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과 10월은 ‘라틴아메리카 문학의 달’이었다. 9월에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Gabriel Garcia Marquez)의 소설 《백년의 고독》을 읽었다면, 10월은 안토니오 스카르메타(Antonio Skármeta)의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를 읽었다. 그러고 보니 9월과 10월은 ‘민음사의 달’이기도 하군.
*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백년의 고독》 (민음사, 2000)
* 안토니오 스카르메타 《네루다의 우편배달부》 (민음사, 2004)
평점: 4점 ★★★★ A-
두 작품 모두 ‘나를 관통하는 책 읽기’ 모임 필독서였다. 그리하여 9월과 10월에 가르시아 마르케스와 파블로 네루다(Pablo Neruda)를 집중적으로 읽었다.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를 읽기 전에 네루다에 대해서 알고 싶었다. 예전에 네루다의 시를 접해본 적이 있었지만, 그땐 네루다의 시 문학 세계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저 네루다의 시가 ‘참 좋은 시’라고만 생각했다. 확실히 네루다의 생애를 알고 난 후에 그의 시를 읽으니 정말 시 속에 ‘네루다’가 있었고, 네루다의 삶 속에 ‘시’가 있었다.
* 파블로 네루다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 (민음사, 2007)
평점: 3점 ★★★ B
* 파블로 네루다, 정현종 옮김 《네루다 시선》 (민음사, 2007)
평점: 3점 ★★★ B
* 파블로 네루다, 김현균 옮김 《네루다 시선》 (지만지, 2014)
평점: 4.5점 ★★★★☆ A
네루다가 쓴 시 중에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은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약칭 ‘스무 편의 사랑의 시’)다. 1924년 네루다가 스무 살 때 발표한 시집이다. 《스무 편의 사랑의 시》가 워낙 유명해서 시인의 첫 번째 시집으로 오해할 수 있다. 《스무 편의 사랑의 시》는 네루다의 두 번째 시집이다. 《스무 편의 사랑의 시》가 나오기 일 년 전에 네루다는 첫 번째 시집 <황혼 일기>을 발표했다. <황혼 일기>에 대한 평단의 반응은 좋았지만, 대중의 관심을 많이 받은 시집은 《스무 편의 사랑의 시》다.
젊은 네루다는 《스무 편의 사랑의 시》를 통해 자신의 솔직하면서도 대담한 감정과 욕망을 표출한다. 특히 이 시집에서 가장 맨 먼저 나온 『한 여자의 육체』는 독자의 얼굴을 화끈거리게 만들 수 있다. 네루다의 시를 우리말로 옮긴 정현종 시인은 《스무 편의 사랑의 시》의 매력이 “품격을 잃지 않은 표현의 적나라함과 솔직함”이라고 하지만,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 독자가 있을 것이다. 시인은 자신에게 내맡긴 벌거벗은 여인을 ‘세계’로 상정하여, 자신은 ‘농부’가 되어 여인을 정복하려고 한다.
한 여자의 육체, 흰 언덕들, 흰 넓적다리,
네가 내맡길 때, 너는 세계와 같다.
내 거칠고 농부 같은 몸은 너를 파 들어가고
땅 밑에서 아들 하나 뛰어오르게 한다.
(『한 여자의 육체』 중에서, 정현종 옮김)
이 시에 묘사된 ‘여자(의 육체)’는 수동적인 존재이다. 시인은 우아한 여자의 육체를 사랑하고 소유하면 ‘터널 같은 외로움(이 시에서 가장 유명한 구절: “나는 터널처럼 외로웠다”)’을 벗어날 수 있다. 페미니즘 비평의 관점으로 이 시를 해석하면 남성의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데 그치고 마는 여성의 육체를 찬양한 시인의 남성 중심적 시각을 비판할 수 있겠다.
