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상처는 해석이다.”

오랫동안 나는 마음의 상처에 천착했다. 그 상처의 본질은 무엇일까에 대해 사색했었다. 내게 가장 아픈 상처를 준 사람들. 그들은 공교롭게도 내가 가장 친밀하게 느끼고 있던 (혹은 느껴야 한다고 생각한) 관계들이었다. 덧붙여, 그들은 나쁜 사람들도 아니었다. 의심할 바 없이 ‘선한 의지’를 가진 사람들.

어쩌면 정말로 치명적인 상처는 그 모순이었을지 모르겠다. 나를 상처 준 사람들이 하나같이 착한 사람들이었다는 사실.

그들이 나를 위해 했던 말은, 더할 나위 없는 진심이었다. 그 진심과 선함에 토를 달 생각은 없다. 그러나 의지가 선하다고 하여 내가 아프지 않은 것 또한 아니다. 나의 아픔은 그 아픔 나름대로 존중받아야 한다.

“(p.90)상처는 해석이지 그 자체로 폭력은 아니다. 어떤 행위이든 상처의 가능성이 있고, 동시에 어떤 행위이든 상처받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상처는 절대적인 것도 필연적인 것도 아니다.”

이 날카로운 문장이 눈에 박혀서 한동안 페이지를 넘기지 못했다. 책에서 설득하는 어떤 주의·주장과 상관없이. 텍스트가 박혀있는 문단의 맥락과는 전혀 상관없이.

내가 받은 상처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에 대한 물음표가 하루 내내 떠다녔다.
그것은 어쩌면, 더는 이 상처에 머물러 있고 싶지 않다는.
‘이제 그 모든 과정들을 상처로 남겨두지 말자라는 마음 어딘가의 반영일지도 모르겠다.

나에게/ 상처를/ 주었던/ 착한/ 사람들.

상처는 해석된 것이기에 그들의 의도와는 상관없다. 사실 이미 악의가 없었던. 그들의 의도를 따져 묻는 것 또한 무의미하다. 그러니까 어느 순간부터는 엄연히 내가 해석하는 방식이, 나를 상처 입히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제 더는 아프고 싶지 않기에, 다른 방식의 해석을 - 그러니까, 다음의 삶을 도모해야 한다. 부디, 그러고 싶어졌다.

이 문장을 읽기 위해 이 책을 만났던 것일까..
가끔은 (저자의 의도와는 전혀 무관하게 내 멋대로 해석해버린-) 어떤 한 줄의 글이 나를 살리는 것도 같다. 실은, 그 한 줄을 핑계 삼아서라도 살아가고 싶은 것일 테지만. 



2. 


책에 대한 평.

어느 순간부터 자주 등장하는 낯선 단어 ‘폴리아모리 Polyamory’가 궁금해서 읽었다. 폴리아모리적인 욕망이 향하는 것은 ‘여러 명’이라는 숫자가 아닌 어떤 ‘자유로움’에 가깝다는 것. ‘다자 간’연애보다는 ‘비독점’에 포인트를 맞추고 있다는 것. 그런 의미에서 ‘다자 연애’에만 집중하지 ‘비독점성’과는 상관없는 문어발식 사랑(ex. 나는 바람피워도 너는 절대 피지마~♬)은 폴리아모리의 그것과는 다르다는 것 (여러 사람을 소유하려는 모노아모리monoamory일 뿐)등을 배웠다.

어떤 형태의 ‘사랑’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방식이 이렇게나 다양하다는 것에 대해 놀랄 뿐이다. 처음의 설렘보다는 관계가 성숙해지는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안정감이 내가 느끼는 사랑이라는 감정에 더 가깝기에- 일상을 계속해서 ‘변용’ 해야 하는 너무도 부지런한 그들의 사랑방식을 무리해서 납득하려 하거나,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입장을 갖기는 어려울 듯하다. 게으른 자에게 ‘폴리(여럿)는 물론 ‘아모리(사랑)도 피곤한 것. (더더군다나 난 사회성이 좋은 편도 아니라서 하나 이상은 너무 힘들 것 같다ㅠ_ㅠ) 다만, 이러한 관계가 존재하고 있다니 덤덤하게 아, 그렇게도 존재할 수 있구나 인식하기로.

