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명당》과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불타는 가야사와 남연군 묘


 


   영화 《명당》은 아들을 왕으로 만들기 위해 고찰 가야사를 불 태우고 그 자리에 아버지 남연군 묘를 이장한 흥선대원군의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유홍준 교수가 쓴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권, '불타는 가야사와 꽃피는 개심사'에도 등장합니다.


   고종 5년(1866년), 두 번씩이나 통상 요구를 했지만 거절 당한 오페르트는 흥선대원군을 자극하기 위해 충남 가야산에 있는 남연군 묘를 파헤칩니다. 이 묘가 어떤 묘인데, 감히 파헤쳤을까요?

   이하응에게는 여러 한량이 모여들었는데 어느날 정만인이라는 지관이 찾아와 말하기를 충청도 덕산땅에 "만대에 걸쳐 영화를 누리는 자리(萬代榮華之地)"가 있고 또 가야산 동쪽 덕산에 "2대에 걸쳐 황제가 나올 자리(二代天子之地)"가 있으니 둘 중 한 곳에 선친의 묘를 쓰라는 것이었다. 흥선군은 만대의 영화보다 2대에 그칠지언정 천자를 낳는다는 자리를 택했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1권)』, 143쪽

   안동 김씨의 눈을 피해 한량처럼 지내던 이하응에게 지관 정만인이 이렇게 제안을 합니다. 당연히 이하응의 선택은 그것이 2대에 그치더라도 황제의 아비가 되어보는 것이었습니다.
   영화에서는 이 명당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장동 김씨 일가와 흥선 사이에 피 터지는 싸움이 벌어지지만, 실제로는 정지관이 제발로 찾아가 알려준 것입니다. 지나간 역사에 가정이란 있을 수 없지만, 만약 이하응이 2대천자지지가 아닌 만대영화지지를 선택했더라면 조선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명당의 조건에 해당하는 요소들이 거의 모범답안처럼 펼쳐져 조산(祖山)ㆍ주산(主山)ㆍ안산(案山), 좌청룡ㆍ우백호가 이처럼 뚜렷하게 드러나는 곳을 보기 쉽지 않다. 얼핏 보기에 좌청룡 쪽 산세가 너무 험악하다는 인상을 주는데, 그 때문에 계곡 아래쪽에는 석조보살상을 세워 그 기세를 누그러뜨렸다고 한다. 오직 흠이 있다면 주산에서 명당으로 흐르는 지맥이 생각보다 짧다. 그래서 정만인은 만대(萬代)가 아닌 2대(二代)의 천자가 나온다고 예언했나보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1권)』, 147쪽

   이하응은 가야사를 불 태우고, 가야사 금탑이 있던 자리를 남연군 묘자리로 잡습니다. 후에 진짜로 아들이 왕에 즉위하자 고마운 마음 탓인지, 미안한 마음 탓인지 남연군 묘 맞은편 산 기슭에 절을 짓고 '보덕사'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절 또한 한국전쟁 때 불타버려 지금은 새롭게 지은 절만 남아 있습니다.

   영화를 보다보면, 안동 김씨가 아닌 장동 김씨가 계속 언급되는데 당시 안동 김씨들이 장동(지금의 청운동)에 살아서 그렇게 불렀다고 합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영화감독 보다는 유홍준 교수님이 좀 더 친절합니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는 한번에 쭉 읽는 책이 아니라 이렇게 생각날 때마다 꺼내어 펼쳐보는게 좀 더 흥미롭고 유익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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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8-09-27 23: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느 팟캐에서 들어 보니 <명당>이 <관상>
을 따라 하려다가 망작이 되었다고 하더군요.

남연군묘는 정말 천하 명당이라는 생각합니다.
풍수에 모르는 사람이라도 그곳에 오르면 알
수가 있답니다.

개심사는 소박하니 아주 마음에 들었습니다.

예전에 유홍준 교수님이 진행하시는 당일치
기 부여답사에 따라 나선 적이 있었는데 정말
좋았던 기억입니다.


