장면들이 이어지는 음울한 분위기의 소설을 읽는 내내 식은땀으로 젖은 속옷을 벗지도 못하고 뜨거운 선풍기 바람이 오히려 온몸에 열기가 올라오는, 바람 한 점 없는 여름밤에 읽지 말아야 할 소설 맨 윗자리에 올리고 싶은 소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체주의로 흘러가는 현대 관료 체제는 매일 뉴스를 통해 목도한다. 상식과 합리에 바탕을 둔 판단과 선택과 거리가 먼 경찰과 검찰과 법원의 판단이 오로지 증거와 법리에 따라 선악을 결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 않은 듯싶다. 원고와 피고, 피해자와 가해자가 모두 억울하다고 아우성인 세상에서 요제프 K가 선 법정은 종교 혹은 인간 존재에 대한 은유로 읽히기도 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 혹은 종교적 가르침에는 인과관계가 성립할까. 비인간화된 현대사회에서 인간이 느끼는 소외와 불안은 법정으로 상징되는 권위, 가치, 규범들이 내면화된 죄의식을 만들어 낸다.

1883년 체코에서 태어나 1924년 겨우 40년을 살다 간 프란츠 카프카는 파혼으로 인한 죄책감, 자기 증오, 자기 처벌의 심정으로 이 소설을 썼을 것이라는 추론은 그의 생애와 무관치 않다. 제1차 세계전을 일으킨 독일 황제 빌헬름 2세와 오스트리아의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를 ‘빌렘’과 ‘프란츠’로 등장시켜 우회적이고 은밀한 방식으로 1914년의 세계를 반영했다는 해석도 일리가 있겠다. 그러나 세계가, 아니 우리 삶 전체가 법정과 다름없다는 설정은 공화정 아래 자유롭고 평등한 세상에 산다고 믿는 근대 이후 인류에게 던지는 카프카의 질문이다. 넌 괜찮으냐고, 과연 그게 맞는 거냐고.

“개 같군!” 그가 말했다.

그가 죽은 후에도 치욕은 살아남을 것 같았다.


* 등장인물

요제프 K : 서른 번째 생일을 맞은 은행 재무담당 부장, 주인공 화자

감독관 : 요제프를 감독

프란츠, 빌렘 : 감시인

그루바흐 부인 : 하숙집 주인

뷔르스트너 양 : 타이피스트, 건너편 방 거주자

라벤슈타이너, 쿨리히, 카미너 : K의 은행 동료들

엘자 : 술집 여종업원

법정 정리, 그의 아내 : 법정이 열리는 장소를 제공하며 살아감

베르톨트 : 법학 전공 대학생, 예심판사 밑에서 일하며 법정 정리의 아내를 짝사랑

알베르트(카를) : 요제프의 숙부

에르나 : 사촌인 숙부의 딸

훌트 변호사 : 숙부의 동창으로 가난한 사람들의 대변자

레니 : 홀트 변호사의 시중 드는 아가씨

사무처장 : 홀트 변호사의 지인

티토렐리 : 초상화를 그리는 화가이자 비공식적 법원 중재인

블로크 : 상인으로 변호사의 의뢰인

*

체포

그루바흐 부인과의 대화 이어서 뷔르스트너 양

첫 심리

텅 빈 법정에서 / 대학생 / 법원 사무처

태형리

숙부 / 레니

변호사 / 제조업자 / 화가

상인 블로크 / 변호사와의 해약

대성당에서

종말

**미완성 장들

B의 여자친구(몬타크)

검사(하스테러)

엘자에게로

부행장과의 싸움

관청

어머니에게로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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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의 일기
다니엘 페나크 지음, 조현실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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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대 총선이 끝나고 정운영의 『심장은 왼쪽에 있음을 기억하라』가 떠올랐고, 223차 모임 도서표지를 보고 이문구의 소설집 『내 몸은 너무 오래 서 있거나 걸어왔다』가 생각났다. 한국어의 아름다움과 사투리 특유의 특징을 기막히게 살린 ‘재밌는’ 소설과 달리 다니엘 페나크의 『몸의 일기』는 날것 그대로인 ‘몸’을 드러내며 솔직함을 무기로 개별 독자의 몸을 돌아보게 한다.

