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스 크로싱
존 윌리엄스 지음, 정세윤 옮김 / 구픽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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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점  ★★★★  A-




서울 독서 모임 <달의 궁전>

5월의 책


(모임 날짜: 525일 토요일)





모든 것은 변한다이 자명한 진실은 동서양 곳곳에 있다석가모니 부처(佛陀)는 열반(涅槃모든 괴로움에 벗어나 해탈의 경지에 이른 상태)에 가까워지자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당부한다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이라는 불교 경전에 부처의 마지막 말 자취가 있다.



 是故比丘無爲放逸我以不放逸故自致正覺無量衆善亦由不放逸得一切萬物無常存者此是如來末後所說.

 

 “그럼 비구들이여이제 마지막으로 너희들에게 고하노라만들어진 것은 모두 변해가는 법이니라게으름 피우지 말라나는 오직 게으르지 않음으로써만 홀로 바른 깨달음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이다방일치 말고 정진하여라.” 이것이 여래의 최후의 말이었다.

 

(도올 김용옥달라이 라마와 도올의 만남 1》 180)



고대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Heraclitus)는 만물이 변한다는 뜻을 가진 판타 레이(panta rhei)’를 끊임없이 흐르는 강물로 비유하면서 설명한다. 



 어디에선가 헤라클레이토스모든 것은 나아가고 아무 것도 제자리에 머무르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는 것들을 강의 흐름에 비유하면서 너는 같은 강물에 두 번 들어갈 수 없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플라톤, 크라튈로스402a,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단편 선집243쪽 재인용)



우리는 생각보다 변화를 낯설어한다. 젊음을 유지하고 싶어 하고, 영원한 안식처를 갖고 싶어 하고, 변치 않는 사랑과 우정을 갈망한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 영원은 없다.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존 윌리엄스(John Edward Williams)의 소설 부처스 크로싱(Butcher’s Crossing)은 지상에 있는 모든 것은 영원하지 않다는 삶의 본질을 떠올리게 해준다. 윌 앤드루스(Will Andrews)는 미국의 철학자 에머슨(Ralph Waldo Emerson)의 자연주의 사상에 심취한 청년이다. 앤드루스는 인간의 발길이 아직 생기지 않은 자연을 직접 보고 느끼기 위해 하버드대학을 중퇴하고 서부로 향한다.


앤드루스는 부처스 크로싱이라는 마을에 도착한다. 이곳에 들소를 잡는 사냥꾼들이 주로 거주한다. 들소 사냥꾼들의 목표는 들소 가죽이다. 들소를 잡아서 얻은 가죽을 상인에게 판매한다. 개인주의적 성향이 높은 사냥꾼 밀러(Miller)는 오로지 자기 자신을 위해서만 들소를 잡는다. 과거에 그는 희귀한 들소 무리가 사는 평원을 우연히 발견한다. 평원을 잊지 못한 밀러는 그곳에 가기 위해 자신과 함께 사냥할 대원을 직접 모집한다. 그는 서부 자연을 궁금해하는 앤드루스에게 들소 사냥을 함께 하자고 제안한다. 한쪽 팔이 없는 찰리 호지(Charley Hoge)는 예전에 밀러와 함께 들소를 사냥했던 동료다. 그는 항상 성경을 품속에 들고 다닌다. 쉬고 있으면 성경을 펼쳐서 소리 내서 읽는다. 프레드 슈나이더(Fred Schneider)는 가죽을 벗기는 일에 능숙하다. 프레드 역시 개인주의자라서 종종 밀러의 의견에 직설적으로 반대한다.


밀러 일행은 강인한 인내심으로 물이 금방 바짝 말릴 정도의 위력을 가진 무더위를 뚫고 지나가는 데 성공한다. 평원에 도착한 그들은 엄청나게 많은 들소 떼를 발견하고, 본격적으로 사냥에 나선다. 이날을 오랫동안 고대한 밀러는 마치 같은 일만 반복하는 기계가 된 것처럼 들소를 학살한다. 그의 머릿속에는 모든 들소를 전멸하겠다는 일념만 가득 차 있다. 들소 사냥에 눈이 먼 밀러의 과욕은 점점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밀러의 사냥 집착은 결국 본인과 다른 사람들을 더 큰 위험에 빠뜨리게 만든다. 들소의 피가 물든 평원은 들소들을 무참히 살해한 인간들을 순순히 보내려고 하지 않는다. 화가 난 자연은 눈을 퍼부어 온 세상을 하얗게 만든다. 밀러 일행의 야영지는 폭설로 고립된다. 밀러 일행은 추위와 굶주림과 싸우면서 겨울을 버틴다.