한편으로는 이미 파편화 된지 오래인 우리 사회에서 나타날 수밖에 없는 다양한 가족(혹은 관계 맺기) 형태에 대한 실험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요즈음의 한국은 ‘가족’혹은 ‘가정’이라는 개념 자체를 재정의 해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에 직면한 것 같다. 전통적인 개념의 가족이 더 이상 안전한 관계가 아니라면, 또 다른 관계를 찾아 나서야지.
요컨대, 필요한 것은 상상력. 그리고 용기. 실제 책에도 아래와 같은 문장이 나온다.

"(p.104) 즉 우리는 폴리아모리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모노아모리만이 의식적인 선택의 문제인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모노아모리란, 우리가 한 사람만 사랑하기로 ‘선택‘한 그런 폴리아모리이다. 무한한 공동체의 배치를 상상할 수 있다. 당신이 어떤 배치 속에서 가장 행복할 수 있는지 끊임없이 상상하고 실천하고 구성하라."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 궁금해서 지인 몇몇에게 ‘폴리아모리를 주제로 이야기를 나눠보려 했지만, 입도 떼기 전에 제지 당했다. 생계도 피곤하다며... 사실, 그게 현실 인 것 같다. 

책을 덮고 잠시 모두가 폴리아모리스트인 세상을 생각해보았다. 역시나 상상이 잘 되지 않았다. (빈약한 상상력 ㅠ.ㅠ)




(p.162)
실제로 대중의 욕망이 변화한 것이라면, 그 변화의 기제는 무엇일까. 사실 폴리아모리가 소개되는 시점부터 한국 사회는 가족과 공동체, 성과 사랑에 대해서 여태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이해를 구해야만 하는 처지에 놓인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p.227)
우리 각자는 하나의 우주와 같다. 그러므로 가족이 된다는 것은, 둘 이상의 우주가 장기적으로 교차한다는 것과 같다. 그래서 혼자서는 어느 정도 인력의 균형을 유지할 수 있더라도, 교차하는 순간 그 인력들은 복잡해지고, 별들은 충돌하고, 어떤 공간은 소멸하고, 결국 여러 심급의 카오스로 뻗어나간다. 카오스에 대해 우리는 불안을 느끼는 존재이다. 하지만 모든 것이 해체된 카오스 속에서도 오히려 그 카오스 자체에 대해 일관된 긍정을 찾을 수 이는 것, 이것이 바로 폴리 아모리의 가족형태인 폴리피델리티가 꿈꾸는 상태일것이다.

(p.242)
폴리아모리는 윤리적인사랑이아니다. 횡단하는 사랑이며 그 자체로 자연의 사랑이다. 어차피 우리는 사랑하고 있고 사랑하게 되어있다. 올바른 사랑을 찾으러 형이상학을 맴도는 것이 아니라 그저 우리에게 마주한 강렬함을 그 자체로 기쁘게 사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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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 마르크스 범우문고 266
블라디미르 일리치 울리야노프 레닌 지음, 김승일 옮김 / 범우사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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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_청년마르크스



청년시기 마르크스의 삶을 복원하려 애쓴 흔적이 역력한 라울펙의 영화. 
수염이 그렇게까지(!)풍성하지 않은 스물여섯의 썽썽한 마르크스를 만날 수 있었다. 
더하여 영원한 동지 엥겔스도!
_
두 친구는 만나자 마자 영혼을 적시면서 술을 퍼붓는다. 격렬한 오바이트 도중 마르크스가 한마디 한다. 
“야야, 나 방금 좋은 생각이 났어. 지금까지의 철학은 세계를 모두 해석했을 뿐.. 
중요한건 세상을 변혁하는 거야.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 11번)
뭐 그렇게 의기투합하여, 공산당 선언을 집필하고,공산당을 만들고, 발표하기 까지의 이야기.

영화의 대부분은 의외로 so 스윗한 남편인 마르크스가 경제생활이 벅차서 괴로워하는 내용이고, 중간중간 당대의 철학적-실천적 논쟁이 펼쳐진다.(책을 미리 보지 않고 갔으면 조금 졸렸을 지도)

영화를 통해 새로 알 게된 이야기는 브루주아 엥겔스와 그의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였던 메리번스의 연애.(역시, 청년은 사랑이죱. -ㅅ- 재벌2세와 신데렐라 스토리가 아니다... 그걸 미러링같기도..!!)

여하튼 200년전의 사회주의자+페미니스트의 연애관계를 유추해볼 수 있었다.