한 남자의 몸에 관한 68년간의 기록은 색다른 의미를 갖는다. 1944년생 다니엘 페나크가 68세가 된 2012년에 출간한 소설의 주인공은 작가보다 스무 살쯤 연상인 1923년생으로 설정했다. 경험과 생각 이상의 무언가를 쓸 수 없는 게 작가의 한계라면 이 소설 역시 자전적 경험이 바탕이 됐으리라는 짐작이 어렵지 않다. 직립 보행을 하는 인간의 몸은 거의 매일 걷거나 뛰고 오랫동안 서 있다. 중력을 극복하려는 헬서들의 노력만큼은 아니어도 우리는 하루하루를 견디며 지나온 시간, 살아낸 인생을 고스란히 몸에 새긴다. 기억은 흐릿해지고 망각과 추억이 뒤섞여도 몸에 남은 흔적들은 어쩌지 못한다.

화자는 아내와 아들 그리고 동성애자 손자 등 오래 산 만큼 가족과 친구와 주변인들과 관계를 맺는다. 죽은 후에 딸 리종에게 남기는 형식의 글들이 간간이 섞여 있으나 두툼한 소설 한 권은 화자의 몸으로 쓴 인생을 표방한다. 그러나 타인과의 관계 안에서 작동하는 몸, 주변인들의 몸에 대해 관찰한 기록, 비올레트의 죽음으로 사라진 몸, 몸이 없는 상상 속의 동생 도도 등 다양하게 맺은 관계에서 몸으로 부대끼며 걸어온 길이 삶이라는 자명한 진리를 펼친다. 다니엘 페나크는 거대한 몸의 서사를 표방하고 있으나 어쩌면 우리 몸의 기쁨과 슬픔, 욕망과 한계를 통해 삶의 의미를 묻고 있는 듯하다.

따뜻한 봄나들이가 여름의 후끈한 열기로 가득했으나 남산과 한옥마을, 동대문 성곽길과 낙산공원, 함께 나눈 김밥과 샌드위치와 떡과 과일과 그리시니와 호두과자를 먹은 몸은 기억할 듯싶다. <책읽는 고양이>에서 시작해 밥집을 거쳐 다시 카페에 둘러앉아 계속된 책과 몸에 관한 우리들의 기나긴 이야기들이 울고 웃었던 시간도 우리 몸의 일부가 될 듯하다. 아픈 몸, 어머니의 몸, 건강한 몸, 좋아하는 몸...2분기 주제인 몸과 건강은 즉물적 삶의 실존적 토대다. 오롯이 자신에게 남겨진 몸을 돌보고 건강한 삶을 이어갈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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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다만 사랑의 습관 창비시선 500
안희연.황인찬 엮음 / 창비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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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만진 슬픔

_이문재

이 슬픔은 오래 만졌다

지갑처럼 가슴에 지니고 다녀 따뜻하기까지 하다

제자리에 다 들어가 있다

이 불행 또한 오래되었다

반지처럼 손가락에 끼고 있어

어떤 때에는 표정이 있는 듯하다

반짝일 때도 있다

손때가 묻으면

낯선 것들 불편한 것들도

남의 것들 멀리 있는 것들도 다 내 것

문밖에 벗어놓은 구두가 내 것이듯

갑자기 찾아온

이 고통도 오래 매만져야겠다

주머니에 넣고 손에 익을 때까지

각진 모시리 닳아 없어질 때까지

그리하여 마음 안에 한 자리 차지할 때까지

이 괴로움 오래 다듬어야겠다

그렇지 아니한가

우리를 힘들게 한 것들이

우리의 힘을 빠지게 한 것들이

어느덧 우리의 힘이 되지 않았는가

창비시선 500 기념 시선집.