밀러는 팔 수 있는 양의 들소 가죽만 챙기고, 나머지는 봄에 다시 와서 가져가기로 기약한다. 밀러 일행은 일 년 만에 부처스 크로싱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일 년 사이에 확 달라진 세상이다. 밀러 일행이 열심히 들소를 죽이고 가죽을 벗기고 있었을 때 들소 가죽 사업은 죽어가고 있었다. 어렵게 가지고 온 가죽을 팔지 못한 밀러는 큰 허탈감과 분노에 빠진다.


만약에 찰리 호지가 성경책 대신에 불교 경전이나 헤라클레이토스의 어록을 모아놓은 책을 들고 있었다면 과연 밀러는 평원으로 가는 여정을 멈췄을까? 부처와 헤라클레이토스의 말을 모르더라도 세상이 언젠가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어야 했다밀러는 절대로 피할 수 없는 판타 레이의 흐름을 읽지 못한 인물이다. 가죽 상인에게 복종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위해서 들소를 사냥하겠다는 그의 자신감은 지나치게 부풀어진 오만이다. 스스로 과장한 오만은 욕심까지 커지도록 부추긴다오만과 욕심을 스스로 통제하지 못한 밀러는 자연을 정복할 수 있다는 환상에 갇힌다. 그는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환상(fantasy)을 현실이라고 착각한다. 들소 사냥을 영원히 할 수 있고,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들소 가죽을 전부 가지겠다는 환상. 밀러를 제대로 속인 판타지가 만들어 낸 현실에 판타 레이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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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매기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 지음, 강명수 옮김 / 지만지드라마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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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점  ★★★★  A-












잃어버린 사람이에요.

당신도 그렇네요.

 

(고연옥, 희곡 <인간이든 신이든> 중에서

고연옥 희곡집 3316쪽)





체호프(Anton Chekhov)4대 장막극에 속한 갈매기는 암울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대사로 시작된다.

 





메드베덴코: 당신은 왜 항상 검은 옷을 입고 다니죠?

마샤: 이건 내 인생의 상복이에요. 난 불행하거든요.

 


마샤는 극작가가 되고 싶은 가브릴리치를 좋아한다. 그러나 가브릴리치는 대지주의 딸 니나를 좋아한다. 니나도 가브릴리치를 좋아하고 있으며 그녀의 꿈은 연극 배우다. 가브릴리치는 새로운 형식의 희곡을 써서 소린 영지에 체류하는 사람들에게 공개한다. 연극의 주연 배우는 니나다. 하지만 사람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지 못한다. 가브릴리치의 재능을 유일하게 알아보는 사람은 소린의 주치의 도른이다. 유명한 연극 배우인 가브릴리치의 어머니 이리나는 일하지 않고 글만 쓰는 아들을 못마땅하게 여긴다. 미망인 이리나는 소설가 트리고린과 연인 관계다. 가브릴리치는 명성과 사랑을 동시에 얻은 트리고린을 싫어한다.


낙심에 빠진 가브릴리치는 갈매기를 사냥한다. 그는 니나 앞에 죽은 갈매기를 보여주면서 자신도 언젠가는 자살할 거라고 말한다. 하지만 니나는 가브릴리치를 이해하지 못한다. 니나의 마음은 기브릴리치가 아닌 트리고린으로 향해 있다. 니나는 가브릴리치의 희곡보다 트리고린의 소설 <낮과 밤>을 좋아한다. 트리고린은 자신이 쓴 소설에 큰 관심을 보인 니나에 이끌린다. 결국 두 사람은 사랑에 빠졌고, 다시 만나기로 약속한다.