마르크스의 결핍을 아주 잘 알고 
그 마저 인정해줄 것을 엥겔스에게 당부하는 ‘예니’의 사랑도 기억에 남는다.

영화의 끝무렵, (1848년 혁명이 목전이지만 아직은 모르는 상황) 조직건설과 혁명에 정력을 다 쏟았던 두 친구가 지친표정으로 주절주절 신세한탄을 늘어놓는다.

“너만 힘들어? 나도 힘들어!” 

그러니까 혁명가의 삶이란 무시무시한 공안탄압이 주가 될 것 같지만, 사실은 가족과의 관계문제(엥겔스)-경제생활문제(마르크스)가 대부분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영화였다. ㄷ ㄷ ..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 혁명, 동지, 술, 그리고 투쟁. 모처럼 두근두근 했음. 
또봐야지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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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_카를마르크스


영화를 보기전에 간단하게 읽으려고 (얇아서) 집어 들었는데 하루 내내 읽게됨.

마르크스와 그의 사상에 대한 무려 ‘레닌’의 논문이다. 마르크스의 생애와 사상 체계를 간단하게 정리하고 있다. 말그대로 ‘정리’만 한 것이라서, 주관적 문장은 거의 없다 시피 하지만, 이 부분이 재밌다.

"(p. 14-15)
망명자 생활의 사정은 마르크스와 엥겔스 사이에 오고간 왕복 서간에서 특히 자주 나타나고 있듯이 매우 곤란했다. 궁핍은 마르크스와 그 가족들을 실로 질식시킬 뿐이었다. 만일 엥겔스의 헌신적인 경제적 지원이 없었다면 마르크스는 <자본론>을 성취시킬 수 있다는 생각도 못했을 뿐만이 아니라, 의심할 것도 없이 물질적 궁핍에 억압되어 파멸했을 것이다.
그 뿐만이 아니고 마르크스는 소부르주아적인 사회주의의 유력한 제 학설 및 모든 조류에 의해서 끝없이 가차없는 투쟁을 계속했고, 그러는 가운데 매우 화가 나게 됐으며, 또 아주 바보스럽게도 대인적인 공격에 대한 방어를 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망명자들의 그룹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마르크스는 그 힘을 주로 경제학 연구에 계속적으로 쏟을 수가 있어서 일련의 역사적인 모든 역작을 쓸 수 있었고, 또한 그의 유물론적인 이론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마르크스가 일련의 (당시에는 지금까지의 모든) 사상과 역사에 관한 사상투쟁을 전개하느라 매우 화가 나게 되어, 사회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코멘트. 그리고 그 덕에 오히려 자본론을 비롯한 역작들이 만들어 졌다는 아이러니.

주변에 글은 참 잘쓰는 데, 분노 조절장애가 있어 힘들어 하는 친구가 있다면, 든든한 조력자가 되어주시길. 혹시 아나, 엥겔스적 역할을 하게 될지.

천재는 재능이나 영감 같은 것이 많이 주어진 사람일 것 같지만, 어쩌면 ‘결핍’이 그의 동기일지도 모르겠다. 그 결핍을 메꾸기 위한 인고의 노력이 더 위대한 무언가를 만들어 내기도 하는 듯.
그리하여 꼭 천재가 아니라 하더라도 ‘결핍’을 사랑하기로 하자. 멋진 변화의 에너지로 작용할지도 모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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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진처럼 읽기 - 내 몸이 한 권의 책을 통과할 때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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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5) 새삼스런 이야기지만 가장 강력한 지배는 사람들에게 여행과 독서를 금지하거나 접근하기 어렵게 하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독서 이전의 상태로는 돌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관계에서 ‘갑’은 원하는 것이 없는 사람, 잃을 것이 없는 사람, 덜 사랑하는 사람일지 모르지만 권력이 두려워하는 인간은 분명하다. 세상이 넓다는 것,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 이동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된 사람이다."


앞으로 생각하고 뒤로 생각해도 말이 되지않는 이야기이지만, 고집세고 궁금한 게 많은 나에게 어떤 종류의 생각과 독서를 말리는 나를 (자신의 방식으로)아끼는 지인이 있었다. 더 놀랍고 말도 안되는 이야기지만, 나는 그의 생각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처음에는 갸웃하고 난색을 표하기도 했지만. 어느 순간 그가 원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 더는 복잡해지지 않기로 했다.

