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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그림책 작가들에게 묻다 - 10인의 작가가 말하는 그림책의 힘
최혜진 지음, 신창용 사진 / 은행나무 / 2016년 10월
평점 :
나의 유년기를 세 단어로 요약한다면 나는 어떤 답을 할 수 있을까?
이 책은 프랑스, 벨기에를 무대로 활동하는 그림책 작가 열 명을 저자가 직접 방문하여 인터뷰한 내용을 담고 있다.
좋은 질문을 해야 가치 있는 답이 나오기 마련이다. 상상력, 창의력, 작가의 유년기, 부모와의 관계 등을 통해 창작활동과 삶에 대한 태도를 배울 수 있다. 서구의 그림책을 보고 창의적이고 자유로운 분위기가 강할 것이라 짐작만 하는데 그림책 저자들의 유년기가 마냥 행복하고 자유로운 것은 아니었다. 연배 있는 분은 우리나라 60대같이 전쟁을 겪기도 하고 냉정한 엄마 슬하에서 불우하게 자란 분도 있다. 희망적이고 고무적인 건 유년기나 학창시절이 인생과 창작에 절대적인 것이 아니며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속담은 폐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원래 불완전하며 그 불완전을 딛고 시도해보는 데서 예술, 창작이 시작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인터뷰 면면을 살펴보자.
‘관찰하는 시선’ 조엘 졸리베
관찰력을 기르려면 '좋다', '예쁘다' 하는 식의 첫인상에 머물러서는 안 돼요. '이것은 무엇인가',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어디에서 온 이미지인가', '누가 만든 것인가' 주체적으로 정보를 소화하고 판단하면서 보려고 하는 것이 관찰력과 시각적 문해력을 기르는 첫걸음이에요. 26쪽
관찰력은 보는 대상에 감정이입을 하거나 감탄할 줄 아는 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감탄하는 마음이 관찰의 시작이라고 생각해요. 관찰이라는 행위 안에는 사랑의 성분이 분명 들어 있습니다. 저는 대학생 때부터 지금까지 수십 년째 카페나 지하철에서 관찰 크로키를 하고 있는데요. 우리가 흔히 못생겼다고 치부하는 사람을 발견하게 되면 전 그 사람만이 가진 선과 형태감에서 아름다움을 찾아요. 그림 그리는 사람들 특징 같기도 한데 사실 전 모든 존재는 아름답다고 믿습니다.
27쪽
관찰력을 기른다고 자연백과를 들이거나 무리하게 나들이를 다닐 필요 없이 일상에서 만나는 이미지를 진지하게 살펴보면 되는 거다. 아들 어릴 때 강원도 국도변에서 하루종일 여러 차들과 화물트럭을 오가는 걸 지켜보던 때가 생각이 난다. 차바퀴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던 아들의 눈망울이 떠오른다.
‘상상을 만드는 질문’ 키티 크라우더
키티 크라우더는 선천적 난청을 통해 사람들의 말과 표정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그 너머의 감정을 자주 상상했다. 저 가면 너머에 무엇이 있을까? 키티 크라우더는 요즘 학생들이 몸을 쓰는 수업을 많이 하지 않는 것을 안타까워한다. 글을 쓸 때 기억을 관장하는 뇌가 자극을 받는 편인데 손글씨도 잘 쓰지 않는 실정이다.
키티 크라우더가 좋은엄마 상을 제시한 부분이 인상적이다.
30년 후에 두 아이가 저를 좋은 엄마였다고 회상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우선은 엄마 이전에 자신만의 삶을 가진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믿어요. 아무리 음식을 잘하고 뒷바라지를 잘 한다고 해도 그 안에서 엄마의 열정과 영혼이 안 느껴진다면 아이는 껍데기 엄마만 만나는 겁니다. 뭔가에 열정을 지닌 살아 있는 엄마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우표를 모으거나 봉사활동을 다니거나 정원을 가꾸거나 그 대상은 무엇이 되어도 상관없어요. 엄마 스스로 행복해질 수 있다면요. 좋은 엄마가 되는 길은 나 자신의 행복을 디자인하는 과정과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61쪽
‘공감의 쓸모’ 올리비에 탈레크
부모님이 가족과 친구, 이웃을 섬세하게 돌보는 타입이어서 어느 정도 보고 배운 것도 있겠지만 관찰로도 공감 능력을 키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전 어릴 때 동네 친구들 관찰하는 걸 무척 좋아했어요. 81쪽
탈레크는 자의식 강한 예술가는 신뢰하지 않는다고 한다. 혼자 작업실에 있다 보면 과장된 자의식이 생기기 마련이다. 밖에 나와 사람들과 소통하고 나 아닌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느낄지 상상해보는 게 공감 능력의 본질이라고 한다.