문지시인선 600과 봄에 만났다.

오래 만진 슬픔도 언젠가 지나가나 봄.

이건 다만 고통의 습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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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zeppa 문학과지성 시인선 597
김안(김명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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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제작으로 실린 「Mazeppa」는 우크라이나의 영웅, 이반 스테파노비치 마제파Ivan Stepanovich Mazeppa를 가리킨다.(류수연 해설, 「연옥으로의 한 걸음」, 108쪽) 또한 마제파Mazeppa는 리스트liszt의 초절기교 연습곡 4번이기도 하다.

나는 듣는다,

토끼가 겨울나무를 파먹는 소리,

얼어버린 눈동자가 물결처럼 갈라지는 소리.

나는 듣는다, 술로

연명하다 굶어 죽은 시인의 창밖으로 계절처럼

전진하던 기차 소리,

그 소리에 밤하늘의 불꽃이 흔들리고,

낭만과 폭력을 구분하지 못하던 시절과,

죽은 이의 입속으로 들어가는 벌레의 날갯소리,

듣는다,

음독이 묵독이 되는 소리,

기억을 잃은 이들이 거울 앞에 서는 소리,

나는 실패하고,

나는 전진하기에,

이것은 나의 몫이므로.

_ 「Mazeppa」중에서

함정에 빠진 젊은 청년 기사의 사랑 이야기와 시련과 생존을 거쳐 독립 영웅이 되는 반전 서사는 이 시집과 닮은 구석이 없다. 시인은 리스트가 제안하듯 시의 기교를 연습한 게 아니라 매 순간 처음인 모든 이의 삶에 반전을 기대하라는 위로를 보내려 한 것일까. 왼갖 잡소리를 듣고 싶지 않은 순간들, 뵈는 게 없어도 좋을 것 같은 장면들이 떠오른다. 누구나 자기 삶을 실패하며, 또 전진한다.

‘내가 젊을 적 쓰고자 했던 것들은 어떤 빈곤함의 형상, 때론 논리와 신랄한 야유, 잠자리 날개 같던 당신의 이마와 별 무리와 당신의 끝’(「시인의 말」중에서)이 먼저 튀어나와 당혹스럽다. 이제 젊지 않은 시인이 쓰고 싶은 건 뭘까? ‘말의 해방, 말의 깊이 따위를 향해 손 내밀다니 겁도 의미도 없이’ 변명과 술수로 부끄러운 연옥을 포장할 순 없다. 언어의 세계가 존재의 한계라는 사실을 자각했다고 인간이 전혀 다른 존재로 사는 건 아니다. 추악한 변명과 끝없는 변명으로 자신을 합리화할 뿐. 시인의 말은 이제 막 시작한 독자의 시 읽기를 방해한다.

그러다가 문득 ‘내 질문들은 자꾸만 어리석어지고, 어리석어지니 입을 틀어막고, 세상에는 이토록 많은 선의와 이토록 불가해한 다정함이 가득하니, 나는 그저 진부함과 유치함 속에만 존재하는 사람이 되어’(「뒤풀이」중에서) 버린 시인에게 공감하며 푸른 하늘을 잠시 쳐다본다. ‘세계의 절반은 어둠이고 그 남은 절반이 빛이라는 뻔한 술수’(「무의식」중에서)라는 사실을 몰라서 쓸쓸한 게 아니다. 사람들에게 선의와 다정함이 필요한 건 어둠 때문이 아니라 빛의 그림자 때문이 아닌가.

이념도 없고 분노도 없는 계절이 왔다. 마음이 질겨서 봄이다. 이제 나는 한 줄로도 만족하게 되었다. 한 줄만큼의 어리석음이면 족하다. 그 정도의 망신이면 족하다. 부끄러운 봄이다.