나는 옮겨적고, 받아적었다. 토론 중에 생각이 달라지면 죄책감이 들었다. 생각이 달라지지 않고 싶어서_ 그가 추천하는 책 말고는 책을 읽지 않았다. 표면 그대로 생각하고, 판단도 그 기준으로 했다.


책을 읽지 않는 시간동안 나의 언어는 메말라갔다.
언어의 부족. 서사의 부족. 삶의 부족. 그리고 성찰의 부족.

어느 날 문득, 버석버석하게 말라가는 ‘나’ 라는 인간이 보였다.
생기없는 스스로의 못남이 견딜 수 없어졌을 때, 사람들에게 ‘나 자신’에 대해서 할 말이 거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몇 년치의 노트와 SNS를 뒤적이기 시작했고 - 지겹도록 똑같은 질문을 다양한 단어로 변주한 내 글들을 읽었다.

나는. 멈춰있었다.

_

멈춰있는 모든 것을 멈춰야 했다. 가장 먼저 하던 일을 멈추기로 했다. 쉬고 싶다고 이야기 했다. (어느 순간 간절했던 쉬고 싶음은 ㅡ 사실 계속 이렇게 살아서는 안된다는 마음의 브레이크였나보다.)

하던 일을 멈추니 모든 것이 움직이고 있더라.
그리고, 알았다.
더 이상 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겠구나.

꿈에서 깬 것처럼 관계가 재구성되었다.
나를 아낀다면서 하는 ‘충고’가 내게 얼마나 큰 ‘독’이었는 지. 멈추고 나니 알았다. 입맛이 썻다. 많이 울었다.

_

내게 조언을 아끼지 않았던 그 사람. 그는 왜 그랬을까를 오랫동안 더듬어 물었다.
"세상이 넓다는 것,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지 않았던 걸까. 그 세계를 만나면, 내가 달아날것 같았나? 아니면 그저 다른 시각으로 이야기하는 타인을 버텨낼 재간이 없는 사람이었던걸까.

막연한 생각 끝의 결론은 ˝그에게는 어떤 의도가 없었다˝는 것. 그냥 그는 자신의 삶의 방식 그대로 살았을 뿐이고, 많은 이들이 그렇 듯 ‘성장‘을 중요하 게 여기는 부류의 사람이었고, 자기 스타일의 조언을 아끼지 않은 거고.. 존경의 대상이 필요했던 취약한 내가 그의 말을 곧이 곧대로만 받아들이려 한 게 뒤틀린 관계의 시작이었겠거니.

나의 성장을 그가 제멋대로 재단했다는 것에 오랜시간 분노했었다.
‘성장’이라는 전제까지도 기꺼이 받아들인 ‘나 자신‘에 대한 화 였을 테지만.. 그땐, 화낼 대상이 필요했다.

나는, 나란 인간은. 아- 얼마나 의존하고 싶은 나약한 고집쟁이였던 것일까.

_


더 다양하고 풍부하게 사람들을 만났어야했다. 다른 시각의 말들을 듣고, 진한 이야기를 나누고, 미묘한 관계의 긴장감을 느끼고, 스스로를 고치고 변주하면서 살아야 했다. 판단은 내가 하는 것이었고, 삶도 스스로가 사는 것이었다.

개인의 평가나 충고에 그토록 깊게 침식당하면 안되었다. 다양한 사람들의 충고와 다가섬을 덕지덕지 온몸에 묻혀가면서, 그렇게 내 세계를 주조해 나갔어야 했다. 그런데, 난. 왜 그토록.

맹목적으로 누군가를 따르려 했던 걸까.
같아지려 애썼던 걸까.
다른 것을 견뎌내지 못했던 걸까.
그렇게 분리되고 싶지않아 발버둥 쳤던 걸까.
그러니까,
스스로를 믿지 못했던 걸까.

"(p.257) 한때 나를 구원했던 것(사람,생각,조직...)이 나를 억압하는 시기가 온다. 이것은 나의 성장 때문일 수도 있고 대상의 변질이나 상실 때문일 수도 있다. 어쨌든 나는 그것들과 헤어지거나 최소한의 거리를 두어야 생존할 수 있다. 내게 이 이야기는 분리의 어려움에 대한 비유였다. 20년된 관계, 30년된 생각, 사라진 이들과 헤어져야 한다."