체호프는 의욕적으로 글을 쓴 작가. 젊은 시절 체호프는 체혼테라는 필명으로 짤막한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당시 체혼테가 쓴 소설들은 권위 있는 문학잡지가 아닌 유머 잡지에 실린다. 그에게 글쓰기는 부업이었다. 의사라는 안정적인 직업을 가질 때까지 체호프는 생계비를 벌기 위해 글을 썼다. 일 년 동안 백 편이 넘는 단편소설을 썼다.


체호프는 두 번째 장막극 <숲의 정령>이 상업적으로 실패한 이후로 7년 동안 장막극을 쓰지 않았다. 체호프가 절치부심 끝에 쓴 장막극이 바로 갈매기체호프는 7년 전에 잃어버린 명예를 되찾고 싶은 마음에 의욕적으로 갈매기를 썼다. 그는 극작가이자 의사인 체호프 본인 모습뿐만 아니라 화가, 작가, 연극 배우로 활동하는 지인들의 삶까지 녹여서 새로운 인물들을 만들었다가브릴리치는 대중성이 있으나 틀에 박힌 주류 문학(또는 예술)과 파격적인 형식의 새로운 문학이라는 갈림길에 선 체호프의 모습이 반영되어 있다. 작가로서의 명성과 경제력을 동시에 얻으려면 대중과 비평가들의 입맛에 맞는 작품을 써야 한다. 그러나 가브릴리치의 머릿속에 새로운 형식이 자꾸만 나타난다. 그것이 글을 쓰려는 가브릴리치의 손목을 여러 번 잡는다글을 제대로 쓰지 못할수록 가브릴리치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한다. 극이 진행될수록 가브릴리치가 잃어버린 것이 하나씩 늘어난다공교롭게도 가브릴리치는 자신이 정말 소중하게 여기는 것들을 잃어버린다. 새로운 형식의 문학을 세상에 알리겠다는 젊은 자신감, 니나 그리고 어머니 이리나.


니나는 문학 청년 가브릴리치를 좋아하지만, 현실과 동떨어진 이상을 찾으려고만 하는 그의 모습을 사랑하지 않는다. 니나는 가브릴리치와 완전히 다른 삶을 사는 트리고린이야말로 자신이 원하는 진정한 사랑이라고 믿는다. 트리고린과 함께 모스크바에 살면 연극 배우가 되는 꿈을 잃어버릴 가능성이 줄어든다. 결국 니나는 자신의 꿈과 사랑,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소린 영지를 떠나기로 결심하고 가브릴리치를 포기한다. 하지만 트리고린과의 사랑은 실패로 끝나고, 불행한 일들을 연이어 겪은 이후로 연극 배우의 꿈이 시들어져서 더 이상 반짝거리지 않는다. 니나는 한순간의 어리석은 판단으로 자신에게 제일 중요한 존재들을 잃어버린 사실을 뒤늦게 깨닫는다하나는 자신을 외면한 니나를 여전히 사랑하고 있는 가브릴리치, 또 하나는 가브릴리치를 사랑했고 화려했던 과거의 본인 모습이다.


갈매기에서 처음으로 대사를 주고받은 마샤와 메드베덴코도 소중한 무언가를 잃어버려서 불행해진 사람들이다. 인생의 상복을 입는다는 마샤의 대사는 희곡의 첫인상이자 희곡의 모든 것을 담고 있다. 그것은 극 중 인물들 모두가 마주하게 되는 비극적인 진실이다갈매기》에 느닷없이 일어난 비극적인 결말을 생각하면 마샤의 대사가 더욱 애잔하게 느껴진다. 갈매기에 나오는 모든 인물의 복장은 제각각 다르지만, 그들이 언젠가 입어야 할 옷은 검은 옷이다. 그들은 인생의 상복이 어울리는 사람들[주]이다



(사이)


:

지금 우연히 이 글을 보고 있는 당신도 그렇네요. 

당신도 제법 인생의 상복이 잘 어울려요.

아니라고 부정해봐도 소용 없어요.

살면서 언젠가는 인생의 상복을 입게 되는 날이 올 테니까요. 

아니라고? 당신이 몰라서 그렇지,

이미 상복을 입은 채로 살아가고 있을 수 있어요.





