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주석의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 1
오주석 지음 / 솔출판사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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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8년 만의 재회 
 

오랜만에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 1권을 읽었다. 8년 만이다.
많은 시간을 흘러 사람이 성장하면 키도 커지고 체형도 변하듯이 

이 책도 그런거 같다.
구판의 책표지에는 김정희의 ‘세한도’ 였으나
개정판에는 윤두서의 ‘진단타려도’ 로 되어 있다.
책 크기도 구판보다 조금 켜졌고, 디자인도 Simple하면서도 예전보다 나아졌다.

하얀 색 바탕에 중간에 한국화를 배치하여 여백의 미(美)를 보여주고 있다.
꼭 박물관에 그림이 전시되어 보는 거 같다.

그리고 2권도 출간되었다.
한창 1권을 읽고 있을 때 2권이 나오기를 기다리곤 했었는데.....
5년 전에 백혈병으로 돌아가셨다.
투병 생활 중에서도 우리나라 그림에 대한 연구를 손에 놓지 않았다.
아마도 2권 출간을 위한 구상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돌아가신지 1년이 지난 후에야 생전에 구상하고 있었던 자료들을
한국미술을 연구하는 그의 지인들이 완성한 것이다.
지인들 덕분에 2권의 유고 자료들은 빛을 보게 될 수 있었다. 
 

 

 

 미술 교과서와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

8년 전, 그 때는 중학생이었다.
1권에는 미술 교과서에 나오는 그림들이 있었고
당시 미술 선생님께서 한 번 읽어보라고 하셨기에 읽게 된 것이다.
이 책이 우리나라 그림에 대해 쉽게 설명했다고는 하지만,

중학생의 나이에 한자어의 문장과 동양 사상 내용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았다.
비록 내용은 제대로 읽지 않았지만,

이 책을 읽는 계기로 우리나라 옛 그림들에 더욱 더 관심을 갖게 되었다.

1권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그림은
강희안의 ‘고사관수도’다.  

  


 

깎아지른 절벽의 배경, 바위 위에는 선비가 편안히 턱을 괸 채 흐르는 물을

그윽이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선비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하다.

시끄러운 속세를 떠나 편안하게 자연을 감상하는 선비를 그린 것이다.
항상 이 그림을 보게 되면 나도 선비처럼 편해지기도 하면서도
아무 근심 걱정 없이 미소 지으면서 물을 바라보는  

그림 속 선비가 부러운 느낌도 들게 된다.  

 

미술 교과서로 처음 봤을 때는 그냥 사진 속 그림일 뿐이었다.
하지만 이 책에서도 교과서와 같은 사진 속 그림이었는데도 
나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왜 보는 것의 차이가 생기는 것일까?
미술 교과서에 나오는 산수화와 이 책의 산수화는 비교 자체가 안 된다.
교과서의 그림들은 크기가 작은 반면에  

이 책은 그림 한 점 시원하게 한 페이지 전체를 장식한다.
그러니 이 책만 읽어도 전시회 안 가도 그림 한 점 제대로 감상하는 셈이다.
미술 교과서에는 모든 나라와 모든 인류의 역사를 대표하는 그림들이 수록되어 있다.
즉, 동, 서양의 유명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을 그림들이 교과서 한 권에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교과서는 교과서일 뿐이다. 단지 좋은 점수를 얻기 위한 내용일 뿐이지
감상용으로 쓴 것은 아니니깐 말이다. 
재미있는 것은 시험 기간만 되면 학생들은 잠깐이나마 예술 애호가가 된다.
‘~주의’ 에는 무슨 화가의 그림, 이 그림을 그린 화가, 그림의 표현 기법 등등.....
그림과 그림 제목, 화가 같은 세세한 정보들을 달달 외운다.