<정희진처럼 읽기>의 마지막은 이별을 권했다. 꼭 그녀의 이별 권유가 계기는 아니지만.. 어쨌든 나는 사랑했던 많은 것들과 헤어지는 중이다. 언젠가 다시 돌아갈 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여전히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별로 없다. 일을 멈추고 나니까 더 없는 것 같기도 하다. 요즘은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겠을 지경이다. 지금 상황이 스스로에게 납득 되지 않을 때는 울컥울컥 속에서 무언가가 치민다. 무언가를 도모하지 않고 멈춰있는, 진공의 시간이 참기 힘들다. 그렇지만 노력한다. 언제까지나 불안을 질료로 삶을 유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혼자 있지 못해서, 너무 많은 마음을 허락하는 거.. 그렇게 계속 힘을 들여가며 내면을 응시하지 않기 위해 무언가를 하는 거.. 이제 그만 둬야지.
이 가만히 있는 시간이 주는 불안감은, 일중독으로 좇아 버려야 할 것이 아닌,
더 적극적으로 가만히 들여다 보아야 할 내 안의 _어떤_ 신호.

달라짐을 자책하지 말자. 분리가 두려워, 나를 해치지는 말자.
(인식조차 하지 못했던)나를 억압하는 것들로부터 -
이별하자.

다만, 살아있기 위해서.
스스로를 믿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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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7-09-25 15: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글이 너무 좋아서, 정희진처럼 읽기를 다시 읽고 싶어졌어요.

공쟝쟝 2017-09-25 16:27   좋아요 0 | URL
정희진 처럼 읽기 정말 좋죠..두고두고 읽어도 또 남을 책인 것 같아요.
 
나는 세상을 리셋하고 싶습니다
엄기호 지음 / 창비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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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사회과학 서적은 앙상하다. 나는 개념으로 짜여 진 그 앙상한 느낌을 좋아한다. 저자 엄기호씨의 책은 사회과학 서적인데도 앙상하지 않다. 그의 글에는 촉감이 느껴진다. 살아있는 것 같다. 등장하는 사람들의 사례가, 그의 시선이 얽혀들어 분석되는 세상이 그렇다. 그는 학문과 생활이 따로 떨어져있지 않은 학자일 것이라 추측해본다. 이런 ‘지식인’이 아직있다는 것은 ‘위로’되는 일이다.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았던 ‘위로’를 가까스로 ‘박민규의 소설’에서 받았다는 본문 속 어느 학생의 예시처럼. 나는 그의 글에서 요즘 좀처럼 만나기 힘든 위로를 받았고 가능성을 보았다.

이 책은 촛불이 일어나기 전­ - 그러니까 박근혜정권의 통치 하에서 기획되고 집필되었을 것이다. 아주 먼 옛날의 일 같지만, 일 년도 채 지나지 않은 이야기다. 그 때의 우리는 암담했고, 무력했다. ‘싸그리 망해버려라‘ 많은 사람들의 정념을 엄기호는 ‘리셋‘이라고 표현했다.

-


(p.20)
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을 망치는 것이건 창조하는 것이건, 그 힘으로부터 배제되어 자신은 그저 무기력하게 자기 자리에 앉아있기만 한다고 느끼는 세상이다. 이런 근원적인 무기력감은 세계를 다루고 싶은 방식을 바꾸어 놓았다. 그 방식은 가난과 전쟁의 폐허에서 나라를 다시 만드는 ‘재건‘이 아니다. 그렇게 재건한 국가가 부정의하고 불평등하기에 체제의 전환을 꿈꾸는 ‘변혁‘도 아니다.
세계 자체를 원점으로 날려버리려는 ‘리셋 reset‘인 것이다. … 그것이 현실적이어서가 아니라 유일하게 상상가능 한 것이기 때문이다. 현실을 바꿀 힘이 없는 사람들에게 아예 현실을 날려버리는 것만이 유일하고 ‘즐거운’ 상상이 된다. … 이렇듯 가장 허무주의적인 것만을 상상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이미 그 사회의 다른 모든 가능성이 봉쇄되었다는 뜻이다.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는 무기력이 아니라 세상의 변화 가능성에 대한 근본적인 불신에 기인한 ‘과격한 무기력‘이다.