[] 유진 오닐(Eugene O’Neill)의 희곡 상복이 어울리는 엘렉트라(이형식 옮김, 지만지드라마, 2019)에서 따온 표현이다. 이 작품 역시 불행한 사람들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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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프루 GD 시리즈
티아구 호드리게스 지음, 신유진 옮김, Nyhavn 사진 / 알마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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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점  ★★★★  A-








[희곡 가게 <인스크립트> 2024‘1월의 인스크립트추천 도서]


<인스크립트> 인스타그램 계정

https://www.instagram.com/inscriptbooks/





유령은 희끄무레하다. 보이지 않고, 만질 수도 없다. 이와 반대로 눈에 보이고, 만질 수 있는 유령이 있다. 이 유령의 이름은 엑토플라즘(ectoplasm)’이다. 이것은 유령이라기보다는 신비로운 물질에 가깝다. 엑토플라즘은 영매(靈媒)의 몸에서 나온다. 그것하얗고 끈끈한 액체로 되어 있다. 엑토플라즘이 흘러나오는 부위는 입, 콧구멍, 귓구멍이다밖으로 나온 엑토플라즘은 죽은 자의 모습으로 변한다사람들은 엑토플라즘이 영혼의 실체를 밝혀 줄 수 있는 물적 증거로 확신했다. 그들은 엑토플라즘을 사진으로 촬영했다. 하지만 엑토플라즘을 찍은 사진 대부분은 조작되었거나 가짜인 것으로 판명되었다.


시간은 항상 뜨겁다. 시간은 식을 줄 모르고 계속 앞으로 나아간다. 열기를 내뿜는 시간 앞에서 살아있는 존재는 맥을 못 춘다. 파릇파릇한 생명은 점점 누렇게 변하면서 사라진다. 기억은 정교한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시간의 열기가 닿는 순간 기억은 원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사르르 녹는다이처럼 시간은 모든 것을 태우고 파괴한다엑토플라즘이 가짜라고 해도 죽은 자를 잊지 못한 사람들은 죽은 자가 엑토플라즘으로 다시 태어나길 바란다. 영매는 시간에 태워져서 재로 남은 기억을 뭉쳐서 복원한다.


<소프루>는 무대 위에 열연(熱演)하는 배우들, 이 사람들의 뜨거운 연기 열정을 덥혀 주는 극장에 다시금 불을 지피는 희곡이다. 소프루(sopor)’는 포르투갈어로 을 뜻한다. 우리가 내쉬는 숨은 눈에 보이지 않고, 한순간에 사라진다. 배우들의 연기도 마찬가지다. 배우는 무대 위에 오르기 전에 캐릭터(character)와 한 몸이 된다. 캐릭터가 된 배우는 숨 쉬듯이 연기한다. 종이에서 살고 있던 캐릭터는 무대에서 다시 태어난다배우는 온몸을 이용해 캐릭터의 성격을 보여주고, 표정과 목소리로 캐릭터의 감정 상태를 표현한다. 관객은 배우들의 숨소리(연기)와 숨결(연기력)에 집중한다. 연극이 끝나고 나면 배우의 몸속에 캐릭터는 남아 있지 않다. 무대 위에서 숨이 되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극장에 배우만 있는 게 아니다. ‘그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살아 있다. 하지만 관객은 그 사람을 볼 수 없다. 그 사람의 정체는 프롬프터(prompter)프롬프터는 무대 근처에 있다. 배우들이 열심히 숨 쉬는 무대 뒤쪽이나 아래쪽에. 프롬프터는 무대 근처에 숨어 있다. 배우들을 바라보면서 그들의 대사를 읊어준다. 캐릭터가 된 배우가 숨 쉬는 도중에 동작과 대사를 잊어버리면 캐릭터의 생명력이 끊긴다. 프롬프터는 배우를 위해 다음 동작과 대사를 알려준다. 그러므로 프롬프터는 배우와 캐릭터를 살리는, 아주 중요한 존재다.

 

<소프루>에 등장하는 예술감독은 프롬프터의 역할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예술감독은 프롬프터가 주인공인 연극을 만들고 싶어 한다.