‘치유하는 상상’ 클로드 퐁티
클로드 퐁티는 부모님의 불화로 불우한 유년기를 보냈다. 유년기를 어렵고, 슬펐고, 혼자라는 세 단어로 정리할 정도였다. 작가는 딸 아델에게 선물하기 위해 그림책을 만들어 지금도 꾸준히 작업하고 있다. 아델을 키울 때 완벽한 부모는 없다는 것과 아이는 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닌 스스로를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중요한 원칙으로 세웠다고 한다.
“시도해보고, 감탄하고, 수정하고, 배우고 다시 해보면서 변화하는 존재가 사람입니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속담은 거짓말이에요. 그 말 좀 믿지 마세요. 아이에게든 어른에게든 산다는 건 예측 불가능한 난관을 통과하는 과정이고, 우리는 언제든 그 과정에서 배우고 수정하고 진화할 수 있습니다.” 103쪽
아이는 조부모, 부모의 양육방식과 세계관에 영향을 받지만 인간은 그것에 절대적으로 지배될 정도로 약하지는 않다.
‘작은 용기’ 세르주 블로크
알자스 시골뜨기, 행복한, 뛰어놀다를 유년의 키워드로 택한 작가는 부모님이 물려주신 최고의 자산으로 이것을 꼽는다.
매일 정육점으로 출근하는 아버지를 보며 규칙적으로 일터로 나가는 것의 의미와 무게감을 배운 것요. 그 일을 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기복 없이, 대단한 기대감이나 불안감 없이, 어제 노력했던 일을 오늘 또 해보는 태도. 그건 예술가에게도 꼭 필요한 태도거든요. 사실 창작 활동에서 ‘반복’은 피할 수 없는 요소입니다. 마음에 드는 선 하나가 나올 때가지 똑같은 짓을 계속해야 하는데 그걸 지겨워하거나 진도가 안 나간다고 좌절하면 성장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140-141쪽
똑똑하고 가진 게 많은 부모가 아이들을 잘 키우는 게 아니라 묵묵하게 자기 일을 불평 없이 해나가는 평범한 부모가 자식의 삶에 큰 울림을 줄 수 있다.
작가의 부모님은 작가의 불안정한 작업을 묵묵히 바라봐주었다. 세상의 속도대로 살지 않고 나만의 속도로 살아본 사람은 좀더 용기를 낼 수 있다. 작가는 창의성이 뭔가를 해보는 용기, 잘 안된다 하더라도 시도해보는 용기에서 시작한다고 말한다. 학창시절에 쉬는 시간에 놀 때 큰 결심을 가지고 노는 게 아니듯이 그냥 한번 해보자 하는 마음이 중요하다.
‘결점에서 태어난 창의성’ 벵자맹 쇼
벵자맹 쇼는 참고 자료를 전혀 보지 않고 생각한 것을 그리는 작가이다. 그의 성장기는 완벽주의자로 살던 시기와 결점을 받아들이고 결점과 함께 일하는 지금으로 나뉜다고 한다. 부모님은 시골 농사꾼 장남이 불확실한 예술을 한다고 해도 반대하지 않으신 분들이다. 그의 아버지는 말수가 적었지만 항상 아들을 믿고 있다는 걸 마음으로 느끼게 해주었다. 그 역시 아이들이 보호가 필요할 때 나서고 대개는 믿고 기다리려고 한다.
그의 스케치 노트는 학창시절 깜지같이 빽빽하게 선과 형태들이 채워져 있다. 마음에 드는 선을 찾기까지 시도하고 또 시도할 뿐이다. 처음부터 완벽하게 나타나는 선은 없으니.
‘깊은 심심함’ 에르베 튈레
스마트폰, 상업적 놀이공간으로 가득한 요즘을 사는 아이들은 심심할 겨를이 없는데 심심하다는 말을 달고 산다. 발터 벤야민은 “깊은 심심함은 경험의 알을 품고 있는 꿈의 새”라고 했다. 저자가 창의력을 기르려면 더 무얼 해야 하냐고 묻는데 튈레는 오히려 뭔가를 하지 말라고 한다. 창작하는 데에는 “결핍과 심심함, 불확실한 기다림”이 필요하다.