_ 「입춘」중에서

허나, 2024년의 봄은 이념과 분노로 가득하다. 마음이 모질지 못하면 견디기 힘든 시절은 저마다 다른 빛깔과 모양일 터. 사람들은 어리석음과 망신은 항상 타인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복잡하게 착하며 타인은 단순하게 나쁘다는 착각. 봄이 부끄러운 게 아니라 외면과 부인 그리고 자기 합리화의 모순을 견디는 힘이 가끔 못내 부럽다. 입춘을 지나 우수, 경칩까지 스쳐와도 갈 길은 멀고 험하다. 봄이 온다고 해서 부끄러움 없는 생활이 가능하다는 생각은 언제나 희망 고문이다.

‘설운 마음이 넘쳐서 누워만 있던 오후다. 잠든 딸아이 옆에 누워 머리를 쓰다듬다가 빗소리에 몸을 일으켜 앉으니’(「귀신의 맛」중에서) 창밖엔 켜켜이 쌓인 세월의 더께가 두툼하다. 잠든 아이의 손톱을 깎던 평화가 전생 같다. 고개 한번 돌리면 시간의 저편으로 넘어갈 수 있을까. 마음이 어린 후이니 하는 일이 다 어리다.

마음 밭에 거름을 주고 비가 와 촉촉하고 부드러운 상태가 되어야 쓸 수 있다. 읽는 일도 다르지 않다. 시인은 ‘지난가을이었다.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온종일 집에만 있었다.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니 읽을 수 있는 책도 없었다. 지난가을이었다.’(「붉은 귀」중에서)라고 고백한다. 읽고 쓰는 일이 아닌 사람들의 일상도 마찬가지다.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게 아니라 할 일을 못하는 상태, ‘지난 가을’이 아니라 굳이 ‘지난가을’이라고 말하고 싶은 때가 있다. 누구에게나 그 순간은 온다. 그러나 그 방법과 태도는 제각각이다. 지난 가을이 아니라 올가을로 만드는 사람들은 누구일까. ‘창에 비친 나를 본다. 늙고 있다, 늙은 개 같은 인간 늙은 인간 같은 개 같던 지난가을, 네발로 나는 빈다. 나는 반성합니다. 보세요, 최대한 인간처럼 걷고 있습니다. 마치 미래가 있는, 생활이 있는 사람처럼 웃으며 전활 받고, 네네, 생활이 있는 사람입니다, 나는 반성한다.’(앞의 시)

생활인의 슬픔에는 시인의 말대로 ‘자본주의의 돼지’가 된 친구를 우연히 만나는 일보다 구체적이고 현실적이다. ‘망각이 용서를 낳는다고 했던가, 그 용서가 영혼을 병들게 만든다고 했던가.’(「이 문장을 끝내지 못한 곳에서」) 어쩌면 용서하지 못하는 건 타인의 음험한 욕망이나 자본주의가 아니라 자기 자신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산다는 무언가 그립다는 말 한마디 때문이거나 모든 것을 상실했음을 확인하는 과정이다.

이것이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다. 다만 내게 필요한 것은 단 하나뿐이다. 그건 세상에 없던 새로운 비유를 만드는 일 같달까. 아버지의 구석진 장례식장에 온 사촌 동생 부부의 고귀한 옷차림 같은 거랄까. 눈앞에서만 착한 학생들처럼, 나는 한껏 슬퍼했었지. 아니 그런 것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일 테다. 마음을 쏟는다는 말은 두 가지로 읽힌다. 최선을 다했거나, 더 이상 쏟을 것 없이 모든 것을 상실했거나.

_ 「마음 전부」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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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 프루스트를 읽은 사람과 읽지 않은 사람만이 있다.” - 앙드레 모루아

“한 인간의 삶을 가장 완벽하게 재현했다.” - 알랭 드 보통

세상에 필독서는 없습니다. 마르셀 프루스트가 어떤 사람이든 현재 내 삶과 무관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나 책보다 사람과 세상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틀린 건 아닙니다. 다만 아래 소개 글은 죽기 전에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어 보려고 시작하시는 분들에게 작은 도움이 될까 싶어 며칠 먼저 읽은 사람이 남기는 흔적입니다. 매우 주관적인 생각과 판단일 수 있으니 참고만 하시기 바랍니다.