-

*
책이 출간되지 마자 읽기 시작했고, 한번은 통독, 한번은 정리 분석하며 읽었고, 이 책만큼은 늦게라도 서평을 써야겠다 싶어 다시 읽었다. 처음에는 한국사회에 나타나고 있는 여러 인간의 유형 분석에 공감했고, 두 번째 읽을 때는 우리사회에 남은 가능성에 대해 곱씹었고(그 때는 촛불 직후였으므로)- 세 번째 읽고 난 지금은 리셋만큼이나 아득한 과제들이 겁이 난다.

불가능할 것 같은 정권교체를 이뤄낸 이 후에도, 나를 둘러싼 존재들의 배열방식은 변하지 않았다. 저건 아니지 싶은 것이 박근혜에서 김기춘에 대한 판결로, 여혐살인으로, 장군 부인의 갑질로 바뀐것 외에는. 여전히 나의 하루는 기운이 없고, 생계는 언제나 위태로우며, 일상은 벌여놓은 일로 가득차 있다.

나를 포함한 많은 이들이 ‘리셋‘만큼이나 과격한 변화를 원했던 것은 - 거대한 세상을 포함한 나 자신의 일상이 변화하길 바랬기 때문이리라. 아직 변화가 부족했다면, 남은 에너지를 그러모아 ‘다음 싸움‘을 준비해야 하는 것일 게다. 다음의 싸움은 ‘멈춘 곳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 저자의 말대로 다시 ‘존엄‘과 ‘안전‘을 위한 투쟁, 그리고 투표소만을 넘어 모든 곳에서의 민주주의, 일상에서의 ‘존중‘과 ‘협력‘을 위한 각자의 결단과 노력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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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66)
인간의 존엄이란 생물학적 생명을 가진 존재로서의 존엄을 넘어 사회적 생명을 가진 존재로서의 존엄을 의미한다. 사회적 생명을 가진 존재로서의 존엄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다른 이의 삶을 내 삶의 동반자로 여긴다는 말이다. 그의 존엄을 존중한다는 것은 그를 삶의 동반자로서, 공동세계의 일원으로서 존중한다는 의미다. 그렇기에 그의 존엄성을 존중한다는 것은 나와 함께 공동세계를 짓고 있는 그의 활동, 그의 의견을 존중한다는 말이 된다. 그의 말을 묵살하고, 그의 활동을 파괴하는 것이야말로 ‘사이로서 살아가는 존재’라는 의미에서의 인간의 존엄성을 짓밟는 파괴행위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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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은 중학교 윤리 교과서 이후로는 들춰보지 않았을 - 평등, 존엄, 협력 과 같은- 우리가 다시 되짚어 생각해 보아야 하는 ‘개념‘들을 꺼내어 현실과 대입하며 친절하게 서술하고 있다. ‘방귀보다 못한 말‘만 듣고 보다 ‘개념의 핵‘이 명징한 말들을 읽다보니 고개가 끄덕여지고 생각할 것이 많아졌다. 막연히 걱정이 되었던 촛불 이후의 투쟁- 불투명했던 다음 싸움의 과제들도, 책이 명확하게 밝혀주고 있어서 덮고 나니 무언가를 마음먹게 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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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211-214)
1987년의 민주주의는 군사독재를 끝내고 정치적 민주주의를 도입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삶의 민주화에는 실패했다. 학교에서 학생들은 ‘교복 입은 동료시민’이기보다는 여전히 ‘잡아야 하는’ 학생이었다. 여성들은 사회 진출을 보장받은 것처럼 보였지만 경제 위기 국면에서는 여전히 가장 먼저 해고를 당했다. 학교와 가정, 공장과 사무실, 우리의 일상 공간 앞에서 1987년의 민주주의는 멈췄다.

민주주의가 멈춘 곳에서 혐오와 폭력, 차별이 독버섯처럼 자랐다. 투표소에서만 평등한 사회에서 사람들의 존엄은 여지없이 무너졌다. 곳곳에서 터져나오는 성폭력, 비정규직 노동자를 노예처럼 부려먹고 한계 너머로 밀어붙이는 노동 착취, 끊임없이 모욕을 강요당하는 소위 갑질과 감정노동 등. 이 모든 것은 다른 사람을 평등한 동료 시민으로 대하지 않는 민주화의 실패를 뼈저리게 증언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시 시작해야하는 지점이 여기다. 우리가 멈춘 곳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투표소에 표를 찍으러 갈 때만 ‘동료 시민’인 것이 아니다. 대의제 앞에서 멈춰버린 민주주의를 그 너머로 밀어붙여야 한다. 왕을 뽑고 그 왕에게 우리의 권리를 위임한 뒤 다시 삶의 자리에서는 노예로 내려오는 것이 민주주의가 아니다. 차라리 왕의 머리를 잘라버림으로써 왕의 부재 이후 발생하는 모든 정치적 책임을 지는 것이 민주주의다.