‘다르게 보기, 오래 보기’ 안 에르보
아이들 어릴 때 많이 읽었던 안 에르보라 너무 반가웠다. 특히 이 인터뷰가 좋았다. 책에 커피포트가 자주 등장하는데 특별한 의미가 있냐고 묻자 이렇게 답한다.
전 자기만의 몸가짐을 가진 물건을 좋아합니다. 의자나 커피포트가 그래요. 220쪽
딱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이다. 여기에 텀블러나 책도 더해서.
“저는 책에 질문을 많이 넣습니다. 하지만 답은 절대 적지 않습니다. 인생의 본질이 그래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야 하는 상황이 끊임없이 이어지지만, 정답은 아무도 모른 채 나아갑니다. 우리를 발전하게 만드는 건 인생의 그 모호함입니다.”
안 에르보는 창의력이란 자신만의 답을 찾는 과정의 불편과 막막함을 견디는 데서 시작한다고 본다.
육아철학마저 신선했다. 아이를 내 삶의 중심이 아니라 주변에 놓으려 한다는 것. 아이 중심으로 가족의 삶이 짜이면 아이가 막강한 무게를 느끼게 되고 겁이 많아져 결국 뭐든 제대로 시도할 수 없게 된다는 걸 한국의 부모들이 알았으면 좋겠다. 아이를 삶의 주변에 놓는다는 건 아이가 중요하지 않다는 게 아니라 자신의 삶과 아이의 삶을 분리하고 자신의 삶에 더 충실한다는 것을 뜻한다. 지금의 나. 명심하고 명심해야 할 말이다.
‘시간 사용법’ 이치카와 사토미
이치카와 사토미는 일본에서 정규 예술교육을 받지 않고 프랑스로 건너와 보모를 하며 그림책을 배우고 작품을 내놓고 있다. 아프리카와 개발도상국을 여행하면서 사진을 찍지 않고 자신만의 속도로 스케치하며 여행하고 있다. 시간을 들여서 할 일이 세상에 많은데 그중 어느것에 시간을 더 많이 들일지 자신이 정하는 게 중요하다. 좋아하는 일을 시간을 들여 천천히 하라는 충고가 와닿는다. 전부터 난 뭐든 빨리 많이만 하려고 했다. 요즘 책읽기도 그런 편이다. 몇 권 안 되는 내가 좋아하는 책들을 자주 공들여 읽어야겠다.
‘자기 믿음’ 베아트리체 알레마냐
유년기를 즐거움, 여행자, 관찰자로 설명한 작가는 완벽주의를 가진 아버지로부터 끈기와 투지를 배웠다.
“행복에 대해 말하는 창작물을 짓고 싶다면 우선 자신이 행복했던 느낌을 떠올려 그걸 전달해야겠죠. 그런 의미에서 창의력은 자기를 믿는 것입니다. 창의성이 최초로 태어나는 순간은 우리가 보고 느끼고 경험할 때입니다. 그 느낌과 생각, 충동, 자기 안의 목소리를 믿고 그리로 자신을 던지는 것. 저에겐 그게 창의성입니다. 자기 믿음 없이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일은 불가능해요.
303쪽
인터뷰 끝까지 하나하나 버릴 장이 없는 책이었다.
창의력이나 상상력이라고 하면 뭔가 어떤 특별한 환경에서 길러진다고 믿는다. 특히 한국의 획일적인 교육환경이며 문화가 어떻고 비판하며 한국은 이래서 안 된다고들 한다. 하지만 인터뷰를 읽다보니 서구 작가들이라고 해서 크게 자유롭고 풍부한 환경에서 자란 것만은 아니다. 몇몇 작가는 부모가 믿고 지원해주었고 몇몇은 불우한 유년기를 보내면서도 예술과 내면의 힘으로 극복했다.
유년기나 부모가 어떻든 간에 작가들의 공통적 특질은 혼자 있는 시간을 잘 버틸 줄 알고 매일매일 꾸준히 작업을 하며 불확실한 가운데서도 용기를 잃지 않고 자신을 믿는다는 것이다. 매일매일 아이를 키운다고는 하지만 부모도 함께 성장하는 것이다. 아이에게 용기를 주고 믿어주는 것도 필요하지만 완벽하지 않은 나를 믿고 내 삶에 여유를 주는 시간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