1. 번역본 선택과 워밍업

마르셀 프루스트에 관한 찬사와 관심은 21세기 대한민국에서도 여전합니다. 2022년 11월에 민음사에서 완간된 13권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추천합니다. 번역은 제2의 창작입니다. 특히 문학은 번역가의 역량과 출판사의 투자에 따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독자들에게 읽는 재미와 감동을 선물합니다. 문학동네, 창비, 민음사 등 대형 출판사가 독점하고 있는 상황을 고려해서 세계 문학 번역본은 반드시 한두 쪽이라도 비교해 보고 선택하는 것이 좋습니다. 번역가의 역량에 따라 전혀 다른 재미와 감동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작가의 집필 기간에 버금가는 시간을 투자한 김희영의 노고에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감사한 마음을 전할 뿐입니다.

이미 번역 출간된 국일미디어, 동서문화사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1권을 읽다가 열화당에서 나온 만화로 먼저 스토리를 파악하고 워밍업을 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고전을 읽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2차 저작물을 통해 사전 정보를 얻고 전문가의 견해와 배경 지식을 토대로 접근하는 방법도 나쁘지 않습니다. 아래 프루스트와 ‘잃시찾’ 관련 도서를 적어 두었습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결국 문학은 개별독자마다 다른 풍경을 보여줍니다. 누가 뭐라든 내가 읽은 나만의 ‘잃시찾’을 만들게 됩니다.

2. ‘잃시찾’ 효과

단 한 권의 책을 쓴 유일한 작가라는 평가는 이 책에 아우라를 부여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기억과 시간에 관한 집착이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각자의 삶을 다른 방식으로 추억합니다. 프루스트는 도대체 어떤 생각과 감정을 떠올리며 10여 년간 글쓰기에 매달렸는지 모르겠습니다. 문장은 길고 묘사는 치밀합니다. 한 단락이 수십 쪽에 이르기도 하니 의식의 흐름stream of consciousness이라는 심리학 개념은 문학과 예술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며 자동기술법automatisme으로 발전합니다. 문학이론과 평가는 이 책을 읽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다만 100년 전 프랑스의 금수저 귀족 집안에 태어나 무직으로 글만 쓰며 살던 프루스트가 바라본 세기말의 풍경과 사교계 인물들, 자기 경험에 대한 미치토록 지루한 TMI를 견디다보면 어느새 프루스트식 글쓰기에 매료되는 놀라운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다른 모든 책이 쉬워지는 ‘잃시찾’ 효과를 느낄 수 있습니다.

그 유명한 홍차에 적신 마들렌은 1권 도입부에 등장합니다. 피에르 바야르는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1편 「스완네 집 쪽으로」(1~2권)만 읽으셔도 마들렌 효과(비의지적 기억을 통한 과거의 부활과 총체적인 인식)에 대해 대화를 나누거나 글을 쓰는데 불편은 없을 겁니다. 그러나 과 알베르틴 효과(일시적이고 단편적인 것, 늙음과 죽음, 욕망과 질투, 광기와 환상, 무의식과 타자)까지 살펴보시려면 완독을 추천합니다.

만연체 문장의 힘은 대단합니다. 세상을 0.5배속으로 보게 합니다. 슬로우 모션으로 돌아가는 영화처럼 프루스트는 끊임없이 중고등학교 때 애용하던 카세트 플레이어의 되감기rewind 버튼을 누릅니다. 속으로 ‘제발 그만 하라고!’라고 외친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서사story 중심의 현대 소설과 전혀 다른 전개 방식에 지쳐갈 쯤 독특한 구성과 차별화를 경험하신다면 프루스트에게 감염되신 겁니다.