 


 프롬프터, 당신을 말하고 싶어요. 프롬프터를 연기하는 배우가 아니라, 진짜 프롬프터인 당신이 무대 위에서 배우들에게 대사를 알려주고 그들을 구조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요. 사고를 다루는 이야기를 쓰는 거죠. 사고가 났을 때의 구조대원 이야기요. 나는 당신을 위한 연극을 쓸 거예요


(<소프루> 3, 12)

 


평생 숨어 있는 존재로 살아온 프롬프터는 예술감독의 제안을 거부한다. 프롬프터는 항상 시커먼 옷을 입는다. 보이지 않으려고 철저히 숨으면서 살아온 프롬프터는 화려한 조명 빛을 받아야 하는 무대 정중앙이 낯설다예술극장은 프롬프터를 극장의 호흡’, ‘극장의 기억’, ‘극장의 허파’(<소프루>, 19, 80)로 표현하면서 찬사를 보낸다. 프롬프터는 자신과 함께 일했던 배우들의 숨소리를 기억하기 위해 기록한다.


 

 나는 대사에 밑줄을 긋고 날짜를 적어뒀습니다. 늘 그렇게 해왔어요. 만약 누군가 극장의 기록 보관소에서 내가 프롬프터로 참여했던 모든 대본을 찾는다면, 내가 지금까지 일하는 동안에 속삭였던 모든 대사들을 정확히 알 수 있을 겁니다.

 

(<소프루> 20, 82)

 


<소프루>의 프롬프터는 배우뿐만 아니라 스태프들도 기억한다. 스태프는 배우가 숨 쉴 수 있는 무대를 만든다관객은 무대 위에 흘린 배우의 땀을 기억하지만, 무대를 만들다가 흘린 스태프의 피는 모른다. 그래서 프롬프터의 기억력은 소중하다.


프롬프터는 점점 사라지고 있는 직업이다. 그러나 프롬프터가 없으면 배우와 캐릭터의 숨소리도 영영 사라진다. 프롬프터는 뜨거운 시간 한가운데 뛰어들어 타버린 배우와 캐릭터 모두를 다시 살릴 수 있는 존재다. 따라서 <소프루>는 프롬프터의 눈과 입에서 흘러나온 액터플라즘(actorplasm)’이다. 액터플라즘이 많을수록 좋다. 한 번 나오는 순간 금방 사라지는 배우의 숨소리를 다시 볼 수 있으니까.


아, 그런데 프롬프터가 진짜로 사라진다면 이 일은 누가 해주지? 극장을 찾는 관객이 하는 수밖에…‥




우리는 극장에서 모두 같은 공기를 마십니다.

 

배우, 스태프들, 인물들. 우리는 같은 공기를 마십니다.

 

어쩌면 그래서 우리는 늘 같은 이야기로 되돌아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같은 공기를 마십니다. 우리는 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각자만의 방식으로 숨을 쉬지만 그 공기는 같습니다.

 

나는 그들이 숨을 쉬는 것처럼 숨을 쉬어보려고 합니다.



(<소프루> 16, 57~59, 프롬프터의 대사)

 

 

관객도 배우와 함께 호흡하고, 같은 공기를 마신다. 관객인 나는 배우들이 숨 쉬는 것처럼 숨을 쉬어보려고 한다. 비록 정확하지 않더라도 나만의 액터플라즘을 만들 것이다. 





추신

 

* 소프루》에 <소프루><그녀가 죽는 방식>, 총 두 편의 희곡이 실려 있다.

 

* ‘actor’남자 배우를 뜻한다. 여배우는 ‘actress’를 쓴다. 하지만 내가 만든 조어 액터플라즘(actorplasm)에 남배우/여배우로 명시되는 젠더 이분법이 반영되어 있지 않다배우의 연기 활동을 설명할 때 자주 거론되는 기준들, 즉 연령(성인 배우/아역 배우), 연기 비중(주연/조연/단역) 또한 배제되어 있다. 따라서 액터플라즘의 액터배우를 통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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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아닌 일로
나탈리 사로트 지음, 이광호.최성연 옮김 / 지만지드라마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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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A-





말은 무기다라는 제목의 책이 있다. 이 책은 말 잘하는 기술을 알려주는 자기계발서다. 이 책을 쓴 일본인 저자는 말을 잘하려면 자기 생각을 먼저 정리하라고 당부한다. 머릿속 생각이 뒤죽박죽 헝클어진 상태로 말하면 입 안에서 말이 배배 꼬인다. 상대방은 꼬여서 풀리지 않는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다. 생각 정리가 잘 된 말은 상대방의 마음을 움직이게 만드는 강력한 무기다.