문제 형식은 객관식이라서 답 찾는 것이 쉽다.
시험지에 흑백으로 처리된 그림 사진이 나오면
기억력을 발휘하여 바로 망설임 없이 보기에 답을 고른다.
이제 시험이 끝나고 채점을 하면 좋은 점수를 받는다.
그리고 동시에 공부했던 미술 지식들은 기억 속에서 사라지고,
예술 애호가에서 성적을 위해 공부를 해야 하는 평범한 학생으로 되돌아오게 된다.

요즘은 중, 고등학교 미술 교과서가 어떻게 구성되었는지 모른다.
확실한 것은 예전 우리가 공부한 것보다 내용과 구성이 더 좋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예전 교과서보다 수록된 그림 자료가 많다든지
내용면이 훨씬 더 나아졌다고 해서 무조건 교과서가 좋아졌다는 것은 아니다.
교과서를 봐도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을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옛 그림을 보고 즐기는 것은 갑자기 생기는 능력이 아니다.
자신이 창조한 게임 캐릭터가 꾸준히 레벨 업 상승을 시켜 능력을 키우는 것처럼
옛 그림에 대한 심미안(審美眼)을 가지는 것도 미술에 대한 호기심을 바탕으로
자주 그림을 보면서 느낄 줄 알아야 키워지는 능력이다.  
  

 

 

 선비의 미소가 아름다운 이유

1권을 다 읽고 난 후에도
나는 가끔 ‘고사관수도’ 가 있는 페이지를 찾아 다시 본다.
언제나 이 그림을 보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특히, 선비의 미소가 잊혀 지지 않을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동, 서양화에 나오는 인물 중 최고의 미소일 것이다.  

                                                                 


        
단연 미술 작품 중 최고의 미소라면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 가 있다.
그녀의 미소는 
보는 사람들을 자신에게 집중하게 만드는 독특한 매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우리들은 모나리자의 미소를 알 수가 없다.  

일반적인 기분이 좋아서 웃는 거 같으면서도, 

어떻게 보면 뭔가 우울한 기분이 감도기도 한다. 

보는 사람마다 미소를 보는 입장이 달라진다.
결국 그녀는 관객에게 사악한 미소만 지을 뿐이다.
사람들이 미소의 의미를 알지 못한 것을 비웃기라하듯이 말이다.

그러나 ‘고사관수도’ 의 선비는 다르다.
선비의 미소는 모나리자보다 아름답다.
우리는 그림만 봐도 선비가 왜 웃고 있는지 알 수 있다.
그리고 모나리자처럼 비웃지도 않는다.  

그림 속 주인공인 자신에게 집중하라고 재촉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자신보다는
그림 속을 전체를 차지하고 있는 절벽과 절벽에 자라고 있는 식물,  

그리고 바위와 흐르는 물.
그것은 관객에게 아름다운 자연을 함께 감상하자는 장면을 연출한다.
선비의 미소는 자연을 보는 즐거움에 취하여 웃는 동시에
그림을 보는 관객들에게도 함께 즐거움을 느끼자고 권하는 것 같다.
그림이 말하고자 하는 인간과 자연의 합일(合一)과 동시에
그림 속 인물과 그림 밖의 관객의 합일을 이루고 있다.

요즘 대형 미술 전시회가 많이 열리고 있다.
고대 그리스부터 시작해서 영국 근대 화가, 그리고 조각가 로댕까지.....
올해에는 외국에서 온 미술 작품들이 우리나라에 찾아왔다.
죽기 전에 꼭 봐야 하는 안 보면 후회할 전시회들이다.
하지만 왜 우리나라와 관련된 대형 전시회는 자주 열지 않은 걸까?
그리고 전시회 홍보도 많이 차이가 난다.
외국에서 온 다양한 색상의 그림들은 손님인데도 불구하고 자기들 왔다고 법석거린다.
반면 터주대감인 우리나라 그림들은 조용히 관객들을 기다린다. 
그리고 외국 그림들처럼 소란스럽게 자랑하며 내세우는 것도 아니다.
관객에게 여유를 주면서 천천히 음미하며 바라볼 것을 권한다.
그리고 관객도 그림과 하나가 되기를 원한다.