13권을 읽는 동안 수많은 등장인물이 독자를 괴롭힙니다.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 등 러시아 소설을 읽을 때 등장인물 이름을 읽다가 덮어버리신 경험이 있는 분들이라면 등장인물 뿐만 아니라 당대를 풍미했던 음악가, 화가들의 작품까지 살펴야 하는 매우 번거로운 각주 읽기가 되거나 의외의 재미이거나! 드레퓌스 사건은 시종일관 사회적 배경으로 소모되기 때문에 사회, 역사적 배경까지 공부하며 읽을 필요는 없지만 드레퓌스 사건과 제1차 세계대전에 관한 정보는 간단하게 찾아보시면 좋습니다. 반복해서 등장하는 인물과 사교계의 복잡한 혼인 관계 등은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그려집니다. 1편~7편이 시작될 때 등장인물을 미리 소개합니다. PDF 파일로 만들어 두고 출력해서 참고하시거나 핸드폰에 사진으로 저장하고 헷갈릴 때마다 수시로 확인하면 금방 떠올려집니다. 아래 첨부해뒀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드레퓌스 사건, 유대인 차별, 전통 귀족, 신흥 부르주아, 살롱 문화 등 당대 사회를 이해하는 기본적인 정보와 지식이 필요할 수도 있으나 프루스트의 설명만 따라가며 그땐 그랬구나, 정도만 이해하고 넘어가도 소설을 읽는 데 큰 지장은 없습니다. 이 소설을 읽는 목적이 어디에 있든 각자의 방식대로 읽으시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3. 쓸데없을 수도 있는 몇 가지 안내

1권 50쪽 쯤 읽다가 전체 분량이 13권이라는 사실에 현타가 오시면 각 편 뒤쪽 김희경의 해설을 먼저 읽어 보시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매일 일정 분량을 정해 놓고 읽는 방법도 좋지만 저는 집중할 수 있는 시간에만 읽기를 권합니다. 최선을 다해 천천히 문장과 문제를 즐기려면 프루스트식 글쓰기에 익숙해지기 전까지 집중력 높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벨 에포크 시대 프랑스와 유럽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 알베르 소불의 『프랑스 혁명사』를 읽고 우디 앨런의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Midnight in Paris, 2012》 등을 찾아보셔도 좋습니다.

스완과 오데트의 딸 질베르트는 화자인 마르셀 프루스트의 첫사랑입니다. 스완 양이었던 질베르트는 스완 사망 후 오데트의 재혼으로 포르슈빌 양이 되고 생루와 결혼해서 생루 후작 부인이 되었다가 생루 사망 후 게르망트 공작 부인이 됩니다. 인물들의 호칭과 관계 변화가 다양하진 않지만 중간중간 나오는 사망, 결혼 등 주요 사건을 놓치는 순간 회상과 미친 TMI에 길을 잃기 쉽습니다. 가급적 주요 등장 인물은 메모를 하며 읽기를 권합니다.

최초 구성은 1편 「스완네 집 쪽으로」, 3편 「게르망트 쪽」, 7편 「되찾은 시간」 3부작이었다네요. 나머지 2, 4, 5, 6은 알베르틴이 주연을 맡습니다. 물론 사교계 이야기와 다른 등장인물도 중요하지만 인과관계와 사망 시점 등이 마지막 편에 헷갈리기도 합니다. 1, 3, 7편을 먼저 읽고 2, 4, 5, 6편을 읽는 방법도 괜찮아 보입니다. 7편이 각각 다른 소설로 완결될 수 있으니 전체 구성을 이해하고 공간적 배경과 이동 경로를 감안해서 읽으시면 ‘시간’ 순서대로 ‘추억’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프루스트의 ‘기억’과의 싸움의 최전방에 참전하는 느낌을 받으실 겁니다. 전체 구성과 읽으면서 주요 등장인물과 사건을 메모하기 시작한 건 3권부터입니다. 혹시 참고가 될까 싶어 아래 첨부합니다.