... 그러므로 박수는 일종의 서약이다. 내가 앞으로도 당신들의 말을 말로 인정하고 경청하겠다는 서약이 바로 박수다. 그 자리에서 청소년의 말이 들을 만하다고 박수를 친 사람이라면 학교에서도 가정에서도, 길거리에서도 그들의 말을 역시 들을 만한 말로 대해야 한다. 그들을 ‘그날만’ 단지 동원의 대상으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그러므로 박수를 친 자는 결단을 내려야 한다. 앞으로도 내가 그들을 동료 시민으로 대할 것인지 아닌지 말이다.

만일 아니라면 그들을 동원의 대상, 즉 ‘쪽수’로만 여겼다는 것을 고백해야만 한다. 100만이라는 숫자를 채우는 하나의 ‘점’으로만 여겼다고 말이다. 내가 ‘점’으로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은 민주주의지만 상대가 나를 ‘점’으로 여기는 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파괴다. 민주주의는 동료 시민을 동원의 대상으로 여기는 순간부터 파괴되고 부패된다. 그것이 1987년 이후의 민주화가 우리에게 남긴 뼈아픈 교훈이다.

... 나는 우리 사회의 미래가 여기에 달려있다고 믿는다. 협력과 존엄. 광장에서 점이 되기를 두려워하지 말자. 기꺼이 점으로 협력하자. 그러나 광장에서 나란히 점으로 있던 다른 이의 얼굴을 기억하자. 그 얼굴이 가진 나와 평등한 존엄, 나와 평등한 목소리의 힘을 기억하자. 삶의 전 영역에 드리워진 히드라처럼 증식하는 왕의 목을 치자. 만약 내가 왕이라면 기꺼이 내 목을 치자. 그래서 삶의 전 영역에서 ‘동료 시민’으로 서로 만나자. 민주주의가 실패한 곳에서 우리 다시 만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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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부분을 읽으면서는 세번 다 울컥했다.
실패한 곳에서 우리 다시 만나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를 믿어야 한다‘는 저자의 목소리가 구원 같았고, 힘을 주었다. 사실, 변화의 시간을 감각하는 속도가 너무 짧아서 도저히 ‘역사’가 가능한 것 같지 않은 우리 세대에게, “멈춘 곳에서 다시 시작하자”는 그의 요청이 과연 가능할까 하는 질문은 여전히 남아있다.

저자는 ‘시간을 이기고 변화를 보라’지만, 좀 더 긴- 시간 감각을 갖는 다는 것이 어떤 말인지 현실에 적용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철저히 파편화된 세계, 감정을 느낄 새도 없이 휘발되어버리는 SNS속 숱한 정보의 폭격 속에서 일상이 너무 피로하기도 하고. 사실 무엇보다 ‘평등과 존엄-존중‘이라는 관계에 대해 ‘원‘체험이 애초에 없기 때문에. 살아보지 않아봐서 살 수가 없는.

하지만 알고 있다. - 이 책이 주문하는 것은, 비록 어려운 일이지만, 어떤 결단을 해야한다는 것.
내가 왕이라면 기꺼이 내 목을 치자. 엄기호씨가 요청하는 것은 그러한 결단이고, 나는 오랫동안 그 결단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기다려왔는 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제서야 들리는 것일지도) 과연 나는 응답할 용기가 있는가? 꾸물꾸물 8개월이~~ 지나서야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은 잊어버리지나 말자 싶어서.

서평을 쓰면서 저자의 다음 책인 <공부공부>를 주문했다. 이 책에서 던진 과제들을 이행하는 데 개인이 어떤 노력을 기울 일 수 있는 가에 대한 대답을 주는 책이면 좋겠다.