뒷북소녀 2018-09-28 09:27   좋아요 0 | URL
이 덧글 보고 찾아보니 <명당>이랑 <관상> 비교에서 쓴 글이 있더라구요.
보니까, 정말 <관상>과 똑같은 법칙으로 만들었던데,
이번 추석 대작 세 편 모두 봤지만, 저는 <명당>이 가장 별로였어요.
왜 박스오피스 예매순위가 2위인지 아직도 이해할 수 없는.
예전에 다녀온 곳들이 많은데, 책을 읽고 갔더라면 더 좋았을 걸
하는 아쉬움이 남아서, 기회되는대로 다시 다녀올려구요.^^
 

   만발한 배롱나무 사진이 8월부터 인스타그램 피드를 채우고 있었지만, 덥고 또 더워서(여기는 대프리카니까요) 이제서야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한 권을 들고 답사에 나섰습니다.
붉은 꽃들이 제법 떨어져서 풍성하지는 않았지만, 나의 목적은 꽃이 아니라 책 속에서 보았던 그 장면을 답사하는 것이었으므로 살랑살랑 부는 바람과 파란 하늘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면에 있는 도동서원은 한훤당 김굉필 선생을 모신 조선 5대 서원 중 하나입니다. 참고로 나머지 5대 서원은 도산서원, 옥산서원, 병산서원, 소수서원입니다.
   19세에 순천 박씨와 결혼한 김굉필 선생은 합천군 야로현에 있는 처갓집 개울 건너편에 서재를 짓고 한훤당이라는 당호를 붙이고 지내다가 현풍으로 돌아와 지금의 도동서원 뒷산인 대니산 아래에서 살았다고 합니다. 

 

 

   16세기 중반 곳곳에 서원이 세워지기 시작할 때 퇴계 이황과 한훤당의 외증손이자 예학에 밝았던 한강 정구(1543~1620)가 나서서 선조 2년(1568) 현풍현 비슬산 기슭에 한훤당을 모시는 쌍계서원을 세웠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져 선조 37년(1604) 지금의 자리에 사당을 지어 위패를 봉안하고, 이듬해 강당과 서원 일곽을 완공하였다.
   선조는 이 서원에 도동서원이라는 사액을 내려주었다. '도동(道東)'이란 그 뜻은 "도가 동쪽으로 왔다"는 의미로, 도학이 한훤당으로부터 시작되었음을 기리는 이름이었다. 도동서원은 1865년 흥선대원군이 전국에 47개 서원ㆍ사당만 남기고 모두 철폐할 때도 훼철(毁撤)되지 않아 조선5대 서원의 하나로 손꼽힌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6권)』, 213쪽

 

 

   본래 도동서원의 대문은 매우 작은 환주문으로, 머리를 숙이지 않으면 갓 쓴 이의 갓이 닿을 정도로 낮다. 그리고 강당인 중정당은 아주 높직한 석축 위에 올라앉아 마루에 앉으면 환주문을 눈 아래에 두고 은행나무 너머 낙동강을 멀리 내려다보는 조망을 갖게 되어 있었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6), 216


   그런데 그렇게 펼쳐지는 시야가 이 수월루로 인하여 막혀버린 것이다. 철종 때 증축한 분들은 "서원의 제도에 맞으려면 누각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과 "서원 출입하기 가파르고 갑갑하다"는 이유로 수월루를 세웠다는 것이다. 과연 그래야 했을까?
   도동서원은 북향집이다. 남향을 버리고 북향을 택한 것은 낙동강을 유유히 바라보는 전망을 갖기 위함이었다. 남에게 보여주는 외관보다도 내가 사용하는 내관을 중시했던 것이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6), 216


   도동서원 앞에 당도하면 사람들은 우선 김굉필나무라고 이름지은 은행나무의 늠름한 자태에 입이 벌어진다. 외증손 정구가 이 자리에 동서원을 세울 때 심은 것으로 수령이 400년 이상 된다. 내가 시각장애인들과 여기를 답사했다면 그들로 하여금 몇아름 되는지 둘러보게 할 생각이었다. 아마 다섯명이 손을 잡아야 했을 것이다. 낙엽이 질 때면 이 앞마당에 온통 은행잎이 깔려 답사객들은 그 노란 카펫 위를 거니느라고 좀처럼 서원 안으로 들어갈 줄을 모르곤 했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6), 215

   책을 읽기 전에는 몰랐던 사실, 수월루 때문에 막혀버린 시야를 확인하는게 이번 답사의 목적이었습니다. 지금은 수월루와 4대강 사업 때문에 낙동강이 제대로 보이지 않아, 강둑까지 내려가 낙동강을 바라보았습니다. 그 옛날 마루에서 보였을 법한 풍경이 이랬겠죠? 은행잎이 노랗게 깔리면 노란 카펫을 밝으러 다시 와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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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8-09-11 15: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오래 전에 답사 다녀본 바에 의하면
한국 서원 중에 최고는 풍천 병산서원이
최고인 것 같습니다.