이것이 우리나라 옛 그림에만 읽을 수 있는 즐거움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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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의 역사 에코 앤솔로지 시리즈 2
움베르토 에코 지음, 오숙은 옮김 / 열린책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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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 의 다양한 의미

 

모 검색 사이트의 한자사전에 ‘추(醜)' 라고 검색을 하였다.
‘추’(醜)는 ‘닭 유’(酉) 자와 ‘귀신 귀’(鬼) 자가 결합되어 있다.
그런데 내가 검색한 사이트의 내용에는
머리에 장식한 무녀가 신전에 술을 따르는 장면을 나타내는 글자로
(사실 ‘술’ 의 뜻을 가진 한자는 ‘닭 유’ 자와 비슷한 이다)
신을 섬기는 사람, 나중에 신을 섬기는 사람을 싫어한다는 뜻으로 바뀌면서
‘싫어하다’ 라는 의미가 자리잡게 되었다는 것이다.
검색 내용이 조금은 수긍이 안 갔지만 ‘싫어하다’ 이외에 뜻이 많이 있다.

‘못생기다, 나쁘다, 못되다, 더럽다, 미워하다, 부끄러워하다, 익살꾼.....’
여기에 제시된 문장과 단어는 서로 다르지만 뜻이 일맥상통하다.
결국은 다 우리가 부정적으로 보이는 말들이다.

나는 ‘추’ 라는 단어를 검색하기 전에는
‘추’ 라는 단어는 그냥 얼굴이 못 생김을 뜻하는 줄만 알았다.
그래서 ‘추하다’ 라고 말할 수 있는 대상은 확대된다.
입에 담지 못할 온갖 육두문자를 서슴없이 내뱉는 사람들은 ‘추하다’,

남들과 다른 독특한 사고 방식, 카메라 앞에서의 돌발 행동,  

평소 사람들도 입기 힘든 옷을 입고 출연하여
'돌+아이' 라고 듣는 그 유명한 연예인도 ‘추하다’,
그리고 사랑의 힘으로 예전의 젊은 왕자의 모습으로 되찾은 야수와  

힘만 세지 녹색의 피부에 뚱뚱하고 못생긴, 사람과 같지 않고 비호감만 들 것 같은
괴물 슈렉도 ‘추하다’  

 

 

 추에 대한 이중적인 관점 

 

여기서 태클 걸기, 야수와 슈렉에게 ‘추하다’ 라고 말할 수 있으면서도
우리는 왜 그들에게 ‘추하다’ 라고 느껴지지 않는 것일까?

물론 그들의 외모는 대놓고 말하자면 못생겨서 ‘추하다’ 라고 생각하겠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이 두 만화 캐릭터를 싫어하지는 않는다.
만화영화 ‘미녀와 야수’에서는 못생긴 야수와 벨과 결혼하고 싶은  

가스통이라는 인물이 나온다.
물론 가스통이라는 인물도 ‘추하다’
마을 사람들은 선동하여 야수를 죽일 음모를 꾸미며,
심지어 벨이 정성껏 모셔왔던 아버지를 정신병원에 강제로 입원시켜  

벨과 결혼하려고 한다.
그리고 야수가 자신을 살려줬음에도 불구하고 방심한 틈을 타 야수를 죽일려고 하는
만화에서는 야수와 반대로 ‘악’의 캐릭터로 설정되어 있다.  

그리고 만화를 보는 사람들은
그런 가스통의 행동에 나쁘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런데 야수의 괴물스러운 용모에 대해서는 뭐라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야수를 동정하고, 벨과의 사랑이 이루어지길 바란다.
녹색 괴물 슈렉도 마찬가지다. 슈렉은 비록 괴물이고 못생겼어도

전 세계 어린이들을 사로잡는 친근한 만화 캐릭터로 자리잡았다. 
 