《스무 편의 사랑의 시》는 라틴아메리카의 젊은 독자들의 사랑을 많이 받은 시집이다. 아마도 젊은 시인의 솔직 과감하고 에로틱한 사랑 고백에 공감하는 젊은 독자들이 많았으리라. 반면 보수적인 가톨릭 전통 속에 살아온 독자들은 이 시의 선정적인 표현을 탐탁지 않았다. 이러한 독자의 반응을 반영한 인물이 《네루다의 우편배달부》에 나오는 과부다. 그녀는 네루다의 에로틱한 시를 좋아하지 않는 인물이다. 소설의 주인공 마리오는 과부의 딸을 사랑하는데, 과부는 네루다의 시를 읊으면서 딸에 접근하는 마리오가 못마땅하다. 과부는 네루다의 시에 있는 구절(‘벌거벗은’, 스페인어: desnuda)을 문제 삼는다. 그녀는 이 시의 구절을 트집 잡으면서 마리오가 딸의 벌거벗은 몸을 봤다면서 분노한다. 마리오와 딸의 결혼을 반대한 과부를 설득하려고 온 네루다는 시의 내용이 꼭 실제 상황으로 볼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한 여자의 육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그 시 한 편만 콕 집어 시집 전체마저 부정적으로 보면 《스무 편의 사랑의 시》에 수록된 나머지 작품들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다. 그리고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같은 초기작에 너무 주목하면, 상대적으로 네루다의 중기작과 후기작에 대한 관심이 줄어든다. 《스무 편의 사랑의 시》 이후에 네루다의 시는 좀 더 다채로워지고 풍성해진다. 네루다는 공산주의를 지지한 초현실주의자들과 친분을 맺었는데, 그들로부터 영향을 받아 시집 《지상의 거처》(Residencia en la tierra, ‘지상의 주소’라고 하기도 한다)에서 보여준 난해한 초현실주의적인 시를 쓰기도 했다. 네루다가 페루의 마추픽추(Machu Picchu)을 여행한 이후에 쓴 《모두의 노래》는 라틴아메리카의 장대한 역사를 담아낸 역작이다.
우리에게 친숙한 네루다의 시의 대부분은 정현종 시인이 번역한 것이다. 시인이 번역한 네루다 시 선집은 영어 중역본이다. 시인이 번역한 시와 스페인어 원문의 시를 우리말로 그대로 옮긴 김현균 교수의 번역 시를 함께 읽어 보면 두 사람의 번역 차이점을 확인할 수 있다.
* 《스무 편의 사랑의 시》 34쪽
[『나는 네가 조용하기를 바란다』 중에서, 정현종 옮김)
나는 네가 조용하기를 바란다: 그러면 네가 없는 것 같고
그리고 너는 멀리서 나를 듣고 내 목소리는 너에게 닿지 않는다.
마치 네 두 눈이 날아가 버린 것 같고
키스가 네 입을 봉한 것처럼.
* 《네루다 시선》(지만지) 19쪽
[김현균 옮김]
마치 곁에 없는 것 같아 말 없을 때의 네가 좋다.
널 멀리서 내 말에 귀 기울이고, 내 목소리는 네게 닿지 못한다.
네 두 눈은 멀리 날아가 버린 듯하고
한 번의 입맞춤이 너의 입을 걸어 잠근 것만 같구나.
필자는 시인의 영어 중역본과 스페인어 원문을 우리말로 옮긴 김현균 교수의 번역본 중에 누가 더 번역이 낫다고 말하지 않겠다. 그래도 이 두 권 중 하나를 골라 추천해야 한다면 김현균 교수가 번역한 《네루다 시선》을 고르겠다. 김 교수 번역의 《네루다 시선》은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은 네루다의 시집 <에스트라바가리오>(Estravagario, 1958)에 수록된 아홉 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정현종 시인의 《네루다 시선》에는 <에스트라바가리오>에 수록된 시가 단 한 편도 실려 있지 않다. 김 교수 번역의 《네루다 시선》은 네루다의 시 문학 세계가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한눈에 파악할 수 있다. 라틴아메리카 문학을 전공한 역자의 상세한 해설은 네루다의 시 문학 세계가 다가서려는 독자에게 도움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