하지만 정교한 무기가 되어야 할 말이 때론 무기력해질 수 있다. 상대방이 말귀(馬耳)’라면 신중한 생각 끝에 나온 말도 마이동풍(馬耳東風)으로 흘려듣는다말의 무게는 상당히 가벼워서 침소봉대(針小棒大)’가 되기 쉽다. 바늘 크기만 한 단어를 몽둥이로 만들어 버리는 사람도 있다. 단어가 확 커져 버리면 의미도 확 달라져 버린다. 침소봉대된 단어는 대화를 방해하는 걸림돌이다. 대화가 원활히 이루어지려면 걸림돌을 빼내야 한다. 그런데 대화에 참여한 상대방이 침소봉대된 말에 지나치게 확신하면 문제의 돌을 빼내려고 하지 않는다. 말을 확대해석하는 사람은 자기 생각에 반하는 상대방을 공격한다. 말은 누가 하느냐에 따라 위험한 무기가 된다.


프랑스 작가 나탈리 사로트(Nathalie Sarraute)희곡 아무것도 아닌 일로무기력한 말이 대화하는 등장인물들을 깊은 수렁으로 빠지게 만드는 상황을 그리고 있다. 희곡에 나오는 인물들은 이름이 없는 남자 1’남자 2’. 두 남자는 서로를 잇고 있는 관계를 끊어지지 않게 하려고 대화를 시도한다. 하지만 그들의 입에서 나온 말은 무기력하다극 중간에 남자 3’여자 1’이 나타나 두 사람의 대화에 참여한다. ‘남자 3’여자 1’은 꼬여버린 두 남자의 대화를 풀기 위해 중재자로 나서지만, 도움을 주지 못한다대화가 진행될수록 말다툼으로 변질되고, 공감의 폭이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다. 두 사람이 서 있는 관계의 동아줄은 점점 얇아진다. 계속 늘어나는 두 사람의 무기력한 말은 관계의 동아줄 위에 널브러져 있다. 너저분한 말들은 튼튼했던 두 사람의 관계 동아줄을 한순간에 끊어버릴 힘을 지닌 위험한 무기가 된다. 희곡은 두 남자에게 이득이 없는 무의미한 언쟁만 계속 보여준다.


아무것도 아닌 일로를 무대 위에 올린 연출가들은 원작을 충실히 따르기보다는 자신의 해석에 맞춰 새롭게 변형시켰다. 원작에서는 말이 오고 가는 장면이 주를 이룬다. 어떤 연출가는 두 남자의 대화를 좀 더 생생하게 전달하기 위해 퍼포먼스를 추가하기도 했다. 내가 만약 연출가라면 두 남자의 대화를 결투하는 상황으로 표현하고 싶다.







희곡 텍스트를 이미지로 재현하면 스페인의 화가 프란시스코 고야(Francisco Goya)의 그림 곤봉 결투』(1820~1823년)와 흡사하다. 그림 속 두 남자는 상대방을 죽일 심정으로 곤봉을 휘두른다. 그런데 두 남자의 싸움터는 수렁이다. 두 남자의 눈에는 죽이고 싶은 상대방만 보일 뿐이다. 자신들이 수렁으로 빠지고 있는 위태로운 상황을 모르고 있다. 곤봉 결투이겨도 의미 없고, 서로의 몸과 정신을 소진하게 만드는 갈등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아무것도 아닌 일로허구라고 볼 수 없는 비극이다. 가벼운 일상적인 대화가 어느 순간부터 상대방을 향해 무기를 휘두르는 결투 같은 언쟁으로 변하는 상황이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다. 연극 속 말다툼을 구경하는 우리 역시 언젠가는 비극의 주인공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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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3-12-15 17: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문단이 인상깊네요. 맨 아래 고야의 그림은 처음 보는데, 보는 즉시 음, 고야풍이군..이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고야 그림이네요~