나를 포함해 역사를 믿는다고 말하는 내 주변사람들을 보면 이들의 감정상태는 ‘조울증‘에 가깝다. 역사가 앞으로 나아가는 것 같이 보이면 몹시 환호하고 열광한다. 그러다 다시 그 역사가 뒤로가는 것 같은 모습을 보면 끝없이 절망한다. 자기가 역사의 주인 이라고 말하면서도 사실은 역사의 변덕에 따라 자기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채 끌려다닌다... 우리는 광장의 조증과 삶의 울증을 반복하고 있다. 삶의 울증이 심각할수록 현장을 바꾸려고 하기보다는 광장의 조증을 갈망한다.... 역사를 믿는다는 것은 이 조울증에서 벗어나 평상심을 회복하는 일이다. 절망보다 좀 더 긴 시간 감각을 가지고 삶의 현장을 보는 것, 광장의 찰나에 흥분하기 보다 좀 더 긴 시간감각을 가지고 광장을 보는 것, 이것이 역사를 믿는 사람의 태도가 되어야 한다. - P5

만능감에 젖은 존재가 모든 것을 자기가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자책하는 주체는 반대로 모든 것을 자기의 책임으로 돌린다. 유능한 신은 벌하고 무능한 신은 후회한다. 이 두주체에게는 도무지 ‘바깥‘이라는 것이 없다. 결국 모든 것을 자기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만큼이나 그때 내가 왜 그랬을까를 자책하는 주체는 모든 것을 자기의 탓으로 돌린다. - P49

첫 번째로 냉소다. ... 실패가 당연하다고 생각할 때 상처를 덜 받는다. 냉소는 더 이상 상처받지 않겠다는 단단한 결심이다. 중요한 것은 자기가 상처받지 않기 위해 냉소하는 사람들일수록 다른 사람들에게는 냉소를 통해 큰 상처를 준다는 점이다... 이들의 냉소는 협력에 대한 거부다.. 냉소적 주체는 그저 ‘잉여’가 아니라 공동세계를 파괴하는 괴물이기도 한 셈이다. - P27

신자유주의의 시대에 우리가 터득해야 했던 것이 내가 살아남기 위해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는 기술‘이었다면, 지금 현재 우리가 터득하고 있는 것은 외면을 넘어 ‘타자-세계를 파괴하는 기술‘이다. ... 자기만 사랑하라는 명령에 따라 살지만 자기가 될 수 없는 시대다. 자기(가 되고자 하는 것)에 대한 꿈이 무너지며 나타나는 이 무기력이 증오가 되어 타자와 세계를 파괴한다. 이 시대에 즐길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바로 이 타자와 세계를 파괴하는 것이다. - P32

모욕과 무시가 만연하다보니 우리는 서로를 존중하는 법을 잊어버렸다. ... 존중의 경험이 없는 사회에서 아무것도 안 하는 ‘무관심‘과 ‘무기력‘은 생존 전략이자 윤리적 선택이다. ... 왜이렇게 되었을까? 돌이켜보면 우리는 살아오면서 끔찍할 정도로 존중받아본 적이 없다. ... 존중에 대한 ‘원체험‘이 없다보니 무시를 당했을 때 자신의 존엄을 지키는 방식도 잘 모른다. 재수 없다고 생각하고 세상이 원래 그렇다고 체념하면서 분노할 뿐이다. 대신 그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유일한 출구가 앞서말한 ‘소비자‘ 혹은 자신이 가진 조그마한 권력으로 온갖 방식을 동원해서 위세를 부리는 ‘갑질‘이다. ... 당연히 그것은 자신이 만나는 노동자의 존엄을 짓밟는 방식으로만 가능하다. - P115

돈을 주고 그 내용과 흐름을 소비하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어떤 기술도 발생하지 않는다. 다만 이 놀이가 재밌었는지 아닌지에 대한 소비라로서의 평가만 가능하다. 어렸을 때부터 새로운 제안을 하는 협력의 기술이 아닌 평가, 즉 품형하는 기술만 늘어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소비자는 제안하는 존재가 아니라 상대의 제안에 품평하는 존재다. 제안과 관련해서 그는 완전히 무능하다.
그러므로 폐허가 되다시피한 이 사회를 다시 세우기 위해 필요한 것은 ‘똑똑한 소비자‘가 아니라 끊임없이 상대의 말을 새로운 제안으로 돌려줄줄 아는 ‘협력의 기술자‘다. - P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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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년생 김지영 오늘의 젊은 작가 13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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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이 많이 읽었으면 좋겠다. 너무 일상적이라서 말로 꺼내는 것 조차 쑥스러웠던 가랑비 젖듯 젖어든 상처들. 소리내어 더듬더듬 말하는 것이 변화의 시작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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