이것말고도 우리로서는 이해가 안 가면서도 한편으로는 재미있는 현상이 있다.
영화 ‘스크림’ 의 ‘고스트 페이스’, ‘나이트메어’ 의 ‘프레디’.
이들은 무자비한 살인을 일삼는 공포 영화 시리즈의 대표적인 살인마 캐릭터이다.  

죄 없는 사람들을 눈 뜨고 볼 수 없도록 잔인하게 살해한다.
그러므로 그들의 살인 행위는 인간으로서는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들의 행위에 두려워하고 나쁜다는 것도 알면서도

관람객은 살인마가 주인공인 영화를 보게 되면   

살인 현장을 보고도 그냥 지나치는 것처럼  

무의식적으로 살인마의 행위를 방관하거나 그를 좋아하는 열혈 매니아들도 있다.
그리고 그들의 살인은 1편으로만 족하지 않는다. 2편, 3편 연속으로 등장한다. 

죽다가도 다시 살아나 어지간히 사람들을 죽이는 걸로 봐서는
두 살인마는 영화광들을 매혹시키기 특별한 매력이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우리는 ‘추’ 에 대한 이중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다.
그것에 대하여 기호학의 대가 움베르토 에코가 고대부터 현재까지
‘추’ 에 관한 모든 문헌과 그림들을 통해 추에 대한 이중적 시각을 추적하였다. 
 

 

 좋은 그림, 나쁜 그림, 이상한 그림

 

움베르토 에코 이 사람,  책 한 권 우리나라에 번역되어 나온 것을 읽게 되면
그의 박학다식에 놀랍기만 하다.  하나의 책에 나오는 수백개의 자료와 주석들은
어디서 구하는지 대단하기만 하다.
이 책도 전작인 <미의 역사>(열린책들, 2005) 만큼 많은 그림 자료들이  

독자들의 눈을 사로잡는다.
<미의 역사> 에서는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좋은’ 그림들로 가득 찼다면,
후에 출간된 <추의 역사> 에서는 어둡고 우울하고,
보다 못해 두 눈으로 쳐다 보기 힘들 정도로  

사람의 감정을 불편하게 만드는 ‘이상한’ 그림과
정말 19세 딱지를 붙여주고 싶을 만큼 ‘나쁜’ 그림들로 구성되어 있다.
목이 잘린 사람, 흑사병에 걸린 사람, 죽음에 사로잡혀 해골이나 다름없는 사람,

반인 반수, 기형아, 그로테스크한 얼굴의 사람.....

전체 역사를 통틀어서 이런 ‘나쁜’ 그림과 ‘이상한’ 그림들을  

찾는 것도 쉽지 않았을텐데.....
대충 그림 자료를 보고 넘기기에는  

저자에 대한 수고로움이 생각나서 지나치기가 쉽지 않았다.
(물론 번역자도 이 책을 번역하느라 고생이 많으셨다) 

그림뿐만 아니라 그림에 대한 사람들이 기록한 증언과
시대순으로 문학가와 예술가들이 ‘추’ 에 대해 느꼈던 것들을 기록한 문헌들이
적절히 배치되어 두꺼운 분량에도 불구하고 내용 이해가 수월하였다.