고야 그림은 따로 그림책을 아직 구비하지 못했는데, 생각난 김에 고야 그림 도록을 갖춰놓아야 할 듯합니다..ㅎㅎ

cyrus 2023-12-18 06:37   좋아요 0 | URL
도록은 아니지만, 고야가 쓴 편지와 판화집이 실린 《고야, 영혼의 거울》을 권해드리고 싶어요. 이 책에 관한 제 글 몇 편 있어요. ^^
 
소피의 세계 (합본) - 소설로 읽는 철학
요슈타인 가아더 지음, 장영은 옮김 / 현암사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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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점  ★★☆  B-




[대구 서점 <일글책> ‘하루 10분 벽돌 책 함께 읽기’ 프로젝트 

네 번째 책(2022년 11~12월)]


[대구 인문학 책방 <읽다익다> 명상과 낭독선정 도서]





소피의 세계읽기 쉬운 철학책을 주제로 꾸민 도서 큐레이션의 단골 책이다. 이 책은 1991년 노르웨이에서 처음 발표되자마자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국역본은 199412월에 첫선을 보였다. 청소년을 위한 철학책 소피의 세계는 성인도 접근하기 어려운 철학책 출간이 주를 이루던 당시 90년대 초중반 출판 시장에서 단언 돋보이는 책이었다.

 

소피 아문센(Sophie Amundsen)은 노르웨이의 어느 마을에 살고 있는 소녀다. 소피는 이름이 없는 발신인이 보낸 의문의 편지를 받는다. 편지에 알쏭달쏭한 질문만 적혀 있다.너는 누구니?’ 편지를 보낸 사람은 자신을 철학자라고 소개한 알베르토 녹스(Alberto Knox). 철학자는 소피를 위해 철학사의 주요 인물과 개념들을 편지에 담아서 알려준다. 소피의 철학 수업은 가장 오래된 철학적 질문이 적힌 편지 한 통에서 시작된다. 철학을 풀어낸 소설에 등장인물들의 정체를 추리하게 만드는 추리물 요소까지 잘 섞여 있어서 이야기를 끝까지 보게 만든다.

 

2015년에 출간 20주년을 맞아 합본으로 된 소피의 세계전면 개정판이 출간되었다. 노르웨이 인명과 지명을 외래어 표기법에 맞춰 고쳤으며 일부 문장과 단어를 새로 수정했다고 한다. 하지만 사람도, 책도 시간이 지나면 늙는다. 한 사람의 인생에 큰 영향을 끼친 가치관은 시간이 흐르면서 녹이 슨다. 가치관이 형성하는 데 유용한 영양분이 되어준 책 속의 지식은 점차 텁텁한 맛으로 변한다.

 

녹스는 소피와 소설 밖 독자들에게 한 가지 슬픈 사실을 상기한다. 우리는 성장하면서 중력의 법칙에만 익숙해지는 게 아니라 동시에 이 세계 자체에 길들고 있다는 사실을. 책 소개하는 도서 큐레이터가 철학을 공부하기 시작한 독자에게 소피의 세계를 추천했다면, 그 사람은 오래돼서 녹슨 소피의 세계에 완전히 길들어진 상태일 수 있다. 그리고 소피의 세계에 여전히 고쳐야 할 내용들이 있다는 사실에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을 것이다. 늙어버린 책을 읽으면 머릿속 생각과 지식도 같이 늙는다. 지적 노화는 의심하고 질문하는 습관을 잊어버리게 만든다.

 

책 속 인물은 영원히 늙지 않는다. 그들은 얼굴에 늘어나는 주름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그들이 옳다고 믿는 지식으로 꾸민 생각은 노화를 피할 수 없다. 녹스의 정신은 녹슬어 늙었다. 그가 소피 아문센에게 가르쳐준 것들 일부는 낡고 편협하다.

 

녹스는 이성의 중요성을 틈틈이 강조한다. 그는 소크라테스(Socrates) 이성을 강하게 믿은 명백한 합리주의자로 평가한다. 그런 다음에 소피스트(Sophist)를 소크라테스와 정반대되는 () 철학적 노선을 따른 학파로 분류한다. 오랫동안 소피스트는 철학적이지 않은 불한당으로 취급받았다. 녹스는 이성과 합리주의를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주류 철학사에 길들어 있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소피스트 역시 소크라테스와 마찬가지로 말(logos)과 덕(arete)의 정의와 역할에 관심이 많았다[주1]. 소피스트에게 말은 그저 돈벌이를 위한 도구가 아니었다. 소크라테스가 철학적 대화법인 산파술의 창시자로 알려졌지만, 가장 유명한 소피스트인 프로타고라스(Protagoras)도 질의응답으로 철학을 하는 방식을 시도했다.