소설은 계속해서 살롱 문화를 따라 갑니다. 사교계를 떠나지 않았던 작가의 삶은 관계를 맺고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모두 살롱에서 배웠을 거라 짐작합니다. 타자를 향한 열정과 의심과 질투와 집착을 현대인의 관점에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당대의 문화와 전통과 전혀 다른 21세기 한국인이 마르셀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필요없어 보입니다. 다른 소설과 달리 특정 인물에 감정을 이입하거나 공감을 목표로 한다면 잃시찾 읽기는 지루한 자기와의 싸움일 될 뿐입니다.

소설에서 각주 읽기는 당황스런 경험입니다. 김희영의 각주는 프루스트 연구자들의 주장을 소개하고 사실관계를 설명하며 내용의 모순을 알려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각주를 건너뛰면 내용을 깊이 이해하고 프루스트의 의도를 놓칠 수도 있으나, 선택은 독자의 몫입니다. 각주 읽기가 소설 읽기를 방해한다면 주객이 전도되지 않는 선에서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각주를 읽으며 음악, 미술, 오페라 등 당대 예술가들의 대표작과 특징을 확인할 수도 있습니다.

4. 사족

조정래의 『태백산맥』(전10권), 『아리랑』(전12권)이나 이문열의 『삼국지』(전 10권) 혹은 앙투안 갈랑이 엮은 『천일야화』(전 6권),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전 5권) 등 연작 소설을 읽은 경험을 떠올리며 이 소설을 읽기 시작했다가 당황했습니다. 각자의 소설 읽는 방식이 있겠으나 저에게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조금 색다른 독서 경험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긴 사족을 덧붙입니다. 소설을 읽는 목적과 방법, 책을 읽는 이유에 따라 각자의 접근 방식을 선택하면 그뿐입니다. 물론 안 읽어도 그만입니다. 그래도 혹시 시작하신다면 작은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민음사 1~13권 5,716쪽)

1편 「스완네 집 쪽으로」 : 콩브레

1부 콩브레(민음사 1권, 324쪽)

2부 스완의 사랑(민음사 2권, 432쪽) : 스완-오데트

3부 고장의 이름-이름

2편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 : 상젤리제, 발베크

1부 스완 부인의 주변(민음사 3권, 376쪽) : 샹젤리제_베르고트, 질베르트(스완 양 → 포르슈빌 양 → 생루 후작 부인 → 게르망트 공작 부인)

2부 고장의 이름-고장(민음사 4권, 556쪽) : 발베크_엘스티르(마네), 알베르틴, 앙드레

3편 「게르망트 쪽」 : 콩브레, 동시에르, 빌파리지 부인의 오후 모임 vs 게르망트 부인의 만찬

1부(민음사 5권, 524쪽) : 동시에르_빌파리지 부인, 생루(로베르)-라셸, 샤를뤼스

2부(민음사 6권, 544쪽) : 게르망트_할머니의 죽음, 게르망트 부인, 알베르틴, 스테르마리아, 스완,

4편 「소돔과 고모라」 : 발베크, 동시에르, 게르망트 대공부인 저택 연회 VS 베르뒤랭 부인 집에서의 만찬

1부(민음사 7권, 448쪽) : 샤를뤼스-쥐피앵, 스완, 알베르틴

2부 1장 : 발베크_알베르틴, 앙드레, 캉브르메르 부인,

2장(민음사 8권, 540쪽) : 동시에르, 발베크_알베르틴, 생루,

3장 : 샤를뤼스 남작-모렐, 게르망트 대공-모렐,

4장 : 뱅퇴유 딸-알베르틴, 베르뒤랭 부인, 캉브르메르 후작 부인

5편 「갇힌 여인」 : 파리 샹젤리제

1부(민음사 9권, 328쪽) : 마르셀-알베르틴, 샤를뤼스, 모렐-쥐피앵 조카딸, 베르고트의 죽음,

2부(민음사 10권, 424쪽) : 스완의 죽음, 베르뒤랭 살롱, 샤를뤼스-모렐, 뱅퇴유 양의 친구-알베르틴, 뱅퇴유의 사후 연주회, 알베르틴과 이별