전작 <미의 역사>에서처럼 ‘추’ 도 시대가 변할수록 개념과 의미가 변화되었음을 
저자는 말하고 있다. 그러나 더욱더 놀라운 사실은
고대, 중세, 근대 사람들의 ‘추’ 에 대한 생각이

지금과 같이 관용적이었다는 점이다.
그만큼, ‘추’ 는 ‘미’ 라는 정반대인 미적 개념에 꿀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고대에서는 ‘추’ 를 단순히 못 생기고 악하다는 좁은 의미로 사용되어  

크게 의미를 두지 않았고,
중세에는 스콜라 철학의 영향으로 ‘추’ 도 세상을 이루는  

조화의 법칙에 이바지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마니에리스모, 르네상스로 가면 갈수록
‘추’ 를 인간의 어긋난 행동과 속물적인 면을 유추 적용하여
보기 흉한 그림들을 통하여 관람자들을 ‘조롱’ 하고
그들에게 '경고’ 를 주는 동시에 스스로 ‘경각심’ 을 일깨워주도록 하였다.
현대에 가서는 우리가 보기에도 이해할 수 없도록 그림의 인물이 분해되어 있다거나,
비정상적이고 아름다움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그림들을
우리는 ‘명작’ 이라고 말한다.
파블로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 을 봐라.  

  



 

 

 

 

 

 

 

제목에서는 ‘처녀’ 라고 하는데 그림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이쁜 처녀가 없다.
그림 속 앉아있는 처녀의 얼굴은 이목구비가 뒤죽박죽되어 있고,
다섯 명의 처녀의 벌거벗은 몸은 우리가 보는 일반적인 몸의 형상과 다르며

형체를 대충 그린 것 같아 보인다.
하지만 지금은 이 그림을 입체파의 선구적인 그림으로 평가받는다.
현대 미술은 ‘추’ 를 이용하여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고 있던
‘미’ 의 고정적이면서도 실재적인 아름다움을 가차 없이 깨뜨렸다.

물론 우리가 단순히 공포 영화를 보면서 짜릿한 공포감을 즐기는 것처럼
몇 몇 예술가들은 자신도 ‘나쁜’ 그림을 그려 스스로 ‘추’의 쾌락을 맛보거나
관람자들에게 ‘추’ 의 독특한 아우라를 느끼게 해주려는 작품도 있다.
옛날에는 공포 영화라는 것이 없었기에
사람들은 불을 인간에게 전해줬다는 죄로 인해  

독수리들에게 간을 파먹히는 프로메테우스나
살로메에 의해 목이 잘린 세례자 요한을 보면서
나름 짜릿한 시각적 즐거움을 느꼈을 것이다.
이처럼 예술사에서 ‘추’ 와 ‘미’ 는 알게 모르게 서로 조화되고 있었다. 
   

 

 

 ‘추’ 의 중요성 

 

극작가 프리드리히 실러는 인간의 ‘추’ 에 대한 열광을 이렇게 정리하였다.

 끔찍하고 무서운 것들은 우리에게 거부할 수 없는 유혹으로 다가온다는 것은
 우리 본성의 일반적 현상이다. 우리는 고통스럽고 공포스러운 광경에 혐오를
 느끼면서도 동시에 매혹된다.

결국, 실러의 말이 고대부터 지금까지의 ‘추’ 의 역사를 정확히 말해주고 있다.
우리는 평상시에는 못 생긴 얼굴을 가진 사람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지 않으며
신체의 일부가 이상이 있거나 혹은 상실되어 있는 사람을 보면 꺼려한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 속에는 레테의 강이 흐르고 있다.
언제 그랬냐는 듯 보는 관점이 달라지게 마련이다.
평상시에 잘 생겼다고 들어본 적 없었으며 영화배우치곤 외모에는 거리가 멀었던(?)  

유해진이 우리나라 미의 대명사인 김혜수와 사귀고 있다는 소식에 대해
사람들이 갑자기 유해진의 존재를 다시 알게 되고
유해진은 그 소식 이후로 평범한 외모의 영화배우에서
급호감 훈남(?) 영화배우로 이미지가 역전되었다.
그리고 신체 일부가 잘려나가고 피가 튀기는
스플래터 영화에 나오는 살인 장면을 보고 우리는 거리낌없이 본다.