지금 지도를 찾아 보니 하회마을이 바로
옆이네요.

앞을 끼고 도는 낙동강변의 서원, 풍광
이 너무 멋졌습니다 !

뒷북소녀 2018-09-11 16:15   좋아요 0 | URL
우와, 사진 찾아보니 멋지네요.^^
추천해 주신 곳으로 또 답사를 떠나야겠어요.
감사합니다.
 

 


하루가 길었다. 지독히 외롭고 답답했다.
보수도 그다지 좋지 않았다. 특혜도 없었다.
책상에 앉아 똑같은 일을 반복하는 지루한 일이었다.
그러나 반대편과 비교하면 그런 것들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직업이 없으면 내세울 자존심도 마뜩잖았고, 먹고 살기도 힘들었다.
당연히 임금도 없었다. 아무 것도 없었다. 10쪽

그들이 어떤 일을 하느냐에 따라 그들이 어떤 사람이라고 단정지어 말할 수는 없었겠지만, 그들이 하는 일로 그들이 어떤 사람으로 결정되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일을 하지 않으면 인간의 성품이란 기묘한 개념 전체가 바늘 위에 올라선 것처럼 무척 불안하게, 비정상적으로 불안하게 비춰졌다. 11

─ 『일은 소설에 맡기고 휴가를 떠나요』

미국을 대표하는 32명의 작가가 쓴 32편의 '일에 관한 소설'이 실려있는 책.

읽는게 쉽지 않을 것이다. 오늘부터 매일 조금씩 읽어나갈 것이다.

제목만 봐도 위로가 되는 책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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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기.

용감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용감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하루하루를 사는 데 용기는 반드시 필요하다.

증명할 수 없지만, 용기는 소모품이다.

날마다 필요하니까 날마다 공급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점이 배짱과는 다르다.

배짱은 아무리 부려도 줄어들지 않는다.

뒤집어 말해서 공급할 수 없다.

 

용기를 공급하는 데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책을 읽거나 친구를 만나고, 맛있는 것을 먹는다.

모두 용기가 샘솟는 일이다.

행복한 시간을 많이 가지면 사람은 용감해진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인생에 대한 신뢰, 그것이 없으면 용기도 생기지 않는다.

무언가의 보호를 받고 있다는 것.

그래서 종교가 있는 사람은 용감해지기 쉽다.

부럽다.

 

(……)

 

마지막으로 나는 용기를 원한다.

그 용기를 아낌없이 소비할 수 있도록 행복한 순간을 많이 만들면서 살리라.

 

─ 에쿠니 가오리의 『우는 어른』 p.197~199 ─

 

 

 

 

 

 

 

 

우리 일상은 늘 무언가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것처럼 위태롭기만 해요.

이런 일상을 잘 버텨 내려면 대롱대롱 매달려서도 먼 곳을 내려다 보고, 훌쩍 뛰어내릴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한데

고소공포증이 있는 저에게는 그저 매달려있는 것 조차 공포스러울 때가 많아요.

한번 이겨내고 나면 다음에는 더 쉬울 것만 같아도,

이 용기내는 것에 이력이 나려면 꽤 많은 시행착오가 필요한가 봅니다.

아직까지도 매 순간이 공포스러운 걸 보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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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란 몸에 지닌 것으로 결판이 난다.

자신을 위해 마련된 것도 아니고, 있을 곳이 일정하지도 않은 장소에서,

가족도 일도 없는, 자신의 과거나 미래와도 이어지지 않는 장소에서

그 며칠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

머리와 마음과 몸과 가방 하나.

그 홀가분함을 제대로 즐길 수 있는지가 관건이라고 생각한다.

 

─ 에쿠니 가오리의 『우는 어른』 p.116 ─

 

 

 

 ↑ 체코 체스키 크룸로프의 버스 정류장

 

여행을 할 때 내 가방은 항상 부피가 큽니다.

커다란 DSLR에 이런 저런 책과 필기도구들,

혹시나 내릴지도 모르는 비를 위해 준비한 우산,

넉넉히 충전해둬야 마음까지 편한 각종 배터리와 여분의 메모리카드까지.

그런데 이런 나와는 달리 매우 홀가분하게 다니는 사람들도 종종 보입니다.

작은 가방 하나 크로스로 메고,

짝궁이랑 손 잡고 가볍게 흔들면서 걷는 사람들을 보면 신기할 정도입니다.

 

다음 여행 때는 가방의 크기를 줄일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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