6편 「사라진 알베르틴」 (민음사 11권, 516쪽) : 투렌, 불로뉴 숲으로의 외출 → 질베르트 만남 → 앙드레와의 대화 → 베네치아에서의 체류

1장 : 알베르틴의 죽음, 생루, 에메의 조사와 편지, 에포르슈빌,

2장 : 포르슈빌(질베르트), 알베르틴의 진실(에메의 조사와 편지/앙드레의 방문/베네치아에서 가르파초의 그림)

3장 : 베네치아_노프루아, 빌파리지 부인, 빌파리지 부인의 조카이자 마르상트 부인의 아들 생루-스완의 딸 질베르트 결혼 소식

4장 : 캉브르메르 아들-쥐피앵의 조카딸과 결혼 소식, 생루의 동성애 성향과 질베르트에 관한 회상, 노르푸아-빌파리지

7편 「되찾은 시간」 : 파리, 콩브레, 탕송빌, 블로뉴숲 가로수길

되찾은 시간 1(민음사 12권, 312쪽) : 파리, 로베르-질베르트, 쿠르부아지에, 모렐, 콩쿠르, 제1차 세계대전, 베르뒤랭 살롱, 샤를뤼스, 브리쇼, 쥐피앵, 생루의 죽음

되찾은 시간 2(민음사 13권, 392쪽) : 게르망트 대공부인 살롱, 레투르빌 소위, 블로크, 샤를뤼스, 질베르트, 라셸, 라 베르마

# 주요 무대 : 콩브레, 샹젤리제, 발베크, 동시에르, 베테치아, 포부르생제르맹, 메제글리즈, 투렌, 탕송빌, 루생빌

- 콩브레 : 마르셀이 유년 시절을 보낸 곳

- 샹젤리제 : 어린 마르셀이 놀던 곳

- 발베크 : 마르셀이 여름 방학을 보낸 바닷가

- 동시에르 : 친구인 생루가 군대 생활을 했던 곳

- 베네치아 : 마르셀이 어머니와 함께 여행 갔던 곳

# 주요 인물 : 화자(마르셀), 스완, 오데트, 질베르트, 베르고트, 엘스티르, 알베르틴, 앙드레, 봉탕 부인, 노르푸아 후작, 게르망트 공작 부인, 베르뒤랭 부인, 포르슈빌 백작, 빌파리지 후작 부인, 르그랑댕, 캉브르메르 후작 부인, 뱅퇴유, 샤를뤼스 남작, 모렐(샤를리), 쥐피앵, 마르상트 백작 부인, 생루(로베르), 라셸, 블로크,

# 키워드 : 시간, 기억, 추억, 사랑, 죽음, 동성애, 살롱 문화, 전통 귀족, 신흥 부르주아, 드레퓌스 사건, 벨 에포크

# 관련도서

- 프루스트가 우리의 삶을 바꾸는 방법들, 알랭 드 보통, 박중서 역, 청미래, 2023

- 프루스트 그래픽, 니콜라 라고뉴, 정재곤 역, 니콜라 보주앙 그래픽, 민음사, 2022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되찾은 시간 그리고 작가의 길, 오선민, 북드라망, 2021

- 프루스트를 읽다, 정명환, 현대문학, 2021

- 프루스트와 함께하는 여름, 앙투안 콩파뇽, 장 이브 타디에 외, 길혜연 역, 책세상, 2017

- 프루스트와 지드에서의 사랑이라는 환상, 이성복, 문학과지성사, 2015

- 마르셀 프루스트 : 독서에 관하여, 마르셀 프루스트, 유예진 역, 은행나무, 2014

- 프루스트의 화가들, 유예진, 현암사, 2010

- 프루스트와 기호들, 질 들뢰즈, 이충민 역, 민음사,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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