그렇다고 해서 ‘추’ 에 대한 이중적인 시각에 대해서 무조건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인류가 가지고 있는 독특한 시각이 인류 예술에 큰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미술은 ‘아름다움’ 과 ‘추함’ 이라는 서로 다른 감정을 담아내어
표현의 다양성을 보여주었다.
만약 ‘추함’ 이라는 개념은 없고 우리의 본성에 ‘아름다움’만 있었다면 어떻게 될까?
남성은 무조건 이쁘고 아름다운 여성을 차지하기 위해 다툼을 벌였을 것이고,
장애인, 기형아들은 인간 대접 받지 못할 것이고
예전 독일 나치가 저지른 우생학적 살육 정책이 재연될 것이다.
그리고 ‘미녀와 야수’, ‘슈렉’ 과 같은 만화 캐릭터는 당연히 없을 것이다.
상상만해도 끔찍하고 생각하기가 싫다.

두꺼운 움베르토 에코의 책을 완독(이라고 부르기에는 그렇고 사실은
책에 나오는 그림 자료들은 빠짐없이 눈으로 확인했다)하면서
옛날에나 지금이나 사람들의 추에 대한 관심이 변한 것이 없음을 보면서
우리가 지금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에 대해
‘아름답다’ 다거나 ‘추하다’ 라고 말하는 것이 어쩌면 무의미할 수도 있다.

세상에는 두 부류의 인물이 있다.
얼굴은 못생겼어도 마음씨는 착한 사람들도 있고,
얼굴은 온화하고 잘 생겼어도 시커먼 본심을 가진 사람들도 있다.
세상이 이런데 과연 ‘미’가 무조건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으며
‘추’가 무조건 나쁘다고 말할 수 있는가.
아니면 ‘미’ 와 ‘추’ 는 결국 같은 것이 아닐까.
우리가 야누스의 얼굴을 가지고 있듯이 말이다.  

  

  

 

 

 뱀의 다리) Mi dispiace, Umberto Eco

먼저 움베르토 에코에게 정중히 사과를 하겠다.
세계적인 석학이 쓴 도서에 대해 나름 태클을 걸겠다.
움베르토 에코의 ‘추의 역사’ 는 모든 역사 속에서 ‘추’ 를 표현한 그림들을
소개하여 미술사 서적으로 읽어도 손색이 없다. 그리고 자료를 찾는데 심혈을 기울였을
그의 수고로움에 찬사를 보내고 싶다. 하지만 아쉬운 점은.....
동양의 그림들은 눈 뜨고 봐도 찾아볼 수 없었다는 점이다.  
내가 이 책을 완독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확실히 동양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고대 중국의 최고(最古)의 문헌인 <산해경>에는  

신화 속에 등장하는 괴이한 짐승이 소개되어 있다. 그 짐승들을 보면 

정말 입에서 '추하다' 라는 말이 튀어나올 것이다.
그리고 우리나라에도 빠질 수가 없다.
정말 우리나라에도 나름 ‘추’ 에 관련된 그림과 신화, 전설, 문헌들이 많이 있다. 
용 된 ‘추남’ 의 대명사 온달 왕자, 도깨비에게 혹을 팔아 넘긴 혹부리 영감 이야기,
우리나라 대표적인 귀신 구미호,

사람 얼굴이라고 하기엔 해학적인 모습의 탈들.....
대표적으로 열거한 것은 그리 많지 않지만 분명 더 있을 것이다.
어쨌든 움베르토 에코가 동양의 자료들도 소개해줬으면
분량은 더 늘어나도 지금의 책보다 내용면으로 훌륭하고 내용도 균형적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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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대 위의 까치 - 진중권의 독창적인 그림읽기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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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이들을 위한 미술 교육 프로그램

 

무심코 TV 채널을 돌리다가 우연히 K 방송에서 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
요즘 TV에서 자주 나오는 행위예술가 낸시 랭과 K 방송국 유명 개그맨들
그리고 유치원에 다닐듯한 어린이들이 나와
미술을 소개하고 직접 체험하는 유아용 교양 프로그램이었다.
어떤 프로그램인지 호기심이 생겨 잠깐 그 채널을 고정하고 있을 때
내가 봤던 장면은 어린이들이 밀레의 명화 <이삭 줍는 여인들>을 보고  

감상한 것을 이야기하고 낸시 랭이 아이들에게 그림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다.