 

녹스는 실제보다 과장된 신화로 알려진 뉴턴의 사과일화를 언급한다(308). 뉴턴은 사과나무 아래에서 중력의 심오한 실체를 단 몇 분 만에 알아차리지 않았다. 과학은 우연한 순간에 의해 발전하지 않는다. 과학 역시 철학과 마찬가지로 어떤 현상을 의심하고 검증하는 행위들이 차곡차곡 모여져서 만들어진 학문이다.

 

녹스는 제대로 된 과학 수업을 받아야 한다. 특히 다윈(Charles Darwin)의 진화론을 다시 배워야 한다. 그는 다윈이 인간을 비열한 생존 경쟁의 결과로 만들었다고 주장한다(598). 녹스는 다윈이 자신의 책 종의 기원에서 밝힌 진화론다윈의 영향을 받아 정치적인 관점이 들어간 다른 형태의 진화론을 명백히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 후자는 자신을 진정한 다윈주의자라고 말하지만, 실은 우생학자에 가깝다. 다윈의 진화론과 다윈주의자의 진화론은 같지 않다[주2].

 

녹스는 프랑스 혁명의 구호자유, 평등, 박애라고 표현했다(458). 박애는 원래 의미와 동떨어진 표현이다. 서양 학문을 접한 우리나라 근대 개화기 지식인들이 동시대 일본 지식인들의 번역을 그대로 따라 쓴 게 박애.박애로 잘못 알려진 프랑스어 ‘fraternité’형제애연대감을 뜻한다. 그런데 형제애로 번역하면 혁명에 참여한 여성을 차별하는 기준이 된다. 실제로 세상을 바꾸려고 거리에 나선 여성들은 프랑스 혁명 이후에 자유평등을 보장받지 못했다.

 

녹스는 소피 아문센에게 비판적인 사유를 가르치려고 했다. 부모 세대의 가치 체계뿐만 아니라 방대한 철학사를 압축한 이 책 또한 비판 대상이다. 녹스 선생! 똑바로 앉아 있어요? 불멸의 존재인 당신이 해야 할 일은 끊임없이 공부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지적 노화를 스스로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답니다.[주3]





[1] 참고 문헌: 강철웅 옮김 소피스트 단편 선집》 

(아카넷, 2023), 2

 

[2] 참고 문헌: 양자오, 류방승 옮김 종의 기원을 읽다》 

(유유, 2013)


[3] 녹스가 소피에게 한 말을 패러디한 문장이다.

 

 소피야! 똑바로 앉아 있니? 네가 남은 철학 수업에서 철학자와 소피스트의 차이를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단다. (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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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3-12-04 1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별점이 넘 짠데? ㅋ 이 책이 첨 나왔을 때 인기 대단했지. 나도 그 틈바구니에서 읽었고. 맞아. 어떤 책은 시대를 거스르지만 지금 이 책을 다시 읽는다면 어떨지 모르겠어. 하지만 이 책은 그저 철학에 좀 더 가까이 가게하는 안내서 정도로만 생각하지 대단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적어도 나는. 오히려 그 이후 내가 철학을 좀 가까이 하게될까 싶었는데 역시 그건 아니더군. 재미있게 읽었다고는 말할 수 있지만 나와 비슷한 철학 문외한에게 적극 권하지는 못 할 것 같다. 이후로 비슷한 책이 많이 나왔겠지만 어느 책이 좋은지 난 잘 모르니. 잘 읽었어.^^

cyrus 2023-12-04 21:19   좋아요 0 | URL
뒤에 가면 갈수록 3부의 현대철학 내용이 빈약했어요. 하이데거는 철학 전공자도 공부하기 어려운 철학자예요. 저자가 그걸 염두에 두면서 쓴 건지 모르겠는데 녹스 선생은 하이데거를 거르고 실존주의에 관해 설명했어요. 참고문헌이 없는 것도 아쉬웠어요. 그래서 평점을 깎았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