내가 애들 나이 또래 때에는 미술이란 크레파스나 물감으로 그리기뿐이었다.
하지만 지금 TV에 나오는 아이들은 그림 그리는 방법뿐만 아니라
벌써 그림을 ‘보는’ 방법도 배우고 있었다.
어린이들의 교육에 참 좋은 프로그램인 거 같은데 

왠지 얼마 안 가 종영할 거 같았다.  

이 프로그램을 처음 보게 된 시간은 오후 4시쯤이었는데
이 시간이면 어린이들이 집에 있을 리 만무하다.
그리고 유아 교양 프로그램이 예전만큼 시청률도 좋은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내 예상을 들어맞았다. 프로그램은 1년도 채 안 되어 종영되었다. 
 

 

 미술에 대한 선입견 깨뜨리기

 

예상대로 종영되었지만  

아마도 유아를 위한 수준 높은 미술 교육 프로그램은 그것이 최초일 것이다. 
어린이들을 위한 미술의 수준을 한 단계 높여준 거 같다.
예전 유아를 위한 미술 교양 프로그램은 단순히 크레파스나 물감으로 그리거나
우리가 일상 생활에 쓰고 있는 물건들로 공예 작품을 만드는 등
딱 ‘어린이’들을 위한 수준으로만 그쳤다.
과연 유아 교육 프로그램의 황금기에 자란 아이들은 ‘미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TV에서 그림이나 공예 만드는 방법을 상세히 알려주는 것을 보면서
아이들은 무조건 TV에서 알려주는 방법대로 하면 멋진 미술 작품이 나온다고 알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아이들은 계속 시도하다가
결국은 TV대로 되지 않은 것에 대해 미술은 쉬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런 감정을 지닌 채 초등학교, 중학교에 다닐수록
어렸을 때 느낀 미술의 즐거움은 기억 저편으로 사라진다.
이 때 미술은 단지 ‘성적’을 위한 하나의 과정일 뿐이다.
고등학생 때는 대입 내신 성적을 위해 미술 과목을 암기한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사회 생활을 하게 되면 미술은 자신의 삶과 관련 없는 쓸데없는 일이다.
미술관에 그림 감상하는 일은 돈이 있고 특별한 사람들이 한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대부분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미술에 대한 선입견을 가지게 된다.
그러면 미술에 대한 선입견을 깨뜨리기 위해서는
처음부터 유아를 겨냥한 미술 프로그램을 봐야하는가.

그런 미술을 어렵게 생각하면서도 미술에 대해 알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
미학자인 진중권 씨가 <교수대 위의 까치>를 펴냈다.

이 책의 저자는 말한다. 

   그림은 화가와 감상자의 공동 창작의 산물이다. 그래서 감상자 역시
  창조적이어야 한다.

말은 좀 어렵게 느껴질 수 있으나
저자가 진심으로 우리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자신만의 생각과 방법으로 창조적으로 그림을 보는 능력을 갖추라는 것이다.
물론 화가가 그린 그림에 대해 올바른 의도와 해석을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기 스스로 그림을 감상하여 깨닫는 것은 미술이라는 분야를 쉽게 다가갈 수 있게 된다.  

  

 

 미술을 바라보는 의지

 

미술사학자 알로이스 리글은 말한다.

   미술사를 움직이는 것은 ‘능력’이 아니라 ‘의지’이다.

미술사를 간략하게 살펴보면  

중세의 그림들을 보게 되면 뭔가 부정확하고 어수룩한 면이 있다.
르네상스부터 근대 고전주의로 갈수록 그림 그리는 방법이 정형화되면서
더욱 정확해지고 그림다운 그림으로 보이게 된다.
하지만 근대부터 현대로 오게 되면서 그림은 다시 부정확해지고  

감상자는 이해 불가능해진다.
세잔은 원근법을 무시하고 피카소가 그린 사람은 형체가 쪼개져서 나온다.
잭슨 폴록은 커다란 캔버스 위에 아무 생각 없이 물감을 뿌려댄 것을 그림이라고 하고
마르셀 뒤샹은 화장실 변기를 예술 작품이라고 우긴다.

알로이스 리글은 현대로 갈수록 중세 미술보다 못한 그림들이 나오는 이유는
화가가 표현을 지향하는 것보다 자신이 느끼는대로 그리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들뢰즈의 철학 개념을 빗대어 ‘창조적 역행’ 이라고 정의한다.
결국 화가가 그림을 그리게 하는 원동력은 화가의 ‘의지’인 것이다.

지금도 많은 예술가들은 창조적 역행을 시도하고 있다.
사회가 다양해지고 복잡해진 만큼 예술가들은 자신의 다양한 생각들을 작품으로 표출한다.
과거 미술은 획일화되면서도 정립되어진 이미지의 감상으로 이해했다.
하지만 현대 미술은 다양성과 동시에 해석의 난해성도 갖추고 있다.

예를 들자면
도상학에서는 그림 속의 해골은 ‘죽음’을 의미하며 이는 곧 불문법적 감상으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몇 년 전에 전통 미술에 자리 잡고 있던 기존의 관념을 바꾸는 사건이 있었다.
영국의 대중 예술가 데미안 허스트는 다이아몬드로 만들어진 해골을 작품으로 출품한다.
작품명은 [신의 사랑을 위하여].  

고가의 보석으로 만든 작품인 만큼 보험에 가입할 정도였다. 
그리고 이 작품으로 세계 곳곳 전시 투어를 하게 된다.   

 


 

 

 

 

 

 

 

 데미안 허스트 <신의 사랑을 위하여>
 
결국 허스트의 의도는 전시 투어를 통해
이 작품을 구입할 상류층 컬렉터를 찾고자 하는 것이며  

마케팅을 미술 판매 전략에 적용한 것이다.
작품 이름만 들어도 알다시피 데미안 허스트의 해골은  

예전의 부정적인 죽음의 이미지가 아닌
사람들을 위한 아름답고 고귀한 그리고 사람들에게 팔기 위한 미술품으로 되어 있었다.  

 

이렇듯 시간이 지날수록 미술은 변하고 있다.  

그리고 감상자들도 이에 부응하듯 변하고 있다.
정확성과 아름다움, 틀에 박힌 정형적인 감상이 아닌
이제는 ‘나는 그림을 이렇게 그렸다’ 라는 화가의 의지를
감상자도 스스로 미술을 보는 의지를 가지면서 다양한 감상을 해야 한다.

미술을 보는 의지를 가지게 됨으로써
어렵게만 느껴졌던 미술을 한층 더 가깝게 다가올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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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조부 2010-11-06 1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석훈을 이 책을 5년 동안 나온 책 중에 가장 중요한 책이라고 생각한다고 하던데

저는 잘 모르겠더라구요~

cyrus 2010-11-06 15:56   좋아요 0 | URL
저도 이 책,,, 읽으면서 재미있다는 생각만 들었지
내용이 그렇게 중요하다고는 생각 안했답니다.^^;;
그나마 이 책에서 진중권 씨가 언급했던 창조적 감상자에
대해서는 공감이 갔었습니다.
 
세계 명화 속 현대 미술 읽기
존 톰슨 지음, 박누리 옮김 / 마로니에북스 / 2009년 10월
평점 :
절판


현대미술의 모든 것을 하나의 책에 담겨진 현대미술 gui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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